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사상과 철학 72 (교재 공개)
    패러다임/철학 2022. 5. 2. 02:01
    반응형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생각하기 이해하기 실천하기-

     

    사상과 철학 72

     

    영상 강의 링크 : https://youtu.be/YraQ_dRKymw

     

    478.

    진정한 정신은 분리되지 않는다. 우리는 오직 두 개가 아니다.’하나

    자기실현의 진리(실재 그 자체)는 하나도 둘도 아니다. 둘을 하나로 만들어라. 그러면 둘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실재하나단수다수초월적내재적=어떤 것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름이 없고 존재하지 않는 것=세상에게는 무가치하게 보이지만 지혜의 아이들에게는 모든 것이다.의식무의식

    우상숭배;실재의 이미지들을 숭배;상징들의 오용;절대자로서 언어적 방법을 다룬다.

    귀류법 reductio ad absurdum 어떤 명제가 참 임을 직접 증명하는 대신 그 부정명제가 참이라는 가정하에서 결국 그것이 모순에 귀결한다는 것을 지적하여 간접적으로 원  명제가 참이 아니면 안된다는 것을 주장하는 추리 증명법

    어떤 대상도 실재 그 자체에 적절하지 않다. 가장 높은 실재는 영원히 생각해 낼 수 없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기 때문에 실재란 전체로서 어떤 반대(상대)도 갖지 않으므로 결코 생각해 낼 수 없다. 실재는 모든 형태의 이원론을 초월하기 때문에 그 안에는 어떤 대조도 없다. 그래서 그 어떤 특정 짓기도 불가능하다.

    우주는 뫼비우스 띠처럼 뒤쪽이 안쪽으로 구부러져 있다. 따라서 안과 밖을 가지고 있지 않다. 반대의 것의 동시발생, 비이원론적인 우주다.

    우리의 논리는 순수한 이원론에 기초하여 움직인다. 내부가 외부이고 위가 아래이고 선이 악인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서로에게서 독립적이지 않다.

    삼라만상은 둘이 아니다. 윤회(열반)가 없는 곳에 열반(윤회)도 없다.

    실재를 가로 막는 가공의 건조물;착각, 무지, 환상=아비댜 avidya

    실재는 그것을 벗겨냄으로써 알려진다. 마음을 비개념화, 경험적인 모든 개념들을 해방, 정보획득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카타르시스이다. 그것은 이성(차이와 구별)을 깨끗이 하는 방법이다. 이성은 보편적이지도 못하고 공평한 지식도 아니다.

    생각의 전체적인 부정이란 허무주의가 아닌 비이원론적인 통찰력인 프라즈나 prajna의 시작이다.

    부정은 생각의 자포자기이다. 하지만 즉시 새로운 방법(직관의 길)이 열린다. 부정은 지적인 직관의 출입구이다.

    실재를 자유롭게 만드는 것이지 실재의 부정은 아니다. 어떤 상징적 대표나 생각도 실재에 적용할 수 없다. 실재에 관한 생각은 무의식적 수준에서 많이 일어나기 때문에 왜곡될 수도 있다.

    생각은 사물을 보도하지 않는다. 생각은 사물을 창조하기 위하여 실재를 왜곡한다.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실재의 본질은 도망쳐 버린다.

    실재란 개념적 설명의 공일뿐만 아니라 분리된 사물의 공이다.

    절대자==사물도 없고 생각도 없다.=실재를 분리하기 이전의 실재=지도를 초월한 순수한 영토=타타타 tathata 如如=있는 그대로의 진짜 세계=구별이 전혀없는=상호침투=모든것 안에 하나=하나 안에 모든 것=다양성 안에 통일, 통일 안에 다양성=우주장=우주적인 시스템=오직 마음뿐=둘이 없는 하나=나를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없다.=정신, 실재 또는 모든 분리된 사물들의 근본은 정신이며, 각 사물은 실제로는 정신이기 때문에 모든 다른 사물과 동일하다.=상호 동일화=언어로 표현하고자 하는 인간의 최고의 노력=게슈탈트 심리학=화이트헤드의 유기체철학=상호의존=상호작용=분리할 수 없고 둘이 아니며 비이원론적이라는 뜻=다르지만 분리할 수 없다.=혼동이 없는 융합=우리는 세계 안에, 세계는 우리 안에 존재한다.

    모든 객관화는 환영이다. 단순하게 모든 물체는 환영이다. 모든 물체는 정신적 물체이다.

    이원론적으로 분리(눈과 사물) 됐다고 느끼는 한 우리는 환영에 사로잡혀 있다. 보여지는 종이와 그것을 보는 행위는 오로지 하나의 나눌 수 없는 사실의 두 이름이다. 그것을 제대로 이름 붙인다면 자료, 현상, 경험이다. 종이는 마음 속에 있고 마음은 종이 주변에 있다. 종이와 마음은 나중에 그 하나가 되는 경험에 대한 두 개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주체와 객체가 둘이 아니란 사실을 깨달았을 때 오직 정신뿐인 실재가 드러난다. 처음엔 유추적 방법으로 실재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유추에 매달린다. 지도와 땅을 혼동하는 것이다. 이후 부정적인 접근법으로 실재에 대한 생각은 유용하지만 실재 그 자체는 생각이 아니다. 이제는 (유추적 접근 방법에 의해 깨달음을 얻어서 절대자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는) 실재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모두 부정함으로써 앞으로 나가야 한다.

    지금까지 배운 모든 것을 잊어버려라. 스스로를 비워라. 소멸, 비우기를 돕기 위해 명령적인 방법이 적용된다. 이것은 실재를 직접 경험하는 결과를 낳게된다.

    요약;개념의 지배를 받아. 공간으로 확장되고 시간적으로 연속된 사물들의 복합체라는 우리의 평범한 세계의 개념은 오로지 우주에 대한 관습적인 지도이다. 그것은 진짜가 아니다. 상징적-지도 지식에 의해 그려진 이 그림은 한편으로는 보여지는 사물로, 또 한편으로는 이런 사물을 보는 자로 나눈 것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기 위하여 우주는 반드시 관찰자 대 관찰되는 것으로 자신을 분리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러한 분리는 잘못됐다기 보다는 환영(무의미)이다. 손이 그 자체를 잡을 수 없고, 눈이 그 자체를 볼 수 없는 것처럼 사람은 우주로부터 스스로를 분리하여 지식을 추출할 수 없다. 하지만 이원론적 지식에 의존하는 사람은 무의미한 것을 시도하고 자신이 성공했다고 상상한다. 그 결과는 진정한 우주가 아닌 우주의 이미지이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에서 분리되는 사물이라 불리는 조각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것은 인간이 스스로의 존재라고 상상하는 의식의 고립된 섬에서 낯설고 이질적인 존재로 남아있다.

    주체와 객체는 오로지 하나이다. 전체로서의 이 진짜세계(, 텅빈, 인지불능, 스스로와 분리되지도 모순되지도 않는 우주, 브라만, , 오직 예수뿐, 如如, 의식, 오직 그 자체, 두 번째가 존재하지 않는 하나, 하느님, 다르마다투...)는 어떤 정반대의 것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정의되거나 이해될 수 없다. 모든 상징은 그 반대의 관점에서만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이는 실재에 대한 모든 생각과 명제는 무익하고 논리적으로 모순된다. 동시에 진정한 세계는 분리된 사물이 없다는 뜻이다. 사물이란 생각의 산물이지 실재의 산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진짜 세계에 대한 경험은 우리의 개념에 의해 가려진다. 이런 개념들은 인식하는 주체 대 인식되는 개념으로의 분리에 기초하기 때문에, 실재와 당신이 갖고 있는 실재에 대한 지각이 하나이고 동일하다. 실재를 아는 것이 실재이다라고 주장해야 환영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

    말할 수없는 것에 대해 침묵하라.

    모든 개개인은 습관적으로 자신의 에고, 자아가 자신의 경험, 감정, 생각의 주체라고 느낀다. 그것은 절대로 진짜 주체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객관적으로 인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인식되는 것은 인식할 수 없다. 그것은 보여짐을 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의 자아는 인식될 수 있기 때문에 인식하는 것일리 없다. 그러나 내 안에서 인식하는 것은 무엇인가?

    내 자신 안에는~를 아는 존재가 있다!

    진아 즉 순수한 의식을 제외한 그것들(에고, 정신, 육체) 각각은 단지 형체를 부여받은 것이지 진정한 관찰자가 될 수 없다. 진아는 객관화 될 수 없고, 다른 어떤 것에 의해 인식될 수 없다. 진아는 다른 모든 것을 보는 관찰자이기에, 진리 안에는 오직 진아만이 존재한다. 그 진아는 보는 자도 보여지는 것도 아니며 주체와 객체와 관련 되지도 않는다.

     

    풍경 69.

    반응형

    댓글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