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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영상, 미학론 47 (교재 공개)
    패러다임/예술 2021. 3. 11. 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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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생각하기 이해하기 실천하기-

     

    영상, 미학론 47

     

    391. 모든 예술에는 그 과정이 창작이다.

    (영혼의 현상학)의 주된 기능은 우리들을 변화(존재의 전환, 생성, 창조)시키는 것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특별히 인간적인 일체의 것은 로고스()이다. 언어에 앞서 있는 영역에서라면 우리들은 사유할 수 없을 것이다.

    고전주의(보편성)사실주의, 낭만주의(상대성, 독창성, 개아성, 특이성, 상징성, 내재성)이미지구조주의탈 구조주의

    훌륭한 작품들은 내재적으로 잘 짜여진 가치와 보편적인 가치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 고전주의에서 아름다움이란 내용(자연, 진리)에 완벽하게 일치하는 형식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상대적인 문학관이 극단화되어 내재적인 문학관이 되면, 작품의 진리성은 더 이상 문제되지 않게 된다. 왜냐하면 작품 스스로가 하나의 독자적인 세계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세계이다. 그것은 모사의 대상, 즉 작품의 아름다움을 가능케 하는 그 외부의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이미지(사상에 앞선다)는 지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소박한 의식의 재산일 따름이다. 그 표현에 있어서 그것은 젊은 언어이다. 시인은 그의 이미지들의 새로움으로 하여 언제나 언어의 원천이 된다.

    번역가는 배신자다.

    가치의 영역에서는 열쇠는 열기보다는 닫는 것이고, 손잡이는 닫기보다는 여는 것이다. 그리고 닫는 동작은 여는 동작보다는 언제나 더 확고하고 더 강하고 더 짧은 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인간은 구석으로 숨어 들어가기를 좋아한다. 새집, 조개껍질, 구석 등의 이미지는 우리들 내부에서 원초성(원초적 이미지)을 요구하는 이미지로(내밀성 거주) 특징지어 보인다.

    인간은 벙어리다. 말하는 것은 이미지인 것이다. 왜냐하면 오직 이미지만이 자연과 보조를 같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상상력은 보호(안전, 덮고 숨김)의 체험을 사는 것이다. (, 긍정, 여기, 이승)과 밖(아니오, 부정, 저기, 저승)은 분단의 변증법을 이룬다.

    인간의 진화는 거의 수용기관, 즉 시각과 청각(, 그림, 음악, 조각, 건축, 무용)의 발달로 특정지어져왔다. 인간이 이룩한 의사소통 체계 역시 그러하다. 우리는 결코 세계를 있는 그대로 알 수 없으며 단지 감각 수용기관에 미치는 물리적 힘의 영향을 입을 뿐이다. 공간의 지각은 지각시키는 능력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배제시키는 능력의 문제이기도 하다. 냄새의 변화와 이동은 공간적인 위치를 일깨워 줄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의 풍미를 더해준다. 인간과 그 환경의 관계란 자신의 감각 기관의 기능과 더불어 그 기관이 어떻게 반응하도록 조건지어져 있는가이다. 정보 수집체로서의 눈의 기능도 중요하지만 정보를 전달(눈빛, 동공의 크기)하는 면에서의 유용성도 소홀히해서는 안 된다. 망막에 비친 상과 인간이 지각하는 것은 반드시 구별해야 한다. 인간은 여러 감각들 끼리의, 그리고 과거 경험과의 상호관계의 결과로서 거리를 판단한다. 또한 우리는 무엇을 볼 때에는 빛과 색 형태 그리고 들을 때에는 음 이외는 아무것도 즉각적으로 지각하지 못한다. 즉 엄밀히 말해서 마차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머릿속에 마차로 연상되어 온 소리를 듣는 것이다. 극장에서의 음향효과는 청각적인 단서에 근거하여 시각적 세부 사항을 채워 넣는 인간의 능력을 이용한 것이다. 같은 의미에서 거리가 즉각적으로 눈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다. ‘높은’, ‘낮은’, ‘왼쪽’, ‘오른쪽과 같은 단어들이 우선적으로 적용되는 것은 운동 감각적 경험과 촉각적 경험이다. 즉 뇌의 상위 수준에서 종합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감각적 입력들은 아무런 효과도 낼 수 없다.(말하기나, 말하는 소리도 마찬가지다) 망막에 비친 상은 눈이 끊임없이 움직이기 때문에 결코 똑같을 수 없음에도, 역설적이게도 문, , 탁자 등은 그것을 인지하는 각도상의 큰 변화에도 불구하고 항상 같은 형태와 색상으로 보인다. 사물은 13피트(혹은 16피트) 보다 멀어지면 갈수록 평면적으로 보인다. 관객과 자신이 묘사한 사실 사이에 놓여 있는 장애물들을 제거하는 것이 예술가의 과제이며, 예술가의 주요한 역할 가운데 하나는 보통 사람들이 자신의 문화 세계에 질서를 부여하도록 돕는 일이다. 미술도 언어와 역사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커뮤니케이션의 한 체계이다. 고대의 예술은 주술적인 것이었다. 위대한 예술은 심오한 커뮤니케이션을 행한다. 그리스에서 조각이 회화보다 1천년 앞선 이유는? 복제품(회화)의 한계점인 규모의 문제는, 모든 예술작품은 특정한 규모로 창조된다. 그 규모를 변경시키는 것은 모든 것을 바꾸어 놓는 것이다. 더구나 조각품(아름다움, 진리, 자연, 미메시스...)은 직접 만져보고 여러 각도에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시각장(실제 망막에 비친 상, 눈으로 보는 것)과 지각된 시각 세계(아는 것)는 구별해야 한다. 복제화를 통해서는 사실적으로도 입체적으로도 느낌을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모국어에 의해 규정된 선들을 따라 자연을 해부한다. 절대적으로 공평무사하게 자연을 기술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스스로 가장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순간조차 특정한 해석의 양식에 제약을 받고 있다.

    진정한 거리는 눈의 소관이 아니다. 그것은 정신에게만 허락된 일이고 그 가치는 언어의 가치인 것이다. 왜냐하면 사물을 하나로 엮는 일은 언어의 소관이기 때문이다. 현실 세계는 대부분 그 집단의 언어습관 위에 구축된 것이다.

    모든 유기체는 반복에 크게 의존한다. 즉 한 시스템에서 받아들인 정보는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서 다른 시스템들에 의해 복사(백업)된다. 인간 자신도 문화에 의해 대규모 반복적인 방식으로 프로그램된다. 사람들이 대화할 때에는 메시지의 일부만을 공급하고 그 나머지는 듣는 사람이 채워 넣는다. 마을이나 풍경도(고정형태)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시대와 문화에 따라 변화하는 계획을 따른 것이다. 공간 감각을 잃는다는 것은 정신이상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건물의 모양을 만들고 건물은 우리의 모양을 만든다.

    밀접한 거리;가까운 단계, 먼 단계(6-18인치)

    개인적 거리;가까운 단계(1.5-2.5피트), 먼 단계(2.5-4피트)

    사회적 거리;가까운 단계(4-7피트), 먼 단계(7-12피트)

    공적인 거리;가까운 단계(12-25피트), 먼 단계(25피트 이상)

    인간이 제 아무리 애써도 자신의 문화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문화는 인간 신경조직의 뿌리에 침투되어 인간이 세계를 지각하는 방식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문화의 대부분은 자유의지에 의한 조절을 벗어나 있다. 인간과 그 연장물들(, 도시기술, 언어, 자동차, 컴퓨터, 언어 등)은 하나의 상호연관된 체계를 이루고 있다. 지각은 기억 또는 과거의 자극에 의존한다. 즉 과거가 지금 어떻게 지각하느냐의 기반을 이루고 있다. 언어는 본능이다.

    아름다움의 본질적 특성은 즐거움(안도감-숭고)이다. 아름다움은 심리적인 현상이다. 고전적인 전통적인 이론에서는 아름다움의 기준은 비례와 균형, 조화, 완전성, 적합성 등이다.

    추한 것과 끔찍한 것이 숭고와 결합될 수 있다.

    어떤 대상이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려면 어느정도 새로운 것이어야 한다. 호기심은 많든 적든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 모든 감정들에 수반되는 감정인 것이다. 또한 고통(숭고)과 즐거움(아름다음)을 유발시킬 수 있어야 한다. 고통은 즐거움이 없어졌기 때문에, 혹은 즐거움은 고통이 사라졌기 때문에 생기는 결과는 결코 아니다. 서로 독립적인 감정이다.(의존적일 수는 있다) 감정이입을 통해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자기보존과 관련이 있는 경우에는 고통이 될 것이고 따라서 숭고의 원천이 될 수 있다. 지나치게 가까이에서 우리를 압박하지만 않으면 공포는 언제나 안도감을 준다. 실제 사건을 통해서는 고통을 느끼지만 그에 대한 묘사를 통해서는 안도감을 느낀다. 그러나 위험에서 벗어나 있는 일이 안도감의 원인은 아니다. 어떤 대상을 보면서 무서움을 느낀다면 그 대상은 숭고하다. 실제로 공포(경악)는 명시적이든 암묵적이든 모든 경우에 숭고의 지배적 원리이다. 일반적으로 어떤 사물이 아주 두려운 것이 되려면 불분명해야(상상력 자극감동) 한다. 우리가 어떤 사물에 대해 감탄하고 그로인해 흥분을 느끼게 되는 것은 그것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시의 효과는 시가 불러 일으키는 이미지 때문만이 아니라 불명료함(불확실, 혼돈)에도 원인이 있다. 우리가 그 한계(선명, 경계, 인식, 명확, 생생)를 알 수 있을 때는 어떤 사물도 감동을 주지 못한다. 즐거움은 노력이 필요없을 정도로, 우리보다 힘이 훨씬 약한 대상들을 통해 즐거움을 얻는다. 반면 고통은 우리보다 강한 힘을 지닌 대상들에 의해 유발된다. 즉 힘, 폭력, 고통, 공포 등 일반적으로 힘은 그에 수반되는 공포 때문에 숭고해 진다. 숭고는 언제나 공포가 수반된다. 우리가 신 앞에서 느끼는 기쁨은 두려움에 떨면서 느끼는 기쁨이다. 그리고 신의 은총을 입을 때는 우리는 그토록 엄청난 은총을 줄 수 있는 힘 앞에서 전율할 수밖에 없다. (거대함, 무한함은 연속과 균일성-둥근 물체상상력은 휴식을 얻지 못한다-에 의해 얻어진다. 혼란, 장엄, 어려움, 무질서, 강한인상, 태양 빛, 빠르게 움직이는 빛-번개, 어둠-암흑, 양극단, 큰소리, 갑작스러움-이미지, 소리가 시작이나 중단되었을 때-, 간헐적으로 지속되는 소리나 빛)이 숭고의 주요한 원천이다. 결핍(공허, 어두움, 고독, 침묵...)은 두려움을 자아내기 때문에 장엄하다.(길이높이깊이)

    진정한 예술가라면 관객을 다양한 방법으로 속여 훌륭한 목적을 성취할 수 있다. 반면 규모만 엄청난 계획들은 언제나 평범하고 저급한 상상력의 표시이다. 어떤 예술작품이 웅장해 보이는 것은 오로지 그것이 우리를 속일 때만이다.

    무슨 일이 일어날 지 모를때면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태에 대해 두려워 하는 것이 우리 인간의 본성이다. 그래서 불확실함이 그토록 공포를 자아내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종종 손해의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그것을 없애려 노력한다.

    쓴 맛과 악취, 촉각(노역, 번뇌, 고문)은 숭고의 원천이 될 수 없지만 어떤 장엄함과 연결되거나 그것을 묘사하거나 거기에 대해 이야기 할 때에는 가능하다. 아름다움은 측량과는 상관이 없으며 산술이나 기하학(비례, 균형, 유용성, 적합성, 합목적성, 완전함)과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

    예술에 정해진 규칙이란 없다.

    사실 사진은 지금껏 객관적인 적이 없었고, 사실을 그대로 묘사한 적도 없었다. 사진의 객관성은 그저 이상일 뿐이었다. 특정 프레임을 고르고 선택하는 과정, 노출시간, 초점거리, 선명도, 순간 포착 등 이 모든 것은 사진을 회화만큼 주관적인 작업이며 주관적으로 만드는 요소이다. 사진은 사실적이지는 않다. 하지만 진실하다. 이제 작폼 사진은 사진기의 버튼을 누르는 순간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순간들이 모여 서로 녹아들면서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구성사진)

    미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작업에 적용된 기술이 아니라 완성된 작품이다. 회화든 사진이든 작가가 추구하는 공통의 목표가 존재한다. 즉 눈 앞에 보이는 대상으로 작품을 빚어내는 일이며, 더 나아가 이 작품을 통해 감상자를 감동시키고 이해시키고 위로하는 일인 것이다. 자연은 일종의 사전이다. 자연에는 문장 혹은 단락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수많은 단어들이 들어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연이 문학적 표현 그 자체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미는 형식적 완전성과 연관된 반면, 추는 탈형식성이나 기형성 또는 이념적인 것과 연관된다. 그리고 형식적 불완전성을 내포한다는 의미에서, 숭고는 넓은 의미의 추에 속한다. 따라서 숭고와 추는 비형식성이나 탈형식성을 공통분모로 갖는다. 숭고의 대상은 일반적으로 거대하거나 불규칙적이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명료한 관념을 가질 수 없다. 숭고의 관념은 근본적으로 불명료하거나 불투명한 것으로 특징짓는다. 반면에 미는 현상적 구조를 명료하게 인지할 수 있고, 그러한 인지가 적극적 쾌를 산출한다. 즉 미는 일종의 명료한 관념이다. 결국 숭고가 불쾌감과 고통과 긴밀하게 연결되는 근거는 우리가 거대하거나 불규칙한 대상에 대해 명료한 관념을 가질 수 없다는 사실에 있다.

    지각할 수 있고 동일시 할 수 있는 형태나 규칙성을 인식하는 일은 상상력의 소관이다. 시각 대상을 마주할 때 상상력이나 구상력은 먼저 대상의 구조를 추정적으로 가늠하면서 마음에 심상을 구성한다.(마음의 도식) 그리고는 상상력을 활성화시켜 심상과 구조를 맞추어 본다. 그 도식과 대상의 구조가 서로 일치할 때 그 일치의 심리적 효과도 쾌의 감정이 발생한다. 반면에 상상력이 도식화할 수 없을 만큼 지극히 복잡하거나 거대한 사물이나 상태는 상상력의 자유로운 유희를 좌초시킨다. 즉 사물과 마음의 일치가 깨지기 때문이다. 이때 상상력은 무력감과 고통을 느낀다. 거대한 규모의 대상이나 급작스럽게 변화하는 불규칙한 현상 또는 고통이나 위험을 암시하는 사물들은 마음으로하여금 형식적 면모를 동일시하는 일을 포기하게 만든다.

    숭고는 어떤 거대한 사물이나 공포스러운 대상을 마주할 때 상상력이 활동을 포기함으로써 비로소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숭고는 스스로의 자립적인 어떤 원리에 의해 이성이 작용함으로써 얻는 관념이 아닌 것이다. 대다수의 미학자들은 미를 맥락 안에서 탐구하는 방향으로 전환했다. 즉 미와 추, 그것이 예술과 갖는 연관성은 오직 문화적, 공동체적 현상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지적 맥락주의자에 따르면, 아름답거나 추하게 보이는 것은 참으로 아름답거나 추한 것의 관념과는 다르다. 눈이 발견하는 것과 마음이 발견하는 것이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형식미의 전형은 구성의 치밀함이나 부분들의 조화 같은 것으로서, 수학적 특성을 갖는다. 미가 단순히 눈으로 보기에 아름답다고 하기에는 알맞지 않게 보이는 성질, 예컨대 그로테스크, 조야함, 숭고, 심지어 추에 가까워진다. 불쾌감을 주는 미가 특별히 주의력을 집중하거나 노력을 기울이고 긴장감을 갖는 것은 미를 강화시키기 위해서다. ‘미의 역설이라고 부를만한 미적 쾌의 면모는 때때로 가장 고통스러운 주제에서 미가 발견된다는 사실에서 발견된다. 실상 쾌와 고통은 반대 개념이 아니다. 쾌란 그 자체로 동일시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어떤 활동이나 사건, 경험에 주의력을 모으고 몰입(호소력, 매력, 호감)하는 강한 정도를 가리키는 지표일 수 있다. 쾌를 주의력이 집중되고 경험이 강화되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쾌가 고통을 수용한다는 것이 함축되므로 역설이 해소되는 것이다. 그래서 미에 이르는 도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주의력을 집중시키고 경험을 강화하는 다양한 종류의 감정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즉 감정은 쾌와 고통의 경우처럼 개념적 대립에 부딪히지 않고도 경험을 강화시킬 수 있다. 예컨대 공포나 연민 같은 부정적인 감정은 그 자체로는 피하고 싶은 경험이지만, 그것이 예술적 표상과 연결될 때 관람자의 경험을 강화시킴으로써 쾌로 변환될 수 있다. 즉 공포는 임박한 위험에 주목하게 하고 연민은 슬픔의 원인들을 인지할 수 있게 한다. 따라서 감정은 미적 감흥의 일부인 동시에 예술적 특질을 인지하는 능력의 표지가 될 수 있다. 어떤 예술 작품이 환기하는 혐오감은 그 자체로 혐오스러운 것으로 기술될 수 있지만, 가장 끔직스러운 경험을 아름다움으로 변환시킬 수 있는 예술작품이 있을 수 있다. 따라서 쾌와 고통은 단순한 병존이 아니라 유의미한 방식으로 미를 창출하는 상호 대대적 관계에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즉 미와 숭고의 관념들이 단순히 배타적이 아니라는 것으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미와 숭고는 실제로 명목적인 이름에 불과하며 실제로는 유기적으로 융합되어 이름없는 미묘한 스타일을 자아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혐오감의 역설은 매혹적인 역설인 것이다. 아는 것은 경계를 설정하지만, 숭고는 지식의 불가능성으로 정의된다. 그러므로 결여라 부르는 종류의 부재들(공허, 어둠, 고독, 침묵)은 숭고이며, 그것들은 예측불가능하고, 자신의 동일성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다. 고통과 쾌는 적극적 본성을 가지며, 옷을 입는 것을, 옷을 벗은 상태가 지체된 대립자로 보는데서 볼 수 있다. 항상 무서운 것을 포함하는 숭고가 중요한 범주인 까닭은 그것이 고통과 쾌의 중첩을 나타내는 특이한 혼합체이기 때문이다. 숭고는 추론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철학적 탐구의 반명제가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항상 모종의 한계나 경계를 넘어서기 때문이다. 범주화를 초월하는 것은 힘이나 장대함의 범주에 속한다. 그것은 용인될 수 없으면서도 불가피한 회의주의적인 경험으로 무서운 불확실성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순응적이고 무해한 힘(평범함)은 반숭고이다. 숭고한 대상은 의심이나 비판을 넘어서 있다. 숭고의 경험은 지배의 경험이다. 황소들은 숭고하지만 거세한 수소들은 그렇지 않다. 늑대는 숭고하지만 개는 그렇지 않다. 우리의 의지에 부합하게 행동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결코 숭고할 수 없다. 유머와 명랑함, 익살스러움, 우스꽝스러움, 해학적인 것은 숭고의 적이다. 냄새는 결코 숭고할 수 없다. (사랑도 마찬가지)의 경험은 숭고와 마찬가지로 즉각적이며 이성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사랑은 오랜 주목과 탐구의 결과가 아니다. 숭고와 마찬가지로 미는 쉽게 형식적으로 분류되지 않는다. 그것은 측정될 수 없고, 추론된 비례의 결과가 아니다. 비례는 미의 원인이 아닌 것이다. 자연 원리로부터 작용하는 어떤 일정한 비율도 미를 산출하는 데 필요하지 않다. 미는 비례도, 완전성도, 덕도, 이성의 산물도 아니다. 미와 숭고는 합리적 탐구와 무관한 무법자인 것이다. 양자 모두 강압적이며, 불가항력적이며, 일종의 유혹이며, 방향을 잃게 하고, 목적을 좌초시킨다. 숭고는 고통, 찬양 그리고 위대함을 포함한 겁탈이라면, 미는 적극적 쾌와 사랑 그리고 왜소함을 수반하는 덫이다.

    무시무시한 모든 것, 또는 무시무시한 대상과 관련된 것, 또는 공포와 유사한 방식으로 작용하는 것은 어떤 것이든지 숭고의 원천이다. 쾌보다도 고통의 관념들에서 훨씬 큰 만족감을 얻을 수 있다. 또한 심신에 더 큰 영향을 준다. 자기보존에 속하는 정념들은 고통과 위험(숭고)이 있을 때 나타난다. 고통과 위험이 없을 땐 나타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예술가들은 편협한 영역 안에 갇혀 있다. 그들은 자연의 모방자라기보다는 서로의 모방자들이다.(이것은 고대로부터 그래왔다) 예술의 참된 기준은 모든 사람의 능력 안에 있다.

    숭고의 근원;1.경악(찬양경외존경). 경악은 공포감이 견지되면서 모든 운동이 정지되는 마음의 상태다. 이때 마음은 그 대상에서 완전히 압도되기 때문에 다른 어떤 것도 생각할 수 없고, 따라서 그 상태를 초래한 대상에 대해서도 추론할 수 없다. 숭고는 엄청난 힘을 행사하기 때문에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추론들을 능가하며, 불가항력적인 힘으로 우리를 몰고 간다.

    2.공포; 공포는 고통이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다.(, 크기가 큰 것-광대, 놀라움, 무시무시함, 기겁)

    3.불명료성;일반적으로 무엇인가를 두려운 것으로 만들려면 불확실성이 필요하다.(, 유령, 도깨비, 민간설화, 환영, 괴물, , 잔악한 政府, 종교) 어둡고, 불확실하고, 혼돈스럽고, 무시무시하며, 숭고적이다. 그것의 원천은 무지에서 온다. 지식과 친숙함은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비천한 자가 된다. 영원과 무한의 관념들은 우리가 가진 가장 감동적인 것에 속하지만, 아마도 무한과 영원만큼 우리가 별로 아는 것이 없는 것도 없을 것이다. 명료성은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이미지들이 한데 엉켜 있고 혼란스러울 때 더욱 감동적이다. 그것들을 따로 떼어보면, 그 위대함은 많이 상실될 것이다. 그것들을 한데 모아보면 명료성을 잃게 될 것이다. 시에 의해 환기된 이미지들은 항상 이러한 종류의 불명료성을 갖는다. 그리고 회화에서조차 이미지들이 갖는 적절한 정도의 모호성은 그 그림의 효과에 기여한다. 회화에서 이미지는 자연의 이미지들과 정확히 닮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연에서 어둡고 혼연되고 불명료한 이미지들은 더 명료하고 확실한 것들보다 더 강력하게 상상력을 자극함으로써 장엄한 정념들을 만들어 낸다. 그렇지만 어떤 대상을 분명하게 본다는 것은 곧 그 한계를 지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명석한 관념은 취약한 관념의 다른 이름이다.

    4.;거대한 힘(위험)의 영역은 다른 영역들과 마찬가지로 숭고한 모든 것의 공통재료인 공포에서 발생한다.(강탈, 파괴, 폭력, 은총, 신성한 두려움) 일반적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보다 힘에서 크게 열등한 많은 것들에서 쾌를 느낀다. 그러나 고통은 항상 어떤 식으로든 우월한 힘을 가진 것에 의해 부여되는 데, 그것은 우리가 고통에 기꺼이 복종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힘의 숭고성(야생말, 황소)은 공포가 동반할 때 산출된다. 그러나 힘의 숭고성이 박탈될 때(파괴) 그것은(, ) 단지 혐오스러운 것이 되고 만다. 즉 힘(무해한)이 유용하게(편의성) 쓰이고 우리의 혜택이나 즐거움에 기여하거나 순종적일 때 그리고 우리의 의지에 순응하며 작용할 때 그것은 결코 숭고하지 않다.(경멸의 대상) 그러므로 우리는 자연적인 힘을 가진 대상에 대해 감동을 받는다. 공포는 최초의 신들을 이 세상에 들여보냈다. 그것이 일단 마음에 작용하면, 필연적으로 그 원천인 힘의 관념이 그 뒤를 따른다. 종교는 경외심이 포함된 공포의 거대한 혼합물을 가진다.

    5.결여;모든 결여가 위대한 까닭은 그것들이 모두 두려워할만한 것이기 때문이다.(공허, 암흑, 고독, 침묵)

    6.광대廣大;크기의 거대함이나, 양의 광대함 못지않게 작음의 극도 어느 정도 숭고하다.(미소성微小性의 경이로움-놀라움, 혼란) 왜냐하면 나누는 것은 더하는 것만큼 무한하기 때문이다.

    7.무한;무한성은 즐거운 두려움을 마음에 채워주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숭고의 가장 진정한 결과이며 가장 참된 테스트가 된다. 감각은 첫 번째 동인動因의 힘이 가라앉을 때까지 옛 노선을 계속 따라간다.(잔상효과)

    8.연속과 균등;부분들의 연속과 균일(균등)은 인공적 무한성을 낳는다.(사원, 성당복도, 십자가) 부분들의 형태가 바뀔 때마다 상상력은 검사를 해야하므로, 우리는 모든 변화의 계기를 한 관념이 완결되고 이어서 다른 관념이 시작하는 것으로 보게된다. 따라서 상상력은 조금도 휴식을 얻지 못한다. 그러나 이 형체(원형체)에 완전한 힘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부분들이 둥글게 배치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크기도 균등해야 한다. 배열에서나 형태에서 또는 부분들의 색깔에서조차 약간의 차이는 무한성의 관념에 장애가 되는 데, 왜냐하면 새로운 시리즈를 개시하는 변화가 일어날 때마다 즉시 그 변화가 탐색되고, 따라서 선행하는 관념을 종결짓기 때문이다. 앵글이 많은 것만큼 건물의 장대함에 더 해로운 것도 없다. 그것은 많은 건물에서 명백히 볼 수 있는 결함이다. 그리고 다양성에 대한 과도한 갈망으로 인해, 다양성이 우세해질 때 참된 취미를 거의 견지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9.규모;건축물의 규모-참된 예술가는 관람자에게 관대한 속임수를 써야하며 손쉬운 방법으로 가장 고상한 구도의 효과를 낳아야 한다. 크기에서만 거대할 뿐인 구상은 항상 평범하기 그지없고 천박한 상상력의 표지다. 상상력이란 더 많은 무엇에의 약속으로 향유되는 것이지, 현재의 감각 대상을 단순히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완전한 완성작보다는 미완성작이 더 만족감과 즐거움을 줄 수 있다.

    10.난도難度;막대한 힘과 노동을 필요로 했을 것 같아보일 때, 그것은 위대함과 장대한 관념을 준다.

    11.장려壯麗;굉장히 찬란하거나 값진 사물들의 풍성함은 그 자체로 장려하다.(숭고의 원천, 빛나는 별들-, 무한성) 무질서도 장관의 느낌을 촉발시키는 데, 잘 다듬어진 외관은 장려의 관념과는 완전히 반대다.

    12.;모든 색은 빛에 의존한다. 빛이 숭고를 산출할 수 있으려면 다른 대상들을 보여주는 빛의 자연적인 능력 외에 다른 특별한 환경이 수반되어야만 한다.(눈에 즉각적으로 들어오는 햇빛, 빠르게 움직이는 빛-번개, 빛에서 어둠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순간적인 전환, 정반대의 극들) 어둠은 빛보다 숭고의 관념을 더 잘 산출한다. 건축조명은 다소간 어둡고 음침해야 숭고의 관념이 산출된다. 대상을 강렬하게 보이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것을 가능한 한 우리가 이미 알고 있던 것과는 다르게 변화시켜야 한다. 따라서 밤에는 방을 더 밝게 조명할수록 더욱 장대한 정념을 불러 일으킬 수 있다.

    13.;부드럽거나 유쾌한(과도한 광택도금) 색은 장려한 이미지에 부적합하다. 역사적인 사건을 그린 회화에서 화려한 묘사기법은 만족스러운 효과를 얻을 수 없으며, 건축에서 최고도의 숭고를 표현하고자 한다면 재료나 장식품에 흰색, 녹색, 황색, 청색, 연한적색, 자주색, 얼룩덜룩한 색은 절대로 쓰면 안 된다. 그 대신 흑색, 갈색, 짙은 자주색 같은 칙칙하고 어두운 색을 사용해야 한다.

    14.소리와 굉음;커다란 굉음, 웅장한 폭포, 휘몰아치는 태풍, 천둥, 군중의 함성, 대포 소리는 어떤 정교함이나 기발함도 없지만 경이로운 감정을 일으킨다. 그것은 상상력을 무력하게 만들고 압도해버린다.

    15.급변;(예상치 못한 것) 소리의 갑작스런 시작이나 멈춤은 숭고 효과를 낳는다. 그것들은 주의력은 기민해지고 경각심을 갖게 만든다. 즉 사람은 위험을 의식하고 경계심을 갖는다. 또한 어느 정도 위력을 지닌 소리는 오래 지속되지 않더라도 시차를 두고 반복될 경우 웅장한 효과를 낳는다.(한 밤의 시계 타종 소리, 반복되는 북소리, 멀리서 연속 발사되는 대포 소리)

    16.단속성斷續性;낮게 떨리며 단속적으로 울리는 소리는 숭고를 불러 일으킨다.(불확실성, 빛의 결여, 희미한 빛, 낮고 혼란스럽고 불확실한 소리들-그 원인에 대한 무지로 인해 공포스러운 불안감을 불러 일으킨다) 반복적으로 명멸하는 빛은 완전한 어둠보다 더 두렵다. 어떤 일이 일어날 지 알 수 없을 때, 그 불확실성 자체를 너무 두려워 한 나머지 우리는 어느 정도의 손해를 감수하고라도 그것을 없애려하는 일이 흔하다.

    17.동물의 울음소리;고통이나 위험 속에서 인간이나 동물이 내는 소리는(야생동물의 성난 울음소리) 위대한 관념들을 환기시키는 능력이 있다.

    18.쓴맛, 악취;가공할만한 사물은 항상 위대하다. 그러나 어떤 대상이 약간의 위험을 초래할 만큼 불쾌한 성질을 가졌거나, 그러한 성질을 가졌더라도 그 위험이 쉽게 극복될 수 있는 것일 때, 그것은 두꺼비나 거미처럼 단지 혐오스러울 뿐이다.

    19.느낌과 통각;신체적 고통의 관념은 진통, 통각痛覺, 불안, 고문 등의 모든 양태와 경중의 정도에 따라 숭고를 환기시킨다. 숭고는 자기보존에 속하는 관념이고, 가장 강렬한 감정은 고통의 감정이다.

    비례, 적합성, 완전성은 미의 원인이 아니다.

    비례는 상대적인 양의 척도로서, 거의 전적으로 편의성과 연관된 것이다.(오성悟性의 산물) 우리가 어떤 대상을 아름답게 느끼는 것은 오랜 주목과 탐구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미는 추론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심지어 우리의 의지와도 무관하다. 건축의 비례와 인체의 비례 사이에는 어떠한 연관성도 없다. 예술작품에 적용하는 비례들은 자연에서 빌려온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유독 자신의 작품과 이념에 대해 갖는 집착에 기인한다. 근본적으로 그것은 동물들의 표준적인 형태가 주는 효과들에 대한 그릇된 추론에서 연유한 것이고, 조화와 적합성에 관한 플라톤의 이론(고르기아스)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즉 비례는 관습(동물들의 형태에 관한, 습관, 관념)에 의거하거나 유용성의 관념에 의거한 것이다. 아름다운 것은 기형적인 것 못지않게 그 참신성 때문에 우리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다. 기형성은 공통된 비례의 결핍에서 발생한다. 미의 진정한 반대는 불균형이나 기형이 아니라 추.

    우리는 우연적인 요소에 불과한 것을 필연적인 원인이라고 착각하게 만드는 궤변에 잘 속곤 한다.

    2차적인 성찰;목적, 의의, 비례, 적합성, 수월성, 오성, 안정, 순응, 유용성상상력, , 아름다움, 사물은 작다. 양도 적다. 매끄러움, 점층적 변화(아름다운 대상의 부분들은 직선으로 계속 이어지는 일은 결코 없다. 사실 자연 대상들 가운데 완전히 각진 것은 드물다. 그 형태들은 갑자기 그리고 불연속적으로 변화한다. 오히려 가장 예리하게 각진 형태에 가까운 것들은 가장 추하다) 부드러움, 완만함, 섬세함, 연약함, 수줍음, 강렬하지 않고 어둡지 않고 탁하지 않고, 밝고 맑은 색, 즉 중간색들이다.(옅은 녹색, 부드러운 하늘색, 옅은 흰색, 분홍빛이 감도는 빨강색, 보라색), 경계가 불분명한 색, 부분들이 사방으로 퍼지는 것, 서로 부드럽게 연결되는 것들, 온화함, 아담한 자태, 달콤한 미각, 후각, 변화, 투명하고 맑은 눈, 우아함(부분들이 서로를 억압하지 않고 조야하거나 혼란스럽지 않고, 그와 동시에 매끄럽고 윤기 있는 부분들로 이루어진 어떤 규칙적인 형태를 이루는 물체-편안함, 완만함, 섬세함), 지속되는 부드러운 촉감, 부드럽고 섬세한 청각

    추와 미가 대립자이지만, 비례와 적합성에 반대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물이 적절한 비례를 가졌거나 어떤 용도에 적합하거나 상관없이 매우 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추가 숭고의 관념과 충분히 일치된다. 그러나 강렬한 공포를 환기시키는 것 같은 성질들과 연합하지 않는 한, 추 그 자체가 숭고한 관념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언어의 효과;소리(사물의 이미지나 표상, 마음의 정서)

    미는 긍정적인 쾌락을 준다. 그러나 만족보다 더 강력한 열정과 결합되어 있는 또 다른 종류의 쾌락이 존재한다. 그것은 고통이며 지연된 죽음이다. 육체는 고통으로 영혼에 영향을 주고, 영혼은 다시 육체에 영향을 미친다.(재현) 이같이 완전히 정신적인 열정을 공포라 한다. 공포는 박탈과 연결되어 있다. 빛의 박탈은 어둠의 공포이고, 타자의 박탈은 고독의 공포이며, 언어의 박탈은 침묵의 공포이고, 대상의 박탈은 무의 공포이며, 생명의 박탈은 죽음의 공포이다. 공포감을 주는 것은, 그것은 일어난다가 일어나지 않는 것, 일어나기를 그만두는 것이다. 이 공포가 쾌락과 결합되고 숭고 감정을 유발시키기 위해서는 그 공포를 발생시키는 위협이 지연되고 저지되고 억제되어야 한다. 이러한 지연이 긍정적인 만족에서 오는 쾌락이 아닌 안도감에서 오는 쾌락을 가져다 준다. 이것 역시 박탈(희열)이다. 따라서 숭고한 감정은 매우 크고 매우 강력한 대상은 영혼으로부터 그것이 일어난다를 박탈하려 위협하고, 그 영혼을 경악감으로 사로잡는다. 따라서 영혼은 멍한 상태가 되어 무력해지며 죽은 것이나 다름없게 된다. 예술은 이 위협으로부터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안도의 쾌락, 희열의 쾌락을 유발한다. 예술의 도움으로 영혼은 삶과 죽음 사이의 동요된 영역으로 귀환하게 되는데 이 동요가 영혼의 건강이요 생명이다. 숭고는 더 이상 고양의 문제가 아니라 긴장 강화의 문제이다. 의지가 실패하게 되는 것은 사건과 만날 때이다. 전위예술의 임무는 여전히 시간에 대한 인간의 가정을 해체시키는 것으로 남아 있다. 숭고한 감정은 이러한 박탈에 붙여진 다른 이름이다.

    재현할 수 없는 것을 재현하기 위해서 상상력은 구속받아서는 안 된다. 열정이라고 불리는 극단적으로 고통스러운 기쁨은 강렬하고도 맹목적이어서 그것은 치매나 광기라 불릴 정도로 상상력에 자유를 부여한다. 하지만 열정은 열광보다 바람직한 것이며 기쁨에 들떠 야단법석을 벌이는 황당무계한 발광과도 구별되는 것이다. 그것은 아무런 규칙 없는 상상력이 아니기 때문이다. 열광은 감수성이 가진 모든 한계를 초월한 대상을 볼 수 있다는 환상에 의존한다. 직접적 재현이 불가능 할 때도 그것은 직접적 재현이 가능하다고 믿는 것이다. 열광은 무비판적인 이행만을 초래한다는 의미에서 인식이 갖는 한계를 넘어설 수 있다고 믿는 초월적 환상과 비교될 수 있다. 반면에 열정은 모든 한계를 초월한 대상을 알지 못하며 그러한 대상이 존재한다 할지라도 그것을 초월이 아닌 재현 불가능성으로 설명한다. 도덕적으로는 병적인 것으로 비난받을지라도 심미적인 면에서 열정은 숭고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데아에 의해 촉발된 힘들의 긴장을 보여주고 감각적인 재현에서 생겨나는 충격보다도 훨씬 더 강력하고 오래 지속되는 영향력을 인간 정신에 미치기 때문이다.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열정은 치매와도 같은 것이다. 그것은 병적이라고 불릴 정도로 갑자기 폭발하는 것이며 어떠한 윤리적 유효성도 가지고 있지 않다. 윤리란 동기가 부여된 모든 정념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연하게 분출되는 열정이라는 정념은 심미적인 유효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강력한 힘을 구사하는 기호이며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동력이다. 거대한 변화들은 우리가 숭고함을 느끼는 자연 대상과도 같다. 역사 속에서 거대한 변화를 불러일으켰던 사건들이나 혁명도 자연의 숭고과 마찬가지로 형태가 없고 일정한 형상을 갖고 있지 않다. 숭고라는 이데아가 가장 잘 드러나는 때는 자연이 혼돈스럽고 무질서하며 가장 격렬하고 황량하게 보일 때이다. 숭고를 가장 잘 규정해 주는 것은 숭고가 갖는 비결정성이다. 숭고는(자연의 숭고도) 규정된 형태를 가지지 않으며 일정한 형상도 갖추지 못한 것으로 간주된다. 숭고미는 개념으로 규정되지 않고 이해관계로 설명될 수 없는 보편적 기쁨이라는 점에서 취향과 같다. 하지만 그것은 목적 없는 목적성을 추구하며 능력들 간의 자유로운 조화를 가져다주는 미와는 달리 반목적성의 목적성을 추구하고 고통을 통한 기쁨을 가져온다. 숭고미는 심미적인 것이 갖는 모순을 더욱 극단적으로 확장시킨다는 의미에서 미에 관한 논의에서 볼 수 없었던 이질성의 영역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그러므로 단순히 미적인 어구가 아닌 극단적인 숭고미만이 인류가 끊임없이 진보하고 있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다. 미적인 감정은 선한 것의 상징일 뿐이다. 숭고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모순적인 감정으로서 형상으로 나타나거나 감각적 직관으로 포착될 수 없는 무정형이다. 그러나 고정된 형태를 갖지 않는다는 바로 이 사실 때문에 숭고는 마치 ...인 것처럼이라는 형태로 시민사회 또는 우주적 사회라는 이데아, 더 나아가 도덕성이라는 이데아를 제시할 수 있는 것이다. 이데아를 경험적으로 재현할 수 없다는 사실이 숭고가 기호라는 것을 보여준다. 숭고라는 기호는 자유로부터 도출되는 인과성을 지시할 수 있을 뿐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보를 입증하는 증거로 간주될 수 있다. 왜냐하면 심미적 청중은 이미 숭고미를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문화적 진보를 했기 때문이다. 즉 혁명을 기호로 파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충청도의 어느 시골 마을 풍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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