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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영상, 미학론 52 (교재 공개)
    패러다임/예술 2021. 3. 28. 0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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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생각하기 이해하기 실천하기-

     

    영상, 미학론 52

     

    400. 놀이(호모 루덴스 Homo Ludens-놀이하는 인간)는 문화적 현상이며 문화보다 더 오래된 것이고, 놀이에는 어떤 중요한 의미가 깃들어 있다.

    놀이의 생물학적 기능;남아 돌아가는 생명 에너지의 발산, 모방본능 만족시키기, 긴장 해소시키기, 훈련, 내적충동, 지배와 경쟁의 욕망, 충동발산, 에너지회복, 소망충족, 개인적 가치의 느낌을 유지시켜 주는 허구적 개념 등등 이러한 가설들의 공통점은 놀이는 놀이 그 자체가 아닌 어떤 것에 봉사하고, 생물적 목적을 갖고 있다는 가정이다. 이 가설들은 놀이의 이유와 목적을 탐구한다. 그것들은 실험과학의 수량적 방법으로 다루려한다. 놀이의 일차적(본질 혹은 원초적) 특징(열광, 몰두, 광분, 재미)이나 미학적 특성은 아니다. 자연은 잉여 에너지의 발산, 힘든 일 이후의 긴장완화, 장래의 일에 대비한 훈련, 충족되지 못한 동경의 보상 등을 위해서라면 기계적 운동이나 반응보다는 그 자녀들에게 긴장, 즐거움, 재미 등을 갖춘 놀이를 제공했다. 놀이의 본질을 규정하는 것은 바로 이 재미의 요소라 할 수 있다. 재미는 각종 분석과 논리적 해석을 거부하며 인간생활 영역의 합리성을 넘어선다. 정의, 아름다움, 진실, 선량함, 마음, 하나님 같은 진지한 추상 개념을 부정할 수는 있어도 놀이를 부정하지는 못한다. 이렇게 놀이의 존재를 인정한다면 그것은 곧 마음(정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다. 놀이를 어떻게 정의하든 그것은 물질이 아닌 까닭이다. 동물의 세계에서조차도 놀이는 물질의 경계를 초월한다. 오로지 맹목적인 힘만이 사태를 결정한다는 세계관으로 본다면 놀이는 피상적인 것이 된다. 마음이 흘러들어와 우주의 절대적 결정론을 무너뜨릴 때 비로소 놀이는 가능해지고, 생각해 볼 수 있고, 또 이해할 수 있다. 동물들은 놀이를 하기 때문에 기계적 사물 이상의 것이 될 수 있다. 우리 인간도 이런 놀이의 비합리적 특성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합리적 존재 이상의 존재가 되는 것이다.

    놀이를 동물이나 어린아이의 생활에 나타나는 행위로 보는 것이 아니라 문화의 기능으로 인식할 때, 비로소 생물학과 심리학의 경계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인간사회의 중요한 원형적 행위들은 처음부터 놀이의 요소가 가미되어 있었다. 모든 추상적 표현 뒤에는 대담한 은유가 깃들어 있는 데, 이 은유라는 것이 실은 말을 가지고 하는 놀이이다. 현상의 세계를 신성의 세계에 위치시키는 신화의 세계나, 원시사회의 의례, 희생, 성화, 신비 등 이런 예식은 모두 순수한 놀이 정신의 구체화이다. 또한 문명사회의 위대한 본능적 힘인 법과 질서, 상업과 이익, 기술과 예술, 詩歌시가, 지혜, 과학 등은 신화의 의례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이 모든 것이 놀이라는 원초적 토양에서 자양을 얻는다. 놀이가 문명의 주된 기반들 중의 하나이다. 무엇보다도 모든 놀이는 자발적 행위이다. 명령에 의한 놀이는 더 이상 놀이가 아니다. 기껏해야 놀이를 모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어린아이와 돌물은 재미있어서 놀이를 하는 것이며, 거기에 그들의 자유가 깃들어 있다. 또한 놀이는 피상적인 것으로 언제나 연기되거나 정지(그만) 될 수 있다. 놀이가 사회적 기능(가령 의례와 의식)으로 인식될 때 비로소 강제와 의무의 개념과 연결된다. 그래서 놀이의 첫 번째 특징은 자유로운 행위이며 자유 그 자체이다. 두 번째 특징은, 일상적인 혹은 실제 생활에서 벗어난 행위이다.(~체 하기, 진지, 열정, 숭고함, 무욕, 만족) 놀이의 표현력은 모든 종류의 공동체적 이상을 충족시킨다. 인간이 하는 놀이의 가장 높은 형태는 언제나 축제와 의례의 영역, 즉 신성의 영역에 위치해 왔다. 놀이의 세 번째 특징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다. 놀이는 시간과 공간의 특정한 한계 속에서 놀아진다. 놀이는 그 나름의 방향과 의미를 갖고 있다. 또한 놀이는 어느 정도 벌어지다가 스스로 종료한다. 어느 정도 경과하면 놀이는 문화현상이라는 고정된 형태를 취한다. 일단 놀아버리면, 놀이는 정신이 새로 발견한 창조물, 기억에 의해 보유되는 보물로서 유지된다. 그것은 뒤로 물려져 전통이 된다. 그리고 놀이는 아무 때나 반복될 수 있다. 이런 반복의 기능은 놀이의 본질적 특징 중 하나이다. 모든 놀이는 운동성을 갖고 있고, 사전에 그 놀이가 벌어지는 공간을 따로 마련한다. 놀이와 의례에 형태적인 차이가 없는 것처럼, ‘신성한 장소와 놀이터를 형태적으로 구분하기 어렵다. 경기장, 카드테이블, 마법의 원, 사원, 무대, 스크린, 테니스코트, 법정 등은 그 형태와 기능에 있어서 모두 놀이터이다. 즉 금지되어 격리된 장소, 특정한 규칙이 지배하는 울타리쳐진 신성한 장소이다. 이런 놀이터는 일상 생활의 세계 속에 자리 잡은 일시적 세계이고, 별도로 정해진 행위의 실천에 혼신의 힘을 기울이는 공간이다. 놀이터 내부에는 특정하면서도 절대적인 질서가 지배한다. 여기서 놀이의 또 다른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놀이는 먼저 질서를 창조하고 그 다음에는 스스로 하나의 질서가 된다. 그것은 불완전한 세계와 혼란스러운 일상 생활에 잠정적이고 제한적인 완벽함을 가져다준다. 놀이는 자체적으로 지고하고 절대적인 질서를 요구한다. 이런 질서가 조금이라도 일탈하면 그것은 게임을 망쳐버리고 그 특징을 박탈해 버리고, 그리하여 무가치한 것이 되어 버린다. 놀이는 이처럼 질서와 깊은 연관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미학의 한 부분이 된다. 놀이는 아름다워지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이런 미학적 요소는 질서정연한 형태를 창조하려는 충동과 동일한 것인데, 놀이의 모든 측면에 스며들어 있다. 우리가 놀이의 요소들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하는 용어들은 아름다움의 요소들을 설명하려는 용어들과 상당 부분 중복된다. 가령, 긴장, 안정된 자세, 균형, 대비, 변화, 해결, 해소 등이 그러하다. 놀이는 우리에게 매혹의 그물을 던진다. 그것은 사람을 황홀하게 하고 매혹시킨다. 놀이에는 사물을 지각하는 가장 고상한 특질인 리듬과 하모니가 부여되어 있다. 긴장의 요소는 놀이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긴장은 불확실성과 우연성을 의미한다. 문제를 파악하여 그것을 해결하는 노력을 가져온다. 놀이하는 사람은 어떤 것이 진행되고 추진되기를 바란다. 그는 자신의 노력이 성공을 거두기를 바란다. 장난감에 손을 내미는 어린아이, 실패를 잡고 어르는 고양이, 작은 공을 가지고 노는 어린 소녀, 이러한 자들은 뭔가 어려운 일을 착수하고 성공하여 긴장을 끝내기를 바란다. 그래서 놀이는 긴장이다. 이런 긴장과 해결의 요소가 솔리테르(패 떼기) 같은 혼자 하는 게임뿐만 아니라 퍼즐, 직소, 모자이크 만들기, 페이션스(혼자서 하는 카드놀이), 타깃 쏘아 맞추기 등의 응용 게임에 스며들어가 있다. 놀이가 경쟁의 특성을 띠게 되면 더욱 치열해진다. 그 치열함은 도박과 운동 경기에서 그 절정에 이른다. 놀이 그 자체는 선과 악을 초월하지만, 놀이에 내재된 긴장의 요소는 놀이하는 사람의 심성 즉 용기, 지구력, 총명함, 정신력, 공정함 등을 시험하는 수단이 되므로 특정한 윤리적 가치를 부여한다. 그는 경쟁에서 이기고 싶은 강렬한 욕망에도 불구하고 게임의 규칙을 준수해야 한다. 모든 놀이에는 규칙을 갖고 있다. 게임의 규칙은 절대적인 구속력을 가지고 있고 의심을 허용하지 않는다. 규칙을 위반하거나 무시하거나 참여하지 않은, 게임을 망치는 자(놀이 파괴자-배교자, 이단자, 이노베이터, 예언자, 비양심자, 범법자, 혁명가, 카발라주의자, 비밀결사의 조직원, 이단자)는 마법의 세계를 망치는 자이고, 따라서 비겁자이며 축출(추방)되어야 마땅한 자이다. 놀이의 예외적이고 특별한 지위는, 놀이가 비밀의 분위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놀이를 비밀로 만듦으로써 놀이의 매혹을 더욱 높인다. 이것은 우리만의 놀이이고 남들은 끼지 못한다. 이렇게 경계를 둘러치는 것이다. 놀이의 형태적 특성을 요약해보면-일상 생활의 바깥에서 벌어지고, 진지하지 않은 성격을 갖고 있으며, 독립되어 있는 자유로운 행위이나, 놀이하는 사람을 완벽하게 몰두하도록 만든다. 그것은 물질적 이해와는 상관없는 행위이고 아무런 이득도 제공하지 않는다. 그 나름의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가진 놀이터 내에서, 고정된 규칙에 따라 일정한 방식으로 수행된다. 사회적 집단의 형성을 촉진하고 그 집단은 은밀함 속에 자신들을 감추며 위장과 기타 수단을 동원하여 평범한 세상으로부터 벗어나 있음을 강조한다.

    고등형태의 놀이에는 두 가지의 기본적 양상이 있다. 하나는 어떤 것을 얻기 위한 경쟁이고, 둘째는 어떤 것의 재현이다. 이 두 기능은 서로 합쳐져서 게임은 경쟁의 재현이고, 또한 어떤 것을 잘 재현하기 위한 경쟁이다. 재현은 展示전시를 의미하는 데, 이것은 자연적으로 주어진 어떤 것을 관중 앞에 드러내는 것이다. 공작과 칠면조는 그들의 화려한 깃털을 암컷에게 전시한다. 그 행위의 본질적 특징은 비일상적인 어떤 것을 전시함으로써 암컷의 존경심을 자아내자는 것이다. 새들이 이런 연기를 펼쳐 보일 때 어떤 느낌인지 알지 못하지만, 우리는 어린시절 이런 종류의 연기를 펼칠 때 상상력이 충만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어린아이는 실제의 자신과는 다른 어떤 것, 더 아름다운 것, 더 고상한 것, 더 위험스러운 것의 이미지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아이는 왕자가 되고 아버지가 되고 사악한 마녀가 되고 혹은 호랑이가 된다. 어린아이는 문자 그대로 기쁨에 넘쳐 자기 자신의 밖으로 나가버린다. 너무 황홀하여 그 자신이 왕자, 마녀, 호랑이가 되었다고 생각하며 그러한 중에서도 일상적 현실에 대한 감각을 유지한다. 그의 재현(다른 어떤 것이 되기)은 가짜 현실이라기보다 외양의 실현이다. 이것이 바로 이매지네이션(imagination-이미지 만들기, 의례)의 원뜻이다.

    원시사회의 신성한 의례에는 더 많은 정신적 요소가 놀이하고(작동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성스러운 의례는 가짜 현실 혹은 외양의 실현 혹은 상징적, 신비적 실현을 넘어선다. 그 의례 안에서는, 보이지 않고 비현실적인 어떤 것이 아름답고 현실적이고 성스러운 형태를 취한다. 의례 참석자들은 그 행동이 실제로 벌어져서 결정적인 미화 작용을 하고, 그리하여 사물의 질서가 일상적 삶보다 한 단계 높아졌다고 확신한다. 이런 재현에 의한 현실화는 모든 면에서 놀이의 형태적 특징을 고스란히 간직한다. 고대인들은 의례가 모방적인 것이 아니라 성스러운 행위에 참여하는 것이다. 의례는 구획이 정해진 놀이터 내에서 놀이되고 수행된다. 게다가 축제의 분위기, 즉 환희와 자유의 분위기 속에서 놀이된다. 하지만 놀이가 끝나도 그 효과는 사라지지 않는다. 놀이 바깥에 있는 일상적 세상에 안정 질서, 번영의 광휘를 뿌려서 공동체의 결속을 강화한다. 다음번의 신성한 놀이-계절이 돌아올 때까지 말이다. 자연을 놀이하는 행위가 모든 사회적 질서와 제도의 출발점이었다. 이런 의례 놀이를 통하여 원시사회가 조잡한 형태의 정부를 획득했다. 왕은 태양이고 왕권은 태양운행의 이미지(재현물)였다. 평생동안 왕은 태양을 놀이하다가 종국에 가서는 태양의 운명을 맞는다. 왕은 그의 사람들에 의하여 의례적 형태 속에서 살해되는 것이다.

    본능이라는 말은 임시변통의 용어로서 현실의 문제 앞에 무능력을 시인하는 것이다. 또한 문화의 발전을 특별한 목적(, 어떻게)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은 폐기된 사고 방식의 잔재이며, 인과관계만을 앞세우는 최악의 횡포, 낡아빠진 공리주의인 것이다.

    놀이의 劇化극화가 곧 의례이다.의례적 놀이는 본질적으로 고등형태의 어린아이 놀이 혹은 동물의 놀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러한 놀이는 우주적 감정을 표현하기 위한 몸부림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가장 순수하고 본질적인 형태의 놀이다. 원시사회는 어린아이나 동물들이 노는 것처럼 놀았다. 이러한 놀이는 처음서부터 질서, 긴장, 운동, 변화, 엄숙, 리듬, 환희 등 놀이의 여러 요소들을 갖추고 있었다. 사회발전의 후기단계에서 이르러서야 비로소 놀이는 생활이나 자연 속에 표현되는 어떤 아이디어들과 결합하게 되었다. 원시사회의 놀이는 말이 없는 놀이로서 시적인 형태를 취했다. 놀이의 형태와 기능은 그 자체로 독립된 실체였고 목적도 없고 합리성도 없었다. 자신이 사물의 신성한 질서 속으로 들어간다는 느낌(붙들림), 바로 그것이 놀이에서 최초의, 최고의, 지고한 표현을 얻은 것이다. 그리하여 의례가 놀이와 결합했다. 어린아이는 완벽할 정도로 진지하게 놀이를 하면서도 자신이 놀이 중이라는 것을 안다. 운동선수도(배우도, 연주자도) 신들린 사람처럼 운동(연기, 연주)에 몰두하지만 자신이 놀이(운동, 연기, 연주)를 하고 있음을 자각한다. 마찬가지로 희생제의를 수행하는 사제는(예식, 주술, 전례, 성사, 신비의식) 단지 놀이를 하고 있을 뿐이다. 의례는 놀이의 본질적 특징을 갖고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놀이를 놀아주는 자이다. 그것이 그의 가장 좋은 역할이다. 올바른 생활 방법이란 인생을 놀이처럼 영위하여, 게임들을 놀이하고, 희생을 바치고, 노래하고 춤추는 것이다. 놀이는 문화보다 앞서며 우월하다. 놀이를 통하여 아름다움과 신성함의 영역에 들어간다는 점에서 진지함의 수준을 넘어선다. 성스러운 신비의례를 위하여 일정 공간을(폐쇄공간, 예식공간) 구획하는 것과 순수한 놀이를 위하여 공간을 확보하는 것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놀이터, 테니스코트, 장기판 등은 그 형태에 있어서 사원이나 마법의 원과 구분이 되지 않는다. 게임에 결부되어 있는 즐거움은 긴장을 낳을 뿐 아니라 정신의 고양을 가져온다. 놀이는 무의미함과 황홀감이라는 두 기중 사이에서 움직인다. 축제는 또한 놀이와 같은 특성과 독립성을 갖고 있다. 원시사회에서의 축제(유령의 의례, 가면, 악기)는 자녀들을 위하여 산타클로스 역할을 하는 현대의 부모와 비슷했다. 원시부족 사회가 초자연적 능력을 가졌다고 인정하는 사람의 행동은 그 능력의 演技연기(놀이)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 원시부족의 의례가 단 한 순간도 놀이 개념을 배제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비교종교학의 연구자가 알고 있어야 할 중요한 사항은, 어떤 종교 형태가 다른 질서에 속하는 두 가지 것(가령 인간과 동물)을 신성한 동일체라고 받아들일 경우, 이 관계를 상징적 조응이라고 불러서는 제대로 본질을 파악하지 못한다. 그 동일성은 실제와 상징적 이미지 사이의 조응보다 더 큰 의미를 갖고 있다. 그것은 신비한 동일성이다. 즉 인간이 동물이 되거나 동물이 인간이 된다. 주술의 춤에서는 원시인이 캥거루가 된다. 우리는 우리의 표현수단이 언제나 결핍되어 있고 부족한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원시부족의 심리적 습관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불가피하게 그 습관을 우리의 용어로 표현하게 된다. 그것을 원하든 말든 우리는 원시부족의 종교관을 우리의 논리적 사고 체계에 꿰맞추려 한다. 가령 원시인과 캥거루의 관계는 존재(나는 캥거루이다)인데 비해, 우리 현대인의 논리 체계에서는 연기(나는 캥거루를 연기한다)가 된다. 원시인은 이 존재와 연기(놀이)를 개념적으로 구분하지 않았다. 그는 또 동일성, 이미지, 상징 등의 단어를 알지 못했다. 놀이라는 한 단어에 이 모든 것이 들어가 있었다. 따라서 의례적 행위를 수행하는 원시인의 심리 상태를 가장 가깝게 묘사한 것이 이 보편적으로 이해되는 놀이이다. 이렇게 이해된 놀이의 개념 내에서, 믿음과 믿는 체하기의 구분은 사라져 버린다. 놀이의 개념은 자연스럽게 성스러움의 개념과 융합한다. 바흐의 전주곡이나 그리스 비극의 대사는 이런 융합의 구체적 사례이다. 원시문화의 전 영역을 놀이의 영역으로 파악함으로써, 우리는 원시문화의 특성을 보다 직접적이고 전반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심리적, 사회적 분석은 융합보다는 구분을 중시했다. 원시적 의례는 신성한 놀이였고, 공동체의 안녕, 우주적 통찰, 사회적 발전에 필수적인 것이었다. 즉 놀이는 일상생활의 필요와 진지함에서 벗어나는 곳에서 그 자신을 드러내고 성취하는 행동이었다. 이런 신성한 놀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원시인은 어린아이와 시인에 가장 가까운 존재이다. 가면 쓴 인물의 광경은 우리를 원시인, 어린아이, 시인의 세계, 즉 놀이의 세계로 안내한다. 신성에게 바쳐진 성스러운 놀이는 인간 노력의 최고봉이다.

    어떤 단어 속에 들어 있는 사상은 그 단어에 의해서 제약을 받는다.

    놀이의 일반적인 정의는 특정 시간과 공간 내에서 벌어지는 자발적인 행동 혹은 몰입행위로서, 자유롭게 받아들여진 규칙을 따르되 그 규칙의 적용은 아주 엄격하며, 놀이 그 자체에 목적이 있고 일상생활과는 다른 긴장, 즐거움, 의식을 수반한다.

    고대문화에서 놀이와 사냥, 경기, 음악, 에로스, 전투가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었다. 놀이는 긍정적인 반면 진지함은 부정적이다. 진지함은 놀이하지 않음일 뿐이고, 반면에 놀이는 진지하지 않음, 심각하지 않음이라고 하면 그 의미가 파악되지 않는다. 놀이는 그 자체로 독립되어 있는 것이다. 놀이 개념 그 자체는 진지함보다 더 높은 질서 속에 있다. 왜냐하면 진지함은 놀이를 배제하려고 하는 반면, 놀이는 진지함을 잘 포섭하기 때문이다. 문화는 놀이의 특성을 갖고 있었고, 놀이의 형태와 분위기에 따라 발전했다. 놀이는 객관적으로 알아볼 수 있는 확정적인 것인 반면, 문화는 후대의 역사적 판단이 특정 사건에 부여한 용어일 뿐이다.

    대체로 놀이 요소는 성스러운 영역에 포섭이 되면서 서서히 뒤로 밀려나게 되었다. 포섭되지 않은 나머지는 민담, 시가, 철학, 다양한 형태의 법률적, 사회적 생활로 結晶결정되었다. 그리하여 당초의 놀이 요소는 문화현상 뒤에 거의 완벽하게 감춰졌다. 하지만 그 어떤 순간에도, 심지어 고도로 발달한 문명사회에서도, 놀이 본능이 강력하게 터저나와 개인과 집단을 거대한 게임(놀이)의 도취 속으로 밀어 넣는다. 혼자서 하는 놀이는 문화적 생산에 크게 기여하지 못한다.

    놀이의 일반적 특징으로는 긴장과 불확실성이다.

    소송(법률)은 경기와 상당히 유사하다. 일정한 규칙과 신성한 형태를 가진 경기로서, 거기에 참여한 두 당사자는 재판관의 결정을 바라보며 놀이를 한다. 경기는 곧 놀이를 의미한다. 소송도 놀이의 특성(요소들)을 가지고 있다. 법정(특별한 장소)에서 판결을 내리는 판사는 가발과 법복을 입는 그 순간 일상적 생활로부터 벗어난다. 가발은 중세 영국의 법률가들이 썼던 머리 장식의 잔재물이다. 이 가발은 원시부족 사람들의 춤추는 가면과 관계가 있다. 가면은 그것을 쓰는 사람을 다른 존재로 변모시킨다.

    전투는 가장 열정적이면서도 정력적인 놀이 형태이며 동시에 가장 구체적이면서도 원시적인 놀이이다. 역사, 예술, 문학에서 우리가 아름답고 고상한 놀이라고 인식하는 것들은 과거 한 때 성스러운 놀이였다. 토너먼트와 주스팅(마상 창 시합), 기사단, 맹세, 기사작위 수여식, 기사도, 현대의 젠틀맨 등은 모두 원시문화의 성년식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어떤 형태의 경쟁(신체적, 재주, 전투, 경기, 기량, 지식, 재판, 신탁, 내기, 소송, 수수께끼)도 놀이임에는 틀림없다.

    시를 창조하는 것은 실상 놀이의 기능이다. 시는 정신의 놀이터에서 벌어지며, 그 놀이터는 정신이 그 자신을 위해 스스로 만들어 낸 세계이다. 시 속에서, 사물들은 일상생활과는 굉장히 다른 외관은 지니게되고, 논리와 인간관계를 벗어나 다른 유대관계로 매이게 된다. 시는 진지함을 넘어서는 더 원시적이고 근원적인 단계에 속해 있다. 그것은 어린아이, 동물, 원시인, 예언자 등이 마음대로 넘나드는 꿈, 매혹, 황홀, 웃음의 영역이다. 시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마법 망토처럼 아이들의 영혼을 입어야 하며, 어른의 지혜를 내던지고 아이들의 지혜를 얻어야 한다. 시의 작품은 꿈과 유사하다. 먼저 시는 미학적인 기능만을 가지고 있다거나 미학의 관점에서만 설명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모든 번성하는 문명에서는, 시가 사회적이면서 의례적인 중요한 기능을 가지고 있었고 특히 모든 고대의 시는 의례, 오락, 예술, 수수께끼 생성, 교리, 신념, 마법, , 예언, 경쟁 등을 한데 뭉뚱그린 것이었다. 자체적으로 문화 생성 능력을 가진 시는 놀이로 태어나고 놀이 속에서 태어난다. 시는 의심할 바 없이 신성한 놀이지만 그런 거룩함 속에서도 특유의 즐거움, 분방함, 환희, 쾌활함이 있다. 사회적 놀이 역할을 하는 시와 노래 시합은 다양한 분포 상황을 보인다.(호의적인 사랑의 불평, 허풍과 비방시합, 드럼시합, 사랑의 법정) 신화는 항상 시의 형태를 띠고 있다. 또한 신화와 시는 둘 다 놀이의 영역에서 움직인다. 이미지, 상상, 부조리한 생각, 허황된 꿈, 끝없는 과장, 무책임한 모순, 변덕스러운 변형 등 신화는 원시시대에 일어났을 법한 일들을 이야기하며, 원시인의 우주론을 표현하는 아주 적절한 매개였다. 시는 말로하는 놀이이다. 갈등과 사랑 모두 경쟁 관계 혹은 경쟁을 내포하고 있는 데 경쟁에는 자연히 놀이가 포함된다. 시와 문학의 중심 주제는 일반적으로 갈등이다. , 임무, 시련, 장애물 등으로부터 갈등의 상황이 빚어진다. 이런 모티브들은 경쟁적인 놀이를 연상시킨다. 또 다른 긴장을 형성하는 주제는 영웅의 숨겨진 정체성이다. 영웅은 고의적으로 신분을 감추거나 자신에 대해 알지 못하거나 자신의 모습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기 때문에 신분이 자연스럽게 감춰진다. 즉 영웅은 가면을 쓰고 있거나 가장을 한 채 나타나거나 비밀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감추어진 존재라는 고대의 신성한 게임을 만나게 된다. 그 영웅은 오로지 성년식에 입회한 자에게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그 자체가 경쟁의 형태인 고대 시가는 고대 수수께끼 시합과 거의 구별되지 않는다. 수수께끼 시합은 지혜를 만들어내고 고대 시가는 아름다운 언어를 빚어낸다. 둘 다 놀이 규칙의 체계에 지배되는 데, 그 체계는 생각의 범위와 사용되어야 할 상징, 필요에 따라 성스러운 것 혹은 시적인 것을 규정한다. 고대 시가와 수수께끼 시합의 타당성은 순전히 놀이 규칙에 얼마만큼 순응하는가에 달려 있다. 특정한 기술의 언어를 말할 수 있는 사람만이 시인이라는 호칭을 얻는다. 이 기술 언어는 누구나 이해하는 것은 아닌 특별한 용어, 이미지, 상징 등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일상적인 언어와는 다르다. 구체적 실체와 추상적 생각 사이의 까마득한 거리는 오로지 상상이라는 무지개에 의해 연결될 수 있다. 언어에 의해 표현되는 개념은 언제나 인생의 준엄한 현실 앞에서는 적절치 못하다. 그러므로 사물에 표현을 부여할 수 있고 동시에 생각의 광휘 속에 사물을 적실 수 있는 것은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단어 혹은 상징적인 단어뿐이다. 생각과 사물은 이미지 속에서 통합된다. 하지만 그 자체로 실용적이고 일꾼의 도구같은 일상 생활의 언어는 지속적으로 단어의 이미지를 약화시키고 단어 그 자체의 표면적인 것(외관상의 논리성)만 취하는 반면, 시는 상징적인 것들, 즉 이미지들을 담은 언어의 특징을 의도적인 계획을 통해 더욱 고양시킨다. 시적 언어가 이미지를 상대할 수 있는 것은, 그 이미지를 가지고 놀이를 하기 때문이다. 시적 언어는 이미지에 스타일을 부여하고 신비스러움을 주입해 모든 이미지가 수수께끼를 풀어헤치는 대답이 되도록 한다. 시인들의 언어는 의례를 언어로 옮겨놓았고 사회적 관계를 조정했으며 지혜, 정의, 도덕의 수단이 되었다. 이 단계에서는 문화적 활동이 사회적 놀이로서 수행되었다. 하지만 문명의 정신적 폭이 확대되면서, , 전쟁, 상업, 기술, 과학이 놀이와는 연관성을 잃어버렸고 심지어 한때 놀이 정신이 가장 잘 표현되었던 의례 영역마저도 놀이 정신으로부터 분리되었다. 그리하여 시만이 살아 있는 고상한 놀이의 최후 보루로 남게 되었다. 형체 없는 것과 생명 없는 것을 사람으로 나타내는 의인화는 모든 신화 창조와 거의 모든 시의 정수라고 할 수 있다. 생각은 상상과 동시에 태어나며 이런 생래적인 마음의 습관, 살아 있는 존재들의 상상적 세계, 혹은 살아 움직이는 생각의 세계를 창조하려는 경향을 가리켜 마음의 놀이, 혹은 심리적 게임이라고 부르는 것이 타당하다. 의인화는 놀이의 한 요소이다. 의인화는 놀이의 기능이며 최고로 중요한 마음의 습관이다. 심지어 현대 문명에서도 일정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일상 생활 속에서 어떤 물체에 인성을 부여하는 이런 마음의 본능적 경향이 실은 놀이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의례, 신화, 종교 속에서 신이 동물로 변하는 요소(혹은 동물 가면이나 가죽을 뒤집어 쓰고 동일시 하는 고대부족들)는 하나의 놀이 태도가 아닐 수 없다.(神獸同形신수동형도 하나의 놀이이다.) 리듬을 가진 말은 그럴 필요가 있기에 생겨났다. 음률, 억양, 리듬, 각운, 대구, 강음과 반강음, 고저, 질문과 응답 등 놀이의 영원한 계속 반복되는 패턴 속에서 유래하는 것이며, 오로지 그 속에서 의미를 갖는다. 이러한 요소들의 기원은 노래와 춤의 원리와 단단하게 묶여 있으며 놀이의 기능 속에서 이해된다. 시의 세부 사항으로 인식되어 온 시의 모든 특질들은(아름다움, 신성함, 주술) 본래 원시적인 놀이 특질 속에 포함되어 있다. 서사시는 더 이상 어떤 축제의 목적으로 낭송되지 않고 단지 읽을거리로 전락하는 순간, 놀이와의 연계를 잃어버리게 된다. 또한 서정시는 음악과의 연계를 잃어버리면 놀이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오로지 드라마(희곡)만이 자체의 기능적 특성과 행위의 성격 때문에 놀이와 영구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희극과 비극은 경쟁이라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는 데 경쟁은 언제나 놀이인 것이다. 비극과 희극은 모두 놀이에서 유래되었다. 아테네의 희극은 디오니소스 신의 축제에서 벌어진 방탕한 축제행렬에서 나온 것이다. 후기에 들어와서야 희극은 문화적 행위가 되었다. 비극도 무대에서 공연하기 위한 문학작품이라기보다는 원래 신성한 연극 혹은 극화된 의례였다. 하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 신화의 주제를 실연하는 것은 정기적인 공연으로 바뀌었고, 그에 따라 무언극과 대화, 줄거리가 있는 일련의 이야기로 재구성되었다.

    고대사회에서 발견되는 사회적 놀이의 두 가지 중요한 요인이 소피스트에게도 존재하는 데, 곧 명예로운 자기선전과(자신의 지식과 기술의 신비로움을 드러냄) 논쟁(공개적인 경쟁에서 라이벌을 물리침)을 하려는 열망이다. 소피스트(궤변, 과시, 전시)의 직업(자신의 논설에 대금을 청구)은 운동선수와 동등한 대우를 받았다. 그들은 유목민이며 따라서 방랑과 寄生기생은 그의 타고난 권리이다. 이 소피스트들이 고대 그리스의 교육과 문화적 사상의 터전을 닦아 놓았다. 학교라는 단어는 원래 여가라는 의미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문명이 젊은이들의 자유시간을 점점 더 제한하고 일상생활에 전념하도록 유도함으로써, 이제 학교는 체계적인 작업과 훈련이라는, 원래의 뜻(여가)과 정반대의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궤변은 수수께끼와도 가깝다. 그것은 또한 검투사의 재주이기도 하다.

    중세에는 이성이나 말의 힘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것은(아곤-결투, 경쟁적 경기, 아곤적-논쟁적) 무기를 전문적으로 사용하는 것에 필적한 만한 스포츠였다. 수사학, 전쟁, 놀이의 혼합은 또한 이슬람교 신학자들의 학문적 경쟁에서도 발견된다. 중세대학의 모든 기능은 충분히 아곤적이고 놀이적이었다.

    18세기에는 진지한 혹은 오락적인 필전(펜을 가지고 벌이는 싸움)을 하기에 아주 적합한 시대였다. 음악, 가발, 경박한 합리주의와 더불어 로코코 양식의 우아함과 살롱의 매력이 넘쳐나던 시대였다.

    놀이는 시의 본능 같은 것이며 모든 형태의 시적표현이 놀이의 구조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또한 악기 다루기가 놀이하기로 표현된다. , 음악, 놀이는 리듬과 하모니를 공통 요소로 취한다. 하지만 시에서는 일부 시어의 의미가 시를 순수한 놀이 밖으로 나오게 하여 관념화와 판단의 영역으로 들어서게 하는 반면 음악은 그 비구상성 때문에 처음부터 끝까지 놀이 영역을 벗어나는 법이 없다. 시가 고대 문화에서 그토록 중요한 의례적, 사회적 기능을 발휘했던 이유는 음악적 낭송과 밀접한 관계였기 때문이다. 모든 진정한 의례는 노래 부르고, 춤 추고, 놀이하기를 동시 다발적으로 수행했다. 현대인들은 의례와 신성한 놀이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렸다. 하지만 음악적 감성은 여전히 그런 감각을 되살려 준다. 음악의 분위기를 타는 순간 의례를 느끼게 된다. 그것이 종교적인 개념을 표현하는 것이든 아니든 아름다움의 감각과 성스러움에 대한 느낌이 하나로 합쳐지고 놀이와 진지함의 구분이 사라져서 하나로 융합된다. 모든 음악적 행동의 본질이 놀이이다. 모든 음악적인 것에서 놀이의 영역을 발견한다면 음악의 쌍둥이 자매인 춤(공연, 전시, 윤무, 코랄, 피겨댄스, 무용)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무용은 항상 모든 시기, 모든 사람들에게 순수한 놀이였으며 존재하는 놀이 형태들 중에서 가장 순수하고 가장 완벽한 것이다. 춤이 그 안에 놀이의 어떤 특질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고, 춤이 놀이의 필수적인 한 부분이다. 놀이와 춤의 관계는 직접적인 참여의 관계이며, 거의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춤은 놀이하기의 구체적이면서도 완벽한 형태이다. 그러나 음악가의 사회적 위치는 굉장히 낮았다.

    조형예술 작품은 생생하게 살아나기 위해 공적인 행위를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놀이 요소가 개입할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가시적인 행동이 없는 곳에서는 놀이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조형예술에서는 물질과 물질적 형태의 제약에 묶여 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자유로운 놀이가 어렵고 음악과 시처럼 천상의 공간으로 날아가는 것도 하기 어렵다. 이런 점에서 춤은 다소 절충적인 위치에 있다. 춤은 음악적인 동시에 조형적인 까닭이다. 리듬과 움직임이 주요 요소라는 점에서는 음악적인가 하면, 물질에 묶여 있을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는 조형적이다. 춤의 실행은 제한적으로 움직이는 인간의 신체에 의존하고 그 아름다움은 움직이는 신체 그 자체의 아름다움이다. 춤은 조각과 마찬가지로 조형적 창조이지만 어느 한 순간의 창조이다. 춤을 수반하는 필수적 조건인 음악과 마찬가지로 춤은 반복 능력을 통해 생명을 얻는다. 건축가, 조각가, 화가, 제도공, 도예가, 장식예술가들은 일반적으로 근면한 작업을 통해서 물질에 어떤 미학적인 충동을 부여하고 그것을 고정시킨다. 그들의 작품은 지속성을 가지고 있고 그 어느 때든 관중에 의해서 관람될 수 있다. 그들은 특별한 공연에 의존하지 않는다. 일단 그 작품이 완성되면, 말이 없고 움직일 수 없더라도 그것을 보아주는 관중이 있는 한 그 효과는 계속 생산된다. 조형예술에서 이런 손재주, 근면함, 끈질김의 특질이 놀이 요소를 막고 있다는 점 이외에 실용적인 목적이 그런 비놀이적 측면을 더욱 강화한다. 그러나 조형예술에서 놀이 요소의 자취를 찾는 것은 어느 정도 가능하다. 고대문화에서 조형예술 작품은 주로 의례에서 신성한 중요성을 가진 물체로서 인식되고 기능을 발휘했다. 아름답게 장식된 건물들, 동상들, 의복들, 무기들은 모두 종교적인 세계에 속하기도 했다. 그런 물체들은 마법적인 힘을 지녔으며, 굉장히 자주 신비적인 존재를 대표했기 때문에 상징적인 가치를 지녔다. 의례와 놀이는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므로, 조형예술 작품의 제작과 감상에서 의례의 놀이 특질을 자연스럽게 찾아낼 수 있다. 또한 사물을 장식하려는 본능적이고 자발적인 욕구는 부정할 수 없다. 조형적 욕구는 세 가지 방향으로 움직이는 데 장식, 건설, 모방이 그것이다. 많은 문화 분야에서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는 아곤적 충동은 예술에서도 강력하게 작용한다. 무언가 어려운, 겉보기에 불가능한 예술적 기술의 재주로 라이벌에게 도전하고 싶은 욕구는 문명의 기원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다. 그리하여 지식, , 용기의 분야에서는 다양한 경쟁이 벌어졌다. 따라서 조형적 기술의 걸작이나 대표작을 제작하기 위한 경쟁이 건축을 촉진시켰다. 이것은 성스러운 수수께끼 시합이 철학을 발전시키고, 노래와 시 짓기 시합이 시의 발전을 가져온 것과 동일한 이치인 것이다. 많은 세월 동안 예술(기술)이라는 단어는 단지 창조적인 것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인간 손재주를 포함했다. 따라서 정신과 손으로 만들어 낸 모든 가치 있는 걸작은 그 어떤 역작이든 예술로 분류할 수 있으며 그것들 모두에게 놀이 요소를 찾아볼 수 있다. 경쟁적인 기술은 신화와 전설에서 영원히 순환하는 주제였으며 또한 실제의 예술과 기술의 발전에서도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결국 시험이나 공개적 논쟁 등은 어떤 재주나 솜씨를 겨루는 과거의 경쟁 형태에서 온 것이다. 경쟁의 조합에 가입하려는 장인은 걸작을 내놓아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야 되었다. 전 세계에서 벌어진 경쟁의 오래된 역사를 모르는 사람들은 실용성과 효율성이 그런 경쟁적 예술의 형태를 오늘날까지 지속시켰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런 실용적인(, 장학금...) 목적들 뒤에는 항상 그런 경쟁에 수반되는 원초적 놀이의 기능이 숨어 있다. 두 세기 전에 피렌체는 그 자체의 유명한 탑의 숲을 과시했는데 각기의 탑은 어떤 귀족 가문의 자존심에서 비롯되었거나, 아니면 다른 가문에 도전하려는 욕구에서 만들어졌다. 예술과 전쟁을 연구하는 역사가들은 이런 피렌체의 탑들을 진지한 방어의 목적이라기보다 허세를 위한 탑으로 간주한다. 그리하여 이 중세도시는 그 무수한 망루 탑을 통하여 그들의 놀이 개념을 장엄하게 과시하고 있다. 놀이의 경쟁 정신은 사회적 충동이라는 측면에서 문화 그 자체보다 더 오래된 것이며, 실질적인 효소가 되어 삶의 모든 측면에 배어들었다. 의례는 성스러운 놀이에서 성장했고 시는 놀이에서 태어났고 길러졌다. 음악과 춤은 순수한 놀이이다. 지혜와 철학은 종교적 경기에서 유래한 말과 형태로 표현된다. 전쟁의 규칙, 고상한 삶의 관례는 놀이 양식 위에서 세워졌다. 따라서 문명은 초기단계에서 놀이 중심으로 이루어졌다고 결론내릴 수 있다. 문명은 놀이의 정신 속에서 놀이의 양태로 생겨나며 결코 놀이를 떠나지 않는다.

    풍요, 화합, 경건, 평화, 덕 등과 같은 형태들은 고도로 발전된 사회적 사고 방식에서 나온 결과물이 아니다. 신적인 힘들과의 거래를 통해 이익을 보호하고 추구하려는 원시적 공동체의 조잡하고 유물론적인 이상들일 뿐이다. 따라서 이런 종교적 위안의 체계에선 수많은 축제들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런 의례들이 항상 로마인들에게 루디(놀이들)라고 불린 것은 우연이 아니다. 로마의 의례화는 고대의 개념들을 가져와 거기다가 새롭게 멋진 의상을 입힌 것이었다. 성스러운 것과 세속적인 것이 로마의 장식 예술에서는 완전하게 하나로 융합된다. 로마의 놀이 요소는 (경기)과 서커스(원형경기장)놀이라는 구호에서 가장 명확하게 표현된다. 스페인 문화의 투우(코리다)는 로마 루디의 직접적인 후계자이다. 물론 그 중간에 중세의 토너먼트라는 경유 과정이 있었지만, 그래도 투우는 고대 검투사의 결투와 더 가족적인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로마의 문학과 예술에서도 놀이 요소는 굉장히 명확하게 나타난다. 과장된 찬사와 공허한 수사는 로마 문학의 특징이며 천박한 내부 구조를 겨우 가린 표면장식, 알맹이 없는 풍속화로 희롱하거나 혹은 축 늘어진 우아함으로 타락한 벽화가 예술을 지배했다. 이런 특징들은 고대 로마의 위대한 전기문화에 천박함을 추가시키는 후기 로마의 특징이다.

    중세의 삶은 놀이가 넘치도록 가득했다. 사람들의 놀이는 기쁨에 차고 자유로웠으며, 신성한 의미를 배제하고 익살로 변해버린 이교도적인 요소로 가득했다. 또한 장엄함을 과시하는 기사도의 놀이, 궁정연애의 정교한 놀이, 법과 재판의 상징, 규정된 몸짓, 상투적인 문구 등이 있었다. 기사의 입문과 작위 수여, 종신 영지 수여, 마상시합, 문장, 기사도 규칙, 맹세 등 이 모든 것들은 고전을 넘어 완전히 원시적인 과거로 되돌아가는 것이며 그 와중에 놀이 요소가 강렬하게 작용하여 아주 창조적인 힘을 발휘한다.

    르네상스는 고대를 모방했고 그런만큼 삶의 놀이는 신성한 진지함을 추구했다. 하지만 르네상스의 전체적인 정신적 태도는 놀이의 태도였다. 형태의 아름다움과 고귀함을 얻기 위한 정교하고도 자발적인 노력은 놀이하는 문화의 구체적 사례였다. 르네상스의 훌륭함은 이상화된 과거를 화려하고 장엄하게 가장했다는 것이다.

    바로크는 원래 건축과 조각의 특정 양식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17세기 문명의 본질을 묘사하는 여러 관념들의 커다란 복합체를 가리키게 되었다. 의례적 과장, 강요하는, 위압하는, 거대한, 명백히, 비현실적인 어떤 것 등을 연상시킨다. 바로크 형식은 하나의 예술 형태이다. 바로크 양식은 종교적인 것을 다룰 때에도 미학적인 요소를 많이 받아들였기 때문에 놀라울 정도로 놀이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다. 예술작품은 그 스스로 하나의 류를 이루는 독자적 실체인 것이다. 17세기처럼 스타일(복장, 의복, 망토, 모자, 가발)에 집착했던 시대도 없다. 17-18세기는 우스꽝스러운 가발의 시대였다. 가발은 그 자체로도 의복의 역사일 뿐만아니라 문명사의 한 챕터를 구성한다. 가발 현상이 문화 속에 들어 있는 놀이 요소의 주목할 만한 사례였다.

    18세기의 로코코 시대는 더 많은 놀이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 양식(스타일)이라는 것은 놀이와 마찬가지로 리듬, 하모니, 정규적인 변화와 반복, 강조와 가락 등에 의해 비로소 생명을 지닌다. 양식과 패션은 같은 혈족이다. 패션에서 미학적 충동은 모든 종류의 외부적 감정들, 욕구, 허영심, 자존심 같은 것들과 뒤섞인다. 로코코에서처럼 양식과 패션, 예술과 놀이가 밀접하게 뒤섞인 경우도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비밀음모단, 밀실의 음모, 정치적 의사 방해 등 18세기의 정치기술은 분명한 놀이였다. 문화적 측면에서는 야심적인 경쟁의 정신을 발견할 수 있다. 즉 클럽, 비밀단체, 문학 살롱, 예술적 그룹, 협회, 모임, 비밀집회 등과 박물연구수집과 골동품수집. 그들의 놀이에의 몰두와 약진은 그들을 문화에 기여하는 존재로 만들었다. 로코코는 우아한 복잡함과 풍성함으로 말할 수 있으며, 로코코처럼 놀이와 진지함이 우아한 균형을 이룬 예술의 시대는 찾아보기 어려우며 조형예술과 음악예술이 그렇게 아름답게 조화된 시대도 드물다. 또한 18세기 음악의 가장 큰 의미는 놀이 내용과 미학적 내용 사이에 완벽한 균형을 이뤘다. 순수하게 청각적 현상인 음악은 다양한 방식으로 세련되어졌고(악기발명, 기악의 예술성) 풍부해졌다. 하지만 음악은 주로 예배나 축제적 목적을 위해 주문받아 작곡되었으므로 오늘날 같은 명성을 누리지는 못했다. 음악은 실용적 목적에 이바지하지 않으면서도 즐거움, 기분전환, 정신의 고양을 가져온다. 치열한 연습의 필요성, 허용되는 것과 되지 않는 것을 규정하는 규범, 아름다움의 효과를 얻기 위한 엄격한 음악적 요구 사항, 이 모든 것들이 놀이 특질의 전형이다.(음악의 내부적 다양성-통일된 청각 원칙은 없다.) 다른 어떤 예술보다도 더 엄격하게 법칙(시간, 음조, 멜로디, 하모니 등의 관습적인 규칙)을 만드는 것이 음악의 놀이 특질이다. 이러한 규칙을 위반하면 그것은 더 이상 음악도 놀이도 아니다.

    로코코 직후의 시대에는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시대(18세기 중반)로 음침하고 우울한 인물들, 뚫고 들어갈 수 없는 우울함, 슬픈 진지함 따위를 연상시켜 놀이의 특질이 없는 듯하지만, 신고전주의는 고대의 사상에서 당대에 필요한 아이디어를 가져왔다. 신고전주의는 18세기의 가볍고 쾌활한 특성을 물려 받았다. 그 뒤 바로 이은 낭만주의는 모든 정서적, 미학적 삶을 이상화한 과거로 회귀시키려는 경향을 갖고 있는데, 그 과거는 모든 것이 흐릿하고, 구조가 없으며 신비와 공포로 가득찬 그런 시대였다. 생각이 뛰어놀 수 있는 이상적 공간을 만들자는 낭만적 계획은 그 자체가 하나의 놀이 과정이다.(고딕주의, 감상주의-사랑과 결혼, 25년 동안 횡행했다.)

    19세기(빅토리아시대)는 산업혁명으로(작업복) 노동과 생산이 시대의 이상이자 우상이 되어 놀이의 공간이 별로 없어 보인다. 사회적 의식(마르크시즘, 합리주의, 공리주의, 자유주의, 사회주의...), 교육적 열망, 과학적 판단이 문명의 지배요소가 되었다. 19세기의 실험과 분석과학, 철학, 개혁주의, 교회와 국가, 경제학 등 모든 것은 오로지 진지함만을 추구했다. 심지어 예술과 문학도 놀이를 포기하려 했다. 그리하여 사실주의, 자연주의, 인상주의, 등이 그 이전의 사상들과 다르게 놀이 정신을 배척했다. 예전 시대에는 픽션이 삶의 더 높은 이상적 형태를 제공했는데, 더 이상 겉으로 드러난 형태는 픽션의 외양을 꾸미지 않았다. 특히 의복에서 나타났다. 프랑스 혁명 이후 남성복에서 상상적이고 공상적이며 위엄과 화려한 맵시적인 요소가 모두 사라졌다. 오직 스포츠 복장과 야회복에만 과거의 위엄이 희미하게 남았다. 신사들은 더 이상 영웅, 전사 혹은 귀족의 역할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성복은 크게 변하지 않다가 20세기가 돼서야 단순함과 자연스러움 쪽으로 변했다. 놀이적 경쟁은 현대스포츠(기술, , 지구력, 속도, 공놀이-20세기 조직된 클럽, 대회의 시스템, 전문화, 프로화)로 굳어지게 되었으나 스포츠가 조직화, 제도화되면서 순수한 놀이 특질은 점점 사라졌다. 프로에게는 자발성과 무사무욕의 정신이 없어 순수한 놀이 정신이 될 수 없다. 프로는 점점 더 스포츠를 놀이의 영역으로부터 멀리 밀어냈고 그리하여 스포츠는 그 자체로 특별한 종이 되었다. 고대문화에서 발견되는 위대한 경쟁들은 언제나 신성한 축제의 일부였고 전체 부족의 건강과 복지에 필수적인 것이었다. 이런 의례적 유대는 이제 완전히 단절되었다. 올림픽, 월드컵, 미국대학들의 조직적인 운동대회, 관 주도의 스포츠 행사들, 국제대회 등은 스포츠를 문화 창조의 행위로부터 멀어지게 했다. 진정한 놀이가 되려면 어른이 동심으로 돌아가 놀이하는 그런 게임이 되어야 한다. 브리지(카드, 반상게임, 체스, 체커놀이, 주사위, 핼마) 게임에서 놀이 정신의 미덕은 사라진 것이다. 스포츠와 체육은 놀이가 진지함으로 굳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놀이의 상태를 유지한다. 그것은 당초 물질적 이득을 추구하여 놀이와 무관해 보이는 행위들이 앞으로 발전하면서 2차적 특징으로 놀이의 형태를 취하는 경우이다. 그리고 상거래는 놀이가 되었으면서도 여전히 진지함을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두 가지 현상은 강력한 아곤적 습관에 의하여 연결되어 있다. 놀이를 촉진시키는 아곤적 습관은 현대에 들어와 비록 형태가 달라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보편적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러한 아곤적 원칙의 부활은 문화 그 자체와는 상관없는 외부적 요소에서 유래한다. 모든 종류의 소통을 원활하게 해주는 커뮤니케이션 기술이 발달하면서 그런 경쟁 원칙이 생겨났다. 테크놀리지, 광고, 프로파간다 등은 전 세계에서 경쟁심을 촉진시키고 전대미문의 스케일로 그것을 만족시키는 수단을 제공했다. 물론 상업적 경쟁은 태고적의 신성한 놀이 형태에 속하지는 않는다. 무역업이 활발해지면서 각자 상대방보다 더 뛰어나려고 애쓰는 활동 분야가 생겨났다. 상업적 경쟁은 곧 규칙을 제정했고, 현대적 통신수단, 프라파간다, 통계 자료가 발달하면서 더욱 치열해졌다. 또한 무역과 생산의 통계자료는 경제 생활에 스포츠의 요소를 도입시켰다. 최고의 매출액, 최고의 선적량, 가장 빠른 항해 속도, 가장 높은 비행 고도 등. 이러한 경향 때문에 좀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나 놀이가 기업이 되었다.(소규모화, 경쟁심리, 사원들의 전문화, 특수화...)

    현대예술의 놀이 요소를 찾아내는 것은 현대 상거래의 경우보다 복잡하다. 예술은 여러 세기에 걸친 점진적 과정에 의하여 탈기능화해 왔고 점점 더 예술가 개인의 자유롭고 독립된 정신에 의존하게 되었다. 그것은 패널과 벽화 대신에 캔버스로 대체되었다. 마찬가지로 판화도 세밀화와 채색화를 누르고 득세하게 되었다. 이처럼 사회로부터 개인 쪽으로 방향 전환을 한 유사한 사례는 르네상스 시대에서도 발견된다. 그 당시 건축은 더 이상 교회나 왕궁을 짓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저택을 짓는 일에 집중했다. 화려한 갤러리가 아니라 개인의 거실과 침실을 지었던 것이다. 예술은 보다 친밀해졌으나 동시에 더 격리되었다. 그것은 개인의 문제 혹은 취향이 되었다. 음악에서도 일반 대중을 상대로 하는 곡보다는 개인의 미적 감각을 만족시키는 실내악이나 성악곡이 더 중요해지고 더 표현력이 풍부해졌다. 이런 예술 형태의 변화와 함께 더 중요한 기능과 평가의 변화가 따라왔다. 예술은 점점 더 독립적이면서도 중요한 가치로 인정받게 되었다. 18세기 초반에만 해도 예술은 가치의 스케일에서 종속적인 위치에 있었다. 예술은 특권층 사람들이 즐기는 장식품 정도였다. 미적 감수성은 지금 못지않게 높았으나 종교적 환희의 측면이나 오락과 유희의 관점에서 해석되었다. 예술가는 여러 면에서 손으로 작업하는 장인이었던 반면, 과학자와 학자는 유한계급의 지위를 갖고 있었다. 18세기 중반에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가 새로운 미적 충동을 제공함에 따라 일대 방향 전환이 이루어졌다. 곧 낭만주의가 대세로 굳어졌다. 이 두 사조는 전에 없이 미적 감수성을 끌어올렸고 그 열렬한 열기는 종교를 대체할 기세였다. 그렇지만 예술을 숭배하고 감식하는 태도는 오로지 소수의 특권으로 남았다. 19세기 말에 이르러 사진 기술에 힘입어 예술 감상의 기회가 덜 교육받은 일반 대중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예술은 공공의 재산이 되었고 예술을 사랑하는 태도는 교양 있는 좋은 태도가 되었다. 예술가가 우월한 존재라는 사상이 힘을 얻었고 일반 대중은 스노비즘(대중이 귀족인 체하는 경향)의 세례를 받았다. 동시에 독창성에 대한 동경이 창조적 충동을 왜곡시켰다. 새롭고 기이한 것에 대한 동경이 예술을 인상주의의 등성이로 밀어넣어 과장과 군더더기를 선호하게 만들었다. 과학에 비해 예술은 현대 생산 기술의 유해한 영향력 앞에 더 많이 노출되었다. 기계화, 광고, 화제 만들기 등이 예술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예술은 시장의 동향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고 온갖 테크닉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8세기 이래 예술은 하나의 문화 요소로 인정받았는데, 그로 인해 놀이 정신을 얻었다기보다 잃어왔다고 볼 수 있다. 예술이 자기를 의식하게 되면, 즉 그 우아함(목적, 아름다움)을 의식하게 되면 어린아이와 같은 순진성을 잃어버리게 된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볼 때, 예술가가 일반인들의 일상 생활로부터 훌쩍 벗어나 있다는 점에서 예술의 놀이 요소가 더 강화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자신의 우월성을 충분히 느끼기 위해 예술가는 그를 존경하는 대중 혹은 소수의 추종자 세력을 필요로 한다. 소수의 추종자는 공허한 칭찬을 남발하는 일반 대중보다는 더 세련되게 그들의 존경심을 표시할 것이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오늘날에도 예술은 秘敎主義비교주의를 필요로 한다. 비교주의의 신도들은 그들만의 신비에 빠져들 수 있는 놀이 공동체를 필요로 한다. 무슨 무슨 주의(-ism)로 끝나는 말 뒤에는 곧이어 놀이 공동체가 따라 나온다. 과장된 예술 비판, 전시회, 강연회 등 현대의 홍보 장치들은 예술의 놀이 특성을 고양시키기 위한 것이다.

    현대 과학의 놀이 내용을 결정하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근본적으로 다른 대상을 상대해야 하기 때문이다. 예술의 경우 우리는 놀이를 일차적 체험 혹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이는 개념으로 여겼다. 하지만 과학의 경우 그런 체험과 개념을 근본적으로 새롭게 정의해야 한다. 과학에 놀이의 정의(고정된 규칙에 따라 특정한 시간, 공간, 의미에 따라 발생하는 행위)를 적용한다면, 과학과 기타 학문 분야가 모두 놀이의 형태라는 놀라우면서도 황당한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각 학문은 자신의 고유한 영역이 있고 엄격한 방법론의 규칙에 구속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놀이의 제약, 규칙, 시공간의 제약, 비현실적, 긴장과 즐거움 등, 이런 것들은 과학에 적용되지 않는다. 과학은 그 유용성을 확보하기 위해 끊임없이 현실과 접촉해야 한다. 또 현실에 응용될 수 있어야 한다. 순수 과학으로 인정받으려면 보편타당한 현실의 패턴을 수립해야 한다. 과학의 규칙은 놀이의 규칙과는 다르게 언제나 도전을 받는다. 그 규칙은 실험과 체험에 의해 끊임없이 수정되는 반면 게임의 규칙은 변경되지 않으며 그것을 바꾸면 게임의 흥을 깨트리고 만다. 그런데 과학이 그 특유의 방법론 내에서 놀이에 빠져들 수도 있다. 가령 어떤 시스템을 수립하려는 과학자들의 지속적인 경향은 놀이의 방향을 가리킨다. 고대의 과학은 경험의 바탕이 부족했기 때문에 각종 개념과 속성의 체계화에 쓸데없이 매달렸다. 이 경우 관찰과 계측이 견제의 역할을 했지만, 어느 정도의 변덕이 끼어드는 것은 막지 못했다. 심지어 가장 미묘한 실험 분석도 사전 정립된 이론에 봉사하기 위하여 놀이되는 경우가 있었다. 이런 발견 자체는 놀이의 존재를 입증하는 것이다. 과거의 법률학자들도 이와 유사한 행동을 했다고 비난받았다. 문헌학자들도 이런 점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하다. 가령 구약성경과 베다의 시대 이래 그들은 위태로운 어원 놀이에 빠졌고, 심지어 오늘날에도 지식보다 호기심이 강한 사람들은 그런 위태로운 놀이를 하고 있다. 게다가 오늘날의 심리학자들 또한 프로이드의 용어를 너무나 확신하는 나머지 아주 손쉽게 사용하고 있다. 과학자나 아마추어들이 그들의 방법론을 가지고 씨름하는 문제 이외에도, 그들은 경쟁적 충동 때문에 놀이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과학의 경쟁은 예술처럼 경제적 요인으로부터 직접 영향을 받지는 않지만, 한결 엄격하게 변증법의 영향을 받는다. 과학은 논쟁적이다. 하지만 과학적 발견의 길에서 다른 사람을 방해하거나 파괴하려는 욕망이 너무 분명하게 드러난다면 그것은 불길한 징조이다. 진정한 탐구자는 라이벌에게 이기는 문제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현대 과학이 정확성과 진실성의 엄격한 요구를 준수하는 한 놀이의 영역으로 떨어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 하지만 고대로부터 시작하여 르네상스에 이르기까지 과학적 사상과 방법은 의심할 바 없이 놀이 특성을 드러냈었다.

    현대 정치에서 놀이에 관한 오해를 언급하자면, 우선 어떤 놀이 형태는 사회적 혹은 정치적 의도를 위장하기 위해 의식, 무의식적으로 사용되고 있다.(거짓된 놀이) 다음으로는 피상적으로 사태를 관찰하는 사람에게는 어떤 놀이가 항구적인 놀이 경향을 갖고 있는 현상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전혀 놀이가 아닌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현대의 사회생활은 점점 더 놀이와 비슷하여 놀이 요소인 것처럼 보이는 현상에 지배되고 있다. (유치한, 야만적인 놀이) 전에는 의젓한 어른들의 영역이었던 문명 생활의 상당 부분에서 청소년 같은 심리와 행동이 판을 치고 있다. 그러한 것들 중에서 群居性군거성은 가장 강력하면서도 위험스럽고, 저급하고, 유치한 것이다. 소리를 지르거나 요란하게 인사를 하고 휘장을 달고 다니고 각종 정치적 복장을 구사한다. 행진하는 방식으로 걸어다니고 우스꽝스러운 집단적 행위를 한다. 또한 깊은 심리적 차원에서 사소한 오락과 투박한 선정주의에 대한 갈망, 집단 대회, 집단 시위, 행진 등에 대한 열광을 들 수 있다. 클럽은 오래된 제도이지만 온 나라가 클럽화하면 문제가 된다. 클럽이 우정과 유대 관계를 촉진시키는 점이 있기는 하지만, 당파주의, 불관용, 의심, 거만함, 자기애와 집단 의식에 아첨하는 환상 등의 온상이 되어버린다. 우리는 위대한 나라들의 명예, 유머, 예절, 페어플레이의 정신을 송두리째 잃어버리는 것을 보아 왔다. 무식한 대중이 국제적 정신 교류에 가담하게 된 것, 도덕이 위축된 것, 테크닉이 과도한 수준으로 비대해진 것 등이 커다란 원인이다. 에를 들면 어떤 정부가 혁명적 열기에 휩싸이게 되면 존경할 만한 도시, 사람, 기관, 캘린더의 이름을 바꿔치우는 경향이 있다. 놀이의 진정한 정신은 고대사회에서 문화를 창조하던 힘이다. 하지만 보이스카웃 정신이 왜곡된 형태로 정치에 스며들면서 유치한 놀이가 된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놀이가 되려면 의례, 스타일, 위엄 등이 혼연일체가 되었던 레크레이션의 고대적 형태를 획득해야 한다. 영국에서는 정치적 제도를 밑받침하고 있는 인간 관계의 유연성 덕분에 정치제도는 놀이를 할 수 있다. 놀이가 없었더라면 참을 수 없거나 위험스러웠을 긴장을 나름대로 이완시키는 것이다. 사실 유머의 결핍이야말로 지독히 나쁜 결과를 가져온다. 이런 놀이 요소가 각종 선거 제도에 들어 있어서 순기능을 하고 있다. 그것은 미국의 양당 정치에서도 아주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런 제도가 확립되기 훨씬 오래 전부터 선거 활동이 일종의 국민적 스포츠로 발달되어 있었다.(1840년 대통령 선거와, 링컨) 그러나 영국이나 미국이나 현대의 정치는 순박함이나 자발성보다는 난폭함, 강제동원, 기타 나쁜 사례들이 판을 치고 있다. 그리고 국제정치가 폭력과 예측불가능으로 얼룩지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놀이의 가능성이 완전 배제된 것은 아니다. 법을 지키는 공동체나 국가들의 공동체는 이런저런 방식으로 놀이 공동체와 연계를 맺는다. 국제법은 특정한 원칙의 상호 인정에 의하여 유지되는 데, 그 원칙이 형이상학적 바탕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놀이 규칙과 비슷하게 운영된다. 놀이 규칙의 준수는 국가 간 관계에서 특히 엄정하게 단속되어야 한다. 그런 관계가 붕괴하면 사회는 야만과 혼란 속으로 추락하게 된다. 위신과 영광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현대적 전쟁은 고대 전쟁의 아곤적 태도를 회복해야 한다. 그러나 현대의 전쟁은 놀이와의 연계를 모두 잃어버렸다. 그들은 국제법 체계 속에 깃든 놀이 규칙을 파괴한다. 현대 정치는 전쟁을 대비하면서 진행되는 만큼 예전의 놀이 태도의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명예의 코드는 무시되고 게임의 규칙은 방치되고 국제법은 위반되며, 예전에 전쟁이 의례 및 종교와 맺었던 관계는 사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 정책이 수립되고 전쟁이 준비되는 방식에는 원시사회에서 발견되는 아곤적 태도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정치는 과거에서 지금까지 늘 행운의 게임 같은 요소가 있었다. 온갖 도전, 도발, 위협, 비난 등을 생각해보면 전쟁과 전쟁을 유도하는 정책들이 일종의 도박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겉보기에는 전혀 그렇지 않지만, 전쟁은 아직도 놀이의 마법적 원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되지는 못했다. 전쟁을 진지하게 만드는 것은 그 행위의 도덕적 내용이다. 전투가 윤리적 가치를 지니게 되면 그것은 더 이상 놀이가 아니다. 정치와 경제는 경기로서 놀이되는 원시적 문화 토양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결론-진정한 문명은 특정 놀이 요소가 없는 곳에서는 존재할 수 없다. 왜냐하면 문명은 자아의 제약과 통제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문명은 일정한 규칙에 의거하여 놀이되는 것이며, 진정한 문명은 언제나 페어플레이를 요구한다. 페어플레이는 놀이의 관점으로 표현된 信義신의 성실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속이거나 놀이 정신을 망치는 행위는 문명 그 자체를 동요시킨다. 진정한 문화 창조의 힘이 되기 위해서 이 놀이 요소는 순수해야 한다. 이성, 믿음, 인간성 등에 의해 설정된 기준을 훼손하거나 타락시켜서는 안 된다. 그럴 듯한 놀이 형태를 앞에 내세우면서 실은 그 뒤에 숨어 있는 정치적 의도를 위장하는 가짜 놀이가 되어서는 안 된다. 진정한 놀이는 프로파간다를 모른다. 놀이 자체가 그 목적이며 놀이 정신은 행복한 영감의 원천이 된다. 그렇다면 올바른 생활방법은, 인생은 놀이처럼 영위되어야 한다. 일정한 게임들을 놀이하고, 희생을 바치고, 노래하고 춤춰야 한다. 이렇게 하면 인간은 신들을 기쁘게 할 것이고, 적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것이며, 경기에서 승리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하여 인간은 자연을 따라 살아갈 것이다. 논리적 사고 방식은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 고상한 정신과 장엄한 업적을 모두 살펴보아도, 진지한 판단의 밑바닥에는 여전히 문제적인 어떤 것이 남아 있다. 우리는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우리의 언명이 절대적으로 확정적인 것은 아님을 깨닫는다. 우리의 판단이 이처럼 동요할 때, 이 세상은 진지한 어떤 것이라는 믿음 또한 동요한다.

     

    경상도 어느 소도시의 장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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