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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사상과 철학 198 (교재 공개)
    패러다임/철학 2024. 12. 20. 0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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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생각하기 이해하기 실천하기-

     

    사상과 철학 198

     

    영상 강의 링크 : https://youtu.be/AgSMtIQZZro

     

     

    602.

    탄트라 비전 첫 번째 차트 <#호흡, 우주에 이르는 다리>

    <수행법 둘> 2.숨을 들이쉴 때 아래(下丹田)에서 위(百會)로 반원을 그리며 회전한다. 그리고 내쉴 때 다시 위에서 아래로 반원을 그린다. 이 두 개의 회전점을 통해서 불생불멸의 그 자리를 깨달을지어다.

    이 방편은 강조하는 부분이 정지 간격이 아니라 두 호흡 사이의 회전점이다. 들어오는 숨과 나가는 숨은 하나의 원을 만든다. 기억하라. 호흡은 절대 평행으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실제로 그것은 원을 그린다. 들어오면서 반을 그리고 나가면서 나머지 반을 그린다. 첫째, 호흡은 원형으로 이동한다는 것을 이해하라. 두 개의 평행선은 결코 만날 수 없는 것이다. 둘째, 들어오는 숨과 나가는 숨은 둘이 아니라 하나이다. 하나의 호흡이 들어오고 나가면서 완전히 원을 그리는 것이다. 들어오는 숨은 내부의 어느 지점을 중심으로 반원으로 돌아서 나가는 숨이 된다. 또 나간 숨이 밖의 어느 지점에서 반원으로 회전하여 들어오는 숨이 된다. 그러면 왜 호흡은 회전하는가? 그것은 자동차 기어의 원리와 같다. 그대가 기어를 바꿀 때마다 중립기어를 통과하지 않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호흡 역시 중립기어가 있다. 그것이 바로 호흡의 회전점이다. 이 회전점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호흡이 바로 들어가고 나가고 할 수 없다. 이 중립지대에서는 그대가 육체도 아니고 영혼도 아니다. 물질적인 것도 아니고 정신적인 것도 아니다. 물질적인 것은 그대 존재의 기어이며 정신적인 것 역시 또 하나의 기어이다. 하지만 그대가 중립기어일 때 그대는 육체도 정신도 아니다. 단지 존재 그 자체이다. 그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대의 중립기어를 말이다. 관찰 속에는 언어가 개입되지 않는다. 언어는 개념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감정을 유발한다. 하지만 진정한 관찰은 언어적인 개념도 없고 감정의 어떤 움직임도 없는 상태 속에 홀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때 꽃은 그대와 하나가 된다. 그래서 꽃은 더 이상 대상이 아니다. 그대와 하나가 되어 있기에 거기에 홀로 남아 있다는 말이 가능한 것이다. 3분 동안만 마음의 어떤 움직임도 없이 완전하게 꽃과 함께 홀로 남아 있을 수 있다면 여기 차원의 변형이 온다. 지복의 순간이 온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는 관찰자가 될 수 없다. 우리의 의식이 각성되지 못했기에 우리는 어떤 것에 대해서도 주의를 기울일 수 없게 되었다. 우리는 그저 여기저기로 원숭이처럼 건너뛰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물려받은 유산이다. 우리의 마음은 원숭이처럼 작용한다. 원숭이는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한다. 여기저기로 뛰어다니고 있다. 그래서 붓다는 어떤 행위도 하지 말고 그저 앉아만 있으라고 말했다. 그때 원숭이 같은 마음은 더 이상 날뛸 수가 없다. 마음의 움직임이 없는 가운데 두 호흡 사이의 회전점을 관찰할 수 있다면 그대는 궁극 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육체와 마음을 넘어서서 그대 자신 속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왜 그토록 이 회전점이 중요한 것인가? 이 회전점은 육체와 마음으로부터 그대를 분리시켜 다른 차원에 이르게 하기 때문이다. 호흡은 그대와 함께 육체 차원으로 들어왔다가 그대와 함께 마음의 차원으로 나간다. 하지만 호흡의 두 회전점에서는 호흡이 그대와 함께하지 않는다. 회전점에 이르는 순간 그대는 호흡과 분리된다. 그 순간에는 호흡이 삶이라면 그대는 죽음이고, 호흡이 육체라면 그대는 비육체이며, 호흡이 마음이라면 그대는 무심이다. 호흡이 멈춰지면 마음의 작용도 따라서 멈춰진다. 호흡이 멈춤과 동시에 마음은 호흡에서 분리되기 때문이다. 호흡은 육체와 마음에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호흡의 정지는 그대 자신으로부터 몸과 마음의 분리를 뜻한다. 기어가 중립 상태에 있음을 뜻한다. 호흡이 회전점을 지날 때 그대는 호흡과 분리된다. 그 순간 그대는 자신이 누구라는 것을 깨닫기 쉽다. 이 존재가 무엇이며, 삶이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이 육체 속의 주인은 누구인가? 나는 단지 기계 장치일 뿐인가? 아니면 이 기계 장치를 통제하는 그 무엇인가? 호흡 사이에 있는 회전점에 지복이 깃들어 있다. 이 회전점을 깨달아라. 그리하여 그대의 영혼은 깊은 잠에서 깨어나리라.

     

    탄트라 비전 첫 번째 차트 <#호흡, 우주에 이르는 다리>

    <수행법 셋> 3.들이쉬고 내쉬는 그 찰나의 사이에 호흡은 에너지가 없으면서 또한 에너지로 가득 찬 그대의 중심에 닿는도다.

    우리는 중심과 주변으로 나뉘어져 있다. 육체는 주변이다. 우리는 육체를 안다. 우리는 주변을 안다. 그러나 중심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내쉬는 숨과 들이쉬는 숨이 한 점에서 만날 때, 그것을 들이쉬는 숨이나 나가는 숨이라고 지적할 수 없을 때, 거기에 침묵의 순간이 있다. 호흡이 나가지도 않고 들어오지도 않는 그 순간이 있는 것이다. 호흡이 나갈 때는 다이나믹하다. 들어올 때 역시 다이나믹하다. 그러나 들어오지도 않고 나가지도 않을 때 거기에 침묵이 흐른다. 그때 그대는 자신의 중심에 이를 수 있다. 들어오는 숨과 나가는 숨의 결합 지점이 그대의 중심이다. 그러면 들어오는 숨은 어디로 가는가? 그것은 그대의 중심으로 간다. 그리고 중심에 가 닿는다. 나가는 숨 역시 그대의 중심에서 나간다. 인간의 중심은 머리에 있지 않고 아랫배(丹田)에 있다. 호흡은 단전으로 내려가서 그대의 중심을 건드린 다음 다시 밖으로 나온다. 다시 말하지만 호흡은 그대의 중심과 몸을 잇는 다리다. 그대는 자신의 몸을 안다. 하지만 중심이 어디인지는 모르고 있다. 호흡은 본래 중심에까지 갔다가 밖으로 나가는 것이 정상이다. 그러나 우리는 충분한 호흡을 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까닭에 대부분의 경우 호흡은 중심에까지 이르지 못하고 있다. 사람들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방황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항상 뭔가 불안하며 허영심에 들떠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아이의 호흡을 관찰하라. 숨을 들이쉴 때 배가 나온다. 그리고 호흡이 나가면 배가 들어간다. 호흡하는데 가슴은 움직이지 않는다. 오직 배만 움직인다. 어린아이는 자신의 중심에 있다. 그들이 그토록 행복해하는 것은, 그들이 그토록 에너지로 가득차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들은 피곤해 하지 않는다. 그들은 언제나 생명력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에게는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다. 언제나 지금 그리고 여기에 살고 있다. 어린아이가 화를 낼 때는 100% 화를 낼 수 있다. 이때 아이의 분노는 아름답기까지 하다. 그래서 완전히 분노할 때 그 분노는 아름다움을 갖는다. 전체는 언제나 아름다운 것이다. 하지만 그대는 100% 분노할 수 없고 따라서 아름다울 수도 없다. 그대는 부분적이며 분열되어 있다. 그리고 그대는 추하다. 부분적인 것은 언제나 추하기 때문이다. 분노 뿐만 아니라 사랑조차 추할 것이다. 사랑 속에서도 그대는 사랑 자체가 되지 못하고 부분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대가 계산하는 한 결코 그대는 전체적으로 되지 못한다. 그대가 사랑을 할 때 거울을 통해 그대의 얼굴을 한번 보라. 헐떡거리는 추한 짐승이 거기에 있다. ? 무엇 때문에 사랑 속에조차 추한가? 그대의 사랑 역시 또 하나의 투쟁이기 때문이다. 서로 뭔가를 얻으려고만 할 뿐 그대 자신을 전체적으로 내맡기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린아이는 분노 속에서조차 전체가 된다. 그의 얼굴은 빛나고 아름답다. 그는 지금 여기에 존재한다. 그의 분노는 과거와 연관되어 있지 않다. 그는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계산하지 않는다. 단지 분노할 뿐이다. 그는 그의 중심에 있다. 따라서 그대가 그대의 중심에 있을 때 그대는 전체적으로 될 수 있다. 그대가 무슨 행동을 하건 그것은 전체적인 행동이 될 것이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거기에 분열이 없다. 이 중심에 이르는 순간 그대는 전체가 된다. 그러나 그대는 두려워 한다. 그대가 자신의 전체적인 상태를 두려워하는 만큼 그대는 깊게 호흡하지 못한다. 그대의 삶이 의미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삶이 흘러 넘칠 때 사랑 역시 흘러 넘칠 것이다. 그때 그대는 모든 차원으로 흐르며 어떤 것 하나에 매일 수가 없다. 이렇게 되면 마음은 위험을 느낀다. 따라서 그대는 활기차게 사는 것을 원치 않게 된다. 그리고 그대가 죽어있는 정도가 클수록 그대는 안전함을 느낀다. 그대의 생명 에너지가 적으면 적을수록 자신을 통제하기가 쉽다. 그리고 그대가 자신을 통제할 수 있을 때 그대는 자신을 영적 스승이라고 내세운다. 그대의 분노와 그대의 사랑과, 그대의 모든 감정을 그대가 통제할 수 있다고 느끼지만 그것은 그대가 최소의 에너지로 살아갈 때만이 가능하다. 모든 사람은 이따금씩 갑자기 자신의 에너지가 최소한의 상태에서 최대한의 상태로 바뀌는 것을 느낀다. 산을 오르거나 교외로 빠져나가거나 혹은 감옥에서 나올 때 특히 그렇다. 산봉우리 위에 올라갔을 때 저 끝없는 하늘이며 펼쳐진 푸른 숲과 손으로 잡을 것만 같은 구름을 마주 대할 때 우리는 심호흡을 하게 된다. 그대의 에너지가 최소한의 차원에서 최대한의 차원으로 바뀔 수 있는 것은 산에 올라갔기 때문이 아니라 심호흡을 했기 때문이다. 심호흡을 할 때 그대는 ,  소리를 내게 되는데 이때 호흡은 그대의 중심에 닿게 된다. 그리고 모든 것이 지복 속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지복은 산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그대의 중심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사실 복잡한 도시 속에서 그대는 두려웠다. 가는 곳마다 타인이 있기 때문에 그대는 자신을 억눌러야만 했다. 소리도 지를 수 없고 마음껏 춤도 출 수 없었다. 마음껏 목청을 돋구어 노래를 하거나 큰 소리로 웃을 수 조차 없었다. 두렵기 때문이다. 경찰과 성직자가 나타나 그대를 꾸짖을지 모른다. 온통 그대를 둘러싼 감시의 눈초리 때문에 그대는 잔뜩 웅크리고 있는 것이다. 길거리에서는 춤출 수 없지만 산 위에 올라가서는 마음대로 춤추고 노래할 수 있다. 하늘과 함께 그대는 혼자일 수 있다. 하늘은 그대를 구속하지 않는다. 하늘은 끝없이 열려있다. 무한하게 펼쳐져 있다.

     

    그대가 한 심호흡은 그대의 중심을 울리고 그와 동시에 지복으로 넘쳐난다. 그러나 이것은 잠시일 뿐 산꼭대기의 지복은 곧 사라지고 만다. 걱정은 어김없이 그대에게 다시 밀려오기 시작한다. 그대는 산에 오르자마자 내려갈 생각부터 먼저 한다. 그대는 다시 주변으로 되돌아왔다. 조금 전에 했던 심호흡은 그대가 의식적으로 한 것이 아니다. 단지 생리적으로 일어난 현상이다. 상황이 바뀌게 되면 기어가 바뀌기 때문이다. 만약 새로운 상황이 펼쳐진다면 그대는 이전에 하던 식으로 숨쉴 수 없다. 새로운 호흡이 들어오는 순간 그것은 그대의 중심에 가서 닿는다. 그리고 그대는 지복을 느낀다. 그대는 매순간마다 그대의 중심에 닿아야 한다. 그대의 호흡이 중심에 닿지 않는다면 그대 스스로 그 중심에 닿을 수 있어야 한다. 깊게 그리고 고요하게 호흡하라. 그대의 중심에 숨결이 가 닿도록 천천히 그리고 깊게 호흡하라. 문명, 교육, 도덕이 모든 것들이 그대로 하여금 가슴으로 호흡하게 만들었다. 아랫배로 호흡하라. 인간이 섹스에 대한 억압을 그만두지 않는 한 결코 진정한 호흡을 할 수 없다. 호흡이 아랫배 깊숙이 들어가면 호흡은  센터에 에너지를 준다. 그리고 성 센터를 자극시킨다. 이때 성 센터는 생기가 넘쳐나면서 활성화 된다. 그런데 문명, 사회, 성직자들은 금기 시킨다. 그러면 오직 위쪽, 머리쪽으로만 호흡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전혀 성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호흡이 깊게 내려 갈수록 그대는 중심을 향해 가게 되며 중심은 성 센터 부근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은 곧 삶이기에 그대의 중심은 성 센터와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호흡은 위쪽으로부터 아래쪽으로의 삶이며 성은 아래쪽으로부터 위쪽으로 흐르는 삶이다. 섹스 에너지도 흐르고 있고 호흡 에너지도 흐르고 있다. 단지 호흡 에너지는 상체에서 흐르고 있고 섹스 에너지는 하체 쪽에서 흐른다. 이 둘이 만나서 삶이 창조된다. 그러나 성을 두려워한다면 이 둘을 만나지 못하게 하라. 그래서 문명인은 거세된 인간이다. 우리가 호흡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사실 중심에는 에너지가 없다. 그대의 몸과 마음으로는 거기에 어떤 에너지도 공급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기에는 에너지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에너지로 가득 차 있다. 그것은 그대의 몸이나 마음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에너지의 우주적인 근원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실 육체 에너지는 연료 에너지의 일종이다. 그러나 그대의 중심에는 이런 연료용 에너지가 전혀 없다. 그래서 에너지가 없으면서라고 말한 것이다. 그것은 음식물 섭취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 그것은 우주적인 근원에 연결되어 있다. 그것은 바로 우주적인 에너지이다. 때문에 에너지가 없으면서 또한 에너지로 가득 찬 그대의 중심이라고 말한 것이다. 들어오는 숨과 나가는 숨이 만나는 그 순간, 바로 그 지점이 그대의 중심이다. 이것을 자각하는 순간 바로 거기에 깨달음이 존재한다.

     

    탄트라 비전 첫 번째 차트 <#호흡, 우주에 이르는 다리>

    <수행법 넷> 4.숨을 완전히 내쉰 뒤 멈춰지는 순간에, 또는 숨을 완전히 들이쉰 뒤 멈춰지는 순간에, 호흡의 이 우주적인 멈춤 속에서 에고는 사라진다. 그러나 이것은 마음이 순수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힘든 일이로다.

    위급할때에는 호흡이 중지된다. 사념도, 모든 것이 중지된다.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에고도, 명성도, 자존심도 순식간에 증발해 버린다. 그때 마음이 멈춘다. 마음이 멈출 때 호흡도 멈춘다. 그리고 호흡이 멈추면 마음도 멈춘다. 여기에 우주적인 멈춤이 있다. 그리고 그대는 중심에 이를 수 있다. 호흡이 움직여야 마음이 움직이고 마음(생각)이 빨리 움직일 때 호흡도 빨라진다. 그러나 마음의 상태가 순수할 때, 욕망도 바람도 동기도 없을 때 지금 여기에 머물 것이다. 마치 잔물결 하나 일지 않는 연꽃처럼, 바로 이때 호흡은 자동적으로 멈춘다. 그때 에고는 사라진다. 그대는 우주 전체와 하나가 된다. 우주가 그대 자신이 될 것이다. 사람들은 영적인 성취는 상당히 어려운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어렵지도 않고 또 그대가 새롭게 성취하는 것도 아니다. 그대가 누구인지 이미 그대는 영적인 것을 지니고 있으며 그대의 존재에 덧붙여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아무것도 그대의 존재에서 가려내야 할 것이 없다. 그대는 더 이상 손댈 곳이 없을 만큼 완벽하다. 미래의 언젠가에 완벽해진다는 말도 아니다. 그대 자신이 되기 위해서 어려운 일들을 통과해야 할 그 무엇이 있다는 것도 아니다. 어떤 다른 곳으로 갈 필요도 없다. 이미 그대는 거기에 있다. 성취해야 할 것은 이미 거기에 갖추어져 있다. 이 점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그때 그대는 왜 그토록 간단한 방편들이 그대를 도울 수 있는지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만약 영적인 것이 어떤 성취라면 그때는 일이 어렵게 될 것이다. 어려울 뿐만 아니라 불가능하다. 만약 그대가 영성을 갖추고 있지 않다면 그대는 절대 영적으로 될 수 없다. 영성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영적인 존재가 될 수 있겠는가? 만약 본래부터 그대에게 신성이 없다면 그때는 가능성이 없다. 다른 방법도 없다. 그대가 아무리 애를 쓰고 노력하더라도 헛수고이다. 신성이 없는 사람은 신성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대가 성취하고자 원하던 것이 바로 지금까지 존재했던 그대 자신이다. 그대는 이미 거기에 있다. 갈망의 끝이 이미 그대의 존재 속에 현존하고 있다. 지금 여기에, 이 순간에 신성으로 알려진 것이 바로 그대이다. 궁극적인 존재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토록 간단한 방편이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성취가 아니라 하나의 발견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주 아주 작은 것 속에 숨어 있는 것이다. 인격이라고 하는 것은 옷과 같다. 그대의 육체는 여기에 있으며 또한 옷 속에 숨겨져 있다. 같은 방식으로 그대의 영성도 여기에 있다. 그리고 그대의 어떤 옷 속에 숨어 있다. 이 옷이 바로 그대의 인격이라는 것이다. 그대는 지금 당장 여기에서 벌거벗을 수 있다. 그대의 영성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그대는 옷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어떻게 그 옷 속에 그대가 숨는지도 그대는 모른다. 따라서 어떻게 옷을 벗는지도 모른다. 그대는 오랜 세월을, 아니 수많은 생을 옷을 벗지 않고 살아왔다. 그리고는 그 옷이 자신이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그대 자신을 잃어버렸다. 이 옷들이 그대가 되었고 이것이 자신을 발견하는 데 유일한 장벽이 된다. 그대는 보물을 덮고 있는 약간의 흙(, 겉치레)만을 걷어내면 된다. 구걸한 것을 모아서 황제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느 시점에 가서 갑자기 간단한 방편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미래는 벌써 현재 속에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 모든 가능성이 여기 씨앗 속에 들어있다. 단지 문만 열리면 된다. 그대의 노력과 긴장과 기대심과 갈망이 모두가 장벽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노력없는 노력(無爲)으로 그것은 쉽게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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