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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영상, 미학론 56 (교재 공개)
    패러다임/예술 2021. 4. 14. 2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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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생각하기 이해하기 실천하기-

     

    영상, 미학론 56

     

    412. 모든 진리의 모델을 부수고 진실의 창조자, 생산자가 되는데 영화의 진실이 있다.

    외적인 세계의 물리적 실재인 운동과 의식 속에 심적인 실재인 이미지는 더 이상 대립될 수 없었다.

    영화는 우리에게 거짓운동을 준다.

    수단이 인위적이라고 해서 그 결과도 인위적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는가! 영화는 사진소들을 가지고서, 즉 움직이지 않는 단편들을 가지고서 진행한다. 그것은 매개적 이미지로서, 간단히 말해서 영화는 우리에게 운동이 부가하고 이미지를 주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운동-이미지(지속의 움직이는 단편들)를 준다. 그러므로 영화란 운동을 범용한 순간과 관계지음으로써 운동을 재생산하는 체계로 정의할 수 있다. 즉 움직이지 않는 단편들로써 운동을 재구성하는 것이다. 운동은 항상 변화와 관계가 있다. 운동을 통해서 전체는 대상들로 분할되고, 대상들은 전체 속으로 재통합되며, 그 둘 사이에서 전체는 변화한다. 우리는 세트의 대상을 또는 부분들을 움직이지 않는 단편들로 간주하는데 운동은 이 단편들 사이에서 확립되며, 대상들 또는 부분들을 변화하는 전체의 지속에 관계시키고, 따라서 대상들과의 관계 속에서 전체의 변화를 표현하고, 그 자체가 지속의 움직이는 단편이 된다.

    프레임은 우리에게 이미지란 단지 보여지기 위해 주어진 것만이 아님을 가르쳐준다. 그것은 볼 수 있는 만큼이나 읽을 수 있는 것이다. 프레임은 소리 정보뿐만 아니라 시각 정보까지도 기록하는 함축적인 기능을 가진다. 만약 한 이미지 속에서 매우 적은 것들만을 본다면, 이것은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적절하게 읽을 수 있는가를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지의 희박화를 그것의 포화만큼이나 서투르게 평가하는 것이다. 이미지의 교육학이 존재한다. 영화적 이미지는 항상 분할적이다. 이는 스크린이 프레임들의 프레임으로서 공통의 기준을 가지지 않는 사물들-시골의 롱 쇼트들과 얼굴의 c.u, 천문학적인 체계와 단 한방울의 물-에게 공통의 측정 기준을 주고, 거리, 기복 또는 빛의 똑같은 표준을 가지지 않는 부분들에게 공통의 측정기준을 주기 때문이다. 이 모든 의미에서 프레임은 이미지의 탈영토화를 보증한다. 시각적인 이미지는 그 볼 수 있는 기능을 넘어서 읽을 수 있는 기능을 가진다. 시야 바깥은 시각적인 것이고 사운드의 프레임이다. 모든 프레임화는 시야 바깥을 규정한다. 프레임화는 하나의 세트의 부분이 되는 모든 종류의 부분들을 선택하는 기술이다. 이 세트는 하나의 닫힌 체계, 상대적으로 그리고 인위적으로 닫힌 체계이다. 프레임에 의해 결정되는 닫힌 체계는 그것이 관객들에게 소통시키는 데이터와의 관계에서 고려될 수 있다. 즉 그것은 정보적이고, 포화되거나 희박해진다. 그 자체로서 그리고 제한으로서 고려된다면, 그것은 기하학적이거나 동역학적-물리학적이다. 그것의 부분들의 본성에서 고려하자면, 그것은 여전히 기하학적이거나 동역학적이고 물리학적이다. 시점, 프레임화의 각도와 관련하여 고려할 때, 그것은 시각체계이다. 그것은 그때 실용적으로 정당화되거나 더 고차적인 정당화를 요청한다. 마지막으로, 그것은 때로는 그것을 확장하는 더 큰 세트의 형태로, 때로는 그것이 통합되어 들어가는 하나의 전체라는 형태로 시야-바깥을 결정한다.

    커팅(데쿠파주)은 쇼트의 결정이고, 쇼트는 닫힌 체계 안에서, 세트의 요소들 또는 부분들 사이에서 확립되는 운동의 결정이다. 그러나 운동이 세트와는 질적으로 다른 전체와도 관련된다. 전체는 변화하는 것이다. 그것은 열린 것 또는 지속이다. 따라서 운동은 전체의 한 변화를, 또는 이 변화의 한 단계, 한 국면을, 하나의 지속 또는 지속의 집합을 표현한다. 그러므로 운동은 안과 밖, 동전의 양면처럼 분리될 수 없는 두 면을 갖는다. 그것은 부분들 간의 관계이고 전체의 성정性情이다. 한편으로 그것은 세트의 부분들, 세트의 단편들과도 같고 그 각각은 그 자체로서는 움직이지 않는 부분들이 가지는 각각의 위치들을 변경한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그 자체가 자신이 그 변화를 표현하는 전체의 움직이는 단편이다. 쇼트란 그것이 어떤 종류이든 두 개의 극을 갖는다. 하나는 그것이 요소들 또는 하위-세트들 사이에 상대적인 변경을 도입하는 공간 속의 세트들과 관계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지속 속에서 일어나는 그 절대적인 변화를 쇼트가 표현하는 전체와 관련된 것이다. 이 전체는 생략적이거나 내러티브적이 되는 데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러나 쇼트는 항상 이러한 두 가지 국면을 갖는다. 그것은 하나의 세트나 얼마간의 세트들 속에서 일어나는 상대적인 위치의 변경들을 제시한다. 그것은 하나의 전체 또는 전체(일반) 속에서의 절대적인 변화들을 표현한다. 쇼트 일반은 자신의 한 얼굴을 세트를 향해 돌리고 있으면서 세트의 부분들의 변경을 이전시키며, 또 다른 얼굴은 전체를 향하고 있으면서 그 전체의 변화-또는 적어도 하나의 변화-를 표현한다. 따라서 세트의 프레임화와 전체의 몽타주 사이의 매개라고 추상적으로 정의될 수 있는 쇼트의 상황은, 때로는 프레임화라는 극을 향하는 경향이 있으며, 때로는 몽타주라는 극을 향하는 경향이 있다. 쇼트란 이러한 이원적인 관점에서부터 고찰되는 운동이다. 즉 그것은 공간 속에서 확산되어 나가는 세트의 부분들의 이전이고, 지속 속에서 변경되는 전체의 변화이다. 쇼트, 말하자면 의식은, 그 사이에서 운동이 일어나는 사물들이 계속해서 하나의 전체 속으로 재통합되고 전체는 계속해서 그 사물들 사이에서 분할되고 있다(분할적인 것)는 것을 의미하는 하나의 운동을 추적한다. 쇼트는 운동-이미지이다. 그것이 운동을 하나의 변화하는 전체와 관계시키는 한 그것은 지속의 움직이는 단편이다.

     

    413. 표현형식이 언어적 형식을 취할 때 그것을 기호체제(정권)라고 정의한다. 그러나 하나의 보편성 및 단일성을 갖는 기호계란 없다. 또한 기호들의 집합이 하나의 질서 내지 세계일뿐만 아니라, 그것은 하나의 세계로 질서지우고 유지하는 권력의 배치라는 것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414. 잔혹이란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잔혹성이란 사물이 우리를 향해 끼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무시무시하며 필연적인 것이고, 이는 강밀한 엄격함이나 무대적 요소들의 극단적인 응축이라는 뜻이다. 구체적으로 이는 스펙터클, 음향과 음색, 고함, 잡음, 동작, 무대장치 등이 관객의 신체조직 전체에 침투하여 강하게 뒤흔들어 놓을 수 있는 강밀도를 만들어 내는 것을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소리와 음향과 잡음, 고함들은 그것들 자체의 진동하는 특질을 발견하기 위해 추구되며, 그 다음에는 그것들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위해 추구된다. 동작 역시 그렇다. 연극을 예술로 만드는 것, 그것은 바로 제스처를 통해서 인체(신체)조직 속의 진동을 빼앗아 오는 것이다. 연극은 우리를 인체의 기관으로 직접 인도하는 총체적이면서도 최종적인 수단이다. 여기서 인체의 기관으로 인도한다는 말에 속아서는 안 된다. 그것은 기관화하는 것과는 반대로 습속에 물든 신체를 바꾸어 놓기 위해 신체의 기관에 마치 한의사가 침을 놓듯이 진동을 주고 그것에 침투하여 다른 리듬에 따라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잔혹성을 특징으로 하는 진혹연극이 신체를 겨냥하는 바는, 기관 자체를 털어내고 다른 기관으로, 혹은 다른 신체, 다른 의 신체로 바꾸어 놓으려는 이르토의 문제의식으로 이어진다. 그럼으로서 그는 이미 존재하는 것을 벗어나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을, 새로운 삶의 양상을 지배하기를 꿈꾼다. 이러한 꿈과 발상을 극한으로 밀고 간다면 모든 낡은 습속에서 벗어난 신체, 모든 기관화된 사용에서 벗어난 신체라는 절대적 탈지층화로 이어지게 될 것이다. 이는 잔혹극을 통해 궁극적으로 정신으로 하여금 절대적인 순수성, 추상적인 순수성을 불러오게 만들 것이다.

     

    415. 미학적 방법은 개별적인 것에서 보편성을, 우연적인 것에서 법칙성을, 외적이고 일시적인 것에서 사물의 본질과 의미를 통찰하는 방법이다.

    내용(심리학적, 역사학적, 경제학적, 정치학적, 윤리학적, 미학적 인식의 대상)이란 개인들이 상호작용을 하는 이유나 근거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를테면 충동, 욕구, 감정, 이해관계, 목적, 이상 또는 가치들과 같이 실로 다양한 이유나 근거에서 다른 사람들과 상호작용을 한다. 바로 이것들이 상호 작용의 내용이다. 이에 반해서 형식(사회학)이란 개인들 사이에 진행되는 사회적 상호 작용의 반복성, 규칙성, 고정성, 지속성 및 구조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색깔이 우리의 현실성에 부합한다면, 음악은 우리의 잠재성(탈영토화)을 자극한다. 시각의 세계보다 청각의 세계가 우리의 실존을 더 심층적으로 자극한다. 그래서 색깔로는 대중을 움직일 수 없다. 시각적 자극은 우리 실존의 표면만 건드리고 지나갈 뿐이다. 불쾌하면 눈을 감으면 그만이다. 국기라는 시각적 대상도 비장한 트럼펫 연주가 없으면 애국심을 촉발시키지 못하고, 화려한 레이져 쇼도 음악을 수반하지 않으면 공허한 불빛에 지나지 않는다. 공포영화에서 공포감을 자아내는 음악을 뺀다면 별다른 공포를 느끼지 못할 것이다. 스크린은 멀리 있지만 비명소리나 유리창 깨지는 소리는 바로 우리 귀에 곧바로 들리기 마련이다.

    성공한 대중예술은 시대적 욕구와 대중들의 욕구를 적절히 반영하여 독자가 보고 싶은 인물을 가장 자연스럽게 잘 그린 것이다.

    만약 당신의 사진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그건 충분히 가까이에서 찍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든 예술은 현실을 반영한다. 모든 의미와 가치들은 역사를 통해 형성된다. 어떤 사물도 특정한 시간과 장소를 벗어나 존재할 수 없다.(미술도) 근대 이전의 작품들(미켈란젤로, 다빈치의 작품들)은 누군가에 의해, 오늘날의 특정한 제도와 가치관에 의해 우리 문화에 차용되어 미술로 변형되었다. 이것들은 우리 시대의 문화적 잣대(믿음)에 의해 미술로 차출된 것이다. 그 작품들은 미술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들에 대해 예술, 미술의 가치와 지위를 부여한 것은 오늘날의 시각인 것이다. 즉 우리의 신념과 가치체계대로 보는 것의 결과이다.

     

    416. 시인은 결코 앞선 사람들과 같은 길을 가지 않는다. 모든 체제는 원래 정해진 출구를 만들어 놓는 법이다. 그 출구로 나가는 것은 똑같은 구멍으로 뽑아져 나오는 가래떡과 마찬가지로 길들여지는 것이다. 허용된 자유가 허구적인 이유는, 끝까지 가다보면 허용이란 경계선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거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진정한 자유를 고민하게 된다. 그렇게 제 몸으로 벽을 확인해 본 사람만이 자유를 이야기할 수 있다. 부딪치지 않은 사람들에겐 자유라는 말보다 먼저 갇혀 있다는 자각이 필요하다. 그래서 시인들은 그 벽 앞에서 굴복할 것인가 뚫을 것인가의 경계선에서 시를 쓰고 있다. 그래서 제대로 된 시는 구조적 한계와 뚫고 나가려는 순간의 좌절을 동시에 보여준다. 그 벽에 부딪쳤을 때 꽥 소리를 지른 것이 바로 .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은 만지는 것이다. 내가 존재한다는 것, 이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감각은 촉각이다. 백석은 우리와 다른 아가미로 호흡했다고 말할 정도로 그의 시는 육감 중 오감이 살해되는 세계에 익숙해져 있는 우리에게 풍성한 감각의 세계를 전해준다. 철학자는 이 옛시인에게서 현대인의 잃어버린 감각을 복원할 방법을 발견한다.

     

    417. 여느 기계처럼 두뇌 역시 한정된 자원으로 제약을 받는다. 그래서 두뇌는 가능한한 효율적으로 자신의 일을 하기 위해 진화한다. 이것이 바로 대개의 사람들에게 문제가 되는 부분이며, 상식파괴자가 되는 데에 가장 큰 장애로 작용하는 부분이다. 예를들어, 눈을 통해정보가 들어오면 두뇌는 최대한 빠르고 효율적으로 이 정보를 해석한다. 시간은 에너지이다. 두뇌가 어떤 계산이나 해석을 하는데 시간을 많이 쓸수록 에너지는 더 많이 소비된다. 그래서 두뇌는 눈으로 받아들인 정보를 이해하기 위해 과거의 경험이나 기타 다른 정보 자원을 모두 끌어내야 한다. 가령, 다른 사람들에게 들은 말도 자원의 하나가 될 수 있다. 이런 일은 매 순간 일어난다. 두뇌가 효율성을 추구하기 위해 택하는 것이 바로 지름길이다. 그것은 너무나 매끄럽고 순식간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우리는 그 과정을 눈치조차 채지 못한다. 결국 의식의 표면에 떠오르는 것은 마음의 눈이 산출한 이미지일 뿐이다. 우리는 세상에 대한 자신의 지각이 당연히 진짜일 것이라고 믿지만, 그것은 사실 상상의 망령이자 우리가 진짜라고 믿는 생물학적이고 전기적인 허상에 다름 아니다. 우리가 지각하는 것은 뇌의 산물이다. 지각은 상식파괴자의 핵심에 있다. 상식파괴자들은 남들과 다르게 사물을 본다.(정확히는 사물을 다르게 보는 것이 아니라 사물을 해석하는 지각이 다른 것이다.) 그들의 두뇌는 보통 사람들처럼 효용성의 덫에 빠지지 않기 때문에 사물을 다르게 볼 수 있다. 뇌는 감각에서 비롯되는 물리적 자극을 해석해야 한다. 궁극적으로 선택한 한 가지는 단순히 뇌가 자기 안으로 들어온 정보를 해석해서 고른 최종의 추측일 뿐이다.이 추측은 두뇌가 통계를 토대로 하여 여러 가지 해석들 중 한 가지를 뽑아낸 것이다. 그 추측은 과거의 경험이나 다른 사람의 말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그것들이 지각에 미치는 영향을 제한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보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해결책은 전에 한번도 접한 적이 없는 것들을 두뇌에 퍼붓는 것이다. 새로운 경험은 과거의 경험에 속박되어 있던 두뇌를 해방시켜 자유로운 지각 과정을 통해 새로이 판단하게 만든다. 적어도 성공한 상식파괴자들은 새로운 경험에 대해 호감을 가지고 지각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낯선 사람이나 사물을 꺼리는 반면에, 상식파괴자들은 적극적으로 새로운 사람과 사물의 경험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새로운 경험은 두뇌의 공포 시스템을 가동시킨다. 공포, 즉 두려움은 상식파괴자처럼 사고하는 것을 방해하는 두 번째 장애물이다. 그것은 두 가지로,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과 대중의 조롱에 대한 두려움이다. 진정한 상식파괴자는 그런 두려움을 느끼더라도 거기에 막혀 행동을 포기하지 않는다. 새로운 지각을 얻고 두려움을 극복한 사람이 성공적인 상식파괴자가 되기 위해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은 자신의 아이디어를 다른 사람들에게 설득하는 것(사회 지능)이다.

    창조가 파괴행위다. 새로운 무엇인가를 창조하려면 상식적인 사고방식을 해체하고 무너뜨려야 한다. 시각과 지각은 다르다. 우리는 뭔가를 지각할 때 과거의 경험과 일치하는 방식으로 지각하는 경향이 높다. 보편적이고 일상적인 지각은 익숙하게 느껴지기 때문에 두뇌가 그 처리를 하는 데에 거의 에너지를 들이지 않는다. 반대로 일반적이지 않은 지각을 하려면 두뇌는 눈이 정확히 무엇을 보고 있는지 알아내는 처리 과정에 돌입해야 하는데, 이 과정에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상식파괴자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사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는 다른 사람과 다르게 사물을 지각한다.(지각-공포반응-사회지능) 두뇌가 게으른 방식으로 지각하지 않게 하는 방법은 다양하지만, 핵심적인 방법은 두뇌를 놀라게 하는 것이다. 두뇌가 평범한 지각을 하지 못하게 하려면 전에는 한번도 처리해 본적이 없는 것을 제시해 주어야 한다. 대상의 공간적 위치도 중요하지만, 상식파괴자들이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행동하는 원인은 대개 그들이 대상을 어떻게 범주화시키는가에 놓여 있다. 인간의 두뇌는 자신에게 가장 익숙한 방식(경험)으로 사물을 본다. 하지만 익숙한 환경에서는 깨달음이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상식파괴자처럼 보는 방법은 예전에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물을 보는 것이다.(또는 같은 사물이라도 다르게 지각하는 것) 지각상의 획기적인 발견은 단순히 사물을 응시하고 그에 대해 더 열심히 생각하는 데서 나오지 않는다. 획기적인 발견은 지각 시스템이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모르는 무언가와 대면했을 때 나온다. 익숙하지 않은 것을 맞닥뜨리면 두뇌는 평소의 지각 범주를 버리고 새로운 범주를 창조하기 때문이다. 때로 두뇌에는 시동을 걸 자극이 필요하다. 때로 환경에 단순한 변화를 주는 것만으로도 지각 시스템에 자극을 주어 익숙한 범주들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래서 색다른 레스토랑들이 지각의 변화를 이룰 수 있는 현장으로 그토록 주목을 받는 건지도 모른다. 좀 더 과감한 환경상의 변화 (해외여행)는 더욱 효과적이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장소를 대면할 때 두뇌는 새로운 범주들을 만들어낸다. 두뇌가 새로운 이미지들을 통해 낡은 생각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정보를 통합하는 것은 바로 이런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새로 알게 된 사람 역시 새로운 지각의 근원이 될 수 있다. 처음 대면하는 사람들은 상대방에게 자신의 관점을 밝힐 것이고, 그 관점들은 서로에게 익숙한 지각 패턴을 불안정하게 만든다. 관점의 변화는 또한 새로운 지각을 형성한다. 시각 시스템으로 하여금 다른 방식으로 사물을 바라보게 하면 우리는 새로운 고찰 가능성을 키울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말처럼 쉽지가 않다. 두뇌는 새로운 경험에 저항하기 마련이다. 낯선 것을 받아들이는 데는 에너지가 많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상상은 현재 모습이 아니라, 미래의 모습으로 사물을 바라보기 위해 이 범주화를 깰 수 있을 때 비로소 시작된다. 사물을 범주화하려는 두뇌의 의지에 의식적으로 맞설 때 우리는 한계를 넘어 상상을 할 수 있다. 지각은 눈이 전달하는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눈이 전달하는 것에 대한 개인의 기대나 예측을 통해 형성된다. 반대자가 한명만 있어도 군중효과는 충분히 깨질 수 있다. 이는 한 상식파괴자가 집단에 가장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전략은 자신과 생각이 같은 사람을 한명 더 끌어들이는 것임을 의미한다. 집단에 속해 있는 사람들도 제각각 의견이 다양하다. 이들의 의견은 다만 사회에 소속되고자 하는 압력 때문에 어느 한 가지 사회 규범으로 흡수될 뿐이다. 소수의 이견만 있어도 동조적 성향으로 묶인 집단은 깨질 수가 있다. 또 소수의 의견을 허용하는 집단이 만장일치를 강요하는 집단보다 더 나은 의사결정을 할 가능성이 높다. 보통 사람들과 연결되는 능력은 사회지능의 두 가지 핵심적인 측면, 즉 익숙함과 평판에 의존한다. 상식파괴자라면, 자신의 의지에 따라 자신의 아이디어를 상대에게 점점 익숙하게 만들 몇 가지 수단을(광고, 대중매체) 가지고 있어야 한다. 또 하나 필요한 것은 중요 평판이다. 상식파괴자는 사물의 본질을 명료하게 꿰뚫어보고 다른 이들의 의견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지각, 용기, 사회지능)

    예술은 사실과 안전으로 상징되는 친숙한 세계를 뒤흔들어 느낌과 위험으로 가득찬 낯선 세계가 도래하는 길을 여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한 시인이 자신의 시로써 독자들의 친숙한 내면을 와해시키지 못한다면, 그는 겉만 시인일 뿐 진정한 시인이라고 말할 수 없다. 시와 철학이 독자들에게 폭력적으로 다가와, 흔히 너무 어려워서 읽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진정한 이유는 시나 철학에서 자신의 일상적 삶을 동요시키는 듯한 불쾌감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시는 어떤 시간감(리듬)을 함축하고 있는데, 이 리듬은 시인이 무엇인가를 낯설게 느꼈을 때, 그리고 그것을 새로운 말로 옮기려고 할 때 발생하는 것이다. 시인이 느낀 것은 기존의 말로는 표현될 수 없는 낯선 상처, 혹은 어떤 감각이다. 시는 기존의 말로는 말할 수 없는 것으로, 새로운 말을 만들어 말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아이러니를 발생시킨다.

    순수한 색상, 즉 혼합되지 않은 색상은 단 4가지다. 파란색, 녹색, 노란색, 빨간색이다. 혼합색상은 이 네 가지 중 두 가지의 혼합물이다. 색상(일반적으로 색)에는 지각적 반대색이 있지만, 네 가지 기본 색상의 일부 결합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즉 빨간색과 녹색은 섞어도 새로운 색상이 나오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파란색과 노란색도 결합하면 색상이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지각 가능한 기본 색상의 결합은 네 가지 뿐이다. 파란색-녹색, 녹색-노란색, 노란색-빨간색, 빨간색-파란색. 결론은 파란색과 노란색, 그리고 빨간색과 녹색은 서로 지각적 반대색이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반대되는 것의 기본 성질 중 하나가 유용하게 결합될 수 없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추상체인 S, M, L은 세 개의 대립축(검은색-흰색, 파란색-노란색, 빨간색-녹색) 중 하나와 관련이 있다.

    파란색;헤모글로빈 농도 높다. (혈액축적), 무기력, 질식, 무겁다, 슬픔, 강하다, 차갑다, 공포-납빛, 흥분한 창백, 걱정, 불안, 당황, 심란, 낙담, 우울, 불행, 의기소침, 불길, 가망 없음, 울적, 고통, 재앙

    빨간색;헤모글로빈 산소화 수준 높다. 부끄러움, 성적 흥분, , 강함, 뜨거움, 위험, 공격적, 섹시, , 분노, 건강, 창피, 수치심

    노란색;헤모글로빈 농도 낮다. 행복, 질투, , 비겁, 두려움, 충격, 출혈, 깨끗함, 약하다.

    녹색;헤모글로빈 산소화 수준 낮다.(탈산소화) 병약, 무기력(빈혈), 공포, 허약, 차갑다. 행복, 깨끗함, 질병, 창백, , , 질투, 언짢음

    자주색;헤모글로빈 농도 낮다. 산소화 수준 낮다. , 질식, 맞은 자국, 느리다. 애도, 참회, 피의 색깔

    청록색;헤모글로빈 농도 높다. 산소화 수준 낮다. 정맥, , 차갑다.

    우리는 자신의 감정, 자신이 느낄 수 있는 것을 자세히 설명할 때 언어의 도움을 받는다. 산문문체는 반드시 자신을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많은 작가들의 반짝이는 문체를 배제해 버린다. 생생한 문체와 거기서 엿보이는 몽상적인 정신, 풍부한 추측, 통찰력, 주관성이야말로 그들의 기술이며, 진리에 관한 독특한 시각을 보여준다. 예술분야 중에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분야가 있는가? 예술이란 원래 평범한 것을 초월하고,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게 하고, 예술적인 기교를 명함처럼 내보이게 마련이다. 은유가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는 분야, 즉 전체를 다 이해할 수 없는 어떤 대상의 일부를 밝게 비춰주는 것이 바로 예술인 것이다. 예술가들은 세상을 풍부하게 인식한다. 공기 중의 수분이 응축돼서 빗방울이 되려면 먼지 입자가 필요하듯이, 은유에는 인식이 필요하다. 정신은 본능적인 육체 속에 살면서 언어의 추상성에 기대고 있기 때문에 생각을 구현하고, 생각이 느껴지게 만들고, 몸이 쉬고 있을 때조차 세상을 탐색할 수 있는 도구가 필요하다.

    예술을 관람하는 사람 간의 문화적 선택의 차이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우연적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예술이나 문화에 대한 해석 가능성은 사회 안의 계급적 위치에 따라 길들여져 강요된 것이다. 어떤 작품을 좋아한다는 것은 그 작품에 대해서 사회적으로 인정된 평가를 수용한다는 의미를 가지며, 이러한 맥락에서 예술작품에 대한 선호는 이미 사회적 세계관이나 정치적 판단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생각과 판단의 차이는 그들이 어떤 가정에서 출생했고, 어떤 학교를 다녔는가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즉 출신 배경이나 학벌이라는 요인이 사회적 가치는 물론 예술에 대한 취향마저도 결정하는 것이다. 결국 개인의 상징자본(문화적 조작적 개념)의 차이가 취향의 편차를 낳는다. 그것은 예술작품이 생성되는 논리는 문학이나 학문의 세계에서 명작이라고 평가되는 저술 등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

    예술작품에 대한 안목은 바로 교육의 산물이다. 교육은 사회적으로 공인된 예술을 가르치며, 해독하는 방식을 규정한다. 이것은 또한 예술작품에 대한 해석의 권위를 학교가 독점하고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교육 수준의 정도가 예술에 대한 고급취향/대중취향을 구별하는 계기가 되며, 거꾸로 예술에 대한 취향이 계급을 구분하는 중요한 기준이 될 수도 있다. 예술에 대한 취향은 더 나아가 음식이나 가구, 패션 감각 등도 포함된다. 일상의 문화가 사람들의 쾌락과 감성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감성의 형성 과정은 사회적 분류체계로 작동함으로써 사회적 지배를 강화시키고 사람들의 저항의식을 억압하는 효과를 발휘한다.

    내적 상징체계가 없는 사람은 너무도 쉽게 대중 매체의 포로가 된다. 이들은 선동 정치가들에게 쉽게 현혹되며, 연예인들을 보고 쉽게 기분이 풀리고, 장사꾼들에게 이용당하기 쉬운 사람들이다. 우리가 TV나 마약 그리고 유창한 정치적 구호나 종교적 구원에 의존하게 되는 것은 의지할 것이 너무 없어서, 즉 모든 해답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우리 마음을 빼앗기는 것을 방지해주는 내적 규칙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정보를 제공할 능력이 없을 때 우리의 생각은 무질서로 흘러들어가게 된다. 의식의 질서를 찾기 위해서, 즉 상징체계를 숙달하기 위해서는 가장 오래되고 기본적인 규칙들은 단어의 사용을 통제하는 일이다.(수수께끼, 십자말 풀이) 단어를 사용해 우리 삶의 질을 고양시킬 수 있는 훨씬 더 실재적인 방법은, 대화의 기술이다. 지난 200여 년 동안 공리주의 관념에 따라 우리는 대화의 주된 목적이 유용한 정보를 전달하기 위한 것이라고 믿어왔다. 그러나 대화의 주된 기능은 무엇을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의 질을 향상시키는 것이다. 언어의 가장 창의적 사용은 시이다. 운문은 우리의 경험을 응축되고 변화된 형태로 보전할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에 의식을 정리하는 데는 가장 이상적이다. 매일 시를 읽는 것은, 근력강화 운동을 할 때 우리의 신체가 단련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정신을 단련시켜준다. 누구라도 약간의 훈련과 인내심만 있다면 개인적 경험을 운문으로 정리해 낼 수 있다. 산문도 마찬가지다. 글은 단지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보를 창조하기 위해 쓰는 것이다. 우리가 쓰는 내용들은 글로 쓰여지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글을 쓰면서 서서히, 조직적으로 성장하는 사고의 과정에 의해서 여러 생각들이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사실 뛰어난 재능이 없는 한, 글을 써서 부나 명성을 얻고자 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그러나 내적인 이유로 글을 쓰는 것은 결코 낭비가 아니다. 우선 글쓰기는 정리된 표현수단을 우리 정신에 제공해 준다. 또한 글을 쓴다는 것은 경험을 분석하고 이해하는 한 방법으로서, 경험을 정리해주는 자가 의사소통의 매체가 된다. 글을 쓴다는 것은 감정의 혼란 속에서 어느 정도 질서를 잡아주는 치료 역할을 해주며, 자신들이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는 언어의 세계를 창조해 내어 골치 아픈 현실의 존재를 머릿속에서 지워버리는 것만이 작가들이 플로우를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될 수도 있다.

    약의 영향을 받은 상태에서 만들어진 작품은 좋은 예술작품이 마땅히 갖추어야 할 복합성이 떨어져서 너무나 명백하고 자아도취적인 경향을 띠게 된다.

    창조적 사고는 일상의 당연한 경험들에 대한 의심에서 시작된다.(낯설게 하기) 인간의 가장 창조적 직업인 예술의 목적은 일상의 반복과 익숙함을 낯설게 해 새로운 느낌을 느끼게 만드는데 있다. 우리 삶이 힘든 이유는 똑같은 일이 매번 반복되기 때문이다. 우리 삶에 예술이 필요한 이유인 것이다.

    보통 사람들이 잘 모르는 작가, 음악가, 저자의 이름을 쭈욱 늘어놓는 것은 한국형 지식인의 가장 대표적인 허세다. 모든 예술 작품은 내가 느낀 것이 바로 진리다. 음악은 절대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니다. 음식도 마찬가지다. 입으로만 먹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안대로 눈을 가리거나, 귀를 막고 음식을 먹으면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없다. 인간의 모든 감각적 경험은 共感覺공감각적이다.

    붉은 물체는 붉은 성분 자체를 가지고 있지 않다. 색이란 물체 자체의 색이 아니라, 우리의 시각계에서 형성된다. 색은 빛에 있기 때문에, 조명에 따라 보이는 방식이 변한다.(演色性연색성) 우리는 어두운 곳에서 형태는 볼 수 있지만 색을 구분하지는 못한다. 빛이 부족해서라기보다 어두워지면 색을 느끼는 세포가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색은 물체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보는 사람의 내면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며, 또한 과거 경험이나 주변과의 관계에 따라 색의 느낌이 변화한다. 그런 의미에서 색은 모두 주관적이다.

    길가의 돌멩이는 예술품이 아니지만 미술관에 전시될 때는 예술품이 된다. 예술은 제도의 산물인 것이다.

     

    풍경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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