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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사상과 철학 197 (교재 공개)패러다임/철학 2024. 12. 12. 00:13반응형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생각하기 이해하기 실천하기-
사상과 철학 197
영상 강의 링크 : https://youtu.be/2ogCud2bgFg
601.
<오쇼 라즈니쉬의 탄트라 강의>
39개 차트 112가지의 수행방법으로 구성, 자신에게 맞는 수행법 찾으시길.
탄트라 비전 첫 번째 차트 <#호흡, 우주에 이르는 다리> - 4가지 수행법
호흡은 우주에 이르는 다리이다. 진리는 언제나 여기에 있다. 진리는 미래에 성취되는 어떤 것이 아니다. 지금 그리고 여기에 있는 그대가 바로 진리이다. 그래서 진리는 창조되거나 발명되는 것도 아니며 찾아지는 것도 아니다. 진리가 있다는 사실을 그대가 발견할 수는 있어도 진리 그 자체를 볼 수는 없다. 찾는 노력이 바로 장벽이 되기 때문이다. 찾는 자는 현재에 있고 찾는 행위는 미래에 있다. 그대는 찾는 것을 결코 만날 수 없다. 명상의 모든 방편은 과거나 미래에서 떠도는 마음을 현재로 이끌어오는 방법이다. 그대가 찾고 있는 것은 이미 여기에 있다. 마음은 찾는 행위에서 찾지 않는 상태, 즉 무위의 상태로 전환되어야 한다. 이것을 지적으로 해석하려면 더욱 어려워진다. 도대체 무슨 수로 마음을 그렇게 바꿀 수 있단 말인가? 그때 마음은 다시금 ‘찾지 않는 상태’, 즉 무위의 경지를 하나의 대상으로 만들어 놓고 다시금 그것을 추구하기 시작한다. 처음에 마음은 말한다. ‘찾지 마라’ 그리고 나면 마음은 또 말한다. ‘나는 찾지 않아야 한다’ 그때 ‘찾지 않는 상태’가 새로운 목표가 된다. 이리하여 찾는 행위는 또 시작된다. 욕망은 뒷문으
로 다시 들어온다. 그러므로 세속적인 것을 갈망하는 사람이나, 비세속적인 것을 갈망하는 사람이나 찾는 행위에 있어서는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똑같은 마음의 게임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사실 모든 목표는 세속적인 것이다. 찾는 행위 그 자체가 세속적인 것이기에. 그러므로 세속적이지 않은 것은 찾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찾는 순간 그것은 세속적인 것이 된다. 그대가 신을 찾는다면 신은 세속적인 것의 한 부분이다. 모크샤(해탈)을, 니르바나(열반)를 찾는다면 그것 역시 세속의 범주를 넘어서지 못한다. 그대의 바람이 곧 세속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니르바나를 갈구해서는 안된다. 갈구가 끝난 상태가 니르바나이기 때문이다. 갈구가 끝난 상태를 갈구한다는 것이 얼마나 웃기는 일인가? 이것을 지적으로 이해하려면 하나의 수수께끼가 될 것이다. 그대가 한 가지 방편을 수행하게 되면 그대의 마음은 과거나 미래로 떠도는 것을 멈추게 될 것이다. 그때 갑자기 그대는 현재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붓다, 노자, 크리슈나 모두 한결같이 방편을 이야기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어떤 것이라도 일단 마음과 연관되면 그것은 문제 거리로 변한다. ‘찾지않는 상태’마저 문제가 되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욕망을 없앨 수 있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모두 욕망이 없는 상태를 욕망하고 있다. 그들은 어디선가 영적인 격언, ‘욕망이 없으면 축복의 경지에 이르리라, 그리고 그대의 영혼이 자유롭게 되리라. 욕망이 없으면 고통마져 끝나리라’라는 말을 들었던 모양이다. 이제 그들은 고통이 없는 경지를 얻으려고 갈망하고 있다. 그들의 마음은 지금 속임수를 쓰고 있다. 그들은 아직도 갈망하는 상태에 있다. 단지 목표와 대상이 바뀌었을 뿐이다. 그들은 이전에 돈과 명성, 부와 권력을 갈망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 모든 것들이 해결될 수 있는 ‘갈망없는 경지’를 갈망하고 있다. 갈망하는 행위는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다. 오히려 이전보다 더 교활하게 위장하고 있다. 명상의 방편들을 수행한다면 그대의 마음은 현재로 돌어올 것이다. 마음이 현재로 돌아올 때 마음의 작용은 멈춘다. 그때 더 이상 마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더 이상 떠다닐 수 없기 때문에 사념이 생겨날 수 없는 것이다. 현재 속에는 사념이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 없다. 만약 그대가 지금 여기에 있다면 어떻게 마음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마음은 멈추어 버린다. 그때 그대는 마음 없음. 즉 無心을 얻는다. 그래서 진짜로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해야 ‘지금 그리고 여기’에 있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물론 노력은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노력이 쓸모없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역할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그대가 현재라고 하는 지점을 정해 놓는 순간 그 지점은 미래 속으로 이동해 버리기 때문이다. 어떻게 현재에 있을 수 있겠느냐고 물을 때 그대는 또다시 미래에 대해서 묻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현재의 이 순간은 곧바로 물음 속으로 들어가 버리고 그대는 미래의 어느 순간을 꿈꾸게 된다. 그대는 ‘언젠가 갈망도 없고 고통도 없는 경지에 머무를 수 있을 거야’라고 꿈꿀 것이다. 그래서 그대는 또다시 ‘어떻게 하면 현재 속으로 들어올 수 있는가?’라고 묻는다. 이 방편을 수행하게 되면 어느날 불현듯 그대 자신이 ‘지금 그리고 여기’에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지금 여기에 있는 그대의 존재가 바로 진리이다. 그것이 바로 자유이며 니르바나이다. 삶과 호흡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리고 그 삶 속에서 모든 것이 변한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은 호흡이다. 호흡은 탄생과 죽음 사이에서 끊임없이 계속된다. 모든 것이 변한다. 그러나 호흡만은 끊임없이 계속된다. 행복할 때나 불행할 때, 젊었을 때나 늙었을 때, 성공했을 때나 실패했을 때, 그대가 무엇을 하든지 그것은 관계가 없다. 오직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대가 그 언제라도 호흡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단 한순간이라도 호흡이 멈춰진다면 그대는 더 이상 생존할 수 없다. 만약 그대가 애를 써야 호흡이 가능하다면 그때는 살아가기가 참으로 힘들 것이다. 하지만 그대는 호흡하려고 특별히 애를 쓰지 않아도 호흡할 수 있다. 그대의 영혼이 잠들어 있어도 호흡은 계속된다. 무의식 상태 속에서도, 깊은 혼수상태 속에서도 호흡은 계속된다. 호흡은 그대 자신도 모르게 계속되는 어떤 것이다. 첫째로 호흡은 그대 속에서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으며 그대의 본질을 구성하는 인자이다. 둘째로 호흡은 삶에 있어서 가장 근본적이며 기본적인 것이다. 호흡하지 않고는 생존할 수 없다. 호흡과 삶은 동의어이다. 호흡은 삶의 매커니즘이다. 이 때문에 인도에서는 호흡을 프라나(prana)라고 부른다. 프라나에는 생명력과 활동력이라는 두 가지 뜻이 담겨 있다. 따라서 그대의 삶은 그대의 호흡이다. 셋째로 호흡은 그대와 그대 육체 사이의 다리 역할을 한다. 호흡은 그대를 그대의 육체에게 연결시켜 주고 있다. 호흡은 또한 그대 자신과 우주 사이에서도 다리 역할을 한다. 육체는 그대에게 다가온 우주다. 육체는 그대에게 가장 가까이 접근해 있는 우주다. 그대의 육체는 우주의 일부분이다. 육체 속에 있는 모든 것, 낱낱의 세포들이 곧 우주의 부분이다. 그리고 호흡은 그것들을 이어주는 다리이다. 다리가 부서지면 그대는 더 이상 육체 속에 머물 수 없다. 그대는 더 이상 우주에 존재할 수 없다. 더 이상 시간과 공간 속에서 발견될 수 없다. 시간과 공간을 그대에게 연결해 주는 다리는 바로 호흡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대가 호흡을 잘 다루면 그대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할 수 있다. 그대는 미지의 차원으로 들어갈 수 있다. 호흡은 두 개의 극점을 갖고 있다. 한 극은 그대의 육체와 우주에 연결되어 있다. 다른 한 극은 그대의 존재와 초우주超宇宙에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호흡의 한쪽 극만을 알고 있다. 호흡이 우주 속으로, 육체 속으로 이동하는 것만 알고 있다. 그러나 호흡은 육체로부터 비육체로도, 우주에서 초우주로도 이동한다. 우리는 호흡의 다른 이 극점을 알지 못하고 있다. 또 다른 이 극점을 알게 되면 그대의 차원은 변형된다. 요가에서는 체계적인 호흡을 한다. 호흡을 체계화시키면 더욱 건강해질 것이다. 그때 호흡의 비밀을 알게될 것이며 그러면 그대의 수명은 더욱더 연장될 것이다. 더욱 그대는 강해질 것이다. 생명 에너지로 가득 찰 것이다. 더욱 젊어지고 싱싱해질 것이다. 그러나 탄트라는 그런 것을 개의치 않는다. 탄트라는 호흡을 제어하고 체계화시키는 것에 찬성하지 않는다. 그저 그대의 내면으로 되돌아가는 방편으로써 호흡을 잠시 이용할 뿐이다. 따라서 탄트라에서는 호흡의 특별한 체계나 조절 따위를 수련해서는 안된다. 있는 그대로의 호흡 속에서 호흡의 또 다른 어떤 극점을 자각하기만 하면 된다. 호흡에는 확실히 두 개의 극점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두 극점을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왔다. 호흡 속에는 두 극점이 있는데 그것들이 바로 문이다. 다른 세계 속으로, 다른 존재 속으로, 다른 의식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이다. 그것은 그대가 그대의 육체 속으로 들어온 문이다. 그리고 육체를 빠져나갈 때도 그 문으로 나간다. 하지만 그 문은 너무나 미묘하다. 호흡은 가장 그대 가까이에 있다. 가까이에 있는 것일수록 관찰한다는 것이 더 어렵다. 분명할수록 더 어렵다. 그대와 너무나 밀착되어 있기 때문에, 그대와 호흡 사이에 어떤 간격도 없기 때문에 그대는 호흡을 관찰의 대상으로 놓고 보기가 힘들다. 오직 깊은 통찰력이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그때만이 호흡의 두 극점에 대해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각성이 이들 방편의 기본이 된다.
탄트라 비전 첫 번째 차트 <#호흡, 우주에 이르는 다리>
<수행법 하나> 1.빛의 샘(光源), 그 황홀한 일별은 들이쉬고 내쉬는 숨 사이에서 찾을 수 있도다. 숨이 들어오고, 들어온 숨이 나가려고 하기 직전, 바로 거기에 지복至福이 깃들어 있도다.
호흡이 들어온 뒤-이것을 호흡의 하강점이라 한다-그리고 돌아나간 직후-이것을 상승점이라 한다-거기에 지복이 깃들어 있다. 호흡이 들어올 때 주시하라. 그리고 호흡이 나갈 때 주시하라. 찰라와 같은 순간에 호흡의 정지 상태가 있다. 그 점을 찾아내어야 한다. 그대가 그 점을 잡아내야 한다. 호흡이 들어오기 직전, 그리고 나가기 직전, 거기에 정지되는 순간이 있다. 그대가 그 순간을 잡을 때 깨달음이 가능하다. 그때 그대는 육체와 호흡이 연결되어 있지 않다. 순간적으로 그 연결 고리가 끊기는 것이다. 그때는 그대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순간이다. 이 점을 이해하라. 숨이 멈추는 상태는 그대가 살아 있으면서도 죽은 상태다. 하지만 그대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호흡의 정지 순간을 한번도 인식해 본 적이 없다. 그 순간이 너무나 짧기 때문이다. 내쉬는 숨은 죽음이요, 들이쉬는 숨은 탄생이다. 그러므로 그대가 내쉬고 들이쉴 때마다 그대는 죽었다가 다시 사는 것이다. 그 간격은 너무나 짧다. 하지만 그 간격은 반드시 존재한다. 오직 성실하게 주시하는 자만이 그 간격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 지복을 경험할 수 있다. 그때 그대는 내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알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호흡법을 수련하지는 말라. 호흡을 조절해서는 결코 그 점을 발견할 수 없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그 상태를 그대로 두라. 완전한 주시는 완전한 자유 속에서만이 가능하다. 그대가 조금이라도 의도적인 면이 있다면 거기에 왜곡이 일어난다. 그리고 그대는 오해하게 될 것이다. 진리를 아는 것은 불생과 불멸을 아는 것이다. 그대가 관념적으로 아는 것과 정지의 순간을 잡아내는 것과는 질적으로 틀리다. 그대가 관념적으로 아는 것은 결코 진리를 아는 것이 아니다. 진리를 안다는 말은 진리를 체험한다는 말이다. 말을 통해서, 사념을 통해서, 아는 것은 그저 상상일 뿐이다. 거기에는 아무런 확신도 없다. 그러므로 그대는 이 정지 간격을 잡아내기 위해 모든 주의를 다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다른 노력은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 단지 주의를 기울여라. 그러나 어떤 행위도 개입시키지 말라. 의식의 분명한 각성만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이미 거기에 갖추어져 있다.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오직 숨이 들어오고 나오는 것만 살펴라. 그 들락날락하는 통행만을 주시하라. 공기가 그대의 콧구멍에 닿는 감촉을 느껴보라. 그 숨과 함께 단전으로 내려가라. 완전히 깨어있는 중에 호흡과 함께 다녀야 할 것이다. 결코 호흡을 놓쳐서는 안된다. 앞서가지도 말고 뒤따라 가지도 말라. 오직 호흡 그 자체가 되어 호흡과 동시에 존재하라. 호흡과 의식은 하나가 되어야 한다. 호흡이 들어올 때 그대도 들어오라. 그렇게 할 때만이 그대는 들숨과 날숨 사이에 존재하는 정지 간격을 느낄 수 있다. 그것은 간단하면서도 쉽지 않은 일이지만 숨과 함께 들어가고 숨과 함께 나와라. 다만 경계할 것은 정지 간격을 발견하려는 욕망이다. 그 욕망은 의식의 각성에 장애물이 된다. 정지 간격에 이르려는 욕망의 바람이 불 때 그대는 앞으로 전진한다. 호흡이 들어온다. 그러나 그대는 호흡을 앞질러 간다. 호흡보다는 정지 간격에 더 관심이 많기 때문이다. 순간적으로 호흡과 함께 움직일 때 거기에 호흡이 없다면 어떻게 무자각의 상태로 있을 수 있는가? 그때 그대는 알 것이다. 호흡이 텅 빈 상태를 깨닫게 될 것이다. 호흡의 핵심이 들어오는 것도, 나가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느낄 때 깨달음의 순간이 온다. 이제 호흡은 완전히 사라졌다. 그 순간을 지복이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비그야나 바이라바 탄트라’의 첫 번째 방편이 붓다의 이름을 연상케 했다. 붓다 이전부터 이 방편은 사용되었다. 단지 붓다는 이 방편을 통해서 깨달은 자, 즉 붓다가 되었다.
풍경 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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