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사상과 철학 193 (교재 공개)
    패러다임/철학 2024. 11. 13. 22:09
    반응형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생각하기 이해하기 실천하기-

     

    사상과 철학 193

     

    영상 강의 링크 : https://youtu.be/c-Fso4D0A5M

     

    597.

    시계 추가 중앙에 머물면 시계는 멈춘다. 마음이 그러하다. 만약 그대가 하나의 극단에서 다른 극단으로 움직인다면 마음이 계속되고 시간이 계속된다. 그대가 중앙(중도)에 멈추는 그 순간 시간이 사라지고 기계가 멈춘다. 마음이 사라지고 마음이 멈춘다. 그 순간, 갑자기 그대는 처음으로 그대가 누구인지 인식하게 된다. 그대의 존재를 오염시키는 것은 생각이다. 육체와 마음은 물질의 두 가지 면이다. 몸은 보이는 물질이고 마음은 보이지 않는 물질이다. 그리고 그대가 몸 마음을 둘 다 볼 때, 그대 즉, 관찰자가 세 번째이다. 그것이 세 번째의 시계이다. 관찰자, 주시자, 지켜보는 자

    ()은 부드럽고 겸손하며, 가장 낮은 곳을 찾는다. 그것은 가장 깊은 곳에 이르며 마지막으로 머물며 야망이 없다. 그것은 처음(최고)이 되고자 하는 어떤 야망도 가지고 있지 않다. 또한 물은 산야신이 되는 것을 의미하고 움직임을 의미한다. 그것이 움직이지 않을 때면 언제나 더럽고, 불순하며, 유독한 것이 된다. 그것은 죽게 된다. 삶은 움직임, 역동성, 흐름에 있다. 그 생애 전체가 하나의 흐름(, )이며 그 어떤 것도 정적이지 않다. 마음은 세상이 정적으로 머물기를 원한다. 사회가 체제 순응자, 정통파인 까닭(보수적, 인습적, 옛 패턴)은 마음 때문이다.

    God is nowhere. 어디에도 없는 땅(nowhere)은 지금-여기(now-here)이다.

    삶에서 가장 커다란 비참함은 자신을 어리석고, 가치없고, 무지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그 누구도 무지하게 태어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신에게서 왔기 때문이다. 신은 순수한 지성이다. 우리는 우리가 이 세상에 올 때 신에게서 약간의 풍미와 향기를 가져온다. 그러나 사회는 즉시 그대에게 달려들어 조작하고 가르치고 바꾸고 자르고 더하기 시작한다. 그러면 곧 그대는 모든 모양, 형태를 잃게 된다. 사회는 그대가 복종하는 순응자, 정통주의자가 되기를 원한다. 이것이 그대의 지성이 파괴되는 방법이다. 그대에게 강요되어져왔던 모든 것을 버려라. 비교하지 말라. 그대는 그대이고 다른 사람은 다른 사람이다. 어리석음이란 다른 사람을 따르는 것, 다른 사람을 모방하는 것, 다른 사람에게 복종하는 것, 그들의 눈을 통해서 보는 것, 그들의 지식을 그대의 지식으로 흡수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즉 앵무새가 되어 반복하는 것이다. 지성은 프로그램에 따르지 않는 삶이 발생하는 순간 순간에 반응하는 능력이다. 비지성적인 사람만이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다.

    깨달음은 매순간 일어난다. 들이쉬고 내뱉는 모든 호흡은 그대를 깨달음으로 데려다 준다. 왜냐하면 깨달음은 존재가 만들어진 바로 그 재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을 깨닫는 것이 문제이고 그것이 거기 있다는 것을 보는 것이 문제이다. 신이 있지만 볼 수가 있다는 것은 그대가 그것을 볼(붙잡을) 만큼 충분히 민감하지 않았고, 그대는 그것에 의해 채워질만큼 충분히 비어 있지 않았다. 그대는 그대 자신의 에고로 너무 가득차 있었다. 깨달음이란 자신을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 보는 능력이다. 우리는 에고가 없다. 에고는 단지 속임수이다. 우리는 그것을 만들어 내고 그것을 투사한다. 그것은 우리의 환영이고 우리의 꿈이다.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 자체로 그것은 거기 있지 않다. 깨달음은 찾는 것에 의해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찾는 것이 헛되다는 것이 판명될 때 그대에게 온다. 기억하라. 찾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대가 찾지 않는다면 그대는 찾는 것이 헛되다는 것을 결코 알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명상은 목욕과 같다. 그러나 그 신선함은 깨달음이 아니라 단지 길을 준비하는 것이다. 그대는 결코 깨달음에 도달하지 않는다. 깨달음이 그대에게 도달한다. 깨달음은 추구를 멈춘 사람에게만 가능하다. 그러나 누가 추구하는 것을 멈출 수 있는가? 충분히 깊이 찾아본 사람만이 가능하다. 이 역설을 기억하라.

    마음은 몸의 내부적 모습이다. 그것은 물질적인 현상이고 그것은 그대의 존재와 아무 상관 없다. 그것은 그대의 몸과 마찬가지로 물질이다. 그래서 만약 그대가 몸에 무언가를 한다면 그것은 자동으로 마음에도 일어난다. 더 이상 몸은 없다. 즉 전체 존재가 그대의 몸이다. 왜냐하면 그대는 더 이상 분리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대는 한정할 수 없다. 전체 존재는 그대의 몸이다. 즉 몸은 결코 있지 않다. 내부의 침묵에 도달하면 사람은 장소를 바꾸지 않지만 장소가 그 스스로를 바꾼다. 즉 평범한 실재가 비범한 아름다움으로 채워진다. 그대는 세상으로부터 도피하지 말라. 그대가 어디를 가든 그대는 다시 똑같은 세상을 만들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을 만드는 청사진(씨앗)이 그대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대는 상황만 바꾼다. 상황은 청사진에 의해 만들어 지고 청사진은 다시 그것을 만들 것이다. 그것은 씨앗과 같다. 그대는 나무를 없앴지만 씨앗은 가지고 다닌다. 그 씨앗이 땅에 다시 떨어지는 어디든지 나무로 되살아 날 것이다. 그 씨앗은 태워져야 한다. 그러면 그대가 있는 곳 어디서나 이 기적은 느껴질 것이다. 바로 이 세상은 낙원이 되고 열반이 되고 몸은 붓다의 몸이 된다.

    천국과 지옥은 그대 속에 있다. 그대가 그것들을 만든다. 그대는 장소나 시간을 바꿀 필요가 없다. 그대는 외부의 그 어떤 것도 바꿀 필요가 없다. 외부는 더할나위없이 완벽하다. 그대가 해야 할 단 한 가지는 보다 의식적이 되어야 하고, 더 깨어 있어야 하고 더 각성되어야 하고, 더 비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외부로 투영할 아무것도 없어야 한다. 그대는 안에 있는 모든 씨앗들을 태워야 하고 안에 있는 모든 청사진을 불태워야 한다. 그러면 그대는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던저 버리게 되고 그대는 비어있게 되고 저 너머로부터 그 무엇이 그대 속으로 들어온다. 그것이 변형의 순간이다. 이 변화와 함께 전체 존재는 완전히 달라진다. 즉 주위의 모든 사람과 사물들이 더 이상 같지 않다. 왜냐하면 그대가 더 이상 같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변형의 올바른 길이다. 결코 외부로부터 시작하지 말라. 내부로부터 시작하라. 그대가 가슴 속에 가지고 다니는 모든 것을 내던져 버려라. 비어 있게 되는 것 그래서 신이 그대 속에서 흐를 수 있도록, 그를 위해 공간을 만들어라. 공으로써 그대는 광대해진다. 신은 오랫동안 그대의 문가에서 문을 노크하며 기다려 왔다. 그러나 그대 안에는 너무나 많은 소음이 있어 귀 기울이지 않는다. 그대는 그대 자신의 어리석은 것들에 너무 열중해 있다. 어떻게 그대가 노크 소리를 들을 수 있겠는가? 가슴을 텅 비게 만드는 것. 그것으로써 문제는 해결된다. 내가 나의 신성함을 알게 된 순간 나는 모든 사람들의 신성함을 알게 되었다. 사실 그대가 나는 존재한다라고 말할 때 그대는 그대 자신을 존재와 분리시키고 있으며 이것은 잘못이고 거짓이다. 왜냐하면 그대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대는 존재로부터 분리되지 않았고 그대 자신을 존재로부터 떼어 놓을 수 없다. 단 한순간이라도 그대는 존재할 수 없다. 그대는 전체이다.

    명상해야 할 세 가지

    1.;이 전체적인 외부세계, 객관적인 세계는 완전히 비었다고 묵상하라. 그러면 탐욕스럽거나 야망을 품을 수 없다. 전 세계가 스크린이고 그림자만이 지나가고 있다.

    2.미혹;꿈이라고 생각하는 것만으로 그것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생각하지 말라. 세계는 여전히 있다. 이제 그것은 미혹이다. 이제 그것은 그것 안에 실체를 가지고 있지 않다. 즉 더 이상 실재적이지 않다. 그것은 단지 마음의 게임일 뿐이다. 그것은 꿈과 같다. 이제 그것은 가치가 없다.

    3.중심;세계가 더 이상 실재적이 아닐 때(객관적인 세계는 사라지고 그리고 주관적인 미혹이 된다.) 그때 새로운 경험이 그대 안에서 일어난다. 처음으로 그대는 실재적이 된다. 사물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세상을 살아라. 마치 그대가 공 속에서 움직이는 것처럼 계속 움직여라. 세상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서 그의 일을 계속하고, 매우 초연한 방식으로 계속 살아가라. 그러면 세 개의 묵상은 일치한다. 그러면 자기기억, 사마디, 식별이 뒤따른다. 그대가 만물이 비어 있음을 알 때 문제가 하나 있다. 그대는 이 정말 진짜인 무엇으로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것이 문제이다. 공이 신인 것처럼 공이 마치 삶의 실재인 것처럼 비어 있음에 대해 생각한다. 마치 아무것도 아님이 무엇인 것처럼 아무것도 아님에 대해 생각한다. 아무것도 아님은 단지 말이다. 자연 속에서 아님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의 언어일 뿐이다. 미혹이 최소한 미혹으로서 진짜라고 생각하기 시작하지 말라. 미혹 또한 비어있다. 중심도 비어있다. 세계()는 환영이고 미혹(마음)도 환영이고 중심(근원)도 환영이다. 만약 보여지는 것이 환영이라면 어떻게 보는 자가 실체일 수 있겠는가. 꿈과 춤이 환영이라면 꿈과 춤추는 자 역시 환영이다. 모든 것이 사라지게 하라. 단지 공, 아무것도 없음만이 거기 있게 하라. 그러면 그 아무것도 없음 속에 모든 것이 있고, 그 완전한 부재 속에 존재가 있다. 그런데 마음은 대단히 교활하기 때문에 그 존재에 대해 이야기 하면 그것은 그 존재에 대해 탐욕스러워지기 시작한다. 만약 그대가 신에 대해 이야기하면 마음은 어떻게 도달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기 시작한다. 붓다는 신에 대해 결코 이야기하지 않는다. 신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신이 다름 아닌 붓다라는 것을 누가 알겠는가? 그러나 그는 결코 이야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매우 분명한 이유 때문이다. 신에 대한 이야기는 신에 대한 욕망을 만들어 낼 수 있고, 그리고 만약 욕망이 거기 있으면 그대는 결코 신에게 도달할 수 없을 것이다. 모든 욕망은 사라져야 한다. 단지 무욕 상태 속에서만 신은 도착한다. 그대를 세계에서 꺼내기 위해 붓다는 세계가 비었다고 말한다. 이제 그 미혹은 진실이 된다. 그런 다음 그는 그 미혹 또한 비었다고 말한다. 이제 중심은 진짜가 되었다. 이제 그는 중심도 또한 비었다고 말한다. 모든 것은 흔적없이 사라졌다. 완전한 침묵, 그리고 그 완전한 침묵 속에 은총이 있고, 신이 있다.

     

    주왕산 단풍

     

     

     

     

    반응형

    댓글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