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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영상, 미학론 55 (교재 공개)
    패러다임/예술 2021. 4. 12. 0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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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생각하기 이해하기 실천하기-

     

    영상, 미학론 55

     

    407. art(예술)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이다. 다시 말해 예술이란 박물관이나 전시장에서 볼 수 있는 값비싼 물건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예술은 짜 맞추다 를 뜻하는 동사로서 결과가 아니라 과정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런 관점에서 예술이란 일련의 경험이나 실험처럼 무엇인가를 관찰해서 얻어내는 행위로 보아야 한다. 즉 예술이란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는, 보다 확실하고 실질적인 방법인 셈이다. ‘예술은 작품이다라는 말은 지극히 편협한 생각이다. 예술작품을 낳은 실질적인 행위는 물론이고, 그 작품이 우리에게 안겨주는 깨달음, 즉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는지, 그래서 우리의 삶이 어떻게 바뀌는지에 대해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물질적인 세계관에 사로잡혀 있다. 예술품을 사고팔며, 부담을 느끼면서도 예술을 논한다. 게다가 우리 자신의 타고난 능력과 호기심, 예술적인 잠재력을 내팽개친 채 이른바 몇몇 전문가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하지만 예술이란 우리에게 친숙하고 재미있으며 매력적인 행위이다. 다시 말해 진지한 놀이인 것이다. 예술가는 훈련을 통해 예술과 함께하는 삶의 비밀을 터득한 사람이다. 우리가 누려야 할 진정한 행복과 즐거움도 그 비밀에 달려 있다. 예술행위의 3가지 공통점;1.세상 만들기-의미 있는 것을 만들기. 2.세상 탐구하기-다른 사람이 만들어낸 것을 탐구하기. 3.세상 읽기-그 과정에서 터득한 기술을 일상의 삶에 적극 활용하는 과정. 이 세 부분은 끊임없이 순환한다.

    기술이란 화려한 테크닉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기본적인 솜씨를 가리키는 말이다. 실제로 기술은 내적인 능력, 즉 깜짝 놀랄만한 재주의 근본을 의미한다. 우리 내면에 깃든 예술적 기술들;1.열망-열망은 우리 마음 속에 깃든 욕망이며, 형태를 드러내고 싶은 영혼의 소망이다. 우리의 열망은 감탄(고통, 분노, 기쁨, 호기심)하는 능력과 정비례한다. 열망의 첫 번째 행동은 반응이다. 반응능력의 유무는 예술에서 유난히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2.관찰-예술가들은 쉽게 눈에 띠지 않는 것을 찾아내려고 애 쓰고, 명백한 것에서도 색다르고 낯선 면을 찾아낸다. 삶을 변화시키는 가장 기본적인 기술은 사물을 눈여겨보는 기술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떻게 의 문제다.(주의집중, 지속성) 결국 평범한 것에서 특별한 것을 찾아내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다. 관찰의 6가지 기술은 .앞과 뒤를 모두 살펴라. .끌리는 대로 끌려가라. .관찰하되 판단하지 말라. 예상(주의)하는 힘을 키워라. .대본을 쓰고 필요할 때마다 수정하라. .귀담아 들어라. 3.비유-독립된 두 개체가 이미 존재한다면 그것들을 하나로 연결할 수 있는 가능성 또한 존재한다. 예술가의 능력은 그가 어떤 연장을 보유하고 있으며, 그 연장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그들은 과제를 바르게 이해함으로써 변형과 조절을 시도하고, 일상의 삶이란 기회의 연속에서 그 가치를 이끌어낸다. 예술행위는 미지의 것을 향해 가는 통로이다. 연결고리(짝짓기)를 찾기 위해서는 상징과 기호가 필요하다. 기호의 의미는 구체적이지만 상징의 의미는 추상적이다. 즉 기호는 우리에게 정보의 수용을 요구하며, 이해와 전달에 근거하지만, 상징은 우리에게 동참을 요구하며, 환기와 초대에 근거한다. 요컨대 상징은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여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가능성을 탐구하도록 부추긴다. 뛰어난 예술품을 구분하는 방법의 하나는 상징을 찾는 일이다. 예술에서 상징은 상당한 설득력과 보편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상상력이란 세상을 다른 식으로 바라보는 능력이다. ‘만약에’(은유, 공상, 가정, 상상)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 예술행위를 위해 살아 있는 매개체로 바뀐다. 4.문제의 재구성-예술가는 시간을 왜곡시키는 사람들이다.(좋은 질문과 여러 가지 관점들, 그리고 선택) 직관에 경험이 더해질 때 우리는 개인적 경험과 유전자, 지식, 기호와 기질, 인간관계, 유머감각, 행운 등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다. 예술행위는 논리적으로 진행되지 않는다.(모순 ,역설) 5.적극적인 참여-새로운 것을 창조해 내는 힘은 지적 능력이 아니라, 내적인 필요성에서 시작된 놀이 본능이다. 성공의 반대는 실패가 아니라 정체다. 예술행위를 성공적으로 이끄는 4가지 기술;.평생학습-우리는 세 가지 기본적인 방법으로 학습을 한다. 교육, 경험, 우리가 아는 것의 재발견이다. 예술가는 이러한 방법을 꾸준히 활용하며 평생 동안 배운다. .감정-감정가가 된다는 것은 삶이 제공하는 모든 가능성에 참여하는 것이다. .아름다움의 창조-빛도 아름다움을 따른다. 아름다움은 경험의 기술이며, 일종의 대화다. 아름다움은 사물에서 아름다운 면을 적극적으로 찾아내는 과정이다. .즉흥성

    창조적인 문제해결 방식의 7단계;관련 자료의 수집-자료의 정밀 검토-문제의 심층 연구-성찰-실험-해결과정-성공과 그 이후

    일반적으로 가장 위대한 작가는 동시에 가장 민족적인 작가였다. 그들은 자기 시대의 정신과 민족적 사고방식, 그리고 모국어의 본질에 대해서 약점과 특수성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다. 또한 그들은 의도적이든 천재적 영감을 통해서든 그것들을 이용할 줄 알았다.

     

    408. 서양민족은 분화의지가 강하고,(성장, AA+B) 이로 인해 자율문화가 발달했다. 分化분화는 단순한 동질의 상태에서 이질적인 상태로 나뉘는 작용으로, 분화문화의 특성은 이분법적 사고를 하는 자기중심적 개인주의 문화이다. 기독교의 유일신관은 창조물과 피조물의 분화이다.(, A, 창조주+, B, 피조물), 계층적 위계질서를 가지며 형이상학의 분화구조는 주가 본질이고 종이 현상이다. 이성에 의한 자연지배는 인간과 자연의 분화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우주=인간(, 지배자)+자연(, 피지배자)의 합리주의의 분화구조이다. 서양의 미적 이상은 美醜미추분리이고, 미적주체는 인간중심적이며, 주요미학은 고전주의, 낭만주의, 형식주의이다.

    중국민족은 동화의지가 강하고,(포용, A+BA+a) 이로 인해 융합문화가 발달했다. 同化동화는 이질적인 성질이나 양식을 동일하게 만드는 것으로, 동화구조의 특성은 자기중심적 확장의지의 표상이다. 유교의 대동사회와 왕도정치는 인으로 동화된 사회체계이다. 성리학의 동화구조는 성(, 인의예지)+(, 오욕칠정)=, , 君子. 도교는 자연중심의 동화사상이다. 중국의 미적 이상은 천일합일이고, 미적주체는 우주중심적이며, 주요미학은 의경, 기운생동이다.

    일본민족은 응축의지가 강하고,(단합, A+BAb) 이로 인해 조직문화가 발달했다. 凝縮응축은 서로 다른 요소들이 한데 엉켜 굳어지는 현상으로, 응축구조의 특성인 신도는 하나로 응축된 국가를 위한 민족종교이다.(일장기, 작고 아기자기한 여성적 문화, 정원) 또한 천왕제도는 응축된 민족의 구심점 역할을 한다. 사무라이는 응축된 질서를 유지하는 집행자 역할을 한다. 관료와 기업은 가족처럼 응축된 사회조직이다.(상명하복, 종신고용) 일본의 미적 이상은 물아일체이고, 미적주체는 사물 중심적이며, 주요미학은 유겐, 모노노아와레, 오카시, 가와이이이다.

    한국민족은 접화의지가 강하고,(상생, A+BC=a+b) 이로 인해 혼합문화가 발달했다. 接化접화는 서로 대립적인 존재가 만나서 하나로 어우러지는 것이다. 동화나 응축이 중심이 있는 통합이라면, 접화는 중심이 없는 균등한 통합이다. 그리고 조화가 질적으로 유사한 요소들의 어울림이라면, 접화는 음과 양, 하늘과 땅처럼 운명적으로 하나가 될 수 없는 대립적 요소가 상생의 관계로 맺어지는 것이라는 점에서 다르다. 한국의 신화는 접화문화의 원형으로, 상극의 어울림 문화이다. 마고신화는 천상계와 지상계의 접화이다. 또한 단군신화는 천신족과 지신족의 접화이다. 그리고 천지인 삼재사상은 접화의 우주관이다. 접화의 수리 철학을 대표하는 것이 천부경이다. 한국의 무는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접화의 의례이다. 신과 접화된 이상적 인간상을 신선으로 그렸다. 신선사상은 도교와 유교의 원형이다.(화랑도, 선비정신, 동학) 한국의 미적 이상은 신인묘합이고, 미적주체는 상호주체적이며, 주요미학은 신명, 평온, 해학, 소박이다.

     

    409. 문학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누구도 할 수 없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나만의 시선이 있어야 한다. 그것을 표현하는 나만의 문장, 표현, 구성을 부려야 한다. 이 비반복성과 비복제성이 문학의 심장이다. 취준생(공문, 보도자료, 자기소개서, 이메일)들에게 글쓰기는 예술을 요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이 필요한 것이다. 문학과 자신에게 필요한 글쓰기(세상에 살아남기 위해)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글쓰기를 막는 장애물은 두려움과 자기검열이다. 자기검열은 실제로 있지도 않은 어떤 가상의 시선이나 예상평가를 전제하며 시작된다.(자기혐오, , 악순환, 비난, 조롱, 타인을 의식)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생각의 전환이 필요하다. 두려움과 자기검열은 관념의 조작일 뿐이다. 실체나 뿌리가 있는 것이 아니다. 상자에 구멍을 뚫으면 어둠이 빠져나오는 것이 아니라, 빛이 들어 갈 뿐이다. 빛은 실체가 있고, 어둠은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어둠은 단지 빛이 없는 상태일 뿐이다. 빛이 비추면 어둠은 순식간에 사라진다. 글쓰기의 원리와 방법을 알면 빛이 비추는 것과 같이 두려움과 자기검열은 사라진다. 글은 처음부터 끝까지 차례로(일관된 흐름) 쓴다는 생각을 바꿔라.(고정관념) 우선 마구 쏟아내고, 덩어리별로 뭉쳐라.(시퀀스) 덩어리와 덩어리 사이의 유기적 연결에 신경 쓰지 말라. 글을 읽는 사람들은 덩어리 사이에 생략된 의미를 연결해 스스로 전체적 맥락을 만들어간다.(징검다리, 열린 문장, 능동적 참여) 중요한 원칙은, 전달할 내용을 중복되지 않고 누락되지 않게 하는 것이다.(카테고리 내에서) 글이란 내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교육을 받아왔다. 늘 글쓰기의 중심에 나를 놓아두었다. 그러나 이제 그 중심을 고객에게로 옮겨야 한다. 적힌 내용을 판단하고 결정하는 사람들에게 말이다.(고객이 궁금할 내용을 본문의 맨 앞으로 옮겨라) 짧고 구체적으로 요지를 생생하게 써야 한다. 그래야 읽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 글은 의견(느낌)과 함께 그림을 그려주어야 한다. 슬프다는 말만으로는 슬픔을 전달할 수 없다. 슬프다고 말한 다음 슬픈 장면을 보여주기보다는 슬픈 장면을 보여준 뒤 슬프다고 말해야 비로소 슬픔이 전달된다. (先景後情선경후정-이야기/논리, 사실/의견, 관찰/평가, 구체/추상, 개별/보편, 묘사/설명) 선경은 살이고 후정은 뼈다. 뼈의 표면에 살이 도톰하게 둘러싸고 있어야 한다.

     

    410. 광고란 매력(선망의 대상이 된다.) glamour을 제조해 내는 과정이다.

    광고 그 자체와 광고된 상품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이나 이익과는 구분되어야 한다.

    광고는 실제 그 자체가 아니다.

    실제적 대상들을 통해 어떤 즐거움이 가능하다는 이야기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광고란 즐거움을 제공하는 어떤 실제적 대상도 우리에게 제공하지 않는다.

    광고란 대상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관계에 관한 이야기이다. 광고가 우리에게 약속해 주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주어진 행복감인 것이다.

    선망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행복감이 바로 매력인 것이다.

    화가 자신이 그들의 작품이 물질적인 재산과 그에 따르는 사회적 지위에 대한 찬양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언어, 즉 전통에 의해 제시되는 언어와 투쟁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광고는 상대 회사와 경쟁하지만 모든 광고는 서로 다른 광고의 내용을 더 믿음직스럽게 만들고 효과 있게 한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광고는 오직 한 가지 제안 밖에 안한다.

    무엇인가를 더 사들임(돈을 써 전보다 가난하더라도)으로써 우리 자신이나 우리의 삶이 변화(우리를 부유하게) 할 것이라는 메시지인 것이다.

    매력은 우아함, 고상함, 권위와 다르다. 매력이란 사회 내에서 많은 사람들의 감정에서 우러나오는 선망이 없이는 성립되지 않는다.

    광고는 소비를 민주주의의 대체물로 바꾸어 놓는 기능도 한다. 무엇을 먹을 것인가(입을-, 어떤 차를 -)하는 선택의 양식이 중요한 정치적 선택의 행위를 대체한다는 것이다. 광고는 사회 내에 존재하는 비민주적의적 요소를 은폐하거나 보장해주는 역할을 한다. 동시에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은폐하기도 한다.

    광고의 이미지는 우리 자신에 대한 우리의 사랑(밀월, 선망의 대상)을 훔쳐가지고는, 다시 그것을 우리에게 되돌려 주는 것이다. 그것도 우리가 구입한 물건 가격을 대가로 해서.

    광고는 향수를 자극하고 불만족을 환기시켜 현재의 상태에 대한 대안을 제시해 주는 셈이고 불안감에 호소하고 두려움을 유발시킨다.

    그러나 부유한 계층은 적용되지 않는다.

    광고는 과거나 예술품, 교육적인 것을 이용해 항상 미래 시제만을 사용한다.

    즉 환상(꿈의 세계)을 심어준다.

    광고는 본질적인 어떤 사건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광고에는 그 것 말고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제시 된다.

    현재의 문제는 배제 된다.

    광고에 있어 중요한 것은 구매할 수 있는 능력 뿐이다. 인간이 희망하는 바도 광고를 통해 동질화되고 단순화 되게 된다. 이렇게해서 자본주의적 문화 안에서 다른 종류의 희망이나 만족감, 혹은 즐거움의 가능성도 배제되어 어렵게 된다.

    자본주의는 대다수 사람들의 관심을 좁은 범위(소비)에 한정시킴으로써 그 생명을 유지한다.

    한때는 광범위한 분야에서의 착취를 통해 그것이 가능하기도 했다.

     

    411. 예술가는 기억과 회상을 증오하며, 생성의 역량을 긍정한다.

    반복을 통해서 질서 혹은 통일성을 만들어내는 방식이 리토르넬로(ritornello)이다. 이는 리듬과 매우 밀접한데, 반복되는 리듬은 일관성을 부여한다. 선율이나 편성이 달라지는 경우에도 리듬이 동일하게 반복된다면 변화된 선율에서 어떤 통일성이나 안전성을 느낄 수가 있는 것이다. 여기서 반복은 차이, 변화, 변주와 함께 진행된다. 음악에서 음색과 음량의 차이는 선율과 리듬의 반복을 대신해 주는 기능도 한다. 차이나는 것만이 반복될 수 있다. 차이없는 동일한 선율과 리듬의 반복은 견딜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반복이 그 자체로 이미 차이를 포함하지 않으면 안된다. 리듬은 근본적으로 차이의 반복을 특징으로 한다. 군대의 행진(박자는 있지만 리듬은 없다)을 음악처럼 즐길 수 없는 것은, 차이 없는 반복이라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어떤 곡에 통일성을 부여하는 것이 리듬이요 리토르넬로(영토성, 영토화)이다.

    이는 영화에도 적용된다. 가령 카메라는 대개 인물의 움직임을 따라간다. 그러면 배경으로 다양한 풍경들이 만들어지며 지나간다. 여기서 인물은 이어지는 시퀀스를 하나의 장면으로 포착하게 하는 요소이다. 풍경이 끊임없이 달라져도 인물들이 그대로인한 우리는 하나의 장면이 연속되고 있다고 지각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인물은 반복의 방식으로 하나라는 연속성을 부여하면서 통일성을 이루는 요소이다. 반면 풍경은 끊임없이 변하면서 동일한 장면에 머물지 않게 차이화하는 역할을 한다.

    반복의 요소는 다양한 차이와 이행, 변환, 변화에도 불구하고 이질적인 것들의 집합을 하나의 배치로 만들어 준다. 따라서 리토르넬로란 이질적인 요소들을 결합하여 하나의 배치로 만들어 주는 반복적 성분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바이올린과 포도는 이질적인 대상이다. 그런데 피카소는 이 이질적인 것을 적절히 분해하고 재결합해, 거기에 또 다른 이질적인 요소들을 섞어, 하나의 그림으로 묶어낸다. 그래서 전체가 어떤 일관성을 가진 하나의 그림을 이루게 된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 바이올린도 원래의 모습을 상실하고(탈영토화), 포도 또한 원래의 색깔과 형태로부터 탈영토화되어야 했다. 어쨌든 이토록 이질적인 것을 하나로 묶어주는 것을 일관성이라고 한다. 만약 이렇게 재구성한 바이올린과 포도가 하나의 일관성을 획득하는 데 실패했다면, 그것은 좋은 그림이라고 할 수 없다. 이처럼 일관성이란 이질적인 어떤 것들을 하나의 배치 안에서 적절한 기능이나 위상을 갖도록 하는 것이며, 그럼으로써 배치를 구성하는 요소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것이다. 이것은 배치의 구성요소들은 이전의 배치에서 탈영토화하여 어떤 배치 안으로 재영토화하는 능력을 뜻한다. 그런 점에서 요소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일종의 통일성이라고도 하겠는데, 굳이 일관성이라고 하는 것은 각 요소가 갖는 이질성을 제거하지 않는 것이란 점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소나타든 교향곡이든 일부분만 들어도 이건 누구의 작품이군하는 판단은 일종의 일관성과 결부된 것이다. 즉 여러 종류의 작품들임에도 불구하고 피카소나 베토벤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묶어주는 것은 일관성과 관련된 그 사람의 스타일이다.

    지금까지 말한 것이 영토성 내지 재영토성이란 면에서의 일관성이라면, 다시말해 재영토화되는 한에서만 탈영토화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면, 반대로 탈영토화 자체와 결부된 일관성이 있다. 이는 유사한 배치들을 다른 방향에서 탐색하는 방식으로 포착될 수 있다. 가령 새소리는 영토의 배치에서 구애의 배치로 이행될 수 있다. 여기서처럼 각각의 배치들은 이질적이지만 언제나 다른 배치로 이행하는 도중에 있다고 할 수 있고, 그런 이행의 성분을 항상-이미 포함하고 있으며, 그 성분은 항상-이미 작동하고 있다. 즉 모든 배치는 탈영토화의 도중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질적이고 상이한 배치들이 서로 이행하고 교대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바로 두 번째 의미에서의 일관성이다. 즉 상이한 배치들이 이행 및 교대의 성분과 더불어 존속하는 방식에 관한 것이다. 다른식으로 말하면 상이한 배치들을 이행이라는 것을 통해 하나로 이어주는 것, 이행을 통해서 상이한 배치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것이기도 하다. 전자가 어떤 요소를 하나의 배치로 묶어주는 것이라면, 후자는 여러 배치를 이행 가능성이라는 잠재성의 차원에서 하나로 묶어주는 것이란 점에서 다르다. 이처럼 극한에서 정의되는, 모든 배치를 이행 가능성이라는 차원에서 하나로 묶어주는 일관성은 사실 어떠한 영토성에도 고정되지 않는 상태에 있어야 하므로 잠재성의 차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일관성은 어떤 하나의 배치로 영토화하는 성분이 없는 절대적인 탈영토화(기관 없는 신체, 일관성의 구도탈영토화된 거대한 리토르넬로로서 우주)의 선을 그리고 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모든 배치를 이행 가능성이라는 차원에서 하나로 묶어주는 일관성은, 묶이는 것들을 형식적으로 포섭하는 것과도 무관하고, 그것을 하나의 층위로 고르게하는 것과도 상관이 없으며, 차라리 그와 반대로 이질적인 것을 이질적인 그대로 둔 채, 혹은 어떤 형식적 통일성도 부여하지 않은 채 하나로 묶는 것이란 점이다. 배치를 이루는 요소들이 그 배치의 일부가 되기 위해서 탈영토화되는 것을 통해, 나아가 어떤 배치도 될 수 있는 절대적 탈영토화에 이르는 것(절대적 탈영토화, 탈영토화 자체와 결부된 일관성) 일관성은 이질적인 것에서 공통성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둔 채 탈형식화되는 양상을 하나로 연결하여 포착하는 것이다. 이것은 통일성을 만들지만 그 각각이 갖는 이질성을 그 통일성으로 환원시키거나 귀속시키지 않는다. 이질성을 갖고 있으면서도 일관성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갖고 있는 기능이나 성격, 위치 등이 탈영토화되어야 한다. 각각의 이질성이 그대로 잔존하기 때문에 하나의 배치 안에서조차 다른 배치로 이행하게 하는 변환자로 쉽게 전환하게 된다. 바로 이러한 변환적 성분으로 인해 복수의 배치들이 하나로 묶일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일관성은 각각의 이질적 요소들이 스스로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자신이 이전에 속했던 어떤 배치에서도 탈영토화될 수 있을 때 비로소 형성된다. 일관성은 모델이나 동형성이 아니라 탈영토성에 의해서 정의되는 그런 종류의 통일성이다. 새로운 배치 안에서 재영토화되어 나름의 일관성을 형성해야 한다는 것을 내포한다. 이질적인 배치들에 대해서, 혹은 어떤 작품에 대해서 어떤 것이 더 훌륭한지 말할 수 있다. 여기서 기준은 평가자가 갖고 있는 어떤 초월적이고 외적인 척도가 아니라 다양성을 산출하는 이질성이 내적인 일관성, 탈영토성을 획득하는 정도라는 점에서 작품에 내재적인 것이다. 즉 작품의 가치평가는 어떤 작품이 더 좋고 더 나쁘다고 말 할 수 없다는 식의 소박한 상대주의와는 거리가 멀고 능력의 정도는 일관성 내지 탈영토성이란 관점에서 평가해야 한다. 이질적 요소들을 결합하여 콜라주하는 경우 콜라주된 각각의 부분들이 살아남아서 제 성질을 그대로 발휘하고 있다면, 그건 그야말로 오려붙이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남의 것을 많이 따다 썼는데도 만들어진 전체가 원래의 요소들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표현적인 능력을 갖게될 때, 우리는 비로소 그것이 나름의 표현적 자율성을 획득했다고 말하고, 그것이 하나의 새로운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대부분의 텍스트를 남의 것으로 채우고 있어도, 거기에 몇 마디 안되는 문구들을 갖다 붙임으로써 고유한 표현적 자율성을, 혹은 일관성을 획득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새로운 저자의 작품이 된다. 그러나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따온 각각의 부분들이 충분히 탈영토화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결국 문제는 베꼈는가, 인용했는가, 패러디처럼 비판적 거리가 있는가? 등이 아니라 그 어느 경우든 수합收合한 쪼가리들이 모여 일관성을 형성할 정도로 충분히 탈영토화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중요한 것은 질료와 형식이라는 고전적 요소가 아니라 소재와 힘이라는 새로운 요소이다. 즉 어떤 음향적인 소재(질료)를 통해서, 혹은 그것을 이용하거나 변형해서 비가시적인 힘을 표현하는 것,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화하는 것이 그것이다. 즉 미예(밀레 Millet)의 말처럼 농부가 끌고가는 자루를 그린다고 할 때, 자루 안에 든 것이 무엇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거기 담긴 것의 무게를 묘사하는 것이다 무게라는 힘은 보이지 않는다. 비가시적인 것이다. 훌륭한 화가는 감자를 그 무게가 느껴지게 그린다고 할 때, 그것은 무게라는 보이지 않는 어떤 힘을 보이게 만드는 사람이다. 현대음악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베베른은 알프스 산의 소리를 만들어 내고자 했고, 한영애는 침묵으로 노래를 하고 싶다고 했으며, 윤이상은 우주의 소리를 따다 쓴다고 했다. 그것은 우리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우주를 가득 채우고 있는 소리를 우리로 하여금 들을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소재와 힘이라는 개념쌍이 모던이라는 배치에서 중요하게 부상된다. 그리고 이때 소재는 세 가지 중요한 특징을 갖는다. 첫째는 분자화된 소재고, 둘째는 포착해야 할 힘과 관련되어 있으며, 셋째는 그것에 포함된 일관성의 작용에 의해 정의된다.

    현대의 예술가들에게 결여되어 있는 것은 민중이다. 책은 민중을 필요로 한다. 문학이란 민중에 관한 문제다. 민중은 본질적이지만 가장 결여된 것이다. 이런 말들은 독자 대중이 있어야 한다거나, 사회주의자들이 흔히 하는 얘기처럼 민중적인 작품을 써야 한다는 것과는 전혀 종류가 다르다. 문학이 민중의 삶에 어떤 출구를 보여주는 것, 이를 위해 지금은 비가시적인 다른 방식의 삶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그것은 또한 민중의 삶을 바꾸는 문제를 다루는 것이다. 그것은 기존의 지배적인 삶에 영토화되어 있는, 주민에 머물러 있는 민중들을 탈영토화하여 새로운 배치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고,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영토화하는 것이며, 무한한 탈영토화하는 과정속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의 민중은 무엇보다도 우선 기존의 영토에서 벗어나 새로운 배치로 나아가는 민중, 그래서 기존의 배치 안에서 본다면 때론 동요로, 때론 저항으로, 때론 이탈로 보이는 선을 그리고 있는 민중이며, 분자적인, 그만큼 상호작용의 힘이기도 한 진동자振動子의 민중이라는 것이다. 이는 현재의 민중이 아니라 도래할 민중이며, 지금은 보이지 않는 힘들을 가시화함에 따라 새로이 형성되는 민중이고, 그에 따라 새로운 힘을 형성해내는 민중이다.

    시인이란 분자적 군중들을, 도래할 민중의 씨를 뿌리고, 나아가 그들을 발생시키리라는 희망, 그들이 도래한 민중 속으로 들어가리라는 희망, 그들이 우주를 개방하리라는 희망 속으로 풀어 놓는 자이다.

    유목()의 특징:흐름, 생성, 이질성, 소용돌이(열린공간, 가변성), 문제설정적(기존의 체계에 부합하는 것이 아니라 난관이 되는 문제와 직접 대면하고 그것을 향해서 새로운 창의적 시도를 던지는 것. 즉 문제를 통해 직접적으로 어떤 난관을 극복하려는 시도), 무한소, 극한으로의 이행, 지속적 변이, 특이성, 이동(), 소재-, 목적()이 아닌 과정을 중요시, 확산과 촉발, 비전공적인 지식, 변용을 위한 지식, 매끄러운 공간(홈패인 공간은 규정, 방어, 막음 등이다), 탈영토화의 공간, 근거리 공간, 촉감적인 공간, 특개성(이곳을 다른 어디도 아닌 이곳으로 만드는 것), 지평선도 윤곽선도 투시법도 소실점도 없는 국지적이다.(움직임을 가두는 패인 홈이 없으니 원하는 모든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다. 반면에 투시법이란 소실점이 자리잡을 지평선 내지 수평선이 있어야 된다. 그 지평선을 축으로 시각은 윤곽선을 통해서 세상을 본다. 지평선이나 윤곽선은 모든 사물을 그 안에다 담는(포괄하는) 기능을 한다. 일종의 전체인 셈이다. 그것들은 소실점으로 집중되는 어떤 상대적 양상으로만 담기고 포괄된다. 여기서는 오직 소실점에 자리잡는 눈만이 모든 곳을 향해서 시선을 움직일 수 있다.), 무신론적이다(종교는 국가장치의 단편이다), 운동(외연적/연장적)보다는 속도(내포적/강밀도적)와 관계 있다, 세는 수(계량적 수나 차원적 수가 아닌 방향적 수다. 화성적이 아닌 리듬적이다. 자율적 수, 이동적인 수, 암호화된 수, 복합성, 이중화), 역사가 없다.

    예술은 모방(미메시스 Mimesis)이나 재현 혹은 구상이 아니라 추상이다. 예술은 추상적 선에서 시작한다. 구상적인 것, 혹은 모방이나 재현(표상)은 선이 이런저런 형식을 가질 때, 그 선들이 갖는 어떤 특징으로부터 생겨난 결과다. 이는 구상적인 선은 추상적 선의 일부, 그것의 특수한 경우일 뿐이다. 이 추상적인 선은 유목적인 선이다. 추상이란 공통된 형식을 찾아내서 일반화하는 전통적 추상 개념이 아닌 모든 형식을 제거하는 탈형식화로서의 개념이다. 그래서 추상기계라는 개념 역시 두 가지인데 모든 형식을 탈형식화해서 흐름 그 자체로, 그래서 일관성의 구도로 이어지는 그런 추상기계의 개념이다.

    눈은 이제 광학적이라기 보다는 촉감적인 기능을 부여받게 된다. 이것은 마음으로 만지지 않고는 볼 수 없으며, 눈으로 보아도 마음이 손가락이 되지 않고는 볼 수 없는 동물성이다. 이것이 유목민의 예술이다.

    예술이란 모방충동이 아니라 추상충동에 의해 창조된다고 주장한다. 즉 엄밀한 의미에서 예술이라고 불려질 것은 모든 시대에 있어서 어떤 심리적 욕구의 만족을 구한 것이었지, 순수한 모방충동의 자기만족이나 그 자연원형의 모사에 대한 유희적 즐거움을 구한 것은 아니었다.

    추상충동은 외부적 현상으로 인해 야기되는 인간의 커다란 내적 불안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추상충동은 그 불안한 외부의 사물이나 공간에서 불명료한 세계상을 제거하고 거기에 필연성과 합법칙성을 부여하고자 하는 충동이다. 이러한 추상적 합법칙적 형식은 이것에 의해서 인간이 세계상의 무한한 혼돈 상태에 직면해서 평정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최고의 형식이다. 이런 추상충동은 감정이입충동과 달리 유기적인 것이 아닌 무기적인 것을 지향하고, 자아를 통한 향유가 아니라 자아를 버리고 몰입하게 하며, 모방하기보다는 변형시키는 방식으로 작용한다.

    추상적인 것은 기하학적인 것이 아니라 유목민적인 것이며, 그러한 유목민의 추상적인 선이 바로 매끄러운 공간을 정의한다. 추상이 단순히 형상의 제거가 아니다. 그렇다고 문자를 추상하는 것이 문자를 원래의 그림으로 되돌리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종류의 추상적 선을 그리는 것이다. 즉 추상을 글자와 그림의 이원성에서 벗어난 변형의 과정으로 재정의 할 수 있다. 구상은 추상과 대립되지만 추상은 구상과 대립되지 않는다. 어떤 것도 그것과 연결되는 다른 것과의 관계가 달라지면 다른 것이 된다. 벽과 문과 자물쇠는 연결되는 방향만 달라져도 침실에서 감옥으로 바뀐다. 예술을 모방과 재현이라고 보는 것은 아무리 다른 형상에서도 동일한 것을 발견하려는 의지 때문이다. 반면 추상 내지 변형이라는 개념으로 보는 것은 비슷한 것 속에서도 차이를 보고, 차이를 찾아내려는 의지를 표현하는 것이다.

    현대예술에서 추상적인 선이란 다방향적이고, 안과 밖을 갖지 않고, 형식도 배경도 갖지 않고, 아무것도 한정하지 않고, 윤곽을 그리지 않는, 얼룩이나 점들 사이를 지나는 선이고, 매끄러운 공간을 채우는, 근접한 촉감적이고 시각적인 질료를 뒤섞는 선이며, 관찰자의 눈을 끌어당기기는 하나 눈에 계속적으로 머물 어떤 장소도 제공하지 않는 그런 선이 바로 그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어떠한 윤곽도 그리지 않고 어떠한 형식을 제한하지도 않는, 가변적인 방향의 선이다.

    이질적인 것들을 향해, 나와 다른 모든 차이를 향해, 가능한 모든 것을 향해 자신의 마음을 열고, 그것을 자신과 상생 가능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차이의 철학이다. 그것은 단지 생각을 바꾸는 문제가 아니라, 사실은 실천과 삶의 방식을 바꾸는 문제고, 그것이 이루어지는 관계를 바꾸는 문제다. 또한 그것은 사람뿐만 아니라 환경, 무생물도 서로 상생할 수 있는 관계를 만들어내는 것, 이러한 것을 상생의 윤리학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나를 위한 것이 아닌 나와 더불어 하나의 코뮨적 존재를 구성하는 실천의 방침으로서 코뮨주의 communeism란 함께 어울려 사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창조하는 구성적 실천의 정치학이다. 이것은 익숙하고 전통적이고 그래서 편안한 것을 특징으로 하는 공동체주의, 동질성을 전제하는 공동체주의와 대비한 것이다. 그것은 외부와의 만남과 접속을, 그에 의한 차이의 생성을 여여하게 긍정하면서 동질성을 갖는 별도의  우리를 고집하지 않고, 반대로 모든 외부와의 만남을 통해 새로운 상생적인 관계의 생성을 추구하는 이런 코뮨주의 개념을 차이의 철학’, ‘무아의 철학’, ‘코뮨주의의 정치학이라고 한다.

    추상적인 기계들은 항상 독자적이며 내재적이다. 추상적 기계들은 형식화되지 않은 질료들과 형식적이지 않은 기능들로 이루어져 있다.

    모든 동일성은 흉내낸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차이와 반복이라는 보다 심층적인 유희에 의한 광학적 효과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차이를 사유하고자 하며 이는 차이나는 것들을 같음으로 환원하고 부정적인 것들로 만들어버리는 재현의 형식들에서 벗어나야 가능한 일이다.

    도처에서 다름은 같음의 반복 안에서 발생한다. 반복되고 있는 대상 안에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반복을 응시하고 있는 정신 안에서는 무엇인가 변하고 있다.

    차이는 반복에 거주한다. 차이는 반복 안의 한 질서로부터 다른 질서로 옮겨가게 해 주고, 능동적으로 재현된 반복으로 이행한다. 이 반복은 어떤 일반적 차이들의 상태로부터 독특한 차이로 옮겨가는 이행이며, 외부적 차이들로부터 내부적 차이로 향하는 이행이다.

     

    경상도 어느 저수지의 추춘(秋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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