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사상과 철학 239 (교재 공개)패러다임/철학 2025. 10. 27. 20:55반응형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생각하기 이해하기 실천하기-
사상과 철학 239
영상 강의 링크 : https://youtu.be/ZGGT8axNKYU
643.
탄트라 비전 서른아홉 번째 차트 <#텅 빔의 철학> -4가지 수행법
진리에 대한 욕망 없음의 상태만이 그 앎의 조건이 되는 것이다. 욕망이 없다면 성취할 목적도 없다. 욕망이 사라질 때 텅 빈 상태가 될 것이다. 수많은 욕망들이 한데 모여 바로 그대의 ‘나’가 된 것이다. 그대의 에고가 원자같은 욕망들의 집합일 뿐이다. 그것들 수백만개가 모여서 그대를 이루고 있다. 그것들을 하나씩 끄집어내면 더 이상 욕망이 없는 순간이 올 것이다. 그때 그대는 사라지고 없다. 단지 빈 공간만이 남는다. 붓다는 이것을 니르바나라고 불렀다. 그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붓다는 이것을 진정한 침묵이라고 불렀다.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한 침묵은 임할 수 없다. 침묵할 수 없는 것은 그대 자신 때문이다. 그대가 바로 병이기 때문에 축복의 상태에 이를 수 없다. 축복은 매순간 내려오지만 그대가 장벽이 된다. 그대가 사라지면 축복은 거기에 있을 것이다. 그대가 없을 때 평화가, 침묵이, 엑스터시가 거기에 있을 것이다. 내면이 완전히 텅 빈 상태가 될 때 그 텅 빔 자체가 바로 지복이다. 이 네가지 방편들은 이러한 존재의 상태를 얻기 위한 것이다. 그것을 존재 부재不在의 상태라고 부를 수 있다. 존재의 상태나 존재 부재의 상태나 말이 다를 뿐 차이는 없다. 그것은 무한한 공간일 뿐이다. 이 방편들은 궁극의 방편이다. 가장 섬세하고 가장 어렵고 가장 놀라운 방편이다. 이 네 가지 중 어느 한 가지를 수련할 수 있다면 얻을 수 없는 것을 얻게 될 것이다.
탄트라 비전 서른아홉 번째 차트 <#텅 빔의 철학>
<수행법 백아홉> 109.그대의 수동적인 형상이 살의 벽으로 둘러싸인 하나의 빈 방이라고 상상하라. 텅 빔이 일어난다.
이것은 가장 아름다운 방편 중의 하나다. 명상의 자세로 홀로 앉아 있어라. 등뼈를 곧바로 펴고 몸 전체를 이완시켜라. 마치 몸 전체가 등뼈에 매달려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눈을 감아라. 더욱더 이완되고 더욱더 고요해져라. 그리고 갑자기 몸이 살의 벽으로 둘러싸인 공간이라고 느껴라. 그 속에서는 아무것도 없다. 그 집은 비어 있다. 때때로 사념의 구름들이 거기를 지나가고 있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것들이 그대에게 속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그대는 없다. 그것들은 텅 빈 허공의 메아리라고만 생각하라. 그것들은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았다. 그것들은 뿌리가 없다. 그리고 실제로 이것은 하늘을 흘러가는 구름과 같은 경우다. 그것들은 어떤 뿌리도 갖고 있지 않고 하늘에 속한 것도 아니다. 단지 하늘을 배회하다가 사라져 간다. 하늘은 그것에 의해 물들지 않는다. 영향받지 않는다. 몸은 살의 벽일 뿐 그 안엔 아무것도 없다. 생각들은 여전히 흘러갈 것이다. 그것은 옛 습관 때문에 계속 흘러 들어온다. 그러나 그것들은 근거 없는 뜬구름이라고 생각하라. 그것들은 그대에게 속한 것이 아니며 다른 누구의 것도 아니다. 그것들의 주인은 없다. 그대는 텅 비어 있지만 옛 습관 때문에 그렇게 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마음은 어떤 생각이라도 붙잡고 싶어한다. 그것과 동일시 하고 싶어한다. 그것에 탐닉하고 집착하려 한다. 그러나 참아라. 시간이 지나면서 생각들은 점점 줄어들 것이다. 구름들은 사라지기 시작할 것이다. 그것들이 온다해도 커다란 틈새가 생겨날 것이다. 그 틈새로 맑은 하늘이 보일 것이다. 아무 생각도 없는 상태의 하늘이 말이다. 하나의 생각이 지나가고 다른 생각이 잠시 동안 오지 않을 것이다. 그 잠시 동안은 하나의 간격이 된다. 그 간격 속에서 처음으로 텅 빔이 무엇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그것에 대한 일별이 일찍이 상상해 본 적이 없는 지복을 가져다 줄 것이다. 그대는 거기에 없기 때문에 행복이라는 단어도 부적절하다. 그대가 없는데 어떻게 행복하겠는가? 깊은 침묵이 그대가 있던 자리에 대신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 상태를 방해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누군가가 항상 그대를 방해하고 있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사실은 자신 외에는 그 누구도 방해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대가 거기에 있기 때문에 어떤 것이 방해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그대가 거기에 없다면 방해라는 말조차 성립되지 않는다. 소음은 그저 왔다가 지나갈 것이다. 그 무엇도 건드리지 못하고 말이다. 거기엔 건드릴만한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그대가 거기에 있다면 그것은 그대를 건드릴 것이다. 그대에게 즉시 자극을 주고 상처를 입힐 것이다. 사람이 없는 숲 속에서 나무가 쓰러지면 어떤 소리도 나지 않는다. 소리에는 그대의 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대가 거기에 없다면 어떤 소리도 만들어질 수 없다.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소리는 만들어질 수 없다. 소리란 에너지에 대한 청각의 반응 현상이기 때문이다. 만약 아무도 이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태양은 떠오르겠지만 빛을 만들 수는 없다. 그것은 쓸모 없다. 빛은 허공 속으로 사라져 버릴 것이다. 그 빛에 반응해서 ‘이것이 빛이다’라고 말할 사람이 없다면 빛은 생겨나지 않는다. 빛은 에너지와 시각의 접촉에서 일어나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장미꽃 혼자만으로는 어떤 향기도 만들 수 없다. 그대의 코가 필요하다. 누군가 그 냄새를 맡고 그것이 장미꽃 냄새라고 말할 사람이 필요하다. 코가 없다면 장미꽃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거리의 소음이 방해가 되는 것도 그대 속에 에고가 있기 때문이다. 에고는 반응을 하고 시끄럽다고 말한다. 그것은 그대의 해석이다. 아름답다든지 멋있다든지 등등. 어떤 것이 그대를 통해서 지나가더라도 거기에 주의를 빼앗기지 마라. 그것에 동요되지 마라. 반응을 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 메아리조차 생겨나지 않도록 하라. 그리고 이 방편은 그대를 도울 수 있다. 수동적인 상태로 앉아 있어라.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로, 그대가 무엇인가를 할 때마다 행위자가 그 속으로 들어오기 때문이다. 실제로 거기엔 어떤 행위자도 없다. 단지 그대가 행위한다고 상상하기 때문이다. 걸어가고 있다고 할 때 걷는 주체는 아무도 없다. 과정만 있을 뿐이다. 웃을 때도 웃음의 행위만 있을 뿐 웃는 자는 없다. 웃고 있는 주체를 찾아보라. 결코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단지 웃음만 있다. 그 행위 배후에는 아무도 없다. 슬플 때도 슬퍼하는 누군가가 없다. 단지 슬픔만이 있다. 그것은 하나의 흐름이다. 단지 웃음만이, 행복만이, 불행만이 있다. 그 배후에는 어떤 주체도 없다. 단지 언어 때문에 그대는 항상 두 가지를 생각한다. 어떤 움직임이 있으면 반드시 그 움직임에 주어를 갖다 붙인다. 주어 없이는 동사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단지 움직임만이 홀로 존재하는 상태를 상상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주체를 본적이 있는가? 웃고 있는 주체를 보았는가? 그리고 거기에 죽음이 있다. 그러나 죽어가는 사람은 없다. 죽음이라는 현상만이 있다. 그러나 그대는 언제나 이중성이다. 말하는 행위만이 있을 뿐 말하는 주체는 없다. 그것은 하나의 흐름이다. 그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은 것이다. 명상하지 마라. 명상 속에 있어라. 명상을 한다면 거기에 행위자가 들어온다. 자신이 명상을 하고 있다고 계속 생각할 것이다. 명상은 하나의 행위가 된다. 그러나 명상 속에 있는 것은 전적으로 수동적이어야 함을 의미한다. 어떤 것도 하지 마라. 그 어떤 행위자가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그래서 때때로 행위 속에서 행위자를 잃어버릴 때 갑작스런 행복감이 치솟는 것을 느낀다. 그것은 그대가 하나 되었기 때문에 온다. 춤추는 자는 사라지고 춤만 남는 순간이 온 것이다. 갑작스런 지복감이, 은총이, 엑스터시가 일어난다. 오직 행위만이 남아 있고 행위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눕거나 잠자는 것이 수동적이지 않다. 능동적이다. 붓다의 좌법이 가장 깊은 수동성의 상태에 이를 수 있다. 그 이유는, 그때 육체는 마치 자물쇠로 잠겨진 것 같다. 전류는 육체 내부로만 흐르고 밖으로 누출되지 않는다. 육체가 에너지를 방출할 때 육체는 계속 에너지를 만들어 내야 한다. 그것은 능동적인 상태다. 그래서 가장 수동적인 상태는 어떤 에너지도 방출되지 않는 상태이어야 한다. 그 상태에서 육체는 최소한의 에너지만을 소비한다. 따라서 에너지는 충전된다. 그리고 에너지가 충전될 때 내부의 발전기는 일할 필요가 없다. 어떤 내적 활동도 필요 없는 것이다. 그 육체는 수동적으로 된다. 이 수동성 속에서 그대는 쉽게 텅 빌 수가 있다. 이 붓다의 좌법에서 등뼈는 곧게 세워진다. 그리고 등뼈가 곧으면 몸 전체가 곧아진다. 그러면 전체적으로 곧아진다. 그때 중력의 영향을 가장 적게 받게 된다. 육체가 편치 않다고 느낄 때 그것은 중력의 저항을 많이 받기 때문이다. 중력의 방향에 수직으로 앉게 되면 중력의 저항을 가장 적게 받는다. 그때는 중력이 등뼈에만 미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서서는 잠자기가 어렵다. 붓다의 좌법에서 에너지의 방출이 최소화되면 육체는 완전히 비활동적이고 수동적으로 된다. 그리고 외부로 열린 문이 닫힌다. 아무것도 나가지 못하고 들어오지도 못한다.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가 펼쳐진다. 눈은 감겨져 있고 손과 발은 잠겨져 있다. 에너지는 그 속에서 돌고 있다. 에너지가 내부의 회로를 돌 때마다 그것은 내적 리듬의 음악을 만들어 낸다. 그 음악을 들을수록 더 깊은 이완을 느낀다. 그대의 수동적인 형상이 텅 비었다고 상상하라. 텅 빈 방처럼 말이다. 살이 바로 그 벽이다. 그리고 계속 그 텅 빔 속으로 떨어져라. 어느 순간 모든 것이 사라졌다고 느낄 때가 올 것이다. 아무도 없다. 집은 텅텅 비어 있다. 그 집의 주인은 사라졌다. 증발해 버렸다. 그 틈 속에서, 그 간격 속에서 그대는 내면에도 존재하지 않게 된다. 오직 신성만이 존재한다. 그대가 사라질 때 신이 존재한다. 그대가 없을 때 축복이 거기에 있다. 그러므로 사라지려고 노력하라. 내면에서부터 사라져 가라.
탄트라 비전 서른아홉 번째 차트 <#텅 빔의 철학>
<수행법 백열> 110.은혜로운 이여, 유희遊戱하라. 우주는 텅 빈 껍질 거기에서 그대의 마음이 끝없이 장난치고 있다.
이 명상법은 유희의 차원이다. 그대가 비행위적일수록 그대는 허공에, 내면의 심연 속으로 떨어지기 쉽다. 그러나 하루 종일 텅 빈 상태로 가만히 앉아 있을 수는 없다. 뭔가를 해야한다. 활동은 필수적인 것이다. 삶은 활동을 의미한다. 몇 시간 동안은 비활동적으로 될 수 있다. 그러나 나머지 시간은 활동적이어야 한다. 명상은 삶의 방식이 되어야 한다. 23시간 동안 쌓여진 행위를 한 시간 안에 없애 버린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활동에 대해서도, 일에 대해서도 변화되어야 한다. 일은 일이 아니라 하나의 유희가, 게임이 되어야 한다. 심각해지면 안 된다. 어린아이들이 술래잡기를 하는 것과 같은 마음으로 무의미하게, 마치 아무것도 성취할 것이 없는 것처럼 임해야 한다. 그저 즐겁게 노는 것만 있을 뿐이다. 문제는 일을 놀이로 여기지 못할 때 생겨난다. 일 앞에서 심각해지면 어깨가 무거워지며 걱정과 야심이 우글거릴 것이다. 그것은 결과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모든 관심은 미래에 있다. 하지만 유희 속에는 결과가 없다. 노는 과정이 그대로 축복이며 기쁨이다. 그리고 그대는 걱정하지 않는다. 유희는 심각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결과보다는 과정을 중요시한다. 예를들어 축구 팀에서 그들의 전 관심이 승부에만 있다면 경기를 하지 말고 동전으로 결정하면 된다. 뭣하러 쓸데없이 땀을 뺄 것인가? 그러나 그것은 의미가 없다. 결과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 진행 과정이다. 그 게임이 승부가 나지 않는다고 해도 게임 자체로서 가치가 있고 즐거운 것이다. 삶 전체가 이 유희의 차원에 적용되어야 한다. 무엇을 하든지 행위 그 자체로 전체가 되어야 한다. 결론이나 목적은 필요치 않다. 신성의 손에 미래를 맡겨라. 행위의 결과는 신성의 손에 달려 있다. 그대는 그저 행위하라. 이 간단한 행위가 하나의 놀이인 것이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그대가 계산을 하고 결과에 집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과는 신성의 손에 달려 있다. 문제는 그 결과가 그대의 손에 달린 것이 아니어야 한다는 것이다. 결과를 붙잡고 있어서는 안 된다. 유희하라. 즐겨라. 심각해 하지마라. 결과나 이익, 미래나 시간 따위를 생각하지 마라. 마음은 연상작용에 의해 흘러간다. 심각함이야말로 마음과 그대 사이를 잊는 다리며 중계자다.
탄트라 비전 서른아홉 번째 차트 <#텅 빔의 철학>
<수행법 백열하나>111.사랑스런 그대여, 앎과 알지 못함에 대해서, 존재함과 존재하지 않음에 대해서 명상하라. 그때 그대가 처한 양쪽 모두를 떠날 수 있다.
삶의 긍정적인 측면을 명상하라. 그리고 나서 부정적인 측면을 명상하라. 그때 양쪽을 모두 떠난다. 그대는 그 어느 쪽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삶을 바라보라. 삶의 첫 순간부터(세포로서) 마지막까지(육체가 화장되고 장사 지내는 것까지) 두루 지켜보라. 그때 처음과 끝 양쪽을 모두 떠난다. 그대는 태어남도 아니고 죽음도 아니다. 그리고 내면을 바라보라. 거기에 그대가 있다. 결코 그대는 태어나지도 않았고 죽지도 않는다. 이것을 긍정이나 부정의 어떤 극에서도 할 수 있다. 사람들은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한 가지 유형은 지식으로 가득 차 있고 다른 한 가지는 무지로 가득 차 있다. ‘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지식 때문에 에고로 가득 차 있다. 지식과 자신을 동일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알지 못한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그들 역시 무지로 가득 차 있는 에고를 갖고 있다. 무지와 자신을 동일시 한다. 그 양쪽 모두를 떠나라. 앎과 알지 못함을 떠나라. 그대는 양쪽 모두 아니다. 긍정의 편과 부정의 편 모두를 떠나라. 그때 초월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사랑과 증오도 떠나라. 우정과 적의도, 모든 양극을 떠날 때 텅 비게 된다. 그대는 지금까지 한쪽편에 집착하고 다른 한쪽편을 멀리해 왔다. 무지를 멀리하고 지식에 집착하고, 고통을 멀리하고 쾌락에 집착하고, 적들을 멀리하고 친구에게 집착해 왔다. 그리고 소수의 사람들이지만 그 역으로 살아온 사람들이 있다. 친구를 멀리하고 적에게 집착하고, 사랑을 멀리하고 증오에 집착하고, 부를 멀리하고 가난에 집착하고, 지식이나 경전 따위를 멀리하고 무지에 집착해 왔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은 위대한 은둔자로 여겨져 왔다. 하지만 어느 한쪽에 집착하는 것은 똑같다. 그리고 그 집착이 문제다. 집착하지 않을 때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집착 때문에 그대는 가려져 있다. 집착하지 않음으로써 그대는 드러날 것이다. 그대는 노출되어 폭발될 것이다.
밤의 꽃 풍경








반응형'패러다임 > 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사상과 철학 241 (교재 공개) (1) 2025.11.09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사상과 철학 240 (교재 공개) (0) 2025.11.05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사상과 철학 238 (교재 공개) (0) 2025.10.21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사상과 철학 237 (교재 공개) (1) 2025.09.30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사상과 철학 236 (교재 공개) (0) 2025.09.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