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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사상과 철학 196 (교재 공개)
    패러다임/철학 2024. 12. 5. 2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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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생각하기 이해하기 실천하기-

     

    사상과 철학 196

     

    영상 강의 링크 : https://youtu.be/W0Gap4cFGIs

     

     

    600.

    분노, 욕망,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려면 마음을 바꾸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면을 바꿔라. 그러면 외부도 변화될 것이다. 그 테크닉이 탄트라이다. 마음은 미묘한 물질이다. 그래서 그것은 변화될 수 있다. 한 번 그대가 변화된 마음을 갖게 되면 그대는 다른 세계를 접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음을 통해서 세상을 보기 때문이다. 그대에게 보이는 세상은 그대의 특수한, 마음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마음을 바꾸어라. 그러면 세상 역시 달라질 것이다. 그리고 만약 마음이 없어진다면 그것은 탄트라의 궁극적 경지이다. 즉 탄트라가 궁극적으로 꾀하는 것은 그대의 마음을 없애는 것이다. 그때 그대는 드디어 중재자 없이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 중재자가 사라질 때 비로소 그대는 실체와 직접 조우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無心의 상태이다. 처음으로 그대는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직접 보게 된 것이다. 만일 그대가 마음을 갖고 있다면 마음은 그대 앞에서 세상을 창조해 나갈 것이다. 그대 눈 앞에 펼쳐지는 세상은 그대 마음의 투사체이다. 그러므로 먼저 마음을 무심으로 바꾸어라. 탄트라의 방편은 112 가지이다. 각 방편을 삼일씩 해 보라. 그 러면 자신에게 맞는 것이 있다. 그러면 그것을 집중적으로 3개월을 계속 정진하라. 그러면 변형이 일어날 것이다. 요가와 탄트라의 목표는 같지만 길은 완전히 대조적이다. 요가는 투쟁의 길이다. 탄트라는 깨어 있음 속에서 사랑하고 녹아드는 길이다. 요가는 자신을 억압하는 길이다. 고차원적 자살이다. 그대는 본능적인 자아를 죽여야 한다. 그대의 육체, 욕망, 인간의 모든 바람들을 말이다. 섹스와도 싸워야 한다. 그러나 탄트라는 자신을 마음껏 풀어주는 것이다. 그대의 본성을 이용해 초월하는 것이다. 즉 그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전체적인 수용이다. 죽음이 필요없다. 섹스도 그대의 에너지이다. 그것을 하나의 장벽으로 만들지 말고 징검다리나 받침돌로 사용하라. 그것과 친구가 되라. 즉 욕망을 지켜보라. 그것에 대항하지 말고 그 속에서 움직여라. 그대가 깨어 있으면서 욕망 속에 움직일 때 그대는 그것을 초월한다. 그대는 그 속에 있으면서 동시에 그 속에 있지 않다. 그대는 그것을 통과해서 지나간다. 동시에 그대는 방관자로 남아있는 것이다. 예로 욕망에 휩쓸리지 않고 욕망 속을 돌아 다니는 것이다. 오르가즘 속에서 말짱한 정신을 차리는 것이다. 전체적인 수용을 통해서만 그대는 성장할 수 있다. 모든 에너지를 이용하라. 먼저 그것들을 받아 들여라. 그리고 그 에너지가 무엇인지 섹스가 도대채 무슨 현상인지 이해하라. 성 행위는 사랑의 행위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을 떠날 수는 없다. 그대가 떠나려고 하면 할수록 그대는 더욱 그것에 묶이게 된다. 부정하면 할수록 그대는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 부정하고 파괴하려는 태도는 결국 그대의 각성과 예민한 감수성을 부정하고 파괴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섹스는 아무런 감수성도 없이 계속된다. 그러면 결코 그대는 섹스를 이해할 수 없다. 오직 예민한 감수성과 깊은 통찰력을 통해서만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 시인들이 아름다운 정원을 거닐 때처럼 깨어 있어야만 그대는 섹스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 모든 욕망은 그 한계를 초월하기 위한 하나의 수레가 된다. 그때 모든 에너지가 도움으로 변할 것이다. 그때 이 세상은 니르바나이며 이 육체는 하나의 사원이 된다. 거룩한 성전이 되는 것이다. 요가는 부정의 길이다. 즉 이중성을 통해서 생각한다. 두 개를 하나로 묶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두 개가 거기에 있다. 이중성이 거기에 존재한다. 반면에 탄트라는 긍정의 길이다. 즉 이중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만약 이중성이 있다면 그대는 그것들을 하나로 묶을 수가 없다. 그리고 그대가 어떻게 하든지 그대는 분열된 채로 남아 있다. 싸움은 계속될 것이고 이중성은 없어지지 않는다. 만약 이 세상과 신성이 둘이라면 그때 그것들은 하나로 합쳐질 수 없다. 만약 그것들이 둘이 아니라면, 단지 두 개로 보여지는 것일 뿐이라면 그것들은 하나가 될 수 있다. 만약 그대의 영혼과 육체가 둘이라면 그때 그것들은 하나가 될 수 없다. 만약 그대와 신이 두 개의 존재라면 거기에는 합일될 수 있는 어떤 가능성도 없다. 그것들은 언제나 둘로 남을 것이다. 그런데 탄트라는 말한다. 이중성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그대 눈의 착각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지금까지 이중성으로 나타난 형상들은 그대의 의식이 성장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지금 이 순간 그 이중성을 없애라. 하나가 되라. 싸움이 아니라 수용을 통해서 그대는 하나가 될 수 있다. 세상을 받아 들이고 육체를 받아 들이고 그 속에 있는 모든 것을 받아들여라. 그대 속에 어떤 다른 중심도 만들지 마라. 탄트라에서는 그대의 다른 중심을 에고라고 부른다. 에고를 만들지 마라.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자각하라. 만약 그대가 싸우려 든다면 거기에 에고가 생겨날 것이다. 요기들은 끊임없이 에고 없음.  無我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무아가 될 수 없다. 그들의 길 자체가 에고를 만들어 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에고와의 갈등이 곧 그들의 수행 과정이다. 그대가 싸움을 계속한다면 반드시 에고를 만들어내고 만다. 그리고 싸움이 치열해질수록 에고는 더 강화된다. 만일 그대가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게 되면 그때는 지고한 에고가 형성될 것이다. 탄트라는 싸우지 말라고 말한다. 그때 에고는 존재할 수 없게 된다. 극단에서 극단으로 흐르는 것이 우리의 습성이다. 우리가 싸우지 않으면 우리는 반대로 너무 좋아한다. 그때 우리는 두려워진다. 우리는 생에 집착할 뿐 다른 어떤 것에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러나 탄트라는 심취하지 말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심취하되 깨어 있으라고 말한다. 그대는 화가 나 있다. 탄트라는 절대로 화를 내지 말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온 가슴으로 화를 내라고 말한다. 단지 깨어 있으면서 말이다. 탄트라는 영적인 잠, 그대의 무의식적 상태에 대해서만 반대할 뿐이다. 깨어 있으면서 화를 내어라. 이것이 바로 키 포인트이다. 그때 그대가 분노를 인식한다면 그것은 변형될 것이다. 분노는 자비로 바뀔 것이다. 그래서 탄트라는 말한다. 분노는 그대의 적이 아니라고. 그것은 자비와 똑같은 씨앗이다. 분노와 자비는 같은 에너지이다. 아직 그대 눈앞에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씨앗 속에는 꽃의 아름다움이 들어있다. 그대가 꽃을 원한다면 씨앗을 소중히 여겨라. 따라서 싸우지 말고 먼저 받아들임이 중요하다. 이해와 깨어있음이 필요하다. 그때라야 비로소 진정한 몰두와 심취가 가능한 것이다. 만약 그대가 세상에 반대한다면 그대에게는 니르바나도 없다. 이 세상 그 자체가 니르바나로 변형되기 때문이다. 이 세상과 분리되어 존재하는 니르바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결국 그것은 그대가 근원에 대해 반대하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대가 적(분노, 탐욕, 증오, 탐욕...)으로 여겼던 것을 신이 준 선물로 생각하고 감사하라. 탄트라는 마치 그대가 거룩한 성전에 들어가는 것처럼 섹스 행위 속으로 들어가라고 말한다. 탄트라에서는 모든 것이 신성하다. 부정이 없고 긍정만 있다. 만약 이 세상에 단 하나의 세포나 원자라도 부정한 것이 있다면 그때 이 세상은 완전히 부정한 것이 되고 만다. 세포 하나, 원자 하나라도 이 세상과 동떨어져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아니 본래 하나이다. 단지 여러개라고 보는 것은 우리 시각의 한계 때문이다. 그대가 한 번 알고나면 그대는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그렇게되면 마치 낙엽이 떨어지듯 그것은 그대에게서 떨어져 나가 버린다. 다시는 그것으로 인해서 신경쓰일 일도, 싸울 일도 없다. 붓다의 얼굴을 보라. 그것은 싸우는 사람의 얼굴과 다르다. 그 얼굴은 완전히 이완되어 있는 얼굴의 상징이다. 그러나 그대 주위의 요기들, 수행자들을 한 번 보라. 그들의 얼굴에는 싸움과 병든 마음을 깊숙이 억누르고 있는 갈등의 표정들이 역력하다. 그래서 건강한 마음, 특히 성적으로 건강한 마음이 필요하다. 그런 다음에는 요가(남성적)와 탄트라(여성적) 중 그대의 기호에 따라 무엇이든지 선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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