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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사상과 철학 99 (교재 공개)
    패러다임/철학 2022. 11. 17. 2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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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생각하기 이해하기 실천하기-

     

    사상과 철학 99

     

    영상 강의 링크 : https://youtu.be/hpzviWULW0E

     

    503.

    미래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과거는 이미 없어서 일어난다는 뜻이 없다. 이 법은 이 때(현재)에 있으나 이 때에 일어나지 않는다. 현재의 때는 영구히 잠시도 머무름이 없고 과거와 미래를 세밀히 제거하면 곧 중간이 없으니 마치 빛과 빛을 제거하면 중간의 처소가 없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이 때에 일어남이 없게 된다.

    이 멀리 있는가 체득하면 이 된다.

    本願;本弘誓願, 本誓, 弘誓, 1.총원, 본원, 四弘서원 2.별원

    버리지않기 때문에 번뇌에 머문다.

    攝大乘經, 金剛三昧, 無量義宗

    대중의 장단점 보지 마라

    항상 상을 떠난 행위를 닥아라

    고요한 마음을 즐겨라

    산란함에 들어가도 항상 선정에 있으라

    三有에 집착하지 마라

    모든 죄의 장애가 망상으로부터 생겨났으나, 이제 모든 상을 깨뜨려서 진실한 관에 들어가서 일체의 망상의 경계를 단번에 깨뜨리니, 그러므로 모든 죄가 일시에 다 없어지는 것이다.

    維摩經-維摩詰

    번뇌가 곧 보리. 즉 무자성

    번뇌가 곧 보리. 즉 무자성(). 세간과 출세간의 대립과 구별이 없게 되며, 번뇌의 큰 바다에 들어가지 않으면 일체지라는 보배 얻을 수 없다.

    생사가 곧 열반

    人寶, 能仁=부처님

    중생들의 국토가 바로 보살의 청정한 불국토이다.

    마음의 지향이 순수해지면(스스로 청정) 그에 따라 선행을 더욱더 실천한다.

    한량없는 중생이 동일한 불국토에 태어나지만, 그들 자신의 마음 상태에 따라 불국토를 보는 데도 차이가 있다.

    건립되어 있는 일체 만물은 무상하다.

    無生法忍;不生不滅을 깨닫는 것

    無所畏;어떤 두려움도 없는 경지

    三昧;等持

    等至;몸과 마음이 평화롭고 안온해지는 상태

    아뇩다라삼먁삼보리;無上正等正覺, 더 이상의 경지가 없는 최고의 깨달음

    三界;1.欲界(탐욕-, , 수면-육도, 육욕천) 2.色界(욕망 벗어난 청정한 세계) 3.無色界(물질과 형상을 초월한 정신만이 존재하는 세계로 가장 높은 천계가 非想非非想天)

    중생들이 본래 가지고 있는 자성이 청정한 마음이다.;淨名, 無垢稱

    앉는 것만이 꼭 좌선은 아니다. 성자의 깨달은 경지를 버리지 않으면서도 범부의 온갖 성품을 나타낼 수 있는 것. 열반을 증득했더라도 그 열반에 머물지 않는 것이 참다운 좌선이다.

    일체 유정의 성품 과 모습 은 다 허깨비 같은 것. 그것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일체 유정과 모든 언설의 성품과 모습도 마찬가지이다. 지혜 있는 사람은 문자에 집착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일체의 언어가 그 자체 고유한 성품도 없고, 그 자체 고유한 모습도 없다.

    己生-今生-當生

    모든 법의 성품은 생멸하면서 머무르지 않는 것이 허깨비 같고 幻化같고 번개와 같고 구름과 같다. 일체 만법은 덧없는 것이니 단 한순간이라도 머물지 않는다. 모든 법의 성품은 허망하고 다 분별심이니, 분별심이 일으킨 영상은 마치 물 속에 달이 비친 것 같고 거울 속의 영상과 같다. 이처럼 일체 만법은 마음이 건립한 것이다.

    등불 하나로 수많은 등불 밝힐 수 있다.

    일체 중생이 다 진여다. 왜냐하면 보리는 일체 모든 중생들이 갖고 있는 깨달음이기 때문이다. 즉 일체 중생은 그 본성이 적정한 것이 그대로 열반의 상태(涅槃相)이다.

    中道;모든 이원론적 대립을 지양하고 초월하는 것으로, 실상으로 나가는 길임

    阿蘭若;수행하기에 적합한 한적한 장소

    대승보살의 자심은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들의 교화하기 위하여 일으키는 자심이다.

    능히 분별하는 것도 비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비어 있는 성품은 분별할 수 없음을 비어 있음으로 삼기 때문이다.

    몸의 덧없음은 보여주어도 몸을 싫어하라고 권하지는 말라

    병든 보살은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지금 나의 이 병은 모두 전생의 허망한 顚倒와 분별하는 번뇌가 일으킨 業報이다. 몸 속에는 이 병을 받을 수 있는 어떠한 법도 존재하지 않으니 도대체 누가 이 병을 받는다 하겠는가? 사대가 합쳐져서 임시로 몸이라고 부르는데, 사대 속에는 주재자 가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나가 없는 몸에 병이 생긴다면 그것은 다 나 를 집착하는데서 나오는 것이다. 따라서 사대 속에서 함부로 나에 대한 집착을 일으키지 말아야 하며 이 집착이 병의 근본임을 분명히 파악해야 한다. 그리하여 중생이나 나라는 생각 我想을 모두 없애고 법이라는 생각 法想에 안주해서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온갖 법이 화합하여 이 몸을 이루고서는 생겼다 사라졌다 하면서 流轉한다. 생겨도 오직 법이 생기는 것이요. 사라져도 오직 법이 사라질 뿐이니, 이렇게 모든 법이 굴러가면서 서로 이어지면서도 서로 알지도 못하고 궁극적으로 사념의 활동도 없다. 법은 생겨날 때에도 내가 생겨난다. 말하지 않고, 사라질 때에도 내가 사라진다 말하지 않는다.

    평등과 동요하지 않음과 관찰대상이 없음을 관찰하는 것이다. 즉 나와 열반이 둘 아닌 평등한 것이다. 왜냐하면 나의 본성이나 열반의 본성이나 모두 비어있기 때문이다. 단지 임시로 이름 名字을 빌래서 비어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처럼 나와 열반을 평등한 것으로 보면 이미 다른 병은 없고 오직 비어있는 병 空病 만이 있을 뿐이다.

    내적 주체라는 견해와 외적대상이라는 견해가 없다면, 지각도 없다. 더 이상 지각이 없으니 반연된 사념도 모두 끊어지고 반연된 사념이 끊어지니 병도 없어진다. 만약 스스로 병이 없다면 중생의 병도 끊어 없앨 수 있다. 또 이 병은 참된 것도 아니요. 존재하는 것도 아니라고 스스로 관찰해야 한다.

    만약 법을 구하고 싶다면 어떤 법도 구하지 말아야 한다.

    ;큰 특징, ;작은 특징

    꽃 자체는 분별이나 관념적인 생각이 없는데 존자들만이 스스로 분별을 하고 관념적인 생각을 한다.

    일체의 법은 만들어 진 것도 아니며 변화하는 것도 아니다. 모든 법은 본질적으로 비어 있는 것 이며 진실로 나 라는 것도 없으며, 중생도 없다. 중생도 미혹한 분별에 의해서 보이는 것이며 본래 그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항상 유만을 주장하면 집착하게 되고 항상 공만 내세우면 곧 선의 근본을 버리게 된다. 따라서 공과 유를 교체하여 잘 써야 한다.

    생사와 번뇌의 큰 바다로 들어가야만 일체지심을 일으킬 수 있다.

    옳고 그름을 따져서 말하는 사람은 그러한 옳고 그름에 얽매어 바른 길을 알지 못한다. 선과 악을 평등하게 보고 옳고 그름의 분별을 초월하라.

    색수상행식은 본래 텅 비어 있는 것이지 색을 없애서 빈 것이 아니다.

    , 無相, 無願;삼해탈문, 깨달음에 이르는 세 가지 길 1.공해탈문-일체 만법이 비어 있음을 하는 것 2.무상해탈문-일체 만법이 비어있기 때문에 어떤 차별성도 없음을 관하는 것 3.무원해탈문-어떤 차별성도 없는 무상이기 때문에 염원해서 구할 것이 없음을 관하는 것 즉 무원 속에는 마음도 없고 뜻도 없고 작용할 의식도 없다는 것을 철저히 안다면 바로 불이의 법문에 깨달아 들어가는 것이다.

    둘이 다른 듯하지만 다른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하여 하나로써 같은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이되 하나가 아니며, 둘이면서도 둘이 아니다. 일만 법이 서로 합하여 하나로 되지만 둘을 떠나서 별개의 하나가 되는 것도 아니다.

    안으로 나 가 없다는 사실을 관찰하면서도 끝내 자신을 저버리지 않는다. 밖으로 중생이 없다는 사실을 관찰하면서도 늘 교화로 인도하기를 게을리하지 않는다.

     

    풍경 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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