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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사상과 철학 34 (교재 공개)
    패러다임/철학 2021. 9. 30. 2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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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생각하기 이해하기 실천하기-

     

    사상과 철학 34

     

    영상 강의 링크 : https://youtu.be/Tiw4skc2Uk8

     

    441-4

    의식의 차원들을 탐사하는 자-말과 생각의(번뇌) 재잘거림을 침묵시키는 법 터득

    의식의 더 미묘하고 숨겨진 영역을 파고 들려면 의식의 자유로운 전환이 필요하다. 우리 안의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려면 먼저 낡은 것을 뒤로하고 떠나는 법을 터득, 마음을 침묵시키고 내부로 여행하는 법, 영혼 탐험가들, 광대한 세계, 다채로운 색깔의 무한한 진동, 시공간 너머의 세계, 비육체적 존재들이 사는 세계, 순수한 진동으로 나타난다.

    이들이 형체나 파동의 모습을 마음대로 나타내는 능력있다.

    정보를 큰 덩어리로 흡수하고 광대한 시공간을 한 눈에 지각할 수 있다.

    대부분의 인간들이 물질의 장악 너머를 보지 못하게 하는 정신적 스크린을 가지고 있다. 장막 너머를 보는 방법을 배우면 인간은 만물이 서로 다른 강도의 빛의 진동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의식 또한 다양한 진동으로 이루어져 있고 모든 물질은 어느 정도는 의식을 지니고 있다.

    염력현상은 모든 물질이 어느정도 의식을 지니고 있는데서 나오는 직접적인 결과이다. 만일 물질이 의식을 지니고 있지 않다면 어떤 요기도 물체 간에 접촉이 이루어지지 않고 마음으로써 물체를 움직일 수 없다.

    빛나고 위대한 신령의 왕국에서 배우게 되는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모든 분리는 미망이며 만물은 궁극적으로 상호연결되어 있으며 일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의식과 현실의 진동이 낮은 차원에 존재하기 때문에 사물을 분리시키며, 더 높고 미묘한 영역에서는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존재의 환희와 사랑과 즐거움, 의식의 강렬함을 경험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은 무엇이든 분리시켜 놓으려는 우리의 버릇이다.

    궁극적으로 나누어지지 않은 전체인 우주에서는 무질서란 존재할 수 없다. 의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만일 우주 속의 단 한 점이라도(무생물도) 완전한 의식이 없다면 온 우주가 마찬가지로 완전히 의식이 없다.

    우주를 절대적인 사실과 불변의 법칙으로 축소시키려는 시도는 오직 왜곡만을 가져오고 진정한 영성은 조직이나 교단(종교)으로부터 나올 수 없으며 오직 내면의 영적 우주로부터만 나올 수 있다.

    물리적 현실의 모든 형체들은 안정되어 있는 빛덩어리다.

    사후의 삶을 흔히 무한 속의 생존이라 말한다.

    사후에 여행하게 되는 곳인 미묘한 차원의 현실

    육체적인 죽음 이후에 생명이 존속할 가능성이 있다.

    우리는 모두 최소한 인간에 관한한 마음은 물질의 산물, 혹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마음은 물질(특히 두뇌)을 통해 표현된다는 점에 동의한다. 양자 量子가 가르쳐 주는 교훈은 물질은 오직 마음과 결부되어서만 구체적이고 분명한 존재성을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일 마음이 물질이 아니라 패턴이라면 마음이 다양한 모습으로 자신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정보가 두뇌 속에 저장된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그리고 이 정보가 변신하여 어떤 다른 영역 속에 나타날 수 있다. 정보를 구성하고 있던 분자(물질)가 파괴되면 그 정보는 어디로 갈까? 물질은 창조될 수도 없고 소멸될 수도 없다. 그리고 아마도 생명이 죽을 때, 생물학적 정보의 흐름은 그 자리에서 그냥 사라져 버릴 수 없으며 그것은 다른 영역 속으로 변환되어야만 할 것이다.

    물질과 영을 분리시키는 것은 추상적인 것이다. 근본은 언제나 하나다.

    마음 속에 감추어진 심층부, 내부세계로의 여행, 빛의 존재들, 그들이 방문했던 배움의 전당이 지식을 위하여 지어진 것이 아니라 지식으로써 지어졌다.

    홀로그램 우주에서는 모든 형체가 환영, 곧 거기에 있는 의식의 상호작용에 의해 빚어진 홀로그램 같은 이미지이며 동시에 그것은 거기에 존재하는 어떤 것에 근거한 환영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외형적 형체를 띠고 나타나지만 그 근원은 언제나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무엇이다.(감추어진 질서)

    우리의 마음이 사후세계 속에 지어내는 홀로그램 같은 이미지가 최소한 거기에 존재하는 어떤 것과 관계가 있다.

    환시들은 집단의식이 만들어 낸 홀로그램적 투영물이다.

    UFO 또한 모종의 홀로그램 같은 현상이다. 그것은 이미지 즉 홀로그램적 투영물의 행동이다.

    상상적 체험이 사후세계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일견 견고해 보이는 우리 물질세계 속으로 엎질러져 흘러들어오고 있다.

    UFO와 기타 비일상적 현상들은 인류의 집단무의식 속의 혼란상의 표현이다.

    1.너무 많은 목격담

    2.외계 생명체 특징 없다.(공기호흡, 지구 바이러스 감염 안됨, 지구중력, 태양의 전자기 방사선 적응, 감정표현, 지구인 언어로 이야기)

    3.외계로부터 온 방문자 행동 안함.(평범한 사람 앞에 착륙, 제트기 공격 안함, 공식적인 접촉 시도 안함, 의학적 검사-그들이 능력으로 그렇게 안해도 충분)

    4.물질로 이루어진 물체로서 행동보기 어렵다.(90, 변신...)

    UFO는 지구 밖의 우주에서 온 것이라는 증거는 없다. 오히려 그것이 시공간 너머의 다른 차원 즉 다중우주 multiverse (universe uni는 단일 單一을 뜻함)로부터 온 것임을 시사하는 증거들이 쌓여있다. 우리를 온통 둘러싸고 있는 이 다중우주에 대한 증거는 지난 수백년 동안 제시되어 왔지만 우리는 그것을 고려해 보기를 완강히 거부해 왔다.

    현실의 미묘한 차원이 너무나 광대하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더 높은 진동의 차원에는 무수한 비육체적 종들이 존재하리라고 믿는 것이 어렵지 않다. UFO 의 출현이 너무나 잦다는 사실은 그것이 외계로부터 온 것일 가능성을 희박하게 하지만(엄청난 성간 거리의 장애물) 무한수의 현실이 우리의 우주와 동일한 공간속에 존재할 수 있는 홀로그램 우주에서는 그것은 더 이상 문제점이 아니다. 오히려 실제로는 이 슈퍼홀로그램이 얼마나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무수한 지성체로 가득차 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가 될 수도 있다.

    순수한 정보의 구름을 도서관이나 학교로 바꾸어 놓듯이 UFO현상의 외양 또한 우리의 마음이 스스로 빚어내고 있는 것인지도 알 수 없다.

    우리 또한 우리의 신념과 신화의 홀로그램적 투영물로 둘러쌓여 있음을 깨닫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우리의 집단적 신념과 정서가 심령적 투영물을 만들어 낼 정도로 고조될 때 실제로 일어나는 일은 어쩌면 이 세계와 그 너머의 세계 사이의 통로가 열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 지성체들이 우리 앞에 나타나 우리와 접촉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는 우리의 잠재적 신념이 그들을 위해 일종의 심령적 출몰구역을 마련해 줄 때 뿐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아원자 입자를 만들어 내며, 따라서 온 우주를 만들어 낸다. 하지만 이들 또한 우리를 만들어 낸다. 각자는 상대를 소위 자신을 비춰보는 우주(거울우주 self-reference cosmology) 속에서 창조해 낸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UFO라는 존재는 인류의 집단 무의식으로부터 비롯된 원형일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지만 동시에 우리 또한 그들의 집단 무의식 속의 원형일 가능성도 있다. 그들이 우리의 심층적 심령작용의 일부인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또한 그들의 심층적 심령작용의 일부인지도 모른다.

    분리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심층의식의 작용이 외부로 흘러넘쳐서 꽃이나 나무 등 객관적 풍경의 일부가 되는 홀로그램 우주에서는 현실이라는 것 자체가 한낱 다수에 의해 공유되는 꿈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현실의 꿈같은 성질들은 존재의 더 높은 차원에서 더욱 확연해지며 모든 차원의 현실들은 통관적이며(, 객관) 꿈과 동등한 존재적 위상을 지니고 있다. 그 꿈은 유일하고 신성한 지성체 즉 신의 꿈, 우리는 유일하고 신성한 지성체에 의해 꿈꾸어지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만물의 집합적 의식에 의해 꿈꾸어지는 것일까? 무의미한 질문이다. 우리는 부분이 전체를 만들어 내는가. 전체가 부분을 만들어 내는가? 부분이 곧 전체이다.

    만물의 집합의식을 신이라고 부르든지 만물의 의식이라고 부르든지 상관없다.

    감추어진 질서(-브라만,  spirit), 펼쳐진 질서()

    ;우주 삼라만상의 탄생지이며 그로부터 무한한 흐름이 나온다. 오직 공만이 실재다. 객관적 세계의 모든 형상은 환영이며 이 두 질서 사이의 끊임없는 흐름으로 인하여 존재한다. 공은 현묘하며 보이지 않으며 겉으로 보이는 성질로부터 자유롭다. 그것은 이음매 없는 전체이므로 말로서 형용할 수가 없다.

    색조차도 말로서 표현할 수가 없는데, 그것 또한 그 속의 의식과 물질과 기타 모든 것이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총체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역설이 있다. 왜냐하면 색은 그 환영과도 같은 성질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무한히 광활한 우주들의 복합체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분리할 수 없는 본질은 늘 존재한다.

    그와같이 짜여있는 우주에서는 만물이 다른 만물 속에 침투해 있으며 다른 만물에 의해서 침투되어 있다. 공이 그렇듯이 색 또한 그렇다. 부분은 곧 전체다.

    우리가 공을 직접적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의 무의식(내부의식)의 지각이 너무나 겹겹이 조건지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 조건화가 마음과 물질 사이의 경계 혹은 주파수 영역을 보지 못하게 막을 뿐 아니라 우리가 몸을 떠나 중음계 between-life state 에 있을 때조차 스스로 몸을 지어내게 만든다.

    보이지 않는 극락세계에서는 마음의 미망이 큰 죄다.

    궁극적 실재를 깨닫기 위해서 온전히 바라보기와 명상이 중요

    선의 중요한 목적은 이 전체성을 인식하는 법을 터득하는 것

    의식은 단지 물질의 미묘한 형태일 뿐만 아니라 물질보다 더 근본적인 것으로서 의식으로부터 난 것이 물질이며 그 반대가 아니다.

    물질우주는 의식의 비추고’, ‘가리는 힘에 의해 존재하게 된다. 또한 의식의 창조물,  2차 현실이기 때문에 그것이 덧없는 미망 迷妄 즉 마야 maya라고 한다.

    현상계는 미망(마야)이며 브라만이고 미망의 창조자이다. 온 우주는 그의 부분들인 뭇 존재들로 채워져 있다.

    만물이 브라만의 불가침한 전체성으로부터 펼쳐져 나오기 때문에 현상계 또한 이음매없는 전체이다. 그리고 분리같은 것은 궁극적으로 존재하지 않음을 깨닫지 못하게 훼방하는 것이 마야다. 마야는 일체인 의식을 분화시켜 대상이 나와 차별되게 보이게 하며 또한 우주 속의 삼라만상으로 분리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게 한다. 그리고 인간의 의식이 가려지거나 수축되어 있는 한 그러한 객관성은 존재한다. 그러나 경험의 궁극적 근저에서는 그러한 분리가 사라진다.

    경험속에서는 경험자와 경험과 경험되는 것이 분화되지 않는 덩어리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모든 피조물은 신의 초월적 측면이 투사된 환영이다. 그러나 그 환영같은 본질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완전한 허무는 아니다. 왜냐하면 실재의 모든 투영물은 거리가 있고 조각나 있어도 반드시 그 원인자의 어떤 본질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태초에 신에 의해 창조가 시작되었다는 것이 환영이다.

    우주 속의 만물은 무한히 상호연결되어 있으며 이 상호연결성을 하나의 그물로 보았다.

    의식은 그 근원을 항상 감추어진 질서 속에 둔다. 마음의 진정한 근원은 초월적 현실 속에 있다. 보통 사람들은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자신의 의식이 자신의 몸속에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주술사들은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안다. 그리고 그것이 그들이 현실의 미묘한 차원을 접촉할 수 있는 이유다.

    물질우주는 보다 심층의 더 근본적인 현실 차원의 산물이며 물질우주는 이 존재의 본원적 측면으로부터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흘러들어간다.

    이끌어내고, 그것을 그곳으로 다시 되돌리고 하는 것, 이것이 이 우주의 생명이다.

    우주 속의 모든 눈에 보이는 (생명, 무생물) 형상들의 배후에는 그것의 근원이 되며 탯줄이 되는 생명소가 존재한다. 궁극적으로 만물은 이 형용할 수 없고 신비한 비인격적 미지로 되돌아간다.

    대우주는 곧 소우주다.

    안은 밖과 같고 작음은 큼과 같다.

    여기있는 것은 다른 곳에도 있다.

    모든 곳이 세계의 중심이다.

    신은 모든 곳에 중심을 둔 원이며 그 원둘레는 어디에도 없다.

    우주 속의 모든 대상은 그 자체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대상들과 연결되어 있다. 사실상 그것은 곧 다른 모든 것들이다.

    우주의 모든 부분들 속에 온 우주가 숨어있다. 또 우주의 모든 곳이 우주의 중심이다.

    우주를 하나의 보석이 다른 보석을 무한히 비추고 있는 다차원 보석그물이다.

    빅뱅이나 심령과학을 사실이라고 믿을만한 강력한 이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그것이 사실임을 증명하지 못했다.

    전인류의 더 높은 의식을 향한 진화적 도약.

    배움의 과정은 끝이 없다.

    우리에게 삶의 목적은 배우는 것이다.

    지구는 처음에는 단지 사념체나 심상의 성질을 띠고 있었다. 그 후 영이 물질 속으로 자신을 밀어 넣음으로써 지구상에 지금 같은 물질성이 발생하게 되었다.

    지구가 꿈의 시대로 돌아갈 날이 올 것이다.

    온 세계가 꿈의 시대였던 때가 있었다.

    인류탄생의 근원이 지구가 아니라 신, 아니면 최소한 순수 영의 비물질적이고 더 천상적인 영역이다.

    영원무한하고 시공간이 없는 의식 그 자체의 대상으로부터 떨어지기로 결정한 하나의 물결이 인간의 의식이 되었다.

    지구는 일종의 놀이터다. 거기서는 육신의 모든 즐거움을 마음껏 누릴 수 있다. 단 자신이 더 높은 공간 차원의 홀로그램 투영물임을 깨닫고 있는 한은 말이다.

    이것은 진화의 불꽃은 우리의 진정한 본향은 다른 곳이며 우리가 원한다면 그곳으로 돌아갈 수도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물질우주는 훨씬 더 큰 배경 속의 작은 한 순간에 지나지 않으며 현실은 본질적으로 비물질적인 방식으로 펼쳐지고 있다.

    우리는 다만 무한 속에서 생존하는 법을 배우고 있는 것이다.

    우리들 각자의 정신은 본질상 만물의 총합과 동등하며 궁극적으로는 우주의 창조원리 그 자체와 동일하다.

    너는 신성한 본질이다.

    나는 신이요. 절대진리요. 참된 존재다.

    아트만 Atman (개인의식)과 브라흐만 Brahman (우주의식)이 하나다.

    물질계는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진짜 현실이라기보다는 절대의식의 창조물이다.

    무수히 많은 개별적 존재와 요소들을 품고 있는 듯 보이는 우주는 본질적으로 엄청나게 크고 상상할 수 없이 복잡한 단 하나의 존재일 뿐이다. 개인의 정신, 우주의 일부분, 창조원리 그 자체 사이에는 어떤 경계도 없기 때문에 우리들 개개인은 궁극적으로 창조의 신성한 근원과 동일하다. 우리는 우주라는 연극 속에서 극작가인 동시에 배우다.

    무수한 매듭을 짓더라도 실은 여전히 한가닥일 뿐

    물질수준의 현상계 전체가 절대의식이 창조한 가상현실이다.

    창조의 원인-신이 신을 바라보고자 원했기 때문, 나는 이 우주전체를 창조했고 만물이 품은 목적은 나 자신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우리가 사는 우주 속의 여러 차원과 현실들은 최고의 예술작업이며, 지고한 예술가의 열정과 영감이 곧 우주를 창조해 낸 원동력이다.

    창조의 동기-풍족함과 풍성함, 궁극적 자족, 창조원리의 완전한 발현이었다면 그와 반대로 결핍과 필요, 욕구를 반영하는 동기들도 있다. 예컨대 우리는 절대의식이 완벽하고 광대한 존재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홀로 외로움을 느낀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다. 이 외로움은 일종의 신성한 갈망, 즉 협력과 소통과 분담에 대한 깊은 동경에서 나타난다. 사랑을 주고받고자 하는 창조원리의 욕구가 창조과정의 가장 큰 원동력이다.

    유형의 물질계를 경험하고자 하는 신성한 근원의 근본적 갈망이 창조를 일으키는 중요한 원동력이다.

      spirit 은 자신의 본질과 반대되고 대조되는 바를 경험해 보고자 하는 깊은 열망을 갖고 있다.

    지루함도 창조의 또 다른 중요한 동기

    인간에게는 신성체험이 대단히 광대하고 놀라운 일이겠지만, 신성으로서는 언제나 끝없이 이어지는 단조로운 상태 뿐이다. 그렇다면 창조란 변화, 활동, 움직임, 극적임, 놀라움을 향한 초월적 갈망을 충족시키려는 거대한 노력이다.

    수많은 차원과 수준 속에서 무수히 존재하는 현상계는 절대의식의 모험과 신성한 여흥에 무한한 놀잇거리를 제공한다. 단적으로 말하면 창조는 분화되지 않은 절대의식이 우주적 권태, 즉 단조로움을 극복하려고 벌이는 행위이다. 신이 우주를 창조한 이유들 중 하나가 권태로움을 극복하기 위해서이다.

    분화되지 않은 태초의 절대의식을 쪼개어 점점 더 많은 수의 파생의식으로 만드는 활동이 창조의 첫 번째 과정이다.

    우주심은 일련의 분활과 분열, 분화를 복잡하게 일으키면서 창조라는 게임을 시작한다. 그 결과로 특정한 형태의 의식과 자기인식 기능을 지닌 독립체들이 무수히 존재하는 현상계가 생겨난다. 분화되지 않은 태초의 우주의식 장 이 분열하고 또 분열함으로써 현상계가 창조되는 것이다. 따라서 창조는 신성의 바깥에서 벌어진 일이 아니고 신성이 스스로 변신을 꾀하면서 이루어진 일이다.

    이렇게 분화되어 나온 의식체들은 점점 더 근원과의 연결성을 잃고 본성을 자각하지 못하게 되는데, 이러한 2차적 분할 또는 우주적 장막에 의한 고립이 창조의 두 번째 과정이다. 의식체들은 서로 완전히 단절되면서 자기만의 정체성을 발달시켜 간다. 이 과정이 막바지에 이르면 무형의 불투과성 장막이 개별 의식체와 분화되기 이전의 절대의식층 사이를 가로막게 된다. 중요한 사실은 이런 분리감이 실제로는 완전한 주관적 환영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여전히 더 깊은 차원에서는 분화되지 않은 일체성이 만물의 배후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의식들은 전체인 동시에 부분이다. 각각의 의식체에 대한 핵심정보는 우주장 속에 두루 전파되어 있다. 역으로 말하면 의식들은 언제라도 창조에 관련된 모든 정보에 접근할 수 있다. 특히 인간이라는 존재는 다양한 초개아적 체험을 통해 이런 관계를 직접 체험해 볼 수 있다.

    한 인간은 우주의 일부분인 동시에 창조의 장 그 자체이다. 이러한 상호연결성은 동물계와 식물계, 무생물계에도 변함없이 적용된다.

    무신론자-자기자신과 숨바꼭질 놀이를 하고 있는 신

    우리들 각자는 고정된 정체성 없이 창조자인 동시에 피조물로서 존재한다.

    육신을 가진 에고(자아)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원형적 세계(신화적 세계)는 인간의 환상과 상상이 꾸며낸 허구가 아니다. 그곳은 매우 자율적이고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그와 동시에 그곳의 사건들은 물질계와 인간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다. 분명히 물질계에 비해 초좌표적 超座標的이며 우리의 일상을 좌우하고 꾸미고 특징 짓는다.

    현상계의 바깥에는 다양한 차원의 세계들이 존재한다.

    우주신이 다중적 분할과 분리, 망각을 복잡하게 조합시킴으로써 가상현실을 창조한다. 절대의식은 본질과의 단절감과 분리감을 느끼는 무수한 개별 존재들 속으로 자신을 투사한다. 그리고 그 존재들은 끝없이 이어지는 역동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엄청나게 풍요로운 현상계를 낳는다.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것들은 분리된 개인이나 견고한 사물이 아니라, 통일된 에너지장의 불가결한 측면들이다.

     

    풍경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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