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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사상과 철학 35 (교재 공개)
    패러다임/철학 2021. 10. 4.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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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생각하기 이해하기 실천하기-

     

    사상과 철학 35

     

    영상 강의 링크 : https://youtu.be/aWeehhYbZw8

     

    441-5

    현대물리학은 견고한 물질로 보이는 것들이 본질적으로는 텅 비어 있다고 말한다. 즉 고밀도의 물체들로 이루어진 이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환영 幻影 maya에 불과하다는 현자들의 주장을 20세기 과학이 뒷받침하는 셈이다.

    현실은 철저하게 불연속적이다.

    현상계는 끊임없이 명멸하며, 순간순간마다 해체와 재생을 되풀이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존재도 태어난 순간부터 죽을 때 까지 연속하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죽고 다시 태어난다.

    자신의 근원에서 떨어져 나온 이는 합일 상태로 되돌아가기를 열망한다.

    시공간속 우주는 의식적 사건들의 통일망 統一網이고 물질계의 경계들은 본질적으로 실체가 없다. 이 우주는 물질적 현실일 뿐만 아니라, 우주 지성의 에너지 또는 우주심의 피조물이다. 우리는 내재하는 신성(신은 곧 자연이다.) 즉 현상계 안에서 또는 현상계 그 자체로서 현현하는 신을 체험할 수 있다. 또한, 우리들 개개인이 창조의 망 전체, 그리고 그 속의 모든 부분과 본질적으로 동등하다는 사실도 발견한다.

    분리된 사물로만 이루어진 듯 보이는 나날의 물질적 현실에서 배후의 통일성과 신성한 본질 발견. 물질계 안의 모든 경계에는 실체가 없고, 우리들 개개인의 본질이 시공간의 전체 장  그리고 우주의 창조원리 그 자체와 동일하다는 사실

    원형계는 물질계와 엮이면서 물질계의 창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원형계는 우리의 일상적 사건들을 짓고 만드는 상위 차원으로서 작용한다. 즉 우주의식의 분화되지 않은 통일장과 물질계를 연결하는 교량으로 볼 수 있다.

    통합체험은 뇌의 이상으로 빚어진 물질세계에 대한 왜곡된 인식이 아니라 현실의 본질에 대한 심오한 통찰을 제공해 준다. 또한 분화되지 않은 우주심과 물질계의 사건들 사이에는 중간단계에 속하는 세계가 존재한다. 즉 우리는 개인적 경계를 초월하여 전일적 全一的 정체성으로 확장됨으로써, 영적 자각으로 가는 여행에서 중요한 이정표를 얻을 수 있다.

    절대의식은 창조, 유지, 파괴의 끝없는 순환 속에서 초월적 상태의 지루함과 단조로움을 극복한다.

    깨달음의 수준은 이전의 무지에 정비례한다. 돌아왔다가 곧 다시 떠나는 매번의 여행을 통해서, 우주심은 다양한 역할을 연기하면서 풍부한 경험을 쌓는다.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것들을 더 많이 구체화해 갈수록, 우주심은 자신에 대한 앎의 깊이를 더해간다.

    우리의 정신은 본질적으로 절대의식과 동일하다.

    우주극의 모든 역할은 궁극적으로 단 하나의 배우, 즉 절대의식이 분한 것이다.

    정신생물학적이고 사회적인 온갖 풍습을 만들어 온 관습과 관례들은 모든 경험적 변주를 체계적으로 탐험하기 위한 우주의식의 계획적인 실험으로 보인다.

    생명은 생명을 딛고 살아간다. 잔인하지만 그것은 신의 뜻이다.

    선과 악의 발생은 우주의 창조 과정과 밀접한 관련있다.

    윤리적 가치와 기준(, )은 창조의 일부분일 뿐, 그 자체로 독립적이거나 절대적인 실체가 아니다.

    악이 우주극 속의 본질적 요소이다.

    창조의 동기의 하나가 스스로를 알고자 하는 창조원리의 욕구이다. 신성이 자신의 내적 잠재력을 탐구하고자 창조를 시작

    우주의 어두운 면이 빛과 완전한 대비를 이루면서 우주극은 훨씬 깊어지고 풍요로워진다. 모든 차원과 세계 속에서 빚어지는 선과 악의 충돌은 매혹적인 이야기들이 탄생하는 재료가 된다.

    신이 자신의 모습을 본떠 인간을 창조했다면 인간의 창조활동과 오락거리에 적용되는 원리가 우주만물도 똑같이 다스리고 있다는 것은 그리 놀랄만한 사실이 아니다.

    절대의식과 공 (현상계 너머에 있으므로 모든 극성을 초월한다.) 이라는 태초의 모체로부터 신성의 어두운 측면과 밝은 측면, 곧 분리된 존재로서의 선과 악이 나타나는 것이 바로 창조의 첫 단계다. 이 두 측면은 정반대 편에 놓여 서로 반목하지만, 둘 다 창조를 위해서는 불가결한 요소이다. 그리고 선과 악은 복잡하게 얽히는 상호작용을 통해 무수한 차원과 세계 속에서 우주극의 역할과 사건들을 끝없이 생산해 낸다.

    악은 이 우주를 창조하는데 불가결한 요소이다.

    분열을 조장하는 우주적 힘이 곧 악이다.

    악의 다양한 모습들은 의식의 분열체로 하여금 서로 분리감을 느끼게 하는 에너지의 표현이다. 또한 악은 우주의 근원, 즉 분화되지 않은 절대의식으로부터 분열체를 멀리 떨어뜨려 놓는다. 분열체들이 근본적 단일성을 회복하거나 근원과의 본질적 합일을 실현하지 못하도록 훼방하는 것이다.

    이 우주의 모든 경계는 변덕스러우며 궁극적으로는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

    인류 역사의 고통은 곧 나의 고통이었다. 희생자는 따로 없었다. 내가 나 자신에게 벌이는 짓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내가 겪는 모든 것, 지금껏 일어난 모든 일은 내게 책임이 있었다. 나는 내가 창조한 것들을 살펴 보았다. 내가 한 짓이다. 내가 하고 있는 짓이다. 내가 이 모든 일을 선택했다. 내가 이 끔직한 세상 전부를 창조하기로 선택했던 것이다.

    추상과 현실을 혼동한 오류(잘못 놓여진 구체성의 오류)-우주를 살아있는 거대한 유기체로 보고 그 유기체를 구성하는 기본단위의 경험들을 현실적 계기 (actual occation- 살아있는 거대한 유기체(우주)의 생명을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경험의 단위) 라고 부름. 그렇다면 우리가 구체적인 물질로 간주하는 것들은 본래 추상적 개념일 뿐이므로, 우리 모두는 추상적 개념을 구체적 물질로 간주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셈이다.

    물질적 존재들의 본질이 텅 비어 있다고 하더라도 각자의 역할에 따른 감정적 괴로움과 육체적 고통은 엄연한 현실이다.

    모든 형상의 본질적 공을 깨닫는 일은 우주 만물에 대한 참된 사랑과 존중에서 조금도 어긋나지 않는다.

    현상계에 대한 깊은 형이상학적 통찰을 제공하는 초월적 체험들은 실제로 모든 살아있는 존재를 경외하게 하고, 삶 속에서 책임감 있고 관계를 맺도록 도와준다. 더 나아가 우리의 연민은 물질적 대상만을 향하지 않는다. 우리는 모든 의식적 존재를 연민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

    현상계의 공성을 깨달음으로써 우리는 인생의 어려운 상황들에 대처할 때 큰 도움을 받는다.

    우주 만물에 대한 깊은 연민과 감탄은 우리가 물질계의 허상을 체험하고 있다는 사실과 조금도 모순되지 않는다.

    삶의 주인공들이 겪는 모든 체험과 현실이

    우리는 우리가 창조를 위해 꼭 필요한 부분이며, 타인을 해하는 것이 곧 자신을 해하는 것이다. 우리의 해로운 행동이 사회적 보복을 면했더라도 나중에 더 심각하고 구체적인 형태로 되돌아 올 수 있다.

    도덕에는 절대적 기준이 없으므로 모든 윤리적 판단은 주어진 정보와 우리의 의식 발달 단계를 반영하는 창조활동이다. 이런 요소들에 변화가 생기면, 우리는 얼마든지 상황을 다르게 바라볼 수 있다. 그렇다고해서 애초의 판단이 틀리게 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 상황 속에서 최선을 다했느냐 하는 점이다.

    악이 창조의 본질적 요소이고 분리된 개체들이 존재하는 모든 차원에는 언제나 빛과 그림자가 공존한다. 악은 우주적 직물 속에 촘촘히 누벼져 있고 경험적 세계가 유지되는 필수조건이기 때문에 결코 패퇴하거나 근절되지 않는다.

    우리는 몸을 가진 자아 또는 이름과 형상(名色)이라고 부르는 것이 자신의 본질이 아니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그저 물질적 원인에 의해서만 결정되지 않는다. 즉 세상사는 원형적 세계의 역학관계가 그대로 반영된 결과물이다.

    원형적 세계에서 작용하는 힘과 존재들은 극명하게 분열되어 있고, 원형적 세계의 신전에는 은혜로운 신과 사악한 신이 함께 공존한다. 선함-중립-악함이라는 원형적 원리들은 우주적 창조게임의 필수요소이자 빠뜨릴 수 없는 부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주에서 악만을 제거하기는 불가능하다. 원형적 세계의 절반을 함부로 밀어내 버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초개아적 세계와 깊이 연관 된 것-탄생, , 죽음-초월성으로 가는 중요한 통로로 우주와의 재합일을 위한 저마다의 독특한 기회를 의미한다.

    성교도 영적 계기로서 의식의 진화를 촉진시킬 수 있다.

    영성-탄생--죽음은 서로 밀접한 관련 있고 공통점도 지니고 있다.

    생물학적 태어남(물질계에 나타남)은 초월적 차원에서 사라짐. 역으로 육체적 사망은 영혼계에서의 탄생

    자신의 의식이 몸의 경계를 초월해서 몸과 독립적으로 기능할 수 있다. 죽음이 궁극적 패배이자 소멸이 아니라 의식의 장엄한 여행이며 다른 존재 상태로의 변화이다.

    자신이 본래 물질이 아니라 의식이다.

    창녀마리아 콤플렉스 the prostitute-Madonna complex : 냉담하고 거리를 두는 어머니에게서 자란 남자는 다른 여성들에게 어머니상을 투시해서 어린 시절에 결핍된 욕구를 충족시키려고 할 수 있다. 이런 경우에 아내 또는 애인은 어머니(성모 마리아)로 여겨지므로 성적 매력이 느껴지지 않는다. 남자는 성욕을 더러운 여자의 전유물로 생각함으로써, 사랑하는 여자와는 성적인 만족을 얻을 수 없고 성적인 만족을 주는 여자는 사랑을 할 수 없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관찰된 사실들을 일관되게 설명해 주는 논리적 틀과 이론을 찾아야 한다. 이것은 과학연구의 과정과도 본질적으로 같다. 현실과 이론을 혼동하지 않는 것은 현대 과학철학의 기본원칙이다.

    우리는 영적 체험을 하는 인간이 아니라 인간이 된 체험을 하는 영적 존재이다.

    우리의 진짜 정체성이 개별 자아가 아니라 우주적 자아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순수한 형태의 절대의식에는 없는 다수성, 양극성, 불투명함, 구체성, 일시성 등의 많은 특징이 있다. 예술적, 과학적으로 완벽하게 만들어진 가상 물질계의 이런 특징들은 우주심에서 분리된 의식체가 진짜 현실로 오인할 만큼 너무나 감쪽같다.

    물질계라는 환영을 창조하는데 사용된 중요한 책략으로는 하찮음과 추함을 들 수 있다. 또한 약육강식이라는 생명의 본질과 악의 실체는 평범한 사람들로 하여금 깨달음이 거의 불가능하게 만들어 놓는다. 물질과학이 구축한 세계관도 험난한 장애물로 작용한다.

    창조의 절대적 완벽성(상대적, 역의 창조)이야말로 우리를 자신을 알지 못하게 하는 금기 속에 가두는 원인

    우리가 분리된 개체 생명이라는 물질계의 환영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것은 창조의 완벽함 때문만이 아니라 신성한 근원과 재결합하는 길에는 고난과 위험과 시련이 가득하다. 자기기만의 함정에서 벗어나 근원과의 재합일로 향하는 샛길들은 대부분 교묘히 감춰져 있고 심각한 어려움들로 가로막혀 있다. 이것은 우주가 안정과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 절대로 필요한 일이다. 영적인 행로의 이런 함정과 굴곡들은 자신을 알지 못하게 하는 금기의 중요한 부분이다.

    다양한 반대 세력들, 장애물들, 내적인 공포, 포기의 결핍, 외부세계의 온갖 방해와 간섭들, 종교의 반대, 과학 만능주의

    에고의 한계를 극복하고 영적 성숙을 이루기 전에는 초자연적인 힘을 멋대로 사용하지 말라.

    창조의 모든 수준에서 우주적 게임에 참여하는 의식체들은 자신의 진정한 정체성을 잊은 채로 분리된 개성을 취하고 다른 주인공들을 이질적 존재로 인식하고 대해야 한다. 창조과정은 서로 다른 특징이 있는 많은 영역들을 낳고, 각각의 영역들은 아름다운 모험을 할 독특한 기회를 의식에게 제공한다.

    우리는 본래 제약이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자유결정에 의해 우주적 게임에 참여하고 그 완벽성의 덫에 스스로 빠져든 것이다.

    영적지성 spritual inteligence 에 의해 우리 삶의 수준이 결정된다. 영적지성은 자신의 본성과 현실에 대한 심오한 형이상학적 철학적 이해를 일상 속에서 발현해 내는 능력이다.

    우리 삶에 영향 미치는 탄생과 죽음의 순환을 영속시키는 세가지 독 또는 힘

    돼지-우리의 본성과 현실에 대한 무지

    -분노와 공격성

    -집착으로 이끄는 욕망과 갈애

    1.무지(avidya 無明):물질계의 불충분한 정보가 아니라 우리 자신과 현실의 본성에 대한 근본적 오해와 혼동이다. 이런 무지를 해소할 수 있는 것은 초월적 지혜(般若波羅密) 뿐이다. 즉 내적 탐구

    2.공격성의 뿌리:동물들은 배가 고프거나, 영역을 지키거나, 번식을 위해 경쟁할 때만 공격성을 드러낸다. 동물왕국에서는 악질적 공격성이라고 불렀던 인간의 폭력성을 찾아볼 수 없다.

    .영유아기의 정신적 충격과 욕구불만, 애정결핍, 학대

    .생물학적 탄생의 정신적 충격-출산시 겪는 위협, 고통, 질식, 불안-세상에 대한 근본적 불신과 적개심

    .초개아적 영역-정신적 심층에서 작용하는 어두운 원형적 힘들-계층발생적으로 물려받은 동물적 기반과 전생의 기억들

    공격성은 우리의 본성이 발현된 결과가 아니라 우리를 진정한 본성으로부터 분리시키는 장막으로 작용하고 있을 뿐이다.

    본질적, 본능적 힘들이 쳐놓은 어두운 장막을 뚫고 나가면, 우리는 우리 내면의 가장 깊은 알맹이가 야수성이 아니라 신성임을 깨닫는다.

    그대의 가장 깊은 본성은 신성과 동일하다. 이처럼 일체지향적 상태를 연구함으로써 진지한 내적 탐구는 공격성과 파괴성향을 눈에 띠게 줄여주고 관용과 연민을 길러준다. 또한 생명에 대한 경외심, 다른 종 에 대한 공감, 생태적 민감성도 크게 높아진다.

    3.끝없는 탐욕과 심령적 원천

    탐욕의 원인은 수유기에 만족되지 못한 구순기 口脣期 방출

    돈에 대한 지나친 열중은 억압된 항문 충동에서 기인(항문기 肛門期)

    과격한 성욕은 남근 고착이 반영된 것이다.

    권력욕은 열등감과 무능감에 대한 보상이다.

    출산시에 겪었던 몹시 불편하고 두려운 상황에 대한 기억은 우리 안에 그대로 남아 쉬지 않고 활동하며 우리의 삶에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즉 우리의 모든 행위와 삶의 전략들은 탄생의 불완전한 게슈탈트(통합적 형태)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려는 뒤늦은 노력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런 정신적 충격은 정신의 표면으로 부상하면서 현 상황에 대한 불만을 일으킨다.(용모, 자원, 경제력, 낮은 권력, 지위, 불평거리, , 명예, 지식 기술의 부족)

    우리는 지금보다 더 나은 상황으로 탈출하고 싶은 욕구에 휩쌓인다.

    우리는 부족함과 단점이 바로 잡힌 만족스러운 미래상을 상상해냄으로써 이런 실존적 불안에 반응한다. 이 매커니즘을 미래를 향한 자기투사라고 부른다. 이런 전략을 일관되게 실천함으로써 우리는 다람쥐 쳇바퀴 또는 과당경쟁이라고 불리는 생활습관에 길들여진다. 이것은 평생 우리를 지배한다.

    미래를 향한 자기투사로 실존적 불만을 메꾸는 것은 패자의 전략일 뿐이다. 그것은 우리의 욕구에 대한 전적인 몰이해와 잘못된 인식에 근거하고 있다. 즉 근본적으로 잘못된 생존전략을 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오직 목표가 너무 작거나 목표설정이 잘못되었다는 식으로 결핍의 원인을 돌려 버린다. 이 전략은 삶의 본질에서 동떨어져있으므로 어떤 상황에서든 남용되기 십상이다. 실제로 우리 삶의 질은 외적인 환경보다는 의식상태와 훨씬 더 크게 관련되어 있다.

    외적 목표를 추구함으로써 만족을 얻고자 하는 그릇된 노력은 오히려 모순된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가 많다.

    사다리 꼭대기에 올라가서야 그 사다리가 잘못된 벽에 서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출산 전후의 공포, 고통을 체험함으로써 충격에서 벗어나 우리 미래의 성취에 대한 집착을 크게 줄이고 현재에서 더 큰 만족을 찾을 수 있다.

    이생에는 영혼의 목마름을 풀어줄 만큼 커다란 기쁨이나 즐거움이 존재하지 않기에, 완벽하고자 하는 욕망은 언제나 모든 즐거움을 불완전한 것으로 보이게 한다.

    만족할 줄 모르는 탐욕의 깊숙한 초개아적 뿌리는 우주아 宇宙我 the Atman project

    우리의 본성이 신성

    우리 존재의 본질-하느님, God, 우주그리스도, 케테르, 알라, 부처, 브라흐만,   ...

    인간정신의 모든 발달 수준에 작용하는 가장 깊은 동력은 신성의 체험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열망이다. 하지만 우리는 육신이라는 억압적 굴레 탓에 신 안에서의, 그리고 신으로서의 완전한 영적 자유를 체험하지 못한다.

    우리가 신성한 존재로서 잠재력을 완전히 실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내적 체험 뿐이다. 그러려면 분리된 자아의 죽음과 초월, 즉 살가죽에 쌓인 에고라는 정체성이 소멸되어야만 한다. 하지만 소멸에 대한 두려움과 에고에 대한 집착 때문에 우리는 우주아 Atman의 대역이나 대체물로 만족해야만 한다. 그리고 이 대체물(자궁, 젖무덤, 음식, 섹스, , 명성, , 외모, 지식...)은 삶의 단계마다 특정한 대상으로 바꾸어 간다. 그것들은 우리의 삶 속에서 툭하면 변덕을 부린다.

    우리의 깊숙한 곳에서는 자신의 참된 본성이 우주창조의 통합과 창조원리 그 자체임을 느끼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리 좋고 많은 대체물을 획득하더라도 항상 불만스러운 상태로 남게 되는 것이다. 만족할 줄 모르는 탐욕을 궁극적으로 해결하는 길은 무수한 종류와 범위의 세속적인 추구가 아니라 내면 세계 속에서 발견된다.

    비일상적 의식상태에서의 신성 체험만이 우리의 가장 깊숙한 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것이다.

     

    풍경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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