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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사상과 철학 259 (교재 공개)패러다임/철학 2026. 3. 29. 16:26반응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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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과 철학 259
663.새는 하늘을 날아가지만,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다. 그대는 새들의 발자국을 쫓아갈 수 없다. 붓다는 궁극적인 진리에 도달했지만, 의식의 하늘에는 발자국이 남지 않으며 정해진 길도 없다. 모든 사람은 저마다 자신의 길을 창조해야 한다. 길이 없다는 말은 종교가 조직화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종교는 근본적으로 개인적인 현상이다. 그것은 사랑과 같다. 조직화된 사랑을 가질 수 없다. 사랑에 빠지는 것은 하나의 개인이지 조직이 아니다. 사랑에는 다른 사람이 필요할 수 있지만 진리의 탐구에는 완전히 혼자이다. 그것은 진리는 밖의 어딘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대 안에 있기 때문이다. 내면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그대뿐이다. 다른 사람을 데리고 들어갈 수 없다. 내적인 의식의 하늘에서는 스스로 길을 창조해야 한다. 그것은 겁 많은 영혼의 소유자에게는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용기 있고 대담한 영혼에게는 커다란 스릴과 즐거움을 주고, 짜릿한 흥분으로 전율하게 한다. 지도와 안내인도 없이, 이정표도 없는 미지의 세계에 혼자 뛰어들어 고독한 도전을 감행하는 것이다. 진리의 땅이 항상 처녀지인 것은 그 때문이다. 그대 이전에는 아무도 그곳에 도달한 사람이 없다. 다른 사람은 그곳에 들어올 수 없다. 그들에겐 그들 나름대로의 내적인 센터가 있다. 그대 내면의 센터는 아직 처녀지이며 그대가 그곳에 도달하지 않는 한, 영원히 처녀지로 남을 것이다. 진리에 대한 탐구는 곧 자신과 사랑에 빠지는 것이다. 진리의 발견은 객관적인 어떤 것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만 그대 자신에 대한 발견이며, 그대 존재의 아름다움과 축복, 평화와 영원성을 아는 것이다. 추종자가 될 필요는 없다. 길을 선택할 필요도 없다. 그 선택 자체가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는 여행의 시초이다. 붓다나 예수에 대한 이상향을 가질 필요가 없다. 그 이상향은 그대를 혼자 있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그들에 대한 이상향은 상상 속에서 그대를 따라 다닐 것이다. 붓다는 ‘길을 가다가 나를 만나면 즉시 나를 죽이고 가라’ 짜라투스트라는 ‘소위 구세주라는 자들을 경계하라. 그리고 무엇보다도 짜라투스트라를 경계하라’ 만일 짜라투스트라 같은 사람과 사랑에 빠진다면, 그대의 순수성과 순진 무구함, 진정한 자기를 탐구하는데 있어서 그 사랑 자체가 장애물이 될 것이다. 그대에겐 그대만의 고유한 특성, 개성이 있다. 그것을 일반적인 법칙으로 만들 수 없다. 왜냐하면 나에게는 달콤한 감로수인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독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모든 개인은 저마다 독자적인 공간에 도달해야 한다. 아무도 그곳을 탐험할 수 없다. 그곳은 그대만의 고유한 공간이다. 이것이 인간의 존엄성이며 특권이다. 길은 존재하지 않는다. 길은 걸어나감에 의해 만들어져야 한다. 길은 춤추고 탐구하는 가운데 창조되어야 한다. 이미 만들어진 길이란 없다. 용기 있는 자는 군중의 안락함과 포근함을 기꺼이 포기할 각오가 되어 있다. 그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두가 틀렸을리 없다. 그들 모두가 옳다면 나 역시 옳은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군중은 어떠한 진리도 발견한 적도 없고 성장하지도 않았다. 군중은 강이 아니라 연못이다. 거기엔 흐름이 없다. 그들은 결코 바다에 도달하지 못한다. 바다에 도달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강이 되어야 하고 수많은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강은 기차처럼 철로 위를 달리지 않는다. 강은 안내자도 갖지 않고, 길을 묻지도 않는다. 모든 강이 마침내 바다를 발견하는 것은 하나의 기적이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왜 그런 기적이 일어나지 않겠는가? 왜 인간의 의식은 궁극적인 진리, 바다와 같은 진리를 발견하지 못하겠는가? 연못이 되는 것은 매우 안전하고 편안하다. 길을 잃을 위험도 없다. 하지만 연못은 죽어 있다. 반면에 강은 살아 있다. 연못은 점점 더 더러워지고 부패하지만 강은 깨긋함을 유지한다. 흐름은 강물을 젊고 청결하게 지켜준다. 인간은 하나의 강이 되어야 한다. 창조성을 제외하고는 우주와 연결되는 다른 다리는 없다.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의 흐름이다. 고정불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렇다면 고정된 선악의 개념은 있을 수 없고, 고정불변하는 신도 있을 수 없고, 고정된 이데올로기도 없고, 계속될 영원한 가치도 없다. 모든 철학과 경전은 무의미하게 될 것이다. 그것들은 변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삶에 아무 쓸모가 없어 제거되어야 한다. 그때, 단 하나만이 남는데 그것은 각성된 의식이다. 그대는 뒤처지지 않도록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변화에 대해 깨어 있어야 한다. 또한 고정관념을 버리고 변화해야 한다. 이것은 어떤 종교도 존재할 필요가 없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대 가슴의 박동이 우주의 박동과 일치하는 것, 이것이 유일한 종교이고, 유일하게 영적인 것이다. 그대는 항상 젊음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육체는 늙을지 모르지만 의식은 매순간 스스로 신선함을 유지할 것이다. 마치 강물이 계속 흐름으로써 스스로 신선함을 유지하듯이 말이다. 흐르는 강물은 결코 더러워지지 않는다. 이 지구는 정치가나 종교지도자, 교회와 전통의 소유물이 아니다. 이 지구는 삶을 사랑하고 노래하는 사람들, 삶을 축복하고 춤출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의 것이다. 삶을 반대하는 것은 신성하지 않다. 삶을 찬양하고, 더 많은 사랑을 넘치게 하고, 더 아름답고 즐겁게 만드는 것, 존엄성을 긍정하는 것, 이런 것이 신성한 것이다.
불행해지기 위해서는 과거와 미래를 질질 끌고 다녀야 한다. 시간은 항상 지금 여기에 존재한다. 과거를 제거하는 순간, 무거운 짐을 덜게 된다. 과거를 포기하는 순간, 미래를 상상할 수 없다. 왜냐하면 미래란 수정된 과거, 더 좋게 개선된 과거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과거가 없을 때, 미래는 자동적으로 사라진다. 그리고 이 순간, 순수하고 오염되지 않은 이 순간만이 남는다. 의식은 과거와 미래라는 무거운 짐을 덜게 되어 그 의식은 빛과 각성의 근원이 되어서 현재 이 순간을 축복의 순간으로 변형시킨다. 이렇게 현재에 집중된 의식이야말로 황금의 열쇠이다.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현재만을 통해서이다. 현재 이 순간에 존재할 수 있다면, 그때엔 나무와 산, 별, 꽃과 깊은 합일이 일어날 것이다. 그대는 존재하는 모든 것과 혼연 일체가 된다. 그대의 과거는 부모와 교육제도, 종교 지도자들과 경전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그것은 물려받은 것이지 스스로 탐구하거나 경험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경험이 아닌 것은 그저 짐일 뿐이다. 그것은 그대를 방해한다. 과거는 황금시대가 아니다. 과거는 선조들에게서 이미 끝났다. 과거와 선조는 그대에게 영광을 안겨주지 못한다. 단 하나의 영광, 단 하나의 명예는 그대가 어디로부터 왔는가가 아니라 어디로 갈 것인가에 있다. 더 나은 미래를 창조하기 위해, 더 나은 인류를 창조하기 위해, 새로운 가족과 신성을 창조하기 위해, 존재계 전체를 향기로 에워싸기 위해서이다.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는 것은 인간에 대한 모독이며 수치이다. 그것은 꼭두각시 이외의 다른 의미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때는 고유의 영혼을 갖지 못한다. 그리고 그대를 창조할 수 있는 자라면, 그대를 파괴할 수도 있다. 그대는 독재자의 손아귀 안에 있는 것이다. 반면에, 신성은 그대가 창조할 수 있는 어떤 것이다. 신은 그대들 모두를 노예로 만들지만, 신성은 그대들 모두를 초인과 창조자로 만들 것이다. 순진무구함과 침묵, 평화와 진리 그리고 내면의 존재와 빛에 대한 경험, 그대의 영원성에 대한 경험이 신성을 이루는 요소이다. 신성은 미래의 종교가 될 것이다. 신은 숭배의 대상이지만, 신성은 숭배되는 것이 아니라 창조되는 것이다. 그대는 가장 아름다운 공간과 엑스터시에 도달한다.
존재계의 모든 생명체는 우리를 만들고 있는 것과 똑같은 생명, 똑같은 재료의 다른 모양일 뿐이다. 그러므로 거기엔 의사소통의 방법이 틀림없이 있을 것이다.
신은 죽었다는 짜라투스트라의 말은 신이 존재했었다는 말이 아니다. 그는 다만 상징적인 언어로 신이라는 개념이 죽었다는 뜻이다. 이제 그 개념은 아무 의미도 없다. 어떠한 신도 존재한 적이 없다. 창조는 스스로 이루어진다. 그것은 자가 발전하는 에너지이다. 창조의 근원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자체의 내부에 있다. 모든 기득권 층은(지배계급, 조직적인 종교) 인간을 허약하고 불행하고 슬프고 심각하게 만들고 공포와 죄의식을 심어주고 편집증적인 상태에서 살도록 한다. 그래야만 인간을 동상이나 석상 앞에 무릎 꿇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그들을 잘 다루고 이용할 수 있고 노예화시켜 권력자에게 기꺼이 봉사하도록 만들 수 있다. 사람들을 독립적인 개인으로, 자신의 의견을 갖도록 허용하지 않는다. 허용된 것은 군중의 일원이 되는 것이다. 무신론은 일종의 믿음이다. 무신론은 부정적인 믿음이다. 신봉자들이 신이 존재하는 것을 모르는 것처럼, 무신론자들은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른다. 그러나 정직한 사람은 아무 믿음도 갖지 않는다. 신을 인정하는 것은 곧 삶의 의미와 중요성, 자유, 사랑, 창조성을 파괴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에게 즐거움과 기쁨을 주는 모든 것을 파괴하는 것이다. 인간이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신이 없을 때뿐이다. 인간은 창조된 것이 아니라 진화되어 간다. 그러나 그대는 창조와 진화 둘 다가 될 수 없다. 창조는 진화가 없음을 의미한다. 그대가 조각, 그림, 시 등 어떤 것을 창조한다. 그 그림이 진화하는가? 조각이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가? 그대의 시가 매순간 스스로 새로워지며 진화하는가? 창조된 모든 것은 그 지점에서 완전히 정지한다. 거기에는 진화의 가능성이 전혀 열려 있지 않다. 그것이 천지창조의 신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신은 6일 만에 세상을 창조했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모든 것이 정지했다. 진화는 우주가 원래부터 존재해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주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움직이며 새로운 형태, 더 나은 형태를 창조한다. 인간과 인간의 의식은 진화를 통해 생성된 것이다. 그리고 진화 안에서는 신이 있을 자리가 없다. 적어도 창조자로서의 신은 그렇다. 짜라투스트라는 인간의 의식의 최고의 경지에서 창조하는 창조물로서의 신이라면 기꺼이 받아 들인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이 의식의 궁극적인 진화를 그는 초인이라고 부른다. 초인이 곧 그의 신이다. 그러나 초인은 출발점에서 이미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최고의 절정으로서 마지막에 오는 것이다. 그것은 그대의 진화된 형태, 정련된 형태이다. 또한 유일신은 있을 수 없다. 수없이 많은 생명체가 진화하고 있다. 따라서 수많은 신이 있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생명체는 신이 되기 위한 씨앗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태초부터 존재하는 신은 그대를 변화시키지 못한다. 기껏해야 그대는 신봉자가 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모든 신앙은 맹목적인 것이며 거짓된 것이다. 그것은 단지 죽은 동상과 케케묵은 경전, 미개한 사상 앞에 노예처럼 무릎을 꿇는 데 유용할 뿐이다.
자연풍경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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