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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사상과 철학 256 (교재 공개)
    패러다임/철학 2026. 3. 9. 2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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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생각하기 이해하기 실천하기-

     

    사상과 철학 256

     

    영상 강의 링크 : https://youtu.be/d2oXsv9pol0

     

     

    660.

    신이란 삶 그 자체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에고는 항상 불가능한 것을 원한다. 그대는 결코 욕망을 충족시킬 수 없을 것이다. ‘더’라는 말이 떠오를 때마다 그것은 에고의 언어라는 것을 기억하라. 에고를 만족시킬 방법은 없다. 에고는 항상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

    눈 멀지 않은 신앙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은 빛을 믿을 필요가 없다. 그는 빛을 안다. 거기에는 신앙이 필요없다. 오직 눈 먼 사람만이 빛에 대해 믿음을 가진다. 왜냐하면 그는 빛에 대해 아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믿음은 무지 속에서만 존재한다. 그리고 모든 종교들이 믿음에 찬성한다. 즉 눈 먼 상태에 찬성한다. 움직임이란 상대적인 경험이다. 마음에 어떤 생각도 떠오르지 않을 때 그대는 텅 빈 하늘에 존재한다. 움직임이 없다면 시간을 판단할 수도 없으므로 시간 또한 멈춘다. 그대는 거기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대는 불필요하게 고통 받으며 다른 것에 의존한다. 그대는 단지 안전하다는 느낌을 갖기 위해 스스로를 구속하는 온갖 종류의 사슬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유일한 안전은 그대 자신을 아는 것에 있다. 그렇게 될 때 죽음조차도 무기력해져서 그대를 파괴할 수 없다.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인 자유는 허위에 불과하다. 유일하게 진정한 자유는 영혼의 자유이다. 깨어 있지 못한 자의 사랑은 탐욕일 뿐이다. 오직 깨달은 사람만이 사랑의 아름다움과 신성함을 안다. 그때 사랑은 더 이상 구속이 아니다. 깨달은 사람의 사랑은 그대에게 자유를 준다. 존재계는 어떠한 차별도 하지 않는다. 존재는 그대가 가치가 있거나, 완벽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사랑은 사랑 그 자체를 사랑한다. 대상과는 무관하다.

    신은 단지 마음의 투영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에 신의 완벽함이란 마음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다. 그대는 신을 매우 쉽게 사랑할 수 있다. 왜냐하면 신은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그 사랑에는 어떠한 문제도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신을 사랑하는데에는 어떠한 수고도 필요없다. 그러나 인간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이해가 필요하다. 신은 단지 그대의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만일 신에 집착한다면 자신이 생각하는 신을 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백일몽에 불과하다. 사실 그대 앞에는 아무것도 없지만 그대의 관념은 그대를 최면 상태에 빠지게 한다. 그것이 기독교인이 예수를, 불교인이 붓다를, 흰두교인이 크리슈나를 보게 되는 이유다. 기독교인은 결코 붓다나 크리슈나를 볼 수 없다. 그리스도는 결코 흰두교인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대 마음의 일부이며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들을 창조했다. 인간은 자신의 형상에 따라 신을 창조한다.

    무엇인가를 주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것은 인간 심리의 일부이다. 받는 사람이 되기를 원치 않지만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 있다. 갖고 있지 않은 것을 남에게 준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대는 빈털터리이다. 붓다, 예수, 짜라투스트라는 그대에게 엄청난 보물을 안겨 주었지만 그대는 결코 그들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주는 자이고 그대는 받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거지이다. 자신을 거지로 만든 사람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는가?

    신은 단지 하나의 가설일 뿐이다. 신은 결코 살아서 활동한 적도 없다. 신이라는 관념은 교활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인간의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만들어 낸 것에 불과하다. 신은 상상의 산물일 뿐이다. 그러나 이 허황된 관념은 오랜 세월 동안 세뇌 작용을 통해 인간에게 강요되어 왔다. 신은 공포와 탐욕, 삶에 대한 절망감에서 비롯된 발명품일 뿐이다. 신은 예술을 배우지 못한 사람들의 창작품이다. 그들은 자신이 춤추는 법을 알지 못했으므로 춤을 비난한다. 삶은 주의깊음과 지성, 인내와 관용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 안에 이런 품성들을 창조해 낼 수 없었다. 그래서 삶은 무언가 잘못된 것이며, 포기되어 마땅하다는 관념을 만들어 냈다. 세상을 포기하라. 그러면 신을, 낙원을 얻으리라. 이것은 도피주의자와 불구자, 열등한 사람들이 발명해 낸 관념들이다. 그들은 사랑의 기술과 삶의 예술을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노래하고 춤추는 법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춤과 노래를 비난한다. 그것은 자신이 불구이며 무지하다는 것을 감추기 위한 방어 수단이다.

    짜라투스트라는 삶과, 삶이 주는 모든 것을 사랑한다. 삶은 아무것도 포기할 것이 없다. 삶은 존재계의 선물이다. 삶을 즐기는 법을 배우라. 나무와 별, 그들과 함께 춤추라. 모든 사람을 판단하려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라. 그러면 어떠한 신도 존재할 필요가 없다. 그때, 저 세상의 낙원이란 개념은 쓸모 없는 것이다.

    아무도 듣는 이가 없다는 사실을 모르고 기도로 시간을 허비하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 수많은 사람들이 석상을 숭배한다. 그러나 인간을 사랑할 수 없다면 어떻게 석상을 사랑할 수 있단 말인가? 석상은 안전하고 편안하다. 석상은 아무 문제도 일으키지 않는다. 석상은 썩은 과일을 바친다 해도 거부하지 않을 것이다. 석상에 대고 아무 말이나 지껄일 수 있다. 그 말이 옳든 그르든 문제될 게 없다. 그러나 삶 외에 다른 신은 없으며, 사랑 이외의 다른 기도는 없는 것이다.

    그대 안에는 헤아릴 수 조차 없을 만큼 많은 얼굴이 있다. 인간은 초인에 대해 웃음거리이거나 비통한 치욕인 것은 그들이 사람들에게 열등감을 느끼게 해서 거부당한 것이다. 사람들은 오직 뛰어난 존재가 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초지상적인(천국, 천사...) 희망에 관해 말하는 자들을 믿지 마라. 이 순간, 지금 여기에서 즐길 수 없다면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더라도 즐길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순간은 지금 이 순간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다른 세상(만일 그런 세계가 존재한다면)은 이 세상의 계속이며 연장이다. 어떤 것이 여기에서 좋은 것이라면 그것은 다른 곳에서도 좋은 것이다. 여기에서 잘못된 것은 우주 어디에 갖다 놓아도 잘못된 것이다. 이것은 삶에 대한 단순하고 논리적이며 합리적인 접근 방식이다.

    누구든지 대지에 반대하는 자는 그대에게 반대하는 것이다. 그대들은 대지의 아들과 딸들이기 때문이다. 나무와 새에게 그러하듯이 이 대지는 그대의 어머니이다. 그리고 이 대지 위에서 자라나는 모든 것이 그대의 가족이다. 이 세상 전체를 거대한 가족, 사랑의 바다로 만드는 것이 유일한 종교이다. 그 외에 종교라고 말하여지는 모든 것은 위선에 불과하다. 종교의 정의는 세상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안에서 즐기는 것이다. 세상은 기쁨을 누릴 수 있는 하나의 기회이다. 바보와 겁쟁이들만이 세상을 포기한다. 매순간 삶에 있는 모든 과즙을 맛보라. 그것은 신의 선물이다. 그것은 존재계가 그대에게 주는 선물이다. 그러므로 삶을 포기하는 것은 신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고, 존재계에 역행하는 것이다.

    신이 존재한다면 인간이 완전히 자유롭게 될 가능성은 전혀 없다. 인간의 자유, 영적인 존엄성은 신이 존재하지 않을 때 가능하다.

    조직화된 종교는 개인적인 탐구를 가로 막는다. 그들은 기성화된(기성복처럼) 진리를 가져다 준다. 진리는 공장에서 생산되는 것이 아니며 시장에서 사고파는 것도 아니다. 그대 가슴의 깊은 침묵 속에서 진리를 발견해 내야 한다. 그리고 그대를 제외한 어느 누구도 침묵 속으로 들어갈 수 없다. 종교는 개인적인 것이다. 국가라는 개념은 추악한 것이며 모든 존재가 신성하며 모든 존재가 사원이다. 그대가 고요함과 명상과 사랑으로 충만하다면 그대는 자신의 주변에 깨어 있는 의식의 사원을 창조하는 것이다. 무엇인가를 숭배하기 위해 다른 곳으로 갈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대의 깨어 있는 의식보다 높은 것은 없기 때문이다.

    짜라투스트라는 세상의 위대한 스승들 가운데, 육체에 반대하지 않는 단 하나의 스승이다. 다른 스승들은 모두 육체에 반대한다. 그 이유는 육체가 영적인 성장을 방해하는 장애물이며, 그대와 신성 사이에 가로놓인 장벽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터무니 없는 소리이다. 그는 육체를 사랑하고 이해하지 않는 한, 영적인 성장은 불가능하다고 가르친다. 육체는 그대의 영혼이 거주하는 사원이다. 육체는 아무 대가도 요구하지 않고 평생을 그대에게 봉사한다. 육체를 비난하는 것은 매우 배은망덕한 행위이다. 왜냐하면 육체를 비난하는 사람들 역시 육체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들은 육체를 통해서 육체를 비난하는 것이다. 인간은 육체를 통해서 살아감에도 불구하고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어 있다는 매우 위험한 사상을 받아들였다. 그것은 육체는 물질이고 영혼은 정신으로, 이 세상이 물질과 정신 두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육체와 영혼, 물질과 에너지는 하나이며 동일한 것이다. 존재는 이중적인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유기적인 전체이다. 육체를 비난하는 데에는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육체를 비난하라. 그러면 영혼을 찬양할 수 있는 훌륭한 기반이 된다. 세상을 비난하라. 그러면 신을 찬양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신이 세상을 창조했다고 설교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육체가 그 자체의 지혜를 갖고 있음을 알지 못했다. 그대는 매순간마다 그 지혜와 마주친다. 그러나 오랜 세뇌 작용으로 인해 그대는 육체의 지혜를 인식할 수 없다. 몸에 반드시 필요한 기본적인 작용은 그대에게 맡겨지지 않는다. ‘그대’는 신뢰할 만한 존재가 아니다. 그래서 그대의 의지와 상관없이 스스로 알아서 한다. 눈꺼풀은 눈의 청결을 유지하기 위해서 깜박거린다. 호흡 또한 마음에 의존하지 않는다. 마음은 주의 깊지 않아 잊어버릴 수도 있다. 만일 마음이 숨쉬는 것을 잊는다면 그대는 죽을 것이다. 그리고 그대가 잠들어 있을 때는 누가 숨쉬겠는가? 그러나 마음이 깊은 잠에 빠져 있을 때도 육체는 호흡을 계속한다. 상처를 입었을 때, 마음은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육체는 즉각 상황에 대처한다. 그것은 너무나 신비하고 경이로운 작용이다. 육체는 스스로 치료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 치료 과정을 지원하는 정도다. 그러나 육체 스스로 치료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우리의 모든 노력은 수포로 돌아간다. 육체는 그 자체에 새로워지는 능력을 갖고 있다. 7년마다 그대는 모르는 사이에 전혀 새로운 사람이 된다. 지금의 세포는 7년 후에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육체는 완전히 새로운 세포로 대치된다. 거의 모든 종교는 육체를 죄악의 근원으로 비난한다. 그러나 육체는 그대 삶의 근원이다. 그 육체를 갖고 무엇을 하느냐는 그대에게 달렸다. 그대는 죄인이 될 수도 있고, 성자가 될 수도 있다. 육체는 그대를 죄인이 되도록 유혹하지도 않으며 성자가 되도록 부추기지도 않는다. 그대가 누구이던간에 육체는 자신의 일을 계속 할 뿐이다. 육체는 그대 존재의 시발점이다. 육체가 있기 때문에 그대는 존재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 그러나 육체를 비난하고, 포기하고, 고문한다면-오랜 세월 동안 그런 행위가 자행되어 왔다-존재를 향해 나아갈 수 없다. 불필요하게 육체와의 싸움에 말려들고 거기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 그대의 모든 에너지는 이 적대적인 투쟁 속에서 낭비된다. 육체를 사랑과 감사함으로 대해야 한다. 그것은 그대의 존재로 향하는 디딤돌이 될 것이다. 사실, 그것은 자연의 뜻이기도 하다. 그대는 일관된 하나의 ‘나’가 아니다. 마음에 관한한 그대는 수많은 ‘나’로 존재한다. 존재에 도달하고 싶다면 육체와 더불어 시작하라. 육체는 존재의 외적인 측면이다. 그리고 존재는 육체의 내적인 측면이다. 영혼의 갈망은 육체의 갈망이며, 육체의 배고픔은 영혼의 배고픔이다. 육체와 영혼은 단지 두 개의 이름일 뿐, 따로 떨어진 두 개의 실체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이다.

     

    자연풍경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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