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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영상, 미학론 45 (교재 공개)
    패러다임/예술 2021. 3. 5. 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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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생각하기 이해하기 실천하기-

     

    영상, 미학론 45

     

    382. 시는 현실을 품고 부화시키는 하나의 가능 세계의 표현이다. 즉 농익은 경험의 다양체들이 상징과 이미지라는 의사소통의 기호들로 함축되고, 사유와 상상들은 감각의 등고선으로 태어난다. 가장 좋은 시는 현존이 욕망하는 직관 의지도, 이미지의 지도를 보여준다. 그러나 시인의 지도는 한번도 살아보지 못한 극작의 지도, 없는 곳에 대한 지도다. 시는 정서의 표현이 아니라, 그것의 배반이며 해체다. 언어 이전의 것이다. 즉 시는 언어를 쓰되, 언어를 넘어선다. 시는 언어가 아니라 이미지, 리듬, 비전 속에 그 몸을 드러낸다. 언어와 언어 사이의 여백과 침묵에 의미를 부여하고, 압축파일을 지향하고, 언어에서 자유로워야 하고, 진술이 아니라 울음이며, 노래고, 다가오는 것들에 대한 계시로, 어두운 하늘에서 우는 천둥이며 번개이다. 시는 기교를 버리고 나아가는 데 있다. 또한 경험을 넘어서 간다. 시인은 온갖 것들과 연애를 하지만, 연애에만 몰입하지 못하고 그 온갖 것들을 뒤집어 이면을 본다. 시는 사물에의 최면이고 빙의다. 또한 세상을 넓고, 깊게, 낯설고 새롭게 바라보기다. 그리하여 본질에 다가가기다. 허식과 기만을 뚫고 나아가는 상상력과 이미지의 놀이다. 시는 당대의 주류적 가치를 옹호하지 않고, 오직 현실에 당도하지 않은, 그래서 모호한 윤곽만을 드러내는 미래의 가치에 헌신한다. 시는 영웅, 성공, 웅장한 것에 대한 예찬이 아니라, 하찮은 것의 숭고함과 실패한 것들의 창백한 진실, 비루한 것의 장엄함에 바치는 한숨섞인 헌사다.

    시인이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는 자고, 철학자란 사유할 수 없는 것을 사유하려는 자고, 코뮨주의(commune-ism 실패한 공산주의 communism로부터 나온 것으로, 변혁의 실험을 모든 방향으로 열어 놓는 실험이다)자란 만들 수 없는 것을 만들려는 자이다. 그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고자 반복하여 시도하는 자이다. 불가능하기에 영원히 계속할 수 밖에 없는 반복, 이런 반복을 니체는 영원회귀’, 맑스는 영구혁명이라 했듯이 공산주의는 여전히 공산주의 너머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공산주의는 최종적인 것으로 인정된다는 불랑쇼의 말처럼 코뮨주의는 계속 나아갈 것이다.

    생산능력(잠재적 능력, 현실적인 능력, 자기화하는 능력, 결합능력, 수용능력, 재영토화하고 탈영토화할 수 있는 능력)이란 에너지의 형태나 소재적 형태를 자신이 이용 가능한 형태로 변형시키는 강도적 능력(내포적, 강도를 조절하는 능력)이며, 다른 한편으로 생산을 위해 필요한 요소들과 결합하는 능력이고, 그러한 결합의 양상을 통제하여 협력을 창출해 내는 능력이다(외연적, 결합되는 대상들을 선택, 대체, 폭 조절, 변형시키는 능력) 생산력이 발전된 사회로서의 코뮨주의는 생산능력의 외연의 확대와 더불어 강도가 최대화될 수 있는 사회를 뜻한다. 생산력은 무엇보다 관계의 문제로서 협업양식(생산수단, 생산방식, 생산과정, 생산조직, 생산조건 등)과 결부되어 있다. 그래서 생산관계를 변혁해야 한다. 생산력 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대체한 새로운 종류의 생산관계를 창안해야 한다. 즉 생산력 발전이 혁명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자연과의 새로운 관계를 구성하고, 인간 아닌 생명체들의 생존과 공존을 추구하고, 인간들의 새로운 협동방식을 구성하고, 인간을 포함하는 새로운 종류의 공동체를 구성하고, 욕망과 생산활동의 거리를 좁힘으로써 생산의 강밀도를 높이고, 가능한 생산활동의 폭을 확장하고 다양화함으로써 생산능력의 외연을 확대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실 어떤 종류의 추상화를 통해서 가능한 것이다. 단지 공통점을 모으는 식으로는 안 되고, 변형을 거치면서 이런저런 생산양식의 추상기계로 변환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통상적인 의미에서 추상화는 어떤 대상 가운데 핵심적인 것만 남기고 나머지는, 덜 중요한 것은 지우는 것이다. 사실 모든 개별적인 것은 다 다르다. 세상 어디에도 똑같은 두 장의 나뭇잎은 없다. 그렇지만 각각 다른 그것들을 묶어서 나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부르게 해 주는 것은, 그 각각에 공통된 어떤 것만 남기고 다른 것은 지우는 추상화로 인해 가능한 것이다. 이렇게 개별적인 차이들을 지우며 남겨두는 것을, 그 각각을 나무라고 할 수 있게 해주는 본질이라고 한다. 개별자들 간에 존재하는 공통성의 추상, 혹은 공통형식의 추상을 통해 도달한 이 본질을 보편성 내지 보편자’(보편적인 것)라고 부른다. 이런 점에서 공통형식의 추상은 보편화의 방법이기도 하다. 어떤 것을, 본질을 달리하는 다른 것과 구별해 주는 것을 추출하는 이런 방법을 보편적 추상화라고 한다. 철학자들이 통상 추상화를 말할 때, 그것은 이처럼 보편성의 추상과 결부되어 있다. 그것은 공통된 본질, 공통된 형식의 추상이다. 이런 추상화를 통해 도달한 보편성은, 서로 간에 넘을 수 없는 벽을 만든다. 인간을 돼지와 다르게 해주는 어떤 공통의 본질을 넘어서 돼지가 들어온다면, 그것은 더 이상 인간의 고유한 본질이 아니며, 인간의 보편성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넘나들 경우, 그것들을 묶어줄 수 있는 다른 본질을, 좀 더 큰 보편성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 가령 인간과 돼지를 동물이란 보편성을 통해서만 하나로 묶일 수 있다.

    그러나 상이한 개체들을 하나로 묶는 것에는 이런 방법만 있는 게 아니다. 반대로 변형을 통해 넘나들 수 있는 것을 하나로 묶는 방법이 있다. 예를들어 직선과 곡선, 원과 타원은 다르다. 그것을 묶으려면 이라는 더 추상적이고 더 보편적인 본질을 통해야 한다. 또한 원의 중심이 두 점이 포개진 것이라고 보면, 그 두 점 중 하나를 옆으로 밀면 두 초점을 통해 정의되는 타원이 만들어진다. 그 초점을 무한히 밀고 가면 포물선이 만들어진다. 따라서 원과 타원, 포물선은 어떤 변형의 추상적 방법에 의해 전혀 다른 형태의 곡선을 하나로 묶어 주는 것이다. 이는 공통된 어떤 상위의 보편성을 추출함으로써 추상된 게 아니라 변형을 통해 추상된 것이다. 이는 동일한 본질의 추상과 달리 동일성을 깨는 변형에 의한 추상이고, 상위의 보편적 본질을 찾아가는 추상이 아니라 보편적 본질을 넘나들고 가로지르는 추상이란 점에서 횡단적 추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방법의 예는 생틸레르는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수행하는 기능적 본질을 통해 기관들을 분류하고 그것의 상응성을 통해 가령 인간의 다리와 새의 날개는 운동기관, 독수리의 허파와 넙치의 아가미는 호흡기관으로 분류하고, 그것을 통해 종이나 속에서 강, , 계 등으로 상승하는 보편성의 체계를 수립했던 퀴비에에 반대하여, 변형에 의해 넘나들 수 있는 방식으로 동물들을 하나로 묶는 방법을 제안한다. 이는 공통형식을 추출함으로써 개별자들을 포괄하는 방식으로 상승하는 보편적 추상과 변형을 통해 구체적 형태의 차이를 넘나드는 횡단적 추상의 차이를 아주 잘 보여준다. 이를 공통형식의 추상과 탈형식화하는 추상으로 대비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 예술의 역사는 이런 횡단적 추상화의 방법을 극한으로 밀고 갈 때 도달하게 되는 지점을 잘 보여준다. 오브제를 이용한 예술작품은 적당하게 변형시키면 예술품이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예술품과 기성품을 하위체계로 분류하면서 상위의 보편성으로 하나로 묶는 게 아니라. 양자를 가로지르는 횡단적 변형에 의해 상위의 보편성 없이 양자를 하나로 묶는 것이고, 예술의 보편적 본질이라고 상정되어 있던 것을 와해시키는 방식으로 양자를 하나로 묶는 것이다. 이런 발상은 적절한 변형만 갖추어진다면 모든 것이 예술품이 될 수 있는 잠재성을 갖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이는 사실 예술의 다른 영역에서 활발하게 전개된 것이기도 하다. 소음을 음악에 끌어들임으로써 음악적 소리와 소음을 갈라 놓는 보편적 본질의 벽을 와해시켰던 루솔로나, 악기 아닌 물건의 소리를 음악에 끌어들임으로써 모든 소리 나는 물건이 악기가 될 수 있음을 보여 준 바레즈, 그리하여 철로를 달리는 기차소리나 회전문 돌아가는 소리로 음악을 만들었던 세페르 등 이들을 통해 음악적 소리와 소음, 악기 아닌 것의 소리와 악기의 소리는 음악의 평면 위에서 하나로 묶인다. 사이렌 소리, 기차 소리도 약간의 변형을 거치면 음악작품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존 케이지는 침묵을 포함한 모든 것이 음악이란 이름 아래 하나로 묶일 수 있음을 보여 주었고, 백남준은 무용과 택시를 무용이란 하나의 이름으로 묶을 수 있음을 보여 줌으로써 움직이는 모든 것이, 아니 움직이지 않는 것조차 잠재적으로 무용임을 보여준 바 있다. 예술가들이 보여 준 것은, 변형의 방법을 통한 횡단적 추상화의 극한은 모든 것이 하나로 묶이는 존재론적 평면이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모든 소리가, 모든 움직임이, 혹은 모든 존재자가 모든 척도와 위계를 떠나 하나로 묶이는 평면이고, 서로가 다른 것으로 변형되는 데 어떤 근본적 장애나 벽이 없는 평면이며, 서로가 어떤 다른 것과도 결합하여 새로운 것으로 변형되는 평면이다. 따라서 그 평면 위에서 모든 것은 평등하다. 모든 것은 어떤 척도와도 무관하게 나름의 의미와 가치를 갖는다. 즉 평등한 존재론적 위상을 갖는다. 하지만 모든 것이 나름의 의미를 갖는다는 것은, 그 각자에게 고정된 어떤 의미이나 동일성이 있음을 뜻하지 않는다. 어떤 것도 그것이 결합하고 관계를 맺는 이웃 항들에 의해 다른 의미를 갖게 되며, 따라서 다른 것이 된다. 이처럼 모든 것을 횡단하며 존재론적 평면 위에서 하나로 묶어 주는 것을 평면화라 부를 수 있다. 그것은 횡단적 추상화의 극한이다. 다만 다시 강조할 것은, 평면에 함축된 이러한 평등성이 비교 가능한 것이 아니라, 각자가 다른 것인 채 평등한 위상을 갖는 것이란 점에서, 어떤 공통의 척도를 갖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것은 이런저런 존재자들을 존재라는 보편적 본질-이것은 본질이 될 수 없다-이나 공통성으로 묶어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음악과 비음악이 음악이란 이름으로 하나로 묶이는 것이고, 예술과 상품이 뒤섞이며 예술이란 이름으로 하나로 묶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상반되는 본질을 갖는 것들을 횡단하여 묶고 연결하고 변형시키는 그런 추상화다. 존재론적 평면화라고 명명할 수 있는 이런 추상화를 통해 우리는 모든 소리를 하나로 묶어주는 일반화된 음악의 평면에 도달하게 되고, 모든 것을 작품으로 묶어주는 일반화된 예술의 평면에 도달하게 되며, 모든 동작/비동작을 무용으로 묶어주는 일반화된 무용의 평면에 도달하게 된다. 수많은 요소들이 어떠한 벽이나 심연 없이 넘나들며 만나고 교차하며 접속하고 이탈하는 것으로 묶어주는 이 평면에 우리는 일반성이란 이름을 붙일 수 있다. 이 경우 일반성이란 보편성이나 어떤 고유한 본질을 통한 일반화(보편화)와 반대로 그런 보편성을 가로지르고 고유한 본질을 지우는 방식으로 도달하는 일반성이고, 공통성이나 공통형식의 추출을 통해 도달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탈형식화하는 방식으로 도달하는 일반성이다. 그것은 횡단 가능성 내지 변환을 통해 도달할 최대치의 폭을 뜻하며, 넘지 못할 어떤 본질도 없기에 곧바로 다시 가로질러질 경계선이다. 이러한 일반화가 어떤 본질을 특권화하는 것과 반대로 그것의 특권을 무력화하는 일반화라는 것은 굳이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추상화는 이런 변환과 횡단을 실제로 가동시킨다는 점에서 실제적으로 작동하며 특정한 효과를 산출한다. 그것은 단지 사유의 속성을 갖는 층위로 제한되지 않는다. 추상화는 사유를 통해 가동되는 프로세스일 뿐 아니라 신체의 속성을 갖는 층위에서도 마찬가지로 작동한다. 음악적 소리의 추상화는 한편에서는 음악적 관념에 대한 추상화를 뜻하지만, 동시에 물리적인 파동들로서 소리의 실제적이고 물리적인 변형을 뜻하기도 한다. 레디메이드를 사용한 미술작품은, 미술의 관념만 바꾸는 게 아니라 작품으로 사고 팔리는 어떤 물리적 신체를 갖는 사물이며, 이때 추상화란 그 사물을 실제로 변형시키는 실제적인 작용이다. 무용수의 무용도, 택시의 무용도 모두 관념의 추상화만이 아니라 신체적인 추상화를 수반한다. 덧붙이면 <자본>에서 맑스가 말하는 추상적 노동이란 모든 구체적 형태를 떠나 일반화된 노동이지만, 그것이 성립되기 위해선 노동이라는 신체적 작동이 추상화되어야 했다. 이런 점에서 추상화는 그 자체로는 변형의 실질적인 힘과 방향을 갖는다. 그 추상화의 힘과 방향을 표시하는 것은 하나의 도식 diagram에 지나지 않지만, 그 도식은 신체적인 층위와 비신체적 층위 모두에서 물리적이고 기계적인 변형의 양상을 표시한다. 그것은 형식이나 본질, 혹은 법칙으로 추상화하는 게 아니라 그런 것들을 와해시키며 나아가는 것이기에, 추상적으로 작동하는 힘과 방향만을 표시할 수 있을 뿐인 다이어그램(추상기계)이다. 추상이란 잠재성의 장으로 밀고가는 것이다. 그러한 잠재성의 장에서 새로운 횡단적 만남을 사유함으로써 새로운 생산의 방향을, 또한 새로운 삶의 방향을 엿보려는 것이다. 구체화란 잠재화와 반대로 현행화의 선을 따라 구체적인 조건들을 기입하는 것이며, 기입되는 조건에 따라, 달라지는 구체적 배치를 보는 것이다. 동시에 그것은 구체적 조건에 따라 추상기계를 변형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구체화는 추상했던 조건들을 다시 대입하는 것도, 추상화의 경로를 역으로 되돌리는 것도 아니다. 반대로 현실로 되돌아 온 것처럼 보일 때조차도 완전히 다른 현실로 빗겨간 것이다. 그것은 총체적 현실이 아니라, 수많은 변형과 이탈의 길들로 이미 애초의 길들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조각조각 난 지도이다. 또한 역사적 경로를 논리에 따라 복원하는 것과도, 논리에 따라 역사를 할당하는 것과도 거리가 멀다. 그것은 차라리 변형과 이탈의 선들이 표시된 새로운 지도를 그리는 것이고, 보이지 않던 길을 보이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보편적인 이념이나 추상적 개념에 감각적 실재성을 부가하는 것이 아니라, 감각적인 것을 통해 보편적이고 이념적인 길을 가로지르는 것이고, 논리적 추론을 근본에서 다시 생각하는 것이다. 따라서 추상화가 평면화의 방향을 따라가는 것이라면, 구체화는 반대로 요철화의 방향을 따라가는 것이고, 우리가 선택하는 길에 의해 그 요철의 양상이 바뀐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며, 그 달라진 요철들 속으로 삶의 흐름을, 사유의 흐름을, 대중의 흐름을 다시 불러내는 것이다. 그것은 오직 앞으로만 나아가는 논리적 전진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항상 기원 이전의 기원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뒤로 더듬어 갈 때마다 항상 도래할 미래를 경유해서 나아가는 실천적 비약이고, 오직 상승의 비행을 힘껏 밀고 가는 것이 아니라, 상승과 하강을 가볍고 자유롭게 오가는 것이다. 코뮨주의적 존재론, 그것이 이 모든 추상화가 항상-이미 도달하는 기원 이전의 기원이라면, 존재론적 코뮨주의, 그것은 이 모든 구체화가 항상-이미 경유하는 현행적인 미래라고 해야 할 것이다. 생명의 추상기계와 구체성의 코뮨주의, 코뮨주의는 수많은 형태들이 있을 수 있지만, 자본에 대한 투쟁, 착취에 대한 투쟁없는 코뮨주의는 코뮨주의가 아니다. 코뮨은 자유로운 개인들의 자발적 연합이라고 정의한다. 자본주의나 시장이 교환의 체제로 특징지어지는 것에 반해, 코뮨이 선물(쌍방향적, 능력의 증가를 야기하는 모든 것, 기쁨의 감응을 야기하는 모든 것, 무언가를 함께 나누고 무언가를 남에게 주는 삶) 내지 증여의 체제로 특징지어진다. 그것은 교환과 달리 주고받는 물건의 등가성을 의도적으로 피하며, 그것의 가치를 재는 것 자체를 피한다. 또한 동시성을 피하고, 교환가치는 물론 사용가치와도 독립적이다. 그것은 가치법칙에 반하는 것이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자칫 선물을 받고 답례를 할 때 의무적으로 하면 자칫 채권/채무 관계를 만들 수 있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코뮨의 능력의 민주주의는(리더쉽) 이질적 요소들이 리듬을 맞추어 생산하는 코뮨의 강도적 능력이다. 즉 이질적인 것들이 함께 작동하는 능력이다. 보이지 않던 능력이 보이게 만드는 것, 다른 리듬으로 따로 놀던 것을 함께 춤추게하는 것, 이견과 불화의 요소들을 하나의 플리즈마로 만들어 거대한 융합의 에너지를 만들어 내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능력없는 자의 능력이 드러나게 하는 것이고, 능력 있는 것들과 없는 것들이 한데 어울리게 만드는 것이다. 인간중심주의를 넘어선 코뮨주의, 그것은 인간만큼이나 인간 아닌 요소들(자연, 사물)과의 공동체적 관계를 함축한다. 그것은 자연이나 사물을 친구로서, 그리고 선물로 대하는 것이다.(즐거운 연대, 연대의 쾌감, 존재론적 평등성) 코뮨은 그것의 구성과정 자체를 목적으로 만들어진다. 금욕주의적 욕망의 배치가 아니라 긍정적인 욕망의 배치를 만들어 내는 것이 중요하며, 함께 무언가를 한다는 사실 자체가 제공하는 쾌감이, 연대의 쾌감이, 그러한 쾌감을 향한 욕망의 자발성이 코뮨을 만들고 지속하게 추동한다. 즉 공동성을 만들어 낸다. 공동성이란 복수의 개체들이 갖고 있는 공통의 성질을 뜻하는 공통성이 아니라, 복수의 개체들이 함께 경험하는 어떤 촉발이나 행동에 의해 야기되는 공동의 감응을, 그리고 그 감응이 잠재화된 것을 뜻한다. 그것은 미리 주어진 어떤 성질이 아니라 공동의 경험이나 체험 행동에 의해 형성된 것이며, 이후 공동으로 무언가를 할 수 있게 해주는 잠재적 조건이 된다. 코뮨은 이런 공동성을 생산하며, 역으로 이 공동성에 의해 작동하고 발전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구성원이 공유하고 있는 어떤 선험적 성질의 동일성이 아니라, 다르게 받아들여지고 해석됨에도 불구하고 무언가를 함께 할 수 있게 해주는 행동이고 경험이다.

    공간이란 단지 비어 있는 장소가 아니다. 공간은 비어 있을 때조차 그저 비어 있지 않다. 그것을 사용하는 활동과 에너지로, 그 활동이 만들어 낸 분위기/대기로 채워져 있다. 오랫동안 쓰지 않은 채 비어 있던 공간조차, 활동-없음으로 인해 만들어진 특정한 대기로 채워져 있다. 그래서 공간이 비어 있을 때에도 사람들은 쉽사리 들어가기 힘들다. 반대로 비좁게 사람들로 가득 차 있을 때에도 쉽게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있다. 들어가고 싶게 만드는 공간, 들어갈 수 없게 만드는 공간이 있는 것이다. 공간의 의미는 그 공간의 용법이다. 이는 분할된 방들의 기능이란 그것의 용법에 따라 달라짐을 뜻하는 말이지만, 단지 그것만은 아니다. 그 공간을 어떻게 사용하는가가 공간의 대기를 만들고 공간의 에너지 장을 형성하며, 공간 안에 인력이나 척력이 작용하게 한다. 따라서 공간의 문제, 공간을 만들고 구성하는 문제는 공간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그것은 단지 도면상에서 분할된 방들에 이런저런 기능을 분배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적인 활동에 의해 구성되고 변화되는 것이다. 공간을 어떻게 분할할 것인지, 어떻게 배치할 것인지는 이러한 공간의 용법을 기준으로, 그것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규정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공간이란 특정한 종류의 사이[], 관계를, 함께 만들어 가는[] 활동이란 의미에서 공-(-)이다. 따라서 코뮨적 공간을 구성하는 문제는 그 공간의 용법을 창안하고 활동을 만들어 내는 문제다.

    도덕성이 자기 이익과 부딪칠 경우에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다.

    철학자들이 제공해 주는 것은 세계의 객관적 진리가 아니라, 세계를 보는 다양한 관점이다.(해석)

    전통적으로 예술의 임무는 세계를 열어 보여주는 것(開示)이다.

    코뮨주의=싱크레티즘 syncretism 이질적인 종교나 문화가 하나로 합쳐지는 현상으로 공동 행동의 원칙을 가리킨다. 그것은 먼저 상대의 존재를 인정하는데서부터 출발한다. 생각의 다름을 인정하되 행위의 일치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것은 공동의 대의라는 명분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남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제 정체성을 유지하는 가운데 행동을 일치시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상대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것은 그의 존재로부터 배울 것은 배우는 것을 의미한다. 진정으로 상대를 존중하는 것이다. 그것은 정체성의 횡단과 교차를 허용하고 장려한다.

     

    383. 하나의 에피소드에서 다른 에피소드로 이행하는 시간이 쓸데없이 오래 걸리는 것이 포르노다. 굳이 성기를 드러내야 포르노가 아니라, 플롯의 진행에 필요한 이상의 시각적 과잉은 어떤 의미에서 모두 포르노다.

    악마성은 행위의 잔혹함보다는 생각의 사악함에서 찾아야 한다. 복수는 범인의 정신에 고통을 주어야지 신체에 잔혹함을 주는 것은 스스로 고통도 공포도 못느낀다고 말하는 자의 신체를 파괴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그의 생각과 기획과 삶을 지탱하는 코드를 파괴해야 한다. 가장 큰 비판은 상대의 이상을 비웃어 주는 것이라는 것처럼, 흉악범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어떤 가치를 추구한다는 점에 그들의 행위 역시 영웅적이다. 다만 반영웅이지만, 악마에게 상처를 주는 것은 그가 절대 악이 아니라 상대 악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주지시켜 스스로 내면에서 인정하게 만드는 것이다.

    예수와 플라톤은 현세를 더 잘 모독하기 위해 내세를 발명했다. 그것은 역겨움으로 역겨움을 극복하는 것이다.

     

    384. 현대예술의 특징 중의 하나는 결과보다 과정을 더 중시하는 것이다. 또한 내용없는 형식이기에 비평 작업은 형식을 읽는 것, 즉 사물을 읽는 것이고, 형식 속에 말없이 침전되어 있는 메시지를 읽어내는 것이다.

    매체가 작동하는 방식이 중요한 문제가 된다. 매체는 모든 일들을 하나의 이벤트로, 스펙터클(spectacle, 구경거리)로 만들어 버린다. 그리고 그것은 또 다른 구경거리로 새끼를 친다. 원본보다 더 생생하고 실재보다 더 실재적인 스펙터클을 과잉실재 hyper-reality 라고 한다. 그것은 실재 저편으로 벗어나 있지만, 그래서 실재가 아니지만, 실재보다 더 실재적이란 점에서 과잉된(하이퍼) 실재고, 없는 것을 대신한다는 점에서 지나친(hyper) 실재다. 전통적인 기호나 복제물은 무언가를 지시하고 무언가를 재현한다. 그러나 시뮬레이션이 만들어내는 과잉실재는 원본이 없다는 점에서, 더 나아가 시뮬레이션 된 모델에 실재를 맞추려 한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기호와 근본적인 단절을 이룬다. 이런 점에서 시뮬레이션과 그에 따라 만들어진 과잉실재가 흔히 말하는 포스트모던한 사회의 특징을 이룬다.

    초상화에서 보이는 삶의 흔적, 혹은 그 얼굴에 깃든 영혼의 장대함이나 누추함 등은 사실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를 미학에선 숭고함 sublimity이라고 부른다. 결국 근대 미술에서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을 보이게 하는 것이고, 재현/표상될 수 없는 것을 재현/표상하게 하는 것인 셈이다.

    근대(모던) 예술은 표상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한다.(숭고미)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런 내면의 빛이나 말할 수 없는 어떤 본질을 떠올리려는 시도에서 벗어난다. 즉 숭고한 분위기를 제거해버린다.(일상성과 평범성) 팝이 의미하는 것은 투시법과 이미지에 의한 상기想起작용의 종언, 증언으로서 예술의 종언, 창조적 행위의 종언, 예술에 의한 세계의 전복 및 저주의 종언이다. 이런 점에서 최근의 예술은 숭고함이라는 개념을 명시적으로 포기하고 대신 일상성과 평범성을 택했다. 쉽게말하면 모더니즘은 감춰져 있는 신성한 어떤 것을 보여주려 했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은 그걸 보여줄 수 없음을 보여주려 했다.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표상 불가능성을 강력히 전달하기 위해서 새로운 표현방식을 탐색했다.

    작품에서 작가의 메시지를 읽거나 해석해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에 대한 비판은 크게 세 가지 정도로 나누어 불 수 있다. 하나는 레비-스트로스나 중기의 바르트로 대표되는 구조주의 입장이다. 구조주의는 작품을 기호들의 구조화된 망으로 본다. 단어나 문장, 음표들, 혹은 색채와 형태는 그것들 간의 내적인 구조로 짜여져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문장이나 이미지의 의미나, 어떤 부분의 의미는 작가의 의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오히려 그것과 관련된 다른 문장들, 다른 이미지들, 그것을 조작하는 전체적인 구조 안에서 결정된다. 그렇다면 작가라는 어떤 특권적인 주체가, 작품의 의미가 발생하고 그리로 귀결되는 어떤 특권적인 중심일 수 없다. 이제 비평은 작가에 대한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으며, 작품의 내적인 구조를 찾아내는데 주력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작품을 만드는데서 중요한 것 역시 각 부분들의 내적인 구조다. 이런 의미에서 저자의 죽음이 선포된다. 그것은 철학에서 일어난 주체의 해체와 동형적인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데리다의 해체주의적인 입장이다. 데리다의 비판은 더욱 근본적이고 급진적이다. 어떤 독자도 작가가 의도한대로 읽지만은 않는다. 그렇다고 저 치밀한 구조주의적 분석가들처럼 읽지도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무능력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우선 작품 내지 텍스트가 하나의 확고한 통일성을 갖지 못하며, 차라리 이질적인 것들로 분열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어떤 텍스트도 여백을 포함하는데, 이 여백은 새로운 독서와 해석이 다양하게 생성될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어떤 텍스트도 다른 텍스트를 명시적으로 인용하거나 은밀히 혹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끌어들이는 방식으로 포함하고 있다. 독창적인 원본은 없으며, 텍스트들이 서로 결합된 텍스트들만이 있다는 것이다.(상호텍스트성) 따라서 어떤 텍스트에도 읽어내야 할 진정한 의미는 없으며, 차라리 중요한 것은 읽는 사람이 독자적으로 읽어내는 것이고, 더 나아가 특정한 해석을 반복하도록 강요하는 지배적인 해석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발신자는 없으며, 오직 텍스트와 수신자만이 있을 뿐이다. 저자는 죽고 작품을 읽는 사람만이 남는다. 마지막은 푸코의 계보학적 비판이다. 푸코는 일단 작품 내지 저작의 개념을 문제삼는다. 저자가 쓴 것은 모두 작품인가? 혹은 출판된 것만이 작품인가? 니체의 수첩에 적은 아포리즘(금언, 격언, 잠언, 경구 aphorism)의 초안은 분명 작품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 옆에 약속장소와 주소 등을 적어놓았다면 그것도 작품인가?

     

    385. 전통적인 예술개념인 창조성, 천재성, 영원한 가치와 비밀, 신비함, 일회성, 아우라, 진품성, 마술적, 종교성, 숭배, 숭고미, 접근 불가능함, 자율성 등은 기술 복제의 출현으로 위협받고 파괴되었다. 그러나 복제의 시대에 원본성의 위기는 새로운 가능성을 의미한다. 전통적인 예술개념이 고수하고자 했던 복제 불가능하며 접근 불가능한 신비함을 아우라라고 부르며, 그것은 예술이 종교적 숭배의 대상이었던 시절의 흔적일 뿐이다. 예술작품에 그러한 주술적이고 신비적인 성격이 생기는 가장 중요한 원인은, 그 작품이 갖는 진품성, 즉 시간적-공간적 현재성과 일회성이다. 그러나 반복적인 복제를 가능하게 하는 근대적인 기술복제는 전통적인 예술작품이 지니고 있던 그 원본성, 즉 진품성과 아우라를 훼손하고 붕괴시킨다. 벤야민은 이것을 예술작품의 의식가치에서 전시가치로의 전환이라고 부른다. 기술복제 가능성이 역사상 처음으로 종교적 의식 속에서 살아온 기생적 삶의 방식에서 작품을 해방시켜주었으며, 예술작품에서 진품성을 평가하는 척도가 그 효력을 잃게 되는 순간, 예술의 모든 사회적 기능 또한 변혁을 겪는다. 예술은 전통적인 마술적-종교적 기능에서 벗어나 학문적-정치적 기능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벤야민은 그 새로운 사회적 기능의 변화를 영화 속에서 찾는다. 그는 카메라가 지닌 인간적 지각을 뛰어넘는 뛰어난 사물 파악 능력에서 영화의 학문적 기능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영화 특유의 파편성에서 대중의 비판적 정치적 각성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캔버스는 보는 사람을 관조의 세계로 초대하지만, 영화는 곧바로 다른 장면으로 전환되기 때문에 종교 의식적 가치를 뒷면으로 밀어낸다. 또한 영화는 파시즘적으로 이용될 수 있고 자본주의적 이용의 위험성도 내포하고 있으며, 대중의 예술의 수용 및 참여 방식에 변화를 가져옴으로써 자신을 재현, 연출해 보려는 정당한 요구에 부응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기술복제에 대한 거부와 이용이라는 이 모순적인 반응은 모두 예술에 대한 전통적인 개념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 동전의 양면이다. 예술작품은 소수의 선택된 천재에 의해서만 창조될 수 있으며, 따라서 관조와 숭배의 대상이어야 하는 전통적인 예술관은, 파시즘의 정치원리와 친화성을 갖는다. 이제 예술에 참여하는 대중의 수적 증가는 참여하는 방식의 변화를 초래하였다. 인공복제는 근본적으로 자연복제 과정에의 인위적 개입이며, 그것의 이용이다. 즉 자연의 복제 능력을 대체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근본적으로 자연의 복제 능력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자연상태에서의 복제는 동일성의 메커니즘이라기보다는 변이의 메커니즘이다. 자연 상태에서 생명의 발생은 곧 복제이다. 복제기술의 창안은 생명의 역사에서 이루어진 기념비적 사건이다. 생명은 화학물질이고, 유전의 물질적 기초는 DNA이다. 교정과 수선이라는 과정은 절대적이지 않다. 만일 유전자가 정말로 불멸이고 복제가 완벽하게 이루어진다면, 새로운 유전구조들의 진화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유전 안전성과 가변성은 둘 다 효소가 관여하는 과정이며, 그 균형 자체가 세포의 조절을 받고 있으며, 그 세포가 처한 특정한 환경에 반응하여 이동한다. 유전자의 복제 능력과 세포의 대사능력, 이것은 생명을 정의하는 두 요소이다. 유전자의 복제는 동일성의 메커니즘이 아니라, ‘변이의 메커니즘이며 세포 또는 개체복제의 안전성은 유전자와 단백질 사이의 복잡하고 정교한 분자적 대화에 의해서 유지된다. 인간의 복제 가능성의 출현은 신성화된 인간중심주의에 일정한 균열이 생기고 있음을 의미하며, 그 인간중심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는 전통적인 가치관과 제도에 위협이 되고 있다. 그 균열과 위협은 지배적인 가치관 속에서 바라볼 때는 두려움의 대상이겠지만, 오히려 자연-인간-기계의 근본적인 연속성에 바탕을 둔 새로운 존재론과 윤리학을 사유할 수 있는 조건이기도 하다. 물론 예술에서의 기술복제 가능성이 파시즘의 무기로 사용되었듯이, 생명복제 가능성도 자본주의적으로 이용되고 있다. 현 인류는 과학기술의 발달과 함께 새로운 존재 종으로 진화(반드시 진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해 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한 진화(도약)은 오로지 인간에 부여된 특권(인간이 인간 스스로에게 부여한 아우라)을 포기할 때,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우리는 매일 사물을 바라보면서 세상을 이해한다. 보는 것은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관찰하고 인식하는 과정으로 그 속에서 적극적으로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보기 seeing는 일상적인 삶에서 우연성을 지니지만 바라보기 looking는 목적성과 방향성이 함축된 자발적인 행동이다. 보는 것은 선택적인 행동이며 이를 통해 사회적 관계와 그 의미를 절충하게 된다. 바라보기는 말하기, 쓰기, 신호하기와 마찬가지로 실천을 거치게 되는데, 자의나 타의에 의해서든 선택과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다. 이를테면 누군가에 의해 주시당하거나 아니면 뭔가를 지켜보기를 원할 때에도 이러한 잠재적인 권력이 형성되는 셈이다. 실제로 바라보기는 쉽거나, 어렵거나, 흥미롭거나, 불쾌하거나, 무해하거나, 위험할 수도 있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보는 행동에는 영향을 주고받는 상호작용이 포함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시각적 이미지가 다양한 용도나 의도된 효과로 활용되는 문화 속에서 살고 있다. 이러한 이미지는 쾌락, 욕망, 혐오, 분노, 호기심, 충격, 혼란 등의 폭넓은 감정적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또한 이미지를 직접 창조하거나 일상을 통해 우연히 접하게 되더라도 누군가를 떠올리거나, 행동이 자극되거나, 설득력을 지니거나, 신비로운 느낌을 받게되는 등 일종의 의미 있는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다.

    재현은 언어나 이미지를 사용해 주변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뜻한다. 물질세계는 재현 체계에 의해서 비로소 의미를 지니며 시각적으로도 보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를 둘러싼 세계는 이를 통해 반영될 뿐만 아니라 물질세계에 대한 의미도 새롭게 구성할 수 있다. 결국 언어와 시각적 재현 체계는 이미 존재하는 실제를 반영할 뿐만 아니라 사실, 감정, 상상력에 대한 이해를 절충하고 재구성하는 수단이 되는 셈이다. 실제 세계를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일련의 관습에 따라 회화가 특정 의미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림이 사물에 내재된 의미를 반영한다기보다는 그것에 관한 의미를 만들어낸다. 수많은 예술가들은 다양한 재현이라는 체계의 관습이나 틀, 규칙을 파괴하려는 시도를 해왔다. 그림 속의 파이프는 실제 파이프가 아니라 파이프를 재현한 이미지이다. 회화나 드로잉에 비해 카메라로 만들어지는 이미지 속에는 사진가의 주관성과 기계적인 객관성이 혼재되어 있다.

    신화는 특정 집단의 감추어진 규칙이나 관습이 사회 전체에 보편화되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신화를 통해 특정한 사물이나 이미지 속에 내포된 의미가 외연적으로 드러나게 되는 셈이다. 자연적 특수성이 아닌 문화적, 역사적인 특수성이 사회에 보편화된 개념으로 작용하게 되면, 신화를 형성하게 된다.

    시뮬라시옹(simulation)은 실제 세계를 그대로 재현한 것은 아니다.

    이미지의 의미를 탐구하기 위해서는 이미지가 그 사회적 권력과 이데올로기(선전 propaganda)의 역동성 속에서 생산된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이데올로기는 모든 문화 속에 존재하는 일종의 신념 체계이다. 이미지는 이데올로기가 파생될 때 중요한 의미를 지니며 이러한 관념을 통해 그 의미가 조명되기도 한다. 이데올로기는 선전보다 훨씬 더 편재되어 있다. 우리가 인지하건 못하건 간에, 이데올로기는 우리가 관여하는 평범한 일상 곳곳에 존재하는 것이다. 즉 사회 구조 속에서 다양하게 공유되는 가치관이나 믿음을 뜻하는 광의의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그것은 모든 문화에 서로 다른 형태로 존재한다. 이데올로기는 자유, 진보, 가정의 소중함 등 특정 가치가 일상생활의 자연스럽고 당연한 측면인양 보이게끔 하는 도구라 할 수 있다. 이데올로기는 현실은 물론 당위성에 대한 사회적 전제를 다수가 공유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지나 미디어 재현을 통해 남들에게 특정 관점을 공유하게끔 하거나 특정 가치관을 갖도록 설득하곤 한다. 바라보는 실천행위는 이데올로기와 밀접한 연관성을 지닌다. 또한 이데올로기는 권력의 관계가 내포되어 이미지는 규제, 목록화, 동일화, 감시, 통제하는데도 사용된다. 언어(film)는 규칙이나 관습, 약호(배치, 장소, 방식)에 의해 그 의미가 늘 바뀔 수 있는 것이, 이미지 또한 (배치에 따라) 마찬가지다. 여성=어머니, 섹스심벌, 요부 등등. 의미는 처음 기호나 신호를 인식할 때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니라, 이를 해석하는 과정과 그 후의 행동에 의해 만들어 지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생각은 연속적인 사고과정(해석소)이 있기 전까지는 의미 없는 부호에 불과하다. 예를들어 정지 표지판을 본 후, 이 신호를 해석하고 실제 멈추는 행동을 한 다음에야 비로소 그 의미가 만들어진다고 볼 수 있다.

    기호=기표(외연적, 이미지/사운드/단어)+기의(내포적, 내면적, 의미)

    이미지에 대한 해석이 역사적 맥락이나 문화적 지식에 의존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미지 자체는 가치를 지니지 않지만,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맥락에서 의미를 지닐 때 비로소 그 가치가 인정된다. 현재 문화에서는 다양한 문화적 도상(icon)들이 재활용되고, 패러디되고, 역설적으로 업데이트된다. 이미지를 해석한다는 것은 우리가 이러한 이미지들이 말하는 시각적 언어를 풀어 나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이미지들은 외연적인 형식에 문화적, 사회적, 역사적으로 내포된 의미를 혼합하고 있다. 이미지를 읽고 해석하는 과정은 특정한 문화권에 속하는 관찰자가 그 문화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바라본다는 것은 단순한 수동적 소비를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는 시각을 통해 세상의 이미지를 바라본 후 그 의미에 관여를 하게 되며, 일상적인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시각적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 이미지는 의미를 파생시킨다. 그러나 의미는 그 자체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배치에 따라 보는 사람들에게 달리 해석된다. 따라서 의미는 복합적인 사회 관계를 통해 만들어진다.

    이미지=이미지 자체+제작자의 의도+보는 사람들의 해석과 경험 그리고 가치관+보이는 (사회적) 맥락 내에서 결정된다.

    관찰자가 이미지의 의미를 만들어 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미지 역시 관람자를 구축하는 것이다. 이미지들은 대부분 개별적인 의미로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이미지들 속에서 그 연관성(배치, 언제, 어디서, 누가...)과 함께 해석된다. 보는 사람에 따라 다양한 기호 signs를 창조하기 때문에, 이미지 자체에 의미가 내재해 있다기 보다는 복합적인 사회적 상호작용을 통해 의미가 형성된다. 모든 관찰자들은 대개 미학 aesthetics과 취향 taste이라는 두 가지 기본적인 개념에 의해 이미지를 평가한다. 아름다움은 보편적인 특성이 아니라, 문화적인 특수성과 취향에 따라 변화될 수 있다. 즉 아름다움의 질도 개인적인 해석에 달려 있다. 취향은 계급, 문화적 배경, 교육, 기타 정체성에 관련된 경험으로부터 파생된다. 즉 선천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문화적 조직체로부터 노출될 때 터득되는 것이다. 취향이 확장되면 특정한 시대적 맥락에 따라 이데올로기로 구체화될 수도 있다. 어떠한 집단도 절대적인 권력을 지니고 있지 않으며 권력은 계급간의 투쟁 속에서 이루어지는 관계다. 또한 헤게모니의 주요한 측면은 바로 이러한 관계들이 끊임없이 변화를 거듭하는데 있기 때문에,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들은 사회적인 저항 의식과 긴장감을 형성하며 늘 문화 속에서 재규정된다. 게다가 이러한 관계는 정치적 운동이나 문화적 요소를 파괴하는 행위 등의 대항 헤게모니라는 개념을 불러오기도 한다. 이미지의 의미는 제작자, 수용자, 이미지나 텍스트, 그리고 사회적 맥락간의 복잡한 관련성 속에서 만들어진다. 따라서 해석적 행위자에게는 일정한 한계가 주어지기 마련이다.

    카메라는 관음증의 매커니즘이며 사디즘의 도구로도 이용되며, 카메라의 응시 앞에 있는 대상들을 무력화시킨다. 또한 카메라의 응시를 폭력이나 공포에 관련된 시각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현대 영화이론은 자신의 정체성을 억제하고 스크린과 동일시한다는 퇴행적 영화관객 개념은 점차 사라졌다. 대신 응시하는 이와 응시 대상간의 권력 관계를 중재하는 다중적 응시 및 관찰에 관한 모델들이 등장하였다. 현대의 권력은 부정하거나 억압(음모, 권위)하는 개념이 아니라 생산하는 힘이다. 교실 자체는 선생과 학생의 역동적인 권력이 형성되는 공간적 구조이며, 이 구조는 학생들로 하여금 선생의 감독을 내면화하게끔 만들며 규율은 수동적이고 자기 통제적 방식으로 작동한다. 권력은 지식을 생산하며, 특정한 형태의 시민과 주체를 생산한다. 권력은 신체(생체권력)가 작업을 수행하거나 의식을 행하고 기호를 나타내도록 투자하고, 표시하고, 훈련시키고, 고문하고, 강요한다. 이는 근대국가가 시민들의 유지 및 통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국가가 적절하게 기능하기 위해서는 시민들이 기꺼이 일하고, 전쟁하고, 생산하고, 건강한 몸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가는 공중보건, 위생, 교육, 인구통계, 출산 정책 등을 통해 인간의 몸을 적극적으로 관리하고, 명령하고, 목록화한다. 이들 제도적 실천이 신체에 대한 지식을 형성한다. 신체로 하여금 기호를 나타내도록 강요하는데, 이는 사회적 규범과의 관계를 기호화하라는 의미다. 현대사회는 권력과 지식 사이의 기본적인 관계에 의해 형성된다. 즉 권력관계가 구조화되어 시민들 스스로 자율적 통제 행위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게끔 만든다. 시민들은 기꺼이 법률에 순응하고 사회 규범에 동참하며 지배적인 사회 가치에 동의한다. 현대사회는 강제가 아닌 협력에 의해 기능한다. 푸코 이론의 핵심은 처벌이라는 강력한 위협 없이도 체계는 정상적으로 작동한다는 점이다. 이는 사람들이 자율적으로 순응하기 때문인데, 우리는 우리를 감시하는 제도적 응시를 내화하고, 이 상상적 응시가 우리로 하여금 적절하게 순응하고 행동하게 만든다.(예로 원형감옥, 병원, 학교...) 사진이나 카메라가 감시, 감독의 기능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늘 카메라 감시의 눈길을 의식하면서 행동하게 되는데, 카메라가 켜져 있는지 아닌지 여부에 관계없이 그 잠재적인 존재만으로도 행동에 영향을 받게되는 것이다. 따라서 사진적 응시는 권력관계(지배/복종, 차이/타자, 문명/자연, 백인/타자, 남성/여성의 이항대립)를 확립한다. 카메라를 가진 사람은 대상들을 바라본다. 그리고 바라보는 행위는 대개 관찰의 대상보다 보는 주체에게 더 강한 힘을 부여한다. 즉 다양한 인종들이 촬영되고 분류되는 제도적 사진의 전통이나, 소위 이국적인 장소의 사람들의 전통 등. 사진은 이처럼 차이(백인/유색인, 유럽인/원주민, 문명/원시)를 확립하는 중요한 도구가 된다. 재현 체계 내에서 의미는 차이를 통해 확립된다. 차이는 의미에 있어서 본질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항 대립은 차이의 복잡성을 단순화시켜 보게 만드는 환원적 방법이다. 데리다가 언급했듯이, 모든 이항 대립은 권력, 우월성, 값어치 등의 개념과 특정 가치관으로 부호화된다. 따라서 규범은 비정상이나 탈선으로 치부되는, 그래서 결국 타자로 간주되는 그 무엇과의 반대라는 의미로 범주화된다. 이항 대립은 묵시적인(unmarked) 규범과 명시적인(marked) 타자를 만들어낸다. 예로 여성성이라는 범주는 명시적이며 흔히 남성적이지 않은 것으로 이해된다. 반면 남성성은 묵시적인데, 모든 인간을 대표하는 단어로 ‘man'을 사용하는 것이 그 예이다. 반면 현실에서는 이 구분이 종종 모호해지고 사람들은 이 두 가지 측면을 모두 가지고 있다. 마찬가지로 백인은 서양의 재현 체계에서 1차적인 범주로 이해되는 반면, 흑인이나 갈색 피부 등은 1차적 범주와 비교되는 기타 범주, 즉 백인이 아닌 범주로 이해된다. 따라서 지배나 우월성 개념을 반복하지 않으면서 차이를 이해하고 인종차별주의나 성차별주의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해하는 작업은 사회적, 문화적 의미는 물론 언어적 의미 차원에서도 행해져야 한다. 또한 사진이나 기타 재현 체계는 오리엔탈리즘을 생산하는 수단으로도 인식되어 왔다. 오리엔탈리즘이란 서양문화가 동양 및 중동문화에 이국적, 야만적 특성을 부여하고 결국 이들 문화를 타자로 규정하는 방식을 지칭한다. 사이드에 따르면, 오리엔탈리즘은 서구 유럽의 경험 안에 있는 동양의 특별한 장소에 관한 것이다. 여기서의 동양은 유럽의 가장 위대하고 부유하고 오래된 식민 지역이다. 즉 가장 자주 등장하는 타자의 이미지 중의 하나다. 동양적에 대한 이러한 개념이 다시 서양과 유럽을 규정짓는다. 따라서 오리엔탈리즘은 서양과 동양이라는 이항 대립을 구성하는데 사용된다. 또한 정치적 측면에서는 물론 현대 대중문화와 같은 문화적 재현에서도 발견된다. 모든 아랍인을 테러리스트로 묘사하거나 동양 여성들을 과잉되게 성적으로 그리는 영화들이 그 예이다. 이국성을 확립하고 오리엔탈리즘을 규정하는 사진의 힘은 현대 광고에서도 찾을 수 있다. 멀리 떨어진 지역으로 부호화된 이미지를 활용하여 상품에 이국성이라는 가치를 부여하는 광고가 대표적이다. 이미지는 결국 권력관계가 행사되고 응시가 교환되는 복잡한 장이다.

    원근법적 기법(르네상스 14-16세기)이 관람자를 (세계의 중심)의 위치에 놓았다. 중세의 관습에서는 하나의 장면이 그려질 때 여러 개의 시점이 존재할 수 있었는데 원근법은 단 하나의 특정 시점이 확립될 것을 요구하였다. 그것의 단독 주체의 강조는 종교적 세계관에서 과학으로 사회적 가치가 이동하는 맥락에서 읽힐 수 있다. 이전의 문화에서는 원근법을 눈속임이라고 생각한 반면에 르네상스는 현실을 최대한 비슷하게 재현하는 것이 예술의 사회적 기능이라고 여겼다. 15세기에 처음 시작한 원근법은 현실의 객관적인 이미지를 창조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과학적 접근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원근법은 예술이 현실을 주관적이기보다는 객관적으로 보여주기를 바라던 당시 사람들의 욕구를 보여준다. 그러나 원근법이 사실적인 기법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것은 환원적이고 추상적인 형태의 재현이다. 그것이 사실적으로 보이게 된 것은 관습에 의해서다. 원근법은 눈과 대상 사이의 관계를 축약해 공간 안에서 단일하게 대치시킨다. 관람자는 구체적인 특정한 장소에서 바라보는 것처럼 상정되지만, 인간의 시각은 이런 고정된 관람자의 개념보다는 훨씬 더 복합적이다. 무언가를 보고 있을 때 우리의 눈은 계속 움직이고 있으며, 우리가 보는 것은 어떠한 장면이라도 다양한 모습과 시선의 합성이다. 아울러 현대 철학의 대부분은 관람자의 시선이 관람의 대상이 되는 사물에 영향을 준다고 강조하였다. 사실 본다는 행위가 매우 가변적인 맥락에 좌우됨에도 불구하고 원근법의 세계는 시각이 견고하고 변함 없기를 바라며, 이미지의 의미가 고정되어 있기를 바라는 욕구를 암시하고 있다. 원근법의 기법은 이미지 속 공간의 역할도 바꾸었는데, 공간은 화면 속의 인물들을 압도하게 되었다. 원근법에서 공간은 상징적이기보다는 선적이고 균등하다. 이렇게 과학적으로 정의된 공간의 개념은 더 광범위한 철학적 발전으로 연결되었다. 현대의 공간에 대한 개념의 유래는 17세기 데카르트가 시각을 특권화한 것과 연관이 있다. 데카르트적 공간이라고 알려진 그의 공간 개념은, 수학적으로 측량되고 측정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경험주의의 기초가 되었다. 이 사실주의는 18세기 계몽주의(과학+이성+진보)로 발전해서 과학과 기술에의 숭상이 근대성(관료주의+산업화+기계화+전통의 붕괴+집단적 소외+유토피아적 낙관주의)의 근간이 되었다.

    .고대 미술~1425(원근법 발명)

    .원근법의 시대(르네상스, 바로크, 로코코, 낭만주의, 15-18세기 판화개발,인쇄술 개발 등 과학혁명과 계몽주의)

    .사진의 시대(1830년대)-원근법 부정한 인상주의 19세기-및 기술적 발전의 근대기(18세기중반~20세기 후반) 특히 1896년 영화의 발명

    -1.20세기 아방가르드 운동~모더니즘 양식(인상파-입체파-추상표현주의)-이들 사조는 모든 상들이 무한히 주관적이며 복잡하다고 선언한다.

    .탈근대시대(1960~현재)-전자기술, 컴퓨터, 디지털 이미지, 가상공간의 시대

    진정성은 재생산될 수 없다. 우리는 역설적이게도 진정성의 개념이 기계적이고, 일상적으로 재생산되고, 포장되고, 일괄적으로 판매되고, 구매되는 세상에 살고 있다. 또한 우리는 대량생산된 이미지들로 가득한 세상에 살고 있다. 하나의 유일무이한 이미지만이 진정성을 지닌다는 개념은 현대사회에서 거의 통용되지 않는다. 사진 이미지로 여러 개의 복사본이 있을 수 있고, 이들은 각기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 이들의 가치는 고유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지니는 미학적, 문화적, 사회적 소용에 있다. 여러 유명한 회화 작품들은 화집과 포스터, 엽서, 티셔츠 등을 통해 재생산된다. 원작은 더 가치가 있지만, 이 가치는 유일무이한 이미지의 고유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복제품의 원본이라는 점에서 오는 것이다. 이미지의 재생산의 가장 근본적인 결과는, 단독 관점에서만 보이던 이미지가 여러 다른 맥락에서 읽힐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미지의 의미가 맥락(배치)에 따라 변하고 있다는 점이다. 현대의 고유한 이미지의 고유(디지털 명작의 복사본)하다는 것은 유일무이함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독특하다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일반 소비자가 재생산의 여러 과정에 쉽게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텍스트는 관람자가 이미지를 정해진 방향으로 읽도록 지시한다. 또한 종종 이미지를 다르게 해석하도록(전유, 약호 전환) 자극하기 위해 쓰이기도 하고 정치적 선전 수단으로도 사용된다.

    미디어들 간의 차이를 이해하는 방법 중 하나는 각 미디어 간의 현상학적인 측면을 살펴보는 것이다. 현상학(지각, 기억, 상상력)은 모든 지식과 진리가 단순히 사물 그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주관적 경험에서 나온다는 믿음이다. 즉 경험은 객관적인 시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과학적 탐구가 지배하던 이성적인 시기에 대항하였다. 또한 우리가 세계에 대해 지적, 감성적, 육체적으로 반응하는 방식의 경험의 과학을 제시하며, 몸과 지각의 중요성을 강조했다.(후설, 퐁티) 그것은 데카르트의 정신과 몸이 분리되어 있다는 이분법에 도전하였으며, 바라보는 행위는 본질적으로 지각적이고 구체적인 실천이며, 따라서 시각성 연구에 특별한 중요성을 갖는다. 현상학적인 접근은 전통적으로 영화와 미디어 연구에서 별 주목을 받지 못했는데, 마르크시즘과 구조주의, 그리고 정신분석학이 현상학의 주요 논리와 충돌했기 때문이다. 마르크시즘은 개별적 경험이 아닌 집단적 신체와 물질적 관계를 강조한다. 구조주의 언어학은 언어와 의미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목소리의 신체적 특성이나 언어의 운동적 측면을 고려하지 않는다. 정신분석학은 행동의 생리학적이고 생물학적인 측면을 전적으로 다루지는 않았으므로 이를 통한 신체에 대한 이해는 극히 제한될 수밖에 없다.

    영화적 의미는 하나의 프레임이 아닌 이미지의 집합을 통해 도출된다. 3의 의미를 창조하기 위해 두 이미지의 병치는 영화의 중요한 개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이미지의 콜라주는 여러 겹의 공간과 다수의 가능한 서술을 만들어 낸다.

    특정한 예술 회화 작품은 그 고유함에 근거하여 문화적 가치를 획득하였다. 그것은 의례적 역할이 있었고, 숭배 가치가 있었는데, 바로 그것이 유일무이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기계적으로 복제된 이미지는 원본과 동일한데, 그것이 지니는 재생산성, 잠재적 유통성, 그리고 매스미디어에서의 역할 등에 의해서 가치가 결정되었다. 그것은 생각을 전파하고, 관람자를 설득하고, 정치적 의견을 순환시킨다. 디지털 가상 이미지는 접근성, 유연성, 그리고 정보로서의 위상 등으로 가치가 결정된다.

    미디어는 지배 수단이다. 지배계급은 미디어를 통해 각종 관념을 판매함으로써 다른 경제적 계급에 속한 사람들을 지배한다.

    우리의 공포와 불안을 건드리면서 즐거움과 안도를 제공하는 것은 현대 소비문화의 가장 근본적인 측면이다. 사람들은 자기가 소비하는 상품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구성한다.(상품 자아) 오히려 광고의 기능은 훨씬 더 간접적이다. 광고는 상품의 정체성을 팔고 또 라이프 스타일을 판매한다. 광고는 상품 물신주의의 중요한 수단이다. 상품이 꼭 가져야할 필요는 없는 의미를 그 상품에 부여하는 것이 광고의 기능이다. 광고는 우리에게 상품을 소비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기호(상품인 기표+의미인 기의)를 소비하라고 독려하는 것이다. 상품을 소비할 때 우리는 이를 상품 기호로 소비한다. 우리는 상품의 구입을 통해 거기에 부여된 의미를 얻고자 하는 것이다. 사실상 많은 제품들이 실제로는 아주 유사하다. 그들의 차이는 결국 맛의 차이가 아닌 광고를 통해 연결되는 계급적 문화적 미학의 차이인 것이다. 이러한 등가성, 차별성, 의미화 등을 통해 광고는 상품 기호(도상적 기호;그림, 그래프+지표적 기호;사진+상징적 기호;텍스트)를 창조하게 된다. 매력(반응, 유혹, 환상, 유순한 신체, 결핍, 질투, 욕구, 소속감, 차별, 가족, 이국적, 정보삭제)은 광고의 핵심 개념이다.

    브리콜라주 bricolage는 사물들을 원래 의도되지 않았던 방식으로 활용하거나 정상적 맥락에서 탈구시켜 배치하는 수용 양식을 지칭한다. 즉 새로운 의미를 생산한다.

    젊음을 판다는 것은 단순히 상품이 소비자로 하여금 좀더 젊게 느끼거나 젊어보이도록 하리라는 믿음을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청년성을 나이든 소비자들에게 파는 것이다. 정체성은 더 이상 제품의 기표가 아니다.

    재현과 복제가 이미지의 작동방식에서 가장 중요한 측면이었던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시뮬라시옹 simulation이 재현을 대신할 새로운 이미지 패러다임이다. 실재를 지시하는 재현과 달리 시뮬라크르라는 현실 세계가 그 어떤 곳에도 의지하지 않는 독립적인 것이다. 극사실 hyperreal은 실재를 대체하고, 시뮬라크르라는 새로운 미디어 형태를 통해 탈근대적 postmodern 존재의 새로운 형태가 되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그저 양식 자체가 아니라 탈근대 문화의 기본 특성을 드러내주는 양식들이다. 모더니즘 예술과 이론은 미디어와 대중에 대한 엘리트주의로 구분하지만 포스트 모더니즘은 대중과 그 근원을 함께하며 구조(기표와 기의)의 믿음을 배격한다. 즉 고급과 저급문화, 엘리트 의식과 대중 의식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들어 비평의 관점이 문화의 밖이나 우위에 존재할 수 없게 만든다. 광고에서도 마찬가지다. 현대인은 상품을 자기 정체성의 일부로 생각하기 때문에 이들에게도 상품이나 회사명, 상품의 질이나 기능은 필요치 않다. 그래서 스타일을 내재화함으로써 상품 판매를 촉진시킨다. 제품을 사용함으로써 얻는 스타일을 말한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포스트 모더니즘의 양상 중 하나는, 포스트모더니즘이 시뮬라크라 세계 내의 관계를 반영적으로 인식하도록 유도한다는 점이다. 이는 소비, 이미지, 그리고 대중의 차원에서 움직이는 세계다. 모더니즘 예술은 우선 재현이라는 전통적 형식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시각적 요소보다 개념, 과정, 행위가 더 중요한 예술작업이 되었다.(행위예술, 퍼포먼스) 아방가르드, 추상표현주의, 초현실주의, 개념미술, 행위예술, 구성주의(예술이 영적이고 신비하다거나 숭고하다는 개념을 파괴한 소련의 운동), 입체파, 리얼리즘, 사실주의, 시네마베리테, 다이렉트시네마, 미래파(1910-20) , 대부분의 모더니스트 운동은 1970년대까지 내용보다 형식을 우선시 하고, 재료의 물성을 명백하게 따르며, 지난 전통의 관습을 붕괴시키는 기본적 원칙을 공유했다. 그러나 고전과의 비밀스런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 참된 근대성일 수도 있었다. 그러므로 근대예술 역시 고전예술만큼이나 규칙에 기반한 역사적인 양식이다. 또한 1990년대까지 포스트모더니즘과 공존한 시기이기도 하다. 탈근대성(postmodernity)이라는 용어는 탈근대적 문화 속 경험, 그리고 모더니즘의 원칙과 틀의 변동을 의미한다. 탈근대성에는 근대성과 구분될 수 있는 중요한 사회적 측면이 존재한다. 모더니즘은 미래지향적이고 긍정적이며, 무엇이 사실이고 진실인지, 그리고 주어진 사회에서 무엇이 최고를 위한 일인지 알고 있다. 탈근대성은 그러한 인식과 발전에 대한 믿음에 대해 반문하는 것이 특징이다. 우리가 정말 발전이란 것이 언제나 좋은 것임을 확신할 수 있는가? 우리가 정말 인간적 주체를 알 수 있는가? 경험이란 것이 관연 순수하거나 미디어에 매개되지 않을 수 있는가? 무엇이 진실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근대성이 올바른 지식의 선택으로 인해 진실을 발견할 수 있다는 생각에 기반을 두었다면 탈근대성은 순수한 진리란 환상일 뿐이며 진실이란 하나가 아니라 복수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탈근대성은 사회의 구조와 사회관계와 문화를 이론화시키는 방법의 근거에 대한 심오한 질문을 제기함으로 문화적 권위의 충돌을 가져온다. 이러한 이유들로 포스트모더니즘은 사회의 거대 담론 master narratives 또는 메타 서사에 대한 의문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거대 담론이란 세계까지는 아니더라도 사회를 이해 가능한 용어들로 설명하고자 하는 틀이다. 종교, 과학, 마르크시즘, 정신분석학, 발달에 대한 계몽주의 신화, 그리고 삶의 모든 단면들을 설명하고자 하는 기타 이론들이 거대 담론에 해당될 수 있다. 거대 담론은 계몽, 해방, 자기 인식 등 특정 목표에 대한 필연적이며 단선적인 발달의 감각을 내포한다. 거대 담론과 그들의 보편주의, 그리고 인간의 조건을 정의할 수 있다는 전제들에 대한 깊은 회의가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의 특징이다. 따라서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은 가치, 질서, 통제, 정체성, 또는 그 의미 자체에 대한 의문과 비난을 넘어서서 지각되는 철학적 사유를 검증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또한 미디어, 대학, 박물관, 의술, 법 등의 사회제도가 움직이는 전제와 그 안에서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을 점검하기 위해 이들 사회제도를 철저하게 파헤치는 작업도 포함된다. 모든 사상의 조직 아래 잠재되어 있는 가치를 밝혀내기 위해, 그리고 그 안에 자연스럽게 내재되어 있는 이데올로기들을 문제 삼기 위해 모든 가설을 면밀히 검토하는 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의 주요 목표이다. 이것은 authenticity 진정성의 개념이 포스트모더니즘에서 항상 문제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핵심적 측면 중 하나는 주체에 대한 근대 개념의 가장 기본이라 할 수 있는 현존 개념에 대한 비판이다. 현존은 즉각적 경험에 대한 인식을 지칭하며, 신뢰성과 실재성을 담보한 인간의 감각을 통한 세계의 직접적 이해를 가리킨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존재의 개념 혹은 즉각적 경험의 개념이 신화일 뿐이며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은 언어, 이미지, 사회적 압력 등으로 인해 매개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포스트모더니즘은 순수하고 매개되지 않은 경험이란 존재할 수 없다고 단언하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은 탈근대적 조건의 이러한 측면들을 연구하고 현대의 사회적 상호작용, 의미, 그리고 문화 생산의 복합성을 이해하는 작업을 해왔다. 지금 사회의 모든 면이 탈근대적이라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이 측면들이 근대적인 요소나 기타 요인들과의 긴장 속에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다원론과 다양성 개념을 강조한다. 차별성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중심적 개념이다. 그것은 다중 주체성 개념을 중요하게 간주하는데, 즉 우리의 주체가 한편으로는 인종, 성별, 계급, 연령, 등 다양한 정체성 영역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제도에 대한 우리의 사회적 관계의 산물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주체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모더니즘에서의 단일 주체 개념과는 상당히 다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문화적 다원주의와 다양성에 초점을 둔다. 탈근대적인 사상은 성차 gender, 인종, , 그리고 계급에 관해 다양한 질문을 던졌던 20세기 후반의 사회운동들, 예를들어 시민운동, 여성운동, 성적 소수자 권리운동 등과 상호 영향을 주며 생겨났다. 정체성 정치의 개념은 1980년대와 1990년대 비판이론에서 생겨났다. 이 이론은 작가와 주제의 문화적 정체성이 텍스트에 확연히 드러나는 정치성의 중요한 측면이라는 점을 강조한 바 있다. 계급, 인종, 성에 기초한 이론의 초기 형태를 따라 정체성 정치의 느슨한 틀 안에서 작업하던 작가들은 문화적 차이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 그리고 텍스트를 통해 말을 하는 자가 누구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논의되는 주제나 말하는 주체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백인인지, 흑인인지, 아시아인인지, 라틴계인지, 동성애자인지, 아닌지, 혹은 성전환지인지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다시 말해, 이러한 사회적 이론적 운동들은 인간적 주체를 보편적인 언어로 표현할 수 있다는 생각에 도전한 것이다. 주체 간의 차이, 혹은 수용자 간의 차이를 강조하는 탈근대적 비평은 이미지가 수용자에 따라 달리 해석될 수 있음 또한 강조한다. 일부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은 텍스트가 다양한 의미를 가진다는 개념인 다의성 polysemy 문제에 중점을 두기도 한다. 대상에 접근한다는 면에서 탈근대성이라 불릴 수 있는 것은 비평과 이론만이 아니다. 텔레비전 쇼, 영화, 광고 등의 탈근대적 이미지 텍스트는 한 가지 이상의 선호하는 해독 방식이 있으며 보는 이마다 다른 방법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한 텍스트에 여럿의 의미가 담겨 있다는 개념은 하이퍼텍스트 hypertext의 예에 잘 나타난다. 하이퍼텍스트란 큰 자료 세트 내의 다양한 지점들, 혹은 다양한 이야기의 끈들과 복수로 연결되어 있는 컴퓨터 텍스트를 지칭한다. 하이퍼텍스트는 지식과 정보를 정리하는 선형적 내러티브보다는 복수의 연결망을 가진 네트워크 모델을 이용한다는 점에서 탈근대성의 조건이 구체화된 형태로 볼 수 있다. 20세기 후반과 21세기 초의 디지털 문화에서 위조품과 진품, 혹은 원본과 복사본의 경계가 붕괴된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 시뮬라시옹 개념을 도입한 바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대중문화와 대량문화, 그리고 이미지의 표면적 세계에 대해서 모더니즘과 매우 다른 분석을 한다. 대중문화 그 자체와 대중문화가 이미지로 세계를 침투하는 점을 적대시하는 것은 모더니즘의 특징이다. 반면 포스트모더니즘은 저급문화, 혹은 대중문화에 대한 사람들의 관여와 아이러니를 강조한다. 모더니즘이 멸시해 마지않던 저급, 대중, 상업문화의 형태가 포스트모더니즘 맥락에서는 필수불가결한 조건으로 여겨진다. 이 조건 안에서, 그리고 이 조건을 통해서 비판적 텍스트를 생산하기 때문이다. 전유 appropriation, 패러디, 과거의 회상, 역사적 인식과 이미지의 재구성, 자기 반영성 등은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용어와 연계된 작업을 하던 1980, 1990년대의 예술가와 비평가들이 채택했던 접근법이다. 탈근대 이론은 진짜 의미가 기저에 숨겨져 있다는 생각을 거부하고 이 표면을 사회의 원초적 요소들로 본다. 이미지는 실재라는 관념을 초월하고, 더 이상 표면 아래의 의미를 보거나 진실된 의미를 찾을 수 없다. 이미지 이면에서는 아무것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자기 반영성은 이미지 혹은 내러티브와 보는 사람의 관계를 재고하기 위해 만드는 탈근대적 양식의 사회적 정황이나 틀의 형태를 만드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서술 양식의 하나는, 관람객이 그 서술 안에서 자신을 잃고 흡수되어 자신의 역할을 잊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때로 카메라를 뒤로 하여 세트나 틀을 보여준다던지, 광고 안에서 광고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소비자에게 직접 이야기하는 식으로, 또는 영화적 서사 구조의 관습을 깨뜨림으로써 이루어진다. 모더니즘 시기의 비평가들은 작업의 생산과정이나 형식을 주목하라고 주문한 데 비해 포스트모더니즘 시기의 이 자기 반영적인 과정에는 암묵적인 비평이 존재하지 않는다.

    모더니스트들의 자기 반영적 서술 전략은 보는 사람들이 쇼의 구조와 텍스트의 즐거움에서 거리를 두고 보도록 요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거리두기는 관람자의 비평적 의식을 이끌어주는 중요한 개념이다. 거리두기 개념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서사로부터 스스로를 끄집어내게 하는 기술이다. 이는 우리가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이게 만드는 도구를 보기 위함이다. 모더니즘에서의 자기 반영성이란 비판적 관람자들이 자본주의의 가치를 가진 미디어의 환상을 훼손할 수 있는 방식이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의 자기반영적 텍스트에서 정작 비환영의 기술을 제공하는 것은 광고주와 미디어 제작자들이다. 이들이 제공하는 것은 텍스트 이면에 숨겨진 경제적 문화적 조건에 대하여 거리를 둔 비판적 반영을 위한 도구라기보다는, 하나의 쾌락적 과정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양식은 이미지 제작의 많은 관습들을 붕괴시키는 경향이 있다. 예를들어, 탈근대적 양식을 따르는 영화들은 영화적 언어의 관습에 개의치 않고 서술적 요소들을 뒤섞어버리고 편집에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장면의 급전환을 사용한다. 관습적 영화언어란 편집기법, 조명효과, 카메라 이동 등을 통해 이음새가 깨끗한 텍스트, 즉 이야기가 일관되게 이어진다는 허상을 낳는 텍스트에 기초한다. 탈근대적인 영화들은 불연속성의 전략을 써서 이러한 관습을 깬다. 불연속성에서는, 형식을 감추기보다는 오히려 보는 이에게 명백하게 드러내 보인다. 이것은 장면의 급전환을 사용하거나, 흑백과 칼라 이미지를 섞는 것, 비스듬하거나 설명되지 않은 카메라 각도, 조화롭지 못한 연속 동작 등을 포함한다. 1980년대 초기에 등장한 이래, 뮤직비디오는 불연속적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이러한 전략을 자주 차용해왔다. 뮤직비디오는 관련성 없는 다양한 이야기 요소들을 섞고, 서로 다른 종류의 이미지들을 혼합하고, 게다가 텔레비전 텍스트인 동시에 광고물이라는 특성까지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포스트모더니즘 양식의 예로 간주한다. 이전 시대에 존재했던 불연속성, 자기 반영성, 서사적 분열, 그리고 다의성 등의 기술과 관습들이 사실 보는 이로 하여금 자본주의 미디어의 환영적 이미지와 그 관습적 관찰 방식으로부터 벗어나고 저항하도록 하는 정치적 프로젝트와 연결되어 있었다는 점은 미디어 역사의 아이러니다. 이러한 기술들은 급진적인 관찰 방식을 생성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 그 기술들은 허상의 조건을 이미 알아버린, 그리고 그 이면에 아무런 중요한 것도 찾지 못한 관찰자의 약호가 되어버렸다.

    영화 <펄프 픽션>은 서사의 순서를 가지고 장난을 치고 시간을 융통성 있는 실체로 만들었다는 의미에서 탈근대적인 텍스트의 예로 볼 수 있다. 이 영화는 내용이 시간 순서로 진행되지 않고 다양한 사건들이 마구 뒤섞여 나타난다. 이야기가 과거로 돌아갈 때마다, 관객은 영화의 구조에 대해 생각하고 그를 밝혀내기 위해 애써야 한다. 불연속적 편집처럼, 이러한 기술은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적 서술구조의 환상에 빠지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 영화를 통해, 연속적 서술이 현실의 환상을 주는 방식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지만, 이 깨달음은 자본주의 미디어의 유혹에 저항하는 정치적 행위라기보다는 단지 즐거운 경험일 뿐이다.

    새로운 사상, 새로운 이미지, 이전에 존재한 적이 없었던 생각이나 행위들이 과연 있을 수 있는가? 그게 과연 중요한가? 오늘날의 이미지 세계는 엄청나게 다양한 종류의 리메이크, 복제, 패러디, 모사품, 재생산으로 이루어져 있다. 건축과 미술에서, 그리고 대중문화에서도, 이미지나 형태의 원본이란 개념은 완전히 사라진 듯 하다. 이것은 포스트모더니즘 건축에서 잘 볼 수 있다. 탈근대적 맥락 속의 포스트모더니즘 건축물은 근대, 고전, 고딕 등 다른 여러 건축 양식을 빌려오지만 그들의 역사적 의미에 대한 명확한 지각없이 함께 섞는다. 탈근대 건축은 과거나 현재의 스타일을 표절하고, 인용하고, 빌려온다고 볼 수 있다. 건축의 전통과 고유성 개념에 대하여 근본적인 의문이 제기된 것이다. 역사에 대한 인식이나 어떤 것이 적절한 디자인이라는 규칙에 대한 고려 없이 섞는 것을 혼성모방이라고 하는데, 이는 인용하고, 빌려오고, 훔쳐오고, 다른 양식, 장르 형태를 혼합하는 것을 말한다. 혼성모방은 진보의 개념, 예를 들어 스타일은 발전함에 따라 나아진다는 식의 사고에 대한 도전이다. 모더니즘에서 그토록 중시했던 진보 개념이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새로움에 대한 의도적 무시 속에서 철저하게 소멸했다. 모더니즘의 양식은 직선적 진로를 따르며 새로운 빌딩마다 기능이나 디자인 면에서 이전의 것보다 발전한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우리가 좀 더 나은 것을 향하 가고 있다는 인식 없이 여러 양식이 뒤섞일 수 있다. 게다가 포스트모더니즘 빌딩의 많은 요소들은 건축의 기능 개념을 문제 삼지 않는다. 아치가 구조적 기능을 갖지 않을 수도 있고, 기능 없이 장식에 불과하거나 기능 없이 존재한다는 해학으로 남을 수도 있다. 통로가 아무 곳으로도 통하지 않을 수도 있고, 외관이 아무것도 가리지 않을 수도 있으며, 그리스의 기둥이 고딕의 아치 옆에 서 있을 수도 있다. 이것은 모두 건축의 기능적 역할을 하찮게 여기는 외양에 대한 의식이며 건축의 기본적 원칙을 장난스럽게 손상시키는 작업이다. 혼성모방은 건축 양식의 요소들이 원래의 역사적 기능적 정황에서 벗어나 다른 각도와 다른 환경에서 계속 의미를 달리할 수 있는 자유로운 기표가 되게끔 한다. 어떤 새로운 것도 만들어 질 수 없을 지 모른다는 말은 사실상 아주 새롭게 생각되는 것은 허위라는 말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는 포스트모더니즘 예술의 중요한 측면이다. 따라서 복사본은 원본과 같은 가치를 가지게 되는 것은 물론, 복사본은 원본의 가치와 진정성 개념을 완전히 손상시킨다. 탈근대적 예술 대부분은 실재를 표현하는 데에 별 관심이 없다. 대신 예술의 기능을 다시 생각하는 것과 생산적 의미에서 제도적인 환경의 역할을 강조하는 데 관심이 있다. 그러한 작업들 중 다수는 예술관련 제도들과 그들로인해 생성되는 세력의 관계에 집중한다. 많은 포스트모더니즘 텍스트가 그러하듯, 이러한 광고(상호 텍스트성-자기반영성은 이미지, 광고, 영화, 텔레비전 쇼 등의 다른 텍스트를 상호 텍스트성을 통해 참조하는 형태를 취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다른 텍스트를 그 의미 그대로 새로운 텍스트에 삽입하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상호 텍스트적 참조는 향수(추억)을 불러 일으키는데, 이는 역사에 대한 애정 깊은 경의의 표현이며 시간의 재구성이다. 또한 이것은 소비자의 기억을 활용하는 것으로서 소비자에게 이야기를 거는 방법이다)들은 제품을 파는 한편 광고의 본질을 규정(혹은 비평)한다. 이것은 많은 탈근대적 텍스트에서 발견되는 전형적인 이중 자세다. 상품의 판매를 꾀하며 동시에 그 과정을 비판하는 것이다. 또한 아이러니, 패러디, 재생산, 리메이크, 참조 등을 통해 시청자에게 자의식을 요구한다. 그 안에서 시청자들은 내용 자체보다는 형식, 스타일, 장르, 관습을 끊임없이 쫓는다. 현대 광고는 메타커뮤니케이션의 한 형태로 시청자에게 광고를 보는 과정에 대해 탈근대적인 전략으로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직접적이지 않게 메타나 반영적 차원에서 말한다. 그러므로 광고는 소비자에게 제품을 사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광고를 보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기술은 광고에 진력이 난 소비자들에게 새로운 방법으로 이야기함으로써 관심을 얻도록 만든다. 메타커뮤니케이션은 이런 광고와 같은 목표(제품, 상표, 기업의 이미지를 파는 것)를 가지고 있다. 메타커뮤니케이션은 소비자를 세련되고 지적인 존재로 대하는 척한다. 그것은 탈근대적인 방법이다. 이것은 마치 시청자들을 광고 회사의 회의실로 불러와 수요가 많은 캠페인의 비밀을 알려주는 듯 보인다.(쪽지나 문자 메모 광고, 반광고, 극사실주의 방법, 사회적 관심, 베네통 광고...) 하지만 그들의 진정한 목표는 그들의 제품을 위한 소비자의 관심을 얻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수용자를 복잡한 독자로 간주하며 이미지와 미디어에 민감한 사람들로 본다. 이것은 현대문화를 바라보는 아이러니한 방식이다. 그리고 이것은 삶의 모든 면이 상업적인 듯 보이는 현실에 대해 매우 냉소적이다. 모더니즘의 진지함과는 정반대다. 그렇다고 해서 포스트모더니즘이 꼭 해방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모더니즘이 신봉하고 있는 사상을 깬다고 해서 지배적 이데올로기에 저항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포스트모더니즘은 소비문화의 이데올로기에 깊이 연루되어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과거에 대한 향수, 보편적 인본주의, 그리고 단일 진리 개념 등을 거부하는 한편, 예술, 상업, 뉴스, 광고 등의 범주들이 서로 중복되어 있음을 인정한다. 이 범주들의 경계는 모더니즘에서 생각했듯 애초부터 그렇게 분리된 개념이 아니었으며, 그 경계의 모호함은 계속 확대되었음을 의미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보편화된 자의식의 신장을 보여주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스타일의 자기 반영성과 메타 커뮤니케이션 속에서, 그리고 일상적 삶의 모든 면에서 전통적 메타 서사에 대해 던지는 끊임없는 질문들 속에서 자의식의 신장은 발견될 수 있다.

    진실에 대한 믿음은 역사적으로 특정한 시점의 특정 담론의 결과물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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