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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영상, 미학론 46 (교재 공개)
    패러다임/예술 2021. 3. 8. 0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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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생각하기 이해하기 실천하기-

     

    영상, 미학론 46

     

    386. 인터넷을 통제하기 무척 어려운 이유는 그것이 탈중심화된 테크놀로지이기 때문이다. 이 덕분에 세계적 접근성을 지니게 되었고, 진정으로 국제적인 미디어가 된 것이다.

    비평;1.작품의 특성에 관한 기술 2.작품의 미적 가치에 대한 평가 3.비평문 자체도 문학적 형식을 갖추어야 한다.(문학적 장르)

    평론가 역시 에세이를 생산한다. 이 에세이들은 대상에서 자립하여 즉 작품에 대한 미적 평가를 넘어, 예술에 관한 미학적 성찰과 세계에 관한 철학적 사유로 비약함으로써 그 자체가 문학이 된 새로운 비평을 해야한다.

    비평;1.관학적 비평(academic 랑소니즘 Lansonism)-.객관성 .좋은 취향 .언어의 명료성-주관적 감상이 아니라 작품 자체에 대한 객관적 기술이고 사회적으로 확립된 좋은 취향에 입각한 미적 평가이어야 하며, 누구나 이해하는 명료한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2.해석적 비평(interpretive)-작품을 고립된 객체로 간주하는 관학적 비평과는 달리, 구조주의 비평은 작품을 사회 속의 다양한 요인들과 연결된 구조적 현상으로 간주한다. 이로써 실존주의, 마르크스주의, 프로이트주의 등 다양한 이론을 비평에 도입할 수 있게 된다. 또 관학적 비평이 제 언어, 제 비평적 기준을 다소간 자명한 것으로 전제한다면, 해석적 비평은 자신이 사용하는 언어 자체를 반성하려 한다. 자신이 사용하는 비평적 기준마저 상대화하는 것이다. 그것은 작품 안이 아닌 밖에서 펼치는 이론의 향연이 될 수 있는 것으로, 그러한 이데올로기들이 예술의 순수성을 해칠 수도 있다. 반면 구비평은 객관성, 좋은 취향, 명확성의 원칙으로 문학을 안전하게 유지시켜주고, 정치, 역사, 혹은 이데올로기와 같은 상징 언어로부터 문학을 지켜준다. 하지만 그것은 짐짓 중립적인 척하지만 실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라는 사실을 은폐하고 있다. 가령 객관성과 좋은 취향은 17세기의 고전주의 이데올로기, 언어의 명확성은 19세기 실증주의 이데올로기의 산물이다. 이 원리들은 부르주아 예술문화의 안정적 유지에 복무한다. 객관성, 좋은 취향, 명확성의 원칙은 또한 검열의 기준으로 사용된다. 즉 자기들이 안 보는 것은 주관적인 것이며, 자기들이 싫어하는 것은 나쁜 취향이며, 자기들이 모르는 것은 애매하고 혼란한 것이라는 식이다. 이렇게 작품에 그것의 이름으로 다른 의미들을 배제할 권리를 주는 단 하나의 의미를 부과하려 한다. 하지만 의미는 작품의 객관적 속성이 아니다. 의미는 비평을 통해 비로소 생산되는 것이다.(?) 작품의 의미는 비평을 통해 다양하게 전개되야 한다.

    비평은 이미 존재하는 기의(작품의 의미)에 정확히 부합하는 기표(비평의 언어)를 찾는 작업이 될 것이다.

    또 다른 모델-구조주의 모델-에 따르면, 기표는 기의와의 결합이 아니라 다른 기표들과의 차이 속에서 비로소 의미를 획득한다. 즉 동일한 텍스트라도 비평을 통해 어떤 계열(배치) 속에 편입되느냐에 그것의 의미는 그때마다 달라진다는 얘기가 된다.

    구비평이 작품 자체에서 누구에게나 동일한 의미를 발견하려 한다면, 신비평은 언어를 조직하여 작품에서 저마다 상이한 의미를 생산하려 한다. 결국 비평가가 역시 의미를 생산하는 창작자인 셈이다.(독자나 시청자 또한 의미를 재생산한다) 저자와 비평가가 있는 게 아니다. 그냥 작가가 있을 뿐이다.

    예술가가 된다는 것은 아무도 실패한 적이 없는 새로운 방식으로만 실패하는 것이다. 그는 피로감 없이 유쾌하고 즐거운 실패들을 이어간다. 그는 자신의 실패, 과오, 심지어는 자신의 성공과도 쉽게 헤어질 수 있을 만큼 이별 능력의 최대치를 지녔기 때문이다. 실패나 성공과 무관하게 오직 자기 활동 속에 존재하는 고요하고 영원한 기쁨, 이것을 스피노자는 신에 대한 사랑, 혹은 지복至福이라고 불렀다.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개체란 없다. 모든 개체는 부분들의 복합체이며, 그런 복합은 물질적 운동 속에서 발생한다. 따라서 공통성이란 물질적 운동 속에서 구성되는 복합적 신체성을 가리킨다. 집합적 신체를 형성하는 힘이 바로 욕망이다. 신체는 신이 창조한 것도 아니고 자연적 필연으로 주어진 것도 아니다. 신체는 이질적인 물질(에너지, , 흐름)들의 끊임없는 연합에 의해 생산된다. 욕망은 그 연합의 힘이다.

    코뮨적=공통적

    혁명은 경제적 착취 때문에, 의식적 각성에 의해, 도덕적 의지는 일어나지 않는다. 혁명은 금욕적 억압과 공포로부터 해방된 집단적 욕망 생산에(분출)의해 일어난다.

    수면이란 몸보다 오히려 뇌가 휴식하고 있는 상태이다.

    인간주의 자체가 본래 오직 체계의 효율성을 위한 착취수단(흑인, 인디언, 환경)이었다. 본시 인간주의라는 것이 자연을 착취하기 위한 도구였으며, 그와 함께 인간주의의 고취는 항상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387. 사회는 어떤 지주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주어진 의미없는 요소들을 조작하는 것으로 그친다. 오늘날은 조작의 사회다. 수요와 공급은 옛날 이야기일 따름이고 대중은 조작될 따름이다. 상품과 광고는 조작의 매커니즘일 따름이고, 이제 더 이상 기능의 사회가 아니다. 덩어리에게 있어서 기능의 분화란 있을 수 없기에 그 옛날 각각 독립적인 기능을 담당하였던 유기적 기관들은 하나의 덩어리 속에서 다 기능적으로 변하거나 본래의 기능이 상실되었다. 오늘의 모든 제도적 기관들도 기관의 독립성은 서서히 상실되고 다기능 혹은 무기능적으로 변해가고 있다.

    실제가 없는 사회는 그 아미노 현상을 극복하기 위하여 끝없이 실제를 주입하기에 힘을 쓴다. 그래서 혹은 거짓 위기를 생산하고 전파하며 위기를 극복하여 일하는 척하거나 실제가 있는 척한다. 문제를 만들어서 다름, 차이를 생산하기에 바쁘다. 정치는 조작의 일종이고, 모든 경제위기, 환경위기도 아무런 실제 없이 만들어진 실제에 불과하다. 우리는 실제가 없는 허구 속에 살고 있을 따름이다. 도덕적 위기라는 것도 알고 보면 없는 형이상학적인 가치를 끝없이 주장하고 거기서 이익을 얻는 자들의 조작품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재는 이제 조작적(복제된 실제)일 뿐이다. 어떠한 상상 세계도 더 이상 실재를 포괄하지 않기 때문이다. 실재는 대기도 없는 파생공간 속에서 조합적인 모델들로부터 발산되어 나온 합성물인 파생실재이다. 시뮬라크르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존재하는 것처럼 만들어 놓은 인공물을 지칭한다. 흉내나 모방은 제1, 2열에 속하는 시뮬라크르, 즉 전통적인 재현 체계 속의 이미지에나 속한다. 현대의 제3열의 시뮬라크르는 가장假裝으로서 흉내 낼 대상이 없는 이미지이며, 이 원본 없는 이미지가 그 자체로서 현실을 대체하고 현실은 이 이미지에 의해서 지배받게 되므로 오히려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것이다. 결국 시뮬라크르는 실제보다 더 실제적인 것이다. 이 시뮬라크르는 아울러 어떤 기왕의 실제 존재하고 있는 것하고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독자적인 하나의 현실이라 할 것이다. 오히려 우리가 지금까지 실제라고 생각하였던 것들이 바로 이 비현실이라고 하였던 시뮬라르크르로부터 나오게 된다. 상환이 완전히 전도되었다. 흉내내거나 모방할 때는 이미지란 실제 대상을 복사하는 것이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실제 대상이 가장된 이미지를 따라야 한다.

    추상은 도출하거나 제거하는 작업으로 구성된다. 도출한다는 것은 본질적인 것을 끄집어 내는 것을 말하며, 제거하는 작업은 본질적인 것만을 남겨놓고 군더더기를 제거함을 말한다. 그런데 이 본질적인 것이란 플라톤주의와 기독교적 전통에서는 항상 정신적인 것을 지칭한다. 그에 따라 이원적 대립이 가능하다. 천상과 지상의 대립, 정신과 물질의 대립, 상상과 현실의 대립, 추상과 구체의 대립 등이다. 이 대립의 축 중 후자는 원칙적으로 본질적인 전자로부터 유래한 변형물이거나 반영물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추상화 작업은 역으로 현실로부터 이미지라는 추상물을 추출해내는 작업이다. 이 추상화된 이미지는 현실의 이미지가 아니라 추상적 본질의 이미지라는 말이다. 여기에 이미지의 기묘한 위상이 있다. 원칙적으로 현실은 절대적인 본질의 반영인 이미지에 불과하였다. 그런데 그 반영적인 이미지로부터 추출한 이미지가 자신이 도래한 현실이라는 이미지보다도 더 본질적인 것으로 취급받는다면 심각한 위상의 전도가 있는 것이다. 이미지와 그가 나타내는 대상 사이의 관계에는 본질에 대한 주도권을 놓고 대립 관계가 형성된다. 모든 기호와 예술활동은 일종의 추상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미지의 추상화 기능은 헤겔미학에서 그 힘을 발휘하여, 헤겔은 2차적인 회화가 3차적인 현실을 하나의 차원이 낮게 단순화시키면서도 그를 나타낼 수 있기 때문에 현실보다 더 우월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3차원을 2차원으로 나타내는 과정 속에 예술가의 정신활동이 들어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다시 되돌아가면 이미지는 여전히 여기서의 본질인 예술가의 정신적인 활동의 흔적을 나타내는 것이 된다. 이러한 주장은 최근의 현상학적인 제 비평 특히 사르트르와 메를로 퐁티로 이어진다. 추상 작업은 20세기 초엽에 일어난 큐비즘과 큐비즘의 뒤를 이은 추상회화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 인상주의가 빛의 조명에 의한 물질의 순간순간의 변화를 번역하여 불변의 고정된 이미지, 따라서 본질적인 것을 제시하지 못함에 대해, 세잔느로 대표되는 후기 인상주의자들의 반발로 이들은 다시 고전주의 혹은 신 고전주의의 절대형으로 어느 정도 다시 회귀하고자 한다. 이들이 찾으려 한 불변의 기하학적 형은 세잔느의 후예들인 피카소, 브라크 등의 큐비스트들에 의해 계승되어, 다각도에서 투사된 혹은 타원형적인 거울에 의해 일그러진 기하학적 형으로 변하였다.(물론 엄밀히 따지면 이들이 투사한 형은 동시적인 여러 각도에서라기보다는 형을 해체하여 나열하는 정도에 그치긴 하였지만), 추상예술은 절대적 본질의 대용으로서, 내면적 필연성(칸딘스키), 종교적 엄숙성(몬드리안), 적 절대 경지(말레비치)를 가시화하는 데 주력하였다. 추상과 시뮬라시옹의 차이는 전자가 아직 원본과 그 복사라는 이원론에 기초하고 있음으로 하여 이미지는 어디까지나 실체의 그림자로서 사실성이 결여되어 있는 반면에, 시뮬라시옹에서는 이미지가 원 실체를 가정하지 않고, 스스로 실체인 이미지 혹은 모델을 만드는 것이다.

    파생(hyper) 실재(복제)는 시뮬라시옹에 의해 새로이 만들어진 실재로서 전통적인 실재와는 그 성격이 판이하다. 파생실재는 가장이기 때문에 전통적인 실재가 가지고 있는 사실성에 의해서 규제되지 않는다. 따라서 파생실재는 어떤 현실을 극도의 현실로 만든 것이라기보다는(하나의 현실은 항상 그 현실이지 더 적거나 많은 현실이란 있을 수 없다. 즉 하나의 현실에 변화가 가해지면 이는 즉각 그 현실이 아닐 것이다), 실재하는 현실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 전혀 다른 현실이다.

    재현은 문자 글대로 지금 당장 현실이 아닌 것을 다시 현실로 만든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기왕에 있는 것 혹은 있었던 것을 다시 모여준다는 의미이므로 언제나 이분법적 분할이 가능하다. 기호에 의한 인간의 모든 활동 즉 예술, 학문, 사회조직 등은 이분적인 분할을 가정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우리가 방금 기술한 추상 작업은 이러한 재현의 하나이다. 추상은 보이지 않게 가려져 있는 본질적인 것을 구체적으로 물질적 도구들인 언어와 여러 요소들을 통해 육화시키는 것이다. 재현에 기반을 두는 체계를 재현체계라고 하는데, 이 체계야말로 예부터 지금까지 사회 전체를 지탱하고 있는 체계이다. 재현체계를 가장 쉽게 나타내고 있는 것은 정치조직이라 할 것이다. 과거의 절대왕권에서, 왕은 신에게서 권력을 위임받아 그의 권력을 대변 즉 재현하거나, 근대에는 국민투표라는 형식을 통해 위정자는 국민으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아 그 권력을 재현하고 있다. 계속하여 그 하부권력은 상부로부터의 권력을 위임받아 그를 대변한다. 이러한 체계는 군대의 조직과 같기에 재현체계를 군사 체계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체계의 기하학적 형태는 지극히 안정된 삼각형이기에 다시 이를 피라미드식 체계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피라미드식 체계는 15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기의 일군의 화가들에 의해 회화의 기법인 원근화법으로 도입된다. 물론 원근화법의 기초는 고대 그리스의 기하학자 유클리드에 의해 이미 제시되어 있었다. 유클리드 기하학의 근원은 빛이 직진한다는 것이며, 직진하기 때문에 평행한 두 직선은 서로 교차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있다. 재현체계와 원근화법은 실제 그 자리에 없는 대상을 마치 그곳에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일종의 환상을 일으키게 하는 수법이다. 따라서 사실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겠다는 사실주의적인 기법의 비사실성이 여기에 있다. 가장 사실주의적인 기법은 가장 환상적이다. 원근화법적인 화면 구성이 고대 그리스 혹은 르네상스라는 문명의 합리화 단계에서 발생되는 것에 주목하여야 한다. 또한 정치적으로도 피라미드식 체계가 다원적인 사회인 중세의 봉건체계가 무너지고 난 이후 절대왕조의 수립과 연결되어 있음도 주목하여야 한다. 합리적 이성에 기초한 재현체계는 단일성, 통일성, 안정성을 지주로 한다. 우리가 행하는 언어뿐 아니라 일상의 일거수 일투족도 이 체계가 행하는 권력 시스템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다. 따라서 이러한 관점에서 보았을 때, 어떤 이데올로기에 의한 해방운동은 결국 항존하는 재현 시스템으로부터 우리를 벗어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시스템을 더욱 공고히 하는 것에 불과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데올로기란 추상적 관념의 재현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진정한 혁명은 차라리 이 시스템을 가속화시켜 포화상태에 이르게 한 다음 스스로 붕괴되게 하는데 있는 바, 이 현상이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재현체계 속에서의 이미지는 원래의 실체를 반영한다고 간주된다. 그렇다면 가장 충실하게 원래의 실체를 재현하고 있는 이미지가 가장 완벽한 이미지가 될 것이다. 결국은 원래의 실체가 가장 훌륭한 자기 자신의 재현 이미지가 될 것이다. 따라서 실체와 이미지가 동일한 하나가 되는 단계, 이 단계가 시뮬라시옹의 단계이다. 여기서는 실체와 이미지를 분할하던 이원론이 사라지고 일원론이 대두된다.

    어떠한 사물을 재현하고 있는 것이 이미지이고, 이러한 이미지를 생산하는 힘이 상상력이며, 이미지에 의해 구성된 세계가 상상 세계이다. 이미지가 모방할 혹은 재현할 실체가 없고 이미지가 실체인 세계에서는 상상 세계는 존재를 상실한다.

    재현체계에서의 이미지는 형이상학적 실체의 반영이기에 이 실체 혹은 진실에 따라 이미지에 대한 좋고 나쁨의 가치판단을 할 수 있다. 이 체계 아래에서는 가치판별의 기준, 도덕적 기준, 비평적 기준이 있었으며, 이미지는 합목적성에 이르는 길인 이상성을 따라야 한다. 이상적 기준을 나열하고 기술하는 형이상학은 더 이상 상위 학문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함과 동시에 그 존립 이유도 없어지게 되었다. 곡선의 세계에서는 재현된 이미지와 실체가 서로 만나서 하나가 되기 때문에 이미지가 곧 실체가 된다. 휘거나 곡선적인 공간은 진실이 채택된 곧바른 공간이 아니다. 이 공간은 진실이라는 지시 대상이 없는 공간으로 시뮬라크르의 공간이다.(불랙 홀)

     

    388. 미학은 결코 질리지 않는다. 알다시피 빵 또한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는다. 물론 햄이나 치즈를 곁들여 먹어야 한다. 말하자면 양념으로 맛을 미세하게 조절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즐길 수 있는 섬세한 미각도 필요하다. 미학의 보편 법칙은, 인간에게는 자신을 둘러싼 환경이 고향과 같은 곳이 되어야 한다. 그럼으로써 자유로워져야 한다. 미학은 하나의 철학적 이론이나 학문 분야를 가리키는 명칭으로 보며, 개념적 인식과는 다른 차원에서 감각적 인식의 전재 과정을 다루는 학문으로 규정한다. 물론 이 경우에 미학은 감각적 인식을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니라, 독자적 이론을 전개시킴으로써 감각적 인식의 가치를 정립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그 가치를 더욱 높이려는 목표를 추구한다. 그리고 좁은 의미에서 미학은 감각을 매개로 하고, 개별적인 감각적 대상들과 함께하며, 감각에 대한 자각과 더불어 이루어 지는 인식으로서의 경이로운 감각적 인식을 가리킨다. 요컨대 미학이란 미디어의 특성에 따라 예술이론, 문학이론, 그리고 음악이론으로 분류되는 예술에 대한 이론이다. 철학의 한 분야로서의 미학은 특수한 방식으로, 다시 말해 감각적 인식의 차원에서 인식의 문제를 다루며, 그러기 위해서 특정한 탁월한 대상들과 사물들, 요컨대 예술작품들로 부를 수 있는 것들을 평가하고 관찰한다. 미학(그리스어로 감각과 관련된 학문)은 자연과 예술에 있어서의 아름다움에 관한 가르침으로서 철학의 한 분야이다. 그리고 미학이 문화예술의 본성과 형식, 그리고 법칙과 관련되는 경우에는 시학이 된다. 일반적으로 보면, 미학은 고대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의 아름다움과 예술을 다루어왔던 역사를 가리킨다. 거기에는 아름다움의 속성에 관한 문제들이 포함되어 있다. 예컨대 아름다움이 주관적인가 아니면 객관적인가의 문제, 아름다움이 관찰자와 독자와 수용자에 의해 처음으로 구성되는 것인가, 아니면 대상과 사물들에 이미 내재해 있었던 것인가의 문제, 자연적 아름다움과 정신적 아름다움의 구분, 즉 이미 주어진 대상에 있는 아름다움인가의 문제, 그리고 다른 종류의 미학적인 범주들(추한 것, 희극적인 것, 숭고한 것)에 대한 문제들, 예술작품들을 층위에 따라 나눌 수 있는가의 문제, 또한 윤리학 및 논리학, 다시 말해  과의 관계에 대한 문제도 포함된다. 달리 말하면 아름다운 작품은 암시적이든 혹은 명시적이든 간에 인류발전의 상태에 대한 참다운 진술과 종국적으로는 인류의 개선을 위한 선한 도움이 될 수 있는가? 구체적으로는 미학은 무엇보다도 테두리를, 바깥의 경계를 설정한다. 그리고 그 테두리와 경계 안에서 詩學은 형상形像과 구성과 내용을 드러낸다. 한편 수사학은 그러한 구성과 조직과 짜임의 내부에서 전개된다. 유감스럽게도 여기에서는 더 이상 파고들 수 없는 시학과 수사학 그리고 세세한 지식들은 미세 조정의 역할을 한다. 그것들은 미학적인 대상의 구조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윤곽과 형상 그리고 적용된 색채들은 함께 작용함으로써만 전체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형상들을 알아보며 또 형상을 인식하는 것, 즉 생겨난 것에 대한 파악과 해석은 그 구성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기술상의 규칙성과 법칙성을 포착해야 가능하며, 또한 이것은 오직 윤곽 분석의 바탕 위에서, 그리고 역사적인 맥락의 바탕 위에서만 가능하다.

    아름다움은 그 자체로 신성과 동일한 것이다. 정반대로 아름다움은 생산품(감각에 의한 흐려짐)을 통해서 왜곡되기도 한다. 아름다움은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발견된다.

    눈이 태양과 같지 않다면/눈은 결코 태양을 볼 수 없을 것이다.

    중세는, 신은 도처에 있으며, 모든 것을 보고 모든 것에 작용한다. 세계와 자연은 그의 작품이며, 그것들은 아름답다. 인간이 만든 예술품은 신에 의해 창조된 것을 모방하고 찬양하고 칭송한다.(이데아) 중세에는 예술의 아름다움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아름다움이라는 술어는 오직 신과 그의 창조물에만 부가 되었다. 아름다움의 본질은(명료함, 완전성, 적절한 비례관계, 훼손되지 않은 질서와 균형의 온전함)은 부분들의 조화로운 관계들에 있다. 왜냐하면 감각은 조화롭게 질서 지워진 사물들이나 서로 호응하는 대립상들 자체에서 만족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의 본질적인 구성요소이며 이 세 가지(명료함, 완전성, 적절한 비례관계) 기본요소들이 아름다움의 객관성을 나타내는 표지들이다.(미학적 이상) 중세는 예술은 신에 의해 창조된 아름다운 자연을 모방한다. 예술은 모방적인 특징을 가진다.

    르네상스의 예술가들은 더 이상 관습의 힘이나 전통적 규범을 믿지 않고 그들 자신이 발견해 낸 것을 믿었다.(하지만 어느 면에서는 새로운 미학 이론은 나오지 않았고 고대의 법칙을 따랐다) 그러므로 예술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규칙의 올바른 적용이 아니라, 개개의 예술가가 이론적으로 인식하고 그것을 감각적으로 생생하게 작품화한 과정(풍부한 경험을 전제로 하는 창작과정-수학적, 기하학적 연구를 토대), 즉 작품의 독창적이고 구체적인 형상화 과정이다.(이론적 정신과 예술적 정신의 종합, 주관적 관점) 그것은 자연의 단순한 복사도 노예적인 모방도 아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훌륭한 목적이나 도구화나 기능화가 아니라, 독창적인 생산자가 만들어내는 예술적 표현이며 아름다움이다. 그것은 또한 구매자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바로크는 17세기에 르네상스와 계몽주의 중간에 위치하여 고전시대를 지향하는 르네상스 양식을 해체하고 대신 등장한 예술사적 양식의 개념이다. 즉 비상할 정도로 다사다난한 역사의 공간이며, 극단적으로 유동적인 세기였으며, 사회적 모순들, 교회와 국가의 작용과 반작용 속에서 벌어지는 상호충돌의 급격한 모순들로 점철된 시기이며, 위대한 문학작품들이 풍성하게 쏟아져 나온 시기였다. 모순적인 신앙심과 비합리적인 이데올로기로 가득하고, 유물론적으로 혹은 변증법적으로 탐구하는 정신들로 가득한 세기였고, 또한 인과율과 합리성에 근거하여 새로운 사유를 낳은 시대로서, 조형예술의 영역들, 즉 회화와 조각과 건축의 영역에서의 예술적 변혁의 시대였다. 팽팽한 긴장, 거대한 파토스를 추구했고, 유동적인 것, 극적인 도약을 높이 평가했고, 무한성과 미완성을 사랑했다. 대립적인 것들이 추구되고 제기되었다. 고전적으로 순화된 르네상스와 비교할 때, 바로크는 극적이고 열광적이며 화려한 전개를 좋아하는 연극적인 양식이었다. 거기에 상응하여 예술적인 표현수단들도 다양했다. 르네상스의 예술은 이성에 호소했고 무엇보다도 논증하려했지만, 바로크의 예술은 그와 달리 감정과 상상력에 호소하였다. 또한 위대함, 극적 감흥, 유동성, 변화무쌍함, 무한성이었다. 인물들을 직접적인 행동 속에서 보여줄 뿐만 아니라, 제시된 인물들 자체의 내면을 곧바로 가리키는 그러한 역동성, 유동성을 도처에서 확인하게 된다. 이러한 유동적인 측면과는 대조적으로 바로크는 정물화를 가르쳤으며, 명암대비의 다양한 가능성들을 발견했다. 한편으로는 행동감에 넘치는 풍속화의 유동성과 정지, 분망함과 고요함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관조적인 정물화가 있어, 이 둘은 서로 마주본다. 자기 격려와 경고가 동시에 자리잡고, 자기 존재를 자각하며 축제를 벌이는가 하면, 그와 동시에 무상함과 현세의 공허함과 가상성에 대한 공포를 느끼기도 한다. 바로크는 유혹적인 가상의 세계에 호의를 가졌다. 즉 작용이 현실 그 자체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보인다. 바로크에 있어서 모든 것이 암시, 넌지시 알림, 지시, 즉 알레고리이다. 또한 세계의 허약함을, 그리고 형이상학적 의미가 없는 파국적인 폐허로서의 역사의 허약함을 드러내 보이고, 모든 명백한 의미를 거부한다. 알레고리에 의해서 인간정신은 인과율적으로 결정되는 지시 관계의 불손함과 월권행위에 저항한다. 애매모호함, 다중적 의미는 알레고리의 기본적 특징이다. 알레고리, 즉 바로크는 의미의 풍성함을 자랑한다. 이러한 애매모호함은 또한 풍성한 낭비이기도 하다. 자연은 형이상학의 옛 규칙들을 따르거나, 그에 못지않게 기계학에 따르려고 하면 무엇보다도 절약의 원칙에 묶이게 된다. 그러므로 애매모호함은 도처에서 의미의 순수함과 통일성에 대한 모순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즉 자연의 통일성은 새로운 현대적 수단들을 통해서, 간단하게 말해서 데카르트의 이성중심주의를 바탕으로 인식되고 입증되었고, 그럼으로써 자연지배의 가능성이라는 점에서 거대한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하지만 그 시대의 예술은 정반대의 현상을 증언한다. 예술은 다시 밤의 측면과 그림자의 측면, 미간의 자기의심과 당황을, 자신의 고유한 자연성과 아울러 그 무상함을 기억하는 것이다. 예술은 자연의 징후를 통해 이성의 논리에 저항한다. 우의寓意와 모토와 슬로건을 통해서 보편적인 도덕적 생각이 특수한 과 연결된다. 추상적인 것이 가시적 형상을 띄게 되며, 인간의 감정이 명백하게 구획되고 합리적으로 구성된 형식 속으로 흘러 들어간다. 여기서 특수한 상은 언제나 미학적 부가가치와 풍성한 비유를 내포하는 데, 이것은 성인전聖人傳을 특징짓는 추상적 개념(, 충실함, 우아함)과는 그 성격을 달리한다. 상은 오히려 여러 의미로 해석되도록 자극을 하고, 다양한 해석을 불러일으킨다. 전적으로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합리주의와 기하학주의(조화와 균형), 그리고 경험적 지식의 추구를 거부했고, 르네상스가 조형예술의 가장 확실한 토대로 간주하고 존중했던 수학이 이제는 곧바로 증오심의 대상이 되어 박해를 받았다.

    요컨대 예술가는 외면적으로 작업을 수행하고 예술적으로 형상화하기에 앞서, 이미 자신의 내면에 그것에 대한 하나의 이념을 생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들에게 있어서 모든 외적인 것은 오로지 심원한 내면적 체험의 표지일 따름이다.

    18세기의 계몽주의는 개성의 발명으로 대표된다. 17세기가 고립된 개인 존재의 내면성을 예찬하였다면 18세기는 자신을 관철해 내는 개인이며, 시장에서 자신의 지위를 주장하고 자신의 초월적 고향을 차안의 세계, 즉 자기 자신 안으로 밀쳐 넣은 그런 인간 유형이다. 즉 자율적이고 독립적이며 교양이 넘치는 성숙한 인간이다. 그리하여 계몽주의는 자율적 사유와 자율적 판단에 이르는 의식적으로 경험하고 의식적인 경험에 이르는 해방의 과정으로 선언된다. 그래서 편지와 출판물은 팽창했고, 신문과 잡지들이 창간되었고, 연맹과 클럽 서클, 살롱 등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의사소통은 또한 교류의 이념을 촉진시켰고, 평등과 자유, 개성과 관용은 계몽의 중심적인 가치들이었다. 18세기 계몽주의 미학이 비로소 근대 미학의 출발점이 되었다. 그것은 미감의 체험으로서 미감의 체험이 미학적 주체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이다. 미감이란 우리에게 학문과 예술 속에서 아름다움을 수용하고 아름다움을 생산하는 것과 관련된 깨달음을 마련해 주는 능력이다. 17세기의 공식적인 예술과 문화는 궁정과 예의범절을 지향하였고, 미학적 재현(미메시스)을 목표로 삼았으며, 예술은 규칙들에 의해 재단되었고, 이전의 훌륭한 미감은 군주의 총애와 동일한 것이었다. 반면에 18세기는 보편적이고 훌륭한 미감을 선택했다. 즉 인간은 시민이고 개인이고 독자적 개인이며, 전통적인 규범에, 그것이 국가와 군주의 이성이든 혹은 예술이든 간에 상관없이 거의 신경쓰지 않는 그러한 영혼의 인간이다. 아름다움은 아름다움일 뿐이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장미는 장미이고 장미이다. 우리의 쾌감을 불러 일으키고 그 이유와 결과를 불문하고 우리의 미감능력(미적공감)에 호소하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에 들 뿐이다. 그것을 관찰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 마음에 들고, 이러한 상태가 우리를 즐겁게 하기 때문이다. 도덕을 강요할 필요가 없다. 그것을 아름답게 보기 위해서 식물학자이어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또한 그것이 마음에 들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지 우리에게 유용하거나 기독교의 상징으로 유효하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나중에 식물학적 분류책에 의해서 그 비밀이 밝혀지는 것과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 거기엔 아무런 개념도 인식도 형이상학적 배경도 필요없다. 아름답다라는 판단은 나 자신에 대한 진술이며, 아름답다고 판단된 대상 앞에서의 나의 상태를 말해주는 진술이다. 천재는 예술에 규칙을 부가하는 재능이다. 아름다운 작품은 천재의 산물이면서 동시에 명징한 미감의 산물인 것이다. 아름다움은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느끼거나 산출되어야 하는 그 어떤 것이다.(괴테) 그러므로 아름다움의 수용은 자극이나 감동이나 그 어떤 유익함과도 상관 없이 오로지 관조적으로 이루어진다. 예술작품의 형태로 아름다움을 생산하는 자가 천재이며, 그 천재의 실행력이 내적인 형상들을 토대로 하여 생겨나는 작품들을 창조한다. 모방 대신에 창안과 영혼의 몰두가 그 출발점이다.

    19세기는 시민계급과 국민국가들 그리고 산업혁명의 세기이다. 또한 계급투쟁과 식민주의의 기치 아래 세계적인 규모의 약탈의 세기이다. 헤겔의 실천철학은 진행되어온 전체 역사발전으로부터 출발하여 인간 노동의 모든 증명서를 인류의 기억으로, 다시 말해 인간정신의 발전의 각 단계마다에서 어느 정도로 진보했는가를 보여주는 그 무엇으로 이해했다. 이 해석학적 정신철학은 언제나 동시에 역사철학이며, 역사와의 연관 속에서 객관화된 것들에 대해 말한다. 왜냐하면 이 모든 객관화된 것들은 역사의 표현이고 증언이고 기록이기 때문이다. 다시 거꾸로 보자면, 이 역사는 인간이 객관화시킨 업적들에 의해서 고정되지 않는다면 흐릿한 안개 속으로 흩날려 사라져버리게 된다. 헤겔은 언제나 작품 속에서 이념을 추구했다. 그 저작은 재구축의 산물이고 해석학이며, 정신적인 업적들에 대한 이해이다. 이것이 보편타당한 원리라면, 헤겔이 말하듯이 우리를 사유적인 관찰로 이끌어가는 예술과 예술작품들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될 것이다. 이러한 예술작품들을 직관하고 해석하고, 역사적 맥락 속에서 정신의 활동 과정을 세계와 역사 속으로 편입시키는 것이 미학의 첫 번째 임무이다. 이전의 미학적 구상들과의 단절은 너무도 분명하다. 이제 더 이상 미학적 판단이나 감각적 인식, 감정 체험에 대한 정의나 주관성에 대한 몰두, 그리고 또한 아름다움과 추함과 같은 미학적 범주들에 대한 기술은 중요하지 않다. 헤겔의 미학은 예술의 철학으로 이해한다. 예술작품들은 아름다움과 동일시되며, 아름다운 것은 예술작품들을 정리하고 제시하는 기준이 되는 범주이다. 둘 다 객관적이며, 아름다운 작품이 미학의 전제조건이 된다. 바로 여기에 헤겔 미학을 이전의 모든 구상들과 구별 짓는 보다 광범위한 규정들이 들어 있다. 헤겔은 자연의 아름다움과 자연의 숭고함을 즉시에 배제한다. 오직 예술만이, 각각의 예술작품만이 아름답다. 왜냐하면 오직 그 속에서만 정신이 객관화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술이 아름다운 것은 그 속에 정신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정신이 그 속에서 하나의 이념을(이념의 감각적 출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비치고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진리란 없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결국 헤겔의 미학은 예술작품들의 내용을 그 배경에 있는 역사와 연관시킨다는 점에서 순수한 내용 미학이다. 그리고 이러한 점 때문에, 예술철학과 역사철학을 괄호에 묶어둔 채 처음으로 미학 자체가 예술의 철학으로 나아가며 또한 동시에 예술사 내지는 문학사, 음악사 또는 건축사로 나아가게 된다. 헤겔 이후에야 비로소 처음으로 상응하는 학문분과들이 보다 좁은 범위의 헤겔학파 내에서 형성되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헤겔은 그의 선배들의 업적을 그대로 인정할 줄 알았다. 그는 미학이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사용하고 미학이라는 학문분과를 철학 속으로 편입시켰던 바움가르텐의 업적을 인정하였다. 헤겔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범주상으로 배제해버린다. 미학은 아름다운 예술의 철학이다. 그에 의하면 아름다운 것은 인간정신에 의해서 생산된 인공적인 그 어떤 것이며, 자연 속에 있는 그저 우연히 존재하거나, 우연히 아름답다고 판단된 대상들 내지는 현상들보다 상위에 있다. 아름다운 것은 그 어떤 객관적인 것이고, 인간의 손과 정신에 의해 만들어진 산물로서 거기에는 자연과 사회에 대한 인간의 지배와 자기소유화의 정도가 반영되어 있다. 예술의 아름다움은 정신으로부터 태어나고 다시 태어난 아름다움으로 거기에서 정신은 자유롭게 그리고 자의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입증한다. 그 자체를 인식하지 않고 그저 느끼기만 하는 차원이라면, 현재라는 실체도 결국 가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실재의 핵심, 즉 실체를 인식하는 것이 예술에게 주어진 하나의 임무이며 가장 의미심장한 의무인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예술은 예술적 가상이라는 제2의 영토를, 사실적인 현실의 바깥과 상위에 있음이 분명한 제2의 실재를 정립해야 한다. 예술은 현상들의 저 참된 내용으로부터 저급하고 찰나적인 세계의 가상과 기만을 지속적으로 제거함으로써, 그 현상들에게 정신으로부터 태어난 보다 높은 현실을 부여한다. 그러므로 예술은 단순한 가상과는 거리가 멀다. 관습적인 현실과는 대비가 되는 보다 높은 실재와 보다 참된 현존재가 예술이라는 현상 덕분에 드러나는 것이다. 헤겔은 고전적인 예술은 예찬했지만 19세기의 예술과 개인은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시대에 대한 인식은 오로지 철학에 의해서만, 개념들과 추론의 수단을 가진 철학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아름다움은 더 이상 어떤 작품의 속성도 아니며, 예술 존재론의 범주도 아니다. 아름다움은 하나의 존재 요소이다.

    20세기의 미학은 더 이상 원리들을 다루는 학문이 아니라 사실들(감정이입, 체험-표현-이해)을 다루는 학문이다. 미학은 심리학의 분야에 속한다. 어떤 대상의 아름다움은 녹색이나 청색과 같은 속성이 아니다. 오히려 아름다움은 어떤 대상 속에서 미학적 가치평가의 행위가 일어날 때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한 행위는 다름 아니라 의식 속에서 일어난다. 그러므로 아름다움은 대상의 본질을 이루는 표지라든가 동인動因이 아니며, 주체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다.(칸트, 쇼펜하우어) 관찰자로 하여금 감정이입이 되도록 자극시키고, 더 나아가 관찰된 대상 속으로 관찰자 스스로 완전히 빠져들도록 자극시키는 것, 그것이 아름답다.(관조, 미학적 관찰) 이러한 종류의 감정이입은 인간을 습관적이고 일상적인 관점으로부터 해방시킨다.(현실로부터 해방된 자아, 순수한 관찰) 순수한 관찰은 대상 속으로 밀쳐들어 가고, 대상 속으로 침잠하여 그 속에서 머무른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순수관찰이 대상 자체와 그 대상 안에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 어떠한 것도 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연미를 배제시켜버린 헤겔의 관점을 다시 무효화시키고 이제 모든 대상을 명상적 침잠의 계기와 대상으로 허용하는 것은 결코 놀랄 일이 아니다. 예술작품이나 자연현상을 개인적인 미학적 내면의 체험으로 자아의 동참이라고 한다. 즉 대상들이 미학적으로 될 수 있는 것은 언제나 수용자가 그 대상을 느끼고 지각하고 다시 인식할 수 있는 경우일 뿐이다. 요컨대 나의 개인적 지각의 폭과 깊이와 부피, 최상의 학문적 경지에 이르기까지의 지식들이 감정이입의 정도를 좌우한다. 작품은 여러 의미를 지닌다.(다의적) 하나의 해답, 유효한 해석이나 규정이나 진술은 존재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시각이며 관점이다. 학문적인 패러다임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더 이상 타당하고 유효한 규범적 학문은 존재하지 않는다. 극히 다양한 방법들과 분과학문들은 그것들이 질문에 대한 답과 해결책을 제시하는 한에 있어서는 동등한 권리를 가지며 마찬가지로 유효하다. 물리학이나 수학조차도 이 문제의 영향권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고, 철학과 미학 또는 예술철학과도 마찬가지다. 20세기 초에 있었던 미학 이론과 예술적 실천, 미학과 예술학 사이의 분열과 갈등들의 서막이었던 셈이다. 20세기에는 극히 상이한 입장들이 자유롭게 서로 뒤섞여 유동하고 있으며, 미학의 활동범위는 여전히 칸트와 헤겔을 중심으로 하고 있지만, 그 사이에는 다양한 입장과 관점들(해석학과 현상학, 존재론, 마르크시즘, 구조주의, 실용주의, 기호학, 정보이론, 복제기술)이 꾸불꾸불 강물처럼 흘러가고 있고, 보다 확실한 것으로 여겨졌던 기준들, 즉 생산자와 수용자, 그리고 예술가와 해석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유동적이 되어 버렸다. 주체의 보편적 위기, 전통적으로 인정되어 온 개성에 대한 문제 제기와 더불어 예술생성과 소비에 있어서의 창조자와 수용자의 역할들도 흔들리게 되었다. 그리고 온갖 촉진 역할들(미디어, 전달 매체들)을 수행하는 판매체계들과 광고 체계들이 그 사이에 자리잡고 있다. 예술작품들은 존재한다. 예술작품들은 자신의 본질을 우리에게 말해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예술작품들로 하여금 입을 열도록 하기 위해 우리에게는 이론이나 철학이 필요한 것이다. 모든 예술작품은 온전하게 경험되기 위해서는 사유, 즉 철학을 필요로 한다. 여기서 철학은 다름 아니라 억누를 수 없는 사유를 말한다. 그리고 이해란 비판과 동일한 것이다. 이해의 대상을 일종의 정신적인 것으로 내면화 하는 능력, 즉 이해의 능력은 다름 아니라 참과 거짓을 구분하는 것이다. 또한 이데올로기 문제는 결코 배제되기 어려우며, 어떠한 이론들이라 할지라도 정치적인 맥락과 권력의 담론 속에서 작용되고 오용되는 것을 피할 도리가 없다. 즉 모든 이론적 담론들은 특정한 사회집단의 언어들로부터 생겨나며 집단의 관점들과 공통의 이해관계들을 반영한다. 요컨대 보편진술과 총체성과 전체성의 위험은 결국 그 어떤 체제의 도그마와 광기, 닫힌 지배구조와 사회의 광기로 이른다. 20세기는 권력과 함께 개인주의와 주관주의라는 근대의 개념은 끝장나고 말았다. 그 배경에는 이제 거대한 질서라는 이념이 요동치고 있다. 예술은 인류의 기억으로서 작품들 속에서 인류 발전의 상태를 읽어낼 수 있다. 또한 예술은 진리를 드러냄으로써 파악할 수 없는 것에다 형태를 부여하는 마술지팡이이다. 이것은 궁극적 목표를 비판하고 유토피아적인 動因을 거부하며, 심지어는 예술작품의 내용조차 거부한다.

    루카치, 블로흐, 아도르노, 벤야민, 하이데거, 비트켄슈타인, 벨쉬, 리오타르, 푸코, 보드리야르, 짐멜, 굿맨, 단토, 쿠체라

    예술은 체험이면서 또한 전달(영향, 소통)이다. 그것은 특정한 내용의 형식이다. 예술은 선취(先取-미리 보여줌)의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예술적 가상假像은 가시적可視的인 선취이다. 이러한 식으로 선취는 잠재된 가능성을 드러내며, 그 선취를 통해서 잉여, 즉 미학적 잉여가치가 표현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아름다움과 진리, 아름다운 가상과 참된 선취는 서로 형제자매 사이가 된다. 광범위한 가능성을 가진 위대한 작품들이 매개하고 있는 시대의 현실이라 할지라도 빈틈없는 연관을 나타내고 있는 것은 아니며, 언제나 단절과 파편성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것은 썩은 역사의 연속을 폭파해버리기 위해 예술이 만들어 내야 하는 충격효과이다. 복잡한 세계는(20세기는 부르주아-부를 축적한 중산층의 형성-의 사회, 문화) 더 이상 단순한 재현의 기술을 통해서 포착될 수 없다. 예술은 추하고 배척된 것을 자신의 영역으로 끌여들여야 한다. 세계가 자신의 모습에 따라 만들고 재현한 그 추를 통해서 세계를 고발하기 위함이다. 위대하고 성공적이며 진실한 작품은 소외에 대한 저항이고, 사회에 대한 부정이며, 비동일적인 것이고, 아방가르드적인 예리한 창날이고, 친숙함과 관습적인 속박에서의 풀려남이며, 기대수준과 규범화된 의사소통의 방식들에 대한 저항이고, 극단적으로 자율적이고, 투사할 수 없을 정도로 수수께끼 같으며, 식별할 수 없을 정도로 아방가르드적이다. 20세기는 황폐화(환경파괴)와 억압의 기제들(내적인 길들임)은 무엇보다도, 무제한적 진보(자연을 소유 지배)를 기치로 내세우며 인간과 자연의 참된 요구를 망각해 버린 채, 개념에 집착하는 이론과 철학들에 그 책임이 있다. 과학과 기술, 합리성과 진보에 대한 믿음을 기치로 내걸고 세계를 황폐화시키는 존재 망각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예술은 다른 방식으로는 진술될 수 없고, 형상과 은유와 상징과 같이 은폐된 방식으로만 전달될 수 있는 인식들을 제공한다. 작품은 수수께끼들로 발언하고, 그 실제 내용은 언제나 변형된 일상이며, 현실적인 것을 자율적인 작품의 영역으로 초월시킨다. 이 과정에서 작품은 언제나 특수한 것, 개별적인 것, 분리된 것, 일시적인 것을 취하여 형상화한다. 그리고 예술작품은 철학 속에서, 차후적으로 재구성하고 해석하는 행위 속에서, 철학적 글을 통해서 다시 발언한다. 요컨대 철학적 글은 예술작품이 자기 자신으로부터는 발언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며, 감각적인 것을 개념적인 언어로 번역한다. 예술은 진리를 향해 있지만, 직접적으로 그것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진리는 예술의 내용일 뿐이다. 예술은 진리와의 관계를 통해서만 인식이 된다. 예술 자체가 진리를 인식하지만, 그것은 진리가 예술을 통해서 드러날 때만 그러하다. 예술은 인식으로서 논증되는 것이 아니며, 또한 예술의 진리가 어떤 객체를 반영하는 것도 아니다. 예술은 예술이 말하지 못하는 것을 말하기 위해 예술을 해석하는 철학을 필요로 한다. 다시 말해 예술이 아무 말도 하지 않을 때에 한에서만 예술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술과 철학은 서로를 필요로 하고, 서로를 완성시키고 서로를 보완한다. 이로써 예술은 더 이상 철학의 기관이 아니다. 그래서 헤겔의 명언도 수정된다. 한편으로 작품에는 그 시대가 이미 각인(무의식적인 역사서술)되어 있다.

    예전의 숭배 가치는 전시展示 가치에 의해 밀려나게 되었고, 복제기술(영화, 사진)에 의해(예술적) 자율성이라는 가상은 영원히 사라졌다. 복제는 예술작품을 이동 가능하게 하였고 복제품의 구조에 따라 습득의 방식, 수용의 방식도 변화된다. 지배자들의 사유는 지배적인 사유이다. 작품들의 기법도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 시대와 전체 역사 과정을 보존하고 또 지양하는 그때마다의 삶의 작품이란 것도 사실은 그러한 기법과 단순한 내용 속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예술을 체험이라고 해석하고 미학 전체를 거기로 환원시키는 입장은, 주관성의 철학이라고 하는 경향 때문에 예술이 타락하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술은 한편으로는 생산자와 수용자라는 비본래적인 영역들을 강화시키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고유하고 본질적인 범주를 시야에서 놓쳐버리기 때문이다. 예술은 작품이며, 작품으로서의 예술은 스스로를 보여주는 하나의 사물이며, 외면과 껍질을 가지고 있고, 그럼으로써 물질적 특징을 가짐과 아울러 또한 언제나 자기 자신을 넘어서는 그러한 사물이다. 그것은 존재하는 바로 그것이다. 예술작품은 미메시스적인 재현이 아니라 세계를 건립한다. 작품 속에서 존재의 구조가 표현되며, 가상 속에서 존재가 현현한다.(시적인 언어) 그러므로 작품은 무엇보다도 의미로서의 세계를 이루는 것이지, 의미를 모방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의미는 자연 속에, 자연적인 것에 토대를 둔다. 즉 작품은 말을 한다. 곧 작품 속에서 진리의 현현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요컨대 예술작품은 진리를 말한다. 작품 속으로 들어가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아름다움이다. 그러므로 아름다움은 진리가 존재하는 방식이다. 작품은 진리이고 그것의 가상이 아름다움이다. 진리는 그러므로 아름다움이라는 양태를 드러낸다. 기존의 것 그리고 관습적인 것으로부터는 결코 진리를 읽어낼 수 없다. 그러나 작품과 진리와 존재의 위엄이 모든 것을 차지해 버린다면, 작가와 수용자는 도대체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그 무엇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아름답게 보일 뿐이다. 그것은 우리에 의해서 재해석되며, 또 다른 어떤 것으로 보여진다. 이 말은 우리 자신이, 우리가 보는-행위가 그 어떤 것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지, 사물이나 사실 등 그 자체가 아름답지는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쨌든 미학적 설명은 결코 인과론적 설명이 아니다. 세계를 창조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구성주의) 즉 눈이 세상을 만들어 낸다. 세계는 세계를 보는 것이며 존재 전체는 존재를 보는 것에 의해서 결정된다. 눈은 고르고, 배제하고, 조직하고, 구분하고, 연상하고, 분류하고, 분석하고, 구성한다. 눈의 고유한 임무는 재현에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수용하고 제작하는 데 있다. 그리고 눈이 수용하고 제작하는 것, 그것을 눈은 속성들이 없는 사물들로서 뿐만 아니라, 또한 대상들로, 음식물로, 인간으로, 적으로, 별들로, 무기들로 본다. 그러므로 눈은 사물들을 단순하게 혹은 벌거숭이 상태로 보는 것이 아니라, 연관 속에서, 다시 말해서 실존적인 구조 그리고 또한 사회문화적 구조와 역사적 구조라는 맥락 속에서 본다. 대상들을 재현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것들을 제작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과정에 우리의 모든 경험들, 우리의 연습, 관심과 태도들이 관여한다는 것은 자명하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이 여건만 주어지면 언제나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은 물론이다. 그러므로 어떤 대상이 어떻게 보이는가의 여부는 그것을 정돈하거나 멀리 가져다 놓거나 조명을 비추거나 하는 것 등에 의해 좌우될 뿐만 아니라, 또한 그것에 대한 우리의 지식, 우리의 교양과 습관과 관심에 의해서도 좌우되는 것이다. 즉 자연은 예술과 언어의 산물이다. 언어는 형상들과 꼭 마찬가지로 우리가 알고 있는 언어와 세계의 창조에 관여한다. 이러한 보편적인 상징화의 과정 속에서 인간은 예술의 언어들, 다양한 예술의 장르들과 예술의 유형들, 개별적인 기호 형식들을 만들어낸다. 이런 것들은 달리 해석될 수 없다. 예술은 결코 모방이 아니며 창조이다. 예술은 창조이고 재창조이며, 학문으로든 일상 언어를 통해서든 신비적인 방식이든, 그 어떤 방식으로도 기술될 수 없는 세계를 지시한다. 예술은 또한 우리의 감정과 감각에 호소하며, 우리의 감정과 감각은 그 인식 기능을 드러낸다. 지각이 인식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예술과 학문 사이의 구분은 느낌과 사실, 직관과 논증, 즐거움과 성찰, 종합과 분석, 감각지각과 뇌의 활동, 구체성과 추상성, 열정과 행위, 간접성과 직접성 혹은 진리와 아름다움 사이의 구분이 아니라, 상징들의 그 어떤 특수한 표지들이 지배적인 가에 따라 결정되는 구분이다. 미학적 상징체계의 보다 세밀한 기호 또는 탁월성의 요인들은 밀도와 충만함과 예시성豫示性이다. 통사론과 의미론에 있어서는 밀도와 충만함이 기준이 되며, 예시성 또는 은유적 예시는 전통적으로는 표현이라고 불리던 것을 목표로 한다. 예컨대 회색의 형상은 술어인 회색을 예시할 뿐만 아니라, 또한 동시에 슬픔을 표현한다. 그러한 상징들, 전체 상징체계들이 가진 기능의 본질은 그것들이 의사소통의 매개물이 된다는 데에 있다. 상징들은 지속적인 논쟁들의 계기가 된다. 예술작품들은 사실들과 생각들과 느낌들을 매개하는 대사관들이다. 그리고 상징들에 대한 연구는 소통이론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새로운 개량품종에 속한다. 예술은 사회에 종속되어 있지만, 사회를 살아 있게 하는 데 도움을 준다. 예술의 존재는 어떤 인간도 섬이 아니게 만드는 데 기여한다. 이러한 생각은 예술 수용을 고독한 침잠의 행위로, 유아적唯我的인 명상으로 해석하려는 하는 쇼펜하우어로부터 비롯되는 모든 구상들에 대한 첨예한 반대를 내포하고 있다. 그러므로 예술의 제1차적인 의미와 목적은 인식이며, 두 번째 의미는 예술에 대한 공통의 이해이다. 상징으로서의 예술은 구조적으로 또한 소통적 이해를 목표로 한다. 왜냐하면 직접적인 필요성을 넘어서 있는 상징들은 실제 행동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해를 위해서 사용되기 때문이다. 우리를 재촉하는 것은 알려는 욕구이다. 발견은 기쁨을 준다. 의사소통은 전달되어야 하는 것을 이해하고 표현하는 것과 비교할 때 부수적이다. 주된 목적은 즉자적卽自的이면서도 대자적對自的인 인식이다. 실제적인 유용성, 만족, 강제성, 그리고 소통의 유익함, 이 모든 것은 인식에 종속되어 있다. 상징체계들을 통하여 우리는 세계를 우리 것으로 만들고, 예술은 특별한 기호들을 가진 자기만의 고유한 체계이므로, 결국 우리 사회 전체의 상호작용은 상징적으로 매개된다. 예술을 통해서 세계는 보다 풍성해지고, 새로운 면모를 갖추게 되며, 다른 관점들과 양태들을 얻게 된다. 예술은 모든 종류의 도그마를 거부하는 최고의 항의이다. 왜냐하면 예술은 쉬지 않고, 앎의 욕구에 넘쳐, 시험을 계속하기 때문이다. 예술작품의 참된 의미는 어떤 다른 방식으로도 보여줄 수 없는, 세계에 대한 관점을 제시하는 데 있다. 이 말의 의미는 예술이란 다른 어떤 매개물이나 다른 어떤 체계로도 대체할 수 없는 세계 재현의 방식이라는 것이다. 요컨대 예술은 세계 내지는 세계에 대한 관점을 예술적으로 제시한 것이다. 모든 예술작품은 문화적인 시대의 내면을 표현하며, 스스로 거울을 자처한다. 예술과 작품은 예술 혹은 작품에 대한 나의 해석의 산물이다. 요컨대 작품은 결코 그 자체로는 존재하지 않으며, 오로지 우리를 위해서, 다시 말해 해석되고 의미가 부여되고 가치평가(아름답다, 안락하다, 매력적이다 등등)를 받는 것으로서만 존재할 뿐이다. 가치를 매기지 않는 사물들은 우리에게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미학적 가치평가는 사물들을 예술로서 전적으로 특별하게 평가하는 것을 의미하며, 사물들을 탁월한 방식으로, 즉 미학적으로 기술하는 경우를 말한다. 그러므로 예술작품들은 우리에 의해 특별하게 평가된 사물들이며, 우리에 의해 예술작품들로 해석되고 특별한 의미론(미학적 개념들, 언어놀이) 속에서 기술된 사물들이다. 예술은 그 무엇을 예술로 보고, 특별한 가치평가를 표현하는 해석이고 의미부여이고 가치매김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러한 미학적으로 가치평가된 대상들 속에서 다시 우리 자신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 대상들은 우리에게로 다가와서 우리와 하나가 된다. 작품은 그것이 읽혀지는 순간에라야 비로소 자신의 대상을 얻게 된다. 미학적 특질들(아름다운, 추한, 숭고한)은 객관적인 가치들이 아니며, 우리가 사물들에 부여한 것이다. 그러한 특질들은 우리의 직관방식에 의해 구성된다.(미학적 판단) 하나의 예술작품은 어떤 의미 있는 내용을 성공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가상(영상)은 더욱 아름다워지기는 커녕, 실재의 존재 영역을 차지하며 들어서서 우리의 사유와 느낌과 행동을 지배한다. 미학적인 것은 오늘날 보편적인 현상이 되었으며, 우리 시대의 문화를 가늠하는 키포인트가 되었다. 미학은 더 이상 예술의 영역에 국한되지 않고, 생활세계와 정치, 커뮤니케이션과 미디어, 디자인과 광고, 학문과 인식 이론을 규정하고 있다. 미학적인 것의 현실성은 무엇보다도 표피적인 측면들을 가진다. 또한 미학은 표면뿐만 아니라 기초구조마저도 지배한다. 우리들의 생산방식, 현실에 대한 우리의 이해 그리고 우리의 인식 형식들도 점차로 미학적인 특징들을 드러내고 있다. 세계 전체가 영상들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으며, 세계는 환영이고, 미디어의 거푸집이 되었으며, 또한 영상-기술적 가능성들을 통한 연출이 되고, 시뮬레이션이 되었다. 세계는 그 자체로서 미학화(가상의 세계) 되었다. 영상 속에서의 세계 그리고 영상으로서의 세계는 현실을 속화시키고, 평균화시키며 무관심한 대상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리고 존엄성마져 박탈해버려 결국 전쟁이나 대파국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탈근대의 사유는 무엇보다도 일련의 거부를 그 특징으로 한다. 즉 근대적인 것인, 진보, 완전성, 역사, 목적론을 반대한다. 그리고 전체와 이성 그 대신에 정지상태와 보전, 순간과 반복, 복수성과 이질성, 지각과 감각을 옹호한다. 즉 동일성 대신에 차이를, 안정성과 안정화 대신에 파괴를, 차이점과 다원성을 강조하며 전통과 관습 대신에 새로운 것과 순간적인 것을 옹호한다.(공허함, 하잘 것 없음, 의미없음) 오늘날 지배적인 사유는 미학적 사유로서 이성의 붕괴라는 가정으로부터 출발한다. 미학적으로 포착되고, 연출되거나 혹은 미디어를 통해 기획되기도 하는 현실은 오직 지각적인(감각적 인식) 사유를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다. 사유 유형의 이러한 변화, 즉 이성중심적인 사유에서 미학적 자유로의 이동에 있어서 결정적 요인은 현실 자체의 변화이다. 오늘날의 현실은 본질적으로 지각의 과정을 통해서, 무엇보다도 미디어에 의한 지각 과정을 통해서 구성된다. 이제 현실은 우리가 지금까지는 예술에만 적용했던 기준들, 즉 창작 가능성, 변화 가능성, 비구속성, 유동성 등과 같은 기준들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다. 자연의 힘과 비교할 때 우리의 저항 의지는 너무나 미미하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안전하다고 느끼는 순간이라면 그 자연의 광경은 더욱 더 매력적(숭고미)으로 보이게 된다. 그러나 야만 상태의 인간은 자연의 폭력 앞으로 몰린 상황에서는 자유롭지 못하고 자유롭게 판단할 수도 없다. 그런 사람은 또한 미학적으로도 느끼거나 판단할 수도 없다. 그것은 자연이나 혹은 인공적인 예술품을 볼 때도 마찬가지이다. 미학은 언제나 자유를 전제로 한다. 실제적인 자유와 이상적인 자유, 현실적인 요구들로부터의 자유와 더불어 상상력의 유희 속에서의 자유를 전제로 한다. 탈근대주의의 예술작품은 이제 더 이상 아름답지 않은 혹은 추한 작품으로서가 아니라, 숭고한 작품으로, 부정성(부재성, 결핍)과 빈 자리들, -연관의 작품으로 나타난다. 다시 말해 숭고한 작품은 무에 대한 텍스트이고, 침묵과 고요의 음악이며, 단색의 그림들이다. 탈근대주의의 작품은 부재의 작품으로, 실재적인 내용들을 도외시하고, 빈자리들을 드러내고, 표현할 수도 말할 수도 없는 것을 표현함으로써 그 무엇을 표현한다. 즉 상상력은 절대적인 것(사물)을 표현할 형식들을 만들어 낼 수 없음을 스스로 알아 차린다. 형식의 이러한 무능함은 예술의 종말을 선언한다. 예술 자체의 종말이 아니라 아름다운 형식으로서의 예술의 종말을 선언하는 것이다. 예술은 여전히 지속된다. 하지만 전혀 다른 방식으로 지속된다. 미감의 저 너머에서, 감각이 아니라 전적으로 비감각적인 비밀로부터 유래하는 를 드러내고 밝히려는 노력으로서만 지속된다. 다시 말해 예술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할 수 없다고 말한다. 요컨대 숭고의 발견은 또한 동시에 현대적이고, 아방가르드적인 작품의 원천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유 과정은 다음과 같다. 칸트에서 비롯되는 숭고의 느낌은 불쾌감과 뒤섞인 쾌감이며, 불쾌감으로부터 유래하는 쾌감이다. 그것은 사막이나 산이나 피라미드, 폭풍우치는 대양, 화산 폭발 같은 거대하거나 강력한 대상들로부터 생겨난다. 하지만 그러한 거대하고 강력한 대상들은 모든 절대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감각적 직관을 넘어서 있으며, 오로지 이성의 이념으로만 사유될 수 있다. 표현능력과 상상력은 이러한 이념에 적합한 표상을 드러내려 시도하기는 하지만 끝내 좌절하고 만다. 그리고 이러한 표현의 좌절이 불쾌감을 불러일으킨다. 이 불쾌감은 주체가 파악할 수 있는 것과 주체가 상들로써 나타낼 수 있는 것 사이의 분열, 즉 주체 분열의 일종이다. 그러나 이러한 불쾌감은 다시 쾌감, 심지어는 이중적 쾌감을 낳는다. 상상력의 무기력은 이제 거꾸로, 상상력 자체로 하여금 눈에 보일 수 없는 것을 눈에 보이게 만들도록 시도하게 만든다. 상상력은 자신의 대상과 이성의 대상이 서로 조화를 이루도록 노력하게 만든다. 다른 한편 형상들의 불충분함은 또한 동시에 헤아릴 수 없는 이념들의 힘을 소극적으로 나타내는 표지이기도 한다.

    빈자리, 결핍, 즉 우리들의 표현능력의 무능함에 대한 근본적인 경험이라는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또한 동시에 우리의 우월함, 이념들을 통제할 수 있는 우리들의 표상 능력의 우월함을 파악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이성의 이념들을 의식함으로써 현대적이고 아방가르드적인, 마침내는 탈근대주의적인 예술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러한 예술은 감각적인 것에는 그 무엇이 결핍되어 있고, 혹은 그 무엇이 감각적인 것을 넘어서 있음을 감각적으로 증언한다. 그 무엇의 이름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것은 이름붙일 수 없는 것이다. 이념은 이름붙일 수 없는 것으로서, 역설적으로 표현하자면 그 부재성만이 제시된다. 현대의 미학은 숭고의 미학이다. 하지만 그 자체로서는 그리움의 대상으로 머물 수밖에 없다. 현대의 미학은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오직 부재하는 내용으로서만 거론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형식은 인식 가능한 것이므로 독자나 관찰자에게 위안을 주고 쾌감을 주는 계기가 된다. 그러나 이러한 느낌들은 쾌감과 불쾌감이 아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숭고의 실제적인 느낌은 아니다. 쾌감은 이성이 모든 표현을 넘어서 있기 때문에 오는 것이며, 고통은 상상력과 감각이 개념에 상응할 수 없으므로 오는 것이다. 탈근대주의는 현대를 표현함에 있어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암시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며, 적합한 형식들이 주는 위안을 거부하고 아울러서 불가능한 것에 대한 그리움을 공동으로 느끼고 나누는 미감에 대한 동의를 거부하는 것이다.

    진짜보다 더 진짜다운 것 그것이 시뮬라시옹이다. 모든 것은 시뮬라시옹 속에 갇혀 버렸다. 풍경들은 사진 속에, 여성들은 성적인 시나리오 대본 안에, 생각은 문서 안에, 테러리즘은 유행과 미디어 안에, 사건들은, TV 안에 갇혀버렸다. 사물들은 이 희귀한 운명을 위해서만 존재하고, 세계는 자기를 위해 다른 세계를 만들어 내는 광고를 위해서만 존재한다. 우리가 가진 모든 기계들은 스크린이며, 우리 자신이 스크린이 되었다. 인간은 경계를 위반하는 존재로 태어났다. 인간은 새로운 미지의 영역을 차지하려고 지속적으로 노력하고, 그럼으로써 보다 광범하고 보다 높은 전망의 탑을 건립하려는 존재이다. 예술은 반대 진술이며, 실재에 대한 항의이고 교정이다. 대상의 진리와 진정한 견해를 결정하고 전달할 수 있는 특권적인 판관, 해석자, 혹은 해설자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더라도 작품(텍스트)에 대한 해석과 설명은 가능하다. 스크린 위의 실재가 실재(실재)이다. 현대의 근본적인 전개 과정은 상으로서의 세계에 대한 정복이다. 왜냐하면 실제의 행동과 태도는 예견될 수 있고, 시뮬레이션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전자계산기는 예술로부터 그 모든 것을 빼앗아 버렸다. 예술은 자신의 소유권을 몰수 당했다. 그러나 미학적 사유는 미디어 혁명의 압력에 직면하여 새로운 종류의 사유를 촉구한다. 이 새로운 사유는 계몽주의적 사유의 초기(바움가르텐)로 돌아가는 것이며, 미디어 혁명을 거부하고, 오히려 현상들에 집중하고, 개별적이고 일상적이고 진부한 현상에 그리고 임의적인 인상을 중시하는 지각을 옹호한다. 이성 중심주의에 엄격하게 대립하는 이러한 종류의 사유가 유일하게 현실적인 방법일지도 모른다. 이성은 19세기에 부르주아-자본주의의 사회가 성립하면서 경제와 자본의 논리로 타락하고 말았다. 18세기 형식주의 미학(헤겔)에서 포스트 모더니즘, 후기 구조주의, 탈구조주의적으로 연결된다. 다른 한편으로는 니체 해석에 의한, 세계는 미학적 현상으로서만 지속될 수 있고, 세계는 우리 인간들에 의해 만들어지며, 매순간 끊임없이 새롭게 생겨난다. 진리는 존재하지 않고, 다수의 관점들로부터 생겨나는 진리들만 존재한다. 오성과 논리의 지배는 서구에서의 인류발전의 거대한 오류이다. 반면에 예술은 진정한 삶의 자극제이고, 존재를 신성화함이다.(순간의 미학, 관조의 개념) 예술은 우리로 하여금 총체성에 대한 추구 대신에 경계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게 하고, 모순의 운동을 위반의 몸짓으로 대체하는 그러한 사유의 형식에 친근하게 만든다. 미학사의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은 경계를 넘어서는 것, 즉 탈경계의 끊임없는 시도에 있다. 결국은 자기 부정과 갱신이 반복되는 자유의 공간을 확보하려는 시도이고 오늘날 미학에 주어진 과제는 그 빈자리와 무로 넘어가는 경계들을 온전하게 포착하는 것이다. 이 몸부림을 통칭하여 미학적 사유라고 부른다. 그 경계 설정은 또한 해체와 탈주의 몸부림이다.

    예술은 미적 심리를 반영할 뿐만 아니라 지위 심리를 반영한다. 예술의 기능은 공동체를 하나로 묶어 주고, 새로운 방식으로 세계를 보게 해 주고, 우주와의 일체감을 주고, 숭고함을 경험하게 해 주는 것이다. 하지만 적응(인간이 진화한 환경에서 특별한 유전자 사본의 수를 증가시키는 매커니즘)과는 무관하다. 음악은 언어를 담당하는 마음 소프트웨어의 일부를 차용한다. 그리고 전 세계 언어들이 추상적인 보편 문법을 따르는 것처럼, 전세계 음악 언어도 추상적인 보편 음악 문법을 따른다. 인생이 예술을 모방한다. 예술의 기능은 인생이 그것을 모방하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389. 웃음은 무의식적인 소음이다. 웃음은 집중을 방해하고 점염성이 있다. 웃음이 시끄러운 것은 웃음이 갇혔던 심적 에너지를 방출시키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웃음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즉 웃음은 일종의 소통이다. 웃음이 또한 무의식적인 것은 다른 감정 표현들이 무의식적인 이유와 같다.

    유머의 3요소는 부조화, 해결, 모욕이다. 유머에는 개인을 믿음과 욕구의 주체로 보는 심리학적 틀과, 개인을 물리적 법칙에 종속된 물질 덩어리로 보는 물리적 틀이 충돌한다. 외설적 유머는 심리학적 틀과 개인을 역겨운 물질의 배출구로 보는 생리적 틀이 충돌한다. 성적 유머에서도 심리학적 틀과 생물학적 틀이 충돌한다. 언어적 유머는 한 단어의 두 의미가 빚어내는 충돌에 의존한다. 두 번째 의미는 의외이고, 민감하고, 모욕적이다.

    조상숭배는 곧 조상이 될 사람들에게는 매력적인 생각이다.

    샤먼과 사제는 자신들이 강력하고 경이로운 힘에 내밀히 관여하고 있다고 믿게 만들기 위해 날랜 손재주와 복화술에서부터 호화로운 신전과 성당에 이르기까지 온갖 특수효과를 사용하는 오즈의 마법사들이다.

    글을 쓰는 사람의 손을 떠나는 순간 그 글은 공존의 영역으로 들어가며 그 누구도 그 의미를 판단하는 독점적 권리를 가지지 못한다. 이렇게 해서 발신자(기원, 의미생성)도 수신자(목적, 이해)도 사라지고 오로지 텍스트(구조)만 남게 된다. 전통적인 독해관에는 억압적 권력을 바탕으로 합의를 강요하는 정치적 함의가 숨어 있다. 텍스트가 아니라 텍스트의 해석이 권위와 권력을 행사한다. 이런 지배 담론의 가장 해악적인 측면은 바로 다양한 관점을 용인하지 않는 데 있다.

     

    390. 개념예술 conceptual art-제작의 개념과 과정 자체를 예술작품으로 보는 예술

    종교는 문화적 현상이다. 즉 자연현상이다.(인간적 현상)

    예술은 익숙한 것을 낯설게 만들기이다. 우리는 너무 가까운 것은 당연시 여기며 그 실체를 명확히 보지 못한다. 실제로 창조적 천재들은 지나치게 익숙한 껍질을 뚫고 일상적이고 명백한 것들을 신선한 눈으로 보게 해준다.

    포스트 모더니즘은 자의식적, 자기 모순적, 자기 해체적, 자기 반영적, 현실성, 패러디, 역설, 전복, 부조화, 비판의식, 혼합미학, 역사성, 콜라쥬, 대중성, 다원성, 복잡성,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탈자연화, 탈규범화, 차이화, 탈중심성, 주변성, 이중약호화-과거의 양식+현재의 의미와 지역적 특성, 이중적 언술의 형태를 취한다. 그것들은 주어진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것들이다. 영화에서 사용되는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단어는 아니러니, 재미, 역사적 문헌의 언급, 토속적인 소재의 사용, 문화들 간의 연속성, 결과보다는 과정에 대한 관심, 예술과 실제 삶의 경계와 제 예술형식들 간의 경계 허물기, 예술가와 관객의 새로운 관계 형성 등이다.

    커뮤니케이션은 정보의 전달과 확산이다. 정보는 명령어의 집합이다. 알려준다는 것은 명령어를 유통시키는 것이다. 즉 우리에게 믿으라고 요구하지는 않지만, 믿는 것처럼 행동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정보이고 커뮤니케이션이다. 정보란 정확하게 통제체계인 것이다.

    주권사회훈육사회통제사회

    고속도로로 사람들을 감금하지는 않지만, 고속도로를 통해 통제 수단을 늘릴 수 있게 된다. 사람들이 전혀 갇혀 있지 않고 무한히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데도 완벽하게 통제된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미래이다. 정보는 바로 이것, 즉 주어진 사회에서 통용되는 명령어의 통제 체계이다.

     

    제가 직접 찍은 사진들을 조금씩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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