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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사상과 철학 108 (교재 공개)
    패러다임/철학 2023. 1. 29.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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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생각하기 이해하기 실천하기-

    사상과 철학 108

    영상 강의 링크 : https://youtu.be/K1Nb0SdJZ0A

     

    512.

    티벳 탄트라;아누타라(Annutara-無上) 탄트라(에너지와 의식의 동일성)

    1.타르 람 Tar Lam(無形의 길, 해방의 길-마하무드라 요가의 열반의 길)

    2.신 람 Hdsin Lam(有形의 길-육법의 요가)

    탄트라에서는 세계를 서로 반대되는 것들 사이의 관계로서 이해한다. 즉 윤회와 열반, 현상과 본체, 형태화와 잠재력, 무분별과 조명, 활력과 공성, 프라나(prana-, 공기, 숨결, 에너지, 바람, 활력, 성향 등 호흡법에 의해 흡입되는 대기 중의 활력소이며, 인체를 에너지로 충전하여 원기를 회복시키고 수명을 연장한다.)와 의식 등이다. 탄트라는 이들 二元性이 궁극적 실재의 관점에서는 서로 분리될 수 없는 하나임을 주장한다. 따라서 수행자는 이원성의 한쪽을 완전히 이해하고 터득할 때 자동적으로 다른 한쪽도 이해 터득할 수 있다. 그리하여 수행자는 의식의 본성이 반야 그 자체임을 깨달음과 동시에 프라나의 본성이 붓다의 초세속적 활력(생명소)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원리 기반 아래 티벳 탄트라는 요가 수행의 두 가지 방법론을 제시한다. 행자가 만일 마음의 요가를 실천한다면 그는 자동적으로 에너지의 요가도 실천하는 셈이다. 마음이 훈련, 변형, 확대되고 예리해져서 조명을 받으면 생명 에너지도 그를 따른다.

    불교의 목적은 인격의 완성과 개화이고, 이것은 완전히 깨어나 에너지로 넘치는 인간(즉 붓다)이 되는 일이며, 그리하여 三身(신성한 초월적인 몸으로 법신, 보신, 응신 또는 자성신, 수용신, 변화신 또는 법신, 응신, 화신 또는 법신, 보신, 화신)을 철저히 깨닫는 일이다. 그 최후의 단계에 이를때까지 평범한 인간의 의식과 에너지를 초월적 지혜와 위대한 활력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수행의 목표이다. 티벳불교는 인간적 본성을 초월적 본성으로 변환시키는 두 가지 방법을 제시하는데 그 중 하나는 마음의 훈련(마하무드라의 무형의 길)을 강조하고 다른 하나는 에너지의 훈련(육법의 요가의 유형의 길)을 강조한다. 이 두 방법은 서로 다르지만 똑같은 초월적 목표를 지향한다.

    마음과 프라나의 동일성에 관한 탄트라의 가르침은 어떤 종류의 마음이나 정신활동은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초월적이거나 세속적인 성질의 프라나를 동반한다는 것이다. 즉 모든 기분과 사념은 그것이 단순하건 미묘하건 복잡하건 그에 상응하는 프라나를 동반한다.

    하늘에 밝은 별이 많으나 해가 떠올랐을 때 그들은 보이지 않는다.

    지푸라기는 물 위를 떠가지만 보석은 물 속으로 가라앉는다.

    말 많은 앵무새는 새장에 갇히고 말할 수 없는 다른 새들은 자유로이 난다.

    적에게라도 유해한 말을 하면 안된다. 바위산에 부딪친 메아리 처럼 그것은 되돌아 오기 때문이다.

    사물의 본성을 아는 사람에게 스승이 무슨 필요가 있을 까? 병에서 회복한 사람에게 의사가 무슨 필요가 있을까? 강을 건넌 사람에게 배가 무슨 필요가 있을까? 옷을 백번 빨아도 더러운 물로 빤다면 어떻게 깨끗해질 수 있을까? 중생이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행복이 있을 수 있는가? 그대는 구원받고 온 세상이 울부짖는 소리를 들을 것인가?

    세속적으로 구하는 모든 것은 피할 수 없는 오직 한 가지, 즉 슬픔만을 가져온다. 얻는 것은 결국 흩어지고 지어진 것은 무너지며, 만남은 헤어짐으로, 탄생은 죽음으로 끝난다.

    칼리유가 kali-Yuga(암흑시대)

    욕망을 신념으로 착각하지 마라.

    절도, 강탈, 사기에 의해 얻은 것들을 보시하거나 구호품으로 주는 것은 큰 실수이다.

    산 존재를 죽여 얻은 고기를 신들에게 바치는 것은 어미에게 그 자식의 살을 제공함과 같다.

    아는 자(명상자)와 앎의 대상(명상 대상)과 아는 일(명상)이 서로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이다.

    실재를 이해하지 못하고 세속적 희망과 염려 속에서 살지 마라.

    세상에는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

    침묵하라. 그리고 네가 그것 임을 알라. 수행자의 목표는 몸과 입과 마음의 완전한 휴식이다.

    의식이나 마음은 원래 태어나지 않고 창조되지 않으므로 사실은 전이되지 않는다. 轉移라고 하는 말은 환영의 영역인 윤회계에 표현된 유한하거나 소우주적인 관점의 의식에 대해서만 사용될 뿐이다. 윤회계를 초월한 참 상태에서는 시공이 존재하지 않는다. 온 곳도 갈 곳도 관계할 일도 없는 태어나지 않은 것이 어떻게 전이될 수 있겠는가?

    실재를 깨달은 사람은 세속적 행위를 포기하든 안 하든, 고행을 실천하든 안 하든, 산꼭대기에서 혼자 살든 이곳저곳을 방랑하든, 세속적 기쁨을 가까이 하든 멀리 하든, 명상을 하든 안 하든, 행복을 만나든 불행을 만나든, 인습적 행동 규범을 준수하든 안 하든, 기적을 행할 수 있든 없든 마찬가지다.

    열반에 이르는 6가지 방편;(육바라밀)-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10바라밀-보시, 지계, 출가, 지혜, 정진, 관용, 정직, 선의, 자비, 평정)

    마하무드라;Great Symbol 中道-존재의 본성에 대한 정신집중(一點) 상태에 도달하는 요가 행법을 기록한 안내서(열반의 길, 무형의 길) 마음을 훈련하는 3가지 주요 방법을 가르친다.(시각화, 호흡 통어를 위한 금강 염송법, 육체를 항아리화하는 과정을 통해 마음을 호흡의 사슬로부터 분리시키는 법)

    명상을 통해 인간의 마음과 신성한 마음 사이에(인간의식과 초월적 우주의식 사이에) 교감이 생길 때, 인간은 자신의 참 모습을 알게 된다. 그는 아는 자와 앎의 모든 대상(모든 앎)이 분리될 수 없는 하나임을 직관적으로 깨닫는다. 그리고 이런 깨달음과 동시에 정신적 조명 照明을 의미하는 신비한 마하무드라가 생겨난다. ‘현자의 돌과 마찬가지로 마하무드라는 마음 속에서 無明을 몰아낸다. 그리고 요가의 연금술에 의해 인간은 신으로 변한다.

    (void) 가 아니라, 진여(眞如, thatness)이며 존재의 표준이며 유한성을 구성하는 모든 것의 원인이자 근원을 나타낸다.

    오감으로 느껴지는 어떤 인상을 분석하려 들지마라. 상상하지 말고 생각하지 말고, 명상하지 말고, 숙고하지 말고 마음을 자연스런 상태에 두어라. 산만하지 않음이 모든 붓다들의 길이다.

    날숨(흰색의 옴), 머무는 숨(붉은 색의 아), 들숨(푸른 색의 훔)

    아주 짧은 순간;흰두 요기들은 이것(상상할 수 있는 가장 짧은 시간 단위) 300장의 바나나 잎을 겹쳐놓고 단 칼로 벨 때 첫 번째 잎과 두 번째 잎을 베는 시간의 간격

    사념에 반응하지 말아라(사념을 막지 말고 그저 그들이 좋을대로 내버려 두고 거기에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이다.)

    마음은 느긋이 머물면 평온해지고, 물은 잔잔히 머물면 맑아진다.

    황홀상태;照明 illumination

    가시에 찔린 코끼리의 마음과 같은 상태로 마음을 유지하라. 윤회와 열반, 사념과 무사념은 하나다.

    개인의 마음은 전체의 마음과 하나다. 요가의 목적은 마음의 인간적인 면과 신성한 면이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이다.

    물질과 마음이 단일성의 양 측면일 뿐이다. 정신적 육체적 탐구를 통하여 수행자는 마음의 본성이 이것도 저것도 아니고, 현상도 본체도 아니며, 그들 둘 다임을 알게된다. 등잔의 불빛은 빛과 열을 발산하면서 기름을 소비한다. 불꽃과 빛, , 기름의 소비가 네 가지로 분리된 것이거나 또는 분리될 수 있는 것인가? 막대기 하나를 다른 막대기에 문지름으로써 불이 생겨나고, 그 불을 이용함으로써 두 막대기가 불 탄다. 마찬가지로 이동 부동의 결합에 의해 초지성이 생겨나고 그들이 탄생시킨 초지성에 의해 그 둘은 사라진다. 이슬방울이 빛나는 대양에 합류하여 초세속적 의식의 상태에 이른다.

    양들이 풀을 뜯는 동안 그들이(사념) 마음대로 움직이도록 허용하지만 그들을 피하거나 시야 밖으로 놓치는 일은 없다. 실제로는 무해하고 유용한 것이 無明(올바른 지식-이해-결여)의 어둠 속에서 보면 전혀 그 반대로 보인다. 윤회적인 사념과 이들 사념에서 생겨나는 감정이 무하마드라의 연금술에 의해 변형되면 그들은 법신의 마음과 하나가 된다. 깨달음이 찾아올 때 수행자는 애당초 적대시했던 사념들이 현상계의 차원에서 우주적인 마음의 사념들과 분리 불가능하게 연결되어 존재하는 것들임을 안다. 그러면 사념들은 현상계를 창조한 무한한 마음의 사념들과 자동적으로 조화를 이루어 율동하게 된다. 이와같이 수행자는 장애로 보이는 사념들을 진리의 길을 나아가기 위한 도구로 이용할 수 있다. 다른 모든 장애도 마찬가지이다. 불가시의 사념이든 그것이 구체화된 객관적 물체이든 상상 가능한 자연계(현상계)의 모든 것이 한마음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풍경 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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