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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영상, 미학론 53 (교재 공개)
    패러다임/예술 2021. 4. 1. 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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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생각하기 이해하기 실천하기-

     

    영상, 미학론 53

     

    401. 메타포(은유)를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시 한 편이 있다. 존 던(John Donne)이 쓴 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가 바로 그렇다. 헤밍웨이가 자신의 소설 제목으로 차용했던 바로 그 시다. 수사법으로서의 메타포와 더불어 특히 메타포의 철학성(哲學性)을 공부하려는 이한테는 이 시 한편이면 족하다고 생각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메타포를 잘 한다는 것은, 두 대상 사이에 존재하는 '동일성(to homoion)'을 통찰할 수 있다는 것이다."라고 설파한 적이 있다. '동일성'을 통찰하는 일은, 결국 사물과 사물의 관계, 사물과 사물이 내적으로 서로 깊이 연결되어 존재하는 그 우주적 존재방식을 통찰하는 행위다. 이를테면, 위의 시는 "누구든 그 자체로서 온전한 섬이 아니다. 모든 존재는 대륙의 한 조각이며, 전체의 일부이다."라는 말로 시작한다. 이어 "어느 누구의 죽음도 나를 감소시킨다. 왜냐하면 나는 인류 전체 속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다시 이어서 종장은 "그러므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는지를 알고자 사람을 보내지 말라. 종은 그대를 위하여 울리나니."로 끝을 맺는다. 메타포의 철학성이 이처럼 명료하게 시어에 담긴 예도 드물다. 알다시피 여기서 종은 '조종(弔鐘)'이다.

     

    402. 고정관념이란 상대적인 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403. 르네상스 이전, 중세에서는 청각이 가장 중요한 감각이었다. 시각과 청각의 위상 교체는 15세기 활판인쇄가 등장하고 원근법이 확립된 이후, 현미경과 망원경 같은 광학장치가 등장하고 난 16세기에서야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이 역전은 사진, 영화, TV, 등 영상매체가 계속 등장한 19, 20세기가지 이어지며 비로소 세계는 문자이후의 시각의 시대로서 완전히 확립되었다. 미술도 근대의 발명품으로서, 근대의 서구문화는 시각의 패러다임으로 이끌어졌으며, 시각의 보편성과 필연성은 모더니티의 주요 의제였다. 인간의 시각의 정확성에 대한 모더니티의 신념은 종교와 신성함에 대해 근대 이전의 신념을 대체했다. 보는 행위는 사회적, 문화적 과정이다. 시각은 단순한 오감 중의 하나가 아니라, 지각보다는 해석에 가까우며, 이미지를 인지, 지각하는 것은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암호해독에 상응한다. 우리가 보는 것과 본 것을 해석하는 내용은 우리 사회가 오랜 기간 세워놓은 지식과 권력의 형태, 욕망의 통제체계 등의 질서와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시각과 진실 사이에는 자연적 관계가 아닌 사회적 관계만 존재한다. 미술은 근대의 발명품으로, 근대 이전의 사람들이 생산한 뛰어난 건물들과 물품들은 우리의 문화에 의해 차용되어 미술로 변형된 것이다. 우리가 아는 미술은 최근에 나타난 현상으로, 미술관에 전시되고, 박물관에 보존되며, 수집가들이 구매하고, 대중매체 내에서 복제되는 그 무엇을 말한다. 미술가가 미술작품을 창조한다하더라도 그 자체로서는 아무런 소용이나 가치가 없다. 그러나 이 미술작품들은 미술의 여러 제도들(화랑이나 미술사, 미술출판, 박물관 등) 내로 순환하면서 비로소 현대세계의 다른 어느 것보다도 상대적으로 깊은 의미와 중요성을 획득하고 그 가치가 증폭된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결국 다양한 제도들에 의해 형성되고 정의된다. 제도는 사물들에 그 경계와 관행을 설명해준다. 이는 액자 틀이 그 안에 있는 것을 회화로 보이게 만들고, 좌대가 그 위에 있는 것을 조각으로 보이게 만드는 것과 같다. 뒤상(변기 ’)이 이 물건을 미술 제도, 즉 미술전시장에 전시했을 때, 이 물건의 원래 기능이 바뀌었기 때문에 우리는 이 변기를 조각으로 보는 것이다. 종교적 물건들에 미술이란 이름을 붙인 것은 우리들이며 사실 그러한 단어는 원시인들에게 존재하지도 않았다. 우리는 다만 우리 자신의 만족을 위해 이 개념을 창조했으며 사실상 우리 자신만의 용도를 위해 이를 만들어 낸 것에 불과하다. 우리는 매우 사적인 생각이나 느낌을 인식하기 위해 언어를 사용해야만 한다. 즉 자신을 알기 위해(존재, 실존) 우리는 문화 속으로 들어가야만 하며 문화적 코드와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개인의 정체성은 자신의 바깥에 존재하는 것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18세기 전반까지만 해도 우리가 지금 미술이라 부르는 것들은 모두 일상생활의 맥락(죽음, 치료, 주술, 종교...) 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걸작은 구체적인 제도 내에서 인위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시스티나 성당의(미켈란젤로의 아담의 창조’) 프레스코화가 아무리 웅장하고 아름답다 하더라도 이 그림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의미의 미술은 아니다. 이 그림들은 종교적, 정치적 권위의 도구였으며 그 웅장함은 기독교 유일신의 권력, 즉 신의 지상주권으로 나타난 교황청의 권력을 시각화한 것이었다. 미켈란젤로는 싫었지만 교황의 명령에 의해 그린 것이다. 우리가 이해하는 미술은 그 작품에 대해 절대권위를 가진 미술가에 의해 창조된다. 현대의 미술은 교황의 명령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창작자 자신이 스스로 만들고자 하여 창작되는 것이다. 미술작품의 제작에 따른 통찰적 시각과 권위는 외부의 정치적, 종교적 주인이 주는 것이 아니라, 개인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온갖 문화영역과 대중매체 속의 수많은 복제품들이 우리가 아담의 창조를 그림으로 보도록 만들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종교적 구조물을 미술작품으로 간주하는 것이다.(선입견의 지평)

    1940년에 발견된 라스코 동굴 벽화는 1963년 폐쇄되고 1984년 근처 채석장에 복사물이 마련되어 개방되었다. 여기서 폐쇄된 원래의 동굴 벽화와 관광객들이 보고 감탄하는 복제품 중에서 어느 것이 예술인가?(시뮬라크룸) 오늘날 우리는 이미지, 즉 복제물이 오리지널보다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세계에 살고 있다.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오는 과거의 예술, 또는 미술품들은 인간이 세계와 관계를 맺으면서 파생된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예술, 미술이란 말에 함축된 의미에는 세계가 그다지 개입되지 않은 채 예술과 인간의 투명하고 자율적인 관계만을 이야기하는 면이 강하다. 예술작품 또는 미술로 제시된 과거의 이미지들이 예술에 대한 우리의 몇 가지 선입관(고귀한 것, 지위, 천재, 진선미의 가치, 문명의 꽃)에 의해 영향 받을 우려가 있으며, 결과적으로 원래의 물건이나 형상을 오해하게 만든다. 이런 선입관은 과거를 신비화할 뿐만 아니라 불투명하게 만드는데, 과거는 그것이 무엇이었던가를 알려주기 위해 발견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그 어떤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세계는 인간의 순수하고 완벽한 시각에 의해 관찰되기를 기다리는 그 무엇이 아니며, 그것을 아름답다거나 심오하다거나 흥미롭다고 생각하는 것도 인간이 빚어낸 오해의 시각일 뿐이다. 보는 사람은 해석자다. 해석이란 세계가 변화함에 따라 변하는 것이고, 어떤 것이 예술인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과 지식은 이러한 특수한 조건 위에서만 정당성을 얻을 수 있다. 어떤 면에서 이런 상대성은 한계로 인식되기도 하겠지만, 한편으로는 예술과 미술에 대한 우리 인식의 폭을 확장시키는 귀중한 토양이 되기도 할 것이다.

    이미지는 현실을 모방하는 것이라고 대부분 생각하지만, 오히려 우리의 삶과 의식이 이미지들에 의해 영향 받고 규정된다. 사진이나 대중문화와 마찬가지로 미술 역시, 근대의 특징적인 재현이라는 분야 가운데 하나다. 사실상 많은 경우, 과거의 문화와 문명이 남긴 것들은 우리가 오늘날 미술이라고 귀하게 여기는 물건들과 파편들과 구조물들뿐이다. 근대에서 시각문화는 인간을 초월하는 권능에서 유래하는 제의나 신화의 신비를 구현하지 않는다. 서구의 정치 구조와 개인의 주체성 인식에 대한 패러다임의 변화는 18세기 말에(1776년 미국혁명과 1789년 프랑스 대혁명, 근대자본주의의 탄생) 일어났다. 미술은 유럽 군주제의 권위가 해체되기 시작하던 18세기 말에서야 그 존재가 확실해졌다. 오늘날의 미술은 근대적 주체가 갖는 권리(무언가를 소유할 권리와 이를 교환-계약-할 수 있는 권리)의 표상이다. 근대 미술(1860-1970, 모더니즘, 고대나 성서에 관련된 주제를 그리는 관행에서 혁명이나 전쟁같은 동시대의 주제, 즉 당대의 현실을 그림으로 표현했다.)은 창조자 한 사람에 의해 만들어 진 것이다. 미술작품은 그 창조자의 자유로움을 나타내는 기능이 있으며, 소유와 교환의 권리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며, 미술가의 절대적인 소유물로, 그리고 자신의 본질적 자아의 대리물 또는 실현으로 여겨진다. 또한 미술작품은 자유시장 내에서 전시되고 교환됨으로써 그 의미와 가치를 얻는다.

    낙서(이름표, 서명, 풀뿌리 거리미술)는 발언권이 없는 이들에게 목소리를 주는 수단으로, 도시의 특히 소수민족의 청소년들에게 낙서화는 다양한 형태로 창조적 활동을 제공한다. 낙서화는 또한 힙합과 랩 문화의 시각적 구성요소다. 근대에 이르기 전까지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예술이라는 용어는 18세기부터 그 근대적 의미, 즉 천재적 개인의 독창적인 산물이라는 의미를 지니기 시작했다. 이 창작물은 기본적으로 일상생활과는 동떨어져 있으며 기본적으로 미적 아름다움을 지닌 물체다. 중세에서 예술은 누구나 터득할 수 있는 하나의 기술로 여겨졌고, 플라톤 당대의 art는 기술을 뜻했다. 르네상스를 통해(14-15세기) 약간 변하기 시작했다. 순수예술에 대한 개념은 17세기말 프랑스에서 확립되었다. 근대에서는 예술이 전통적으로 배워서 얻는 것이 아니라, 창작되는 것, 그것도 천재성을 부여받은 누군가가 창작하는 것으로 인식된다. 사람은 예술가가 되기로 결정하고 그 방법을 배우는 것이 아니다. 현대의 예술가는 타고나는 것이다. 예술과 이론적으로 한 쌍인 미학도 18세기말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1735년 철학자 바움가르텐은 미학이라는 명칭을 감성적 지식에 대한 새로운 학이라고 정의했다. 그러나 근대 미학의 윤곽을 처음 세운 것은 칸트의 판단력 비판’(1790)이었다. 칸트는 이론적이고 실용적 지식과 판단의 비판적 기능을 구분하면서 미에 대한 철학의 윤곽을 잡았다.

    취미는 계급을 구분하는 수단으로 기능하며 또 문화적 규범을 정당화하는 전형적인 근거다. 천재라는 개념은 특권의 혜택으로 개발되는 재능이다. 천재가 타고나는 특성이라면 왜 천재여성은 없고, 천재유색인종은 없는가? 서구문화에서 천재는 모두 백인 남성이었다. 비교적 최근까지, 역사는 물론 인쇄할만한 가치가 있는 모든 뉴스는 남성이 만들어냈으며, 1960년대까지 신문의 1면에 여성이 나오지도 않았고, 주로 유명인이거나 누군가의 부인 또는 어머니로 등장했다. 고대의 유물들 중 여성상들은 여자를 묘사한 것이 아니라 풍요를 묘사한 것이다.

    어떠한 것이 되었든 간에 매체는(회화, 사진, 영상...) 전달되는 것이다. 미술은 배우는 것이 아니라 창조하는 것이다. 우리가 오늘날 알고 있는 형태의 박물관의 기초는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에 확립되었다. 박물관 혹은 미술관은 18세기말 성립된 부르주아 문화의 보관 장치인 동시에 그 이전의 왕권이 변형되어 남아 있는 잔해이기도 하다. 박물관의 전 단계로서 개인 컬렉션은 르네상스 이후에 나타난 문화의 단면이자 소유의식의 표상이다. 미술관의 출현은 자율적인 영역으로서 예술 개념의 성립과 동시에 이루어졌다. 인간의 가장 고상한 모습을 과시하는 곳으로써 미술관은 항상 교회나 성전을 연상시켰고 또 비유되어 왔다. 미술관의 흰 벽은 작품에서 구체성, 현장성을 제거해 중립적 추상공간에 놓고 미술을 나머지 세계와 분리시키는 것이다. 미술관 내의 작품들은 과거의 종교적, 세속적 기능에서 소원해지고, 소장품은 연대기, 국가, 유파별로 배열되어 예술이 세계와의 관계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율적으로 성장해 왔다는 인상을 심어준다. 미술작품이 사회의 여타 다른 물건들과 구별되기 어려운 현대에서는 미술관의 중요한 기능중 하나가 미술을 비미술로부터 구별해내는 틀을 제공하는 것이 되고, 그 맥락은 공들여 지은 건물, 액자, 좌대, 이름표, 유리관 등이다. 이에 따라 미술의 범위를 확인하는 선별 과정과 통과제의를 관장하는 미술관 관계자들의 취향과 철학이 하나의 제도로 자리 잡게 되었다. 오늘날 미술관은 TV 방송국이나 대기업, 신문사 등 대중매체에서 후원, 선전하는 대규모 인기 전시회 장소로 변모하고, 회화, 도록, 티셔츠, TV 쇼 등으로 포장되어 팔린다. 한쪽에선 편의시설이 필수적이 되었고, 상업 활동까지 벌어진다. 미술관은 여가활동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관광자원으로 지역경제에 큰 구실을 하기도 한다. 미술관의 이념적 폐허화를 주장하는 시각이 많음에도, 한편으로는 더 많은 미술관이 지어지고 있는 현상은 그것이 국가와 대기업의 문화주의 및 대중매체와 결합해 과거의 조건에서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있음을 말한다. 미술관과 화랑, 미학, 예술이란 용어와 마찬가지로 미술사 역시 근대의 발명품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가 이해하는 역사 역시 근대에 발명된 것이다. 문명이 시간을 통해 이어지며 선형적으로 성장을 하는, 진보하고 쇠퇴하는 그 무엇이라고 보는 것이 근대적이었다. 초기 근대미술은 근대 초기의 사회구조를 이루는 유기적이고 진보적이고 자기 반영적인 질서를 재현하고 있다. 20세기 초반까지의 근대 미술사는 사실적이고 환영적인 재현에서 더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이미지로서의 점진적인 발전의 역사다. 결국 추상은 그림이 단지 캔버스 위에 그려진 물감일 뿐이란 사실을 보여주게 되었다. 이는 20세기 초 추상 미술의 심각한 모순 중 하나다. 20세기에는 진보와 발전이라는 초기의 현대에 대한 개념이 무너진다. 미술가들은 자신을 반복하며, 기존 양식을 재활용하고, 연작을 제작하며, 똑같은 것을 여러 개로도 제작한다. 선형적인 독창성은 사라지게 된다. 20세기 초 추상 화가들은 이상주의적이었고 유토피아를 꿈꾸었다. 그들은 근대세계를 위한 보편적 언어 창조를 위해 사물이나 이야기, 민족이나 역사 등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관념적 이미지들의 침묵과 형태의 순수함이 반드시 형이상학적 세계를 본질적, 절대적으로 재현하는 것은 아니었다. 대신, 추상 양식은 그 작품에 사용된 재료만을 시각적으로 두드러지게 했다. 추상 미술은 그대세계의 보편적 언어가 되기보다는 몇몇 지식인만이 이해하고 감상할 줄 아는, 신비하고 비밀에 쌓인 주제가 되었으며 그 사정은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이 점이 바로 모더니즘의 실패이자 추상 미술의 실패라고도 할 수 있다. 그래서 모더니즘은 도전적인 그 무엇이 아니라 고상한 것으로 변해 갔고 미술관, 미술시장 등의 제도가 확대됨에 따라 관료제 문화, 거대제도로 정착되었다. 형식상 혁신의 연속, 아방가르드의 신화, 고급미술의 위치 등 모더니즘의 견고했던 실체는 지난 10-20년 사이에 역사에 대한 해체주의적 접근, 페미니즘 이론, 문화연구의 방법 등 여러 경로를 통해서 그 유효성이 의심받아 왔다. 창의력과 개성, 자아표현이 예술교육에서 최고 덕목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은 것도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현상이었다. 그런데 실상은 현대미술의 타자라고 할 수 있는 대중문화가 현대의 보편적인 언어가 된 것이다. 타자는 내가 아닌 모든 다른 사람이기 때문에 서구중심, 남성중심의 입장에서는 타자가 여성이거나 유색인종, 동성애 집단이며 항상 두렵고 지배해야 할 대상으로 간주되었다. 구조주의 영향을 받은 문화이론에서는 이 타자가 역으로 를 반영하고 정의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오늘날에는 몬드리안의 그림이 아니라 코카콜라의 상표가 현대세계의 보편적 상징이 되었다. 미술은 당연히 19세기에 발전된 현대사회 구조의 한 단면일 뿐이다. 미술이란 분야를 대중문화와 분리된, 현대 시각문화의 이른바 대분할(고급문화와 대중문화의 대분할이 성립된 것은 모더니티 문화의 큰 특징이다. 그래서 그 양자의 대립과 구분이 모호한 동시대의 문화를 포스트모던 현상의 한 면으로도 보는 시각도 있다.)에 의해 형성된 영역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대분할은 상호 침투적이면서도 계속 변화하는 것인 만큼, 미술과 대중문화는 각각 서로를 정의해주면서 동일한 역사적 지위를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18세기 서구에서 고급문화는 귀족층의 특권이었다. 우리가 순수미술이라고 여기는 것은 궁정생활에 필요한 장식 소품들이나 그 생활 배경과 동의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대중문화라고 여기는 것은 민속전통(공예, , 노래 등)과 유사한 것이다. 귀족적 유산과 민속전통은 계속 세대를 거쳐 보전되었다. 현대에 들어와서는 산업혁명과 사진, 영화, 라디오, tv 와 같은 신기술이 특정 계급이나 지역에 한정되지 않는 대중문화를 창조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20세기의 대중문화는 국제적인 것이 되었고 항상 변화에 민감하며 확장되는 시장과 관중을 위해 새로운 제품을 끊임없이 제공한다. 현대미술에서 독창성이 중요한 기준이 되었던 것처럼 이제는 새로움이 대중문화에서 찬양받게 되었다. 대중문화를 주제로 택한 팝 아트나 일련의 포스트 모더니즘적 경향은 고급문화와 대중문화의 구분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20세기 초의 미술은 대중매체의 발전과 연결지어 이해해야 한다. 20세기의 전반기 동안 미술가들은 근본적으로 새롭고 더 나은 현대세계를 창조하기 위해 대량생산과 관련된 새로운 기술들(사진술, 발전된 그래픽, 인쇄기술, 라디오, 영화)을 사용하고 싶어했다. 새로운 시대에 대한 관심과 혁명적인 문화변동은 추상의 발전과 무관한 것이 아니었다. 많은 미술가들이 추상을 실험하고 있을 무렵인 1913년을 전후로 또 다른 이들은 미술의 문화적 파급성, 바꾸어 말하면 미술의 제도적인 한계를 깨닫기 시작했다. 미술가들은 문자 그대로, 그림의 사각틀이라는 한계를 넘어서 무언가를 찾기 시작한 것이다. 인상파의 성공으로 본격화하기 시작한 아방가르드는 미술 자체에서의 자원이 고갈되자 대중문화와 키치를 사용하는 충격요법으로 그 속성을 재무장해 고급미술의 돌파구로 삼았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아방가르드는 그 대항적 성격을 상실해 결국 공식문화에 통합되고, 제도권에 대한 비판을 만회하려는 예술시장, 문화기관, 대중매체들에 의해 이용당하는 결과를 낳았다. 19세기 중반까지 서구의 주요 시각예술은 건축, 회화, 조각이었다. 오늘날 대중문화는 자생적인 민속 문화와는 달리 민중을 대신한 전문가 집단이 생산해 낸다. 20세기 후반에 들어서는 상대적으로 특권과 지위를 누려오던 고급문화도 대중문화에 흡수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비판적 의식이나 미학적 우월성 등으로 대변될 수 있는 고급미술도 그 특성을 잃고 대중문화로부터 구별하기 힘들어지게 되었다. 고급미술과 대중문화의 밀월은 팝 아트에서 뚜렷하게 가시화되었지만 그 과정은 돌발적인 것이 아니었으며 질적인 측면에서는 점차 상호 보완하게 되었다. 오늘날의 문화를 양적으로 지배하는 것은 순수예술이 아니라 사진, 영화, 라디오, TV, 비디오, 신문, 광고, 만화, 잡지, 음반 등의 대중매체다. 대중매체의 관점에서 본다면 순수예술이란 스포츠, 정치 같은 여러 사회문화의 영역 중 하나에 불과하며 그것을 흡수 활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반 고흐나 피카소의 영화, 전기, 소설, 등 순수예술이 대중매체의 소재가 되는 지금, 순수예술의 위상은 시장경제가 도래하기 이전의 산업사회와는 엄청나게 달라졌다. 예술이 대중매체와 경쟁하려는 것은 생각할 수조차 없는 것이지만 대중매체의 어법을 차용하여 순수예술에 사용함으로써 대중매체 중심의 질서를 약간은 교란시킬 수 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대중매체의 이미지나 힘을 약간 바꾸어 그것을 오히려 심미화시키는 데 그칠 우려가 크다. 순수예술은 시대착오적으로 보이지만, 바로 이런 주변성이 작가의 독립성과 표현의 자유를 가능케 함으로써, 그 시대와 거리를 둔 위치에서 정치적 의식과 비판적 태도를 가질 수 있게 하는 긍정적인 면도 있다.

    브라크와 피카소는 입체파라는 새로운 양식을 창조해냈는데, 그것은 우리가 자신과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과, 또 이것을 가장 개인적이고도 가장 높이 평가받는 창조성의 형태로 재현하고 소통하는 방식이 실은 인간자신의 외부에 존재하는 것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현대미술에 대한 대중적 이해와는 달리 피카소의 가장 큰 공헌은 입체파가 아니라 콜라주 collage였다. 콜라주는 서구회화의 전통에 중대한 전환점을 가져왔다. 유화물감과 캔버스의 유기적 통합성은 대량생산된 재료의 활용(신문지, 벽지, 잡지 등)과 도입으로 제동이 걸렸으며 순수회화의 성역은 파괴되었다. 이는 우선 자율적이고 심미화된 회화와 대중문화 사이의 경계를 허물었고, 두 번 째로는, 창의성에 대한 미술가의 자율적이고 절대적인 관계에 모순이 드러나게 했다. 그것은 자신들이 생산하지 않은 요소들을 사용해야 했고, 그리하여 창조를 하는 미술가들의 능력이란 그들 밖의 것에 의존하게 된 것이다. 그들의 작업들은 미술적 성취의 기준이 독창적인 양식(유일하고 창의적인 서명의 형태로 드러나는)의 유무에 기반해 있는. 양식이라는 이데올로기에 관한 진지한 탐구라고 할 수 있다. 일생에 걸친 피카소의 양식에 대한 분석은 현대에 주체성에 대한 연구로도 이해할 수 있다. 그는 개인이 정체성과 창조성의 원천이며 본질적으로 비역사적인 특성을 가졌다고 믿는, ‘주체라고 하는 자유주의적 인간주의 개념을 시각적으로 훌륭히 비판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현대의 천재 미술가 중에 가장 유명한 사람이 평생에 걸친 거대한 작업으로 바로 천재라는 신화를 해체하고 있음은 정말로 역설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뒤상도 바퀴와 의자라는 대량생산된 두 오브제를 결합함으로써 피카소와 브라크와 같이 무엇인가를 창작하는 것은 자신 외부에 존재하는 것들을 인식하고 이해하는 방식에 달려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또한 그는 우리가 문장을 만들기 위해 단어 두 개(혹은 여러 개)를 합치는 것처럼 이질적인 두 개의 사물을 결합시킨 것이다.(레디메이드) 콜라주와 레디메이드들은 모든 재현의 형태(그림이든 단어든 제스처든지)가 문화적 언어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그것은 우리가 인식하며 재현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문화적인 것이며, 이상적인 본질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에 의해 형성되는 것임을 심오하고도 근본적인 방식으로 생각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일들이 특정한 역사와 문화에 의해 형성될 뿐만 아니라 재현하는 것과 소통하는 방식조차 특정한 목소리에 묶여 있는 것이다. 그 목소리는 성과 인종, 국적,  정체성, 매우 개인적인 기억, 집단적인 기억, 그리고 역사까지도 포함하는 것이다. 퍼포먼스란 20세기 초 아방가르드 미술의 실험에서 장르 간의 벽을 넘고 고정관념을 깨뜨리려는 새로운 형식의 탐구에서 시작된다. 음악, 연극, 무용 같은 공연예술과는 구별되는 것으로 정해진 계획이나 대본이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으며 즉흥적, 우연적 요소가 개입되기도 하는 행위와 상황 창조의 총체적 형식이다. 미래주의, 다다이즘에서 주로 실험했으며 1950년대 미국에서 해프닝이란 이름으로 다시 시작되어 여러 형태로 변모하면서 지금까지도 실행되는 서구 미술의 주요한 형식이다. 어린이의 놀이나 샤머니즘의 굿, 행위가 개입된 불교의 선문답 같은 것도 넓은 의미의 퍼포먼스로 볼 수 있다.

    완벽한 기술로 캔버스에 물감을 칠하는 미술가라는 전통과 신화는 절대적이고 개인적인 창작의 영역에 대한 미술가의 지배를 은유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다.(이것은 서구의 백인 남성들이 세계와 그 자신을 연관지어 생각하는 방식이다.) 창조성에 관한 문제에서 그림과 콜라주는 매우 다르다. 어떤 의미에서 피카소는 좁게는 창작에 대한 미술가의 권력이라는 신화를, 보다 넓은 의미에서는 현대 남성과 세상의 관계에 대한 신화를 포기하는 것이다. 그러나 미술가의 창작 한계를 인정함으로써, 피카소나 브라크, 뒤상은 서구문화에서의 미와 가치들이 창조되는 방식을 탐구해 자신들과, 작품, 그리고 세계에 대해 보다 많은 지식과 권력을 획득했다고 할 수 있다. 그 즈음에,  1916 <일반언어학 강의>를 출판한 소쉬르의 중요한 공헌은 단어가 의미와 본질적인 관계를 갖고 있지 않다는 면에서 언어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힌 것이다. 의미는 관습을 통해 창조되는 것이며 특정한 맥락과 지역사회, 그리고 역사라는 한계를 가진 것이다. 소쉬르는 언어가 인위적인 사회적 구축물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1910년대에는 시각적 문화, 언어적 문화 양쪽 모두에서 재현이 불변의 자연질서에 따르는 것이 아님을 보여 주는 인물들이 나타난 것이다. 사실상 이러한 재현들은 특정 순간에 특정 역사에 의해 형성된 관습과 다름없는 것이다. 20세기 초 많은 분야에서 의미와 가치가 생산되는 방식에 대해 유사한 재평가가 있었다. 이 세계의 현상들이 영원불변한 본질의 그림자가 아니라, 항시 변하는 역사의 일부로 이해되었던 것이다. 이 변화는 음악과 문학, 심리학, 과학에서도 일어났고, 그 변수와 파장은 매우 넓다. 그 수많은 예 중 하나로, 이때 등장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가 있다. (소쉬르는 스위스의 언어학자로서, 기호학과 구조주의의 이론적 토대를 형성했다. 언어를 동전의 양면처럼 기표(소리)와 기의(개념 또는 정신적 이미지)로 나누고 그 관계는 순전히 인위적이라고 주장했다. 언어의 의미작용이 언어 자체의 고유 의미로 인해서가 아니라 서로의 차이와 그 축적으로 이루어진다고 분석했다.)

    추상성을 실험하던 20세기 초 미술가들은 추상미술이 현대세계의 미학적, 형이상학적 구원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때는 1차 세계대전의 시기로 사회적, 정치적 위기에 처한 미술가들은 사회에서의 자신의 역할을 재정립하고자 했다. 그들은 순수미술에 대한 전통적 생각들을 파괴하고자 했으며 미술의 제도적인 틀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고 미술과 관련된 기준과 실천방식들도 변해야 한다고 믿었다. 많은 미술가들은 문화와 현대사회에 활기를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미술을 창조적인 방법으로 일상생활에 통합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 미술가들은 국제 아방가르드라고 일컬어지는 모임들을 형성했다. 이 모임 중에는 미래파와 표현주의자, 다다이스트, 초현실주의자, 데 스테일, 바우하우스, 그리고 소비에트의 제도 내에서 작업하는 이들이 있었다. 191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서로 다른 나라에서 또 수많은 다른 방식으로, 각기 다른 의제와 다양한 정치적 서클을 가진 미술가들이 미술과 일상생활을 혁명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들은 자신의 작업을 사회변화의 도구로 생각했다. 회화와 조각을 계속 제작하는 동시에 잡지와 책도 출판했고, 전시회를 열었으며, 영화와 사진을 찍고 새로운 종류의 건축과 상품, 글씨체, 그래픽, 의상을 디자인했으며 또 선언물을 썼다.

    표현주의자는, 표현주의라는 용어가 처음 사용되었을 때는 인상주의와 반대되는 현대미술을 일컫는 의미였으나, 그 후에는 관찰된 실제로부터가 아니라 실제에 대한 주관적 반응에서 형태가 결정되는 미술을 뜻하게 되었다. 오늘날은 전통적 사실주의가 아닌, 화가의 감정으로 인해 왜곡된 형태가 색상을 나타내는 모든 미술을 통칭하기도 한다.

    이탈리아의 미래파는 현대세계의 새로운 미술은 현대기술(산업, 군사, 기계)의 가능성을 이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치적으로 파시스트였던 미래파는 자신들의 미술이 많은 관객들에게 전달되어야 한다는 것에 관심이 많았고 그 도구로 대중신문을 이용했다. 미래파들은 미술과 인생의 모든 면(회화, 건축, 요리와 섹스)에 대해 문화적 혁명을 제안하는 선언문을 썼다.

    다다이스트들 역시 의미 없고 엘리트주의적인 추구로 간주했던 전통적 순수미술과는 다른 작품을 창작하고자 했다. 그들은 문화에 활력을 주기 위해 미술에 대한 이전의 생각들을 근절시키고자 했다. 다다이스트들은 1916년 취리히의 한 카바레에서 시를 낭독하고 음악을 연주하는 공연을 하며 새로운 미술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다다이스트란, 세계 1차 대전 직후의 반 미술운동으로서, 전쟁으로 인한 문화적 후유증이라 할 수 있다. 물질적 이득을 가져다 준 새로운 기계시대의 테크놀로지가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엄청난 희생을 가져온 것에 대한 충격, 즉 모더니티의 과학과 기술발전의 이성적 힘이 유럽문명을 자기 파괴로 이르게 했다는 인식인 것이다. 다다는 이상적이거나 합리적이지 않은 것, 즉 황당무계하고, 유희적이며, 도전적이고 허무적이며 직관적이고 간접적인 것을 추구했다. 그래서 다다는 양식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다.

    초현실주의자들 역시 삶을 바꿀 수 있는 미술을 원했다. 그들은 미술이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는 오브제들로 제한되어야 한다고 믿지 않았다. 오히려 생동하는 현대적 삶의 적극적이고도 역동적인 수단이 되고자 했다. 초현실주의는 자신의 욕망과 인생의 멋진 것을 추구하는 새로운 생활방식이었다.(영화, 최면술, 강신술) 이를 성취하기 위해 초현실주의자들은 시를 쓰고, 회화와 조각을 만들고, 사지을 찍고, 영화를 찍고, 신문과 잡지, 책을 출판했다. 초현실주의는 무의식 세계와 꿈을 강조했으며 묘사적 초현실주의 추상적 표현 등의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났고, 후에 추상 표현주의에 영향을 끼쳤다. 프랑스의 다다운동을 흡수, 발전시켰으며, 다다가 전통적인 미술에 대한 거부 방식으로 이용한 방법과 과정들을 다시 활용했다.

    바우하우스나 소련에서의 실험들, 데 스테일에 관여한 미술가들은 현대세계를 다시 디자인하고자 했다. 바우하우스는, 1919년 건축가 그로피우스의 지도 아래 열린 미술학교로, 건축, 조각, 회화를 통합하고 실용 미술교육을 개혁하려는 데 그 목표를 두었다. 초기에는 수공예 전통과 창조적 직관을 중시하는 표현주의의 전통을 따르다가 곧 당시의 조류에 발맞추어 구성주의와 신조형주의의 원리에 따라 산업생산과 테크놀로지, 기능주의적 접근방식을 강조했다. 1933년 나치의 탄압으로 문을 닫았으나 1937년 미국에서 다시 문을 열었고, 20세기 미술교육과 디자인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데 스테일은, 1917년 테오 반 두스뷔르흐가 창간한 잡지 이름(네덜란드어로 스타일’)에서 비롯된 네덜란드 미술 집단으로, 이들의 목표는 우주의 직접적 표현이 될 순수 추상미술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몬드리안의 신조형주의는 데 스테일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였으며, 미술 외에도 건축, 가구 디자인 등이 포함되었다.

    국제 아방가르드 미술가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도달할 수 있는 문화의 새로운 수단들(라디오, 영화, 그림잡지, 레코드, 전시회 등)에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뉴스매체와 선전, 대중문화와 광고를 통해 현대세계를 창조적으로 변화시키는 자신들의 모습을 꿈꾸었다. 아방가르드는, 19세기 프랑스 예술계에서 쓰이기 시작한, 전위를 뜻하는 군사용어로 혁신과 실험을 중요시하는 태도 혹은 집단을 일컫는다. 반 부르주아적 특성을 지니며 모더니즘과 깊은 동반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나 모더니즘의 다분히 자기 충족적 미학과는 달리 아방가르드는 여러 방법으로(대중문화를 빌리거나, 정치 이데올로기와의 연대를 통해) 예술과 삶의 틈을 없애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국제 아방가르드들이 미래에 대해 품었던 전망은 실현되지 못했다. 미술가들은 대중매체의 앞서가는 창조자들이 되지 못했다. 오늘날 미술가들은 라디오나 tv 쇼를 연출하지 않는다. 그들은 광고 캠페인이나 히트하는 영화를 제작하고 있지도 않다. 순수미술의 제작과 수용은 아직도 대부분 심미적 기관들, 즉 화랑과 미술관, 미술학교, 경매장, 미술잡지, 신문의 미술면 같은 틀 안에서 이루어진다. 비록 우리가 국제 아방가르드에 의해 창작된 많은 혁신들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지만, 대중매체와 미술가들의 관계는 20세기 전반에 미술가들이 상상했던 것과는 매우 다른 것이 되었다. 대중매체의 주요 특징 중 하나는 대중적 이미지의 창조(히틀러, 채플린)였다.

    선전을 위한 미술의 이용은 전후 많은 미술가들로 하여금 미술의 정치적 메시지 및 기술, 대중매체의 이용을 배격하도록 만들었다. 40, 50년대 추상표현주의자들은 순수성과 진지함을 보여주는 추상화 같은 작품으로 회귀했다. 국제 상황주의(1957-72) 미술가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아방가르드 전통을 이어 다양한 매체와 반 미학적인 행위를 이용했다. 그러나 20세기 전반의 이상주의적 아방가르드와는 달리 국제 상황주의는 전후 자본주의와 대중매체의 모습에 주목하면서 전후의 통제되는 소비의 관료사회를 스펙터클의 사회라 부르며 비판했다. 국제 상황주의는, 1960년대 활약한 소규모의 아방가르드 마르크스주의 집단으로, 소비 사회의 상품 숭배와 스펙터클의 사회에서의 일반 시민들의 수동성에 대한 비판과 개입으로 일상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미술과 일상의 경계를 해소하는 작업을 내세우다가 1962년 미술 생산 자체가 혁명과업의 바깥에서 주로 일어나기 때문에 반 상황주의적이라고 선언했으며 1972년 해체되었다.

    오늘날은 20세기 초에 불타올랐던 유토피아주의가 사라졌다. 추상표현주의는 현대 미술사의 절정이며, 완전히 새롭고 독창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이는 사실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자주 일컬어지는, 전후 문화와 동시대 미술의 특징이라고도 할 수 있고, 이전의 양식들을 재활용하는 것의 시작일 뿐이었다. 팝 아트라고 부르는, 추상표현주의의 뒤를 이은 양식은 초기에는 많은 경우 네오 다다 Neo-Dada로 알려져 있었다. 이는 포스트모더니즘이 단순한 양식의 재활용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여러 양식과 본격 모더니즘, 그리고 미술과 미학의 자율적인 영역의 신화에 대해서 비판적이고 역사적인 관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미술에서의 포스트모더니즘과 모더니즘을 구분하는 기준은 모호하고 다양하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추상이나 환원적 양식에서 과거의 묘사적 양식으로 돌아간 경향, 퍼포먼스나 설치, 비디오 아트 같은 실험적 경향, 과거의 양식을 차용하고 역설적 모방을 하는 경향, 영역이 모호한 복합적인 미술의 경향, 개념 미술적이면서도 정치적인 비판의 의도를 강하게 띤 미술 등을 말한다. 미술의 포스트모더니즘은 철학의 포스트모더니즘(계몽주의와 이성, 진보에 대한 신념의 포기)과 사회학적 포스트모더니즘(산업사회 이후나 테크놀로지 혁명으로 인한 변모) 또는 건축의 포스트모더니즘(과거 양식으로서의 회귀나 절충적 양식의 활용), 문학의 포스트모더니즘(내러티브 포기 또는 해체주의)과 동일한 것이 아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의 미술은 아직도 대부분 정해진 미학적인 체계, 즉 화랑과 대안적인 전시공간(비영리적 기관), 미술관, 미술잡지, 미술사와 경매장의 테두리 안에 남아 있었다. 이것은 20세기 전반의 지배적인 양상들이었던 다다나 초현실주의, 바우하우스, 데 스테일, 소비에트의 그룹들이 미술의 틀을 해체하고 미술의 실천과 교육, 전파와 수용 등을 위해서 새로운 제도들을 창조하던 것과는 매우 다른 모습이다. 전후 시대에 들어서서(특히 1960, 70년대 이후) 미술체계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개별적인 미술작품들보다 더욱 강력해졌다. 현대미술을 보여 주고 보존, 출판하는 다양한 체제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어느 정도 싹트고 있었다. 1950년대 이래로 이 체계들은 보다 강화되고 발전하여 이제는 미술 그 자체보다 더 강력해졌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미술보다 더 흥미로운 것이 되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미학적인 문제들을 해명하기 위해 미술 잡지나 대중신문을 읽지 않고, 그 대신 한 미술작품이 미술계의 작품들 속으로 흡수되어 가는 방식에 흥미를 더 가진다. 많은 이들은 한 미술가가 그림의 구성을 어떻게 해결했는지 알기 위해 미술기사를 읽기보다는, 급등하거나 폭락하는 경매가격에 대한 기사나 누가 유명 미술관을 운영하는지, 수집가가 어떤 이유로 특정한 사진을 구입하는지를 알기 위해 이를 읽는 것이다. 오늘날의 기사와 에세이들은 주변 동네의 땅값을 올리는 화랑들에 대한 화젯거리 등을 다루고 있다. 잡지 사진들은 새로 디자인된 미술가의 로프트(공장을 변형시킨 작업실)에 대한 것이며 가장 격렬한 미학적인 논쟁은 정부의 지원 기금과 관련된 최신 법제나 국회의사당에서 일어나는 검열 논쟁에 대한 것이다.

    오늘날의 미술가들은 개성적인 작품 창작에만 자신들을 국한시키지 않는다. 대신 미술체계들과 상호 작용하는 오브제나 프로젝트 또는 설치 작품 등을 제작한다. 이 미술가들은 화랑이나, 미술관들, 출판사, 후원자들, 미술시장의 힘을 비판하거나 그것과 함께 작업하기 때문에 그들의 작업은 미술의 수용과 분배를 위한 매개체 제도에 완전히 조절되지는 않는다. 이러한 경향으로 작업하는 화가는 미술가-제작자로 생각할 수 있다. 그들은 또한 문화제도와 함께 작업한다. 설치란, 전통적 그림이나 조각이 아닌 특수한 전시를 위해 전시 공간이나 이외에 구축해 놓은 환경적, 맥락적 성격의 작품을 말한다. 액자나 좌대가 작품을 외부 공간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것과는 달리 관객을 작품 영역으로 포함시키는데 그 고유한 성격이 있다. 20세기 초의 아방가르드 미술의 실험에서 이미 나타났으나, 1970, 80년대 서구미술에서 본격적으로 유행했으며, 일회적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서는 그림이나 조각 같은 상품성이 없는 것이 특색이다.

    참여예술, 시민의 모임, 그룹 머티리얼, 문화적 행동주의, 액트-, WHAM, WAC, 미니멀리즘, 퀼트를 이용한 이름 프로젝트, 이와 같은 프로젝트는 미술과 일상생활, 미술과 대중문화, 미술계를 비롯, 모든 사람들 사이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강력하고도 의미 있는 창작물임을 보여준다. 이제 대중문화(할리우드의 영화, TV, 라디오 소리와 이미지)들도 현대세계의 보편적인 언어가 되었다. 로큰롤은 대량관객에게 호소하려고 하는 반항적인 청년문화의 창조물이다. 앨비스 프레슬리, 비틀스, 마돈나도 우리 문화의 여성적 스테레오타입에 대해 다루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수백만이 보고, 듣고 싶어하는 팝 뮤직과 비디오를 통해서 이 주제를 가지고 유희하며 이용하고, 또 도전한다. 이제는 미술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이 시장성이라는 것과, 대중을 위한 언어를 사용하는 랩과 월드 비트, 팝과 애스니 록 음악과 같은 대중문화의 풍부한 표현력을 고려해본다면, 미술을 고급으로, 그리고 대중문화와 상업은 저급으로 동일시하는 판단 기준을 버려야 할 때다. 미술은 때때로 대중문화와도 교차하거나 결합하는, 매우 강력한 하위문화 중 하나다. 또 최상의 상태일 때, 미술은 풍부한 표현과 아름다움, 그리고 엄격한 사회비판을 제공한다.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미술가들은 우리가 세계를 다른 방식으로 보도록 도전했기 때문에 예언자적 구실을 한다. 그들은 우리 문화를 계몽적이고도 어떤 때는 아름다운 방식으로 재현하며 새로운 개념(새롭게 보는 방식)을 위해 우리의 정신과 영혼을 준비시켜 주는 것이다. 하위문화란, 지배문화를 이념적으로 전복하려 하지 않고 그것에 대한 상징적 저항과 함께 의상, 말투, 음악 같은 영역에서의 자율성을 추구한다. 지배문화에 혁신적인 것(음악그룹이나 유행의상 등)을 제공함으로써 새로운 상품을 필요로 하는 자본주의 체제에 기여하는 면도 있다.

    박물관과 그 안에 보존된 미술품들은 역사와 사회관습으로 형성된 제도이며, 이것들이 한 문화의 미술과 신화뿐만 아니라 의미와 권력이 유지되는 방식까지 명백하게 보여준다. 모든 것이 문화에 의해 형성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우리가 우리의 현실을 창조한다는 것도 쉽게 인정할 수 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이에 기여하고 또 바꿀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시각은 우리 사진과 세계를 보는 방식일 뿐 아니라, 살아가는 데에 우리가 주체가 되는 강력한 방식이기도 하다. 예술가는 선구자이며, 진정한 예술은 미래의 사회건설에 기여할 수 있다는 20세기 초의 아방가르드 이념과 유토피아에 대한 환상이 사라진지는 이미 오래되었지만, 아방가르드의 현실 비판적 유산이 부분적으로 남아 있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다.

    전자미디어는 개인적 정체성을 퇴화시키고, 개인적 정체성이 퇴화되면 도덕심이 사라져 버린다. 이 시대의 지배적인 문화적 시대정신인 포스트모더니즘이 문명을 옹호하는데 핵심적이고 기만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냉소주의, 상대주의, 피상성 같은 특징이 포스트모더니즘을 이루는 요소이며, 화려한 수사로 치장된 포스트모더니즘 사회이론은 문명화된 사회적 존재에 대한 비판을 아예 차단하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핵심적 특징의 하나인 분석에 대한 혐오는 우리가 분석해서 알아내야 할 현재의 상태와 문제를 감출 수 있고 또 실제로 감추고 있다. 경제, 문학, 예술, 철학, 정치, 그리고 모든 사회 및 개인적 삶에 공통된 근본적인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현재 세계에 대한 깊음 불만이다. 인간의 지성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하는 이런 학문과 문화양식은 모두 비통하게 울부짖으며 현 세계의 근본적인 변화를 호소하고 있다. 문명은 강제 수단이 있어야 안전을 보장할 수 있다고 믿는 하나의 문화적, 정신적 관점이다. 이런 방식 때문에 전 세계는 UN의 모든 사회 프로그램을 300년 간 지원할 수 있을 정도의 막대한 금액을 1987년 한 해의 군사비로 지출했다. 모든 중독을 치료하는 첫 단계는 자신이 믿었던 것이 망상이었음을 깨닫는 일이다. 문명은 자신의 현실 인식이 스스로를 죽음으로 이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문제는 불균형이며 해결책은 균형을 회복하는 것이다. 살인자, 강간범, 대량학살의 범죄자들은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이 죽어야 한다는 현대세계의 근본 논리를 잘 체화한 사람들이다. 문명화된다는 것은 당신 자신의 삶과 타인의 삶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또한 당신이 운명적으로 그곳에 태어나서 삶을 살아가게 되는 집단의 이익에 따라 자신의 삶이 이용, 착취, 지배당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사람들은 소속집단 지배자들의 경제적, 정치적 이익 등을 위해 복종한다. 이러한 복종의 대가로 사람들은 그곳에서 인간으로 인정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여받는다. 또한 문명화된다는 것은 권력자들이 자신의 문제를 전쟁으로 해결하려 할 때 당신의 삶뿐만이 아니라 타인의 삶까지 희생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쟁이 가져다주는 다양한 이득은 제쳐두고라도 전쟁은 희생자로 지정된 사람들, 요컨대, 억압되고 유린되고 살해될 사람들을 향해 아무런 가책 없이 가해자의 좌절감을 표현하기에 매우 효과적인 수단이다. 고통을 겪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 것을 즐기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사회의 존립에 유용할 때만 삶의 중요성이 인정되는 그런 도구에 불과한 존재가 된다. 동구권의 붕괴와 해체 이후 더 많은 이익을 얻기 위해 국내의 정치적 갱들은 종교와 민족주의적인 카드를 쉽게 꺼내들었다. 만약 불행하게도 이 카드들이 효과를 발휘한다면, 그것은 이들 국가의 일부 국민들이 이런 붕괴와 해체를 자유 증대의 기회로 인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이들은 엄청난 공허함을 느꼈는데, 이 공허함은 자국의 역사와 문화를 과장하는 민족주의적이고 종교적인 관심 고취로 누그러졌다.

     

    404. 시는 묘사도 표현도 아니다. 시는 세계가 주는 감동을 담아낸 그림도 아니다. 시는 하나의 작용이다. 시는 해석을 요구하지 않으며, 어떤 해석의 실마리도 존재하지 않는다. 시는 우리가 그 작용 안으로 들어올 것을 요구하며, 수수께끼는 그러한 요구 자체이다. 시 안으로 뛰어들 것, 시가 무슨 말을 하는지를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시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사유하기 위해서 시 안에 뛰어들 것, 시는 하나의 작용인 까닭에, 하나의 사건이기도 하다. 시는 사건이 일어나듯이 일어난다. 그 표면의 수수께끼는 이 일어남을 가리키는 것이며, 언어 속에서의 어떤 일어남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시의 진정한 관계는 사유와 현전 사이의 관계이며, 이때 사유는 어떤 주체의 것도 아니고, 현전은 대상을 넘어서는 것이다. 언어의 양 극단에서 가장 순수한 보편성을 대변하는 것은 시와 수학이다. 시의 작용과 수학의 연역은 모두를 대상으로 하는 것의 모범적인 예이다. 실제로 시에서 생겨나는 모든 차이는 언어들 간의 차이라기보다는 언어 안에서 어떤 시점에 시의 작용들이 다룰 수 있는 서로 다른 영역들 간의 차이이다.

    우리는 우리가 세계의 연결의 포로가 아님을 알고 있다. 더 본질적으로 말하자면, 연결 또는 관계의 이념은 거짓이다. 진리를 떠받치고 있는 것은 안정성이 아니라 불안정성이다. 문제는 정확한 판단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식별할 수 없는 것의 중얼거림을 만드는 것이다. 문자들 속의 신비 앞에서, 즉 시 앞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독자는 시의 작용들 앞에 자신을 열어놓기만 하면, 그 앞에 문자적으로(문자 그대로) 자신을 열어놓기만 하면 충분하다. 자기 스스로가 문통되기를 바라야 하는 것이다. 한 시대는 저절로 시인의 존재를 안다. 모든 언어는 훌륭한 시 속에서 그 역량을 재발견하는 법이다. 이 세계의 모든 노력은 플라톤이라는 질병을 치료하기 위한 것이며, 반플라톤주의는 엄밀한 의미에서 우리 시대의 공통분모이다. 이것은 니체로부터 베르그손을 거쳐 들뢰즈에 이르는 생의 철학, 또는 잠재적인 것의 역량의 철학들의 사유 노선에서 핵심적이다. 이 사람들에게 있어 개념의 초월적 이념성은 생의 창조적 내재성과 반대 방향으로 향하는 것이다. 즉 참의 영원성은 치명적인 허구이다. 진정한 진리는 우리가 그 진리를 선택할 수 있다는 조건 하에서만 있을 수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바로 이 때문에 철학은 언제나 진리와 자유를 연결시켜왔던 것이다. 진리의 본질은 다름 아닌 자유인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우리 시대의 사유의 주요 문제는, 주인의 형상을 거치지 않고, 이 형상을 만들어내지도 희생시키지도 않고 공백에서 진리로 가는 선택과 결정에 관한 사유를 찾아내는 것이다. 우리가 간직해야 할 것은 진리가 장소에 내재적이라는 신념, 진리는 밖에 있지 않고, 비인격적이고 초월적인 힘이 아니라는 신념이다. 하지만 이를 위해 어떤 주인을 만들어내지는 말아야 한다. 그러기 위한 조건들은 ;1.절대적인 하나의 진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개의 진리가 있다. 이 진리의 복수성은 핵심적이다. 진리들의 다수성을 확고부동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2.각 진리는 하나의 과정이지 판단이나 사물의 상태가 아니다. 이 과정은 이론상 무한하며, 다시 말해 완성될 수 없다. 3.이 진리의 무한한 과정의 모든 유한한 순간을 한 진리의 주체라고 부른다. 따라서 주체는 진리에 대한 어떠한 지배권도 없으며, 동시에 진리에 내재적이다. 4.진리의 모든 과정은 어떤 사건으로부터 시작된다. 사건은 예측불가능하며, 계산 불가능하다. 사건은 상황에 덧붙여진 것이다. 모든 진리와 모든 주체는 사건의 출현에 의존한다. 진리와 진리의 주체는 여기 있는 것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강한 의미에서의 일어나는 일에서 나온다. 5.사건은 상황의 공백을 드러낸다. 여기 있는 것에는 진리가 없었음을 사건이 보여주기 때문이다. 주체가 어떤 진리의 과정의 일부분으로서 구성되는 것은 이 공백에서부터이다. 주체를 상황 또는 장소로부터 떼어놓고, 이전에 없던 궤도 위에 새겨 넣는 것이 이 공백이다. 하지만 이 시련은 어떤 지배도 만들지 않는다. 기껏해야 완전히 일반적인 방식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주체는 어떤 것이든지 한 진리의 鬪士투사라는 점이다. 6.주체를 진리와 맺어주는 선택은 계속 존재하겠다는 선택이다. 사건이 대한 충실성, 공백에 대한 충실성이다.

     

    405. 니체에게 있어 춤은 사유에 없어서는 안 되는 은유이다. 그것은 춤이 차라투스트라의 커다란 적, 그가 중력의 악령이라고 지칭한 적에 반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춤은 무엇보다도 중력의 악령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사유의 이미지이다. 이 벗어남의 다른 이미지들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한데, 왜냐하면 이 이미지들은 춤을 치밀한 은유의 망 안에 새겨 넣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새가 있다. 춤은 새의 천성이 분명하다. 이것이 첫 번째 은유적 관계, 춤과 새의 관계이다. 말하자면 몸 안에 있는 새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의 발아가 춤으로서의 탄생이 있는 것이다. 더 일반적으로는 飛上비상의 이미지가 있다. 그리고 춤이 대지에 주어진 새로운 이름이라고 말하는 것은 확실히 매우 아름답고 적절한 춤의 정의일 것이다. 또한 어린아이도 있다. 어린아이는 천진난만이요, 망각이며, 새로운 시작, 놀이, 스스로의 힘에 의해 돌아가는 바퀴, 최초의 운동, 거룩한 긍정이다. 어린아이는 차라투스트라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앞부분에 나오는 세 번째 변화로, 춤의 반대편에 있는 낙타와. 새로 시작되는 땅을 가볍다고 부르기에는 너무 사나운 사자 다음에 오는 것이다. 그리고 사실 새이며 비상인 춤은 천진난만이며, 이는 춤이 몸 이전의 몸인 까닭이다. 춤은 망각이며, 이는 춤이 자신의 부자유를, 스스로의 무게를 잊은 몸이기 때문이다. 춤은 새로운 시작이며, 이는 춤 동작이 언제나 스스로의 시작을 만들어내는 것 같아야 하기 때문이다. 춤은 물론 놀이이기도 하며, 이는 춤이 사회적 모방으로부터, 진지함으로부터, 예의로부터 몸을 완전히 해방시키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힘에 의해 돌아가는 바퀴, 이것은 춤에 대한 매우 아름다운 정의일 수 있다. 사실 춤은 공간 속의 원 같은 것이지만, 그 원은 자신이 스스로의 원리인 원, 밖에서 그려지지 않은 원, 스스로를 그리는 원이다. 춤이 최초의 운동(동인)인 것은 춤의 각각의 궤적, 매 동작은 다른 것의 결과가 아니라 운동성의 원천 자체인 것처럼 나타나야 하기 때문이다. 춤이 거룩한 긍정인 까닭은, 춤 속에서 부정적인 몸, 부끄러운 몸은 찬란하게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서 니체는, 여전히 중력의 악령을 무너뜨리는 이미지들의 계열 안에서, 샘에 관해서도 말한다. 나의 영혼 또한 솟아오르는 샘이며, 확실히 춤추는 몸은 바닥을 떠나, 자기 자신을 떠나 문자 그대로 솟아오르는 상태이다. 마지막으로 공기(대기), 공기라는 원소가 있어, 이 모두를 요약한다. 춤은 대지 자체를 공기 같다고 부를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춤 속에서 대지는 지속적인 공기의 흐름을 내포하는 것으로 생각되고, 춤은 대지의 숨결, 대지의 호흡을 가정한다. 이는 춤의 중심적인 문제가 수직성과 인력 사이의 관계, 춤추는 몸 안을 통과하고, 춤추는 몸으로 하여금 대지와 대기가 서로 자리를 바꾸고 하나가 다른 것 안을 통과하는, 그러한 역설적인 가능성을 드러낼 수 있게 하는 수직성과 인력 사이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이유 때문에 사유는 춤 속에서 자신의 은유를 발견하고, 춤은 새, , 어린아이, 만질 수 없는 공기라는 일련(의 은유들)을 요약하는 것이다. 확실히 이 일련(의 은유들)은 천진난만하고, 거의 교태스러운 것처럼 보일 수 있으며, 아무것도 떠받치지 않고 무엇에도 짓눌리지 않는 어린아이의 동화 같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것은 역량과 분노와의 관계 속에서 니체가(춤이) 가로지른 것이라는 점이다. 춤은 이 일려(의 은유들) 중의 한 항이자, 이들을 난폭하게 가로지르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도 춤에 미쳐 있는 나의 발이라고 말하게 된다. 춤은 천진난만함의 지배 하에서 이 가로지름을 형상화한다. 춤은 샘과 새, 어린아이로 나타난 것에 숨어 있는 독기를 드러낸다. 사실 춤이 사유를 은유화한다는 생각의 근거가 되는 것은 사유가 강화하는 니체의 확신이다. 이 확신이 주로 반대하는 것은 사유 안에서 어떤 원리를 보며 그 원리의 실현 방식은 사유 외부에 있다고 생각하는 테제이다. 니체에게 있어 사유는 그것이 주어진 곳 이외의 다른 곳에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효력이 발생하는 것이며, 사유란 말하자면 자기 자신에 대해서 강화되는 것, 또는 자신의 강도의 운동이다. 그래서 춤의 이미지를 말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춤의 이미지는 내재적인 강화로서의 사유의 이념을 시각적으로 전달한다. 더 나아가 춤의 어떤 비전이라는 말까지도 할 수 있다. 사실 은유가 가치 있는 것은 유연한 몸에 부과되는 외부의 강제라는, 밖에서 규제되는 춤추는 몸의 기계적 동작이라는 춤의 표상으로부터 완전히 거리를 두는 경우뿐이기 때문이다. 니체는 그가 춤이라고 부른 것을 이러한 기계적 동작에 완전히 대립되는 것으로 보았다. 요컨대 우리는 춤이 우리에게 명령을 잘 따르고 근육질인 몸을, 능력 있는 동시에 복종하는 몸을 보여주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말하자면 안무를 따르도록 훈련된 몸의 시스템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니체에게 이런 몸은 춤추는 몸의 반대편에 있는 것, 자신 속에서 대기와 대지를 맞바꾸는 몸의 반대편에 있는 것이다. 니체가 보기에 춤의 반대편은 나쁜 독일인으로, 복종과 튼튼한 다리로 군대의 행진을 하는, 이는 줄 맞춰 서서 쿵쿵거리는 몸, 매여 있으며 시끄러운 소리를 내는 몸이다. 단조로운 박자에 맞춰 움직이는 몸 말이다. 반면에 춤은 속박에서 풀려난 공기 같은 몸, 수직적인 몸이다. 결코 쿵쿵거리는 몸이 아니라 발 끝으로 선 몸이며, 바닥을 마치 구름인 듯 찌르는 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춤은 말 없는 몸이며, 자신의 무거운 () 구름이 내는 우레 소리가 나중에 규정하는 몸, 군대 행진의 몸에 반대되는 몸이다. 결국 니체에게 춤은 수직적인 사유, 자신의 높이를 향하는 사유를 의미한다. 이것은 물론 긍정이라는 테마와 연결되어 있고, 니체에게 긍정은 태양이 자오선에 놓였을 때인 위대한 정오의 이미지 안에서 이해된 것이다. 춤은 자신의 자오선에 바쳐진 몸인 것이다. 하지만 아마도 보다 심층적으로는, 니체가 춤에서 본 것, 사유의 이미지이자 몸의 실상으로서 본 곳은, 자기 자신에 단단히 매여 있는 운동성, 어떤 외부의 규정에 새겨져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중심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 움직이는 운동성이라는 테마이다. 강요되지 않은 운동성, 그 중심을 확장하는 것처럼 전개되는 운동성 말이다. 물론 춤은 생성으로서의 사유, 활동 중인 역량으로서의 사유라는 니체의 생각에 부합한다. 하지만 이 생성이란 거기에서 유일한 긍정적 내면성이 해방되는 것으로서의 생성이다. 운동은 위치 이동이나 변형이 아니라 긍정의 영원한 유일성이 가로지르고 지속시키는 궤적이다. 이 결과 춤은 신체적 충동의 능력, 주로 자기 밖의 공간으로 분출되는 충동의 능력이라기보다는 충동을 억제하는 긍정적 인력 안에 사로잡히는 능력을 가리킨다. 아마 가장 중요한 점은, 춤은 운동이나 운동의 외적인 윤곽 안에서 민첩함을 보여주는 것을 넘어서, 운동을 억제하는 힘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점일 것이다. 확실히 억제하는 힘은 운동 자체 안에서만 보여줄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이 억제를 분명히 읽어낼 수 있게 하는 일이다. 이렇게 이해된 춤에서 운동의 본질은 일어나지 않았던 것 안에, 운동 자체의 내부에 억제되어 있거나 현실화 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는 것 안에 있다. 이는 또한 춤의 이념에 부정적으로 접근하는 다른 한 가지 방법일 것이다. 실제로, 억제되지 않은 충동, 분명하고 곧바로 이루어지는 신체적 유혹을 니체는 천박함이라고 부른다. 그는 모든 천박함이란 모든 자극에 반드시 반응해야만 하는 상태, 개개의 충동에 모두 따르는 모습이라고 썼다. 그러므로 우리는 춤을 천박함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몸의 운동이라고 정의할 것이다. 춤은 결코 해방된 신체적 충동, 원시적인 몸의 에너지가 아니다. 반대로 춤은 몸이 어떤 충동에 거역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춤은 어떻게 운동 속에 충동이 실현되지 않은 채로 억제되어 있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며, 따라서 중요한 것은 복종이 아니라 억제이다. 춤은 세련됨으로서의 사유이다. 나는 춤을 원초적 엑스터시나 모든 것을 잊고 몸을 반복적으로 흔들어대는 일로 보는 모든 이론적 입장에 반대한다. 춤이 가볍고 미묘한 사유의 은유가 되는 것은 바로 춤이 운동에 내재적인 억제를 보여주며, 그래서 몸의 본능적인 저속함에 맞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벼움으로서의 춤이라는 테마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사유할 수 있다. 춤이 무거운 정신에 반대된다는 말도 맞고, 대지에 가벼운 것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부여한다는 말도 맞다. 하지만 가벼움이란 무게가 없는 것이라고 말해서는 별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없다. 가벼움이라는 것은 몸이 스스로를 매어 있지 않은 몸으로 드러내는 능력이라고, 자기 자신에게도 매여 있지 않은 몸으로, 다시 말해 자신의 충동조차도 거역하는 몸으로 드러내는 능력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이렇게 몸이 충동을 거역하는 것은 독일의 복종과 튼튼한 다리에 반대되는 것이지만, 특히 이것을 위해서는 느림의 원칙이 필요하다. 가벼움의 본질은 빠른 것에 숨겨진 느림을 드러내는 능력에 있으며, 이 점에서 춤은 가벼움의 최고의 이미지이다. 춤의 운동은 물론 극도로 민첩한 것이며, 심지어는 빠르기에 있어 어떤 경지에 이른 것이지만, 이는 그 운동을 억제하는 긍정적인 역량인 숨은 느림이 거기에 있는 한에서만 그러하다. 니체는 의지가 배워야 할 것은 느려지고 의심이 많아지는 것이다라고 단언했다. 말하자면 춤은 사유체의 느림과 불신의 확장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무용수는 의지가 배울 수 있는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이로부터 분명히 얻을 수 있는 결론은, 춤의 본질은 현실적인 운동이라기보다는 잠재적인 운동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춤의 본질은 현실적인 운동에 숨어 있는 느림으로서의 잠재적인 운동이다. 또는 보다 정확히 말해, 춤은 어떤 경지에 이른 극도의 민첩함 속에서 숨겨진 느림을 드러내며, 그 느림 속에서는 일어나는 일과 그것의 유보(억제)가 서로 구별할 수 없는 것이 된다. 예술의 정점에서 춤이 보여주는 기이한 등가성은 민첩함과 느림 사이에만이 아니라 몸짓과 몸짓 아닌 것 사이에도 존재한다. 춤이 알려주는 것은 운동이 이미 일어났음에도 이 일어남은 잠재적인 일어나지 않음과 구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춤을 이루는 몸짓들은 그 몸짓을 유보함이 자기 안에 깃들어 있어 어떤 의미에서는 결정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는 것이다. 이러한 니체의 해설이 암시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춤은, 모든 진정한 사유는 어떤 사건에 달려 있다는 사실의 은유일 것이다. 사실 사건이라는 것은 바로 일어남과 일어나지 않음 사이에서 결정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것, 사라짐과 구별할 수 없는 출현이나 말이다. 사건은 여기 있는 것 위에 추가되지만, 이 덧붙여진 것이 지적되자마자 여기 있음은 자기 권리를 되찾고 모든 것을 장악하게 된다. 물론 어떤 사건을 고정시키는 유일한 방법은 거기에 어떤 이름을 붙이는 것, 여분의 이름으로 사건을 여기 있음에 새겨 넣는 것이다. 사건 그 자체는 스스로의 사라짐일 뿐이지만, 새겨 넣음은 사건과 그것의 상실 사이의 황금빛 경계선 같은 곳에서 사건을 붙잡아 둘 수 있다. 이름은 이미 일어났음을 결정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춤이 가리키는 것은 사건으로서의 사유, 하지만 이름을 가지기 이전의, 자신의 진정한 사라짐과의 완전한 경계에 있는 사유, 사건 자체의 스러짐 안에 있는 사유, 이름이라는 피난처가 없는 사건으로서의 사유일 것이다. 춤은 아직 결정되지 않은 사유를 흉내 내는 것일 터이다. 춤은 아마도 천연의 사유, 또는 고정되지 않은 사유일 것이다. 확실히 춤 속에는 고정되지 않은 것의 은유가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하여 춤은 공간 곳에서 시간 노릇을 해야 함이 밝혀지는 것 같다. 사실 하나의 사건은 이름을 통해 고정됨으로서 하나의 독특한 시간의 토대가 된다. 흔적이 남고, 이름이 붙고, 새겨진 사건은 상황 속에, ‘여기 있음 속에 이전과 이후를 그린다. 하나의 시간이 존재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춤이 이름 이전의 사건의 은유라면, 춤은 이름만이 단절을 통해 만들어낼 수 있는 시간의 성질을 띨 수 있다. 춤은 시간적 결정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춤에는 시간 이전의, 전 시간적인 어떤 것이 있다. 그리고 이 전 시간적인 요소는 공간 속에서 시간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춤은 공간 속에서 시간을 중단시키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춤이 찰나에 사로잡힌 몸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찰나라는 것은 있게 될 시간 이전의 시간이다. 찰나를 공간에 펼쳐 놓는 것으로서의 춤은 모든 사유가 기초하고 조직하는 것의 은유가 될 것이다. 또한 이렇게도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춤은 명명 이전의 사건 노릇을 하며, 그 결과 이름 대신에 침묵이 있게 된다고. 춤은, 그것이 시간 이전의 공간인 것과 완전히 마찬가지로, 이름 이전의 침묵을 드러낸다. 곧바로 제기될 반론은 분명히 음악의 역할에 대해서일 것이다. 모든 춤은 철저하게 음악의 관할 하에 놓여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어떻게 우리가 침묵을 말할 수 있겠는가? 확실히 춤을 생각하는 방식 중에는 춤을 음악에 사로잡힌, 보다 정확히 말해 리듬에 사로잡힌 몸으로 기술하는 방식이 있다. 하지만 이런 사고방식은 여전히 복종과 튼튼한 다리인 우리의 무거운 독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며, 복종해야 할 주인이 음악이라고 해도 달라질 것은 없다. 주저 없이 말하건대, 음악에 복종하는 모든 춤은 그 음악이 쇼팽의 것이든 볼레즈의 것이든 그것을 군악으로 만들어버리며, 동시에 춤 자체는 나쁜 독일로 변해버린다. 아무리 역설적으로 보일지라도,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해야 한다. 춤의 입장에서 음악의 일은 침묵을 표시 나게 하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음악은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며, 이는 침묵이 침묵으로 드러나려면 표시가 나야 하기 때문이다. 침묵이란 무엇의 침묵을 말하는 것인가? 이름의 침묵이다. 춤이 이름의 침묵 속에서 사건을 명명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침묵의 자리를 지시하는 것은 음악이다. 이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다. 춤의 근본적인 침묵을 지시할 수 있는 것은 극도로 농축된 소리뿐이므로, 그리고 극도로 농축된 소리는 음악이므로, 그러므로 춤추는 튼튼한 다리들이 음악의 지시를 따르는 것처럼 보이는 겉모습과는 정반대로, 실제로 음악에 명령을 내리는 것은 춤이며, 이는 음악이 근본적인 침묵을 표시 나게 한다는 의미에서이고, 그 침묵 속에서 춤은 천연의 사유를 우연적이며 사라져버리는 이름의 체계 속에서 드러낸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모든 사유의 사건적 차원의 은유로서 파악된 춤은 그것을 지탱하는 음악보다 앞서는 것이다. 이런 예비적 고찰로부터, 다른 귀결들과 함께, 춤의 원리들이라고 부르게 될 것이 나온다. 이 원리들은 그 자체로부터, 즉 춤의 기술과 역사로부터 생각해낸 개념화한 춤에 관한 것이 아니라, 철학이 맞아들이고 도피처를 제공하는 것으로서의 춤에 관한 것이다. 이 모두는 춤과 사유의 관계에 관한 것이며, 춤과 연극 사이의 암시적인 비교의 영향 하에 있다. 원리의 목록;1.공간의 필요 불가결함  춤이 공간 속에서 시간 노릇을 한다는 것이, 찰나의 공간을 가정한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춤을 위한 공간의 필요 불가결함이 있다. 오로지 춤만이 실제 공간을 필요로 한다. 춤은 공간에 매여 있는 유일한 예술이다. 특히 연극은 여기에 해당하지 않는다. 춤은 명명 이전의 시간이다. 연극은 이와 반대로 이미 행해진 명명의 결과일 뿐이다. 대사가 있게 되면, 이름이 주어지게 되면, 필요한 것은 시간이지 공간이 아니다. 공간은 연극에 내적으로 필요 불가결한 것이 아닌 것이다. 춤은 이와 달리 공간을 자신의 본질 안에 포함한다. 춤은 사유의 모습 중 이것을 행하는 유일한 것이며, 그래서 춤이 사유의 공간화를 상징한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의 사건은 상황 속에서 언제나 특정한 장소를 차지하지 절대로 상황 전체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명명을 통해 사건이 상황을 자신의 진리로 가공하는 시간의 토대를 만들기 이전에, 그 사건의 자리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춤은 이름 이전을 보여주는 것이므로, 어떤 자리의, 즉 순수한 자리의 변화 과정으로서 펼쳐져야 한다. 춤 안에는 꿈꾸어 본 적 없는(사건의 자리에서 장식-무대장치-이란 상상 곳에만 있을 뿐) 자리의 처녀성이 있다. 무대장치는 연극의 것이지 춤의 것이 아니다. 춤은 자리 그 자체, 어떤 형태의 차장도 없는 자리 그 자체이다. 춤이 요구하는 것은 공간, 또는 공간 확보 이상의 그 무엇도 아니다. 이것이 첫째 원리이다. 2.몸의 익명성-두 번째 원리인 몸의 익명성과 관련하여, 우리는 모든 말의 부재를, 이름 이전을 다시 만난다. 자리에 이르는 것으로서의 춤추는 몸, 찰나 속에서 공간화되는 것으로서의 춤추는 몸은, 사유체로서 상징이지 절대로 어떤 사람이 아니다. 상징이란 우선 모방에 반대되는 것이다. 춤추는 몸은 어떤 인물이나 어떤 독특함을 모방하지 않는다. 춤추는 몸은 아무것도 형상화하지 않는다. 연극은 언제나 모방에 붙들려 있고, 역할에 사로 잡혀 있다. 어떤 역할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은 춤추는 몸은 순수한 출현의 상징이다. 하지만 상징은 또한 모든 형태의 표현에 반대되는 것이기도 하다. 춤추는 몸은 어떤 내면성도 표현하고 있지 않으며, 완전히 표면에 있는, 눈에 보이게 억제된 강도인 몸 자체가 곧 내면성이다. 모방도 표현도 아닌 춤추는 몸은 자리의 처녀성 안으로의 방문의 상징이다. 춤추는 몸은 여기에서 사유가, 사건의 사라짐에 매달려 있는 진짜 사유가 어떤 비인격적인 주체를 끌어내리는 것임을 드러낸다. 춤추는 몸이 익명적인 것은 그것이 우리 눈앞에서 몸으로 태어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한 진리의 주체는 절대로 미리부터, 그리고 그 이전의 모습이 어떠하든 간에, 지금 모습대로의 어떤 사람이 아니다. 3.세 번째 원리인 성의 지워진 偏在性편재성은, 춤은 (남자와 여자라는 이름의) 두 가지 성적인 위치가 있다는 것을 보편적으로 드러내며, 이와 동시에 춤은 이러한 성의 이원성을 추상화하거나 삭제한다. 한편 모든 춤은 입맞춤의 신비롭고 신성한 해석일 뿐이다. 춤의 한가운데에는 이렇게 두 성의 만남이 자리하고 있으며, 이것이 성의 편재성이라고 한다. 춤은 전적으로 성적으로 나뉜 위치들의 만남과 헤어짐으로 구성되는 것이다. 모든 운동은 그 강도를 경로 속에서 억제하고 있으며, 그 경로의 가장 중요한 인력은 남자와 여자라는 위치를 한데 모았다가 서로 떨어지게 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여자 무용수는 여자가 아니고, 남자 무용수는 남자가 아니다. 그것은 춤이 성 구분으로부터, 욕망으로부터, 사랑으로부터 순수한 형식만을, 만남과 포옹, 헤어짐이라는 세 단계를 구성하는 형식만을 붙들기 때문이다. 춤은 이 세 항을 기술적으로 기호화한다. 안무는 이 세 항을 공간적으로 관계 맺는 일이다. 하지만 결국 세 단계는 그 본래의 목적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강도 높은 억제의 순수함에 이르게 된다. 남자 무용수와 여자 무용수의 차이의 편재성, 그리고 이를 통해 드러나는 성차의 이상적 편재성은, 실제로는 가까워짐과 헤어짐을 관계 맺는 도구로 쓰일 뿐이며, 그 결과 남자무용수/여자무용수 커플은 남자/여자 커플과 명목상으로 겹쳐질 수 없다. 성의 편재성에 대한 암시에서 이용되는 것은 결국 존재와 사라짐 사이의, 발생과 소멸 사이의 상호 관계이며, 만남과 포옹, 헤어짐은 신체적이며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이 상호관계의 기호화를 행하는 것이다. 성 구분이라는 기호로 드러나는 분산의 에너지는 사건 그 자체, 즉 모든 존재가 사라질 때 닮게 되는 것의 은유에 봉사한다. 그런 까닭에 성차의 편재성은 지워지거나 소멸되지만, 그것은 춤의 재현적인 종말이 아니라 에너지의 형식적 추상화이며, 그 추상화의 흔적은 공간 속에서 사라짐의 창조적 힘을 불러들이는 것이다. 4.네 번째 원리인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남을 위해서는, 여자 무용수는 춤추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모든 필기구로부터 벗어난 시이다. 즉 시로부터 벗어난 시,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난 시이며, 이는 춤추지 않는 여자 무용수가 춤으로부터 벗어난 춤인 것과 완전히 마찬가지이다. 춤은 기록되지 않은 시, 또는 흔적이 지워진 시 같은 것이다. 그리고 춤은 또한 춤 없는 춤, 춤추기가 지워진 춤 같은 것이다. 이것은 사유가 가지는 벗어남의 차원이다. 모든 진정한 사유는 그것이 형성되는 곳인 지식으로부터 벗어나 있다. 춤이 사유의 은유인 것은 바로, 사건의 출현이라는 형태의 사유는 모든 기존의 지식으로부터 벗어난다는 점을 춤이 몸의 수단들을 통해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진짜 여자 무용수는 절대로 자신이 추는 춤을 알고 있는 이로 보이면 안 되기 때문이다. 기이의 몸짓의 순수한 출현은 그이의 앎(엄청난 테크닉)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가로지른다. 여자 무용수는 춤추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가 보는 것은 그 어떤 순간에도 어떤 앎이 현실화된 것이 아니라는 점, 비록 부분적으로는 그 앎이 우리가 보는 것의 재료나 바탕이 될 수는 있지만 그 이상은 아니라는 점이다. 여자 무용수는 무용수로서의 자신의 모든 앎에 대한 기적적인 망각이므로, 그이는 어떤 춤도 시행하지 않으며, 몸짓의 비결정성을 드러내는 억제된 강도 자체이다. 실제로 여자 무용수는 모든 알려진 춤을 폐지하며, 그것은 그이가 자신의 몸을 새로 만들어진 것처럼 마련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춤에서의 스펙터클은 몸에 대한 모든 앎으로부터 벗어난 몸, 피어남(발현)으로서의 몸이다. 이런 몸에 대해서는 당연히(이것이 다섯 번째 원리인데) 벌거벗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5.벌거벗음- 춤이 순수한 자리를 방문하여, (실제로 있든 없든 간에) 무대장치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건을 대신하는 사유체인 춤추는 몸은 (발레복을 입고 있든 아니든 간에) 의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 벌거벗음은 결정적인 것이다. 춤이 네게 네 개념들의 벌거벗음을 가져다준다. 그리고 조용히 네 삶을 써나갈 것이다. 그러므로 벌거벗음은 다음과 같이 이해된다. 춤은 사유의 은유로서 사유 자체 외의 다른 어느 것과도 관계 맺지 않고, 그 출현의 벌거벗음 속에서 우리에게 사유를 제시한다. 춤은 관계 속에 있지 않은 사유, 아무것에도 관계하지 않으며 아무것도 관계 속에 끌어들이지 않는 사유이다. 또한 춤은 사유의 순수한 소멸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데, 이는 춤이 사유의 모든 치장을 포기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춤은 그 성격상 순결한 벌거벗음, 모든 치장 이전의 벌거벗음, 모든 치장을 벗어버림으로 인한 벌거벗음이 아니라 반대로-사건의 이름 이전에 주어지듯-모든 치장 이전에 주어지는 벌거벗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6.절대적인 시선-마지막 원리는 여자 무용수와 관련된 것도 춤과 관련된 것도 아니며, 관객에 관한 것이다. 사실 무용수가 상징이며 결코 어떤 사람일 수 없듯이, 춤의 관객도 철저히 비인격적이어야 한다. 춤의 관객은 어떤 식으로든 바라보는 사람의 독특함일 수 없다. 실제로 만일 누군가가 춤을 바라보고 있다면 그는 불가피하게 엿보는 자이다. 이 점은 춤의 본질의 원리들(서의 지워진 편재성, 벌거벗음, 몸의 익명성 등)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이 원리들이 실현될 수 있는 것은 관객이 자신의 시선에 포함될 수 있는 독특함이나 욕망과 관련된 모든 것을 포기할 때뿐이다. 다른 모든 스펙터클(특히 연극)은 관객이 무대에 관객 자신의 욕망을 투여하기를 요구한다. 춤은 이런 점에서 스펙터클이 아니다. 춤이 스펙터클이 아닌 것은 욕망 어린 시선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으로, 이 시선은 춤이 시작되면 엿보는 시선이 되어버릴 뿐, 그 시선 아래서 춤의 벗어남은 지워져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인격적이거나 번득이는 절대적 시선이 필요하다. 춤은 어떤 욕망의 독특함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며, 더구나 아직 그런 독특함의 시간을 만들지도 않았다. 춤은 개념들의 벌거벗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렇듯 관객의 시선은 무용수의 몸에서 자기 욕망의 대상들을 찾는 일을 그만두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욕망의 대상들은 치장한, 또는 페티시즘적인 벌거벗음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개념들의 벌거벗음에 다다르는 일이 요구하는 시선은 천박한 몸을 매개체로 하는 욕망의 대상을 찾는 일을 내던지고, 천진스럽고 원초적인 사유체에 다다른, 새로 만들어진 몸, 또는 피어난(발현된) 몸에 다다른 시선이다. 하지만 이런 시선은 어느 누구의 시선도 아니다. ‘번득이는에 관해서, 춤의 관객의 시선은 존재와 사라짐의 관계를 포착해야지 스펙터클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 그뿐만 아니라 춤은 언제나 거짓 총체성이다. 하나의 스펙터클을 위한 제한된 시간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빠져나감 속에 있는, 그 존재와 무의 결정되지 않은 등가성 속에 있는 사건의 벌어짐을 영원히 보여주는 일이 있는 것이다. 이에 어울리는 것은 번개 같은 시선일 뿐 고도의 시선 집중이 아닌 것이다. ‘정대적인에 관해서, 춤에서 형상화되는 사유는 영원한 획득물로 간주해야 한다. 춤은 지극히 일시적인 예술이라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생겨나자마자 사라지는 까닭에, 가장 큰 영원의 무게를 지니고 있다. 영원은 그대로 있음이나 지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영원은 바로 사라짐을 간직하는 것이다. 번득이는 시선이 어떤 스러짐을 사로 잡을 때, 그것은 모든 실제적인 기억을 넘어서서 그 스러짐을 순수하게 간직할 수 있을 뿐이다. 사라지는 것을 간직하는 데에 그것을 영원히 간직하는 것 이외의 방법은 없다. 사라지지 않는 것은 간직할 수 있지만, 이 간직함은 시간이 흐르면 닳아 없어질 위험이 있다. 하지만 진정한 관객이 파악했을 때 춤은 닳아 없어질 수 없는데, 이는 바로 춤이 관객이 춤과 만나는 지극히 짧은 순간 이외의 어떤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춤에 대한 시선에 절대성이 있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이다. 춤의 여섯 가지 원리를 검토한 결과, 이제 춤에 반대되는 것은 연극임을 밝힐 수 있다. 물론 군대의 행진도 있지만, 이것은 부정적인 의미에서의 반대편이다. 연극은 춤의 긍정적인 반대편이다. 연극에서는 대사가 명명을 하기 때문에 순수한 자리라는 제약이 없다는 것, 그리고 배우는 절대로 익명의 몸이 아니라는 것이다. 연극에는 성의 지워진 편재성 역시 없으며, 대신 이와는 정반대로 성 구분의 과장된 역할 놀이가 있다는 것이 있다. 연극의 연기는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벗어남과는 한참 거리가 먼, 자기 자신을 초과함이라는 것 역시 그렇다. 여자 무용수가 춤추지 않는다면, 배우는 연기에, 행위를 연기하고 다섯 막을 연기하는 일에 매여 있다. 또한 연극에는 절대로 벌거벗음이 없고 오히려 의상이 필수적이며, 벌거벗음은 그 자체로 하나의 의상, 가장 잘 보이는 의상이다. 연극의 관객에게는 절대적이고 번득이는 비인격적 시선이 전혀 요구되지 않는데, 이는 연극에 어울리는 것은 욕망의 지속 안에서 뒤얽힌 지성의 열광이기 때문이다. 춤과 연극 사이에는 본질적인 대립이 있는 것이다. 니체의 반연극적 미학은, 현대예술의 진정한 구호는(대지에 새로 주어진 이름인 춤의 은유에 힘입어) 몰락하고 있는 연극성의 혐오스런 지배로부터 벗어나는 것이었다. 니체는 예술을 연극적 효과에 종속시키는 것을 어릿광대짓이라고 명명했다. 여기서 우리는 모든 춤의 반대편에 있는 것, 그리고 천박하다고 불리는 것을 다시 만난다. 바그너의 어릿광대짓을 끝내는 것은 춤의 가벼움을 연극의 거짓투성이 천박함에 대립시키는 것이다. 바그너의 연극화된 음악, 춤의 침묵을 표시 나게 하는 대신 연기의 무거움을 강조함으로써 천박해진 음악, 그 음악에 맞서서 춤추는 음악의 이상을 명명하는 역할을 한 것은 비제였다. 니체의 실수는 춤과 연극 사이에 공통의 척도가, 그것들의 예술적 강도라는 척도가 존재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춤이 예술이 아닌 것은 춤은 예술의 가능성의 표지, 몸에 새겨진 표지이기 때문이다. 춤은 바로 몸이 예술을 담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며, 춤이야말로 어떤 순간에 몸이 그 안에 예술을 담을 수 있는 정확한 한도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몸이 예술을 담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몸의 예술을 한다는 말은 아니다. 춤은 몸의 예술적 능력의 표지를 드러내지만, 어떤 특정한 예술을 정의하는 것은 아니다. 몸이 몸으로서 예술을 담을 수 있다는 것은 몸을 사유체로서 보여주는 것이다. 몸 안에 붙들린 사유로서가 아니라, 사유인 몸으로서 보여준다는 말이다. 스러져가는 예술 능력의 표지 아래에서 드러나는 사유체, 이것이 춤의 역할이다. 몸은 예술을 담을 수 있다. 즉 몸은 자신을 천연의 사유로 보여줄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를 사로 잡는 감정, 비인격적이고 절대적인 번득이는 시선이 조금이라도 가능하게 되면 우리를 사로잡는 감정을 무엇이라고 명명해야 하나? 그것은 정확한 현기증이라고 명명할 수 있다. 이것이 현기증인 것은 여기서 눈에 보이는 몸의 유한함 속에 무한함이 잠재적인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몸의 능력이 예술 능력이라는 방식으로 천연의 사유를 보여주는 것이라면, 이 예술능력은 무한한 것이며, 춤추는 몸 자체도 무한한 것이다. 그 몸이 대기의 은총을 입는 순간 속에서 무한하다는 말이다. 여기서 관건은, 그리고 현기증을 일으키는 것은 몸의 한정된 실행 능력이 아니라 예술의, 모든 예술의 무한한 능력, 그 예술에 기회를 부여한 사건 속에 뿌리박힌 무한한 능력이다. 결국 중요한 것, 무한을 드러내주는 것은 억제된 정밀함, 숨은 느림이지 드러난 名人技명인기가 아니다. 이는 몸짓과 몸짓 아닌 것 사이의 관계에 대한 극도의 정밀함이다. 이렇게 해서 가장 한결같은 정확함 안에 주어진 무한함의 현기증이 있게 된다. 춤의 역사는 현기증과 정확함 사이의 관계를 끊임없이 새로이 하는 일에 의해 지배되어왔다. 어떤 것이 잠재적인 상태로 남아 있게 되며, 어떤 것이 현실화될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억제가 무한을 올바로 해방시킬 것인가? 이런 것들이 춤의 역사적인 문제들이다. 이러한 창안들은 사유의 창안들이다. 춤은 매번 몸이 땅에 부여하는 새로운 이름이다. 하지만 어떤 새로운 이름도 마지막 이름은 아니다. 진리들의 이름을 몸으로 보여주는 춤은 땅에 끊임없이 새로운 이름을 붙이는 것이다. 이 점에서 확실히 춤은 땅과도, 땅의 이름과도, 심지어는 몸이 할 수 있는 것과도 관계가 없는 연극의 반대편이다. 사실 연극은 한편으로는 국가와 정치의 자식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성 사이의 욕망의 순환이 낳은 자식이다. 폴리스(도시국가)와 에로스의 사생아인 셈이다.

     

    충청도 어느 농가의 동춘 (冬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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