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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사상과 철학 81 (교재 공개)
    패러다임/철학 2022. 7. 4. 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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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생각하기 이해하기 실천하기-

     

    사상과 철학 81

     

    영상 강의 링크 : https://youtu.be/nt4ekF0xvcM

     

    487.

    정신은 정신으로부터 어떤 것을 추구하기 위하여 사용될 수 없다.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찾는 자이다. 그러나 보는 자가 보는 것을 보지 못하고, 듣는 자가 듣는 것을 듣지 못하고, 느끼는 자가 느끼는 것을 느낄 수 없다. 모든 것을 베는 칼이 자기를 베지 못하고, 모든 것을 보는 눈이 눈 자체를 볼 수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인식할 수 없다. 인식된 것은 인식할 수 없다.

    자기 자신은 그 어떤 객관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을 그 자체의 부재, 부재의 부재, 객관적인 성격, 본성, 또는 특성의 완전한 결핍이다. 따라서 당신이 의식하는 자아는 절대로, 분명하게, 가장 확실하게 당신의 자아가 아니다.

    우리는 듣는 사람을 들을 수 없고, 냄새 맡는 사람을 냄새 맡을 수 없고, 느끼는 사람을 느낄 수 없고, 만지는 사람을 만질 수 없고, 맛보는 사람을 맛볼 수 없다. 보는 사람을 볼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는 자는 사물이 됨으로써 사물을 알기 때문이다.

    지식이란 알려진 그 대상이 아는 자 내면에 존재할 때에만 실현된다.

    주체와 객체 사이에는 어떤 차이, 거리, 공간도 존재하지 않는다. ‘보는 자’, ‘나의 자아는 그것이 보는 것과 분리된 것처럼 보이고 그것이 바로 제1차 이원주의다. 즉 환영으로 우리의 주관성을 자아라고 불리는 객체로 바꾼다. 하지만 그 자아는 (객관적인) 생각, 감정, 주체성, 개성 등등의 복합체일 뿐이다. 우리는 이러한 개체들의 연합체를 주체성이라고 착각한다. 이러한 가짜-자아와 동일시하기에 모든 다른 객체들은 나와 분리된 것처럼 보인다. 이것이 바로 제1차 이원주의이다.

    모든 것은 객체로서 보이거나 알려질 수 없다. 보여지는 것은 에고이다. 보는 행위를 하는 것은 정신이다. 환경과 분리됐기에 그 환경은 위협이 된다. 1차 이원주의가 다시 죽음의 억압과 공포와 두려움 때문에 가능한 자신과 환경 사이 많은 거리(안전이라 불리는)를 두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면서 우주와의 평생에 걸친 싸움을 야기한다.

    당신은 왜 불행한가? 당신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이 당신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신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주체와 객체는 오직 정신이라 불리는 이 실재에 접근하는 두 가지 다른 방식에 불과하다. 시간과 공간을 통해 정신을 찾는 방법은 없다.

    해방(자유)이란 미래의 희망이 아니라 현재의 사실이다.

    당신은 이미 원하는 곳에 있다.

    어떻게’, ‘방법’, ‘ 이 어떤 곳으로 우리를 이끈다면, 지금으로부터 벗어난 어떤 곳이 될 것이다.

    열반과 윤회는 차이가 없다.

    비록 당신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기 위하여 보살의 모든 과정을 통과한다 할지라도, 결국에는 붓다의 본성이 항상 당신에게 존재했음을 갑자기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앞선 모든 과정이 무의미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 각각은 사토리(깨달음)의 상태에서 살고 있고 딴 방법으로는 살 수 없다. 그것이 탄생과 죽음으로부터 독립된 우리의 영원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생각을 멈춘다는 것은 함정이다. 생각하지 않는 것에 관하여 끊임없이 생각(상상적-감정적 과정들;우리의 에너지를 분해하고 흩어지도록 작용한다.) 하기 때문이다.

    정신의 활동을 억압하는 것...은 병이지 선 이 아니다.

    생각의 과정 핵심 요인들

    1요인;능동적 주의-생각 자체를 인정하고 완전히 받아 들인다. 이런 능동주의가 올바르게 실행될 경우 다음을 야기한다.

    2요인;정지-실재를 왜곡시키는 앎의 첫 번째 양식(생각, 개념화, 객관화)의 중지.이원론적이고 상징적-지도 지식의 중지이다. 공간, 시간, 형식, 이원주의의 중지. 만일 이러한 정지가 분명하고 완전하다면 다음 결과를 낳을 것이다.

    3요인;수동적인 의식-를 간파하기-이것은 진정한 보기이고 영원한 보기이다. 단순한 공백이나 진공 상태 안을 들여다 보는 행위가 아니라 객관적인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음을 보는 것이다. 그것은 주체 대 객체의 제1차 이원주의가 없는 순수한 초시간적 의식이다. 그것은 앎의 제2양식이고, 어느것으로부터도 분리되지 않고 모든 것을 안다. 이렇게 순수한 의식의 한 순간은 그 자체가 정신이다. 우리가 깨닫던 깨닫지 못하던 그것은 항상 이미 그러하다.

    과거나 현재나 미래에 존재하거나 존재해야 하거나 존재할지도 모르는 것이 아닌 존재하는 것. 지금의 의식 말이다. 존재하는 것은 현실이고 바로 이런 실재를 깨달음으로써 우리는 자유를 얻는다.

    진리를 찾는 사람은 절대로 그 진리를 찾지 못할 것이다. 진리는 존재하는 것 안에 있다. 그것이 존재의 아름다움이다. 그러나 당신이 그것을 생각하자마자, 그것을 찾으려고 노력하자마자, 당신은 분투하기 시작한다. 분투하는 사람은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움직이지 않고, 주의깊고, 수동적으로 의식해야 하는 이유이다.

    충분하게 주의를 집중해서 배경의 완전한 의미를 추구한다면, 그 의미를 밝혀낼 수 있고 단번에 진리를 발견하고, 당신의 문제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이해란 지금, 현재, 시간을 초월하여 항상 존재하는 것으로부터 생겨난다. 미루는 것, 내일을 얻기 위해 준비하는 것은 지금 존재하는 것을 이해하는데 방해가 된다. 당신은 오직 지금 안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을 내일 이해하기 위하여 준비할 것이다. 따라서 당신은 절대로 이해할 수 없다. 진리를 인식하기 위해서라면 준비는 필요치 않다. 준비는 시간을 의미하고 시간은 진리를 이해하는 방법이 아니다. 시간은 연속적이지만 진리는 초시간적이다.

    하느님 또는 진리는 생각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에 관하여 생각한다면, 그것은 진리가 아니다.

    해답을 구하는 것은 문제를 피하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 대부분이 원하는 것이다. 해결책은 문제와 분리되어 있지 않다. 해답은 문제로부터 떨어진 것이 아니라 문제 안에 존재한다. (해답이란 지금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만일 해답이 주요 논쟁점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다면 우리는 또 다른 문제를 만들어낸다. 어떻게 그 해답을 깨달을 수 있을까, 어떻게 성취할 수 있을까, 어떻게 실행할 수 있을까 등등

    이를테면, 지금 이 순간 내가 격심한 공포를 경험하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우리 대부분은 공포를 의식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공포로부터 벗어나기 원한다. 공포를 바라보고 싶어 하지 않으며 공포를 부정하기 원한다. 그러나 이것은 오직  공포가 다른 두 개의 존재일 때만 가능해질 수 있다. 오로지 아는 자 대 알아지는 것, 경험자 대 경험, 주체 대 객체란 제1차 이원주의가 존재할 때만 가능해질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 문제가 생긴다. 실제로 제1차 이원주의가 환영이라면, 만일 사실 내가 현재 경험을 소유한 것이 아니라 현재의 경험이라면, 그래서  공포는 이 순간 하나이고 동일한 과정이라면, 결론적으로 나와 내 머리를 분리할 수 없는 것처럼 내 자신으로부터 공포를 분리할 수 없게 된다. 만일 내가 공포라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공포는 나를 위협하고 괴롭히지 않게 된다. 괴롭힘을 당하거나 위협을 당하는, ‘공포로부터 분리된 는 지금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공포는 위협하기를 멈춘다. 한편, 만일 내가 공포로부터 벗어나려고 노력한다면, 이것이 바로 공포를 두려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공포는 그것 자체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그 자체를 둘로 나누려고 애쓴다. 물론 이것이 제1차 이원주의다. 생각하는 자 대 생각, 경험자 대 경험되는 것, 관찰자 대 관찰되는 것의 이러한 악순환에서 공포는 그 자체로부터 벗어나려는 헛된 노력으로 무서운 속도로 자신을 나누고 증가시킨다. 요컨대, 공포를 벗어나려는 노력은 그 자체가 공포이다.

    공포를 피함으로써 고통이나 공포를 다룰 수는 없다. 우리가 그것임을 깨달음으로써만 그것을 다룰수 있다.

     

    풍경 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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