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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사상과 철학 98 (교재 공개)
    패러다임/철학 2022. 11. 11. 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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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생각하기 이해하기 실천하기-

     

    사상과 철학 98

     

    영상 강의 링크 : https://youtu.be/cWYHpNhj4Gg

     

    影像;법상종의 교의로서, 본질과 대칭이 된다. 본질은 영상이 의지하는 것이다. 심과 심소가 대상을 인식할 때 내심 중에 나타난 인식대상의 모습을 직접 인식대상으로 여기는 것을 영상이라고 한다. 반대로 영상의 실질 근거 및 영상이 의지하는 물 자체가 본질이니, 곧 간접의 인식대상이다. 그러므로 相分을 두 가지로 나누니, 본질상분과 영상상분이 그것이다. 예컨대 인식이 반연하는 색경은 안식에 나타난 영상 외에 따로 제8아라야식 종자에서 나온 실질의 색법인 것이니, 이것은 본질이며 영상이 의탁하는 것이다. 이것을 대질경 帶質境이라고 한다. 6의식에 나타나는 허공의 꽃이나 토끼 뿔의 모습 같은 것은 오직 영상만 있지 의탁할 바의 본질이 없으니, 이것을 獨影境이라고 한다.

    二身;두 가지 佛身 1.法性身 2.應化法身-인격식

    상을 떠나고 움직임을 떠나야 선 즉 靜慮이다.

    ;빠르고 날카롭다는 뜻

    ;根機, 根性, 根器

    이근;가르침을 받고 도를 닦는 소질이 빨라서 妙解를 내는 것

    이근인 중생(사람)은 민첩하고 예리하게 불법을 이해하고 나아가 해탈에 도달할 수 있다.鈍根

    개별적인 것은 곧 二門의 뜻을 밝혔고, 전체적인 것은 일심의 법을 나타내었다. 이와같은 일심과 이문 안에 일체의 불법이 포함되지 않은 것이 없다. 전체적으로는 진제와 속제가 둘이 아니지만 하나를 고집하지도 않으니, 둘이 아니기 때문에 곧 일심이고, 하나를 고집하지 않기 때문에 전체가 둘이 된다. 이와같은 것을 일심의 문이라고 한다.

    생이 적멸이지만 적멸을 고집하지 않고, 멸이 곧 생이지만 생에 머물지 않으니, 생과 멸이 둘이 아니고 움직임과 적멸함이 다를 것이 없다. 이와같은 것을 일심의 법이라고 한다. 비록 실제로 둘이 아니지만 하나를 고집하지 아니하여 전체가 연에 따라서 생동하고 전체가 연에 따라서 적멸하니, 이와같은 도리로 말미암아 생이 적멸이고 적멸이 생이어서, 막힘도 없고 걸림도 없으며,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다.

    二門;1.법화경의 내용을-本文 迹門 2.정혜를-  3.소승과 대승을-小門 衍門으로 4.有敎 空敎-유문과 공문으로 나눈다. 5.一心-진여문과 생멸문으로 6.일체법을-진제와 속제로

    일미의 여실한 뜻은 그 맛이 하나의 큰 바다와 같아서 일체의 여러 물줄기가 들어오지 않는 것이 없다. 일미에 머물면 곧 모든 맛을 포섭하게 된다.

    하나의 불도에 머무르면 곧 세 가지(-[소승의 문, 연각승, 성문승, 차별문], -[대승의문, 보살승, 차별문], 여여함-[평등문]에 따라 취하는 행위) 행위를 깨닫게 된다.

    들어가는 마음은 들어가는 상을 두지 않기 때문에 그 들어가는 마음을 들어감이 없는 곳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我執;人執, 生執, 實我에 집착한다는 뜻. 중생의 몸은 원래 오온의 임시 화합인 것인데, 주재하는 작용을 하는 실체로서의 개인의 존재가 있다고 헛되이 집착하여 아와 아소 등의 망상 분별을 내는 것

    我所執;我所란 내가 가지고 있는 것. 나에게 소속된 것이라는 뜻. 오온의 법이 나의 것이라고 헛되이 집착하는 것을 아소견, 아소집이라고 한다.

    1.相應我所;나는 물질의 형체를 가지고 있다는 것. 오온이 나의 몸과 상응한다고 집착

    2.隨轉我所;물질의 형체가 나에게 소속되어 있다는 것. 오온의 법이 나에게 종속되어 있으며, 나의 자재력에 의하여 움직인다고 집착

    3.不離我所;내가 물질의 형체 가운데 있다는 것. 실로 나는 색 등과 떨어지지 않고, 오온 중에 처하여 온 몸에 두루하여 따라 작용한다고 집착

    오온x3=15 아소견+5 아견=20 살가야견 薩迦耶見

    단변 斷邊;단견, 단멸론, 세간과 가 끝내 단멸하는 것이라고 치우치게 집착하는 그릇된 견해. 모든 법의 인과는 각기 다르며, 또한 다시 상속하는 것이어서, 영원하지도 않고 단멸하지도 않는 것인데, 단견을 고집하는 이들은 한쪽 변만을 고집하여 인과 상속의 도리를 무시하고 세간과 아는 생겨난 한 기간에만 한정되고, 죽은 뒤에는 단멸로 돌아간다고 한다.

    常邊;常見, 常邪見, 常論, 단견의 대칭, 세계는 상주 불변하며 사람의 자아도 불멸하여 사람이 죽은 후 자아는 소멸하지 않고, 다시나서 현재의 상태로 상속한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즉 아가 상주한다는 것, 이런 견해에 집착하는 것

    하나의 여실한 일심의 자성을 고집하지 않는다. (한 곳에 머무르지 않는다.) 두 변을 떠났다는 것은 전체가 움직이고 고요하여 두 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릇된 견해;매우 심오한 교법에 의하여 말 그대로 뜻을 취하여 스스로 궁극적인 것이라고 여김.

    1.움직임과 고요함이 둘이 아니라고 한 것을 듣고서 곧 이것이 하나로서 一實이며 一心이라고 생각하여 이로 말미암아 이제의 도리를 비방하는 것이다. 즉 착각하는 것이다.(모두 허망한 것이다.)

    2.공과 유의 두 가지 문에 대하여 듣고서 두 가지 법이 있고 일실을 없다고 헤아려서 이로 말미암아 둘이 없는 중도를 비방하는 것이다. 즉 맹인이 해가 없다고 하는 전도된 견해, 믿지 않음.

    유의 경계가 아니기 때문에 망집의 경계를 벗어났고, 무가 아니기 때문에 단견의 경계를 벗어났다.

    이 법은 무상한 것이 아니어서 모든 상견과 단견을 벗어났다고 한 것은 무상이 아니기 때문에 모든 단견을 벗어났으며, 법이기 때문에 모든 상견을 벗어 났으니, 상견이 취하는 것은 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체의 법이 본래 적멸하다는 것을 아는 것은 이미 일어남이 없음을 알기 때문에 마음을 적멸하게 하지 않으니, 마음을 적멸하게 하지 않는 것은 항상 적멸하기 때문이다.

    마음은 그림쟁이와 같아서 여러 가지 오음을 그려내니, 일체의 세간 가운데 만들어 내지 못하는 법이 없다. 마음과 같이 부처도 또한 그러하며 부처와 같이 중생도 또한 그러하니, 마음과 부처와 중생의 이 셋은 차이가 없다.

    空華;虛空華, 空花, 眼華, 眼花, 실재 존재한다고 착각하는 것.

    地藏菩薩;持地, 妙幢, 無邊心

    인연은 없는 것이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니,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없어지지도 않는다. 연은 법을 일으키지 않는다. 왜냐하면 없는 법을 바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토끼의 뿔을 바라는 것과 같다.

    네가 생각하고 있는 법은 공하여 존재하지 아니하니, 이것은 허망한 마음이 취한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허공의 꽃과 같다.

    법은 이루어짐과 무너짐이 없다. 왜냐하면 상대함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진여와 같다. 일심의 법은 또한 하나를 고집하지 아니하고, 생사와 열반은 공적하여 둘이 없으니, 둘이 없는 곳이 바로 일심의 법이고, 일심의 법에 의하여 두 가지 문이 있다. 그러나 두 문을 모두 취하면 곧 일심을 얻지 못하니, 둘은 하나가 아니기 때문이며, 만일 두 가지 문을 폐하여 함께 취하지 않으면 또한 일심을 얻을 수 없으니, 는 일심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뜻으로 말미암아 둘이 없는 마음의 법을 함께 취하는 것과 함께 취하지 않는 것에 또한 마땅히 적멸하다.

    법은 본래 자성이 없다.

    명칭과 설명의 두 가지와 법은 집착이다.

    공하기 때문에 없는 것인데 어찌 하나를 얻을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일체의 모든 법은 하나가 아니다.

    천 가지 만 가지 생각은 생멸의 상이다.

    만일 법은 하나만 있다고 한다면 마치 아지랑이를 물로 착각하는 것과 같다. 만일 법이 없다고 본다면 마치 장님이 해가 없다고 잘못 아는 것과 같다. 여실함이 없지 않음을 안다고 한 것은 一實 와 자성이 없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여실함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마치 장님이 해가 없다고 잘못 아는 것과 같다. 없지 않다는 뜻이 火性의 왕과 같다고 한 것은 나무 가운데 火大의 성질이 있는데, 쪼개어 구해보아도 불의 형상을 얻을 수 없으나 실제로 없는 것은 아니니, 나무 가운데 불의 성질은 나무를 뚫고 비벼서 구하면 불이 반드시 나타남을 말한 것이다. 일심도 또한 그러하여 모든 상을 분석해 보아도 마음의 자성을 얻을 수 없으나, 실제로 없는 것은 아니니, 모든 법 가운데 있는 마음은 도를 닦아 구하면 일심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불의 자성은 모양은 숨겨져 있으나 세력은 커서 마치 국왕과 같기 때문에 왕이라고 한 것이다.

     

    풍경 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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