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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사상과 철학 260 (교재 공개)패러다임/철학 2026. 4. 5. 20:55반응형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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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과 철학 260
영상 강의 링크 : https://youtu.be/ZZxHwzZo6zg
664.
그대는 우주의 한계에 도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주는 끝이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의식보다 높은 것은 없다. 오로지 인간의 의식만이 자신을 초월하여 나아갈 수 있다. 그대가 숭배하고 떠받들 수 있는 다른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대는 사원과 율법을 세우고 다른 누군가가 그대를 돌보아 줄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자신의 변화에 대해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고 믿는다. 정신은 끊임없는 도전이며 투쟁이다. 삶은 더 높이, 더 깨어 있도록 스스로를 채찍질한다. 이런 각성과 정신적인 성장에서 덕은 저절로 태어난다. 덕은 그대의 경험과 이해에서 태어난다. 그 덕은 독창적인 것이다. 그리고 독창적인 것만이 아름답다. 독창적으로 되는 것, 항상 새로운 경지와 통찰을 향해 성장하는 것, 지도에 나와 있지 않은 인적미답의 길을 가는 것, 이것이 정신의 행복이다. 정신은 모험가이다. 그러나 군중은 고여 있는 연못과 같다. 연못은 흐르지 않고 썪는다. 정신은 하나의 강이다. 강은 항상 새로운 땅으로 흐른다. 안전에 지나치게 관심을 갖는 사람(군중)은 탐험가나 발견자가 될 수 없다. 사람들은 자유에 대해 말하지만 실제로 자유를 원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자유는 위험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노예는 편안하다. 다른 사람이 그의 삶을 책임져 준다. 그러나 지혜는 자유롭다. 다음 순간 무엇을 알게 될 지 미리 알 수 없다. 지혜를 예행연습할 수 없다. 그렇게 지혜는 돌발적으로 온다.
육체에 관한 한, 그대의 본능에 복종하라. 가슴에 관해서는 느낌에 복종하라. 마음에 관한 한, 지성에 복종하라. 존재에 관해서는 직관에 복종하라. 그대 자신이 곧 경전이다. 육체는 필요한 모든 지식을 안다. 그대의 가슴은 사랑의 길에 대하여 완벽하게 알고 있다. 그대의 지성은 존재계의 가장 은밀한 비밀까지도 이해할 수 있다. 직관은 그대 존재의 중심부까지 탐험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이 네 가지 원리는 삶을 받쳐주는 가장 기본적인 기둥이다. 어떤 경전도 그대의 육체보다 오래되지 못했고, 그대 자신의 의식은 어떤 선지자보다도 더 오래 되었다. 자기 의식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곧 세상의 모든 선지자들의 말을 듣는 것이다. 갈증을 해결한 샘물은 똑같기 때문이다. 그러니 딴 곳을 찾을 이유가 없다. 자신은 자신만의 신선한 샘물을 갖는다. 성직자들은 그대를 구원해주는 대리인의 역할을 한다고 수작을 부린다. 또한 그대 스스로는 그대를 구원할 수 없으며 구세주가 있어야 한다고 설득한다. 그들은 그대를 세뇌시키고, 외부로부터의 수업이 필요하다고 그대를 학습시킨다. 다른 사람에게서 바라는 것처럼 다른 사람을 대하라는 말은 그대가 바라는 것일 뿐이다. 이해가 깊은 사람은 결코 명령자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그대의 삶을 마음대로 조작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며, 특정한 스타일과 특정한 역할, 특정한 도덕성을 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다만 그대의 본성을 발견하도록 도울 것이다. 그는 그대에게 그대 육체의 언어, 지성의 언어, 사랑과 직관의 언어를 가르칠 것이다. 사람마다 출발점도 목표도 가야할 길도 다르다. 그러나 모든 종교는 특정한 기준을 따르도록 강요하고, 개인을 존중하지 않고, 그대의 본성을 존중하지 않고 이미 고정된 원칙을 강요한다. 그리고 그 원칙은 그대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진다. 그대는 그 원칙을 위해 만들어진 존재이다. 그것은 평균적인 이해에서 산출된 것이다. 그러나 평균은 수학적인 개념일 뿐이다. 그것은 삶과 아무 관계도 없다. 수학은 모든 학문 중에서 가장 고정된 학문이다. 왜냐하면 수학은 사람들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학문이기 때문이다. 다른 학문은 발견이다. 그러나 수학은 발명이다. 그것도 매우 독단적인 발명이다.
모든 욕망과 염원, 깨달음, 진리에 대한 열망까지도 권력에의 의지일 뿐이다. 깨달음을 얻는 순간, 그대는 자신을 지배할 수 있는 엄청난 권력, 그대의 의식을 지배할 수 있는 절대권력을 갖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앎은 살아 있는 과정이다. 즉 그대의 의식과 그 의식의 진화에 관계되지만, 지식은 마음과 그 기억장치에 관계된다. 아무리 많은 지식을 소유한다 하더라도 그대의 무지에는 변함이 없다. 빌려 온 말들의 배후에는 아무 체험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앎은 그대의 무지를 몰아낸다. 대부분의 경우, 학자가 지혜로운 경우는 드물다. 그것은 그가 사람들을 속일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지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앎을 가진 사람은 지식과 자기 것이 아닌 모든 것을 포기한다. 지식은 장애물이고 위조지폐이다. 지식을 포기하는 것은 부와 왕국, 가족과 사회를 포기하는 것보다 더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 그것들은 모두 외부적인 것이지만 지식은 마음속에 쌓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가 어딜 가든, 설령 히말라야 깊이 들어간다 해도 지식은 따라다닐 것이다. 지식의 포기는 내면의 청소를 의미한다. 명상은 빌려온 지식을 포기하고 자신의 무지를 깨닫는 것이다. 지혜로운 자들이 ‘나는 모른다’고 말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그것들(지식)은 그대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자들의 앎이 그대의 삶이나 앎이 될 수 없다. 그대는 스스로 탐구하고 추구해야 한다.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모험가, 구도자가 되어야 하고, 지도에도 없는 인적미답의 길을 가야 한다.
무지가 각성과 만나는 순간,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큰 폭발이 일어난다. 내 안에 ‘나’라고 말 할 수 있는 실체는 없다. 갈증을 느낄 때 신비주의자는 우물에 가고 학자는 도서관에 간다. 생각은 하나의 허구이다. 왜냐하면 모를때에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에 의해 그대의 마음이 멈추지 않는다면,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다. 훌륭한 춤이 명상을 가져다 주지 못한다면, 그대는 춤을 감상하는 법을 모르는 것이다.
영혼은 육체의 일부이다. 똑같은 에너지의 두 측면이다. 외부적으로는 가시적인 것이요. 내부적으로는 비가시적인 것이다. 비가시적인 세계로 들어가는 데 육체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대는 하나의 전체이다. 즉 하나의 유기적인 통합체이다. 군중들은 수가 많을 수록 지혜도 더 많아진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잘못될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항상 어두운 계곡에 남는다. 세상을 포기하거나 육체를 부정하면 안 된다. 나무가 대지에 뿌리를 박듯이 인간은 이 세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 지구, 이 대지는 인간의 어머니이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분인 것이다. 본성을 제외한 다른 안내자는 없다. 자연의 길에서 어긋날 때 불행이 시작된다. 불행한 사람만이 교회나 사원에 간다. 이 지구, 별들로 가득한 이 하늘이 존재하는 유일한 사원이다. 다른 사원은 인간이 만든 것이다. 나무와 동물, 인간을 관통해 흐르는 이 삶이 신의 유일한 삶이다. 사원에 앉아 있는 신은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 종교들은 신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데, 사실은 그들의 신은 인간에 의해 창조된 것이다. 즉 인간은 자신의 형상에 따라 신을 창조했다. 중국인의 신과 흰두교인의 신이 다른 이유가 그것이다. 아프리카인들의 신과 유럽인들의 신이 다르다. 사람들은 자신의 형상에 따라 신을 창조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상상대로 형상을 만들어 놓고 그 앞에 무릎을 꿇는다. 그리고 기도한다. 이보다 더 어리석은 일을 상상할 수 있는가? 삶은 십계명을 강요하지 않으며, 정해진 길을 강요하며 야단법석을 떨지 않는다. 삶은 그대 자신으로 성장하도록 절대적인 자유를 준다. 아무 조건없이 모든 생명체를 사랑하고 존중한다. 신을 필요로 하는 이유는 그대가 불행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종교의 전략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놔두지 않는 것이다. 사람들이 행복하면 종교가 설 자리를 잃기 때문이다. 종교는 사람들이 항상 가난하고 병들고 불행과 고통에 신음하기를 원한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약해질 것이고 도움을 필요로 하게 될 것이다. 그때 성직자들은 도움을 자청하고 나선다. ‘신이여, 이들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하고 기도한다. 비록 그 기도를 듣는 신이 없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종교는 신이나 천국, 지옥과 무관하다. 그것들은 허구일 뿐이다. 진정한 종교는 단 하나의 관심사만 갖는데, 그것은 내면의 세계에 대한 탐험이다. 즉 내면의 눈(제3의 눈)을 여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내면을 볼 수 있다는 상징이고 비유이다. 절대적인 침묵 안에서 마음이 멈출 때,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공간이 내면에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대 자신을 보는 것. 이것이 초인으로 가는 출발점이다. 그러면 다른 사람을 명목적으로 따르는 눈먼 추종자가 되지 않는다. 자신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종교, 이념, 신학, 철학 등 모든 구속에서 자유롭게 된다. 이제 그는 자신의 눈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는 구세주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는 이미 구원받았다. 인간은 신을 초월해 나갈 수 있다. 왜냐하면 신은 인간이 만들어 낸 허구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이 창조한 허구보다 더 실재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 그것이 인간의 정상이다. 신은 그대의 의식 안에서 그대가 창조해야 할 존재이다. 그대는 자신의 의식을 완전히 정화해서 신성하게 만든다. 그때 그대는 곧 신이다.
자연풍경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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