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영상, 미학론 42 (교재 공개)
    패러다임/예술 2021. 2. 18. 02:33
    반응형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생각하기 이해하기 실천하기-

     

    영상, 미학론 42

     

    367. 역사가 과거와 현재의 대화

    역사를 과거의 사건과 점진적으로 나타나는 미래의 목적과의 대화

    역사를 의식하는 행위는 역사 그 자체가 지니는 맹목적인 사실을 믿는 행위와는 다르다. 그것은 역사가 드러내는 다양한 상황을 상상하는 행위이며, 역사가 주는 반성을 공감하는 행위이다. 또한 역사라는 개별적 실체를 보편적 진리로 변화 시켜 읽어내고 있는 인간을 이해하는 행위이다. 따라서 역사를 의식하는 행위는, 역사의 흐름을 믿고 역사의 흐름 속에 녹아있는 진리를 믿으며 역사의 흐름 속에서 진리를 찾는 인간의 행위가 무의미하지 않다는 것을 믿는 행위이다. 이 믿음이 역사의식, 즉 역사의지이다.

    예술가는 작품의 향유자들을 고유한 개체로 바라보며 작품에 대한 개인의 독특한 반응을 이끌어 내고자 하는 반면에, 엔터테인먼트는 향유자들(관객)을 개인이 아닌 집단, 통계의 집합으로 바라본다. 예술은 개인을 향해 있지만 엔터테인먼트는 가능한 많은 수의 사람들을 겨냥한다. 이 때문에 최대한 많은 수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엔터테인먼트의 생산자들은 만드는 이가 개인적 취향을 섞으려는 시도를 못마땅하게 여긴다. 관객층을 좁힐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예술가들은 서로 다른 관람객들이 각기 모두 다른 경험을 하게 될 것이라는 가정하에 작품을 만드는 반면, 엔터테인먼트의 생산자들은 관객들이 특별한 상황을 공동으로 경험하도록 할 뿐만 아니라 관객들이 비슷한 경험을 했다는 것을 보증하기 위해 그들에게 친숙한 말, 이미지, 심벌, 테크닉, 스토리를 사용한다. 이처럼 과거에 반응이 좋았던, 예측 가능한 요소들의 조합을 추구하는 하이 컨셉트의 전략은 불특정 다수의 관객을 상대로 하는 엔터테인먼트 자체의 본성과 그 맥락을 같이한다. 엔터테인먼트는 낯설고 불투명한 미래 대신 확인되고 안전한 과거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놀라운 경험 대신 친숙한 재미를 선사하는데 더 익숙하다.

     

    368. 어떻든지 하나의 이미지가 예술작품으로서 우리 앞에 제시되면, 그 작품을 바라보는 방식은 예술에 대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존의 관습 혹은 선입견(아름다움, 진실, 천재성, 문명, 형태, 상황, 취향)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는다. 이와같은 예술에 관한 선입견들은 원판과는 일치하지 않는다.(즉 관계없다. 무의미하다.) 즉 실체와 어긋난다.

    그림에 나타난 인물, 몸짓, 얼굴표정, 관습 등에 대한 우리 자신의 관찰과 그림이 우리에게 주는 작용이 일치할 때만 그림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사회관계와 도덕적 가치가 당시의(그림이 그려진) 그것과 비교 가능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고 이러한 작용을 통해 작품에 대한 심리적, 사회적 관심이 촉발되는 것이다. 따라서 작품에 나타난 인물들을 알 수 있다라고 확신하도록 유혹하는 것은 화가의 기예가 아니라, 작품에 대한 작용이다.

    하나의 보는 방식으로서의 시각 perspective(바라다 봄의 차이)은 보는 사람의 눈에 모든 것의 중심을 두는 것이다. 시각이란 발광상자로부터 바깥으로 흘러 나오는 빛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형상 形相이 드러나(마치 그것이 상자 안으로 흘러들어 오듯이)는 것이다. 이처럼 빛을 통해 드러나는 형상을 실재 혹은 현실 reality 이라고 부른다.

    결국 하나의 보는 방식으로부터 시각이란 인간의 눈을 세계의 중심에 놓는 과정, 다시 말하면 원근법에서의 소실점 처럼 모든 사물이 인간의 눈으로 수렴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시각이라는 방식에는 시선의 주고 받음이 없다. 이것은 마치 신이란 개념 그대로 자신을 다른 대상이나 사물과의 관계 안으로 위치시킬 필요가 없다는 태도와 같다. 왜냐하면 신이란 위치지워진 대상이나 사물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 장소에서 한 순간에만 존재할 수 있는 인간(바라다보는 사람으로서)의 경우도 모든 현실의 이미지가 그를 중심으로 배열되는 것은 어떻게 정당화 될 수 있을까?(모순?)

    무엇이 보여진다는 사실은 시공간에 의해 제약되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대상을 인간의 눈으로 수렴시키는(원근법의 소실점처럼) 것은 더 이상 가능한 일이 아니다.

    본다는 것은 선택하는 행위인 것이다. 또한 한 사물에 시선을 준다는 것은 대상과 우리 자신의 관계를 바라보는 것이다. 사물을 하나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주변의 대상과 관계지움으로써 인식하게 된다. 이러므로써 우리 앞에 무엇이 존재하는 가를 알게되는 것이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보게 되면 곧 우리 자신 역시 바라다 보일 수 있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세계의 일부분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하나의 이미지는 복제(재창조 되거나, 재생산 됨) 됨으로써 보여지는(혹은 나타난 것들의 집합) 어떤 것이다. 이때 나타나는 것은 그것이 처음으로 만들어졌던(원판) 공간과 시간으로부터 떨어져 나가게 된다.

    모든 이미지는 우리의 바라다보는 방식(선택, 해석)이 드러나 있다.

    이미지는 마음의 상상에 의해 드러나는 어떤 형상이 아니라 한 대상을 어떻게 보았는가 혹은 한 대상이 관찰자에 의해 어떻게 보여졌는가를 드러내 주는 것이다.

    의미작용의 다원성은 누구나 아무런 의미부여 또한 의미가 무한히 확대됨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작품을 구성하는 기호 체계가 다른 기호들과 결합하여 그 의미가 변화하는 것이며 동시에 그것이 해석되는 시기와 장소에 방법에 따라 달라지고 각자가 부여한 기호체계의 질서가 수용자를 일정한 방향으로 인도한다.

    예술작품의 해석은 단순한 수용이 아니라 의미의 재창조 과정이다.

    예술작품을 해석하는 과정이란 작품에 담긴 가치, 편견의미(텍스트 생산자)를 포용함으로써 인식지평을 융합(수용자와 텍스트는 대화의 과정에 참여하는 두 주체) 함을 의미한다. 즉 텍스트를 매개로 해서 작가와 수용자의 인식세계(그리고 subtext)가 융합 된다는 것이다.

    또한 작품의 의미에 대한 이해는 수용자 입장에서 의미를 재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와 수용자의 매개과정으로 파악될 수 있다.

    작품의 감상자(해석자)는 그 자신의 인식지평과 다른 사람의(예술가) 인식지평을 매개하는 것이다. 동시에 작품의 의미는 양자의 인식지평의 융합을 통해서만 드러나게됨을 알 수 있다. 대화는 인식지평의 융합을 위한 매개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369. 나체 nudity란 언제나 양식화 conventionalized 된다. 그리고 나체의 양식화는 예술적 전통에 유래된다.

    벌거벗음 nakedness은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이고, 어떠한 위장도 없는 상태

    나체는 대상이 되어 보여짐을 의미. 보여지는 대상으로 전시 된다. 덮개를 가지는 것이며, 벌거벗지 않았다는 비난을 받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나체란 의상 dress의 한 형식에 불과한 것이다.

    여성 몸에 털 그리지 않는다. 하나의 양식이다. 이러한 양식은 물론 똑같은 목적, 즉 여성 스스로의 성적 관심 보다는 바라다 보는 사람을 향한다는 목적에 기여하는 것이다. 신체의 털이란 성적 힘과 정열의 상징이다. 따라서 여성의 성적 정열은 최소화할 필요가 있으며, 그렇게 됨으로써 그것을 바라다보는 사람은 자신이 모든 성적 정열을 독점하고 있다고 믿게되는 것이다.

    여성은 어떤 욕구를 채워주기 위해 거기에 있는 것이지, 스스로의 욕구를 표현하는 것은 아니다.

    여성의 눈빛은 그림 바깥의 남자를 바라 본다. 그는 그림을 바라다보는 사람이며 동시에 그것의 소유자인 것이다.

    벌거벗음;안도감(현실을 발견하는데서 오는), 고유함 없앰, 익명성(누구나 비슷하고 익숙), 따뜻하고 친근한 느낌(차갑고 비인간적), 평범함 banality(우리와 다르지 않고 익숙)우리 자신이 그것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다. 신비적(정숙함)인 것의 상실주관적객관적주관적 관점이 일어난다.(성에 대한 신비로움상실평범한 것으로 객관화또다른 주관적으로 부여하는 신비로움으로 전환)

    벌거벗음이란 정적인 상태가 아닌 끊임없이 변화하는 과정이다.

    평범함이란 느낌은 과정으로서 벌거벗음에 대한 우리의 긴장 상태를 지속시키기 보다는 오히려 깨트려 버린다. 벌거벗은 모습을 묘사한 표현주의적 사진이 회화에 있어서 보다 드문 까닭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이러한 한계에 부딪쳤을 때 대부분의 사진가들이 도입한 방법은 인물을 벌거벗음 아니라 나체로 묘사하는 것이었다. 다시말해 바라다 보이는 대상(하나의 풍경 sight)과 바라바보는 사람을 일반화시키고, 성적 고유성을 없앰으로써 욕망을 환상으로 바꾸어 놓았던 것이다.

    (누드화에는 또한 주인공이 없다.)

    대상의 일관된 배열이란 그것 자체에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경험(주관적)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어느 시대에나 예술은 지배계층의 이데올로기적 이해에 봉사하는 경향이 있다.

     

    370.예술은 대상을 그대로 복사하는 재현 representation이 아니라 주관에 의해 다시 구성하는 표현 expression 이다.

    예술은 만듬 making의 세계요. 도덕은 행함 doing의 세계다.

    예술의 역사를 어느 면에서 자유추구의 역사이다. 예술은 고대에는 마법과 종교로부터 해방을 이룩했고, 근대에는 도덕과 지식으로부터 해방을 성취했다. 형식에서 벗어나 자기 표현의 길을 더듬었던 현대미술은 창작과 전시와 감상이라는 종래의 예술 형식을 무화시키려는 새로운 지향을 꾀하고 있다.

    자유가 곧 인간 존재의 본질

    다시말해 이미지에 의한 새로운 언어는 우리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노력으로서 그리고 역사의 주체로서 역사를 이해하려는 노력으로서 역사적 체험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과거의 예술은 그것이 예전에 가지고 있던 권위를 상실했다.

    그 권위의 자리를 이미지를 통한 언어가 차지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중요한 문제는 이들 이미지의 언어들이 어떤 목적으로 누구에 의해 어떻게 사용되는가 하는 것이다. 이러한 질문은 법적, 지적재산권, 정책문제들과 깊이 관련된다.

    이제까지 이들 문제들은 대체로 몇몇 전문가에 의해 개별적인 문제로 다루어져온게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 이러한 것들은 사실상 사회적 역사적 조건과 관련된다. 한 개인이나 계층이 과거로부터 단절된다는 것은 그들의 선택이나 행동에 있어 자유로워짐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역사 안에 우리 자신을 위치시킴으로서만 비로소 개인으로서, 계층의 일원으로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이다.

     

    371. 도시화는 미디어를 통해 형성된 것이다.

    포스트모던이 보편적 냉소주의의 시대임은 분명하다. 냉소주의는 모든 가치를 탈신비화하고 그로부터 중력과 무게를 박탈하여 가벼운 것으로, 그 진정성과 본질을 가치로부터 떼어내어 영원한 표면으로 혹은 수단으로 환원해 버린다. 그러나 보편적 냉소주의의 이면에는 꿰뚫을 수 없고 넘어서기 힘든 관료적 지배체제가 버티고서 있다는 사실이 또한 우리를 절망하게 한다.

    이와같은 의미에서 모순이라든가 대립적 충동은 포스트모던 사회 속에서 체계의 완벽한 도구가 될 수 있다. 체계의 음모는 오히려 그와같은 충동을 내부로 흡수하여 이용하고 어쩌면 더욱더 환영한다. 이런식으로 해서 모순적 충동을 위시하여 포섭된 주체들이 생겨나고, 이 주체 또는 객체들은 체계적 음모의 네트워크 내에서 익명으로 혹은 가명으로 그 음모를 간접적으로 실천하는 대리자 혹은 가담자들이 된다.

    후기 자본주의 공간 속에서 개인들은 지각 경험의 파편화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대량생산과 상품이 현대 사회의 개인들의 삶에 있어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이 나쁜 영향을 준다든지 아니면 무의식적 궁핍의 이미지를 환기하고 있다는 사실보다는, 그것이 아름답지도 추하지도 않는 단지 허접쓰레기 혹은 저질물에 불과하다는 점에 있다. 그 무의미함은 삶을 사소하고 무가치한 것으로, 견딜 수 없는 가벼움으로 이끈다. 그리하여 상품은 단지 이전과는 다른 형태의 노동과 생산을 확인시켜주고, 그로부터 우리의 눈앞에 더 이상 진정성과 같은 가치를 부여할 수 없는 완전히 다른 실재를 제시할 뿐이다. 그럼에도 상품은 우리를 어떤 보편성 속으로 끌어 들인다.

    모든 매개-주체들을 소통 가능한 특정한 코드 또는 생산-권력 관계 속으로 포섭한다. 그런 점에서 상품이란 깔끔한 것이고 평균적인 것이며 따라서 무난하고, 편리하고, 친숙한 것이다. 그것은 동시성을 추구함으로써 세계를 이미지-감각적 보편성으로 묶어 버린다.

    확실히 총체성에 접근하는 길이란 이름모를 어떠한 음모를 탐색하는 길처럼 보인다.

    변증법이란 실재의 구체성에 도달하는 길

    마르크스주의자에게 있어 모순이란 존재의 보편적 비극이면서 동시에 유토피아적 드라마를 여는 계단이기도 하다. 그러나 후기 자본주의의 비극이란 다름아닌 모순의 중화, 다시말해 보편적 비극의 부재이다. 이로부터 모든 유토피아의 드라마는 한낱 텔레비전의 쇼로 생산되어 구매가 가능하지만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그 무엇이 된다.

    후기 자본주의(혹은 post-모더니티)라는 세계체제는 이전의 공간을 무너뜨리고 그 분기점들을 가르지르며 어마어마한 동시성을 전송하는 컴퓨터 미디어 테크놀리지 없이는 상상할 수 조차 없기 때문에, 정보 테크놀로지는 사실상 가장 세련된 산업생산의 산물이다. 즉 그것은 최후의 기계이다.

    이 포스트모던 매체가 기본적인 리얼리즘/모더니즘/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미학적 발전 과정을 반복하고 있다.

     

     

    반응형

    댓글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