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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사상과 철학 80 (교재 공개)
    패러다임/철학 2022. 6. 27. 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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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생각하기 이해하기 실천하기-

     

    사상과 철학 80

     

    영상 강의 링크 : https://youtu.be/UiYe1SgF6fE

     

    486.

    당신이 지금 당신의 자아라고 부르는 가짜 주체 로 완전하게 갔을 때, 당신은 오직 객체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는 진정한 자아, 절대 주체성(비이원론적 의식, , 브라만, 다르마다투-法界)은 그것이 알고 있는 우주와 하나라는 가장 명확한 증거이다. 당신이 관찰하는 모든 것은 그것을 관찰하는 당신이다. 이는 당신과 사물 사이 환영적인 분리에 앞서 진정한 세계의 근본적인 조건이다.

    당신은 정신, 또는 절대 주체성을 볼 수 없다. 아는 자이기에 알아짐을 당할 수 없다. 보는 자이기에 보여짐을 당할 수 없다. 조사자이기에 조사 당할 수 없다. 진정하고 절대적인 주체성은 당신이 지금 의식하는 모든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자신의 존재감 또한 당신이 의식하는 모든 것으로 변화한다. 이런 현상이 발생할 때, 당신은 더 이상 당신이 지금 주시하고 있는 것과 분리됐다고 느끼지 않을 것이다. 주체 대 객체란 이원주의는 절대 주체성, 즉 정신 안에서 사라진다. 주체 대 객체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 사이 차이는 사라진다. 혹은, 애초부터 그 차이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이해된다. 따라서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이라는 형용사는 무의미한 것처럼 들린다. 관찰자가 관찰 대상이 되는 비이원론적 의식의 과정이 존재한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 당신은 절대로 정신을 볼 수 없다. 정신은 보는 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또 다른 의미에서 당신은 정신 외에 그 어느 것도 의식하지 못한다. 정신은 볼 수 있는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진짜 지각자, 진정한 자아, 절대 주체성에 관한 한, 그것은 보일 수 없다. 그것은 보는 행위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알려질 수 없다. 그것이 아는 자이기 때문이다. 나의 진정한 자아는 더 이상 그 자체를 객체로 볼 수 없다. 이는 불이 불을 태울 수 없고, 칼이 스스로를 자를 수 없는 이치와 같다.

    신경증적 욕구(그림자수준), 기본욕구(에고와 실존수준), 메타욕구(초개인대역), 정신수준은 욕구가 없다.

    원하는 것을 충분히 얻을 수 없을 때, 인간에게는 탐욕스러운 신경증적 욕구가 발생한다.

    개인이 실존수준에 도착할 즈음, 초월을 요구하는 완전히 새로운 욕구들, 메타욕구들이 출현하기 시작한다. 이런 메타욕구들에 작용하는 것은 초개인 대역의 세계로 가는 비법을 전수하는 것이다. 그것들을 피할 경우 인간은 정신 병에 걸리게 된다.

    주요 이원주의의 붕괴는 동시에 그 이원주의를 지탱하는 특정한 가짜 주체성의 감각의 붕괴이다. 초개인적 명상 특히 정신명상은 가짜 주체성을 통과하여 절대 주체성에 들어가는 것이다.

    명상을 수행하는 사람은 절대로 어떤 것에도 의지해서는 안된다.

    정신의 수준이란 의식의 현재 수준이며 평범한 상태이다. 그것은 무한하고 게다가 모든 것을 절대적으로 포함하기에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의식의 수준 또는 상태와 조화된다.

    현재 일상적인 의식의 상태, 그것이 정신의 수준이며 특별한 경험이나 상태가 아닌 지금 당신이 있는 수준이다. 그것은 초자연적이거나 일상적인 실체와 분리된 자기 중심적이고 끊임없이 황홀경에 빠지는 것이 아니다. 매일매일의 평범한 의식 그것이 바로 도 이다.

    신비주의의 최고 이상은 보살 菩薩 Bodhisativa로 표현될 수 있다. 보살이란 언제, 어디서나 모든 사람, 모든 장소, 모든 사물 안에서 신성을 보는 사람이다. 따라서 보살은 자신의 을 찾기 위해서 고독한 삶을 살거나 황홀경을 추구할 필요가 없다. 그는 그 순간 그가 하는 행동과 동일하다.

    정신이란 언제든 어디에나 존재하기에 정신을 위한 노력은 불가능하고 무의미하다. 도처에 있기에 정신은 우리가 그것을 붙잡을 수 있는 특정한 장소에 머무르지 않는다. 당신은 그것을 소유할 수도 행할 수도, 자유로울 수도, 도달할 수도, 볼 수도, 잃어버릴 수도 없다. 빈 하늘처럼 그것은 어떤 경계도 없다. 그것은 바로 여기이고 항상 고요하고 청명하다. 정신, , 신성이 우리가 열렬히 추구하는 상태라면, 그리고 정신 바깥쪽에는 갈 곳이 전혀 없다면, 우리는 이미 거기에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우리는 이미 신과 하나이며 우리는 지금 정신이라는 결론이 도출되는 것이다. 보라. 나는 신이다. 나는 모든 것 안에 존재한다. 모든 것을 행하고, 절대로 일을 멈추지 않고, 시작도 없는 시점으로부터 내가 그것을 만들 때와 똑 같은 힘, 지혜, 사랑으로 나는 명한대로 모든 것을 끝까지 이끈다.

    중생은 본래 부처다. 물과 얼음 같아서 물이 없다면 얼음도 없다. 중생 말고는 부처도 없으며, 중생이 가까이에 있음을 모르고 멀리서 찾는 덧없음이여. 마치 물 한 가운데서 목말라 애원하는 사람과 같다.

    신과 나는 내가 그를 인식하는 행동 안에서 하나가 된다.

    아직 자아를 깨닫지 못했다는 생각을 버려라. 당신은 바로 자아이다.

    당신이 깨닫든 깨닫지 못했든, 원하든 그렇지 않든, 관심이 있든 없든, 이해하든지 말든지 상관없이 우리는 정신이다. 항상 그랬고 앞으로도 항상 그럴 것이다.

    만일 당신이 깨달음을 얻는다면 삼라만상은 바로 그 모습 그대로이다. 만일 당신이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 해도 삼라만상은 바로 그 모습 그대로이다.

    우리는 정신이기에 절대로 정신을 얻을 수 없고, 정신에 도달할 수 없고, 정신을 잡을 수도 찾을 수도 없다. 이는 우리가 우리의 발을 따라갈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어떤 의미에서 정신을 찾는 모든 노력은 궁극적으로 헛되다.

    브라만이란 그 사람의 자아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그 사람에 의하여 달성될 수 없다. 비록 브라만은 인간의 자아와 전혀 다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손에 넣을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브라만은 동시에 어디든 존재하기에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항상 있는 본성의 일부이다.

    자아에 도달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만일 자아가 도달될 수 있다면, 이는 자아가 지금 여기에 있지 않으며 획득될 수 있는 것이란 의미가 된다. 다시 얻을 수 있는 것은 다시 잃을 수도 있다. 따라서 그것은 일시적이다. 일시적이지 않은 것은 얻으려고 애쓸 가치가 없다. 따라서 나는 자아란 도달할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당신은 자아이다. 당신은 이미 그것이다.

    달성될 수 있는 것은 없다란 말은 객소리가 아니다. 그것은 진실이다. 당신은 항상 부처와 하나였다. 그러니 다양한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체하지 말아라. 지금 이 순간 이 사실을 확신한다면, 아무 것도 이룰 수 없음을 정말로 확신한다면, 당신은 이미 부처의 마음을 가졌다.(깨달음을 얻었다.) 물론 이런 주장을 받아들이기는 힘들 것이다. 당신에게 부처를 찾지 말라고 가르치는 것이니까. 왜냐하면 어떤 노력도 애초부터 실패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바로 정신이기 때문이다. 오직 일심 一心만이 부처의 마음이다. 부처와 중생의 차이가 없다. 중생은 애착을 가지고 외부에서 깨달음을 추구한다. 추구하기에 그들은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 부처를 얻기 위해 부처를 이용하고, 마음을 붙잡기 위하여 마음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비록 중생들은 영원히 온 힘을 다 바쳐 애쓰겠지만,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정신을 추구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실패하게 돼있다. 추구한다는 행위는 영적인 물체이든 물질적인 물체이든 우리가 붙잡을 수 있는 어떤 사물을 찾거나 얻으려 한다는 뜻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신은 물체가 아니다. 객관적으로 생각하고 지각하고 이해하는 것은 그 무엇이 됐든 절대로 생각하는 자, 인지하는 자, 이해하는 자가 아니었고, 지금도 아니고, 앞으로도 아닐 것이다. 또 다른 이유로 추구하는 행위는 현재의 부족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겐 부족함이 없다. 오직 우리의 불안하고 미혹된 마음만이 부족하다는 기분을 주입할 뿐이다. 따라서 추구하면 할수록 더욱 격심하게 부족함을 느낀다. 그런 방식으로는 절대로 정신을 찾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에 우리는 만성적으로 공포감을 느끼고 노력을 배가하여 자신의 목을 더욱 강하게 조르는 꼴이 될 것이다. 또 다른 이유로, 추구한다는 행위는 미래의 언젠가는 달성할 수 있다는 암암리의 믿음에 기초한다. 오늘 구원을 얻지 못한다면 내일은 분명히 구원을 얻으리라는 믿음 말이다. 그러나 정신은 내일, 시간, 과거, 미래를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상상의 미래 안에서 정신을 추구하는 와중에 우리는 결국 현재 정신으로부터 도망하게 된다. 정신은 오직 지금이란 초시간적 순간에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항상 그렇듯이, 자신의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애쓰는 자는 자신의 영혼을 잃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우리가 찾는 물체와 그 물체를 찾는 자가 실제로 하나이며 동일하다는 점이다.

     

    풍경 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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