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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사상과 철학 75 (교재 공개)
    패러다임/철학 2022. 5. 24. 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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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생각하기 이해하기 실천하기-

     

    사상과 철학 75

     

    영상 강의 링크 : https://youtu.be/YeYAVSvlPfY

     

    481.

    마야는 창조이긴 하나 환영의 창조이며 진짜가 아닌 상상이고 모든 현상으로 보이는 절대자의 거짓 현현이다. 즉 객관적인 모습을 띠는 절대 주체성의 힘이다. 이러한 현상적 외관-창조 능력이 마야인 것이다.

    마야의 세계는 측정의 세계이며 물질의 세계이다. 측정과 물질의 세계를 궁극적인 실재로 착각할 경우 그것은 환영의 세계가 되고 만다.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측정되는 세계와 혼동해서는 안된다. 측정이란 모두 생각의 산물이지 실재의 산물이 아니다. 측정이란 물질의 어머니이다.

    근본적인 이원주의(현상적인 우주를 창조한 최초의 분리행동, 공간을 절단하고 하나의 세계로부터 두 세계를 창조하여 우지 자신을 현상의 세계에 가둬버린, 바로 그 첫 번째 움직임);인식론적으로 인식자를 인식 대상과 분리하는 행위이고, 존재론적으로 무한한 것을 유한한 것과 분리하는 행위이고, 신학적으로 원죄이며, 일반적으로 그것을 주체와 객체로의 가공의 분리이다.

    정신의() 수준에서 이원화되는 것은 외부로 향하는 이미지, 개념화, 객관화이다. 즉 공으로부터의 이탈이다.(존재의 수준)

    본성이 순수하지만 정신은 무지를 수반한다. 무지에 의하여 더럽혀진 상태로 정신은 태어난다. 그러나 비록 더렵혀졌다 하더라도 정신 그 자체는 영원하고 불변의 존재다. 깨달음을 얻은 사람만이 이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 정신의 필수불가결한 본성이라 불리는 것은 항상 생각을 초월한다. 따라서 그것은 불변이라 정의된다. 실재의 세계를 깨닫지 못했을 때, 정신은 변하기 쉽고 완벽한 통일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갑자기 하나의 생각(이원론적)이 솟아난다. 이것은 무지라고 불린다.

    무지=실재에 대한 무지

    문맹한 사람은 무지하고 교육을 받은 사람은 유식하게 무지하다.

    무지란 비이원론적이고 비개념적인 앎의 방식을 모르는 것.

    공간에 확장되고 시간에 따라 연속되는 분리된 사물들의 관습적이고 상징적인 우주를 창조하는 것은 바로 이 오직-마음(, 정신) 뿐에 대한 무지이다. 무지의 주요 도구가 생각이다. 즉 이원론적인 경향을 생각이라고 부른다. 생각, 개념화, 추론, 구별, 이원론, 측정, 상징적-지도 지식 이 모든 것은 마야의 또 다른 이름이다. 그것에 의하여 우리는 하나의 세계를 많은 세계로(개념적 세계) 분리하고 몰아넣어 의식의 스펙트럼을 발생시킨다.

    시간의 흐름이라는 설득력있는 환상이 미래라는 시간을 만들어 낸다. 이런 방식으로 이 순간으로부터 우리는 시간이라는 환상을 만들어 낸다. 시간이란 공간과 물체의 또 다른 이름이다. 그 생각-기억은 하나의 정신을 반영하고 그 정신을 분리한다. 마야는 주체와 객체의 구별로부터 유래하고 조직된 모든 경험이다.

    근본적인 이원주의란 주체와 객체의 환영적인 분리를 뜻한다.

    신화란 어떻게도 말할 수 없는 실재에 관하여 언어로 표현하는 세가지 방법중 하나이다. 신화는 절대자에 대한 유추적 접근방식의 한 형식이며 긍정적이고 비유적이고 유한한 용어로 무한함에 옷을 입히는 행위이다. 실재에 대하여 어떤 것도 예측할 수 없기에, 신화는 강력한 유추방식이다.

    태초=정신=초시간적=공동의 원칙들로 이뤄진 합

    물질, 어머니, 마야는 최고의 분할자인 로고스(말과 생각)에 의해 수행된 측정과 구별에 의한 창조물이다.

    지식은 이원론적이다.

    인간의 타락은 이원주의로의 타락이다. 타락은 아담을 남성과 여성으로 나눔으로 가능해졌다. 또한 지식의 나무에서 선과 악이었던 지식을 먹었을 때 발생했다.

    정신분석학자들은 인류는 모든 이원론을 완전히 없애기 전까지 병과 불만족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종말론적 제안을 한다.

    시간적-공간적 구체물의 우주는 분리라는 최초 행동으로 창조됐고(근본적인 이원주의) 분리란 시간과 공간을 창조하고 따라서 그 자체가 시공을 초월한다.

    가장 유용한 용어는 주체와 객체, 자아와 타자, 생물체와 환경이다. 근본적인 이원주의를 통해 인간은 자신의 환경과 대비되는 존재로 자신의 생물과 자신을 동일시 하기 때문이다. 그 자신이 이런 환영적인 한계를 설정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린채 말이다. 따라서 인간은 이런 한계로부터 자유를 추구한다.

    사실, 당신이 비참해하거나 불행해야할 이유는 없다. 스스로 진정한 본성인 무한한 존재에 한계를 지우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유한한 존재라며 슬퍼한다. 따라서 당신이 정말 신 이고, 순수한 존재이고, 절대 자아임을 자각하라고 나는 말한다. 당신은 항상 다른 어떤 것이 아닌 그 자아이다. 따라서 당신은 절대로 자아를 모를 수 없다. 당신의 무지는 오직 형식적인 무지일 뿐이다.

    이원성은 비이원성을 억압하고 그것을 다수로(세상에서 생각을 내포하는 모든 것) 투영한다.

    이원성-억압-투영(마야), 이것은 마야의 세겹의 과정이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관심을 가지는 과정이다. 이원성은 둘로의 분리이다. 즉 두 개의 사물들’, , 원반과 페이지는 결국 그렇게 분리된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다를 . 분리된 것은 아니다. 상호관계 있고 상호 의존적이다. 원반의 경계는 존재하지만 분리하지는 않는다. 그 둘은 공동의 경계 덕택으로 실제로 하나가 된다.

    우리의 감각은 우리를 위해 주목과 무시를 통해 모순, 강조, 변화, 빛과 그림자로 기득찬 세계를 만들어 낸다.

    따라서 생각의 과정(앎의 첫 번째 방식)이라는 편협하고 선택적인 관심의 힘을 통하여 우리는 원반에 초점을 맞추고 집중하고, 마음속으로 원반을 배경과 분리하고, 게슈탈트의 통일성을 무시하고, 이런상태가 항상 존재했다고 상상하게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시야 혹은 게슈탈트의 비이원성을 억압하고 그것을 원반 대 페이지로 투영하는 이원주의를 도입하게 된다. 그러나 이런 분리, 이원성의 관점은 완벽한 환영이다. 어떤 배경이 전혀없는 상태에서 원반만 보는 모습을 상상하려고 노력해 보자. 반대로 대조가 되는 어떤 모양이 없는 배경만을 상상해보라. 불가피하게도 하나는 나머지 하나가 없다면 존재할 수 없다. 그것들은 본질적으로 합쳐진 것이고, 오직 생각에 의해서만 분리된다.

    따라서 이원성은 억압과 투영을 동반한다. 이원성은 과정을 절단하고, 비이원적 단일의 특성을 억압하고, 원반 대 페이지라는 두 개의 대립되는 반대 개념으로 투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근본적인 이원주의란 실제로 근본적인 이원주의-억압-투영이다. 그것이 매번 새로운 스펙트럼의 대역을 만들어내고, 최고의 정체성에 대한 인간의 무지를 증기시키기 때문이다. 또한 연이어 일어나는 모든 의식의 수준 내내 수없이 자신을 반복한다.

    실존수준은 근본적인 이원주의-억압-투사로 발생된다. 즉 정신은 분리되고 정신의 비이원성은 억압되고, 그런 후 생물 대 환경으로 투사된다. 이제 인간은 자신의 정체성을 자신의 생물체에 집중시키면서 공간과 시간 안에 존재한다.

    당신은 당신이 누구인지 잊어 버렸다.

    이런 주체와 객체의 분리는 공간의 창조를 표시한다. 근본적인 이원주의 그 자체가 공간(비록 환영이지만)을 창조해 내기 때문이다. 그러한 분리, 보는 사람(주체)과 보이는 대상(객체) 간의 그 차이가 바로 공간이다. 그것은 사람과 그의 세계 사이의 차이(공간의 환영)이다.

    공간의 창조는 반드시 시간의 창조와 관련된다. 시간과 공간은 상호 관련된 연속체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생물체(인간)가 근본적인 이원주의에 의해 환경과 분리되기 때문에, 오로지 그 이유 때문에 실존적 고뇌(유무, 존재 대 비존재, 삶 대 죽음)가 발생하게 된다. 인간은 실제로 삶과 죽음은 하나임을 이해하지 못하고 상상속의 죽음으로부터 미친듯 도망치는 와중에 그것들을 분리한다. 삶과 죽음은 유기체 수준에서 일종의 단일체이고 인간적 수준에서 대립되는 반대 개념으로 분리된다. 차별적이지 않고 변증법적 하나인 본능(삶과 죽음)을 동물적 수준에서 산산이 분리한 것은 인간의 독특한 업적이다. 인간은 그것들을 반대 개념으로 분리시키고, 서로 대립시키고 삶이 삶을 자르도록 만든다.

    탄생과 죽음은 현재의 순간이란 실재를 바라보는 서로 다른 관점에 지나지 않는다.

     

    풍경 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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