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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영상, 미학론 57 (교재 공개)
    패러다임/예술 2021. 4. 18. 2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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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생각하기 이해하기 실천하기-

     

    영상, 미학론 57

     

    418. 일반적으로 근대디자인이란 바우하우스 운동을 계기로 발전된 기능주의적인 디자인을 가리키며, 모던디자인이라고도 한다. 모던디자인의 원리는 물체의 형태가 기능에 의해서 결정되어야 한다.’는 관점에서 출발한 것이다. 즉 기능이 가장 효과적으로 드러날 수 있는 형태를 디자인하면 미적인 요소는 저절로 생겨난다는 주장이다. 그 결과 디자인은 단순하고 명쾌한 형태를 지향하게 되었고 이러한 경향은 20세기 문명 전반에 영향을 끼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모더니즘이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 모더니즘은 강력한 도전을 받고 있다. 소비자의 요구가 날이 갈수록 복잡하고 다양해지면서 모더니즘 가치관을 수정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기술 중심의 기존 제품 개발 방식은 디자이너가 새로운 제품의 아이디어나 모양을 만들어 내면, 공학자나 기술자들이 그에 맞는 구조나 작동 방법, 성능 등을 갖추어 제품을 만드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기술 발전에 따라 수많은 제품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기능보다는 형태, 즉 모양새의 중요성이 강조됨으로써 디자인의 과정에서 형태와 기능의 앞뒤 관계가 바뀌어 버린 것이다.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라는 고전적인 명제는 현대사회 대중들의 물질적인 욕망에 따라 기능이 형태를 따르는 것으로 바뀐지 오래다. 더 나아가 형태는 재미를, 감성을, 욕망을 따른다.’는 식으로 계속 변화되고 있다. 결국 형태는 마케팅(판매)을 따른다.’로 통합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디자인의 변하지 않는 원칙은 여전히 인간을 위한 목적을 지닌 활동이라는 점이다. 또한 기능성과 아름다움을 통합하는 것이 디자인의 목표이며 이러한 가치를 실제로 구현하는 기술적 프로세스가 디자인인 것이다.

    디자인은 의미 있는 질서를 창조하려는 의식적인 노력이다.

    기능이 우선이냐, 아니면 심미적 만족이 우선인가? 심미적 가치는 기능에 내재한 일부이다.

    모든 디자인은 일종의 교육이다. 그래서 사회적, 도덕적 책임감을 디자이너는 의식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디자인은 디자이너의 상품과 환경, 나아가서는 디자이너 그 자신까지도 형성할 수 있도록 이제까지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강력한 도구이기 때문이다.

     

    419. 분절하고 지층화하는 것은 일정한 규칙이나 코드에 따라 이루어진다. 이런 점 때문에 어떤 분절 방식(배치)으로 포착하는 동시에 그 분절 방식에서 벗어날 가능성을 열어 놓아야 한다.

    서양음악의 박자가 심장의 박동 pulse과 결부된 개념임에 반해, 한국 음악의 장단은 호흡의 흐름과 결부된 개념이다.

    분절은 어떤 질료의 흐름을 기본적인 구성단위로 분할하고 그것을 일정한 형식으로 결합하는 것이다. 기본적인 구성단위를 실체(내용)라 하고, 그 실체들을 결합하는 규칙을 형식(표현, 질서)이라고 한다.

    무엇을 그린 것인가에 관심을 갖는 도상학(주제, 모티프 파악 중요시)이 내용의 형식이란 관점에서 그림을 연구한다면, 어떻게 그린 것인가에 관심을 갖는 양식론(특징이 중요)은 표현의 형식이란 층위에서 그림을 보고 분석한다. 그렇지만 모두 두 개의 층위로 다시 분할한다. 화가는 나름의 정신세계(이차적 내용, 상징적 가치)를 표현하기 위해 다양한 모티프(일차적 내용, 시대나 문화, 종교적 특징들)를 표현형식으로 선택할 수 있다. 이처럼 일차적 내용을 대상으로 하여, 이미지(그림)를 분류하고 서술하는 작업을 도상학이라고 한다면, 이차적 내용(상징적 가치)을 추적하는 작업을 도상해석학이라고 부른다. 양식론 또한 내용의 층위를 이루는 영역 안에서 다시 표현적인 층위와 내용적인 층위로 분할된다. 따라서 모든 분절은 이중적이므로, 내용의 분절과 표현의 분절이 따로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내용의 분절은 그 자체로 이중적이며 내용 안에서 상대적 표현을 구성한다. 표현의 분절 역시 이중적이며 표현 안에서 상대적 내용을 구성한다. 즉 다른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 표현의 역할을 하는 내용의 형식 및 실체를 발견하며, 반대로 내용의 역할을 하는 표현의 형식 및 실체를 발견한다.

    리듬이란 박자와 달리 차이화하는 반복이고, 공조된 움직임 사이에 차이의 여백을 남겨두는 연계이며, 그렇기에 새로운 차이가 끼어 들거나 발생할 수 있는 방식의 연결이고, 그렇게 끼어들거나 새로이 발생한 차이에 의해 전체가 전혀 다른 것으로 달라질 수 있는 결합이다. 즉 우리의 신체는 각기 다른 수많은 요소들이 전체 신체의 움직임에 리듬을 맞추어 움직여 주는 한에서만 그 개체성을 유지할 수 있다.

     

    420. 자연과의 새로운 관계를 구성하고, 인간 아닌 생명체들의 생존과 공존을 추구하고, 인간들의 새로운 협동방식을 구성하고, 인간을 포함하는 새로운 종류의 공동체를 구성하고, 욕망과 생산활동의 거리를 좁힘으로써 생산의 강밀도를 높이고, 가능한 생산활동의 폭을 확장하고 다양화함으로써 생산능력의 외연을 확대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실 어떤 종류의 추상화를 통해서 가능한 것이다. 단지 공통점을 모으는 식으로는 안 되고, 변형을 거치면서 이런저런 생산양식의 추상기계로 변환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통상적인 의미에서 추상화는 어떤 대상 가운데 핵심적인 것만 남기고 나머지는, 덜 중요한 것은 지우는 것이다. 사실 모든 개별적인 것은 다 다르다. 세상 어디에도 똑같은 두 장의 나뭇잎은 없다. 그렇지만 각각 다른 그것들을 묶어서 나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부르게 해 주는 것은, 그 각각에 공통된 어떤 것만 남기고 다른 것은 지우는 추상화로 인해 가능한 것이다. 이렇게 개별적인 차이들을 지우며 남겨두는 것을, 그 각각을 나무라고 할 수 있게 해주는 본질이라고 한다.

    개별자들 간에 존재하는 공통성의 추상, 혹은 공통형식의 추상을 통해 도달한 이 본질을 보편성 내지 보편자’(보편적인 것)라고 부른다. 이런 점에서 공통형식의 추상은 보편화의 방법이기도 하다. 어떤 것을, 본질을 달리 하는 다른 것과 구별해 주는 것을 추출하는 이런 방법을 보편적 추상화라고 한다. 철학자들이 통상 추상화를 말할 때, 그것은 이처럼 보편성의 추상과 결부되어 있다. 그것은 공통된 본질, 공통된 형식의 추상이다. 이런 추상화를 통해 도달한 보편성은, 서로 간에 넘을 수 없는 벽을 만든다. 인간을 돼지와 다르게 해주는 어떤 공통의 본질을 넘어서 돼지가 들어온다면, 그것은 더 이상 인간의 고유한 본질이 아니며, 인간의 보편성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넘나들 경우, 그것들을 묶어줄 수 있는 다른 본질을, 좀 더 큰 보편성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 가령 인간과 돼지를 동물이란 보편성을 통해서만 하나로 묶일 수 있다.

    그러나 상이한 개체들을 하나로 묶는 것에는 이런 방법만 있는 게 아니다. 반대로 변형을 통해 넘나들 수 있는 것을 하나로 묶는 방법이 있다. 예를들어 직선과 곡선, 원과 타원은 다르다. 그것을 묶으려면 이라는 더 추상적이고 더 보편적인 본질을 통해야 한다. 또한 원의 중심이 두 점이 포개진 것이라고 보면, 그 두 점 중 하나를 옆으로 밀면 두 초점을 통해 정의되는 타원이 만들어진다. 그 초점을 무한히 밀고 가면 포물선이 만들어진다. 따라서 원과 타원, 포물선은 어떤 변형의 추상적 방법에 의해 전혀 다른 형태의 곡선을 하나로 묶어 주는 것이다. 이는 공통된 어떤 상위의 보편성을 추출함으로써 추상된 게 아니라 변형을 통해 추상된 것이다. 이는 동일한 본질의 추상과 달리 동일성을 깨는 변형에 의한 추상이고, 상위의 보편적 본질을 찾아가는 추상이 아니라 보편적 본질을 넘나들고 가로지르는 추상이란 점에서 횡단적 추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방법의 예는 생틸레르는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수행하는 기능적 본질을 통해 기관들을 분류하고 그것의 상응성을 통해 가령 인간의 다리와 새의 날개는 운동기관, 독수리의 허파와 넙치의 아가미는 호흡기관으로 분류하고, 그것을 통해 종이나 속에서 강, , 계 등으로 상승하는 보편성의 체계를 수립했던 퀴비에에 반대하여, 변형에 의해 넘나들 수 있는 방식으로 동물들을 하나로 묶는 방법을 제안한다. 이는 공통형식을 추출함으로써 개별자들을 포괄하는 방식으로 상승하는 보편적 추상과 변형을 통해 구체적 형태의 차이를 넘나드는 횡단적 추상의 차이를 아주 잘 보여준다. 이를 공통형식의 추상과 탈형식화하는 추상으로 대비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 예술의 역사는 이런 횡단적 추상화의 방법을 극한으로 밀고 갈 때 도달하게 되는 지점을 잘 보여준다. 오브제를 이용한 예술작품은 적당하게 변형시키면 예술품이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예술품과 기성품을 하위체계로 분류하면서 상위의 보편성으로 하나로 묶는 게 아니라. 양자를 가로지르는 횡단적 변형에 의해 상위의 보편성 없이 양자를 하나로 묶는 것이고, 예술의 보편적 본질이라고 상정되어 있던 것을 와해시키는 방식으로 양자를 하나로 묶는 것이다. 이런 발상은 적절한 변형만 갖추어진다면 모든 것이 예술품이 될 수 있는 잠재성을 갖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이는 사실 예술의 다른 영역에서 활발하게 전개된 것이기도 하다. 소음을 음악에 끌어들임으로써 음악적 소리와 소음을 갈라 놓는 보편적 본질의 벽을 와해시켰던 루솔로나, 악기 아닌 물건의 소리를 음악에 끌어들임으로써 모든 소리 나는 물건이 악기가 될 수 있음을 보여 준 바레즈, 그리하여 철로를 달리는 기차소리나 회전문 돌아가는 소리로 음악을 만들었던 세페르 등 이들을 통해 음악적 소리와 소음, 악기 아닌 것의 소리와 악기의 소리는 음악의 평면 위에서 하나로 묶인다. 사이렌 소리, 기차 소리도 약간의 변형을 거치면 음악작품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존 케이지는 침묵을 포함한 모든 것이 음악이란 이름 아래 하나로 묶일 수 있음을 보여 주었고, 백남준은 무용과 택시를 무용이란 하나의 이름으로 묶을 수 있음을 보여 줌으로써 움직이는 모든 것이, 아니 움직이지 않는 것조차 잠재적으로 무용임을 보여준 바 있다. 예술가들이 보여 준 것은, 변형의 방법을 통한 횡단적 추상화의 극한은 모든 것이 하나로 묶이는 존재론적 평면이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모든 소리가, 모든 움직임이, 혹은 모든 존재자가 모든 척도와 위계를 떠나 하나로 묶이는 평면이고, 서로가 다른 것으로 변형되는 데 어떤 근본적 장애나 벽이 없는 평면이며, 서로가 어떤 다른 것과도 결합하여 새로운 것으로 변형되는 평면이다. 따라서 그 평면 위에서 모든 것은 평등하다. 모든 것은 어떤 척도와도 무관하게 나름의 의미와 가치를 갖는다. 즉 평등한 존재론적 위상을 갖는다. 하지만 모든 것이 나름의 의미를 갖는다는 것은, 그 각자에게 고정된 어떤 의미이나 동일성이 있음을 뜻하지 않는다. 어떤 것도 그것이 결합하고 관계를 맺는 이웃 항들에 의해 다른 의미를 갖게 되며, 따라서 다른 것이 된다. 이처럼 모든 것을 횡단하며 존재론적 평면 위에서 하나로 묶어 주는 것을 평면화라 부를 수 있다. 그것은 횡단적 추상화의 극한이다. 다만 다시 강조할 것은, 평면에 함축된 이러한 평등성이 비교 가능한 것이 아니라, 각자가 다른 것인 채 평등한 위상을 갖는 것이란 점에서, 어떤 공통의 척도를 갖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것은 이런저런 존재자들을 존재라는 보편적 본질-이것은 본질이 될 수 없다-이나 공통성으로 묶어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음악과 비음악이 음악이란 이름으로 하나로 묶이는 것이고, 예술과 상품이 뒤섞이며 예술이란 이름으로 하나로 묶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상반되는 본질을 갖는 것들을 횡단하여 묶고 연결하고 변형시키는 그런 추상화다. 존재론적 평면화라고 명명할 수 있는 이런 추상화를 통해 우리는 모든 소리를 하나로 묶어주는 일반화된 음악의 평면에 도달하게 되고, 모든 것을 작품으로 묶어주는 일반화된 예술의 평면에 도달하게 되며, 모든 동작/비동작을 무용으로 묶어주는 일반화된 무용의 평면에 도달하게 된다. 수많은 요소들이 어떠한 벽이나 심연 없이 넘나들며 만나고 교차하며 접속하고 이탈하는 것으로 묶어주는 이 평면에 우리는 일반성이란 이름을 붙일 수 있다. 이 경우 일반성이란 보편성이나 어떤 고유한 본질을 통한 일반화(보편화)와 반대로 그런 보편성을 가로지르고 고유한 본질을 지우는 방식으로 도달하는 일반성이고, 공통성이나 공통형식의 추출을 통해 도달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탈형식화하는 방식으로 도달하는 일반성이다. 그것은 횡단가능성 내지 변환을 통해 도달할 최대치의 폭을 뜻하며, 넘지 못할 어떤 본질도 없기에 곧바로 다시 가로질러질 경계선이다. 이러한 일반화가 어떤 본질을 특권화하는 것과 반대로 그것의 특권을 무력화하는 일반화라는 것은 굳이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추상화는 이런 변환과 횡단을 실제로 가동시킨다는 점에서 실제적으로 작동하며 특정한 효과를 산출한다. 그것은 단지 사유의 속성을 갖는 층위로 제한되지 않는다. 추상화는 사유를 통해 가동되는 프로세스일 뿐 아니라 신체의 속성을 갖는 층위에서도 마찬가지로 작동한다. 음악적 소리의 추상화는 한편에서는 음악적 관념에 대한 추상화를 뜻하지만, 동시에 물리적인 파동들로서 소리의 실제적이고 물리적인 변형을 뜻하기도 한다. 레디메이드를 사용한 미술작품은, 미술의 관념만 바꾸는 게 아니라 작품으로 사고 팔리는 어떤 물리적 신체를 갖는 사물이며, 이때 추상화란 그 사물을 실제로 변형시키는 실제적인 작용이다. 무용수의 무용도, 택시의 무용도 모두 관념의 추상화만이 아니라 신체적인 추상화를 수반한다. 덧붙이면 <자본>에서 맑스가 말하는 추상적 노동이란 모든 구체적 형태를 떠나 일반화된 노동이지만, 그것이 성립되기 위해선 노동이라는 신체적 작동이 추상화되어야 했다. 이런 점에서 추상화는 그 자체로는 변형의 실질적인 힘과 방향을 갖는다. 그 추상화의 힘과 방향을 표시하는 것은 하나의 도식 diagram에 지나지 않지만, 그 도식은 신체적인 층위와 비신체적 층위 모두에서 물리적이고 기계적인 변형의 양상을 표시한다. 그것은 형식이나 본질, 혹은 법칙으로 추상화하는 게 아니라 그런 것들을 와해시키며 나아가는 것이기에, 추상적으로 작동하는 힘과 방향만을 표시할 수 있을 뿐인 다이어그램(추상기계)이다. 추상이란 잠재성의 장으로 밀고 가는 것이다. 그러한 잠재성의 장에서 새로운 횡단적 만남을 사유함으로써 새로운 생산의 방향을, 또한 새로운 삶의 방향을 엿보려는 것이다. 구체화란 잠재화와 반대로 현행화의 선을 따라 구체적인 조건들을 기입하는 것이며, 기입되는 조건에 따라, 달라지는 구체적 배치를 보는 것이다. 동시에 그것은 구체적 조건에 따라 추상기계를 변형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구체화는 추상했던 조건들을 다시 대입하는 것도, 추상화의 경로를 역으로 되돌리는 것도 아니다. 반대로 현실로 되돌아 온 것처럼 보일 때조차도 완전히 다른 현실로 빗겨간 것이다. 그것은 총체적 현실이 아니라, 수많은 변형과 이탈의 길들로 이미 애초의 길들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조각조각 난 지도이다. 또한 역사적 경로를 논리에 따라 복원하는 것과도, 논리에 따라 역사를 할당하는 것과도 거리가 멀다. 그것은 차라리 변형과 이탈의 선들이 표시된 새로운 지도를 그리는 것이고, 보이지 않던 길을 보이게 하는 것이다.

     

    421. 기능만으론 안 된다. 디자인으로 승부하라.

    단순한 주장만으로는 안 된다. 스토리를 겸비해야 한다.

    집중만으로는 안 된다. 조화를 이뤄야 한다.

    논리만으로는 안 된다. 공감이 있어야 한다.

    진지한 것만으로는 안 된다. 유희도 필요하다.

    물질의 축적만으로는 부족하다. 의미를 찾아야 한다.

    헬레니즘 시대 미술의 주된 목적은 조화, 아름다움, 극적인 표현이다. 명확성과 단순성이 충실한 모방보다 더 중요하다.

    이집트인들은 대체로 그들이 존재한다고 알았던 것을 그렸고, 그리스인들은 그들이  것을 그린 반면에 중세의 미술가들은 그들이 느낀 것을 그림 속에 표현하는 방법을 배웠다.

    어떤 시대든 그 사회는 예술과 취향에 관한 한 그 나름의 특이한 편견을 가지고 있다.

    양식이란 제복과 같은 것이다.

    품위 있는 주제, 균형 잡힌 구도, 정확한 소묘는 구시대의 기법이다.

    작품의 완성은 예술가가 그의 목적을 달성한 때이다.

    자연을 구, 원추, 원통의 견지에서 보라.

    예술 Art이라는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예술가들이 있을 뿐이다.

    정작 중요한 것은 어떤 소재를 택해 쓰느냐는 게 아니다. 그 어떤 소재를 어떤 눈으로 바라보았느냐는 것이다. 그러니까 시적 경험은 나의 경험의 일부를 말하는 게 아니라 나의 경험 중에 나만의 시각으로 바라본 적이 있는 것을 우리는 시적 경험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시인은 경험한 것에 대하여 쓴다. 하지만 경험한 것을 곧이곧대로 쓰지는 않는다. 이것저것 여러 가지 일을 해 본다고 많은 시적 경험이 쌓이는 것은 아니다. 바쁘게 한 세상을 살아왔다고 그 수많은 경험들이 글쓰기로 이어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소재를 해석하는 능력, 즉 상상력의 도움 없이 어떤 소재에 매달리는 것은 소재주의의 늪에 빠질 위험이 있으니 특별히 경계해야 한다. ‘무엇을 쓰려고 집착하지 말라. 시에서 소재주의는 시단의 특정한 경향을 답습하거나 이미 규범화한 유파의 문법을 비판 없이 추종할 때, 그리고 글쓰기의 목적의식이 지나치게 앞설 때 생겨난다. 초보자의 경우에는 시가 생겨나는 지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 때 곧잘 소재주의에 빠진다. 그러므로 무엇을 쓰려고 1시간을 끙끙댈 게 아니라 단 10분이라도 어떻게 풍경과 사물을 바라볼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문제는 당신이 무엇을 쓰는가에 있지 않고, 당신이 어떻게 쓸 것이며, 어떻게 이 세계를 볼 것이며, 어떠한 각도에서 세계를 볼 것이며, 당신이 어떠한 태도로 이 세계를 포용할 것인가에 있다.”

    시인은 세상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자가 아니라, 세상을 세밀하게 그리는 자이기 때문이다.

    시에서 묘사에 충실해야 하는 이유는 대상의 현상을 생생하게 그리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그 묘사의 생생함이 대상의 본질에 이르는 관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묘사는 시의 화자인 를 객관화하는 데 기여하는 형상화 방식이므로 묘사를 통해 대상과 시적 화자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게 된다. 시로써 말할 수 있는 게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묘사 한 줄 없이 자기 뱃속에 든 것을 줄줄이 쏟아 놓기만 하는 시는 우리를 슬프게 한다. 얼마나 말을 하고 싶었으면 시라는 형식을 빌려 일방적인 고백을 할까 싶기도 하지만, 시의 옷을 입고 이리저리 시달리는 그 언어는 또 얼마나 몸이 아플 것인가. 말을 하고 싶어도 참을 줄 알고, 노래를 시켜도 한 번쯤은 뒤로 뺄 줄 아는 자가 시인일진대, 어두운 노래방에서 혼자만 마이크를 잡고 있는 시인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또한 묘사는 개념을 해체한다. 밤은 어둡다, 여름은 덥다, 꽃은 아름답다, 개나리는 노랗다와 같은 문장은 고정관념이 만든 개념적 표현이다. 묘사는 개념을 구체화하거나 해체하는 데 기여한다.

    시의 리듬이 발생하는 지점은 행갈이, 연의 나눔, 음절과 음운의 반복·고저·장단·강약, 문장 부호의 배치 등으로 알려져 있다. 이 중에서 시의 행과 연은 외형적으로 시와 산문을 가장 잘 구별해주는 요소이다.

    모든 예술은 적어도 삶을 인식하기 위한 수단이다. 창작자는 자신의 견지에서 어기차게 탐구해온 삶에 대한 통찰을 드러낸다. 물론 그 통찰은 범상한 일상인의 통찰과 다르다. 적어도 그는 탐구하고자 하는 대상의 언저리를 그 누구보다도 오랫동안 서성거린 사람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저 당연시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만 현실에 의문을 제기하고, 그 의문에 스스로 답하고자 하는 지난한 사유의 흔적이 예술에는 담겨 있다. 그래야만 우리는 작품을 통해 우리들의 삶의 제한된 인식을 조금이나마 넓혀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시인은 외롭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서 독자를 외로움에 젖어들게 해야한다. 또한 괴롭다는 말을 해서도 안 된다.(넋두리, 푸념) 그래도 독자가 그 마음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시는 다 말하지 않고 말해야 하고, 다 그리지 않고 그려야 한다.

    익숙한 사물과 낯설게 만나, 그 낯섦으로 그 사물을 새롭게 만나는 것이다. 시인은 반란자다. 그의 눈이 포착하는 모든 것은 언제나 새롭다.

    천추만세는 지금으로부터가 옛날이다. 옛날은 그때의 지금이었을 뿐이다. 지금은 훗날의 옛날이다. 현재에 충실하라. 그러면 그것이 훗날의 모범이 된다. 옛것을 맹종치 말라. 그 옛것도 그때에는 하나의 지금이었을 뿐이다. 지금과 여기가 차곡차곡 쌓여 역사가 된다. 시인은 깊은 우물에 가 닿을 긴 두레박줄을 마련해야 하고, 아무리 먼 길에도 부르트지 않는 튼튼한 다리를 가져야 한다. 시인은 자신의 노래로 귀신이 울게 해야 한다.(천기누설) ‘그때 지금이었던 왕희지의 글씨가 후대 서가書家의 기준이 되듯, ‘오늘’, ‘여기서 부르는 내 노래는 뒷날 시가詩家의 보석이 된다. 어떤 지금도 옛것의 구속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나 옛 사람의 표현은 본받지 말고 정신(원리)을 본받되 자기 목소리(새 길)를 내야 한다.

    예술은 발전해 온 것이 아니다. 다만 변화해 왔을 뿐이다.

    예술에 대한 사유의 핵은 숭고이며, 미는 단지 그것의 규칙에 지나지 않는다.

    아이는 홀로 있을 때 어른이 되기 시작하고, 개인은 홀로 있을 때 성장한다. 사람이 특정집단에 귀속되는 순간 개인의 자유는 소멸하고 만다. 작가는 선험적 의식을 가져선 안되며 특정 사상을 창작의 출발점으로 삼아서도 안된다. 어떤 선험적 테두리를 수용하게 되면 의식과 사상은 종말을 고하고 문학, 예술, 창작의 생명력도 죽어버린다. 또한 작가들이 사회비판을 창작의 전제로 삼아서도 안 된다. 작가가 사회개조의 도구 역할(선지자, 사회의 양심)이나 인민과 사회의 대변자나, 정치적 투사, 열사가 되는 것이나, 사회의 관찰자, 역사의 증인, 인격의 화신이 되는 것 또한 창작이라는 이름의 입신처세일 뿐이다. 정치나 역사를 말하기 위해 문학을 이용하지 말라.(권력의 도구, 이익의 대용품) 작품은 한 작가의 지극히 개인적인 목소리일 뿐이다. 사실 혼잣말이야말로 문학의 시작이다. 세상과의 소통은 그 다음이다. 작품의 사회적 효용은 작품이 완성된 이후의 일이다.

    문학은 현실을 그대로 옮기는 작업이 아니다. 현실의 껍데기를 뚫고 밑바닥까지 내려가 그 속에 있는 거짓된 모습을 벗겨내고, 일상의 이미지를 주무르며, 거대한 시야로 사태의 전말을 밝혀낸다. 작가는 창조주도 아니지만, 낡고 진부한 세계를 참지 못하는 존재며, 이상적인 세계를 건설할 힘은 없지만, 비인간적이고 비상식적인 세상을 인내하지도 못한다. 미래를 위한 글쓰기라는 것은 설령 스스로 의도하지 않았다해도 일종의 자기기만일 뿐이다. 문학은 살아 있는 사람을 위한 것이자 지금 이 순간의 삶을 긍정하기 위한 것이다. 아무런 사명이나 소명도 짊어지지 않은 문학만이 진실에 가장 가까이 다가갈 수 있고, 일체의 허상을 짓지 않을 수 있다. 헛소리를 지어내지 않는 문학이란 기본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쓰는 글이다. 일기가 진솔한 이유도 그 때문이다. 작가가 글을 쓰는 이유는 그것으로 생계를 도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토로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마음(기양) 속 감정 때문이다. 그런 글이라면 독자의 기호에 부합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 이것이 바로 문학의 첫 모습이다. 문학이 교화의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망상일 뿐이다. 작가는 판관이 되려하지 말고 철저히 관찰자적 입장(거리두기)에 있어야 한다.

    어리석은 군중만이 우상의 뒤를 따르며 세상을 바꾸겠다고 싸워댈 뿐이다.

    어떤 작품을 그 시대와 민족문화의 산물이라고 말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그것은 그냥 그 순간의 우연한 산물이었을 뿐이다. 어떤 시대, 어떤 국가이기 때문에 그런 작품이 나온 것이 아니다. 모든 작품은 기본적으로 홀로 걷는 어떤 개인이 그 시대, 그 국가에 남긴 지워지지 않는 흔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작가는 아무도 말하지 않았던 것을 말하고, 누구도 해보지 않은 생각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작가는 무의식의 활동을 생생하게 포착하면서도, 그것을 의식 차원으로 끌어올려서 어법에 맞게 표현해야 한다.

    작가는 언어가 처음 생겨나 형성되었던 때로 되돌아가 언어의 본심을 다시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언어의 본질은 사실 문자가 아니라 소리에 있다. 사람들은 흔히 문자를 언어 자체와 동일시하는 데, 그런 생각은 언어에 대한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 소리는 모든 언어에서 문자에 앞서 존재했다. 문자는 소리를 기록하기 위해 만들어졌을 뿐이다. 언어는 결국 소리이다. 언어의 탄생 자체가 사람의 목소리와 관련이 있다. 어떤 뜻을 전달하고자 한 소리에 반복적으로 의미가 부여되자 그 소리가 언어가 된 것이다.

    작품의 심미적 의미는 작가의 깊은 시선에서 우러난다.

    언어의 진정한 기능은 묘사가 아니라 제시에 있다.

    언어로는 회화처럼 사물의 형상을 세밀하게 재현할 수 없다. 사실 언어의 특징은 대상의 특성을 한정짓는 데 있다.

    언어는 단어를 통해 인간의 체험을 다시 불러일으키고, 소설가는 서술을 통해 독자의 감각을 다시 일깨운다.

    소설은 이야기를 통해 사람의 마음에 파고드는 예술이다.

    철학자의 미학은 대체로 이미 완성된 예술작품을 해석한다. 이미 실현된 미에 해설을 보태는 것이다.

    이미 형성된 미의 표준은 창작자에게 별 의미가 없다. 예술가들은 세대를 거듭하면서 미에 대한 인식과 발견을 확장해 나간다. 아름다움이 기존에 내려진 정의 따위에 갇힐 리가 없다. 작품에 대한 해석이나 평론은 예술가의 일이 아니다. 창작은 언제나 지금 이 순간에 일어나는 살아 움직이는 과정이다. 어떤 굳어진 법칙이 아니라 창작이라는 실천이야말로 모든 것에 앞서 존재하는 것이다.

    문자는 소리인 언어를 기록하기 위해 생긴 것이다.

    영화의 3요소;소리, 화면, 언어

    어떤 인위적 가치관, 즉 사회적 정치적 혹은 윤리적 가치관이 예술가 개인의 심미판단을 대체하고 있다면, 그 예술가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예술가의 의의는 차이를 발견하는 데 있다. 창조는 차이의 발견에서 오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은 어떤 사물 자체에 내재된 것이 아니라, 바로 이런 시의를 통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사람이 존재한다면 시의도 존재한다. 시란 본래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일이자 자아를 투사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너는 너 자신으로 돌아와, 3의 시선으로 너 자신을 바라보면 된다. 시의는 바로 그런 심미적 시선 속에 있다.

    텅 빈 캔버스 앞에 선 화가는 반드시 그림의 언어로 생각해야 되고, 텅 빈 종이 앞에 선 작가는 반드시 말의 언어로 생각해야 한다.

    화가가 의문을 갖고 탐구하는 것은 물리적 세계로서의 자연이 아니라 우리들이 반응하는 것으로서의 자연이다. 화가는 원인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어떤 효과의 매커니즘에 관심을 쏟는다. 그가 문제 삼는 것은 심리학적 문제거리이다. 즉 우리가 현실이라고 부르는 것하고는, 그림자 하나조차도 일치하지 않는데도 그 속에서 설득력 있는 이미지를 추출해 내는 그런 문제이다.

    이름을 만들어내는 것과 이미지를 창조해낸다는 것은 대단히 공통점이 많다. 어느 경우이든 낯선 것들은, 친숙한 것을 바탕으로 하여 분류하게 된다. 미술가란 자기 자신의 관용어를 통해 표현할 수 있는 모티프에만 이끌리게 마련이다. 그가 풍경을 면밀하게 바라보는 동안, 자기가 배워서 다룰줄 알고 있는 도식과 성공적으로 부합될 수 있는 광경들만이 관심의 중심이 되어 앞으로 튀어 나온다. 양식은 매체와 마찬가지로 어떤 선입감을 만들어냄으로써, 미술가로 하여금 자기 주변의 장면들 속에서 자기가 그릴 수 있는 확실한 모습들만을 찾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림을 그리는 것은 하나의 행동이다. 그러므로 미술가는 자기가 보는대로 그리기 보다는 오히려 자기가 그리는 대로 보는 경향이 있게 마련이다. 또한 미술가들은 자기들이 이미 갖추고 있는 양식과 훈련에 걸맞는 작품 소재를 찾는 경향이 있다.

    모든 미술의 기원은 눈에 보이는 세계 자체에 있기보다는 인간의 마음 속에, 세계에 대한 우리의 반응 가운데에 있다. 그 이유는 모든 미술은 다 관념적이며, 모든 표현은 다 그들의 양식에 의해서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출발점, 어떤 중요한 도식이 없이는, 우리는 도도한 경험의 흐름을 결코 파악할 수가 없을 것이다. 어떤 범주category들이 없다면 우리의 인상을 구별해서 분류할 수도 없을 것이다.

    매너리즘이 없는 미술이란 없다. 즉 전통적인 도식이 없는 미술이란 없다. 과학의 역사야말로 한 사람의 관찰자의 업적이 다음 사람에 의해서 이용되고 확대돼 나가는 끊임없는 발전의 역사이다.

    무엇보다도 오브제는 현실적이라기보다는 현실의 한 훌륭한 인도자이다. 풍요로운 반향을 지닌 어떤 이름으로 잘 역동화된다면 시적 오브제는 상상하는 정신심리의 훌륭한 인도자가 되어준다. 상상력의 영역 속에서는 일체의 내재성에 초월성이 결합한다. 사고를 넘어선다는 것은 시적 표현의 법칙 그 자체이다. 어떤 형상들을 이해하게 되는 것은 그것의 변형을 통해서이다.

    아기의 언어는 시적이다. 아기의 언어는 최초로 시작되는 언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때문에 아기의 언어는 시어처럼 원초적이다.

    농부의 노동은 침묵으로 둘러싸여 있다.

    는 침묵으로부터 나오며 또한 침묵을 동경한다. 시는 인간 자신과 마찬가지로 한 침묵에서 다른 침묵으로 가는 길 위에 있다. 시는 침묵 위를 비상하는 것과 같으며 침묵 위를 선화하는 것과 같다.

    오늘날의 시는 더 이상 침묵과 연관되어 있지 않다. 오늘날의 시는 말로부터, 실로 온갖 말들로부터 와서 온갖 말들에게로 옮아간다. 그리고 거기에는 대부분의 경우, 그 말에 의해서 전달되어야 할 실제의 사실이라고는 결코 없다. 실제의 사실은 전혀 없으며 그것을 말로써 찾고 있을 뿐이다. 말이 실제의 사실을 사냥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의 작가는 작가 자신이 원래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들을 제시하고 있고, 그의 인격은 그 자신이 쓴 것에 따라가지 못한다. 작가는 그의 작품과 일치하지 않으며, 그 불일치로 인하여 위기에 빠지는 경향이 있다.

    역사는 인간의 세계이고 예술은 그 인간의 세계를 그려낸다. 그리하여 비극은 예술의 가장 종요한 분야이다. 예술의 궁극적 목적은 초감각적인 것을 제시하는 것이다

    요약하면 사유의 측면에서 아폴론적인 것이 로고스와 존재, 공간성과 불변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면,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파토스와 생성, 시간성과 변화를 의미한다. 또한 아폴론적 진리가 논리적 형식에 있다면 디오니소스적 진리는 직관적 체험에 있다. 예술의 측면에서는 아폴론적인 것이 영원성을 공간적으로 조형화하여 고정시키려하는 아름다운 꿈의 표상인 반면에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격렬한 감성의 흐름 속에서 영원성을 찰나적인 계기로서 체험하는 고통의 도취를 표현한다. 미학에 있어 아폴론적인 것이 형식과 미의 범주를 대변한다고 하면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질료와 숭고의 범주를 대변한다. 니체는 예술의 기원과 전개를 이 이중적 요소의 변증법적 결합의 소산으로 파악한다.

    고전주의적 미의 이념에 부단히 저항하는 현대예술의 경향은 아우라의 상실, 충격의 미학, 취미와 경험의 파괴, 예술형식에 대한 파괴로 대변된다. 현대예술의 이러한 형식파괴는 예술의 영역을 넘어서서 사회적 가치질서 자체를 문제삼아 공격하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시는 이 세계를 드러내면서 다른 세계를 창조한다.

    돌은 조각으로 변형될 때 광휘를 얻게되며 계단으로 만들어질 때 빛을 잃게 된다. 색깔은 그림 속에서 광채를 내고 몸의 운동은 춤을 출 때 빛난다. 도구로 전락하거나 모양이 일그러졌던 재료는 예술 작품 속에서 본래의 광휘를 회복한다.

    예술가는 이미지의 창조자, 즉 시인이다.

    시적 창조는 언어에 대한 위반으로 시작한다. 이러한 작용의 첫 번째 행동은 말들을 지탱하고 있는 뿌리를 뒤흔드는 일이다. 시인은 일상적인 일들, 그리고 그것들과 매고 있는 연관관계에서 말들을 뿌리째 뽑아내어 일상적 언어의 획일적인 세계와 결별시킨다. 이때 단어들은 이제 막 태어난 것처럼 생생한 것이 된다. 두 번째 행위는 말을 원초적 상태로 복귀시키는 것이다. 이때 시는 소통의 대상으로 변한다. 즉 말을 다시 언어로 복귀시키는 중력의 힘이다.

    모든 창조는 모호성을 야기한다.

    시인의 일은 일어난 사건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일어났으면 하고 바랐던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시가 다스리는 영토는 제발~했으면이다. 시인은 욕망하는 자이다. 결과적으로 시는 욕망이다. 그러나 그 욕망은 가능하거나, 사실인 듯한 것으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다. 불가능에 대한 욕망도 아니다. 시는 실재에 대한 배고픔이다. 이미지는 욕망이 인간과 실재 사이에 걸쳐놓은 다리이다. ‘제발~했으면의 세계는 유사함의 비교에 의한 이미지의 세계이며 그것의 기본적인 매개체는 ‘~같은이라는 단어이다. 시적 리듬은 미래이며 현재인 그러한 과거, 즉 우리 자신을 현재화하는 것이다. 시구는 살아 있는 구체적인 시간이다. 그것은 리듬이며 근원적 시간이고 영원히 재창조되는 것이다. 끊임없이 다시 태어나고 죽고 또 다시 새로 태어나는 것이다.

    모든 앎은, 앎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아는 것知不知이다.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는다.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고로 현자는 말없는 가르침을 전한다. 말의 가치는 말이 숨기고 있는 의미에 있다. 이 의미는 바로 말로는 도달할 수 없는 어떤 것에 도달하려는 노력 그 자체이다. 결국 의미는 사물들을 지향하고, 사물들을 가리키지만, 결코 그것들에 도달할 수는 없다. 대상은 말 너머에 있다. 다시 말해 여여함의 왕국인 침묵으로 돌아가는 것, 즉 이름이 필요없는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혹은 이름과 사물이 융합하여 하나가 되는 곳, 즉 말이 존재가 되는 시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미지는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한다.

    시가 원초적인 인간의 조건을 드러내는 것이라면, 시를 쓴다는 것이 인간의 결핍 혹은 근원적인 결함에 대한 판단 이외에 무엇이겠는가? 인간의 근원적 조건은 본질적으로 결함을 가진다, 왜냐하면 인간은 우연적이며 유한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세계 앞에서 놀라는 것은, 세계가 낯설고 황량하기 때문이다. 죽음은 우리 밖에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 자신이다. 산다는 것은 죽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생명을 가진 것은 모두 죽는 것처럼, 죽음이 우리 밖에 있는 어떤 것이 아니고 삶 자체에 포함되어 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죽음은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죽음은 인간 삶의 결핍이 아니라, 반대로 삶을 완성시킨다. 산다는 것은 앞으로 낯선 것을 향해 전진하는 것이며, 이러한 전진은 우리 자신을 만나러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산다는 것은 죽음을 직시하는 것이다. 이렇게 죽음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것, 끊임없이 낯선 것을 만나는 것은 긍정적이다.

    인간은 상상력이며 욕망이다. 상상력의 작용으로, 인간은 무한한 욕망을 채우며, 그 자신이 무한한 존재로 변한다. 인간은 이미지이지만, 이미지로 육화되는 것은 인간 자신이다.

    상상력은 욕망이며, 욕망은 행동이다. 에너지, 영원한 무상의 기쁨, 시인은 성경의 오류를 씻어내어 죄라고 읽혔던 곳에 무죄라고 쓰고, 권위의 자리에 자유를 스며, 영원이라고 씌여졌던 곳에 순간을 쓴다. 인간은 자유로우며, 욕망과 상상력은 그의 날개이고, 손에 닿는 곳에 있는 천국의 이름은 과일, , 구름, 여자, 행동이다. 영원은 시간의 작품을 사랑한다. 시의 혁신성은 사상이나 형식에 있지 않고 감춰진 오의奧義를 보편적 영혼들이 감지할 수 있도록 잡아내는 능력에 있다. 시적 언어는 언어의 부정을 먹고 자란다. 시적 상상력은 현존을 발명하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이다.

     

    풍경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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