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사상과 철학 82 (교재 공개)
    패러다임/철학 2022. 7. 11. 03:08
    반응형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생각하기 이해하기 실천하기-

     

    사상과 철학 82

     

    영상 강의 링크 : https://youtu.be/tMEP6xGCOqw

     

    488.

    당신은 고통으로부터 떨어져 있지 않다. 이름을 붙여 옆으로 제쳐놓기가 불가능하다. 당신이 바로 고통, 그 감정, 그 아픔이다. 만일 중심(가짜 자아)이 그것과 관련된다면(, 그것과 다르다면), 중심은 공포를 두려워하고 공포에 대하여 분명히 어떤 행동을 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중심이 공포라면, 해야할 일은 아무 것도 없다. 그렇지 않은가? 만일 당신이 공포이고 당신이 공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명칭을 붙이지 않고 옆으로 제쳐놓지 않는다면-만일 당신이 그것이라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당신은 고통을 받는다고 말하는가? 더 이상 나는 고통을 받는다.’란 주장은 없다. 고통 받는 중심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나의 외부로 그것과 관련이 없는 한(분리되지 않는 한), 문제는 없다. 내가 나의 외부에서 그것과 관련을 짓는 순간, 문제는 발생한다. 나는 공포와 관계를 맺지만 그 관계(1차 이원주의)는 허구이다. 만일 내가 그것이라면, 만일 내가 그 사실을 깨닫는다면, 모든 것은 변하고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닌다. 그때 완전한 주의, 통합된 주의가 존재한다. 그리고 철저하게 주의된 것은 이해되고 해결된다. 따라서 공포는 사라지고 슬픔이란 단어는 존재하지 않게 된다.

    경험자와 경험되는 것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 사실은 본질적이다. 경험자가 그 느낌, 그 경험을 말로 표현하는 한, 경험자는 경험과 분리되어 경험에 작용하게 된다. 그런 행동은 인공적이고 환영적인 행동이다. 말로 표현함이 없다면, 경험자와 경험되는 것은 하나이다. 그러한(1차 이원주의)의 통합은 필요하고 반드시 성취돼야 한다.

    우리가 모든 현상을 의식한다는 것은 단지 보는 것이다. 또한 내면적인 모든 것은 단지 주의깊게 관찰하는 것이다. 만일 관찰자와 관찰되는 것 사이에 분열이 있다면 당신은 의식할 수 없다.

    이러한 연상, 이미지, 기억은 관찰자와 관찰 대상 사이 거리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행동반응(주의)이미지)

    이미지가 존재하지 않을 때 생각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면 이원성도 사라진다. 이미지가 발생하는 순간에 바로 그 순간에 충분하고 완전하게(능동적으로) 주의해라(받아 들여라, 1요인) 그러면 당신은 어떤 이미지도 존재하지 않음을(정지, 2요인) 알게 될 것이다. 이미지가 없기에 관찰자와 관찰 대상 사이 분리도 없다.(3요인) 그 순간 의식은 완성된다. 즉 주의-정지-의식

    생각(이미지)은 모든 환영과 속박의 원천.

    상징적 사고는 필수적이다. 그것은 실재와 혼동하여 지도와 진짜 땅을 구별하지 못한 정도가 되지 않는다면 말이다.

    오직 생각(, 자아) 만이 구속이다.

    마음에서 발생하는 모든 생각 중 첫 번째 이자 가장 중요한 것은 최초의 ’-생각이다. 수많은 다른 생각들은 란 생각이 발생 또는 기원한 이후에 나타난다. 따라서 나-생각의 중지는 모든 다른 생각과 정신적 객체의 중지를 특징 짖는다. -생각은 억압될 수 없다. 또 다른 를 제외하고 누가 를 억압할 수 있겠는가? 영적 이타주의는 영적 위선이다. 어떤 다른 생각과 마찬가지로 나-생각은 억압되는 것이 아니다. 중지돼야 한다.

    통합적인 나-생각은 모든 다른 생각을 파괴시켰기에 결국 그 자체도 파괴되거나 소멸된다. 마치 활활 타는 화장용 장작더미를 휘젓는데 이용된 막대기가 태워버려지는 상황과 같다.

    나의 본성을 탐구함으로써 나는 사라진다.

     의 진리는 내면으로부터 저절로 열린다. 그것은 참선(명상)과 관련이 없다. 질문이 클수록 깨달음도 크다. 질문이 작을수록 깨달음도 작다. 질문이 없으면 깨달음도 없다.

    선은 위대한 질문(의심, 하나되는 것)의 효력이 모든 생각의 과정을 중지시키는 능력에 있다.=위대한 고정(2요인, 해탈의 만다라)=일치의 상태(프라즈나)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상태도 자신을 포기하지 말아라. 환상적인 상상은 하지 말아라. 꾸준히 계속해서 질문의 마음을 앞으로 밀어내어 완벽한 동일시의 상태(2요인)을 얻으려고 노력해라. 무엇인가를 찾는 마음이 이 단계에 도달했을 때, 정신의 꽃이 활짝피는 시간이 온다.

    온 신경을 집중하여 열심히 탐구자 그 자신을 탐구한다면(1요인) 그 탐구를 계속하는 일이 절대로 불가능해지는 때가 분명히 올 것이다. 마치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시냇물의 근원지에 도착한 것처럼 말이다. 바로 이때 엉클려 있던 등나무가 무너진다. 즉 주체와 객체의 구별이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묻는 자와 질문은 녹아서 하나의 완전한 일체가 된다.(2요인) 이러한 일치로부터 질문과 탐구에 평화를 가져다주는 위대한 깨달음이 발생한다.(3요인)

    만일 여러분들 중에서 여전히 배움의 단계에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마음 속에서 생각이 깨어날 때마다 (내면으로) 방향을 돌리도록 하시오.(1요인) 그 깨어난 정신이 죽을 때, 의식적 계몽이 저절로 사라질 때(2요인) 이것이 바로 무의식이다.(3요인)

    깨달음이라 불리는 이 멋진 것(3요인)을 실현하기 위하여, 당신은 생각의 원천을 조사하고(1요인) 그것들을 소멸시켜야 한다.(2요인)

    완벽한 사람은 거울로 자신의 정신을 이용한다. 그것은 아무 것도 붙잡지 않는다. 그것은 아무것도 거절하지 않는다. 그것은 받기는 하지만 절대로 간직하지 않는다.

    체계적이고 강요된 관습적 명상수행은 가장 도교적이지 않다. 모든 도교의 비원칙의 중심에는 무위 無爲가 있다.

    정신과 언어를 홀로 내버려둠(무위)으로써, 그것들이 자신의 자연스러운 방법을 따라가도록 허락함으로써, 모든 정신적 경향들을 완전하게 허락함으로써(1요인), ‘생각이나 정신적 활동이 존재하지 않는 정신-단식(2요인)을 얻을 수 있다. 이것은 다시 제3요인인 도라 불리는 수동적 의식을 이끌어낸다.

    나란 존재-실재 그 자체-는 객관적이지도 않고 보거나 느끼거나 만지거나 듣거나 생각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란 사실이다. 나의 인식하는 자아는 사실 인식된 객체일 뿐이다. 내가 그것을 보고, 생각하고, 존경하고 혐오하고 개선하고 등등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은 진정한 나, 인식자가 될 수 없다. ‘인식되는 것은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의 생각, 나의 정신, 나의 육체, 나의 소망, 나의 희망, 나의 공포 등등은 정확하게 말해서 진정한 내가 아니다. 그것들은 모두 인식의 대상이고 따라서 절대로 인식자가 될 수 없다.

    내가 나의 자아에 대하여 알고, 보고, 느끼거나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나의 자아가 아님을 이해해야 한다. 그런 모든 인식은 객체이고 따라서 절대로 주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나의 눈이 그것이 보는 사물과 동일시되는 것과 같다. ‘그 자체를 발견하기 위하여 내 눈은 객관적인 인식들 모두와 비동일시해야 할 것이다. 보는 자로서 나는 보여질 수 없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이해하기 그것이 바로 근본적인 통찰력의 시작이다.

    만일 내가 내면을 관찰하여 어떤 것을 본다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인식의 대상일 것이다. 때문에 그것을 볼 수 없다.

    만일 내가 나의 자아를 찾는다면, 그 어떤 객체도 존재하지 않는 주체성 또는 보는 자를 찾는다면, 만일 나의 눈이 눈 자체를 보려고 애쓴다면 완전히, 절대적으로 아무 것도 보지 못할 것이다.

    주체가 그 자체를 보려할 때, 그것은 그 어떤 것도 보지 못한다. 볼 것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주체란 객체가 아니기 때문에 보여질 수 없다. 그것이 거울-공허이다. 보여질 수 있는 것의 부재, 볼 수 있는 것의 부재, 그것이 바로 주체이다.

    밖을 보아봤자 무슨 소용이 있는가? 당신이 보게 될 것은 모두 객체이다. 몸을 돌려 안을 들여다 보아라. 내가 주체를 볼 수 있을까? 만일 그랬다면 당신은 객체를 보고 있는 것이다. 어느 방향을 향하건 당신은 객체를 보게 된다. 어쩌면 당신은 당신 자신의 부재를 보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이 보는 것이다. 그것은 공 이라 불린다. 공은 당신이 거기에 존재하지 않는 자아를 찾을 때 당신이 볼 수 없는 것이다. 왜 그럴까? 그것이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풍경 78.

    반응형

    댓글 0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