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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영상, 미학론 48 (교재 공개)
    패러다임/예술 2021. 3. 14. 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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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생각하기 이해하기 실천하기-

     

    영상, 미학론 48

     

    392. 현대예술은 작품의 빈곤과 철학의 과잉으로서, 예술이 해석 의존적으로 변했다. 그것은 현대예술의 조건이다. 현대예술은 숭고와 시뮬라크르라는 서로 대립하며 보족하는 두 개념으로 파악할 수 있다.

    벤야민의 기술복제, 하이데거의 존재사상, 아도르노의 미학, 데리다의 해체, 들뢰즈의 되기, 푸코의 마그리트론, 리오타르의 숭고,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

    숭고의 무거움과(현전, 예지계, 실재론, 의식 철학, 신비주의) 그것을 파괴하는 시뮬라크르(해체, 현상계, 관념론, 언어철학, 회의주의)의 가벼움은 현대인의 세계감정이 가진 야누스의 얼굴이다.

    언어는 도구다. 말함 속에서 사물은 창조되고 또한 인식된다. 목소리가 없는 사물은 인간의 언어 속에 제 본질을 전달한다. 모든 자연은 자신이 전달할 때 언어 속에, 즉 인간 속에 전달한다. 그래서 인간은 자연의 주인이 된 것이다. 이름하기는 결코 자의적인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사물의 언어적 본질을 담아야 한다. 신이 인간을 자연의 주인으로 드높였을 때, 이는 결코 제멋대로 자연을 소비하라는 뜻이 아니었다. 신이 사물 속에 담아 놓은 언어를 보존하는 관리자가 되라는 뜻이었다. 언어는 신을 향한 인간의 정신적 본질의 구현이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서가 아니라 언어 속에서 제 정신적 본질을 전달한다. 언어 정신의 타락은 첫째로 한갓 전달 수단으로 전락한 것이다. 둘째로 직관적 인식 대신 판단의 마술이 발생한 것이다. 셋째로 추상적 개념의 발생으로, 개별자들의 고유명사를 지워버리고 획일적인 개념이 생겨난 것이다. 이제 인간은 고유성은 무시한 채 개념으로 사물을 본다. 우리가 자연과 소통하기를 멈추고 그것을 죽은 사물로 간주하자, 사물도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기를 멈추었다. 소리 없는 사물에 말이 있듯이 예술형식에도 말이 있다. 사물을 이름함으로써 그 언어적 본질을 구하듯이 비평으로써 작품의 소리 없는 말을 구원한다. 여기서 언어철학은 예술철학으로 이행하고, 구제 비평으로 실현된다. 예술형식의 인식이란 그것들을 언어로 파악하고, 그것들과 자연 언어들의 연관을 찾는 시도이다. 초기 독일의 낭만주의자들에게 비평은 예술을 매개로 한 철학적 성찰 즉 예술이라는 성찰 매체 속에서의 인식이었다. 그들은 이 인식을 인간 주체가 예술에 관해 얻어낸 것이 아니라 예술 속에서 스스로 이루어지는 예술의 자기 인식이라고 보았다. 비평은 작품을 스스로 말함에 이르게 한다. 비평은 예술작품에 가하는 실험이며, 그것을 통해 작품의 자기성찰이 환기되며, 그것을 통해 작품은 제 자신의 의식과 인식에 이르게 된다. 성찰의 주체는 근본적으로 예술적 구조물 그 자체이다. 이렇게 비평이 예술작품의 인식인 한 그것은 작품의 자기 인식을 지향한다. 반성의 주체는 비평가가 아니라 예술적 구조물 자체다. 그것은 한 작품에 대한 평가라기보다는 그것을 완성시키는 방법이다. 그것은 작품 이후에 따라오는 것이 아니라 작품 자체를 이루는 구성적 계기다. 바벨의 언어들이 번역 가능성을 통해 순수한 언어를 보존한다면, 작품들은 비평 가능성을 통해 진리를 보존하고, 그 진리는 내용이 아니라 그 형식 속에 침전된다. 따라서 형식은 작품의 본질을 이루는, 작품 고유의 성찰의 대상적 표현이다. 전통적 예술론은 형식(기표)을 내용(기의)에 종속시킨다. 하지만 정작 진리는 기의가 아니라 기표 자체를 통해 표현된다. 이렇게 형식을 통해 이념을 구현한다는 점에서 낭만주의는 내용을 통해 이상을 구현하는 고전주의와 구별된다. 한마디로 낭만주의자들에게 예술의 본질은 형식(기표)들의 무한한 전개에 있고, 고전주의자들에게 그것은 다양한 형태들 속에서도 변함없이 다시 발견되는 내용(기의)의 통일성에 있다는 것이다. 해체주의와 벤야민 사이의 유사성은 바로 이 낭만주의적 예술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벤야민이 말하는 형식은 내용을 포장하는 감각적 외투로서의 형식이 아니다. 그것은 외려 내용을 이루는 요소들의 특정한 배치, 배열을 가리킨다. 결코 씌어지지 않을 것을 읽는 것이 비평이다. 비평은 개념이 아닌 이념을 서술해야 한다.

    생산력의 발전은 예술의 형상화 방식을 해방시켰다. 그것은 16세기에 과학이 철학에서 해방된 것과 마찬가지다. 물신성보다 그것의 진보성(기술의 복제술)에 주목해야 한다. 기술 복제는 예술을 베끼는 수준을 넘어 예술에 깊은 변화를 끼치는 단계에 도달했다. 그래서 복제의 고유성을 인정해야 한다.(일시성과 반복성으로 아우라의 붕괴) 아우라의 붕괴는 긍정적으로 보면 전통적 가치의 절멸(파괴)로서, 그것은 현대적 지각의 고유한 특징이다. 그것은 또한 종교적 의식 속에서 살아온 기생적 삶의 방식에서 작품을 해방시켜 주었다. 이로써 종교에 근거를 둔 사회적 기능 대신 정치에 근거를 둔 예술의 또 다른 사회적 기능이 들어선다.(예술품의 예배 가치전시 가치)

    바로크의 알레고리가 그 파편성으로 고전주의적 상징을 무너뜨리고 예술 자체의 수정을 초래하듯이, 영화는 그 단편성으로 아름다운 가상을 무너뜨리고 예술 자체를 수정한다. 프로이트가 지금까지는 눈에 띄지 않은 채 지각의 넓은 흐름 속에 함께 들어 있던 사물들을 분리하여 분석이 가능하도록 만들었다면, 영화 역시 사물의 흐름을 잘라내어 클로즈 업 시킴으로써 감각세계를 풍부하게 해준다. 그리하여 정신분석학을 통해 우리가 충동의 무의식의 세계를 알게 된 것처럼, 카메라의 하강과 상승, 중단과 분리, 확대와 축소를 통해 우리는 시각의 무의식적 세계를 알게 된다. 즉 과거의 전통적인 예술이 미(관조)를 향유하게 해주었다면, 영화예술은 우리에게 생각할 틈을 주지 않고 충격 효과를 준다. 영화예술은 작품으로의 몰입을 막아(충격 효과, 산만함, 소격효과) 관중으로 하여금 늘 비평적 태도를 갖게 한다. 그 산만함에서 전통의 전복이라는 모더니즘의 강령을 볼 수 있다. 대중이 역사상 최초로 예술의 수용자로 등장한 것이다.

    번역(원문은 번역을 통해 순수한 언어로 상승), 비평(작품 이후가 아니라 작품의 성립과 동시적), 복제(원작의 권위를 위협) 세 개념은 모두 시뮬라크르의 미학을 지시한다. 번역이든, 비평이든, 최고의 과제는 근원(현존의 미학, 숭고의 미학, 존재, 진리, 언어-이념, 차이의 놀이)을 드러내는 데 있다. 순수한 언어는 하나의 개별 언어나 하나의 개별 작품 속에 온전히 드러날 수 없으며, 진리는 오직 파편들의 불연속 속에서만 드러나기 때문이다.

    객관적 합리주의;사물=실체

    주관적 경험주의;사물=다양성의 통일(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이다.)

    칸트;경험론+합리론=사물에 대한 구성주의

    하이데거;위의 두 경우 모두 비판. 사물=질료(재료+설계도)+형상(형상화된

    질료) 또는 작품=소재+형식(내용+형식)

    예술의 진리란 근대철학에서 말하는 일치로서의 진리나 근대미학에서 말하는 재현(모방)으로서의 진리(묘사대상이 되는 존재자와의 일치)를 의미하는 게 아니다. 작품 속에 정립되는 진리는 현시現示의 진리, 개시開示의 진리다. 그런 의미에서 예술이란 존재자의 진리가 작품 속에 정립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작품의 진리는 존재자를 재현하는 인식론적 진리가 아니라 이제까지 없었던 것을 있게 하는 존재론적 진리다. 신상은 그 모델이 된 인간의 모방도, 눈으로 볼 수 없는 신의 재현도 아니다. 먼저 존재하는 신을 본 떠 신상을 만든 게 아니라, 신상을 만듦으로써 신을 비로소 존재하게 하고, 그로써 자신들의 민족적 삶의 세계를 세웠던 것이다. 이렇게 작품의 존재란 하나의 세계를 건립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작품 속에서 비로소 대지가 대지답게 되는 것이다.(대지로 존재하게 해준다.) 이처럼 작품 속에 들어올 경우 사물은 뭔가 다른 것으로 변용變容된다. 데카르트의 주체와 객체의 인식론적 관계는 이제 하이데거의 세계와 현존재(실천적 관점-사물은 그저 눈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위한 것이다) 사이의(세계와 대지-투쟁과 안식) 실존적 관계(파생적 관계)로 대체된다. 근대미학은 칸트의 형식미학과 헤겔에서 완성되는 진리 미학의 대립의 역사였다. 하이데거는 그 둘을 해체한다.(작품 미학) 예술의 진리는 예술가의 진리가 아니다. 이로써 미적 주체성은 해체된다.(주체의 죽음, 저자의 죽음) 예술은 예술가의 주관에 있는 것도, 수용자의 머릿속에 환기되는 감정이나 관념에 있는 것도 아니다. 이로써 근대의 예술가 미학(천재론)과 근대의 수용미학(향수 미학)은 모두 기각된다. 인간이 근원적 진리의 주체임을 부정하는 하이데거의 반인간주의는 전통적인 미적 범주론에도 변화를 가져온다. 근대미학에서 미와 숭고를 구별하는 척도는 인간 주체의 인식능력이었다. 즉 인간의 인식 능력의 크기와 조화를 이루는 것은 이고, 그것을 압도적으로 초월하는 대상이나 힘은 숭고라는 것이다. 하지만 미적 주체성이 파괴되면서 이 구분의 척도도 사라진다. 기만하지 않으려면 예술은 추해져야 한다. 합리적으로 관리되는 비합리적인 사회, 그 속에서 예술은 저항을 계속해 나간다. 사회를 비판하기 위해 예술은 사회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 사회와 거리를 두고 그것과 급진적으로 다른 타자로 머무르는 것, 그것의 비동일자로서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는 것, 그것이 예술이 사회를 비판하는 방식이다. 자본주의 동일화의 강제에 대항하여 예술은 끊임없이 자신을 사회와 구별하고 그것과의 차이를 주장한다. 소통을 거부하고 의미를 파괴하고 기대의 지평을 배반함으로써, 예술은 사회와 구별되는 자신의 타자성을 주장한다. 소위 합리성이라는 것이 얼마나 비합리적인지 보여주기 위해 예술은 스스로 부조리해진다. 소위 관리되는 사회의 질서라는 게 실은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보여주려고 작품에 혼돈을 도입한다. 사회가 행하는 동일화의 추적을 따돌리기 위해 예술은 끊임없이 자신을 혁신해야 한다. 그 결과 예술은 끝없이 난해해지고 점점 더 해석적으로 변한다. 운명을 건 이 끝없는 탈주를 통해 예술은 비인간적인 사회 속에서 유일하게 인간적인 것으로 남는다. 이 사회에서 예술이 마땅히 취해야 할 태도는 눈을 감고 이를 악무는 것이다. 예술적 저항의 근거는 예술이 사회에 토해 놓은 시끄러운 발언이 아니라, 영원한 탈주를 통해 늘 사회에 불필요한 것으로, 사회의 영원한 타자로 머무는 예술의 존재 자체에 놓여 있다. 의미를 거부하고, 소통을 거부하고, 사회에 동화되기를 거부함으로써 예술은 모든 것을 동일화하는 비인간적인 사회 속에서 유일하게 인간적인 것으로 남는다. 예술은 이렇게 메시지가 아니라, 자신의 현존을 통해 사회를 비판한다. 예술은 존재 그 자체가 반사회성이며, 이 존재의 사실로써 사회를 비판한다. 새로운 예술은 화해의 가상을 단호히 거부함으로써 화해되지 않은 것 가운데서 화해를 견지한다. 그리하여 미학의 중심 과제는 가상의 구제이다. 예술의 진리는 합리적 인식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것, 즉 동일성이 아닌 비동일성(타자)의 진리다. 우리가 구원해야 할 진리는 동일자와 보편자가 아니라 타자와 개별자에 관한 것이다.

    오늘날 예술은 숭고를 추구한다. 그것은 자연미(침묵의 언어)를 미메시스한다. 예술은 모든 것을 동일화하는 사회 속에서 늘 비동일자(타자)로 남으려 하는 사회의 안티테제다. 자연 역시 그것을 사정없이 인간의 필요에 동일시하려는 합리적 지배 논리에 희생되는 비동일자다. 그런 점에서 자연미는 진리와 밀접한 관계를 지닌다. 자연의 품위는 인간화를 거부하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이 지니는 품위다. 그 품위를 지키기 위해 예술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는 자연이 말을 하는 유일한 방식인 침묵의 모방을 의미한다. 헤겔의 철학은 끝없이 진행되는 이 폭력적인 자연 지배의 이론적 표현이다. 헤겔에게 역사는 정신의 자기 인식 과정, 즉 정신이, 자기 앞에 선 자연이 실은 자신과 동일한 것임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인간은 자연을 객체로 정립한 후 이를 강제로 자기의 필요와 동일화한다. 그는 자연 속에서 정신과 같은 것(법칙)만을 볼 뿐 자연의 타자성, 즉 자기의 정신적, 개념적 파악에 적합하지 않은 요소들을 간단히 무시해버린다. 자연 속에서 합리적으로 계량 가능하지 않은 것은 버려진다. 이로써 자연 속의 진정으로 자연다운 것, 그것의 수치로 통약 불가능한 질적 측면은 사라진다. 헤겔에게 자연은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오직 인간에 대해서만, 즉 인간의 정신적 파악에 적합한 한에서만 아름답다. 그렇지 않은 것들은 그저 자연미의 본질적 결함으로 간주될 뿐이다. 여기서 헤겔은 예술의 필연성을 끌어낸다. 즉 결함이 있는 자연을 완성하는 것, 그게 예술이라는 것이다. 이로써 자연미는 예술미의 부속물이 되어버린다. 바로 여기에서 인간의 필요에 따라 자연의 결함을 멋대로 뜯어고치는 근대의 폭력적 자연 지배는 미학적 표현을 얻게 된다. 자연 지배의 역사를 흔히 진보라 부른다. 이 근대의 이념이 인간화된 자연이라는 마르크스의 생각에도 들어 있다. 하지만 자연의 인간화는 실은 자연의 탈자연화에 불과하다. 오늘날에도 자연미는 보편적 동일성의 속박 속에서 사물들이 지니는 비동일적 요소의 흔적이다. 이를 구제하기 위해 예술은 자연을 대리한다. 이 시대의 예술 이념은 억압된 상태로 역사적인 역동성 속에 얽혀 들어간 자연을 부활시키는 것이다. 정신과 동일해지기를 거부하는 자연 속의 타자, 인간의 정신적 필요에 따른 개념적 파악이나 그의 물질적 필요에 따른 실용적 가공을 거부하는 자연 속의 비동일자를 체험하는 것, 그것이 이 시대에 미적 주체의 목적이자 동시에 해방이다. 예술은 합리적으로 관리되는 세계의 비합리성에 대한 비판이다. 최고의 작품들은 단편적인 상태로 될 수밖에 없다. 종합에 대한 부정이 형상화의 원칙이 된다. 미시적인 구조로 볼 때 새로운 예술은 모두 몽타주라 할 수 있다. 전통적인 미학은 작품을 유기적 전체로 보아 부분을 전체 아래에, 비동일자를 동일자 속에 강제로 편입시켰다. 그러나 예술작품은 그 자체의 구조로 보아 유기체가 아니다. 작품은 유기체 전체가 아닌 여러 모순적 요소들이 긴장을 이루는 팽팽한 자기장이다. 그 속에서 전체와(부분적) 계기, 구성과 미메시스, 정신과 재료는 양극을 이루며 평등하게 배치된다. 양극은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에 종속되거나 종합되지 않은 채 성좌를 이루고, 이로써 예술작품은 하나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이 양극 사이를 오가는 역동적 과정이 된다. 이렇게 예술은 자연을 지배하는 합리성을 비판하며 그것의 폭력성을 철회시킨다. 작품 속에서 이성의 자기 극복이 이루어지고, 그동안 대립했던 합리성과 미메시스는 비로소 화해에 도달한다. 한편으로 예술이 진실하려면 그것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비화해적이고 적대적이며 분열된 파편들의 모습으로 드러내야 한다. 다른 한편 그 일을 하기 위해서라도 예술은 그렇게 갈가리 찢겨진 것들을 비폭력적인 구성으로 다시 종합함으로써 현실을 화해의 빛 속에 드러내야 한다. 역설적이지만 예술은 비화해적인 것을 증언해야 하며 동시에 그것을 화해시키는 경향을 가져야만 한다. 사회의 밖에 존재함으로써 사회와 관계를 맺고, 소통을 거부함으로써 사회와 소통을 하고, 비화해적인 것을 증언함으로써 사회와 화해를 제시하는 역설, 이 역설을 통해 작품은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화해를 제시한다. 눈물 없는 울음인 예술이 약속하는 구원은 희망과 절망의 이율배반 너머에 존재한다. 예술은 작품 속에 존재하는 것(현실의 단편)을 받아들이고, 이 단편들을 별자리처럼 구성함으로써 거기서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을 드러낸다. 이로써 예술 속에선 존재하는 것에 대한 탄핵과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기대가 서로 결합된다. 예술은 유토피아를 그리지 않는다. 그저 존재하는 것들의 단편을 제시할 뿐이다. 현현이 빛을 발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형상은 이처럼 덧없는 것을 붙잡으려는 패러독스한 노력이다. 예술작품 속에서 순간적인 것은 초월적인 것이 된다. 조화로운 아름다움을 포기한 현대예술은 향유를 제공할 수 없다. 가령 현대음악을 듣는 것은 차라리 고통스런 경험이다. 때문에 예술 작품을 감각적 쾌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근대의 향수미학은 이제 거부되어야 한다. 본질 구성적 의미에서 예술 향유의 개념은 사라져야 한다. 새로운 예술은 조화로운 아름다움의 관조가 아니라 고통스런 쇼크의 체험이다. 오늘날 작품은 더 이상 감각적 직관의 대상이 아니다. 새로운 예술은 향유가 아니라 철학적 사유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근대의 예술가 미학도 거부된다. 작품은 피조물이 아니며 인간은 창조자가 아니다. 따라서 천재의 개념은 허위다. 이렇게 향수 미학과 예술가 미학을 거부함으로써 아도르노의 미학은 작품 미학의 성격을 띠게 된다.(주체의 죽음) 오늘날의 예술작품은 주체의 자기표현이 아니다. 비평의 과제는 더 이상 작품 속에 드러난 작가의 주관적 의도를 추적하는 것이 아니다. 작품 속에 재현된 세계와 작품 밖의 세계의 일치 여부를 가리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작품 속에 객관적으로 들어 있는 것, 작품이 객관적으로 수행하는 것을 포착하여 언어로 옮기는 것이다. 예술작품의 진리는 그 속에 들어 있는 미적 주체에 관한 진리도, 그가 재현으로 반영하는 세계의 겉모습에 관한 진리도 아니다. 미적 주체의 매개를 통해 작품 안으로 연장되어 들어온 현실의 객관적 과정에 관한 진리이다. 진리는 주체의 산물이 아니다. 그것은 주체 밖의 어떤 사태의 표현이다. 그 진리는 주체에 관한 진리가 아니라 엄밀한 객관적 진리이다. 아도르노에게 예술가는 더 이상 미적 주체가 아니다. 그는 현실에서 진행되는 어떤 객관적 과정을 매개하는 영매에 불과하다. 예술가의 입을 빌려 말하는 것은 그의 주관적 의식이 아니라 사회의 객관적 상태다. 이로써 예술작품은 단순한 주체를 훨씬 능가하게 된다. 예술은 주체의 발언이 아니다. 주체가 직접 말을 해서는 안 된다. 현대예술의 이상은 사물을 통해서, 사물의 손상되고 소외된 형태를 통해서 말을 하는 것이다. 가령 추상회화는 그 손상되고 소외된 형태를 통해 마찬가지로 손상되고 소외된 사회의 부정적 상태를 고발하고, 음악은 불협화음으로 사회 속에 화해의 부재를 증언하고, 연극은 스스로 부조리해짐으로써 사회의 부조리를 폭로하며, 시는 무의미의 연관관계로써 아무 의미도 존재하지 않음을 표현한다. 오늘날 미적 주체성은 자기 논리에 의해 말살되었다. 여기에서 근대미학의 중요한 프로젝트 중의 하나인 미적 주체성은 해체된다. 주체의 죽음, 그러나 이는 모든 주체의 죽음이 아니다. 자신을 궁극적인 것으로 여겼던 어느 독단적 주체의 죽음일 뿐이다. 이 낡은 주체의 무덤에서 이제 새로운 주체가 걸어나와야 한다. 이성의 폭력성을 철회하고, 인간화를 거부하는 자연이라는 타자에 귀를 기울이고, 동일화의 강박을 벗고 개별자들의 존재를 존중하며, 말이 아니라 존재 자체로써, 합리적으로 관리되는 사회의 비합리성을 비판하는 탈근대적 주체, 타자가 아니라 자신을 지배하고, 그렇다고 자기 안의 자연을 억압하지 않고, 비동일성 속에서 동일성(정체성)을 유지하는 주체, 섣부른 희망도 하지 않고, 그렇다고 절망하지도 않고, 역사에 최종목적(텔로스)을 설정하지 않으나 저항을 포기하지도 않고, 불꽃처럼 나타났다 사라지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을 포착할 감수성을 지닌 현대적 의미의 예술적 주체...... 재현이 사라지고, 조성이 무너지고, 서사적 연관이 파괴된 현대예술에서 작품의 구조는 수수께끼로 다가온다. 현대 예술작품 앞에 서면 그 작품의 배후에 우리가 밝혀내야 할 그 무언가가 감추어져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무지개를 쫓는 아이들의 체험처럼 우리는 끝없는 해석을 시도하여, 그 수수께끼에 답을 내나, 그 답을 내는 순간 작품의 진리는 우리 앞에서 또다시 모습을 감추게 된다. 이렇게 작품의 진리에 관한 최종적 해석을 거부하고 무한한 해석의 놀이를 풀어놓는 현대예술의 구조를 아도르노는 수수께기의 은유로 표현한다. 예술은 진리를 갖고 있으나 그 진리를 개념적으로 표현할 능력은 갖고 있지 못하다. 그래서 예술은 해석을 요구한다. 현대 예술작품은 더 이상 우리에게 직관적으로 진리를 매개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그것의 진리는 본질적으로 해석을 그 상관자로 요구한다. 하지만 전통적인 해석학을 요청하는 것은 아니다. 외려 여기에서 데리다를 연상시키는 반해석학의 뉘앙스까지 느껴진다. 예술에서 현상학만이 아니라 본질을 직접 파악할 수 있다고 망상하는 모든 형태의 현상학에 대해서는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 이는 그것이 반경험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반대로 그것이 사유 과정을 통한 체험을 중단시키기 때문이다. 관찰과 사유로 남김없이 밝혀지는 예술작품은 작품이 아니다. 예술작품에는 아무리 해석을 해도 해석이 안 되고 남는 부분이 있으며, 예술에 수수께끼의 성격을 부여하는 이 부분이 작품 전체에 비로소 의미를 부여해주는 것이다. 작품에 대한 최종적 이해, 궁극적 해석이란 있을 수 없다. 수수께끼를 푼다는 것은 수수께끼가 왜 해결될 수 없는지 근거를 밝히는 것을 의미한다. 예술작품에 대한 해석, 그것에 대한 이해는 예술작품의 열린 성격, 수수께끼적 성격 때문에 본질적으로 운동, 과정, 생성의 성격을 띤다. 그리하여 아도르노는 예술작품이 존재가 아니라 생성이라는 것은 기술적으로 파악 가능하다고 말한다. 여기서 정지된 그림으로서의 작품은 일어나는 사건으로 바뀐다. 작품은 해석을 통한 이해의 과정 속에서 비로소 실현된다. 진리라는 측면에서 예술의 생산과 수용은 동시적이다. 오늘날 해석은 작품이 완성된 후에 사후적으로 행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작품의 성립 자체에 참여한다. 미적 성취는 언제나 대량복제와 시장의 필요를 위한 단순화에 의해 평가절하되기 때문에, 이 지배의 힘을 피하기 위해 예술은 점점 급진적, 해석적으로 되고, 그 결과 점점 더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사회의 타자로 남기 위해 예술은 끝없이 자신을 혁신하지 않을 수 없다. 그 결과 예술은 늘 새로운 형식을 추구하게 된다. 새로운 예술의 창작은 내용에 형식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재료를 그 누구도 아직 시도하지 않은 새로운 방식으로 처리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이로써 내용과 형식이라는 근대미학의 개념은 재료와 처리라는 개념틀로 대체된다. 재료+처리, 이것은 새로운 예술의 창작과정이다. 형식은 재료의 조직을 통해 전개된다. 따라서 진리는 무엇보다도 새로움에, 말하자면 재료를 조직하는 새로운 방식에 있다. 이는 아방가르드의 미적 확신, 즉 진보는 재료를 다루는 방식에서 드러난다고 보는 미적 진보 논리의 이론적 표현이다.

    현대예술의 주요한 미적 범주가 숭고에 있다. 현대예술 전체를 통해 단지 숭고함의 이념만이 남게 되었다.

    아도르노의 부정의 미학은 오늘날 프랑스 철학자들이 주장하는 명제들 대부분이 선취되어 있다. 가령 도구의 이성 비판은 이성 중심주의의 비판을, 비동일자의 강조는 차이의 철학을, 수수께끼 풀기는 해체주의 독해를, 파편적인 것의 선호는 체계의 거부를, 미적 주체성의 해체는 데카르트적 코기토에 대한 거부를, 관리되는 사회의 비판은 푸코의 계보학적 근대비판(광기의 역사)을 각각 연상시킨다. 그는 모던의 신학과 포스트모던의 냉소를 동시에 극복하게 해줄 단초를 비트켄슈타인의 언어철학에서 찾는다.

    근대적 형이상학의 틀, 즉 작품을 현실 속에 존재하는 대상의 모방으로 바라보고 그 대상을 주체로 귀속시키고, 나아가 작품을 작가의 자의식의 표현으로 바라보는 것, 이것이 주체라는 형이상학적 개념 위에 서 있는 근대미학의 특징이다.(의미결정론, 재현론, 해석주의, 해석학, 진리의 현전, 도구 존재의 드러남시뮬라크르의 미학, 해체론, 생성)

    작품의 진리는 결코 작품 속에 한번에 현전하지 않는다. 그것은 작품 속에 존재하면서 동시에 부재한다. 하나의 기표는 다른 것들과의 차이를 이루며 다른 기표로 연기되면서, 존재하면서 부재하는 흔적이 된다. 작품의 의미, 그것의 진리는 존재하면서 동시에 부재한다.(은폐이자 동시에 탈은폐) 존재하는 것은 기표의 놀이, 즉 그것들의 차이, 연기, 산포의 유희일 뿐이다. 재현적 인식은 불가능하다. 명제, 주장, 담론은 텍스트 밖의 현실을 지시하지 않는다. 텍스트 밖에는 그것이 닮아야 할 원본이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오직 차이 속에서 의미를 연기하며, 자신의 의미를 끝없이 다른 시니피앙들에게 연기시키면서 산포되는, 그리하여 결코 현전에 도달하지 않는 텍스트들의 놀이 뿐이다. 예술은 더 이상 현실의 재현이 아니다. 예술이 모방해야 할 원본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방의 원본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작품에 대한 최종적 결정적 해석도 있을 수 없다. 작품은 근원적 진리로의 회귀를 원하지 않는다. 또 다른 사람들에게는 또 다른 진리를 열어줄 수 있는 것이다. 즉 하나의 예술작품이 열어주는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들이다.(관점주의) 해석자와의 만남 속에서 새로이 세계를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들을 생성해 내는 예술작품의 끊임없는 미적 창조력, 바로 거기에 예술작품의 진리가 놓여 있다. 그래서 예술작품은 해석학적 대상이 아니라 개념화 될 수 없는 것의 보존이다.(논리학의 탈피, 의미의 단일성 탈피, 시각 우위의 탈피, 인간주의의-인간중심주의 탈피, 로고스 중심주의 탈피) 의미작용을 일으키는 것은 기의라는 관념이 아니라 기표라는 기호 매체의 물질성이다. 중요한 것은 재현의 재현적 환영이 아니라 질감의 물질적 바탕이다.

    유사;원본과 복제 사이의 닮음의 관계(인식론), 현전의 형이상학(실제와 사유의 일치), 세계에 대한 유일하게 올바른 객관적 기술이 존재, 19세기까지의 근대 의식철학, 자연(원본)의 모방 추구(재현의 기술, 유사성의 예술)-회화의 진리는 원본과의 일치 여부에 있다. 르네상스 시대의 환영주의 회화의 원리인, 그림은 가능한한 그것이 묘사하는 대상을 닮아야 하고, 이 유사를 통해 그것의 재현, 즉 그 대상을 가리키는 도상기호가 된다. 하나의 그림이 어떤 사물의 재현, 즉 그것을 가리키는 도상적 기호가 되는 것은 바로 이 닮음을 통해서이다. 르네상스 화가들이 원근법, 색채론, 광학, 해부학 등을 통해 강박적으로 사물을 닮게 그리려 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르네상스 이후의 회화에서 유사는 곧 재현 관계의 확언이었다. 근원이 되는 요소 존재, 그것을 중심으로 질서가 세워지고, 위계화 된다. 유사하다는 것은, 즉 원본이 있다는 것은 지시하고, 분류하는 제1의 참조물을 전제로 한다.

    상사;복제와 복제 사이의 닮음의 관계(원본을 증언할 인식론적 의무가 없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서로 조금씩 차이를 내며 무한히 반복되는 닮은 꼴들의 미적 유희다. 여기서 푸코의 상사의 개념이, 들뢰즈의 차이의 반복에서 말한 시뮬라크르에 해당한다. 시뮬라크르란 본디 원본이 없는 복제(벤야민), 원본과의 일치가 중요하지 않은 복제(들뢰즈), 원본보다 더 실제적인 복제(보드리야르)를 가리킨다. 근대적 형이상학의 붕괴, 절대적 객관적인 기술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오직 서로 조금씩 차이를 내며 무한히 반복되는 다양한 해석들의 놀이뿐이다. 현대 언어철학의 원리, 오늘날의 회화는 그림 밖의 원본을 재현할 의무를 지지 않는다. 형과 색은 닮음에서 벗어나 자유로이 유희하고, 설사 닮음이 있어도 그 닮음을 유사, 즉 모델과 복제 사이의 닮음이 아니라 원본 없는 복제 사이의 닮음이 된다. 탈동일화, 회화의 본질은 보이지 않는 것을 가시화하는 것이며, 보이는 것과 그 속에 감추어진 보이지 않는 것의 신비에 있다. 중요한 것은 모델과 이미지 사이의 재현 관계나 지시의 관계가 아니라, 작품 속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그 이미지들 사이의 관계, 즉 시뮬라크르들 사이에 존재하는 상사의 관계다. 기표와 기의의 통일, 즉 현전이 아니라, 시뮬라크르들이 만들어 내는 차이의 놀이 속에서 다양하게 무한히 전개된다. 그것이 바로 데칼코마니(전사술轉寫術)이다. 유사는 이미 눈에 보이는 것을 재인식하게 하지만, 상사는 알아볼 수 있는 대상, 친숙한 실루엣이 감추어 못보게 하고 보이지 않게 하는 것을 보게 한다. 이 차이의 놀이를 통해 의미는 열린다. 그리고 한번 열린 의미는 이제 생산적, 창조적 역할을 발휘한다. 그것은 서로 춤추고 의지하고 포개짐으로써 단선의 의미를 다변화한다. 재현회화의 원리인 유사는 형상의 의미를 고정시켜 나뭇잎은 나뭇잎이라는 동어반복의 진부한 진리를 말한다. 그것은 우리의 지각을 고정시켜 사물의 모습 속에서 늘 보던 것만을 보게 한다. 반면 상사의 놀이는 우리에게 친숙한 사물의 모습이 은폐하고 있는 형상들을 우리에게 새로이 열어 보여준다. 그것은 모든 사물 속에 내재된 형상적 잠재성들을 풀어서 전개시킨다. 유사성의 재현은 우리에게 가시적인 대상을 보여준다. 상사성의 유희는 그 대상의 가시성이 우리로 하여금 보지 못했던 것들을 비로소 보게 만들어 준다.(낯설게 하기)

    타율적인 근대의 주체 형성 방식과는 다른 새로운 자율적 자아 형성의 원리가 탄생한다. 그것이 바로 자기의 배려라는 푸코 특유의 존재 미학이다. 주체를 지식 권력의 함수로 보고 주체의 죽음을 선언하는 데에서 벗어나 쾌락을 긍정하는 새로운 자아를 형성하여 미적, 윤리적 실천의 수단으로, 자기의 배려를 통해 제 삶을 예술적 완성으로 끌어올리는 존재 미학의 수완이라 할 수 있다.

    너 자신을 배려하라너 자신

    너 자신을 배려하라너 자신을 알라너 자신을 발명하라(노마디즘, 미적 윤리학, 존재 미학, 숭고의 미학)

    감각은 인식(정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이전에 욕망()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결국은 동일한 신체가 감각을 주고 다시 그 감각을 받는다. 이 신체는 동시에 대상이고 주체이다. 지각에는 지각되는 대상과 지각하는 주체가 분리된다. 이 주객의 근대적 이분법에 선행하여 감각은 세계가 우리에게 주어지는 방식, 아니 그 이전에 우리가 세상에 존재하는 방식 그 자체이다. 오늘날 회화란 재현할 모델도, 재현해주어야 할 스토리도 없다. 이것이 현대회화의 상황이다. 현대회화에서 재현성(대상성)을 파괴하는 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칸딘스키나 몬드리안처럼 추상을 통해 순수한 형태를 지향하는 것이다. 하지만 들뢰즈는 이 방법과는 거리를 둔다. 추상은 두뇌를 통과하기 때문이다. 이보다 더 직접적이고 감각적인 다른 길은 없을까? 다른 하나의 길은 베이컨처럼 추출 혹은 고립을 통해 순수하게 형상적인 것으로 향하는 것이다. 베이컨은 구상과 비구상 사이에서 외줄타기를 한다. 그는 정형도 비정형도 아닌 기괴한 형상의 창조를 통해 구상성을 파괴하려 한다. 그 결과 화폭에는 충격적 형상들이 발생하고, 이 형상들은 두뇌를 통과하지 않고 우리의 신경 시스템에 직접 작용한다. 재현은 대상과 이미지 사이의 관계(닮음)를 내포할 뿐 아니라 또한 한 이미지가 다른 이미지들과 맺는 관계(서사적 연관)를 함축한다. 그래서 닮음을 포기하는 것만으로는 재현을 피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재현은 필연적으로 서사(이야기)를 포함하기에 재현을 피하려면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의 서사적 연관 역시 파괴해야 한다. 여기에 사용되는 것이 격리라는 수법이다. 격리는 재현과 단절하고 서술을 깨뜨리기 위해 필요한 가장 단순한 방법이다. 베이컨은 동그라미, 입방체 혹은 트랙을 이용해 형상을 격리시키고, 이로써 형상이 그림 속의 다른 요소들과 서사적 연관을 맺지 못하게 방해한다. 그의 작품 안에는 종종 둘 이상의 형상이 등장한다. 하지만 이때조차 작품 속의 형상들은 서로 서사적 연관을 맺지 않는다. 형상들은 고독하다. 형상들의 고독, 여기서 들뢰즈는 근대의 재현적 인식모델의 파괴를 본다. 이 모델에 따르면 우리는 외부의 대상을 일단 이미지의 형태로 의식이라는 거울에 비추어놓고(닮음) 이 이미지들을 시간적, 공간적 혹은 인과적으로 결합(서사적 연관)시킨다. 이렇게 의식의 스크린 위에 현실의 사태를 영상처럼 떠올리는 것이 곧 인식이라는 것이다. 이제까지의 회화는 이 모델 위에서 현실의 재현을 추구해왔다. 그림 속에는 사물을 닮은 이미지들이 있고, 그것들이 서로 연결되어 우리에게 어떤 사태에 대해 이야기해준다. 베이컨은 형상의 고립을 통해, 재현을 가능하게 하는 이 두 원리를 파괴한다. 들뢰즈는 거울이라는 사유 이미지의 파괴를 본다. 재현을 포기하고 그리고자 한 것은 감각이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감각을 어떻게 그린단 말인가? 이 과제를 베이컨은 기괴한 형상의 창조를 통해 해결한다. 그려지는 것은 감각, 즉 신체다. 그것은 고깃덩이나 인체 따위의 재현이 아니라, 순수형상, 즉 그 충격적인 형태와 색채의 효과로 우리를 감각의 체험 속으로 몰아넣는 어떤 모양일 뿐이다. 그것은 시각적인 것이 아니라, 촉각적이다. 거기에서 우리는 형태와 색채의 유희가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조화를 관조하지 않는다. 그 기괴한 형상들을 바라보는 이들에게 충격을 준다. 우리의 신경 시스템에 직접 작용해 우리의 감각을 자극하고, 그로써 우리에게 어떤 체험을, 즉 감각을 느끼는 체험을 매개해준다. 베이컨의 회화는 폭력적이다. 그것은 재현된 전쟁의 폭력이 아니라, 회화의 폭력, 즉 감각의 폭력이다. 회화의 잔인함, 즉 색채와 형태가 행사하는 잔혹함이다.

    인간의 동물되기는 이성을 근거로 인간을 다른 동물 위에 올려놓는 인간중심주의는 이로써 무효화된다. 그것은 외적 모방이 아니라 존재론적 닮기이다. 그것은 창조적이며 동시적인 역행이다. ‘되기는 동물 수준으로 돌아가는 퇴행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을 하나의 정체성에 한정시키지 않고, 이 존재의 상투형이 굳어지기 전의 가능성의 지대로 돌아가, 다른 것과의 접촉을 통해 제 존재의 지평을 창조적으로 넓히는 것이다. 또한 새롭고 낯선 생성과 다양성을 형성하면서 탈영토화의 첨점들의 작동이 일어난다. 그런 의미에서 되기란 인간이 예술적으로 존재하는 방식이자 동시에 예술이 존재하는 방식이기도 하다.(파동, 진동, 강렬함, 기관없는 신체-미분화된 원초적 감각-리듬, 잠재성, 무한생성, 새로운 주체, 유목적 주체, 다양화, 얼굴 지우기, 부화 중인 달걀) 하나의 자극을 동시에 둘 이상의 감각으로 느끼는 현상, 의학적으로 착란으로 간주되나, 예술에서는 이 착란이 외려 창조성의 근원이 된다. 실제로 많은 예술가들이 이 공감각의 능력을 갖고 있었다. 가령 알파벳에서 색깔을 보는 랭보, 회화에서 음악을 듣는 칸딘스키, 음악에서 색채를 느끼는 스크랴빈, 원래 감각을 영토화하는 관습, 즉 감각을 오감으로 엄격히 구별하여 위계를 지우는 전통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비롯된다. 그는 감각들이 서로 섞이는 것을 매우 위험시했다. 그러나 들뢰즈는 기관없는 신체가 감지하는 리듬 속에서 여러 감각의 교차와 횡단을 볼 때, 수천 년 동안 지속되어 온 이 전통적인 감각론을, 이 감각의 영토화를 전복하고 있는 것이다. 베이컨의 그림 속에는 종종 근육위축, 마비, 과민반응, 감각상실 등 전형적인 히스테리 증상을 보여주는 형상들이 등장한다. 문명의 과잉이 자연적 신체에 발작을 불러일으키듯이, 감각이 기관의 분화를 마친 유기체를 통과하여 우리 신체와 접할 때 히스테리가 발생한다. 신체는 전적으로 살아 있지만 유기적이지 않다. 따라서 감각이 유기체를 통해 신체를 접하면, 감각은 과도하고 발작적인 모습을 띤다. 한마디로 히스테리로서의 감각을 만들어내는 것은 현재의 집요함, 즉 유기체 이후까지 남아 있는 신체의 악착성, 성격이 규정된 기관들의 후에까지 남아 있는 전이적 기관들의 악착성인 셈이다. 들뢰즈에게 감각이란 삼투압을 하는 식물세포처럼 신경계와 외부 자극 사이에 벌어지는 운동, 이 양자의 충돌로 발생하는 진동이다. 분화된 기관을 통해 받아들여지는 감각은 감각 주체와 감각 대상의 분리를 낳으면서 지각으로 전락한다. 하지만 기관 없는 신체 위에 발생하는 감각은 다르다. 그것은 재현적 인식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의 존재론적 사실이다. 유기체가 아니라 신체에 의거할 때, 감각은 재현적인 것이 아니라 사실적인 것이 된다. 이때 도처에서 현재함이 신경 시스템에 위에 직접 작용하고, 재현이 자리를 잡거나 재현을 하도록 할 만한 거리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히스테리로서의 감각은 이렇게 내재성과 초월성(주체와 대상)의 구별을 지우고, 거울에 비친 영상(재현적 인식모델)을 파괴한다. 그리하여 히스테리 속에서 나는 자기 모습을 보는 착란을 일으킨다. 가령 나는 나를 거울 속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보는 신체 속에서 나를 느끼고, 옷을 입고 있는데도 이 벗은 신체 속에서 나를 본다. 베이컨의 작품 속에서 신체는 자기 몸을 이루는 유기체를 빠져나가고, 옷을 입은 형상이 거울이나 화폭 속에서 벌거벗은 자신을 본다. 이런 상태에서는 합리적 사유란 불가능하다. 회화는 히스테리다. 그것은 우리 앞에 신체의 현실을 세우고, 재현으로부터 해방된 선과 색을 세운다. 신체의 순수한 현전이 일어날 때 눈은 이러한 현전에 걸맞는 기관이 된다. 눈은 더 이상 하나의 기능으로 특화된 유기적 기관이기를 그만두고 다기능적이며 전환적인 기관이 된다. 회화는 바로 이런 눈의 변화, 몸의 변화를 일으킨다. 회화는 감각을 그리는 것이기에, 회화와 함께 히스테리는 예술이 된다. 그 히스테리는 화가의 히스테리가 아니라 회화의 히스테리를 가리킨다. 재현에서 해방된 선과 색, 이것이 현대회화의 특징이다. 현대회화의 본질은 가시적인 것의 재현이 아니라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화하는 데에 있다. 회화의 임무는 눈에 보이지 않는 이 을 보여주는 데 있다. 비가시적인 힘의 가시화, 이 모순적 과제를 예술적으로 해결한 것 중 하나가 고딕 성당이다. 회화는 감각을 그린다. 회화란 장식이 아니라 리듬 감각의 묘사다. 궁극적인 것은 리듬과 감각 사이의 관계다. 전통적인 회화는 데생에서 시작한다. 때문에 창작의 결과가 그림을 시작하는 순간에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알레아토락 Aleatorik(창작과정이나 공정의 일부를 우연에 맡기는 제작방식, 비합리적, 비의지적, 사건적, 자유롭고 우연적)의 우연의 효과는 시작과 결말을 잇는 결정론적인 절차가 사라진다.

    사진(사실성, 진실성, 기록성)이 무엇인가가 된다는 사실, 시각에 스스로를 강요한다는 사실, 그럼으로써 눈 전체를 좌지우지 한다는 사실은 그럴듯한 이미지로 우리의 시각을 사로잡고, 그 판에 박힌 이미지로 세계의 모습을 상투화하여, 그것을 사실인양 우리에게 강요한다. 카메라로 찍은, 판에 박힌 사진적 사실이 있다면, 카메라로 찍을 수 없는, 오직 회화만이 보여주는 회화적 사실이 있다. 회화의 임무는 바로 이 회화적 사실을 형성하는 데 있다. 구상과 추상을 동시에 벗어나려는 모순적 효과를 얻어내기 위해 베이컨은 디아그램 diagramme(돌발 흔적)이라는 전략을 도입한다. 화폭에 우연적인 표시들을 하고, 쓸거나 문지르고 물감을 뿌리기도 한다. 한마디로 비의미적이고 비재현적인 선들, 지역들, 흔적들, 얼룩들 전체이다. 이렇게 디아그램은 화폭에 혼돈과 재난을 도입한다. 이 혼돈과 재난 속에 빈 화폭을 미리 점령한 기존의 판에 박힌 이미지들은 무장해제되고, 새 이미지들이 생성될 장이 열린다. 즉 혼돈이며 파국이다. 동시에 새로운 질서 혹은 리듬의 싹이기도 하다. 디아그램의 파국은 숭고의 미학이다. 그것은 지상의 모든 것을 쓸어가는 대홍수처럼 기존의 이미지들을 모두 무효화하고 생각하지도 못했던 새로운 사건을 도래하게 한다. 우연적 흔적들은 재현도, 이야기도, 의미작용도 하지도 않는다. 그것들은 구상을 지우고, 화폭을 혼돈에 빠뜨린다. 돌발 흔적은 사실의 가능성이지 사실 그 자체는 아니다.(=추상기계, 새로운 유형의 현실, 회화적 사실, 변조, 이미지 변형의 기계, 특이성, 유목적 횡단성, 창조적인 도주선을 그려내고 긍정적인 탈영토화의 특질들을 결합) 사물의 도상(재현)이기를 포기한 현대회화는 추상(상징)으로 나아간다. 이때 사물들은 관습화한 코드에 따라 변형이 된다. 현대회화의 또 하나의 흐름은 소위 서정추상이다. 중요한 것은 그림 자체가 아니라 그림을 그리는 행위다. 들뢰즈에게 회화는 한갓 형태의 변형이 아니라, ‘만지는 눈, 눈의 만지는 시각을 획득하기 위한 활동이다. 20세기에 회화가 재현을 포기한 후 다시 촉지적 기능이 강조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벤야민이 대중의 신체에 직접 작용하는 영화예술에서 혁명적 가능성을 보았다면, 들뢰즈에게 회화는 단순히 미적 관조의 대상이 아니다. 회화는 감각의 폭력을 통해 신체의 변형을 이룬다. 그것은 우리의 몸을 기관 없는 신체로 변형시킨다. 기관의 분화를 지우고 의미작용을 무효화하고, 주체를 해체함으로써 얻어지는 스피노자적 신체는 미리 존재하는 상투성의 틀을 전복하고 끝없이 새로운 것을 생성해내는 새로운 유목적 주체다. 회화는 이미 주어진 상투적인 리얼리티를 재현하는 게 아니라 아직 도래하지 않은 새로운 리얼리티를 창조한다. 그림 앞에 선 관찰자의 체험 혹은 느낌 바로 그것이 작품으로 성립하는 것이다.(칸트의 미란 인식대상과 인식 주관의 조화에 그 본질이 있다. 우리의 파악 능력에 적합하게 생긴 대상이나 형태는 아름답다) 현대예술은 가상의 지위를 갖지도 않고 미적 쾌감은 커녕 당혹감만 느낄 뿐이다. 인식 대상도 찾을 수 없다. 우리의 지각은 좌절하고, 인식은 한계에 부딪친다. 기교도 기법도 없고 현실을 묘사하지도 않고, 대상을 묘사하기를 포기하고, 묘사할 수 없는 것을 묘사한다. 그것은 우리의 일상적 인식 능력 저 밖에 있는 어떤 것이다. 나의 인식 능력으로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그것과 마주치는 불편한 체험, 그것은 바로 숭고의 체험이다. 아방가르드의 미학적 강령이 전통과의 단절(유럽회화와의 단절)이다. 그것은 시대의 황폐함과 도덕적 충격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한 전략은 미를 거부하고 숭고(주제, 형이상학적 체험, 창조의 행위와 사건, 격동과 고양의 감정, 성스러운 장소, 부정적 묘사, 영웅적인 숭고한 인물들, 존재의 상태와 빛, 뜨거운 열광)를 전면에 내세우는 것이다. 미는 잔잔한 호수처럼 우리의 내면을 조용히 가라앉히나, 숭고는 폭풍우가 부는 바다처럼 우리의 내면을 휘저으며 고조시킨다. 현대예술을 추동하는 것은 미를 파괴하려는 열망이다. 숭고는 더 이상 자연 속에서 인간을 압도하는 수학적 크기나 역학적 힘이 아니다. 그것은 아방가르드 예술이 인간에게 주는 그 묘한 효과, 즉 인간의 합리적 인식의 한계를 넘어선 것을 체험하는 불편한 쾌감을 의미하게 된다. 숭고를 드러내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하나는 숭고의 간접적 묘사다. 무한히 큰 것을 유한한 화폭에 옮겨놓는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낭만주의 화가들은 자연을 크고 위력적으로, 인간을 작고 미약하게 묘사하곤 했다. 즉 콘트라스트를 통해 자연의 장엄함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려 했다. 또 다른 숭고의 묘사 방법은, 침묵, 즉 눈에 보이는 것의 묘사를 아예 포기함으로써 이 세상에 말이나 그림으로 묘사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현대예술은 숭고를 묘사하기 위해 굳이 숭고한 대상을 그리지 않는다. 그것은 낭만주의적 예술의 장엄함과 결별한다. 또한 숭고는 부정적 묘사를 통해 매개되는 것은 사건성의 체험이다. 숭고는 지금, 여기에서, 무언가가 일어난다로서 존재하며, 그런 의미에서 숭고한 것은 그림 그리기 자체라는 것이다. 개념으로서의 회화는 숭고의 간접적 묘사로 낭만주의 방법으로 숭고한 대상을 그린다. 반면에 사건으로서의 회화는 숭고의 부정적 묘사로 아방가르드의 방법으로 대상의 묘사를 포기함으로써 숭고를 사건으로 제시하려 한다. 즉 사건으로서의 그림 그리기이다. 그림은 사라지고 오직 그리기만이 남는다. 존재자는 주어지지 않는다. 묘사된 것이 아예 없기 때문이다. 거기에서 주어지는 것은 존재의 체험,  뭔가 일어난다는 것의 체험이다. 이 체험을 아방가르드의 정신으로 본다. 흔히 숭고는 쾌와 불쾌가 혼합된 모순적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것으로 설명된다. 가령 버크에게 숭고는 즐거운 공포 즉 생명을 박탈당할 위험에서 오는 공포와 그 위험이 사라질 때의 안도감에서 생기는 기쁨의 혼합감정이었다. 숭고는 거대한 크기(수학적 숭고)나 위대한 힘(역학적 숭고)을 가진 대상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사건성의 체험에 있다. 숭고 체험에 수반되는 그 모순적 감정을, 리오타르는 기대하지 않은 사건을 기다리는 두려움과 미지의 것을 느끼는 데서 비롯되는 기쁨의 혼합감정으로 설명한다. 그리고 스피노자의 언어로 이 혼합감정의 효과가 사건성의 체험을 통해 존재를 강화시키는 데 있다. 숭고는 사건이 수반하는 존재의 강화를 낳는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더 이상 인식의 문제가 아닌 존재의 문제, 더 이상 관념론적 현상이 아닌 유물론적 사건이 된다. 여기서 리오타르의 숭고론은 생산미학이나 작품미학이 아닌 영향미학의 성격을 띤다. 숭고는 예술 자체에 있지 않다. 숭고는 예술에 대한 관조에 있다고 말한다. 숭고는 작품이 아니라 그것을 수용하는 자에게 달려 있다. 따라서 예술론은 작품의 발신자/수행자 개념이 아니라 수신자 개념에 기초해야 한다. 그러므로 주체가 영향을 받게 되는 방식, 감정을 경험하고 수신하는 방식, 작품을 판단하는 방식에 대한 분석은 정당성을 얻게 되고, 오늘날 예술작품을 어떻게 생산하느냐?’가 아니라 예술 고유의 영향을 경험한다는 것은 어떤 경험인가?’하는 것이 미학의 관심사가 된 것이다. 버크의 숭고는 공포와 연관된다. 현대예술은 우리를 놀라게 한다. 과거의 예술은 관습적 언어가 있었기에, 그 익숙한 코드에 따라 쉽게 해석이 되었다. 하지만 현대의 예술에는 이렇다할 해석의 코드가 없다. 이미 존재하는 코드(양식)에 따라 메시지(작품)를 만드는 게 아니라 메시지를 가지고 이제까지 존재하지 않은 새로운 코드를 만들어내려 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아무런 준비도 갖추지 못한 채 작품과 맞닥뜨리는 관객은 작품 앞에서 번번히 충격을 받게 된다. 쇼크는 아방가르드 예술의 중심적인 미적 범주가 되었다. 자본주의 경제에는 숭고한 면(경쟁을 위해 항상 새로운 것을 내어놓아 놀라게 하는 것)이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에는(표준화, 규격화, 획일화) 동시에 그 숭고함을 파괴하는 면(새로움의 제스처로-대량생산-진정한 새로움을 가장하는 것)이 있다. 흔히 아방가르드의 본질은 끝없는 혁신의 추구(사건)에 있다. 현대예술은 의미를 파괴하고 소통을 거부함으로써 사회에 저항을 한다. 사회가 가하는 동일화(표준화, 규격화, 획일화)의 축적에서 벗어나기 위해 예술은 영원히 탈주를 해야 한다. 현대예술의 주요한 미적 범주는 미가 아니라 숭고이다.(1940년대) 한마디로 숭고는 더 이상 재현이냐, 추상이냐의 차이가 아니라 현전presence(사건성)의 여부에 달려 있다. 숭고와 시뮬라크르는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대립하고 동시에 보족하면서 현대인의 현실 체험을 이루는 두 기둥이다.

    자본의 재생산은 가상의 복제이다. 소비되는 것은 사용가치가 아니라 기호(상징의 교환체계)이다. 자본주의는 이미 생산 위주에서 소비 위주의 체제로 변모했다. 하지만 거기서 소비되는 것은 상품이 아니다. 상품은 그 사용가치로서가 아니라 그 상품과 다른 상품 사이의 차이’, 그것이 드러내 주는 계층적, 신분적 차이를 표시하기 위한 상징으로 소비된다. 현대사회는 이렇게 원시사회의 선물교환경제처럼 기호를 소비하는 상징의 교환체계로 이루어져 있다. 이 속에서 사물 자체는 사라진다. 보드리야르가 보기에 예술 역시 이 교환의 체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오늘날 그것은 다른 상품들과 마찬가지로 기호로서 소비된다. 미디어는 메시지다. 이렇게 메시지보다 미디어를 주목하는 것은 기의보다 기표를 중시하는 프랑스 철학자들의 일반적 경향과 일치한다. 도구가 팔, 다리의 연장이듯이 미디어는 인간의 확장이다. 보드리야르는 이 관계를 뒤집어 거꾸로 인간을 미디어의 확장으로 간주한다. 오늘날에는 미디어가 만들어내는 하이퍼 리얼리티가 실재보다 더 실재적인 것이 되어버려, 인간이 미디어가 만들어내는 시나리오의 배우가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최근 프랑스 철학자들이 주장하고 있는 차이의 철학에서는 의미를 고정시키려 드는 전통 철학에 반대하여 의미의 비결정성을 주장한다. 그것은 기표, 언표, 텍스트에 최종적 해석이 있음을 부정하고, 차이의 놀이를 자유로이 풀어놓고, 그것이 만들어내는 창조적, 생산적 효과를 기대한다. 보드리야르는 여기서 더 나아가, 차이의 놀이가, 그리하여 의미의 비결정성이 극에 달하면, 아예 의미가 사라지는 변증법적 역설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차이의 생산이 극한에 달하면 그 반대물로 전환하여 오히려 모든 차이를 지워버리는 비생산적 결과를 초래한다. 이때 차이의 생성은 극점을 지나 동일자의 무한증식으로 전락한다. 차이의 극한이 외려 차이를 지우고 동일자의 무한증식으로 전락하는 이 극한 현상을 내파라고 하는 데, 여기서 실재와 가상, 현실의 재현, 원본과 복제, 기의와 기표의 차이는 스스로 붕괴하고, 두 대립 항들이 서로 구별되지 않고 하나로 결합된 거대한 시뮬라시옹의 세계가 탄생한다. 그 세계 속에 이제 새로움은 없다. 새로운 것의 발생에 대한 기대도 없다. 모더니즘의 기관차였던 혁신도 이제는 있을 수 없다. 새로운 것의 생산은 오래 전에 코드에 따른 동일자의 무한한 복제가 되어버렸다. 계급과 같은 사회학적 범주들도 내파되어 이제는 무의미하다. 계급의 범주도, 사회의 개념도 내파되어 무차별하고 무관심하고 냉담한 대중 속으로 사라진다. 이로써 사회적인 것의 존립은 불가능해지고 역사는 종언을 고한다. 복제는 원작을 베끼는 수준을 넘어 원작의 지위를 흔드는 경향이 있다. 시뮬라크르(복제의 복제)는 그저 복제를 복제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원본과 복제의 구별 자체를 없애고, 원본과 복제 사이의 일치(재현)라는 인식의 이상마져 무너뜨린다. 여기서 복제에 대한 원본의 우월적 지위는 서서히 무너진다. 과거의 철학자들은 원본-복제-복제의 존재론적 지위를 엄격히 구별하여 이들 사이에 위계질서를 세우곤 했다. 복제는 원본에 가까울수록 참된 것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거꾸로 복제가 예술의 창작에 영향을 주기도 하고, 원본이 복제를 흉내내는 전도현상이 벌어진다. 오늘날 원본은 복제를 닮아간다.(디스토피아, 포스트모던의 불가피한 조건, 매체의 조작) 조작이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행해진다. 즉 어떤 예기치 않은 돌발사태가 일어나 시뮬라시옹의 가상성이 폭로되는 것을 저지하고 차단하기 위하여 아예 현실의 사실성 자체를 없애버리는 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데올로기는 더 이상 실재를 거짓으로 재현하는 게 아니라 실재 자체를 사라지게 하는 하이퍼 리얼리티의 전략을 통해 작동한다. 오늘날 예술은 의도적으로 무가치한 것, 무의미한 것, 범상한 것을 지향한다. 그 반면에 세계는 점점 더 미학화한다. 이렇게 세계 전체가 미적으로 된다는 사실은 어느 정도 예술과 미학의 종언을 의미한다. 예술이 범상한 것이 되고, 범상한 것은 예술이 되고, 미적 가치가 예술 밖의 모든 것으로 확장될 때, 미적인 것은 비미적인 것과의 변별성을 잃고 사라지고, 예술은 불필요해진다. 예술이 더 이상 없기 때문에 예술이 죽는 게 아니라 예술이 너무 많기 때문에 예술은 죽는 것이다. 차이의 생성이 극점을 지나면 동일자의 지루한 무한증식을 낳듯이, 도처에서 증식되는 예술 속에 진정으로 새로운 사건은 없다. 오직 자기 동일성의 무한 반복만이 있을 뿐이다. 이렇게 현대예술의 모든 이중성은 바로 무가치, 무의미, 비의미를 요구한다. 그럼에도 그것이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은, 그 무가치와 그 무의미 뒤에 무언가가 감춰져 있을지 모른다는 반대 추론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 무가치한 예술을 무시할 경우 우리는 모종의 죄의식을 느끼게 되고, 거기에 편승해 현대예술은 마치 가치 있는 양 포장된다. 바로 거기에 전문가 범죄가 있다. 그리하여 예술의 이 공범적인 편집증 때문에 더 이상 비판적 판단은 있을 수 없으며, 무가치에 대하여 타협에 의한 공유만이 있을 뿐이다. 그것이 바로 예술의 음모이며, 베르나사주, 상설전시, 전시회, 복원, 수집, 기증과 투기로 교체되고 있는 예술의 본원적인 무대이다. 범죄는 단지 무가치한 작품의 가격을 터무니없이 높게 올리는데만 있는 게 아니라, 이미 작품의 미적 가치, 자체를 생성하여 관리하는 과정에서부터 개입한다. 이 범죄에는 피해자가 없다. 그것은 예술계에 관계하는 모든 이가 함께 참여하는 공모이기 때문이다.

    보드리야르는 그래피티 예술에 주목한다.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문자로 이루어진 길바닥의 낙서에서 기의 없는 기표, 즉 실재를 가리키는 기능으로부터 독립하여 자유로이 유동하는 기호체계를 본다. 그래피티 예술은 의도적으로 의미를 없앰으로써 기호의 지배가 거짓말을 한다는 사실을 폭로하는 데, 이것이 이 사회에서 아직 가능한 몇 안되는 비판적 개입의 가능성 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기표의 놀이의 창조성에 주목하는 것이 프랑스 철학의 일반적 특징이지만, 그래피티는 의미의 비결정성이 아니라 아예 의미의 사라짐을 증언한다. 보드리야르의 이론과 친화성을 가진 또 하나의 장르는 팝아트다. 자본주의적 생산은 과거의 장인적 생산과 달리 유일물의 생산이 아니라 시뮬라크르의 생산, 즉 코드에 따른 대량복제로 이루어진다. 이런 상황에서 유일하게 장인적 생산의 전통을 이어온 것이 예술이었으나, 뒤상과 워홀은 산업적으로 대량복제된 산물들을 예술에 끌어들임으로써 예술마저 시뮬라크르의 영역에 끌어들인다. 범상함의 예술화를 통해 예술은 범상해지고, 이로써 예술의 영역에서도 내파가 일어나 미적 가치가 사라지는 가치의 황홀경, 즉 초미학의 상황이 도래한다. 재현이 아니라 반복을 지향하는 팝아트의 특성 역시 시뮬라시옹 이론과의 친연성을 보여준다. 과거의 예술이 세계의 공간적 질서를 그리려 했다면, 현대예술은 예술가의 전기 속의 시간적 연속을 표현할 뿐이다. 과거의 예술이 유사성에 따른 공간적 재현을 했다면 오늘날의 예술은 시간적 연속에 따라 차이를 반복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더 이상 공간이 아니라 시간 속에, 유사성의 영역이 아니라 차이의 영역에, 질서의 영역이 아니라 계열의 영역 속에 있다. 하나의 이미지가 반복적으로 복제되면서(마릴린 먼로) 작품이 시뮬르크르의 계열을 이루는 것이다. 보드리야르의 이론에 가장 적합한 예는 극사실주의 hyperrealism일 것이다. 극사실주의 화가들은 사진을 이용하여 복제를 하거나, 혹은 실물을 직접 복제하여 마치 실물을 사진으로 찍은 듯한 작품들을 만들어낸다. 복제의 대상은 팝아트처럼 무가치한 일상의 사물이나 미적 가치가 결여된 황량한 길거리의 풍경이다. 극사실주의는 사진과 복제, 실물과 복제의 구별을 흐린다. 그것은 사진보다 정교한 복제로써 사진의 기록성을 부정하고, 실재보다 더 실재적인 복제로써 현실의 실재성을 의문에 부친다. 즉 실재로부터 해방된 우리는 실재보다 더 실재적인 것(하이퍼 리얼리티)을 만들 수 있다. 보드리야르는 오늘날 예술에서 발생하는 어떤 사라짐에 대해 이야기한다. 여기에서 시뮬라시옹을 통한 실재의 사라짐은 팝아트나 극사실주의를 넘어 현대예술 일반의 특징으로 설명된다. 미니멀아트, 개념예술, 하루살이 예술, 반예술에서 예술은 탈물질화된다. 오늘날 예술은 미니멀이 되지 않을 수 없고 자신의 사라짐을 행하지 않을 수 없다. 예술은 사라지는 모든 형태들처럼 시뮬라시옹을 통해 사라지려고 한다. 비디오, 오디오 비주얼, 회화와 조각의 이미지 등 대부분의 현대의 이미지들은 사라져버린 무언가의 흔적일 뿐이다. 여기서 사라져버린 그 무언가는 아마도 시뮬라시옹이 사라지게 만드는 실재일 것이다. 단색화를 통하여 우리를 매혹하는 것은 모든 형태의 기이한 부재이다. 그것은 예술의 형태로 모든 미적 통사론의 사라짐이다. 여기서 모노크롬 회화는 실재의 사라짐, 재현의 사라짐, 미적 통사론의 사라짐의 상징이 된다. 모든 것이 사라진 화면의 부정적인 강렬함에 대해 얘기할 때, 보드리야르는 숭고의 부정적 묘사를 말하는 리오타르를 연상시킨다. 시뮬라크르의 미학은 그 극한에서 역설적으로 숭고의 미학에 합류한다.

     

    경기도의 어느 도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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