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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영상, 미학론 51 (교재 공개)
    패러다임/예술 2021. 3. 25. 0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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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생각하기 이해하기 실천하기-

     

    영상, 미학론 51

     

    398. 우리의 문명에서 아직 고갈되지 않고 확장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 유일한 미개척지는 에테르 자체, 즉 미디어(datasphere 데이터스피어, 미디어스페이스 mediaspace)이다.

    사랑, 노동, 지식은 인간 존재의 원천이다. 성의 억압은 심리적으로는 정신질환을 유발하며, 사회적으로는 비민주주의적 인간을 양산한다.

    우리는 잘 알려진 진부한 진리의 반복보다는, 아직 발견되지 않은 진리의 파편을 선호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파편은 급진적인 연구에 유익한 원료로 쓰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근본적인 두 가지의 심리적 기본 충동은, 상호관계 속에서의 충족을 목표로 한다. 즉 영양공급(자기보존, )의 충동과 성(종족보존, 판타지) 충동이 바로 그것들이다. 만약 사회가 개개인으로 하여금 생식기관을 만족시키고 승화시키도록 기능하지 못한다면, 인간의 심리기관은 엄한 교육의 영향으로 왜곡되어버린다. 예컨대 그것은 이미 주어진 성 충족의 가능성마저 누릴 수 없게 만든다. 또한 성의 궁핍함 내지 빈한함으로 인하여 여러 가지 불쾌한 자극들이 너무 많이 유입된다.(일부일처제의 맹점, 결혼제도, 성 억압, 성 부정, 가부장적 권위)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심리기관은 어떻게 하든지 간에 이러한 불쾌한 자극을 떨쳐버리려고 부수적인 매커니즘을 형성시킨다. 그리하여 그 결과로서 나타나는 것들은 노이로제, 성도착증, 성격의 병리학적 변화, 비정상적인 현상으로 나타나는 성생활 그리고 노동에 대한 방해 작용 등이다. 성적 만족을 누리는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도 더욱더 훌륭하게 일을 수행한다. 반면에 성이 극도로 억압되면, 노동능력은 현저할 정도로 감소된다. 성 생활에서의 윤리에 입각한 강제적 규범은 성의 억압을 초래하고, 계층적 차이를 심화한다. ()을 찬양하는 사회 조직에서는 노이로제, 성도착증이 존재하지 않는다. 즉 노이로제는 인간의 성생활이 방해당하고 있기 때문에 출현하는 병이다. 성 에너지란 인간의 감정이나 사고의 구조를 형성시키는 물리적 조직체의 생물학적으로 축조된 에너지이다. 성은 생리학적인 미주신경迷走神經의 기능과 관계되는데, 창조적 삶의 에너지나 다름없다. 성 에너지를 억압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기본적 삶의 기능을 방해하도록 작용한다. 성 에너지의 억압이 특정한 사회에서 어떻게 사회적으로 표현되고 있는가? 그것은 다름아니라 목표에 상응하지 않는 (비합리적인) 행동, 광기, 신비주의 그리고 자발적인 전쟁 참여 행동 등이다. 그러므로 성의 정치학은 다음과 같은 물음으로 출발해야 할 것이다. 즉 과연 어떠한 이유에서 인간의 성생활이 억압당하고 있는가? 인간의 제반 욕망은 사회에 의해서 형성되고, 변화되며, 특히 억압당하기도 한다. 인간의 심리구조도 이런 식으로 생겨난다. 이 구조는 태어날 때부터 타고나는 게 아니라, 욕망과 사회적 요청 사이의 끊임없는 투쟁이 이어지는 동안에 사회의 모든 개별 구성원에게서 발전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천성적으로 타고난 충동의 구조는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이러한 충동의 구조를 삶의 초창기에 획득하게 된다. 천성적으로 타고난 것이라곤 다만 충동적 에너지의 척도가 얼마나 크냐 작냐 하는 사항일 뿐이다. 성적 억압의 영향을 통하여 생겨나는 것은 신하들이 행하는 이른바 예속적 근성이다.

    모든 문학작품, 영화, 연극, 시의 99%가 성적 욕구의 산물이나 다름없다. 인간의 사고는 권위주의적 사회에서는 경제적, 정치적 권력자의 이해와 관심사에 일치한다. 반면에 민주주의적으로 노동이 영위되는 사회에서는, 그곳에서 생산된 사회적 이데올로기는 모든 사회 구성원의 삶에 대한 관심사와 반드시 일치할 것이다.

    인간 영혼의 구조가 본질적으로 성의 구조이며, 문화의 과정이 대체로 성적 욕망의 과정이다. 성적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태도는 삶을 보존할 수 있는 기본적 토대로 작용하고 있다. 복된 삶의 핵심은 성생활로 얻는 행복이다. 사람들은 성의 일치감이라든가 만족이 지속되는 만큼의 기간 동안 일부일처제를 고수하게 된다.

    융이 구분한 에로스의 4단계

    1.성적인 에로스와 아기를 낳는 생산성을 상징하는 이브의 단계

    2.미적이고 낭만적인 단계인 헬레나단계

    3.종교적 헌신으로 드높여진 에로스, 마리아 단계

    4.모든 것을 지혜로 관조하는 소피아 단계

     

    399. 휴머니즘의 기능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야만성을 잠재우고 길들이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인간을 유전학적으로 선별하고 사육할 수 있게 만든 생명공학은 포스트휴머니즘의 도래를 의미한다.

    절대적인 가치는 아무것도 없다. 시대는 냉소적이고,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가치는 단명한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모든 것에 냉소적이 된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장점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기 위하여 언어를 가지고 있다.

    인간은 동물로서의 자신의 실패를 통해 환경 세계로부터 분리되고 자신이 거주할 수 있는 집을 짓게 되며, 이 집을 통해 인간을 길들이기 시작한다. 인간화의 역사는 근본적으로 길들이기의 사회사이다. 생명공학을 인간에게 적용하는 인간기술은 인간을 길들이는 또 다른 수단이다. 플라톤 이후 대부분의 철학자들이 대중을 경멸해 왔다. 대중은 니체가 말하는 원한감정, 즉 강자를 도덕적으로 경멸함으로써 약자가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평등 지상주의를 구현한 것이다. 대중은 모든 수직적 차이를 수평적 차이로 전환시키고, 이러한 수평적 차이는 결국 타자에 대한 무관심으로 이어진다. 인간은 더 이상 자신들의 언어에 의해서만 양육되도록 하지 않고, 자신들의 주거에 의해 길들여지게 되었다. 인간이 정주定住하게 됨으로써 동시에 인간과 동물 사이의 관계 전체가 새로운 징후를 띠게 되었다. 집을 통한 인간의 길들이기와 함께 동시에 가축들에 관한 서사시가 시작된다. 그렇지만 가축들을 인간의 집에 묶는 것은 단순히 길들이기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훈육과 사육의 문제이다. 창문들은 둘러막은 벽들의 빈터(전쟁터, 결정과 선택의 장소)일 수 있다. 그 벽들 뒤에서 인간은 이론의 능력을 가진 존재가 되었다. 운동과 사색이 융합된 산보도 역시 집을 좋아하는 성향에서 파생된 산물이다. 들길과 숲길에서 이루어지는 악명 높은 사유의 산책들도 등 뒤에 집을 지니고 있는 사람의 전형적 운동들이다. 휴머니스트는 인간이 스스로를 규정하도록 만들고나선 그에게 길들이고, 훈련시키고, 교육시키는 수단들을 적용한다.

    너의 마음에 진실한 것이 모든 사람들에게 진실하다고 믿는 것, 그것이 창조 정신이다. 너의 감춰진 확신을 말해라. 그러면 그것은 보편적이 될 것이다. 가장 내면적인 것은 제 때에 가장 외면적인 것이 되고 우리의 최초 사상은 최후의 심판을 알리는 나팔 소리를 통해 우리에게 되돌아 올 것이기 때문이다. 위대한 예술작품은 이것 외에는 다른 감동적인 교훈을 가지고 있지 않다. 온 목소리가 다른 쪽을 지지한다고 외쳐대도, 위대한 예술작품은 기분 좋은 완고함으로 우리의 즉흥적인 인상에 머물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그렇지 않으면 낯선 이가 내일, 우리가 내내 생각했고 느꼈던 바로 그것을 말할 것이며, 우리는 수치스럽게 우리 자신의 의견을 다른 사람에게 받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신은 자신의 작품을 겁쟁이가 발표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너 자신을 믿어라. 사회는 곳곳에서 그 구성원 개개인의 인간성에 대항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 사회는 구성원이 각각의 주주에게 일용할 빵을 보장하기 위해 먹는 사람의 자유와 문화를 포기하는 데 찬성표를 던지는 주식회사다. 가장 원하는 미덕은 체제 순응주의이다. 자기 신뢰는 이 체제 순응주의에게는 공포다. 체제 순응주의는 현실과 창조자를 사랑하지 않고 이름과 관습을 사랑한다. 인간이 되려는 사람은 비체제 순응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불멸의 승리를 얻으려는 사람은 호의의 이름으로 방해를 받아서는 안 되며, 그것이 호의인지를 간파해야 한다. 결국에는 너 자신의 정신의 완전무결함보다 더 성스러운 것은 없다. 너 자신에 대한 의무로부터 너를 풀어주어라. 그러면 너는 세상에서 투표권을 가질 것이다. 너의 호의에는 어딘가 모서리가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호의가 아니다. 증오의 가르침은, 사랑의 가르침이 애걸하고 비탄할 경우, 그것을 보상하는 것으로 설파되어야 한다. 위대한 것은 오해받는다는 것이다. 너의 체제 순응주의는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는다. 개인으로 행동하고, 네가 이미 개인으로 했던 것은 오늘 너를 정당화 할 것이다. 세기는 영혼의 건강과 권위에 대적하는 반란자들이다. 역사가 나의 존재와 생성의 즐거운 변호나 비유 이상이 되어야 한다면, 역사는 뻔뻔함이고 모욕이다.

    예술작품은 현재에 창조될 수 없다. 예술작품은 오직 혁명적 활동이라는 수단으로, 파괴하고 분쇄할 가치가 있는 모든 것을 파괴하고 분쇄한 뒤에야 만들어 낼 수 있다. 진정한 발견의 항해는 새로운 땅을 찾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갖는 것이다.

    위대한 작품을 창조해 내는 유일한 길은 위대한 삶인 것이다. 그것은 적어도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본의 비인간성, 부패와 타락에 대한 전면전에 자신의 몸도 참가하는 길밖에 없다. 인간만사의 아름다움은 형식과 내용의 통일에 있다. 그것은 서로 상호 침투한다. 살의 본질과 과정을 올바르게 파악(올바른 세계관과 역사관)하는 작가만이 올바른(위대한) 작품을 창작할 수 있다. 올바른 예술형식은 기술의 습득이 아니라 올바른 예술관(내적인 법칙-내용과 형식의 통일)에 의해서 결정된다. 내용 없는 형식은 공허하고, 형식 없는 내용은 산만하다. 형식의 아름다움이란 결국 내용과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움이다. 내용이 빈약한 시는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예술작품 속에서 내용은 그 특성에 알맞은 형식을 선택하며 그 관계를 규정한다. 즉 내용과 형식이 다 같이 중요하지만,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오히려 내용이다. 그러나 형식주의자들은 사회적인 내용, 곧 정치, 경제, 역사와 관계되는 내용들을 두려워하고 기피하려 하기 때문에 내용을 소홀히 취급한다. 이들은 사회의 모순 앞에 눈을 감으면서 기존 사회를 간접적으로 옹호하려는 의도를 뒤에 숨기고 있다. 예술작품에서 형식의 중요성을 과대평가하고 시의 본질을 언어의 선택과 정리에서 찾으려 하는 형식주의는 심미주의와 함께 순수예술의 중요한 두 주류를 형성한다. 김남주는 형식주의를 포함한 순수예술을 단호하게 거부한다. 시는 혁명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준비하는 문학적 수단이다. 순수예술이라는 개념은 역사적으로 발생한 범주에 속하며 원래부터 존재한 것이 아니다. 순수예술 혹은 예술의 자율성은 역사적으로 자본주의 사회가 정착되면서 나타난 현상이었다. 즉 고대나 중세에서 순수예술이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스에서는 예술이 인간 도야의 한 수단이었고, 중세에는 신의 섭리를 더 잘 표현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봉건제도가 무너지고 근세가 시작되면서 시민계급은 개인의 해방을 기치로 내세웠다. 순수예술은 초기 단계에서 두 가지 측면을 지녔다. 하나는 중세의 종교적인 속박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고 다른 하나는 자본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노력이었다. 자본주의가 정착되면서 황금과 화폐가 보이지 않는 손으로 등장하여 모든 인간관계를 규제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예술을 상품화하고 예술가를 자본가의 심부름꾼으로 만들면서 예술의 고유한 특성을 짓밟으려했다. 이러한 위험을 벗어나려 한 것이 순수예술 운동의 커다란 동기였다. 예술을 자본가의 그늘 아래서 타락시키지 않으려는 선의에도 불구하고 이 운동은 처음부터 환상적이었다. 자본주의 아래서 예술가가 자율성을 유지할 수 있다는 이념 자체가 그러하였다. 예술의 자율성 속으로 도피할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모순과 투쟁함으로써 예술을 구조하려 했어야 했다.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빈부의 차가 늘어나고 자본가에 의한 노동자들의 착취가 심화됨에 따라 인간해방을 부르짖는 노동운동이 일어나고 그것을 뒷받침해 주는 과학적 유물론이 체계화되어 가자 부르조아 지식인들과 예술가들은 스스로 이 기득권을 방어해야 될 처지에 직면하였다. 이들은 종교, 관념론 철학, 순수예술을 무기로 사용하였다. 처음에 어느 정도 긍정적인 의미를 지녔던 예술의 자율성 운동이 이제 반동적인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자본의 덕분으로 주관적인 자유만이라도 향유할 수 있다고 생각한 부르조아 예술가들은 예술을 정치, 사회문제로부터 분리시키면서 자본주의를 간접적으로 옹호하기 시작하였다. 심미주의도 순수예술의 한 주류를 이룬다. 많은 사람들이 서정시를 가장 아름다운 본래의 시로 착각하고 있다. 그러나 김남주는 서정시를 거부한다.(물론 모든 서정성을 배제한 것은 아니다.) 구체적인 삶의 진실이 담겨 있지 않는 서정성이란 개인 감정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절대적으로 순수예술이란 있을 수 없다. 인간은 사회를 떠나 존재할 수 없다. 어떠한 작품도 작가의 사생활과 무관하지 않다. ‘순수란 많은 경우 스스로의 정체를 숨기기 위한 은폐이고 위장일 뿐이다. 학문과 철학과 예술의 정당성은 항상 인간해방이라는 인류의 과제에 비추어 평가되어야 한다.(사실주의) 소위 순수예술을 표방하는 예술지상주의(형식주의, 심미주의, 예술을 위한 예술)들은 내면의 자유 운운하면서 현실로부터 도피를 미화하는데, 그것은 자기의 기만일 수밖에 없다. 사실주의(리얼리즘)는 낭만주의와 상반되며 자연주의와 구분된다. 낭만주의가 주로 환상적인 꿈과 공상의 세계를 그린다면 사실주의는 구체적인 현실의 세계를 그린다. 문예사조상 고전주의에 대한 반발로 낭만주의가 나타났고, 낭만주의에 대한 반발로 사실주의가 나타났으며, 사실주의의 잘못된 극단화가 자연주의로 흘러갔다. 물론 사실주의적인 예술기법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고 특히 과학적인 사고방식이 주도하던 근세에 그것이 두드러졌다. 자연주의 예술가들은 사회를 기계적인 인과법칙 속에서 조명한다. 여기서는 예술의 목적이 현실의 기계적인 재현으로, 창조적인 주관이 기계적인 완숙으로 환원된다. 자연주의가 극치에 달하면 예술의 인식기능과 가치평가 기능이 소멸되고 만다. 자연주의가 발생하게 된 사회적 배경에는 자본주의의 발전에 따르는 개인의 무력감이 놓여 있다. 거대한 자본 속으로 인간의 창조력이 흡수되는 사회에서 개인의 독창성은 사라진다. 사회를 개조하거나 변혁할 수 있는 힘을 상실한 채 예술가는 주어진 상황을 객관적으로 묘사하는 데 만족한다. 이들은 일상성, 야만성, 범죄성, 천박성 등을 인간의 어쩔 수 없는 운명처럼 묘사한다. 사회나 인간의 본질 대신에 현상을 미시적으로 묘사한다. 예컨대 광주민중항쟁을 소재로 한 시나 소설을 쓰면서 자본주의의 모순, 노동해방, 미제국주의의 정체와 같은 본질 문제를 제쳐놓고 계엄군의 야만성, 시민군의 용감성, 시민들의 단결, 사태의 과정 등을 자세하게 묘사하는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시가 자본주의적 분업의 소산인 인간의 비인간화, 날이 갈수록 야수화되는 인간의 짐승화, 민중 생활의 자질구례하고, 구차스럽고, 미분화된 삶을 자연주의적 수법 내지는 몽따쥬 수법으로 나열한다든지 깁고 있는 데 이 누더기 같은 시에 관해서도 반성해야 한다. 문학은 구체적인 현실의 직접적 감성적 반영이고, 그러한 현실의 예술적 반영의 확대재생산 외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구체적이라는 개념을 잘못 이해하고 현상 하나 하나를 개별적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시인들이 현상의 세세함의 끝이 없는 지루한 나열주의에 떨어지고 있다. 그 결과 시인들이 시대의 중대한 문제와 그 본질적인 여러 특징들을 전형적인 상황에서 동적이고 응축된 형태로 그리지 못하고 자꾸만 피상적인 현상들만을 너저분하고 지루하게 길게 늘어놓는 데 그치고 있다. 사회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기 위해서 예술가는 건전한 역사의식을 갖고 있어야 한다. 즉 역사의식이 부족한 예술가는 결코 사회발전의 본질을 파악할 수 없고 사실주의적 작품도 창조할 수 없다. 엥겔스는 사실주의의 불가결한 요소로서 전형성, 객관성, 진실성을 들고 있는 데 이 가운데서도 특히 중요한 것이 전형성이다. 전형성은 구체성이나 총체성이라는 말과 연관된다. 주인공은 고립되어 있는 우연한 개인이 아니라 모든 사회 구성원과 연관되는 전형적 인물이 되어야 한다고 말할 때 전형성의 의미가 다소 분명하게 드러난다. 시인은 독자인 대중에게 복잡하게 보이기만 하는 사회 현상이나 계급 관계를 선명하게 부각시켜 줌으로써 자기 시의 이해를 돕는 것이지, 사회현상을 무분별하게 자연주의적으로 나열한다거나 계급에 대한 애매한 태도를 보임으로써 자기 시의 이해를 돕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현실을 구체적으로 묘사한다는 것의 의미가 현상의 다양성을 모조리 그린다는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구체적이란 말의 철학적 개념은 사물 하나하나를 끊임없이 나열한다거나 사물의 제 측면을 모조리 드러낸다는 것이 아니다. 구체성이란 다양성의 통일이고, 어떤 현상이나 사물의 주요한 측면이나 경향을 일컫는 말이다. 즉 전형성의 동의어라고도 할 수 있다. 엥겔스의 전형적인 상황에서의 전형적인 성격이란 말은 이런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자본주의가 정착되면서 부르조아 예술가들은 대부분 자본주의를 직접, 간접으로 옹호하는 예술을 발전시켰지만 그 중 일부는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러한 예술 방향을 비판적 사실주의라고 말한다. 비판적 사실주의는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전된 19세기에 나타난 시민계급의 사실주의를 의미한다. 이 시기에 사실주의는 봉건 잔재 뿐 만 아니라 자본주의가 만들어 놓은 인간의 비참함에 대해서도 비판의 화살을 돌린다. 비슷한 시기에 나타난 낭만주의도 사회비판에 가세했지만 낭만주의가 중세나 이상의 세계로 되돌아가려는 경향을 보인 반면, 비판적 사실주의는 이상세계를 만들어내지 않는다. 즉 이들은 작가의 주관적이고 자의적인 인간상이나 사회상을 배제하고 현실에 눈을 돌린다. 이들은 자본주의 사회 구조에서 나타나는 이기주의, 기생주의, 이익추구, 소외, 착취 등의 문제를 날카롭게 다루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명확한 역사의식과 사회변혁에 대한 확고한 목표가 없었다.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19세기의 사실주의에서 처음으로 사실주의의 원리와 방법이 완숙하게 발전되었다. 주인공을 영웅처럼 이상화하거나 도덕화하는 대신 심리적으로 묘사하였고 무엇보다도 개인과 사회 사이의 연관성을 자세하게 서술하였다. 이들은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개선할 수 있다는 낙관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 비판적 사실주의의 전통을 계승하여 여기에 과학적 세계관을 융합시킨 것이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김남주의 문학에는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의 경향이 짙게 깔려 있다. 시는 압축과 긴장을 그 생명으로 한다. 시는 긴 분노도 아니고 느슨한 산문적 이야기도 아니다. 현실의 변혁을 위한 무기로써 시는 촌철살인의 풍자이어야 하고 백병전의 단도이며 치고 달리는 게릴라전이오, 가장 길어야 옛 조상들이 사용했던 청송녹죽 죽창의 길이다. 압축과 긴장은 시의 3가지 특성, 곧 대중성, 계급성, 전투성이 가장 잘 실현될 수 있는 형식이다.

    올바른 역사의식은 국수주의적인 혹은 편협한 민족주의적인 투쟁 의식과 거리가 멀다. 또한 국가나 민족을 배제하는 추상적인 인류애의 정신 속에서도 올바른 역사의식은 자라날 수 없다. 올바른 역사의식을 갖기 위해서는 역사의 발전법칙, 역사를 움직여 가는 주체와 동인에 대한 보편적이고 과학적인 인식이 필요하다. 관념론적인 역사관에 의하면 역사는 우연한 사건들의 복합체에 불과하며 역사의 발전법칙은 있을 수 없다. 유물론적인 역사관은 그와 달리 이러한 발전법칙을 인정한다. 자연에는 물질의 필연적인 법칙이 존재하며, 인간은 자연의 법칙에 따라 발생하였고 인간이 만들어 가는 사회도 이러한 자연법칙을 벗어나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유물론자들도 자연과 인간사회의 발전법칙이 동일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역사의 발전이 기계적인 인과법칙에 따라서 이루어지는 것만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하여 우연에 의해서 지배된다거나 자연을 초월한 어떤 신적인 존재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유물론적인 역사관은 현상과 본질의 연관성을 염두에 두면서 자연과 인간과 사회를 과학적으로 분석한다. 그리하여 인간의 생명은 물질에서 발생되었다는 것, 인간에게서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이 의, , 주라는 것, 의식주가 해결되는 기초 위에서 모든 다른 정신적인 활동이 수행된다는 것, 그러므로 인간의 본질은 생산을 해 가는 노동에 있다는 것, 등을 확인한다. 인간의 본질이 노동에 있으며 생산 활동이 사회의 기저가 된다면 역사의 발전법칙이나 그 동인도 생산 관계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인간이 어떤 방식으로 생산을 하며 생산물을 어떻게 분배하느냐에 따라서 사회의 구조가 형성되고 역사가 발전한다. 원시사회-고대사회-중세사회-근대사회-현대사회로 발전해온 인류의 역사를 그 현상에서뿐만 아니라 본질에서 파악한다면 결국 어떤 사람들이 생산수단을 소유했으며 생산방법이 어떻게 발전하였고 거기서 나오는 생산물의 분배를 둘러싸고 어떤 투쟁이 이루어졌는가의 문제가 고찰의 핵심으로 들어서지 않으면 안 된다.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마찰이 사회형태를 뒤바꾸는 계기가 된다는 것이 유물론적 역사관의 기본명제이다. 관념론자들은 역사의 발전법칙 자체를 부정하든가, 그 법칙을 자연을 초월한 어떤 절대자의 의지에서 찾는다. 또한 역사발전의 동인을 생산활동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정신활동에서 찾는다. 정치, 종교, 철학, 예술 등의 이념적인 영역이 역사발전을 결정하고 주도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유물론자들도 이념적인 영역이 역사발전에 끼치는 중요성을 간과하지 않는다. 그러나 유물론자들은 양 영역의 연관성을 항상 염두에 두고 결정적인 요인을 물질적인 영역에서 찾는 반면 관념론자들은 양 영역이 독립되어 있는 것처럼 생각하면서 결정적인 요인을 정신적인 영역에서 찾는다. 관념론자들과 유물론자들의 역사파악은 물질과 정신의 존재론적 파악과 긴밀하게 연관된다. 진정한 유물론자들은 인간의 정신이 물질에 기계적으로 종속되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또한 인간의 자유를 경제적인 결정성에 종속시키지 않는다. 자유와 필연의 관계를 변증법적으로 이해하려는 데 유물론의 특성이 있다. 자연 속에는 객관적인 법칙이 존재한다. 물론 이러한 법칙도 절대적이고 기계적인 필연성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변증법적인 도약이 항상 수반되기 때문이다. 자연법칙을 파악하지 못하는 인간은 자연의 노예처럼 행동할 수밖에 없다. 불가사의한 자연 앞에 머리를 숙이며 기도한다. 자연의 법칙과 필연성을 인식하고 자연을 스스로의 목적에 합당하게 이용할 수 있을 때만 인간은 자연의 주인이 되어 자연을 지배할 수 있다. 필연성을 인식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전제이다. 결국 자유는 필연성의 통찰이다. 필연성이 자연 속에서는 무의식적으로 상호 작용하는 힘들의 결과인 반면, 역사 속의 필연성은 일정한 목적을 설정하고 그것을 성취하려는 인간의 행위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 자체는 필연성의 인식이 전제되지 않는 한 참된 자유가 될 수 없다. 인간 행위의 결과는 각 개인이 설정하는 목적에 부합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사회 속에도 자연 속에서와 마찬가지로 일정한 필연성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객관적 조건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까지도 그 내막을 살펴보면 필연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역사의 필연성을 인식하는 것은 자연의 필연성을 인식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 역사에는 자연의 가장 복잡한 산물인 인간의 행위가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스스로의 행동 동기를 사회구조 속에서 파악하면서 역사를 인식해 간다. 인간은 그가 태어난 역사적 조건들을 스스로 선택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이 태어난 조건들에 어쩔 수 없이 적응해야만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역사적 조건들은 인간 행위에 일정한 제한을 가한다. 이러한 제한 속에서 인간은 사회적 발전의 요구와 일치할 수도 있고 상반될 수도 있다. 일정한 사회형태의 일정한 필연성이 인식될 때, 인간의 행위가 사회적 상황에 의하여 조건지워진다는 사실이 파악될 때, 인간은 오히려 이러한 필연성을 스스로의 결단과 행위를 통해서 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얻는 것이다. 누가 어떤 계층이 사회적 변혁의 물질적이고 도덕적인 주체인가를 파악하고, 그러한 인식을 기초로 하여 인간은 새로운 사회질서를 만들기 위한 투쟁에 동참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올바른 역사의식은 자주, 민주, 통일을 성취해야 하는 한국 민중에게 커다란 힘을 줄 수 있다.

    지배계급은 자기들 계급에 유리한 세계관을 학교 교육을 통해서 주입시키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충효’(봉건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의 이데올로기와 화해와 용서와 협조와 타협’(자본주의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의 이데올로기이다. 자본주의 계급사회에서 모든 투쟁과 운동의 배후에는 계급 간의 이해관계가 은닉해 있다는 것을 시인은 놓쳐서는 안 된다. 허위의 세계를 들추어내어 진실을 밝히는 것이 시인의 펜이라고 할 때, 그 펜 끝에는 계급 간의 투쟁이 흘리는 피가 묻혀 있지 않으면 그는 제대로 진실을 캐내지 못한 시인일 것이다. 문학은 주장이면서 느낌이다. 주장과 연결되지 않는 느낌은 감상에 불과하며 느낌이 없는 주장은 이론에 불과하다. 구체적인 삶 속에 들어 있는 역사적 본질을 응시하여야 하며 개별적 인간이나 사물의 겉모양에 만족하면 안 된다. 구체적인 삶과 이념 사이의 변증법적인 연관성을 날카롭게 파헤쳐야 한다. 육체는 빵으로 살찌지만 정신은 기아와 고통으로 살찐다. 혁명가에게 있어서 나라를 넷이나 가진 인간은 나라를 하나도 갖지 못한 인간보다도 훨씬 비참하다. 각국에서 받는 것이라고는 오직 천국행 차표 한 장이다. 우리 조선인들은 일본인, 중국인, 상하이의 영국인과 프랑스인, 조선 경찰 등에 의해서 합법적으로 체포된다. 아무데서도 보호를 받지 못한다. 그러므로 조선인은 동양에서 가장 믿음이 깊은 기독교 민족인 것이다. 우리들은 하늘나라에서 우리의 슬픔이 멈추기를 기원한다. 그곳에는 자유라고 하는 위험한 사상을 가진 사람들을 잡아 넣을 감옥이 하나도 없을 테니까 말이다.

    예수는 선한 것과 악하지 않은 것을 사랑했다. 그러므로 악을 멸망시키는 것은(전쟁) 선하다. 악을 권력에 머물러 있게 하여 인류를 멸망시키는 것은 선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선과 악은 누가 판단하나? 자의적이고 개인적인 야만성이 전쟁이라는 결과로 이어지는 것이다.

    오류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오류란 심지어는 진리를 드러내는 데 유익하기도 하다. 아마도 존재하는 모든 것은 옳은 것일 수도 있다. 역사는 언제나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승리를 얻는 것이다. 너무나 진리에 가까운 질문을 한다는 것은 위험하다. 그런 질문은 사람을 미치게 만들어버릴 것이다. 자신에게 진리라고 생각되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는 것은 위험하다. 자기가 틀렸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다른 사람들이 자기 나름의 신념과 오류를 지닌 채 행복하게 죽어가도록 내버려두어라. 근본적인 질문으로 타인의 영혼을 괴롭히지 말라. 자기가 원하는 문제에 대해 자기 나름의 해답을 찾도록 내버려두어라. 진실은 언제나 진보주의자의 편이다. 거짓은 오직 반동분자에게만 봉사할 뿐이다. 승리를 하기 위해서는 거짓이 단 한마디도 필요하지 않다. 역사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진실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되는 것이지 큰소리로 이야기되는 것이 아니다. 민중들이 이 작은 목소리를 들을 때, 그들은 손에 총을 잡는다. 진정한 지도력은 날카로운 귀와 신중한 입을 필요로 한다. 민중의 의지에 따르는 것만이 승리로 인도하는 유일한 길인 것이다. 우월한 권력에 대항하여 개인적으로 싸우는 것은 쓸데없는 비극에 지나지 않는다. 힘에 대해 저항할 수 있는 대등한 힘을 조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 힘을 동원할 수 없다면 행동을 늦춰야 한다. 모험주의에 빠져서는 안 된다. 다수의 추종자를 얻기 전에는 지도할 권리가 전혀 없다. 자기 시대를 앞서 있다는 것은 선전 작업과 비판을 할 수 있는 자격에 불과할 뿐 지도할 자격은 되지 못한다. 우리 시대 최고의 위대한 민주주의적 대중 지도자는 대중을 쫓아가서 앞으로 밀 뿐 대중을 밧줄로 잡아끌지는 않는다. 그러나 소수는 보호되어야 된다. 소수는 변혁의 최초의 도구요, 다수의 자식이며,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기의 신념을 위하여 싸우는 것은 모든 사람의 의무이다. 강한 신념과 자기의 판단에 대하여 자신을 갖지 못하는 자는 지도자가 될 자격이 없다. 도덕적 용기야말로 혁명윤리의 정수인 것이다. 또한 타인을 억압하는 자 치고 마음이 자유로운 자는 한 명도 없다. 자발적인 추종이 두려움으로 가득 찬 복종으로 바뀔 때 해체가 시작되는 것이다. 도덕적 강도의 특징은 완고한 우둔함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여러 조건과 함께 변화할 수 있는 능력 속에 있는 것이다. 주어진 다수의 투표는 반드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그 다수가 올바른가 않은가는 별개의 문제이다. 대중운동에서 나타나는 변덕스러운 변화는 대중의 판단이 올바르다는 증거인 것이다. 대중들은 변화를 진정으로 반영하는 데, 이 변화야말로 진리의 정수이기 때문이다. 진리는 상대적인 것이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즉 변증법적인 것이지 기계적인 것이 아니다. 또한 그러한 진동 그 자체가 변화를 낳는 한 요인이기도 하다. 오류는 인간 발전의 통합적인 일부분이며, 사회 변화과정의 통합적인 일부분인 것이다. 사람들은 말을 믿을 정도로 그렇게 어리석지가 않다. 사람들은 실험을 통하여 비로소 지혜를 배우는 것이다. 실험은 사람들의 안전장치이며 권리이다. 거짓을 배우지 않는 자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마르크스주의와 레닌주의의 교과서는 잉크로 쓰여진 것이 아니라 피와 고통으로 쓰여진 것이다. 사람들을 죽음과 실패로 이끌기 쉽다. 그러나 승리로 이끄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일본의 식민지 정책은 개화한 제국주의의 모범 따위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그것은 극동에서도 가장 불행한 나라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인간해방을 위해 극복되지 않으면 안 될 과도기적인 사회제도이다. 맑스주의적 세계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 몰락론이다. 이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자본 자체의 법칙에 의해서 필연적으로 몰락한다. 자본은 그 본질상 소수에게 집중되기 마련이고 자본가는 보다 많은 이윤을 얻기 위해 과잉생산을 하고 노동자를 착취한다. 그 결과 실업이 늘어나고 물가가 오르며 빈곤이 증대된다. 그것은 자본가의 이익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자본 자체의 법칙에 의한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본가나 노동자나 다 함께 자본의 법칙을 벗어날 수 없다. 그것은 생산력과 생산관계 사이의 적대적인 모순으로 치닫는다. 빈곤, 실업, 착취, 경제 공황 등으로 사회가 혼란해 질 때 노동자계급은 단합하여 혁명을 일으키고 사유재산을 폐지한다. 자본가 계급이 무너지고 착취가 사라지는 새로운 사회가 건설된다. 자본의 모순이 혁명의 객관적 요인이라면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이 주관적 요인이다. 그러나 맑스 이후 100여년이 지났는데도 세계 도처에 자본주의가 몰락하고 있지 않다. 레닌은 1916년에 <자본주의의 최고단계로서의 제국주의>에서 맑스의 이론을 보충한다. 자본주의는 오늘날 제국주의의 단계로 들어섰다. 제국주의의 특징으로는 1.생산의 집중과 독점 2.금융자본의 형성 3.자본수출 4.자본가들의 국제적인 독점체제에 의한 세계분할(신식민지) 5.제국주의 국가 간의 전쟁 등이다. 오늘날 제국주의 국가에서는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하는 것이 아니라 강대국의 국민들이 약소국의 국민들을 착취한다. 다시 말해서 제국주의 국가들은 신식민지 국가의 노동자를 착취하여 자국의 노동자들을 도와줌으로써 이들이 혁명 투쟁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한다. 제국주의 국가들은 자국 내에서 이른바 부유한 화이트칼라 노동자를 만든다. 반면 신식민지 국가에서는 군사 독재자와 매판 자본가들이 민중운동을 억압하고 제국주의자들의 착취를 도와주면서 그 대가로 호의호식한다. 이들은 제 민족을 팔아 배를 불리는 것이다. 또한 자녀들을 미국이나 영국의 제국주의에 유학을 보내, 그들이 그 국가들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배워서 자국의 정책에 반영하여 또 다른 착취의 구조를 만든다. 신식민지 국가들이 제국주의 국가들과 경쟁을 할 수 없게 하기 위해서 제국주의 국가들은 이들에게 엄청난 돈을 빌려주거나 투자를 하며, 마음에 들지 않을 때에는 빌려 준 돈을 갑자기 회수해 가면서 국가의 부도 사태를 유도한다. 그러나 결국 제국주의 국가 사이에 신식민지 분할을 둘러싸고 전쟁이 발생하게 되며(무역전쟁이 그 빌미다) 3세계 민중들이 역사의식을 획득하고 반제투쟁에 나서게 되므로 제국주의도 무너지지 않을 수 없다. 자본주의 사회가 무너지고 나타나는 사회형태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다. 사회주의는 자본주의가 무너지고 난 뒤 나타나는 과도적인 제도로서 최후의 이상적인 사회인 공산주의의 실현을 위한 준비단계다. 맑스의 정의에 의하면 사회주의는 능력에 따라 일하고 일한 만큼 가져가는 사회이며, 공산주의는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한 만큼 가져가는 사회이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서는 지금까지의 역사발전 단계에서 존재했던 사유재산과 계급이 소멸되며, 따라서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가 사라진다. 생산수단의 사유화가 허용되지 않음으로써 자본가가 존속할 수 없다. 물론 생산수단 외의 소비재에 한해서는 사유재산이 인정된다. 국가는 자본주의 사회로부터 간섭과 침략을 막아내기 위한 과도적인 현상이며 온 세계에 사회주의가 실현되면 국가도 자연히 소멸한다. 사유재산이 폐지되는 사회에서만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자유를 포함한 가장 현실적인 자유가 실현된다.

    시인은 억압과 착취가 있는 곳에 있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역사에서 글쟁이들의 역할을 너무나 과대평가해 왔다. 지식인들의 나약성, 동요, 기회주의 성, 소시민성, 자유주의적 작태 등을 비판하는 사람은 지식인들 자신이면서도 그들 조차도 그 테두리를 나오려고 하지 않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자유주의자들의 싸움은 이기고 지고가 큰 관심이 아니고 그냥 불의라든가 비양심적인 것이라든가 하는 추상적인 것들과 싸울 뿐이다. 그것도 조직적으로 칼을 들고 싸우는 게 아니고 무정부주의적으로 입으로 펜으로 싸울 뿐이다. 정치 권력을 장악하려고 강고한 의지 없이 싸우는 싸움은 모두가 자유주의자들의 유희에 다름 아니다.

    정의는 강자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이념에 불과하다. 정의는 구체적으로 법을 통해 실현되므로 결국 강자들이 스스로의 이익을 옹호하고 약자들을 통치하기 위한 수단으로 법을 만들기 때문이다. 사유재산을 점유한 부자들이 그것을 지키기 위해 법을 만든 것이다. 법이라는 것은, 부르주아 사회의 법과 국가가 자본가들의 착취를 도와주고 보장해주는 도구에 불과한 것이다.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는 자유주의의 가치는 있는 자들의 평등에 불과한 것이다. 신은 인간의 상상력이 만들어 낸 창조물이다. 흑인의 열등의식이란 인종적 차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백인의 통치를 통해서 주입된 것이다. 즉 백인이 만들어 놓은 허위 이데올로기가 흑인을 인간적으로 비하시키고 있으며 식민 이데올로기의 본질이 파악되지 않고서는 민족해방이 실현될 수 없다. 또한 원주민들의 정신병은 백인들의 억압과 차별대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백인에 의한 압제와 착취가 원주민의 열등의식을 조장한 것이다. 미국의 흑인이나 아시아인, 남미인에 대한 인종차별과 식민 이데올로기는 모두 백인의 인종적인 우월성을 전제로 하고 있다. 미국의 실용주의 역사학자 피스크는 앵글로색슨족에 의한 세계통치가 진화의 최고목표라고까지 주장한다. 서구인은 우월하고 제3세계의 인종은 열등하다는 편견을 조장하는데 서구의 문화와 종교가 커다란 역할을 했다. 문화적, 경제적으로 강대국에 의존하는 국가는 결코 독립을 획득할 수 없다. 자본주의화 된 신생 독립국에 나타나는 일반적 현상이 실업, 빈곤, 부패, 빈곤 격차의 심화 등으로 신식민지가 되는 가장 위험스러운 징조이다. 유럽 지식인들이 만들어 낸 휴머니즘이나 자유주의가 식민지 침략에 알리바이를 제공하고 약탈을 정당화하며 원주민 대량학살을 방관하는 허위허식에 불과한 것이다. 또한 서구부르주아 지식인들은 서방의 강대국이 사용하는 보이지 않은 폭력을 용인하면서도 식민지 민중이 독립과 해방을 쟁취하기 위해 사용하는 폭력을 지탄의 대상으로 삼는다. 식민지를 만드는 것 자체가 일종의 폭력이다. 양심 때문에 식민지를 포기하고 식민지의 독립을 허락해준 강대국은 역사상 존재하지 않았다. 가진 자들이 자진해서 물러나는 경우가 없는 것과 비슷하다. 자주독립의 쟁취나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세상의 건설에서 힘이 절대로 필요한 것이다. 폭력은 더 큰 폭력 앞에서만 항복한다는 사실을 파농은 먼 곳에서 김남주에게 가르쳐주었다. 물론 이들이 말하는 폭력이란 테러와 같은 개인주의적이고 무정부주의적인 폭력이 아니라 조직과 연관되는 집단적인 싸움이다. 계급적인(정치적) 관점에서 자기 세계를 보지 않으면, 노동자의 일상생활을 노래하거나 현장에서의 애환을 묘사하는 시들은 별 의미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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