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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영상, 미학론 54 (교재 공개)
    패러다임/예술 2021. 4. 8. 0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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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생각하기 이해하기 실천하기-

     

    영상, 미학론 54

     

    406. 건축은 번역이 필요 없는 언어를 사용한다. 그 표현은 보편적이고, 어느나라에서든 뜻밖의 억양들을 지녀 건축에 서로 다른 색조를 부여한다. 건축은 바벨탑 사건 이전의 언어, 민족들이 통역사 없이 서로의 대화를 이해했던 시대의 생존자이다. 건축의 낱말들은 모든 것을 설명하진 않지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부분을 간직하고 있는 이미지들을 소환한다. 건축 도면은 형상이자 텍스트인 일종의 서예작품이다. 스케치는 대상을 생각해내면서 동시에 설명한다. 건축은 무엇이든 일어날 수 있는 가설들을 탐구하는 끝없는 상상이다. 공간들 사이를 조직하는 것은 단지 그것들에게서 기능적 논리를 찾아내는 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드라마가 전개될지 코미디가 전개될지를 모른 채 무대배경을 설치하는 것이다. 계획은 각 세부사항이 독자적 중요성을 갖는 복합적 줄거리이다. 조역들을 잘 돌봐야 하되, 주역들에게도 실수하지 말아야 한다. 도서관은 시간을 비춘다. 그것은 변화하는 자신의 그림자들을 평화스럽게 조형하는 햇빛의 틀과 같다. 낮의 밝은 빛은 거기서 태양의 느린 리듬으로 눈에 띄게 변화한다. 책의 시간은 번민하는 시간이며 독서의 느린 진척은 기분 좋은 고문이다. 빛은 시간의 평온한 움직임을 묘사하고 우리로 하여금 현실의 시간에서 상상의 느릿한 운동을 향해 이끄는 독서로 표류하는 순간을 감내하게 한다. 가구는 건축을 모방한다. 책은 작은 크기에도 불구하고, 그 모양의 수직적인 비율과 그 속에 담긴 진리에 대한 동경으로 인해 높이를 확대하고 공간을 확장한다. 책은 몸과 건물 사이의 매개물로서 건축과 함께 정신적 양식의 연속성을 보장한다. 어떻게 보면 책이 책꽂이를 받치는 것처럼 보인다. 책은 책장을 이루는 으뜸가는 재료이고, 그 위에 건물 전체가 놓이는 벽돌이다. 책은 살아 있다. 그것은 나무의 최종 열매이다. 책을 받치는 선반과 책이 놓이는 탁자와 같이 책은 목재로 만들어진다. 종이는 연하고 따듯한 재료로 만들어지며 생기 있는 피부처럼 부드럽다. 책은 인간과 자연 사이에 있으며 건축의 은유이다. 눈이 형을 포착할 때, 스케치는 비워진 세계를 묘사한다. 투시도는 손과 눈 사이의 위계를 바꾼다. 그것은 상황을 역전시켜 보지 못하는 손가락의 표면적 장애를 극복하게 하며 생각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한다. 공간은 이미 지면의 평평함 위에 각인되어 존재한다. 그 결과로 입체로 보는 것은 더 이상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는 깊이감을 전혀 잃지 않고 한 눈으로도 투시도를 볼 수 있다. 이처럼 투시도는 눈에 대한 손의 설욕이다. 그리고 몸짓으로부터 남는 것은 잉크나 연필가루보다 행위하는 그 순간의 초조나 평안, 또는 분노이다. 스케치는 공간 안에 납작하게 눌려진 시간의 感光面감광면이다. 깊이는 서두르지 않으며 전적으로 신중하다. 깊이는 사라짐과 은폐에 의하여 생성된다. 이것은 점진적인 탐험과 같다. 실제로 깊이는 경로와 연계되어 있다. 우리는 걸을 때, 시선은 발견하고 해체하며 지워버린다. 그래서 깊이는 시간에 관한 문제이다.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가운데 건축은 초상화, 정물화, 풍경화가 된다. 건축가의 손은 건물의 첫 번째 거주자가 되며, 바로 그 손이 내부를 들여다 본다. 어떤 면에서 손은 사유의 관객이다. 눈과 손은 동일한 각도로 공간을 보지 않는다. 그들의 관계는 시차의 오류처럼 어긋나 있고, 이 시점의 차이는 불안정한 지형도를 만들어낸다. 또한 이 어긋남은 가상의 입체감을 생성시킨다. 항상 짝을 지어 행동하는 눈과는 달리 그림을 그릴 때의 연필은 혼자이다. 그것은 지면 위를 미끄러지듯 가기 위해 발레리나처럼 뾰족한 끝점을 의지하여 서 있다. 손은 생각의 노예가 아니라, 일종의 자율성을 획득한다. 손은 자신에게 요구되는 것과는 다른 것을 자주 행하곤 한다. 감춰진 곳들을 탐험할 수 있게 한다는 것과 새로운 길들과 예기치 않았던 견해들을 발견하게 한다는 측면에서 손의 방황은 유용하다. 몸은 손을 예민하게 하여 해방되게 함으로써 벅찬 감동들이 마치 넘치는 우유처럼 그 손으로부터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게 한다. 스케치는 이미 생각 속에 구축된 상을 그리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구현하기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는데 도움을 주는 거울이다. 스케치는 사색의 반영으로 눈이 생각하는 것을 쓴다. 생각은 기억 속에 맴도는 꿈과 같다. 생각은 지성이 아니다. 계획은 지성이 조금 목소리를 낮춰주길 원한다. 지성은 대상을 한 부분으로만, 즉 대상의 단편적 특성만을 파악할 뿐이다. 스케치는 우리에게 잠깐 동안이나마 유예기간을 주며 시간을 연장할 기회를 기다린다. 스케치는 생각 속 이미지들이 사라지기 전에 부여잡는 기록과 같다. 그것은 정신을 늦추는 도구가 된다. 지면은 손을 억제하고 묘선은 두뇌보다 느리다. 종이는 손에 저항하고 선에게는 유용한 慣性관성을 부여한다. 연필의 마찰은 망각을 예방한다. 스케치는 선으로 그려지기 전까지는 가려져 있다. 그것은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것 너머로 담대하게 나아간다. 스케치는 점과 선들의 조합이다. 점은 두께와 차원을 갖지 않는다. 공간 속의 어떤 위치에 불과하다. 점은 비실재적이다. 그 자체도 그것의 앞뒤에도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점은 어떤 거리를 결정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며, 언제나 동일한 크기를 갖는다. 종이 위에 홀로 놓인 점은 공간 나누기를 허용하지 않는다. 그어진 선은 점과 마찬가지로 비실재적이다. 그것은 두께를 갖지 않으며, 선이란 일정한 방향으로 향하는 점의 확장이다. 그것은 차원을 달리하며 움직이는 점이다. 점이 정적인 데 반하여 선은 동적이다. 가장 짧은 거리로 근접하여 어떤 긴장감을 창출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거리를 두고 다른 한 점을 위치시켜야 한다. 점과 선의 조합은 최초의 내부를 창조한다. 점과 선으로부터 건축이 시작된다. 직선은 자연에 존재하지 않는 추상적인 선이다. 선들 중에서 가장 다루기 힘든 것이 직선이다. 직선은 어떤 의도를 나타내며, 그것을 그리기 위해서는 규준(법칙, 수단)을 세워야 한다. 직선은 무한을 상기시키는 창작물이며, 시간에 대하여 질문한다. 직선은 끝없는 기간 동안 연속된 선인가? 또는 매 순간마다 연속적으로 나란히 놓은, 즉 한 점을 옆에 다른 점들이 열을 지어 추가된 점들인가? 직선은 어디서 혹은 언제 끝나는가? 직선을 멈추게 하기 위하여 내려져야 할 결단은 시간적인 명령에 속한다. 길이를 설정하는 것, 그것은 지속되는 시간을 확정하는 것이다. 선은 대체로 면의 은유일 뿐이다. 그것은 면의 경계를 형상화하거나 면의 접힌 자리를 표시한다. 선은 면의 특성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선은 그 자체로선 존재하지 않는다. 건축에서 선은 그림자의 사직일 뿐이다. 비례는 자 없는 치수, 법 없는 윤리, 묘사될 수 없는 크기이다. 왜냐하면 비례라는 것은 측정되지 않으며 수치화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비례는 그림 속에 존재만 하고 표현되지는 않는다. 우리는 그것을 주장할 수도 없고, 그것에 대하여 설명할 수도 없다. 비례는 입찰지침서에 포함되지 않는다. 설계는 일반적으로 작업의 양과 공사비, 그리고 면적에 의해 평가된다. 법규와 프로그램 속에 부과된 규준들은 객관적인 가치들이 아니다. 그것들은 단지 불완전한 평균적 한계에만 미치는 통계들일 뿐이다. 이와 반대로, 건축의 치수는 겹쳐지지 않는 구성요소들 사이의 상호관계 속에 존재한다. 관계 자체는 치수가 아니다. 2개의 다른 크기는 그것들이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과는 다른 앙상불이다. 비례는 일정한 강도에 도달하여 음파같이 떨리기 전에는 반응하지 않는 파동과 유사하게 진동한다. 비례는 그 비가 자신의 정확한 척도에 맞을 때에만 反響반향한다. 악기를 조율하는 것처럼, 선들 사이의 긴장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비례는 공간의 전율이다. 그것은 기다림의 순간과 같은 미묘한 평형 속에서 자신의 현존을 알린다. 이것이 설계에 있어서의 주된 어려움이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부분이다. 건축가의 설계도는 기하학 도면이 아니다. 설계도는 그 자체로는 작품이 아니다. 그것은 아무 목적도 갖지 않는다. 비례는 마치 회화가 빛의 파장 내에 존재하는 것처럼 또는 음악이 소리의 진동 속에 존재하는 것처럼 차원들 간의 울림 속에 존재한다. 비례가 없다면 건축은 시끄러운 잡음에 불과하다. 이런 이유 때문에 비례는 정적인, 단지 정면에서 동결된 어떤 규칙이 아니다. 그것은 멈추지 않는 떨림 속에 존속하는 관계이다. 비례는 만족한 수준에 도달하기 위하여 규준선들과 황금비의 도움을 빌리기에 이른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위대한 작품들이 이러한 원칙들 밖으로 낯설고 탐험되지 않은 조화들을 향하여 벗어나 있는가? 비례는 반드시 마음을 진정시키는 그림을 꾸미는 이 가상의 선들 속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빈 공간을 공략한다. 비례는 그림의 여백, 그 숨결 속에 존재한다. 비례와 미를 혼동해서는 안 되며, 반대로 부자연스런 꾸밈새의 위험은 형태들의 의미 없는 매력, 외관의 감미로움 속에 숨어 있다. 비례는 우리에게 충격을 주고 우리를 숨막히게 하는 감각의 격동이다. 건축은 긴장과 정체가 교차된 혼합물이다. 풍경의 단편들이나 주변의 특이성과의 관계들을 꾸미면서 외부와 긴장감 있는 관계를 형성하고 동시에 신중한 선들은 건축에게 내적 응집력을 보장한다. 건축은 팽팽하게 당겨지며 동시에 펼쳐진다. 균형은 전체와 부분 사이, 외부를 향하여 투사된 것과 내부의 독립적인 구조에 부응하는 것 사이에서 형성된다. ‘은 디테일 안에 있다는 말은 작은 치수의 중요성에 대하여 강조한 것이 아니라, 건축물 전부는 언제나 무엇인가의 디테일임을 강조하기 위함일 것이다. 건물은 도시의 디테일일 뿐이다. 건축가에게는 다음 기회란 없지만, 음악가는 언젠가 그의 작품이 그가 생각했던 것처럼 연주될 것이라는 희망 안에서 산다. 건축은 수직과 수평 사이를 넘나드는 균형 속에 떠 있다. 수평선은 최소한의 드러남이 존재의 표적이 되는 절대 고요이다. 지면보다 높아짐은 살아 있음에 대한 최초의 의사표명이다. 그렇게 생명은 모든 것을 아래로 끌어내리는 중력에 대항한다. 죽음은 수직으로부터 수평에 이르는 것이다. 시간은 수평적이며 그것이 분명히 시간에게는 너무 빠른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에 상승의 개념과 싸운다. 시간은 느림을 존중하며 게으르고 완성의 개념을 용납하지 못한다. 시간과 수평선은 제한된 무한이라는 동일한 역설을 공유한다. 건축은 수평적으로 발원한다. 건축에서 수직은 일부 면의 융기에 불과하다. 우리는 직립한 몸과 땅에 평행한 두 눈 사이의 교차된 관계 속에 지어진 수직적인 존재들이다. 그러나 우리의 터전은 평평하다. 건축은 시각적인 풍경을 찾는다. 그 풍경을 생각지도 않은 가까운 곳에 고정시키고 벽에 그림을 걸듯이 틀에 끼우기 위함이다. 결국, 건축은 오직 관점일 뿐이다. 시선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지 않는 심술궂은 중개자이다. 시선은 실재에 다소나마 가까워지기 위하여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끊임없이 재구성한다. 우리는 눈의 수정체가 이미지들을 거꾸로 포착하지만, 습관처럼 몸에 익숙해진 까닭에 보는 것과 만지는 것이 어느 정도 논리적 일관성을 가지기 위하여 뇌가 그것을 다시 뒤집는다는 것을 잊곤 한다. 눈이 구형이므로 우리가 직선이라고 믿는 것은 언제나 곡선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가 보는 것 그대로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 살고 있다. 만약 시선이 이 원들의 포로라면 손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물들은 보이는 그대로 존재하지 않고 정신은 허울로 가득 찬 연극 속에 갇혀 있다. 정신은 그 속에서 자신이 지각한 것을 바로 잡기 위하여 왜곡된 감각을 끊임없이 수정한다. 수평선이 접혀져 실제로 가운데가 불룩 나온 것처럼 정신의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은 직선에 저항한다. 만약 자연이 변덕을 부려 두 눈을 위아래 수직으로 위치하게 한다면 우리는 서 있지 못할 것이다. 좋든 싫든 우리는 모든 광경의 前面전면에 있고 풍경 안에 있다. 우리는 손이 글을 쓰는 것을 보고, 그림을 그리는 것을 지켜본다. 시선은 우리를 둘러싼 것의 근원에 존재하는 듯하다. 공간은 우리 눈으로부터 도출되고 우리의 움직임에 따라 순간적으로 재편성된다. 외부에 촉매작용을 일으키는 이 기관 때문에 우리가 보는 것이 우리가 된다. 육체는 생각과 동일한 면에 있다. 그것은 같은 수직성 안에 존재하며, 시선의 수평선에 투영된다. 육체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우리가 느끼는 것 사이에서 평형을 이루고 있다. 생각은 육체에서 나오며 의식이 깨어 있기 위해서는 움직여야 한다. 신체는 기계적이지 않으며, 그것은 육체적 사건이어서 어떤 감흥들은 소름 돋게 하고 피부의 두께를 두껍게 하며 몸이 달아오르게 한다. 피부는 방향성을 갖지 않으며 공간의 변화에 진동하고, 동시에 가장 멀리 있으면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기도 한 외부와 우리를 결합시키는 팽팽하게 당겨진 표면이어서 마음의 감춰진 곳을 표면으로 끌어올린다. 피부는 우리의 첫 외모로서, 스펀지처럼 세상을 흡수하는 매끄럽고도 심오한 얇은 층으로 우리를 감싼다. 촉각이 우리가 가진 감각 중 가장 미약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실재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접촉을 통해서이며, 가장 많은 정보들을 동시에 해석하는 것이 바로 이 피부이다. 우리가 외부로부터 알아내는 것은 만들어낸 모조의 인상이다. 시각은 내부를 투사하는 X선 사진 같지 않아서 우리는 대상들의 껍데기만을 알 뿐이며, 손으로 그것들을 만지거나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것은 그것을 깊이 있게 알기 위한 역설적인 방법이다. 음악에서의 정적이 음의 부재가 아니듯, 건축에서 가시적이지 않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정적은 선율에 자신의 리듬과 숨결을 주기 위하여 존재한다. 들리지 않는 것도 음악구성에 속한다. 그것이 음악의 음들 사이에 자리하는 화음과 유사한 비례들이 반향하는 방법이다. 건축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의 이러한 관계 안에서 지각된다. 건축은 자연의 모형을 이용하고 마치 기존 형태의 모방이 건축적 지식을 향한 첫걸음인 것처럼 자연의 모습을 재현하기 시작했지만, 이와 동시에 건축은 시간, 중력, 공간, 빛 같은 사물들의 질서를 조심스럽게 구축하는 보이지 않는 법칙들을 표현하기에 이르렀다. 보이지 않는 자연을 향하여 돌아서면서, 건축은 단순한 겉모습의 모방을 피하기 위하여 이렇게 실재로부터 숨겨진 부분과 조우함으로써 유사한 것들로 가득 찬 세상으로부터 할 수 있는 데까지 벗어나고자 노력한다. 건축은 경관을 이루는 요소들에 속하는 우리로 하여금 경관에 거하게 하는 매개요소이다. 건축은 확대경처럼 작용해 땅의 움직임들을 크게 보이게 하는 미세지리학으로서, 단순한 바위로 산을 만들고 물웅덩이로 바다를 만들어낼 수 있다. 건축은 이웃한 것과의 관계를 통하여 자신의 균형을 얻으려 하는데, 건축은 이렇게 관계를 맺어주는 것이다. 건축은 지형으로부터 등고선과 산봉우리, 고원, 그리고 협곡을 취한다. 건축은 그것들의 경사를 두드러지게 하기도 하고 그것들의 틈을 길게 늘이기도 한다. 건축은 잊혀져버린 구조지질 변동의 자취를 드러낼 만큼 잠들어 있는 풍경에서 종종 나타나고, 한 장소의 모든 것이 관습의 잡동사니들 아래에 파묻힌다. 건축은 가치가 없게 보이는 장소에 예기치 않은 아름다움을 선사할 수 있다. 건축은 당시까지 관심을 끌지 못했던 지층들에 의해 엉클어진 과거의 흔적들을 다시 드러나게 할 수 있다. 만약 건축이 숨겨진 형태들을 단숨에 드러낸다면 마찬가지로 건축은 실수와 어리석음으로 형태들을 지워 없애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훌륭한 경관들은 전조와 발단, 그리고 건축이 관대히 다루어야 할 아주 작은 사건들을 품고 있다. 산은 어디서 시작하고, 작은 언덕은 어떤 능선 위에 놓이며, 벌판의 시작은 어디인가? 건축은 지형의 은유이다. 우리는 공간 전체를 점유할 수 없다. 둘러보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것은 회상을 통해서만 이해된다. 우리는 우리가 본 것에 대한 기억을 통하여 감춰진 것에 대한 직관을 갖는다. 완전함은 손에 닿지 않는 곳에 존재한다. 많든 적든 건축물은 둘러싼 환경에 대하여 대지가 취하고 있는 균형을 깰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건축 작업이 감당해야 할 책임이다. 불행하게도 거의 언제나 악행은 이미 저질러지고 있다. 건축한다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대체(치환)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남아 있는 것을 새롭게 조성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중요시하는 행위이다. 건축은 정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건축은 공간과 마찬가지로 시간의 분할이기 때문이다. 정확한 의미로는 건축은 시간의 악보이다. 건축이 형태에 의해 구속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건축은 지속된 시간 속에서 움츠러들지 않는다. 건축은 자기 고유의 리듬을 가진다. 건축이 음악과 닮아 있다면, 그것은 바로 시간을 가공하기 때문이다. 건축은 시간의 지속성 속에 설치된 비례의 관계이다. 공간은 실제로 소리를 낸다. 각자의 말, 각자의 걸음은 내부에서 소리를 발한다. 어찌되었건 건축은 시끄럽다. 그것은 자신만의 고유한 음향효과를 가지고 있다. 소리는 물질 위를 튀어 오르거나 관통하고 자신이 가진 에너지의 일부분을 그 물질에 전달한다. 소리는 빛과 같다. 소리는 존재하기 위하여 물질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장애물들에 의해 반향되거나 반대로 물질을 관통한다. 건축은 소리에 형태를 부여한다. 우리가 위치한 장소를 따르는 그 소리는 결코 동일하지 않다. 그것은 투명하거나 불투명하고, 칙칙하거나 맑다. 그 소리는 분위기에 따라 바뀌는 빛깔들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충만한 여백 속으로 번지는 울림이며 공간의 유동이다. 소리는 빛의 차원들 중 하나이다. 빛과 소리는 형제와 자매처럼 서로 닮았고, 이 유사성으로 인하여 빛은 우리가 음악을 이해하는 것을 돕는다. 소리와 빛은 건축의 악기들에 속한다. 빛과 마찬가지로 소리는 설계에서 자신의 몫을 나타낸다. 스스로 고독을 만드는 것은 우리를 숨막히게 하는 사람들의 포화에서 우리를 보호해준다. 건축은 고독이 개화하도록 내버려둔다. 홀로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자유의 등급 중 하나에 속한다. 고독은 군중 속에서 더욱 깊어진다. 우리는 고립된 감정을 느끼지 않으면서 홀로 있을 수 있는 이 역설적인 운동을 동경한다. 사막을 마주할 때 느끼는 독특한 아늑함은 우리를 중재자 없이 가장 직접적으로 세상과 맞서게 하는 것, 만남들 중 가장 본질적이고 가장 개인적인 것이다. 건축은 친숙한 사막들, 마음 속 깊은 곳의 하늘들과 감춰진 바다들로부터 시작될 수 있다. 추상은 인간을 자연으로부터 분리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에 속한다. 어떤 면에 있어서, 추상은 자연에 대한 우리의 관계를 확장하고 실재에 대한 우리의 확신들을 의심케 한다. 추상과 구상의 관계는 분리할 수 없는 두 극성, 하나의 생각이 가지는 두 가지 양상과 같다. 추상은 실체의 결여가 아니며, 궁극적으로 추상은 생각을 소재로 변형시킬 수 있다. 이렇게 추상으로부터 구상으로 향하는 추의 운동은 이율배반적인 것이 아니다. 그 소재는 하나의 계획이며 생성되고 있다. 현대의 소통하는 능력은 사회적 관계들의 대용품이 된다. 신체의 접촉을 통한 주고받기는 거리를 둔 관계로 대체될 것이고, 그 속에서 멀리 있는 것을 우리와 가깝게 하는 기술은 머잖아 우리를 친밀한 것으로부터 갈라놓을 것이다. 소통의 이와 같은 빠르기는 속임수이다. 속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만약 우리가 가깝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우리가 몸소 체험한 것 때문이지 거리의 제거가 가까움은 아니다. 도시는 공공의 장소이다. 도시는 모두에게 속해야 한다. 도시는 최초의 집단적 행위이며 나눔의 장소이다. 건축은 거기서 거만하지 않게 행해야 하며, 고상하게 자리 잡기 위해 이웃의 차이들과 평범함을 받아들여야 하고. 예의바름과 사랑스러움을 알아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현실을 직시할 수 있으며 너그럽게 숙고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건축은 도시에 우아하게 거해야 하며 예의바르게 그 안에 들어가야 하고, 이웃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하여 어느 정도는 허리를 굽혀야만 할 것이다. 도시는 감성적이며 너그럽고 평온하며 영혼의 피난처처럼 아늑하다. 도시는 영혼에게 생기를 불어넣기 위하여 마음을 가라앉힌다. 평화로우며 상냥한 그곳은 다양한 기억들과 우연성들의 조각모음들로 만들어진 세계를 구축한다. 도시는 우리 기억 속의 배경이 된다. 도시는 세상의 견고함에 대해, 그곳의 안정성에 대해 믿음을 갖게 한다. 도시는 우리를 방황으로부터 보호하는 열린 아늑함을 구축하는 그의 존재로 말미암아 우리를 평온하게 한다. 도시가 없다면 우리는 미래에 대한 무지와 변화에 대한 두려움에 직면하여 영원히 방랑하게 될 것이다. 도시는 새로운 자연, 소우주, 세상의 응축이다. 하늘의 빛은 건축에 있어 근본적인 변수이다. 그 빛은 건축 최초의 경관이다. 땅은 하늘로부터 만들어진다고 이야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도시는 하늘로부터 만들어진다. 하늘은 우리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방 어디에나 있고 땅까지 닿아 우리를 완전히 빨아들인다. 날마다 태양은 덧없는 색조의 마천루들을 고친다. 그리고 도시는 자신의 높이로 기어오른다. 도시는 더 이상 빛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내부에 있다. 구름들은 거기에 휩쓸려 들어가고 가냘픈 레이스 차양들 같은 벽돌 뒤에 숨어 숨바꼭질 놀이를 한다. 밤에 걸을 때면 우리는 본능적으로 천천히 간다. 장애물이 있을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대기 전체가 우리를 밤의 깊은 곳에 붙잡아 놓기 때문이다. 공간이 불투명해진 사이에 어두움은 투명하게 된다. 오늘날의 도시는 라스베이거스로부터 습득한 소음들과 빛들로 덧입혀진다. 유치한 영상기술로 축소되어버린 것이다. 해질 무렵,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의 아름다움은, 어둠 속에서 부드럽게 드러나고 그것의 돌 하나하나는 빛깔을 바꾸며 느리게 모습을 달리한다. 육감적이며 생기 넘치는 그 표피는 매일 저녁시간에 순간적으로 밝혀지는 조명등으로 말미암아 처참하게 사라진다. 조명은 건축을 관광엽서의 사진으로 전락시켜 죽여버린다. 이 처럼 조명은 건축을 죽일 것이다. 살인은 살아 있는 실재를 죽은 이미지로 바꾸기를 원하는 자들에 의해 범해지는 것이다. 우리는 건축이 무엇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건축이 무엇인지를 먼저 고민해야만 할 것이다. 건축은 그것을 계획하는 이에게 속한 것이 아니다. 건축은 우연과 뜻밖의 것, 과거와 현재, 지역적인 것과 멀리 있는 것이 뒤섞여 만들어지고, 우리가 보았던 것과 우리가 경험했던 것에 대한 추억으로 채워진 생각과 기억 사이를 여행한다. 건축은 참신한 구성 안에서만 마음을 감동으로 뒤흔드는 소박한 창작물들을 먹고 사는 고유한 역사로부터 되살아나는 전승으로서 앞선 것에게 경의를 표하는 일종의 혁신이다. 건축은 행해진 것보다 행해지고 있는 것 안에 더 많이 존재한다. 입증해야 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건축은 꾸며낸 전설들을 회상하기를 좋아하고 실제 역사의 그릇됨보다 거짓 역사들을 선호하며, 자신이 아직 알지 못한 것에 대하여 알고 싶어 한다. 건축은 단지 암시적일 뿐이다. 그것은 예증 안에서는 불편해하고 회상만을 즐길 뿐이다. 건축의 모더니티는 재창조된 영속성이다. 역사는 건축에 있어 자신의 재생을 찾아 시간을 가로지르는 전승처럼 우리에게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뿜어내는 샘물이다. 건축은 순수하지도 균질하지도 않으며 완전히 공명정대하지도 않다. 그것은 그 자체로 결말이 아니며, 새로운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 결말을 다시 문제 삼고 그것을 약간 변형시킨다. 변함 없이 지속되는 육신에 대한 망상은 물질의 거짓된 견고함 안으로 시간을 처넣어버린다. 사람의 몸과 돌이 단지 다른 속도로 소멸된다는 것을 망각한 채 조각물은 육신을 바위 조각들로 변모시켰다. 건축은 감당할 수 없는 시간의 덧없음으로부터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한 환상을 언제나 품어왔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영원성을 사실로 믿게 하면서 감동적인 천진난만함으로 일상을 지워버린다. 그러나 우리가 무슨 짓을 하든지 건축은 자연의 느린 움직임과 합쳐지기 위해 조용히 나아갈 것이다. 건축은 영속성을 추구하지만 건축하는 것은 붕괴를 늦출 뿐이다. 계획안은 우리에게 건축의 창조와 동시에 소멸을 묘사한다. 그것은 결말을 배척하지만 처음부터 종말은 거기에 담겨 있다. 우리 시대는 폐허에 대하여 관심을 갖지 않는다. 이 시대는 남아 있는 것을 원래의 모습으로 간직하기를 원한다. 그렇지만 과거의 건축은 다른 시대의 것이 아니라, 현재에 속한다. 매 작품은 나름의 조건에서 건축의 탄생을 재연하고 그것이 가지는 모든 역사를 포함한다. 오래된 기념비적 건축물들은 흔히 혼성적이다. 이 기념물들은 한 요소들이 다른 것들을 넌지시 암시하는 형태들을 슬그머니 덧붙이면서 천천히 진화해간다. 역사의 전개는 그들보다 앞선 시대를 완전히 지우지 않고 더해지는 것이다. 이러한 축적은 건조물에 새로운 강렬함을 부여한다. 그러나 이러한 점진적인 노후화는 오늘날 잘못 받아들여지고 있다. 시간으로 인한 훼손은 고전건축에 더 이상 용납되지 않는다. 오래된 건축은 복원 전문가들에 의해 꾸며진 변덕스러운 학설들로 말미암아 우롱된다. 마치 노후화되어가는 건축이 본질을 바꾼 것처럼, 또한 사람들이 최종적인 결과를 원하는 동안에 이 낡은 건물이 움직이지 못하고 굳어버린 영역으로 넘어간 것처럼 모든 일이 이루어진다. 오래되어 낡은 건축은 병자를 검사하듯 관찰되며, 더 이상 자신이 할 말을 갖지 못한다. 사람들은 그것이 평화로운 죽음을 맞이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그것은 폭력적 처우를 감내해야만 하며, 많은 나이 때문에 변화에 대한 모든 생각이나 비평받을 모든 가능성조차 상실당한 듯 다른 이들의 손으로 넘어간다. 그것을 보존하기 위하여 관계 규정들이 제정되는데, 어떤 公安공안은 창조의 정신을 구현하는 다른 것들을 막는데 임명된다. 사람들은 그 주위에서 모든 것을 멈추게 하고 그것을 한정된 한 시대에 봉인하길 원한다. 그러나 언제가 진정한 과거이었는가를 알기 위하여 경계를 긋는 것이 가능하단 말인가? 건축은 근원적이다. 그것은 영속적인 탄생, 지속되기를 추구하는 시작으로 시대의 여명을, 낙원의 시대를 찾고 있다. 건축에는 아담도 이브도 없다. 그것은 동굴 속에도 아크로폴리스에도 없다. 심오한 전승물들은 도입된 많은 형태들로 가득 차 있다. 계획의 탄생은 먼 여행들로부터 계승된 다양한 정체성을 영양분으로 삼는다. 건축은 혼혈의 아름다움처럼 신비로운 이방인이자 원주민이다. 그것은 젊은이로 남기를, 창세의 빛 속에 머물기를, 그리고 영원한 소묘처럼 존속하길 원할 것이나, 겉늙지 않기 위하여 그리고 자신의 아름다움이 가진 싱그러움을 유지하기 위하여 애써야만 한다. 건축은 초안과 같이 명쾌하고 미완의 극한에 머물기를 바랄지도 모른다. 초안은 모든 의도들을, 그 안에 집중시킨 최초의 묘선 안에서 이러한 계획의 이러한 출현을, 개념이 체계화되는 순간을 증언한다. 형태를 잡기 위한 근거를 찾기 전에 오랫동안 계획을 구상하는 수가 있다. 그 때문에 초안은 빛을 보기 전에 몇 년을 기다릴 수도 있다. 도면은 무엇이 필요한가를 우리에게 보여줄 뿐이므로, 그것의 본질적인 특질은 시작에 있지 끝에 있지 않다. 계획은 시간과 관대함을 필요로 한다. 건축의 영속성은 형태들의 변하지 않는 두께나 물질의 육중함에 있지 않고 그러한 것의 기초가 되는 생각 안에 있다. 정신은 능력보다 더욱 중요하다. 건축은 위압적인 것이 아니며, 독선적이지도 않다. 이 깨어지기 쉬운 안정성이라는 역설이 건축을 강하게 한다. 우리는 무언가를 보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는 고요한 자연의 시간으로부터 우리를 멀어지게 하는 인공의 대상들로 둘러쌓여 있다. 우리는 그러한 시간의 경과를 균질화하고 항거할 수 없게 하기 위하여 시간의 경과를 극적으로 묘사하는 도구들(모래시계, 크로노미터, 경도 측정용 시계)를 만들었다. 그 도구들은 시간 측정을 정밀하게 하는 것과 그것의 표면적인 경과시간을 가속화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멎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공간에 시간성을 부여하는 움직임은 언제나 거기에 있다. 건축에 부과된 과업들 중 하나는 시간에게 모습을 되돌려주는 것인데, 그것을 관찰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느리게 가도록 할 필요가 있다. 빠르기 그 자체가 진보는 아니다. 경사로는 우리에게 잠시 쉼을 선물로 주기 위하여 경과하는 시간을 연장하고 거리를 늘려준다. 또한 경사로는 건물 안을 여행하는 우리를 진정시키고 우리를 외부 삶의 리듬으로부터 이격시키는 制動機제동기이다. 계단과는 반대로 경사로는 층의 단절이 아니며, 그것은 움직임을 환기시키고 중력을 민감하게 느끼게 하는 연속성이다. 빛은 물질의 은유로서, 그 광선들은 빛을 발산하기 위하여 오직 장애물만을 요구한다. 불투명성은 빛에 존재감을 부여하고 그것을 생성케 한다. 빛은 그것을 억제할 저항이 없다면 흔적을 남기지 않고 사라지기 위하여 끝없는 흑암에 깊이 들어갈 것이다. 빛은 투명하지 않으며 투명성은 빛의 광선들을 빨아들인다. 그것이 바로 투명성이 가지는 기만적인 특성이다. 영사 막 없이는 영화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건축에서 물질이 없으면 빛도 존재하지 않는다. 건축은 광선이나 그림자를 射出사출하는 투영과 같은 작업이다. 그것은 빛을 우연히 받아들이지 않는다. 마치 연기자가 조명발을 받기 위해 가장 좋은 위치로 향하는 것과 같이 건축도 단순히 빛 아래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다. 건축은 무게를 덜어주면서 볼륨들을 부풀리는 맑은 숨결로 호흡하고, 빛은 중력을 교란시키며 매스의 관계들을 전도시킨다. 건축을 밝히는 것은 태양이 아니다. 오히려 태양의 경로를 결정하는 것이 건축이다. 그래서 자연의 광채는 형태들의 그림을 통하여 인간의 창작 영역에 들어올 수 있다. 색은 옮겨진 빛에서 나오며, 대기에 예기치 않았던 새로운 깊이를 부여한다. 그것은 소멸로부터 남겨진 것이다. 어떤 빛깔의 존재는 역설적으로 다른 모든 빛깔들의 부재를 강조한다. 건축이 완전해지려면 들어가는 색과 나오는 빛 사이의 불안정한 평형상태로 우리를 들어가게 하는 회화의 다색배합을 고안해내야 할 것이다. 건물은 얼굴처럼 북쪽과 남쪽이 낮과 밤처럼 다른데 반하여, 동쪽과 서쪽은 거꾸로 된 대칭들처럼 공통점들을 가지고 있다. 태양은 건축에게 사랑을 드러내며 건축을 돋보이게 한다. 건축은 마치 화가가 붓 터치로 자신의 그림을 드러나게 하듯이 빛의 모습을 그린다. 빛은 건축에 있어 근본이 되는 질료이다. 어쩌면 그것은 건축의 유일한 질료일지도 모른다. 건축에서 빛은 무게를 갖는다. 건축은 시선을 통하여 부분적으로만 이해된다. 건축은 보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 회화, 듣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 음악과 같다. 건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직감이 필요하다. 건축은 생각지도 못한 본능들을 부추기고 손으로 말하는 벙어리처럼 자신을 표현한다. 서 있다는 것은 조심스런 전투, 중력에 대한 저항, 본능적인 투쟁이다. 몸은 직립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데, 어린아이의 걸음걸이를 보면 잘 이해가 된다. 잠이 우리를 수평적 세상으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는 밤을 기다려야 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서기 위해 필요한 움직임의 복잡성을 계산하지 않고 일어난다. 몸은 생각에 설명을 요구하지 않고 행동한다. 우리는 마치 우리에게 저항하는 것처럼 우리가 두께를 느끼는 역설적인 빈곳에서 산다. 어둠의 근원이 우리에게 더욱 불가사의하게 보이는 반면에, 우리가 빛을 볼 때 안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대기의 점차적 소멸보다는 물질의 단단한 성질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우리가 이미지들과 사진들을 통하여 현실의 사물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직 표면물질에 따라 좌우될 뿐인 유추에 의해서 만들어진 겉모습일 뿐이다. 건축은 필름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물질 앞 빈곳의 진동이자 공간의 전율이며 우리는 그 震央진앙이다. 건축은 이미지가 아니다. 내부도 외부도 아닌 공간은 하나인데 사람들은 그것을 벽들로 둘러싸길 원한다. 그것은 항상 동일하게 존재하여 어떤 칸막이가 공간을 둘로 분리할 수 없는데, 항상 나뉠 수 없는 상태로 존재하는 것이다. 공간은 수평선으로부터 작업실에 이르기까지 오직 하나의 공간만을 형성하고, 벽과 창문은 서로 다른 두 세상을 창조하지 않는다. 방 밖의 전망은 거울 너머에서 펼쳐지는 허구의 넓이와 마찬가지로 내부에 속한다. 하늘이 별들을 모으듯이 내부는 건축이 가까이 모으는 단 하나의 총체를 풍경과 함께 형성한다. 바닥 모를 깊이가 그것들을 분리하지만 우리의 시선은 하나의 형상으로 그것들을 받아들인다. 시각의 원근법에 의한 단축법은 모든 사물들을 모으고 그것들을 같은 장소 안으로 흡수한다. 건축은 내부가 외부의 굴곡이 되는 연속된 움직임 속에서 내, 외부를 결합시킨다. 건축은 내부와 외부를 동시에 부각시키는 긴밀한 관계를 마련해준다. 사물의 내부에 있는 것을 좋아하며 그것의 깊이를 지각하는 우리의 능력이 그 관계를 구축한다. 건축의 오목한 모양은 장갑처럼 뒤집을 수 있다. 건축에서 내적인 도시성이 존재할 수 있는 것처럼 외적인 내부가 존재한다. 우리는 방금 사라진 것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면서 일어날 모든 것을 예견해야만 한다. 몸은 움직임을 미리 준비하기 위해 물체들의 형태를 기억으로 간직한다. 우리는 볼륨들이 이루는 지형을 따라 발아래에 있는 지면의 압박을 느끼는 것만큼 확실하게 배면의 존재를 느끼면서 걷는다. 건축은 연속적인 것 안에 존재한다. 그것은 뒤따르는 것을 창조하며 앞선 것을 반영하는 중간과정이다. 공간은 건축물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의 경험이다. 마찬가지로, 마치 다가올 것의 일부가 방금 끝난 것 안에 이미 존재하는 것처럼 우리에게 감춰진 기억이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느끼게 한다. 건축은 부동적이지 않다. 그것은 주름 잡힌 의복과 같으며 우리의 몸짓들과 동행한다. 건축의 주름은 구조로부터 독립적인 근거들에 의한 것일 수 있다. 건축을 지탱하고 있는 것과 그것을 내포하고 있는 것 사이에는 공백이, 우리가 자유롭게 거하는 간극이 있다. 옷은 가장 가까이에서 우리와 접촉하는 표피이다. 건축은 옷과는 조금 떨어져 있을 뿐인 또 다른 표피인 것이다. 걸음은 공간의 움직임을 유발한다. 매 걸음마다 형태들은 다시 그려진다. 그렇게 우리의 손 하나만 움직여도 우리 주위의 모든 것은 변한다. 우리는 구겨짐 없이 주름이 잡힌 공간 안으로 가만히 미끄러져 들어간다. 건축은 천과 같다. 그것은 표면이며 포장이다. 건축은 마치 제2의 피부와 같으며 그 부드러움을 간직할 수 있다. 건축은 자신의 유일한 골격만으로는 자족할 수 없다. 건축은 살과 피부를 필요로 하는 육체화이다. 가장 완성도 높은 건축은 여인의 몸 같은 섬세함을 지닌다. 건축은 시간과 공간의 춤이다.

    구조주의 건축은 보나 기둥, 콘크리트 하중 등 역학적 의미에서의 구조에 천착한다는 뜻이 아니라, 창작의 근간이 되는 일체의 사고 방식을 가리킨다. 구조주의 건축은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사고의 체계를 찾아내고, 공간의 구조가 다시 사람의 행동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낙관에 근거한다. 건축은 옷과 같아서 사용자에게 어울릴 뿐 아니라, 크기가 잘 맞아야 한다. 건축은 아름다움과 실용성을 동시에 추구해야 한다. 건축가는 보기도 좋고 몸에도 잘 맞는 옷을 만드는 재단사와 같다. 그리고 황제뿐만 아니라, 누구나 입을 수 있는 옷을 만들어야 한다. 건축가가 설계하는 모든 공간은 가능한 모든 상황에 적합해야 한다. 즉 상황을 수용하는데 그치지 않고 상황을 유도할 수도 있는 공간이어야 한다. 이처럼 기본적이면서도 능동적인 적합성을 지니고 있으며 사람을 향한 애정이 풍부한 공간을 우호적인 공간이라고 부른다.

     

    산속 풍경 1

    2021/04/05 서리가 내리고 얼음이 얼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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