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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사상과 철학 94 (교재 공개)
    패러다임/철학 2022. 10. 10. 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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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생각하기 이해하기 실천하기-

     

    사상과 철학 94

     

    영상 강의 링크 : https://youtu.be/n3ycr454Xl0

     

    - YouTube

     

    www.youtube.com

     

    498.

    어떠한 인간의 행동도 그와 반대되는 행동의 [절제].

    먹는다는 것은 단식의 절제

    간다는 것은 서 있다는 것의 절제

    노동은 나태의 절제

    나태는 노동의 절제

    관조의 눈(영안, 혜안)으로만 전능한 신(하느님, 부처님)이 보일 수 있고, 관조의 눈에 의해 위대한 내면세계가 찬란하게 전개된다.

    그래서 모든 경우에 당신이 하느님(부처님)을 보는 눈은 하느님(부처님)이 당신을 보는 눈과 동일한 눈이고, 그것이 바로 관조의 눈(육안, 심안이 아닌)이다.

    파도와 바람;파도는 일심(), 바람은 때, 욕심, 집착... 바람을 잠재우면 자동으로 마음이 진정된다. 근본인 파도는 스스로 움직이지 않는다. 바람이 불어야 움직일 뿐이다.

    생각이나 관념은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못한다. 방향을 모르는 사람이 방향에 의지해서 길을 잃고 헤매는 것과 같다. 만약 방향을 버리면 방향에 대한 무지도 없어진다.

    깨달음이 뭔지 모르면서 깨달음에 의지하기 때문에 어리석은 것이다. 만일 깨달음에 대한 생각을 버리면 깨닫지 못했다는 생각도 없어지게 된다. 바로 깨닫지 못했다는 망상심이 있기 때문에 그 망상심에 근거해서 온갖 명칭과 뜻을 붙여서 바른 깨달음이 무엇인지 설명한다.

    깨달음은 일체가 한몸이고 한마음인 상태이기 때문에 주객이 따로 없고 너와 내가 분리되지 않는다. 진실로 깨닫게 되면 깨달음의 주체와 깨달음의 대상이 사라지고 깨달음만 남게된다. 이것을 가르켜 행위는 있으되 행위자는 없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말로써 설명되고 관념과 개념, 신념으로 정의된 것들은 진짜 실체가 아니다.

    깨닫지 못함(무지)은 세 가지 특징을 만든다.

    1.행위가 생겨난다.(주객으로 분별하는 인식작용-);깨닫지 못함에 의지해서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업(-어리석은 행위)이라고 한다. 깨달음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는다.-無明業相

    2.인식의 주체가 생긴다.;마음이 움직이면 보는 작용(인식의 주체)이 생겨난다.-能見相

    3.인식의 대상이 생겨난다.;인식대상은 실상이 아니라 허상인 심상이다.-境界相

    환경과 조건의 차이를 본질적 차이로 이해하지 말라

    無明(파도 일으키는 바람, 無知)昂明

    심상은 생각과 관념으로 드러나는 허상이다.

    인식대상이 실제로 좋고 싫은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이 좋고 싫다고 분별하는 것이다. 그런데 마음은 마음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마음은 인식대상이 될 수 없다. 세간의 모든 인식대상은 다 중생의 무명과 어리석은 생각에 의해서 존재하는 것 뿐이다. 그러므로 심상은 거울 가운데 비추어진 형상과 같아서 실체가 없고 오직 마음이만들어낸 허상이다.

    자아가 영원하고 독립적이고 절대적 존재라는 그릇된 견해로 말미암아 그런 자아에 집착하고, 교만하고 어리석어서 깨달음을 방해한다.

    심상은(허상이지만) 인식론적 존재이며 즉 관념과 개념으로만 정의되고 설명되는 이미지이다. 표상은 실제로 객관으로 존재하는 사물들의 이미지다. 즉 실제 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아니라 실제 사물을 왜곡시킨 이미지다. 왜냐하면 실제로 존재하는 사물을 지각하는데 정서적, 인지적 심리상태가 영향을 미쳐서 어떤 주관적 이미지를 갖기 때문이다.

    감정(생각, 마음)이 변덕을 부리는 것은 마음 안에 담긴 생각과 감정이 변하는 것이지 마음 자체가 변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그때그때 마음에 담아둔 것들을 비워내지 않고 쌓아두면 숙변처럼 굳어져서 온갖 마음의 병과 고통을 일으킨다.

    중생은 우주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어서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다(상대성, 평등성)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무명, 무지, 오염, =‘라는 인식 주체가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생각 자체

    마음의 오염을 제거하는 것이 깨달음이지 마음 자체를 제거하는 것이아니다. 마음이 공이라는 것은 마음 안에 들어와도 밀어내거나 부딪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어떤 것이든 거부하지 않고 왜곡하지 않으며 있는 그대로 비추고 허공처럼 걸림이 없이 무한히 받아들이고 있는 그대로 수용한다는 뜻

    열반의 경지에서 드러나는 4 가지 지혜(大圓鏡智, 妙觀察智, 평등성지, 성소작지)

    나무에 있는 불이 붙는 성질은 내적인 원인이다. 그러나 만일 사람이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불을 붙이는 도구(외적인 조건-用熏習)를 마련하지 않았다면 나무가 저 혼자서 자기를 태울수는 없는 것이다.

    지혜(깨달음의 종자, 불성, 양심, 진여, 진리)의 차이가 아니라 무지의 차이다. 그러므로 깨달음의 문제는 지혜를 얼마나 성취했느냐가 아니라 무지를 얼마나 제거했느냐에 초점을 둘 필요가 있다.

    일시무시일-시작됨이 없는 시작, 시작을 알 수 없는 시작

    그릇된 관념이나 생각, 심상은 끝이 있어서 언젠가는 소멸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생각이 만들어낸 허상이기 때문이다. 만들어지고 생겨난 것은 때가되면 반드시 부서지고 소멸되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상은 소멸되지 않는다. 실상은 그릇된 관념이나 생각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실제이기 때문이다. 즉 그릇된 마음이 만들어 낸 허상이 소멸되면서 실상이 드러난다.

    진여 자체는 큰 지혜의 빛(=비로자나법신이 진여 자체다. 항상 지혜로 빛나고 관조하여 어둠이 없다. 本心 本太陽 昂明)으로 자성이 청정하다.

    진여=여래장=여래법신

    진여의 본질과 현상이 상호작용하면서 하나의 본질에서 일체의 현상이 드러나고 다시 일체 현상이 하나의 본질로 포섭되는 것을 말한다. 본질과 현상이 서로 모순되지 않고 모두가 깨달음을 위한 인연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이를 불법이라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진여의 본질을 여래장, 여래장을 드러내는 진여의 현상을 여래법신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진여의 본질이 공(如實空) 하다는 사실은 알고, 진여의 본질이 상황과 조건에 따라서 다양한 모습의 현상으로 드러날 때는 공하지 않다.(如實不空)

    맑고 깨끗한 진여의 본질과 그 본질이 현상으로 드러난 무량한 공덕의 실상은 바로 한 마음이다. 그릇된 생각으로 분별할만한 인식대상의 세계가 없이 온통 한마음으로 온 우주에 두루 채워진 것을 여래의 몸이라 하고 여래를 저장하고 있는 여래장이라고 한다.

    태양이 온 우주를 차별없이(인위적 노력, 의지없이=自然) 비추는데 산과 계곡과 나무와 땅들이 저마다 생김새가 달라서(중생의 의식수준에 따라) 빛을 더 받기도 덜 받기도 한다. 깨진 그릇 속에는 물이 담길 수 없기 때문에 실제로 달이 있어도 나타날 수 없다.(중생의 마음 정도에 따라)

    방향을 모르는 사람이 동쪽을 서쪽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서쪽이 동쪽으로 바뀌지 않는다. 마음이 관념이고 생각이 아니라 마음은 움직이는 것 아니고 생각이 없는 무념이다. 즉 진실된 마음은 무념이고 부동이다. 움직이는 것은 생각, 관념이다.

    모든 그릇된 집착(人我見;전체현상을 주재하는 자가 있다고 집착하는 것, 法我見;모든 현상에는 영원불변하는 독립된 실체가 있다고 집착하는 것)은 나의 생각과 견해로부터 말미암아 비롯된 것이다. 그러므로 를 버리면 그릇된 집착도 없어진다.

    열반이 실체를 가지고 있는 실상인 줄 알고 열반을 얻으려고 집착한다. 인간을 구성하고 있는 5 가지 요소(색수상행식)의 본질이 바로 진여고 열반이기 때문에 생겨나지도 않고 소멸되지도 않는다. (일시무시일, 일종무종일)

    세속과 열반은 둘 다 독립적이고 고유한 특징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실상이 아니다. 열반은 무지하고 오염된 마음의 세계인 속세의 상대적 개념으로서 지혜와 깨끗함을 설명하기 위해 붙여진 이름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모든 진리는 본래부터 물질적인 형태도 아니고 정신적인 개념도 아니다. 지혜도 아니고 앎도 아니다. 또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궁극적으로 진리의 본질이나 특징을 설명할 수가 없다.(일시무시일, 일종무종일=直指人心, 敎外別傳, 不立文字)

     

    풍경 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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