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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사상과 철학 241 (교재 공개)
    패러다임/철학 2025. 11. 9.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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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생각하기 이해하기 실천하기-

     

    사상과 철학 241

     

    영상 강의 링크 : https://youtu.be/vL5GDxRYQzk

     

     

    645.

    관측자가 실제로 아원자 입자의 본질을 결정한다. 입자들을 입자로서 관측하면 당연히 그것들은 입자로서 거기에 존재한다. 그러나 같은 입자를 파동으로서 관측하면 그것들은 파동으로서 존재한다. 이러한 사실이 갖는 의미는 물질을 고정된 또는 유한한 존재로서가 아니라 의식이라는 관점에서 규정해야 한다는 뜻이다. 고밀도의 전자들과 양이온들로 구성된 기체인 플라스마에서 전자들은 자기 조절적인 유기체의 성질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었다. (전자들이 마치 서로 연결된 하나의 전체인 것처럼 행동한다.) 마치 본질적인 지성이 있는 듯하다. 광대한 아원자의 현실, 곧 물질의 창조 또는 의식적이라고 할 수 있다. 궁극적인 현실을 인식할 수 있는 지성적 능력이 오로지 인간의 전유물이라는 생각을 무효화하는 것이다. 현실이란 어떠한 상식적인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물질적인 것이 아니다. 말로는 도저히 표현하지 못할 그 무엇이다. 물리학자들은 이를 비국소성이라 부르고 신비주의자들은 이를 일체라고 한다. 의식적인 본질과 상호연결된 전체에서는 모든 물질들과 사건들이 서로 상호 작용을 한다. 시간이나 공간, 거리는 상대적인 관점에 따른 하나의 환상에 불과하다. 사실상 우주의 모델은 홀로그램과 같은 것이다. 전체는 아주 작은 부분에 들어 있으며, 거기서 미묘하지만 강력한 의식 에너지가 홀로그램으로 투사되어 물질과 환경과 차원이 나타난다. 보다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시작이 없다는 사실이다. 다중우주는 내내 거기에 있었다. 마치 우주는 우리가 나타날 것을 알고 있었던 듯하다. 아원자급 양자는 의식이 있다. 이는 만물에, 심지어 살아있지 않은 물체와 텅 비어 보이는 공간에도 의식이 있다는 의미이다. 이를 굳이 규정하자면, 신비적인 또는 영적인 현실이다. 대부분의 물리학자들은 불과 1의 공간에도 물질적 우주 전체가 가지고 있는 에너지의 총합보다 더 많은 에너지가 담겨 있다는데 동의한다. 아원자 물리학에 따르면, 물질은 텅 빈 것처럼 보이는 공간과 결코 분리될 수 없다. 물질은 오히려 공간의 일부이며, 더 깊고 보이지 않는 질서의 한 부분이다. 이 질서로부터 보이지 않는 의식의 본질이 물질적 형태를 촉발했다가, 그리고 다시 보이지 않는 상태로 되돌아 간다. 따라서 공간은 비어 있는 것이 아니다. 만물의 존재의 근원이 되는 고도로 집약된 의식 에너지로 채워져 있다. 모든 물질적 창조는 상상할 수 없는 광대한 대양의 한가운데서 일어나는 잔물결과 같은 요동의 한 형태이다. 단편화된 접근법(부분들을 전체를 고려하지 않고 보는 것)이 우리를 궁극적인 파멸로 몰고 갈 것이다. 불가사의한 현상을 평가하는 것이 진정한 과학의 핵심이다. 어떠한 절대의 존재를 상정하는 것은, 설사 철학적인 의미로 쓰인다 해도, 학계에서 조롱거리가 될 것이다. 마음은 곧 하나의 작은 우주이며, 마음이 확장된 것이 우주이다. 의식이 고양된 상태에서 자신의 지각이 우주의 의식과 합일된다. 그땐 자아에 대한 감각은 더 이상 내 몸에 갇혀 있지 않고 주변의 원자들까지 수용했다. 보통 때는 정면만을 볼 수 있던 시각이 넓고 둥근 시야로 바뀌면서 모든 것을 감지할 수 있게 되었다. 모든 것이 빛의 바다로 녹아들었다. 빛이 합쳐지면서 물질적인 형상을 빚어내기도 했다.(비극소성)

    행복은 진리를 통해 온다. 만일 행복을 찾으려한다면 행복을 구할 수도 없고 진리도 얻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저절로 오는 것이기에 그것을 추구하기 위해 괴로워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언제나 부산물로 얻어진다. 하나의 그림자이다. 나무를 정성스레 돌보면 꽃은 피어난다. 꽃에 대한 생각조차 할 필요 없다. 그대는 행복을 맛본 적이 없다. 행복을 느낄 때, 그대는 행복을 찾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행복은 그대가 다른 어떤 것을 추구할 때 얻어지는 것이다. 행복이란 자신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에만 가능하다. 만일 그대가 행복을 추구한다면 추구하는 자는 결코 자신을 잊을 수 없다. 에고가 계속 남아 있다. 그대는 여전히 판단하는 자로 남아 있는 것이다. 행복을 느낄 때 그대는 그곳에 없다. 행복을 찾기 위해서는 진리를 발견해야만 한다는 것을 알고 진리를 추구하면 그것은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대의 마음은 여전히 행복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 초점은 잘못된 것이다.

    아름다움이 있는 곳이면 어느 곳이나 성이 있다. 삶 전체는 하나의 성적 현상이다. 무엇이든 거부하면 죄의식을 느낀다. 깊은 곳에 억압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신은 아무 형태도 없다고 말할 때 신의 영역에 들어가서 그곳에 아무 형태도 없음을 보았는가? 만일 신의 영역에 들어가 본 것이라면 신은 이미 형태를 갖고 있는 셈이 된다. 만일 들어가 본 적이 없다면 신이 형태를 갖고 있지 않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신의 영역 안으로 들어가 본 후에야 그대는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연히 신에게로 떨어진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말 자체가 모순이기 때문이다.

    탐욕이 없는 사람에게는 포기도 없다. 왜냐하면 그는 과장되게 행동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두려움이 없는 사람에게는 이른바 용감함도 필요 없다. 자기자신의 존재를 이해하는 사람은 이쪽 극단에도 저쪽 극단에도 서지 않는다. 그에게는 균형이 있다. 그의 삶은 조화 속에 있다.

    시간은 물리적 현상이 아니라 심리적인 현상이다. 시간은 그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시간을 창조하는 것은 마음의 기능이다. 욕망이 그 다리이다. 시간은 뒤로(이유) 미루기 위한 것이다. 시간이 더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이해가 필요하다. 욕망은 그 속성상 채워질 수 없는 것임을 자각하는 것이 필요하다. 욕망에 대한 생각은 욕망에 먹이를 주는 꼴이 된다. 욕망도 반복적이기 때문이다. 또한 욕망은 바닥이 없다. 미래를 떨쳐버리면 과거는 즉시 떨어져 나간다. 동시에 욕망의 다리도 없어진다.

    신은 어디에나 있다. 안과 밖 그대 안에 하나의 중심처럼 존재하고 그대 밖에 하나의 원주처럼 존재한다. 밖에 대해 환희 속에서 노래할 수 있고 안을 향해 환희 속에서 침묵할 수 있다. 그는 어디에나 존재한다. 회교는 명상은 존재하지 않고 기도만이 가능하다. 자이나교는 기도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고 명상만이 존재한다. 둘 다 극단으로 달려간 것이다.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그대의 삶은 소설의 찢어진 한 페이지 같아서 이해하지 못한다. 전체 줄거리를 알기만 하면 그 페이지는 이해될 수 있고, 그때 그것은 이치에 맞고 의미있는 것이 된다. 의미는 부분을 전체와 관련해서 이해하는 것이다. 의미는 전체에 대한 부분의 관계이다. 신 없이 인간은 결코 의미를 가질 수 없다. 왜냐하면 신은 전체이고 인간은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시의 한 행에 지나지 않는다.

    불평하지 마라. 그렇게 되면 관심과 동정과 자비와 사랑을 요구하는 것이 된다. 요구하지 마라. 고통도 팔지 마라. 그것은 고행 중 가장 좋은 고행이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명상하라. 그것을 밖으로 내놓지 말라. 안에 쌓아 두고 명상하라. 그러면 다리가 끊어질 것이다.

    너희가 죽기 전에, 먹히기 전에, 너희 안에서 음식이 아닌 것, 음식으로 길러지지 않는 것을 깨달아라. 사실 음식은 깨어 있음을 방해한다. 따라서 음식에 탐닉하는 사람은 명상할 수 없다.

    보이는 것의 경계에 머무르면서 반대 방향을 바라보라.(보이지 않는 것) 이것이 명상이다. 천천히 서두르라. 점차로 보이지 않는 세계가 명확해져서 다가올 것이다. 침묵이 그 고유의 음악 소리를 내기 시작할 것이다. 그것은 언제나 그곳에 있었다. 초조해하거나 조바심을 내지 말라. 무한한 인내가 필요하다. 무엇인가 일어나리라 기대하지 말라. 모든 기대는 죽음의 세계, 시간과 공간의 차원에 속한 것이다.

    춤추는 자가 멈추면 춤은 사라진다. 그리고 춤이 사라지면 그 사람은 더 이상 춤추는 자가 아니다. 우주는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다. 우주는 시간 속에서 창조되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우주는 매순간 창조된다. 우주는 신의 존재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창조는 곧 그의 움직임이고 그의 춤이다. 창조주와 피조물은 둘이 아니다. 하나이다.

    기계적인 면에서는 부분이 결코 전체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유기적인 관계에서는 부분이 전체이다. 즉 바다의 파도처럼 유기적 단위로 존재하는 것이다. 각각의 파도마다 그곳에 바다가 존재하고, 바다는 모든 파도를 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파도는 바다와 분리된 것이 아니다. 바다에서 파도를 떼어 가져갈 수 없다. 물은 가져올 수 있지만 그것은 파도가 아니다.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즉 신 역시 세계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창조가 창조주의 특성이라면 창조된 것이 없다면 어떻게 그를 창조자라고 볼 수 있겠는가? 세계는 그에 의존하고 그는 세계에 의존한다. 서로 상호 의존적이다. 그래서 둘을 분리하거나 나누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는 신이다라는 것은 나와 존재계는 둘이 아니라는 뜻이다. 신은 에너지이고 생명력이고 존재계 자체이다. 그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 들여라. 거부하는 것은 신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인가 더 성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룬다는 개념이 곧 그대의 불행을 만들어 낸다. 행위보다 존재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라. 더 개선할 여지는 없다. 그대가 이미 신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만일 다이아몬드가 더 좋은 돌이 되겠다는 생각은 모두 무의미한 것이다. 그것을 이해한다면 곧 노력을 중단하고 자신이 누구인가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면 문제는 풀릴 것이다.

    반대의 극단으로 이동한다고 해서 변하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그대로의 상 태일 뿐이다. 거짓 종교는 반대편 극단으로 이동하는 것을 도와준다. 진정한 종교는 두 개의 극단을 모두 태워 버리도록 도와준다.

    자유=하느님의 왕국=홀로 있음. 모든 종교는 가짜 젖꼭지와 같다. 그것들은 진정제이고 환각제이다. 필요한 존재가 되려는 욕구를 떨쳐 버리지 않는 한 혼자가 될 수 없다. 필요한 존재가 되고 싶은 욕구가 없어지면, 어디에 있든지, 시장 한복판에 있더라도, 시내 한 가운데 있더라도, 홀로일 수 있다. 그대의 의미는 존재 자체로부터 오는 것이다. 구도자는 자기 자신 만으로 충분한 사람이다. 그는 아무도 필요로 하지 않으며 어떤 식으로도 의존하지 않는다.

    지금 그대의 형상은 그것이 무엇이라도 과거에 그대가 원한 것이다. 다른 사람을 원망하지 말라. 그것은 그대가 갈구하던 것이다. 무엇이든 그대가 원하는 것은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니 무엇을 원하기 전에 한번 생각해 보라. 그런 속에는 고통을 받을 것이다. 완전한 자각을 원하라. 모든 욕망은 언젠가는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모든 욕망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그러니 욕망을 갖기 전에 생각해 보라. 그것은 언젠가는 이루어질 것이고, 그리고 나서 그대가 받을 고통을 기억하라. 홀로인 사람은 이 세상에서 어느것도 원치 않는다. 오직 자신의 존재만 선택한다. 그것은 우주 전체를 선택하는 것이다. 또한 신을 선택하는 것이다. 신을 선택하면 신도 그대를 선택한다. 그대는 선택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즉 근원과 하나가 된다. 하나의 원이 된다. 창조주는 다른 창조주를 갖고 있지 않다. 창조주란 스스로를 창조하는 힘을 의미한다.

     

    새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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