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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사상과 철학 238 (교재 공개)
    패러다임/철학 2025. 10. 21. 2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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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생각하기 이해하기 실천하기-

     

    사상과 철학 238

     

    영상 강의 링크 : https://youtu.be/vjb48J5KhvY

     

     

    642.

    탄트라 비전 서른여덟 번째 차트 <#존재가 되라> -3가지 수행법.

    존재는 그 자체로서 하나다. 그러나 존재로부터 분리되어 있다는 느낌이 모든 문제를 만들어 낸다. 이런 분별심은 바로 그대가 의식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다. 죽음이란 그대가 분리되어 있을 때만 가능하다. 그래서 분리란 거짓이며, 분리되어 있지 않음이 진실이다. 에고는 달걀의 껍질과 같다. 그것은 필요한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보호막이다. 씨앗의 껍질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보호라는 것이 지나칠 경우 위험할 수도 있다. 만약 껍질이 계속해서 씨앗을 보호하기만 하고 싹을 틔우지 않게 하면 그것은 이미 방해물이 된다. 껍질은 내부의 생명이 움터 나오도록 땅속으로 녹아 들어야 한다. 씨앗은 죽어야 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씨앗 속에서 태어난다. 에고는 그 바깥 부분의 껍질이다. 이 방편들은 그 씨앗의 껍질을 어떻게 하면 부술 수 있는가에 관한 것들이다.

     

    탄트라 비전 서른여덟 번째 차트 <#존재가 되라>

    <수행법 백여섯> 106.타인의 의식을 그대 자신의 의식으로 느껴라. 그래서 자아라는 국한된 관점에서 벗어나 하나의 존재가 되라.

    그대 자신이 의식적이라고 생각하기에 그대와 같은 존재는 의식적이어야만 한다고 추론한다. 우리는 타인을 의식이 아니라 하나의 물건으로 대하고 있다. 남편은 아내를 물건처럼 대한다. 그는 그녀를 소유한다. 아내 역시 마찬가지다. 만약 타인을 의식체로서 대한다면 우리는 소유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오직 사물만이 소유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인간은 자유를 의미한다. 인간은 소유되어질 수 없다. 만약 누군가를 소유하려 든다면 그를 죽이는 것이며 그 순간 그는 사물로 전락하게 된다. 타인은 취급되고 이용되며 착취되어야 할 물건에 불과한 것이 되어 버린다. 이것이 바로 현대에 와서 사랑이 더욱더 불가능해지는 이유다. 왜냐하면 사랑이란 타인을 하나의 의식체로서, 인격체로서, 자유로서, 당신과 같은 가치 있는 존재로서 대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사물은 그 자체로 아무런 가치가 없으며, 다만 그대가 그것들을 사용할 수 있을 때만 가치가 있다. 집과 차 등은 그대를 위해 존재한다. 그것은 실용주의다. 그러나 아내는 그대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남편 역시 그대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남편은 그 자신을 위해 존재하며 아내 또한 그녀 자신을 위해 존재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하나의 인간이 된다는 의미다. 만약 인간을 하나의 의식으로서 인정하며 사물로 격하시키지 않는다면 조금씩 그를 느낄 수 있다. 타인은 그대와 마찬가지로 소중한 당신이 되어야 한다. 오직 그때만이 이 방편은 적용될 수 있다. 먼저 타인이 의식적이라고 느껴라. 그때 그대가 갖고 있는 의식을 타인도 갖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실제로 타인은 사라지고 단지 그대와 그 사이에 의식만이 흐르게 된다. 그대와 타인은 한 의식의 흐름에서 양극이 된다. 이 방편은 모든 사람과 더불어 수련할 수 있다고 말한다. 당신에게 다가오는 사람이 누구든지간에 단지 그의 내부로 용해되어라. 그대와 그가 둘이 아니며 그 사이에 하나의 생명이 흐르고 있음을 느껴라. 따라서 처음에는 그대가 별로 두려워하지 않는 어떤 장소에서 시도해 보는 것이 좋다. 한 그루의 나무 옆에 앉아서 그 나무를 느껴 보라. 나무와 그대는 하나가 되었으며 거기에는 하나의 흐름만이 있다. 나무를 두려워하지 않게 될수록 명상은 더욱 쉽게 일어날 것이다. 흘러가는 강물 옆에 앉아서 그대와 강물이 하나가 되어 흘러간다고 느껴 보라. 하늘을 쳐다보고 누워서 하늘과 하나가 되었다고 느껴 보라. 처음에는 단지 상상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점차로 상상을 통해서 실체와 접촉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서 사람과 더불어 해보라. 처음에는 무척 어려울 것이다.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해왔던 습관 때문에 두려움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동안 사람들을 하나의 사물로 대해왔던 것이다. 타인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 누구도 자신이 사물이 되기를 원치 않는다. 도구로 이용되고 싶어하지 않는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타인을 그렇게 대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 때문에 거기에 깊은 공포가 생겨난다. 그래서 이 방편을 사람들 사이에서 시작하기란 무척 어렵다. 그러므로 먼저 강이나 언덕, 별들과 하늘, 나무들과 더불어 시작해보라. 한번 나무와 하나가 되었을 때 어떤 느낌이 일어나는지를 알고 나면-그때 얼마나 행복하고, 아무것도 잃는 것이 없으며 전 존재계를 얻게 된다-그때 사람에게 시도할 수 있다. 나무나 강에게서 행복을 느낀다면 사람과 더불어서는 얼마나 행복하겠는가? 처음에는 두려워하지 않는 어떤 것과 시작하라. 혹은 사랑하는 사람, 친구나 연인처럼 아무런 공포를 갖지 않고 가까워질 수 있는 사람과 시작하라. 그리고 자신을 그 속에서 잊어버려라. 거기에 깊은 만남이 일어난다. 두 에너지가 서로의 내면 속으로 녹아 들어간다. 이것이 하나의 개체와 가능하다면 그때는 전 우주와도 가능하다. 그것은 한 인간과 전 우주 사이에 일어나는 깊은 사랑의 교류인 것이다. 우리가 사랑에 빠질 때조차 자신에만 관심을 갖는다. 상대방을 사랑하는 것도 그가 그대에게 행복과 즐거움을 주기 때문이다. 상대방이 그대에게 중요해지는 이유는 상대방을 통해서 그대가 만족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 역시 상대방을 이용하는 것이다. 자기에게만 관심이 있다는 것은 상대방을 이용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종교적인 의식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관심을 잃어버릴 때만 들어올 수 있다. 존재계와 하나가 된다. 그때 그대는 누구도 이용하지 않고 이용당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존재의 가장 지고한 축제다. 자아라는 국한된 관점은 내던져 버려야 한다. 이것은 자각할 수 없을 정도로 그대 속에 깊이 뿌리 박혀 있다. 그래서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아내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남편 자신을 위한 것이며, 어머니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도 어머니 자신을 위한 것이다. 자아라는 국한된 관점은 너무나 익숙한 것이어서 무엇을 하든지 오직 자신만을 위해서 한다. 다시 말해서 그대는 언제나 에고를 만족시키려 한다. 그 에고는 그대와 우주 사이를 가로막는 장벽으로서 거짓된 중심이다. 자아라는 관점을 잃어버려라. 그러면 타인에게 관심을 갖고 타인이 될 수 있다면 존재의 다른 차원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때 사랑과 헌신과 자비라는 말이 색다르게 느껴질 것이다. 선교사들이 봉사활동을 하는 것은 남에게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관심이 있는 것이다. 그들의 이 봉사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다. 어떤 사람을 그대의 중심으로 만들려고 노력해 보라. 그때 그의 행복은 그대의 행복이 되고 그의 불행은 그대의 불행이 된다. 그에게 일어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대에게 흘러 들어 온다. 그가 중심이 된 것이다. 타인이 중심이 되고 그대가 주변이 되는 일이 한 번만이라도 일어난다면 존재의 다른 차원, 경험의 다른 영역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 순간에 깊은 축복을 느끼게 될 것이다. 타인의 관점이 자신의 관점으로 변하는 것만으로도 모든 불행에서 벗어날 것이다. 그 순간 그대에게는 어떤 지옥도 없다. 그대는 낙원으로 들어간다. 나무가 되라, 강물이 되라, 아내가, 남편이 되라, 어린아이가 되고 어머니가 되라, 친구가 되라, 그대와 관련된 사람이 누구든지 그가 되라. 이것은 삶의 모든 순간에서 수련되어질 수 있다. 하루에 한 시간씩만 해보라. 곁에 누가 있든지 그가 되라. 어떤 것에 대한 공감을 가져보라. 처음엔 자신이 바보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 동안일 뿐이다. 한번 공감의 세계 속에 들어가면 온 세상이 미친 것처럼 보인다. 사람들이 너무나 좁고 메마르게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들이 자아라는 관점으로 굳게 닫혀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삶이 자신들 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삶은 그대가 삶 속으로 들어갈 때만 이 그대 속으로 들어올 수 있다. 수많은 길을 통해서, 수많은 차원을 통해서 그대에게 들어올 것이다. 그 삶은 얼마나 풍부하고 다양한지 모른다.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적어도 하루에 한 시간씩만 하라. 이것이 바로 종교에서 사용하고 있는 기도라는 수단이다. 기도의 의미는 우주와의 합일에서 오는 삶의 풍부함 속에 있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기도들은 너무나 진부해져 버렸다. 그것은 우리가 어떻게 존재계와 대화할 수 있는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나무와 대화할 수 없다면 어떻게 전 존재계와 대화할 수 있겠는가? 나무와 대화하는 것을 바보짓으로 느낀다면 신과 대화하는 것은 더욱 어리석은 행위로 느낄 것이다. 하루에 한 시간씩 기도하는 마음이 되라. 어떤 말도 입 밖에 꺼내지 마라. 느낌으로 기도하라. 머리로 하지 마라. 나무를 만지고 껴안아라. 나무에게 키스하라. 눈을 감고 나무가 마치 연인인 것처럼 느껴라. 깊은 이해 속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자아의 관점을 버린다는 것이 무엇인지, 타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다.

     

    탄트라 비전 서른여덟 번째 차트 <#존재가 되라>

    <수행법 백일곱> 107.이 의식은 각각의 존재로서 존재한다. 그리고 다른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자각하라.

    깊이 들어가면 물질은 없고 에너지만 있다. 그러나 신비주의자들은 여기에 한 가지 사실을 더 알고 있었다. 에너지 속으로 깊이 들어가면 에너지는 사라지고 오직 의식만이 거기에 남아 있음을 알았다. 첫 번째 층은 물질이고, 그 물질을 관통해서 들어가면 두 번째 층인 에너지 층이 나오고, 더 깊이 들어가면 마지막 세 번째 층인 의식이 나온다. 그 의식이 바로 신이다. 가장 깊고 내밀한 핵심인 것이다. 육체는 첫 번째 층이다. 그 속에는 생명의 흐름이 있다. 프라나, 즉 생명 에너지의 흐름이 거기에 있다. 그것이 살아 있는 것은 어떤 것이 그 속으로 흘러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 흘러가는 어떤 것이 바로 두 번째 층인 에너지다. 거기서 더 깊이 들어가면 의식을 자각할 수 있다. 거기서 육체와 생명 에너지의 흐름을 모두 지켜볼 수 있다. 그 지켜보는 것이 바로 그대의 의식인 것이다. 모든 존재계는 이 세 가지 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눈을 감고 그대가 무엇인지를 찾기 시작한다면 궁극에는 그대가 의식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대가 느끼는 모든 것은 그대와 관련된 것이며 그대에게 속한 것이지 그대 자신은 아니기 때문이다. 육체도 그대 자신은 아니다. 그래서 육체는 지켜볼 수 있다. 육체가 분리되어 있음을 자각할 수 있다. 육체는 지식의 대상이며 그대는 그 주체가 된다. 그대의 육체를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조종할 수 있다. 육체를 활동적으로 만들 수도 있고 비활동적으로 만들 수도 있다. 그대는 육체와 분리된 어떤 것이다. 육체가 아닐 뿐만 아니라 그대는 마음도 아니다. 그대는 마음을 인식할 수 있다. 생각이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생각들을 사라지게도, 무념의 상태 속으로, 한 가지로 집중해서, 강물처럼 흘러가게도, 진공과 같은 상태로도, 생각에 뭔가를 할 수 있다. 그러나 거기에 그대는 여전히 남아 있다. 그 진공 상태를 지켜보는 그대가 말이다. 자신과 분리시킬 수 없는 유일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지켜보는 의식이다. 그것이 바로 그대 자신이다. 그것과 자신을 분리시킬 수 없다. 모든 것으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킬 수 있지만 지켜보는 의식으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킬 수 없다. 무엇을 하든지 그것을 지켜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의식이다. 그래서 더 이상 분리를 일으킬 수 없는 한 점에 이르지 않는 한 자신을 알 수 없다. 그래서 구도자들은 자신이 아닌 부분을 계속해서 제외시키는 방법들을 많이 갖고 있다. 먼저 육체를 제외시킨다. 그리고 마음을 제외시킨다. 순간순간 일어나는 생각들을 제외시킨다. 더 이상 제외시킬 수 없는 상황에 이를 때까지 그 행위를 계속한다. 존재계 속에서 무엇이 일어나든지 그것은 이 의식의 한 가지 현상에 불과하다. 그 외에 다른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생각이 아니라 느낌을 통해 알아야 한다. 모든 것은 의식이며 의식이 아닌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대의 감각이 살아나면 모든 것이 살아 있다. 모든 것이 의식적이다. 왜냐하면 삼라만상이 의식의 결정체이기 때문이다. 지적인 사람은 도약할 수 없다. 논쟁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실험하고 증명해야 한다. 그러나 가슴은 즉시 도약할 수 있다. 비상할 수 있다. 지적인 사람들에겐 과정이 필요하다. 그 과정을 완전히 거처야만이 겨우 결론에 이를 수 있다. 그러나 가슴은 먼저 도약한다. 그리고 나서 과정을 밟는다. 신비주의자들이 아무것도 증명할 수 없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그들은 결론만 갖고 있고 과정은 갖고 있지 않다. 그리고 일단 결론에 도달하면 그 과정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신학의 의미다. 신비주의자들은 결론에 도달하고 신학자들과 교 리 연구가들은 과정을 만든다. 예수는 결론에 도달했지만 아퀴나스 등의 신학자들은 과정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그러나 과정은 부차적인 일이다. 먼저 결론에 도달했을 때만이 증거들을 찾을 수 있다. 그 증거는 신비주의자들의 삶 속에 있다. 그들은 그것에 대해 논쟁하지 않는다. 그 자신이 바로 그 증거다. 그대가 들여다 볼 수 있다면 말이다. 볼 수 없다면 거기에는 어떤 증거도 없다. 종교는 넌센스일 뿐이다. 이 방편들을 이론으로 만들지 마라. 그것들은 이론이 아니다. 그것들은 체험 속으로, 결론 속으로 뛰어드는 하나의 도약대인 것이다.

     

    탄트라 비전 서른여덟 번째 차트 <#존재가 되라>

    <수행법 백여덟> 108.이 의식은 각각의 사람들을 인도하는 영이다. 이 영과 하나가 되라.

    첫번째로 그대는 그대 속에 인도자를 갖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너무 오랫 동안 사용하지 않았다. 내면의 인도자를 믿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큰 실수다. 그대는 항상 이성에 의존한다. 지성은 시간을 요구한다. 생각하고 계산하는 동안에 그 순간을 놓치고 만다. 삶은 그대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 순간에서 순간으로 내면의 인도자와 함께 움직여라. 생각하지 마라. 내면의 존재가 어떻게 하든지 그것이 일어나도록 허용하라. 거기에 마음이 끼어들게 하지 마라. 이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마음과 함께 하는 것에 너무나 숙달되어 있기 때문이다. 학교, 문명 전체가 머리를 쓰라고 가르치고 있다. 내면의 인도자와의 접촉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모든 사람은 내면의 인도자와 함께 태어나지만 그것은 거의 마비 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부활될 수 있다. 이 방편은 내면의 인도자의 부활을 위한 것이다. 머리로 생각하지 말고 그냥 움직여라. 그것은 어려울 것이다. 옛 습관 때문에 계속 생각을 일으키기 시작할 것이다. 그래서 깨어 있어야 한다. 마음에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자각할 수 있어야 한다. 혼란스러울 것이다. 그것이 내면의 인도자인지 아니면 마음의 표면에서 나오는 것인지 분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곧 그 느낌을, 차이점을 알게 될 것이다. 어떤 것이 내면에서부터 나올 때 그것은 단전에서부터 끓어오른다. 그것은 이성이나 머리나 논리나 증거도 없다. 오직 깊은 핵심에서 초월적인 곳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온기를 느낄 수 있다. 예를 들어 숲 속에서 길을 잃어버릴 경우 생각하지 말고 눈을 감고 그 자리에 앉아 명상하라. 그러나 하나의 습관처럼 그 순간에도 생각하려 한다. 생각은 이미 알고 있는 어떤 것에 관해서만 가능하다. 그 생각은 하나의 걱정일 뿐이다. 걱정을 하면 할수록 내면의 인도자는 더욱 깊이 숨는다. 걱정하지 마라. 나무 밑에 앉아라. 그리고 생각이 저절로 떨어져 나가게 하라. 단지 기다려라. 생각으로 문제를 만들지 마라. 아무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 순간이 온다고 느낄 때 그때 일어나라. 그리고 움직이기 시작하라. 육체가 어디로 움직이든지 그대로 따라가라. 그대는 단지 하나의 구경꾼이 되라. 간섭하지 마라. 잃어버린 길은 쉽게 찾아질 것이다. 마음으로 간섭하지 마라. 마음이 탈진해 버릴 때 그것은 더 이상 작용할 수 없다. 그 순간 내면의 인도자가 힌트를 준다. 즉 열쇠를 준다. 위대한 발견은 지적인 것이 아니다. 직관적인 것이다. 그것은 바로 내면의 인도자가 존재한다는 뜻이다. 외부의 구루는 내면의 구루를 찾는데만 도움이 될 뿐이다. 그리고 이 내면의 구루가 그대를 진리로 인도할 것이다. 그것은 인간뿐만 아니라 동식물에게도 있다. 어떤 상황에서 당황할 때마다 생각하지 마라. 내면의 인도자가 인도하게끔 허용하라. 이런 내면의 인도자를 신뢰하는 것이 바로 믿음이다. 자신 속으로 깊이 들어가는 순간 그대는 바로 우주의 영혼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내면의 인도자는 신성의 한 부분이다. 그것을 따를 때 신성을 따르는 것이다. 지혜는 지적 능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부터 나온다.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서 나오는 것이다. 머리가 없는 상태가 되라. 그리고 존재를 따르라. 그것을 신뢰하라. 그것과 함께 움직여라. 서양에서는 군중들의 평균치를 정상이라고 부른다. 어떤 사람이 정신 이상에 걸리면 다시 군중의 평균으로 되돌려 놓는다. 그러면 만사 오케이다. 군중의 한 사람이 되면 더 이상 문제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서양의 심리학은 한 가지 밖에 할 수 없다. 초월이 아니라 재조정인 것이다. 또한 마음 자체가 병은 아니다. 그러나 동양의 심리학은 군중이 기준이 아니다. 붓다가 기준이 된다. 그대가 붓다처럼 되지 않는 한 그대는 병든 것이다. 또한 마음을 초월하는데 관심이 있다. 마음이 병들었다든가 건강하다든지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이미 마음 자체가 하나의 병적 현상이다. 마음은 절대로 건강해질 수 없다. 마음을 초월하지 않는 한 언제나 병든 상태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정상인도 건강하지는 않다. 건강한 사람은 오직 붓다뿐이다. 마음의 경계선을 넘어선 사람만이 진정으로 건강한 것이다. 인간은 신(의식, 영혼)과 동물 사이에 있다. 동물로 전락하든지 마음을 초월해서 의식을 깨닫든지 하라. 중간에 있으면 항상 긴장 속에 있게 된다.

     

    달과 버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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