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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사상과 철학 83 (교재 공개)
    패러다임/철학 2022. 7. 18. 0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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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생각하기 이해하기 실천하기-

     

    사상과 철학 83

     

    영상 강의 링크 : https://youtu.be/AaqpYFrz-B0

     

    489.

    객체로 (그것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는 사실은 그 자체가 잘못된 방향이다. 모든 지각 대상을 객관화하고 객관적 개념으로 바꾸려는 습관적 구조를 버리거나 제쳐 놓기 전까지 본질적인 이해는 발전하기 시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것들이 비존재, , 실재하지 않음 등등 으로 다양하게 묘사되는, 익히 잘 알고 있는 공허함이 절대로 객체가 아니고, 객체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즉시 깨달을 수 있다. 그것들은 그것들의 인식자이고, 절대로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보여질 수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것들을 절대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인식자는 어떤 한 시점에서 그가 그 자신을 보고 있는 곳에 이른다. 그리하여 분석의 종범에 도달하고 자신의 본질과 직면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공이란 그 자신을 보았을 때 알게 되는 것임을 깨닫지 못하고, 그는 자신이 보지 못한 것, 절대로 볼 수 없는 것을 객관적 개념으로 바꿈으로써 객관화하려고 계속 노력한다. 마치 잘 훈련된 철학자처럼 말이다.

    따라서, 자신은 인식될 수 없음을 깨닫는 지점에 도착했을 때, 관찰한 내면에서 그 어떤 객관적인 것을 찾지 못하는 지점에 도착했을 때, 인식자로서의 나는 원래 거처에 되돌아 온 것이다. 객관적인 어떤 것이 아닌 인식자, 브라만-아트만은 바로 내가 내 자신을 찾을 때 볼 수 없는 것이다. ‘정신을 찾지만 객체로서 그 자체를 찾지 못하는 것이 바로 정신이다.’ 또는 나를 찾는 것, 보는 것을 찾는 것은 나의 부재(텅빈 정신)를 찾는 것이다.’

    정신을 객체로 알 수 없으니 정신을 알 수 없는 것이 바로 정신이다. 당신이 찾고 있던 공은 당신이 내면에서 보는 자를 찾을 때 찾지 못했던 공과 동일하다. 따라서 추구되는 것은 추구자이고, 추구자는 추구되는 것이다.

    당신이 찾고자 하나 찾을 수 없는 것-그것이 바로 찾는 자이다. 법신(法身-우주적 절대적 붓다의 몸)(정신)을 찾거나 설명할 수 없는 이유는 궁극적으로 그것이 찾는 자, 설명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것의 객체를 만드는 주체 역시 마찬가지다. 이것-여기-지금에 이름을 붙이거나(또는 관찰하거나 생각하려고) 노력할 때마다, 당신은 그 자체를 보려고 애쓰는 눈과 같다. 당신은 당신-자체인-이것을 객관화시킬 수 없다. 당신이 객관화시킬 수 없는 것이 바로 당신이-아닌-저것이다. 찾고 있는 이것은 찾아짐을 당하는 저것이고, 찾아짐을 당하는 저것은 찾고 있는 이것이다.

    찾는 것과 찾는 자 따위는 없다. 완전히 이해했을 때, 찾는 것은 찾는 자와 하나가 된다. 찾는 자 그 스스로가 찾아짐을 당할 때 찾아질 수 없다. 그런 까닭에 찾는 목표의 성공은 또한 찾는 행위 그 자체의 끝이 된다. 그리하면 더 이상 찾을 것도 찾을 필요도 없다.’ 유일한 실습은 이것을 아는 것이다. 그것이 의식이요. 눈이 그 자체를 찾을 때 볼 수 없는 이치이다.

    만일 당신이 보는 자를 보려고 계속 노력한다면, 당신은 그 자체를 잡으려고 노력하는 손이고, 그 자체와 키스하려고 노력하는 입술이 된다. 이와같은 주장은 최고의 사기라고 말할 수 있다.

    사실 우주는 단지 객관적이 되는 것을 중지했을 뿐이다. 인식자는 그것이 인식하는 우주와 하나이다. 따라서 나의 주관적인 자아뿐만 아니라 객관적인 우주는 순수하고 비이원론적 보는 행위 속으로 사라진다.

    찾는 것은 찾는 자이다. 관찰되는 것은 관찰자이다. 들이는 것은 들리는 것을 듣는 자이다. 냄새는 그것을 들이마시는 사람이다. 맛은 맛보는 사람이다. 만져지는 것은 그것을 느끼는 자이다. 생각은 그 생각을 하는 사람이다. 요컨대, 감각적으로 인식되는 것은 그런 감각을 사용하는 인식자이다.

    이 사실을 깨달았을 때, 자아 정체감은 폭발하여 경험되는 모든 것이 된다. 따라서 분리된 경험자나 경험되는 분리된 객체는 존재하지 않게 된다. 단지 모든 것을 둘러 싼 하나의 비이원론적 경험하기만이 남는다. 따라서, 인식자를 찾기 위하여 내면을 들여다보았을 때 그는 객관적인 어떤 것도 찾지 못한다. 그가 발견하게 될 것은 저기 밖 객체로 나타나기를 중지했기에 이제는 보는 자와 동일하게 느껴지는 완전한 우주이다. 이렇게 하여 제1차 이원주의는 치유된다.

    내면을 능동적으로 바라보기(1요인)는 아무 것도 보지 못함(2요인)을 낳는다. 그리고 이로부터 해탈의 만다라는 순수하고 비-객관적인 의식으로 나타날 수 있다.(3요인)

    대답이 말로 표현될 수 없을 때, 질문 또한 말로 표현될 수 없다. 그러한 문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질문이 만들어 질 수 있다면, 대답하는 것 또한 가능하다. 의심은 질문이 존재하는 곳에서만 존재할 수 있고, 질문은 대답이 존재하는 곳에서만 존재할 수 잇고 대답은 오직 무엇인가 말해질 수 있는 곳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삶 자체가 해답이다. 삶의 문제의 해결책은 그 문제의 소멸이다.

    바꿔 말하면, 질문은 오직 그것이 더 이상 질문되지 않을 때 응답된다. 진정한 해답은 그 질문이 물어지지 않는 곳에 존재한다.

    질문이 아직 물어지지 않은 곳은 다름 아닌 지금이라 불리는, 차원이 없는 지점이다. 지금-순간에 과거와 미래는 사라지고, 그것들과 함께 생각도 사라진다. 생각은 과거에 기초하여 미래를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어떤 질문도 발생하기를 멈추는 것이 바로 이 지금-순간의 능동적 주의 안에서다. 그리고 그것이 질문의 궁극적인 해결책이다. 지금에 대한 빈틈없고 능동적인 주의(1요인)는 생각의 중지를 야기한다.(2요인) 생각은 그것의 재료를 위하여 과거에 의지하고, 그것의 결과를 위해 미래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생각은 시간이다. 따라서 초시간적인 지금은 생각이 없는 지금이다. 따라서 침묵하는 의식(3요인)은 내가 현재에 존재할 때 발생한다. 이것은 바로 지금 이 순간 그 무엇이 됐던 그것에 대한 빈틈없는 주의를 필요로 한다. 궁극적으로 내면과 외면의 흐름은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참으로 관조적인 신비주의는 다음과 같다. 지금 이 순간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것에 대한 판단이나 언급없이 의식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발생하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 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행동은 우주의 행동이고 역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나와 우주가 더 이상 분리되지 않았을 때, ‘그것이 내게 한 행동과 내가 그것에게 한 행동은 하나이고 동일한 행동이 된다.

    각 수준에서 상황과 사건이 내 의지에 반하여 발생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것을 내 자신에게 하고 있는 사람은 바로 나이다. 그러나 대부분 나의 외부에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정신의 수준에서는 나의 외부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하나의 의지가 존재한다. 그것은 나의 의지이자 신의 의지이다. 당신에게 발생하는 것은 당신 자신이 한 것이고, 당신 자신의 업이다.

    삶의 끝에 존재하는 갑작스런 죽음이 아니라 삶을 통해 내내 존재하는 순간적인 죽음이다. 죽음의 시간은 매 순간이다. 모든 순간은 죽음의 순간이다. 그 외 다른 어떤 순간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순간에 우리는 이미 항상 순간적인 죽음으로 고통받고 있다. 그리고 이미 항상 미래가 없는 순간을 자각한다. 미래가 없으니 과거도 없고, 시간안에서 시작도 없고 그리하여 시간 안에서 끝도 없고, 따라서 태어나지 않았고 따라서 죽지도 않는 순간 말이다. 그러므로 끝이 있는 탄생-그리고-죽음도 없다. 따라서 지금 현재의 순간은 절대적인 평온함이다. 이 순간에는 한계가 없고 그리하여 영원한 기쁨이다.

    창조도 파괴도 없다. 운명도 자유의지도 없다. 방법도 성취도 없다. 이것이 최종적 진리이다.

    모든 형식의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운 정신을 소유해라. 그리하면 정신은 그 자체의 주인이 된다. 정신은 그 어떤 장애, 금지, 멈춤, 막힘도 알지 못한다. 물처럼 그 자신의 방향을 따라간다. 임의로 부는 바람과 같다.

    방해물은 제1차 이원주의이다. 여기 주체가 없을 때(에고가 없을 때), 저기 객체(외부적 사물)가 없다. 이것이 비-거주, 완전한 의식(3요인)이다.

    생각은 시간이다. 의식은 영원이다.

    완전한 분리는 그것은 사람이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하는 객체가 아니라 객체를 보는 자이다. 정신은 객체를 초월하고, 형태를 초월한다.

    우리가 변화되도록 그것은 변형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형태나 객체를 배제하지 않는다. 공은 형태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 안에 있고, 나눌 수 있지만 나눌 수 없는 것 안에 있다.

     

    동영상 4개

    1.자벌레의 체력 훈련

    https://youtube.com/shorts/DQlB8OlzMus?feature=share

     

    2.왕 사마귀의 산란 과정

    https://youtube.com/shorts/VuriusLiCYU?feature=share 

     

     

    3.잠자리의 나비 포식 장면

    https://youtu.be/OW70fg-A2VQ

     

     

    4.지구가 자전하지 않는다는 증거 중의 하나

    (뒤의 흰 구름은 움직이지 않고

    앞의 검은 구름만 움직이고 있다.)

    https://youtu.be/gfXEiOvepx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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