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사상과 철학 201 (교재 공개)패러다임/철학 2025. 1. 15. 22:15반응형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생각하기 이해하기 실천하기-
사상과 철학 201
영상 강의 링크 : https://youtu.be/saeXOtfL5PU
605.
탄트라 비전 네 번째 차트 <#중심에 이르게 하는 방편들 1.(4가지 중 첫 번째)> 2가지 수행법이 있다.
이 우주는 그대의 집이다. 하지만 그대가 그대의 뿌리(중심)를 찾지 못하는 한 이 우주는 그대와 아무 상관없는 외계로 존재할 것이다. 지복감은 우주와 그대가 유기적인 합일체라는 사실에 대한 당연한 결과로 찾아온다. 그래서 비그야나 바이라바 탄트라를 통해 이 중심에 이르는 방편들을 터득할 수 있는 것이다. 단전의 중심은 존재(종교, 하나되는 능력) 속에 있다. 가슴의 중심은 느낌(사랑, 예술) 속에 있다. 머리의 중심은 앎(지식, 철학) 속에 있다. 가슴과 머리는 본래의 중심이 아니다. 진짜 중심은 아랫배에 있는 단전이다. 섹스 행위를 통해서 짧게나마 단전 가까이에는 갈 수도 있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이것마저 불가능하다. 그들은 섹스조차 머리로 하기 때문이다. 섹스란 하나의 경험이다. 그것을 생각으로(두뇌를 자극하는) 처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대가 생각하기 시작한다면 점점 그것을 경험하기가 어렵게 될 것이다. 그대는 낡은 습관을 되풀이 할 뿐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그리고 좌절감만 맛 본다. 그것은 의식이 머리에만 머물러 있고 중심을 향해 내려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단전을 통해 갈 때만이 그대는 지복의 순간을 경험할 수 있다. 생각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죽음의 순간에 즉 전투를 하는 병사들은 단전의 지복을 경험한다. 생각이 존재할 틈이 없기 때문이다. 일상에서는 생각하고 행동한다. 위험 속에서는 먼저 행동하고 생각한다. 생각없이 행동할 때 그대는 본래의 중심, 단전으로 내던져진다. 위험 속에서 스릴을 맛보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광란의 질주, 도박 등 거기에 위험이 있다. 그때 마음은 멈춘다. 그러면 의식은 단전으로 내던져진다. 위험이 그만큼 매력 있게 보이는 것도 위험 속에서는 일상적인 마음이 그 기능을 멈추기 때문이다. 그대는 무심이 된다. 드디어 그대는 존재하게 된다. 그대가 깨어 있을 때, 마음의 활동인 사념은 사라진다. 그것은 명상의 순간이다. 그래서 인간은 항상 위험을 찾아다닌다. 그것은 명상의 상태를 원하기 때문이다.
탄트라 비전 네 번째 차트 <#중심에 이르게 하는 방편들 1.>
<수행법 열셋> 13.무한한 허공 속에서 오색찬란한 공작의 꼬리 깃털이 그대의 오감이 되었다고 상상하라. 이제 그 아름다운 색채가 그대의 내면으로 들어오게 하라. 그리고 한 점을 정하여 거기에서 만나게 하고 그 점을 집중하라. 그 점이 허공 속에 있든지 벽 위에 있든지 어디에 있든지 상관없다. 그 점이 사라질 때까지 그렇게 하라. 그때 또 다른 것을 향한 그대의 바람이 실재가 되어 나타나리라.
이 방편의 의도는 그대로 하여금 내면의 중심에 이르게 하는 데 있다. 만약 그대가 외부에다 하나의 중심을 정해 놓고 그것에 온 의식을 집중해서 바라본다면 그때 그대는 이 세상을 벗어나게 된다. 이 세상 전체를 그대는 잊어버리게 된다. 갑자기 그대는 그대 내면의 중심에 던져지게 될 것이다. 마음의 구조 자체가 움직임이다. 그것은 한 점에 절대로 머무르지 않는다. 항상 쉴 새 없이 떠다니고 있다. 이 생각에서 저 생각으로 옮겨 다닌다. 만약 그대가 어느 한 점에 머무른다면 마음은 움직이라고 말하며 그대와 싸울 것이다. 그대가 멈추면 마음은 곧 죽어 버리기 때문이다. 마음은 하나의 진행과정이다. 의식이라는 것은 그대의 본성이다. 마음은 그대의 활동이다. 그런데 우리는 마음이 어떤 실체라고 생각한다. 마음은 차라리 사념의 흐름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정확하다. 그대가 걷다가 멈추면 거기에는 더 이상 걷는 행위가 존재하지 않는다. 다리는 그대로 있지만 걷는 행위는 사라진다. 마찬가지로 그대가 집중할 때 의식은 그대로 있지만 마음은 사라진다. 의식이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할 때 그 진행과정이 마음이다. 그래서 의식이 계속 움직이면 그때 마음이라는 것이 생겨난다. 만약 그대가 멈추면 거기에 마음은 더 이상 없다. 그대는 마음없는 의식이다. 그대는 다리를 갖고 있다. 하지만 걷는 행위가 없다. 걷는 것은 다리의 한 기능이고 활동이다. 마음 역시 의식의 한 기능이며 활동이다. 그대는 항상 마음의 명령에 순종해 왔다. 또한 주인이 되어 본 적이 한번도 없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그대는 마음이 그대 자신이라고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대가 마음을 자신으로부터 가려내지 않는 한 그대는 항상 마음의 노예가 되어 끌려다닐 수밖에 없다. 그러니 마음의 속임수를 알고 그 굴레를 벗어나라. 먼저 그대의 다섯 가지 감각이 다섯 가지 색채라고 생각하라. 그리고 그 색채들이 우주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다고 생각하라. 그리고 색채들이 내면 속으로 들어간다고 생각하라. 그대 역시 그 색채들과 함께 내면으로 들어가라. 그리하여 모든 색채가 하나의 중심에서 만난다고 생각하라. 이것은 단순한 상상이다. 그러나 도움이 된다. 이 다섯 가지 색채들이 그대를 관통해 들어가서 한 점에서 만난다고 상상해 보라. 이들 다섯 가지 색채가 한 점에서 만나게 될 때 전 우주가 해체될 것이다. 그대의 상상 속에는 오직 색채들만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공작의 꼬리 깃털처럼 허공에 펼쳐져 있는데, 그대 속으로 깊이 들어가면 한 점에서 만나고 있다. 그 한 점은 어디에 잡아도 좋다. 하지만 단전이 가장 좋다. 그대의 단전에서 다섯 가지 색채들이 모인다고 생각하라. 그리고 전 우주가 그 색채로 구성되어 있다. 그때 그 점을 집중해서 보라. 그 점이 녹아 없어질 때까지 집중하라. 그 점은 해체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의 상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점이 사라질 때 그대는 그대의 중심에 내던져져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은 사라졌다. 이제 그대에게는 세상이 없다. 이 명상 속에서는 오직 색채만이 있다. 그대는 세상 전체를 잊어버렸다. 모든 대상물들을 잊어버렸다. 이 명상 방편은 색채 감각이 뛰어난 사람에게 맞고 컬러 꿈을 꾸는 사람에게 좋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시도해 보라. 다섯 가지 색깔이 있다. 그리고 온 세상이 이 색채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 색채들이 그대 속에 들어와서 만나고 있다. 그 한 점에 집중하라. 그리고 그 점이 사라질 때까지 계속 움직이지 말고 그것과 함께 남아 있으라. 마음을 허용하지 말고 그것이 무슨 색인지 알려고도 하지 말라.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 말라. 생각하기 시작하면 마음이 움직인다. 그대 속에 있는 색채로 취하라. 절대 사념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 집중은 생각이 아니다. 정말로 그대가 색채로 가득 차 있다면 그대는 무지개가 된 것이다. 공작의 꼬리 깃털이 된 것이다. 그리고 전 우주 공간이 그 색채들로 가득 차 있다. 그대는 황홀하리만큼 아름다운 느낌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는 말라. 아름답다고 말하지도 말라. 사념 속으로 흘러 들어가지 말라. 모든 색채들이 만나는 그 점을 집중하라. 그러면 그 점은 사라져 버릴 것이다. 집중력을 강화하면 상상은 더 이상 남아 있을 수 없게 된다. 그것은 해체되어 버린다. 거기에는 오직 색채만이 남아 있다. 그 색채들은 그대의 상상이다. 그 상상적인 색채는 한 점에서 만난다. 그 점 역시 상상이다. 이제 깊은 집중과 함께 그 점마져 사라져 버린다. 그러면 그대는 그대의 중심에 던져져 있다. 사물은 상상을 통해 사라지고 이제 상상도 집중을 통해 사라졌다. 그대는 오직 주체로서 남아 있다. 물질적 세계도 사라지고 정신적 세계도 사라졌다. 그대는 오직 순수한 의식으로서 존재한다. 만약 그대가 색채를 상상할 수 없다면 그때는 벽 위에 한 점을 찍어라. 집중할만한 대상이면 어떤 것이라도 좋다. 그것이 내면에 있는 것이라면 더욱 좋다. 한 점에 집중할 때 눈을 깜박이지 말라. 깜박이는 그 움직임에 마음이 생각을 시작한다. 그 순간 그대의 집중은 잃어 버린다. 만약 내면의 한 점을 집중한다면 더 이상 눈은 상관이 없어진다. 그리고 외부의 점이든 내면의 점이든 그 점이 사라질 때까지 집중하라. 그것은 풀어 없어질 것이다. 그대가 마음의 움직임을 조금도 허락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사실 그 점은 그대에게 있어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집약되어 있는 점이었다. 그 점마저 없어진다면 그때 의식은 아무데도 갈 곳이 없다. 움직일 대상이 없는 것이다. 모든 차원이 닫혀져 버렸고 마음은 이미 그 점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의식은 그 자체에게로 돌아간다. 이제 그대는 자신의 중심에 이르게 되었다. 사실 그대가 한 점에 집중할 때 그 점이 실제로는 사라지지 않는다. 대신 그대의 마음이 사라져 버린다. 그대가 외부의 점에 집중하고 있을 때 마음은 움직일 수 없다. 움직이지 않는다면 마음은 생존할 수 없다. 그것은 죽는다. 마음이 죽으면 그때 그대는 외부의 어떤 것과도 관계를 맺을 수 없다. 갑자기 모든 연결 다리가 끊어진다. 마음이 곧 다리이기 때문이다. 처음에 그대가 벽 위의 한 점에 집중할 때 마음은 그대에게서 벽으로, 벽에서 그대에게로 왔다갔다한다. 그것은 하나의 과정이다. 마음은 그렇게 해서라도 존재하게 된다. 그때는 아직 그 점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대가 집중을 계속하게 되면 마음은 왔다갔다하는 힘이 점점 약해지고 마침내 그 움직임을 멈춘다. 멈추는 순간 마음은 죽는다. 그때 그대는 그 점을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그대는 그 점을 눈으로 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눈은 단지 빛이 들어오는 하나의 창문일 뿐이다. 마음이 사라진 이상 눈은 아무런 기능도 할 수 없다. 그래서 그 점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대가 눈을 뜨고 있어도 말이다. 마음이 다시 되살아나면 그때 점이 다시 보이기 시작한다. 그것은 여전히 거기에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대가 그 점을 볼 수 없다. 그때 그대는 자신의 중심에 있다. 중심에 이르게 될 때 그대는 그대 존재의 뿌리를 자각하게 될 것이다. 그대는 존재계와 연결되어 있는 곳을 알게 될 것이다. 그대 속에 존재계 전체와 연결되어 있는 한 점이 있다. 그것이 바로 중심이다. 그대가 한번만 이 중심을 알게되면 그대는 집에 도착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 세계는 더 이상 그대와 상관없는 외계가 아니다. 그대는 이방인이 아니다. 그대는 이 세상에 속해있고 이 우주가 그대의 집이다. 거기에 더 이상 갈등과 불안, 고뇌, 번민이 있을 수 없다. 그대와 존재계 사이에 어떤 불화도 없다. 그때의 지복은 어떤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왔다가 사라지는 어떤 바람이 아니다. 그때의 지복이 바로 그대의 본성이다. 누구든지 자신의 중심에 뿌리내릴 때 그 지복은 자연스런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 지복은 느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식은 반대의 상황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대가 행복할 때 그대는 불행을 느낄 수 있다. 항상 불행하다면 그대는 그것에 대해 무감각해진다. 한번이라도 행복을 맛봐야 그대는 불행을 안다. 마찬가지로 그대가 중심에 이르면 지복의 순간이 닥쳐온다. 하지만 그대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황홀한 느낌이 약해져 간다. 그저 고요한 평화만이 흐를 뿐이다. 하지만 그대는 진짜로 행복하다. 그것은 별이 빛나고 강이 흐르는 것처럼 자연스럽다. 그대의 존재 자체가 축복 속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그대에게 일어난 어떤 것이 아니다. 이제 그것이 바로 그대 자신이다.
탄트라 비전 네 번째 차트 <#중심에 이르게 하는 방편들 1.>
<수행법 열넷> 14.그대의 신경 전체에 온 주의를 집중시켜라. 연꽃 뿌리 속에 들어 있는 실처럼 섬세한 신경이 척추 속에 있다. 그대의 의식이 척추의 중심에 머무를 때 변형이 일어난다.
이 명상 역시 눈을 감고 수련해야 한다. 탄트라 행자는 눈을 감고 자신의 척추를 영상으로 떠올려야 한다. 등뼈는 곧게 펴고 앉아야 한다. 그리고 척추 속에 연꽃 뿌리의 실처럼 섬세한 신경을 보라. 그것에 집중하라. 그러면 곧 그대는 자신의 중심에 이르게 된다. 척추뼈는 그대의 몸 전체 구조의 기초이다. 모든 것이 그것과 연결되어 있다. 그 척추 속에는 연근 속의 실같은 것이 들어 있다. 해부학에서는 그것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물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척추 속에 있는 실 같은 것을 은줄(silver cord)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그대가 아무리 세밀하게 해부를 해봐도 눈으로는 그 은줄을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깊은 명상 속에서는 그것이 보인다. 그것은 물질이 아니라 에너지이다. 그대의 척추 신경 속에 에너지의 코드가 들어 있다. 그것을 통해서 그대는 보이지 않는 존재계와 연결되어 있다. 또한 보이는 세계, 즉 물질 세계와 그대가 연결되어 있다. 그것은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의 연결 다리와 같은 것이다. 그 실을 통해서 그대는 그대의 육체와 연결되어 있고, 또한 그대의 영혼과도 연결되어 있다. 그대가 내면에 대해 집중할 수 있다면 어느날 갑자기 그대의 몸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면 그대는 또 다른 차원의 유물론자가 될 것이다. 요가는 차원이 다른 유물론이다. 그것은 거대한 또 하나의 우주이다. 그대의 작은 육체는 거대한 우주인 것이다. 섹스 행위를 깊게하라. 눈을 감고 몸을 느껴라. 이완하라. 척추의 중심에 집중하라. 그것은 육체의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깊은 영적 결합이다. 두 개의 육체를 통한 두 내면의 만남이다. 서로를 관통하는 두 주체성의 만남이다. 거기에 변형이 일어난다. 그대는 변형될 것이다. 가슴과 머리의 차크라는 개발하고 발전시킬 수 있다. 그것은 본래부터 있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회, 문화, 교육을 통해 그것들을 개발시킬 수 있다. 그러나 단전의 차크라는 개발되는 것이 아니다. 본래부터 단전에는 중심이 있었다. 그대가 그것을 잊어버린 것 뿐이다. 그것은 발견되는 것이다. 그것은 그대의 생명이다. 존재는 개발될 수 없다. 그것은 이미 완성된 채로 거기에 있다. 단지 재발견 할 뿐이다. 그것은 각자의 소질과 능력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눈꽃 풍경
반응형'패러다임 > 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사상과 철학 200 (교재 공개) (0) 2025.01.11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사상과 철학 199 (교재 공개) (2) 2024.12.25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사상과 철학 198 (교재 공개) (1) 2024.12.20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사상과 철학 197 (교재 공개) (1) 2024.12.12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사상과 철학 196 (교재 공개) (1) 2024.1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