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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사상과 철학 270 (교재 공개)패러다임/철학 2026. 6. 14. 21:04반응형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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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과 철학 270
영상 강의 링크 : https://youtu.be/VDYRaDcaWnw
674.
되기의 도달점 자체가 되기의 과정에서 변환되고 탈영토화되어야 한다. 즉 차이의 개념이 접속과 종합임을 강조할 때, 그리하여 ‘와’라는 접속사를 강조하는 것이다. A와 B의 차이를 B에겐 없는 A만의 것으로 정의한다면, 그것은 합산이 아니라 A-B라는 감산減算이 되며, 서로의 차이를 강조한다는 것은 ‘너의 개성을 인정한다’ 그러니 나의 개성도 인정하라거나, 너의 차이를 인정하니 나의 차이도 인정하라는 식의 차이 개념으로 빠져들게 된다. 이런 차이의 정치학은 바로 그 차이들과 대비되는 공통성을 통해 서로를 묶는 분류학적 차이 개념으로, 종차 개념으로 빠져들게 된다. 그것이 우리 모두를 하나로 묶어주는 국가니 민족이니 하는 분류학적 전체로 이어지게 된다. 반면 감산 아닌 합산으로서, 새로운 무언가를 창조하고 생성하는 것으로서 차이란 A와 B가 접속하여 만들어지고 A와 B의 종합의 결과 만들어지는 것이며, 따라서 A+B라고 써야 할 그런 차이이다. 즉 A와 B의 만남에 의해, 접속에 의해, 종합에 의해 만들어지는 차이는 그 만남에서 달라지는 지점, 그리고 동시에 그 만남에서 이전의 것과 달라지는 지점을 표시한다. 이는 우리가 통념적으로 갖고 있는 감산으로서 차이와 분명하게 다른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서의 차이의 정치학은 B는 B와 다른 A의 고유성을 인정하고, A는 A와 다른 B의 고유성을 인정하는 인정과 보존의 정치학이 아니라, A가 B와 접속하거나 B-되기를 통해서 스스로를 이전과 다른 것으로 변환시키는 변이와 변환 혹은 변혁의 정치학이다. 차이 혹은 생성의 철학은 이처럼 변환과 변혁의 철학이고, 스스로 다른 것이 되는 되기의 정치학이며, 혁명의 철학이다. 이것은 초월적 척도에 의해 A와 B를 비교하여 누구에게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하는, 혹은 A에게는 있는 어떤 성질을 기준으로 그것이 B에게 있는가 없는가를 확인하는 그런 초월적 개념이 아니라, 타자와의 만남과 접속을 통해 A 스스로 만들어내는 A 자신과의 차이란 점에서 내재적 개념이며 내재적 차이라고 하겠다. 그런 점에서 일관성의 구도와 직결되는 개념이다. 그러나 어느 것이 다른 것보다 낫거나 못하다고 할 수 없다는 상대주의 인식론이 된다는 비난이 있을수도 있지만, 그것은 상관없다. 왜냐하면 차이의 개념은 내재적인 것이어서 비교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비교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즉 비교의 내재적 기준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진화론적 서열을 매기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든 새든 그것이 되기 내지 변환을 통해 더 좋아졌는가 더 나빠졌는가를 비교한다. 또한 강밀도를 가지고 비교할 수도 있는 것이다. 능력의 강밀도, 그것이 바로 차이 비교의 기준(내재적)이다. 이 경우 비교나 평가란 그가 하려고 하는 것을 얼마나 잘했는가 하는 것을 아는 것이다. 가령 피카소처럼 재현적인 그림에서 벗어나 새로운 그림을 그리려 했던 사람에 대해 ‘정확하게 그렸는가 여부’를 따져서 평가한다면, 그것은 결코 내재적인 평가가 될 수 없다. 그가 하려고 하지 않은 것을 기준으로 삼아 그가 평가하는 것이기에, 그것은 외재적 내지 초월적 평가가 되고 만다. 반면 그가 하고자 하는 것에 의해 그가 실제로 행한 것을 평가하는 것, 그게 바로 내재적 평가이다. 내재적 평가가 욕망이라는 하나의 속성, 하나의 평면/구도 위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이다. 이 경우 그 속성, 그 욕망 안에서 능력의 강밀도가 잘하고 못함을 가리는 기준이 된다. 전체로서, 스피노자 식으로 말해 실체로서 기관없는 신체는 그런 욕망/ 속성에 의해 구별되는 기관 없는 신체들의 집합 전체이다. 이런 의미에서 기관 없는 신체란 욕망-속성에 따라 달라지는 다양체들의 집합이고, 그것이 달라짐에 따라 달라지는 다양체이다. 각 개체는 무한한 다양체이고, 자연 전체는 완벽하게 개체화되는 다양체들의 다양체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강밀도가 결국은 상이한 문턱을 넘나들면서 상이한 양태들, 상이한 속성들을 하나의 연속체로 만든다. 되기가 사람과 늑대, 새와 소리처럼 상이한 ‘종’이나 상이한 ‘속성’ 사이에서 그 각각을 구별해주는 문턱을 넘나들면서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그 모두가 바로 하나의 강밀도의 연속체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식으로 모든 문턱을 넘나들 수 있는 능력의 극한을 기관 없는 신체 내지 일관성의 구도라고 한다. 일관성의 구도란 어떤 문턱도 넘나들 수 있는 절대적 탈영토화의 지대이다. 그리고 그것은 되고자 하는 어떤 것이 될 수 있는 것이란 점에서 모든 것으로 재영토화될 수 있는, 하지만 그런 만큼 어느 하나로 재영토화되지 않은 순수잠재성이라고 할 수 있다. 되기란 운동과 멈춤, 빠름과 느림, 속도와 강도 등의 변환을 만드는 것이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의 ‘양태’는 자신의 능력을 상승 내지 하강시킬 수 있으며, 나아가 다른 양태가 되기도 한다. 일관성의 구도란 절대 속도, 절대 강도로서, 모든 되기를 향해 열린 절대적 극한이다. 이런 의미에서 되기란 이 일관성의 구도 상에서 일반화될 수 있다. 즉 되기란 운동과 멈춤, 빠름과 느림의 상이한 관계를 만들고, 강밀도의 상이한 분포를 만드는 변용이고 작용/행동이다. 변용되며 촉발하는 관계 속에서 특정의 감응의 형성이 바로 되기란 것이다. 사실 이런 의미에서 어떤 양태나 개체에 정해진 본성이란 없다. 본성에 반하는 분점/참여를 통해 얼마든지 다른 것이 될 수 있다면, 다른 것이 되려하는 ‘나’나, 내가 되려하는 ‘다른 어떤 것’이나 정해진 본성, 불변적인 본성이 없다. 이는 일관성의 구도에는 어떤 고정된 본성이 없으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어떤 것도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空이 自性이 없다는 것이란 점에서, 일관성의 구도와 일맥상통한다. 일관성의 구도를 내재적 비교와 평가, 판단의 기준으로 삼는다는 것은 우선 하고자 하는 것을 바라는 만큼 잘할 수 있는 능력을 기준으로 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그렇게 하고자 하는 것이 얼마나 창조적인 생성능력을 갖는가. 얼마나 다양한 변이능력을 갖는가를 기준으로 삼는 것이다. 전자가 하나의 속성 안에서 강밀도를 비교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강밀도의 연속체로 탈영토화할 수 있는 능력을 비교하는 것이고, 그 순수 강밀도의 지대를 통해서 욕망 자체의 탈영토화 능력을, 욕망 자체의 생성능력을 비교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평가자도 자기보다 높은 것은 제대로 평가할 수 없으며, 자기가 파악할 수 있는 한에서만 평가가 가능하다. 모든 것을 제대로 파악하고 평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가장 높은 경지에 오른 이만이, 득도한 이만이 할 수 있다. 일관성의 구도에 근접한다는 것, 혹은 좀더 높은 탈영토화 능력을 갖는다는 것은 좀더 자유로울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주어진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하고, 되고자 하는 것을 잘 할 수 있는 능력을 뜻하며, 하고자 하는 것을 관성이나 타성에서 벗어나 새로운 방향으로 바꿀 수 있는 능력을 뜻한다. 그것이 없다면 우리는 주어진 상태에 언제까지 머물러야 하고, 이미 존재하는 힘 내지 권력의 관성이나 타성에 따라 살아야 하며, 그러한 관성이나 타성을 유지하는 기능을 하게 된다. 더불어 그러한 자유의 능력, 탈영토화의 능력은 자신의 신체를 탈영토화할 수 있는 능력을 뜻하기도 한다.
신체에 대해서 ‘나’라는 관념을 통해 접근하면 우리는 신체에 대해 더욱더 모르게 된다. 차라리 내 몸이란 생각없이 그저 신체가 어떤 조건에서 어떻게 반응하고 작용하는지를 유심히 관찰하는 것이 그것에 대해 더 잘 아는 지름길이다. 신체를 파악하기 위한 두 가지 축은 욕망의 배치(다른 어떤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 어떤 기계로 기능-활동, 작용-하는가 이며, 신체의 질, 속성을 규정하는 욕망, 의지, 그 신체의 외연-연장, 확장-을 의미한다=경도)와 탈영토화의 정도(신체가 감당할 수 있는 수용능력, 이 능력들이 갖는 감응, 신체의 능력이란 신체의 강밀도고, 최대강도며, 또한 그 신체의 변환능력, 내지 탈영토화 능력이다. 능력을 규정하는 내포적, 내공적, 신체가 갖는 힘, 강밀도, 위도)이다. 충만한 신체로서 기관 없는 신체란 혹은 일관성의 구도란 강밀도의 연속체로서 경도와 위도라는 두 가지 축에 따라 정의되는 신체의 극한을 말한다.
특개성이란 지속성을 갖는 특정한 성질들의 집합을 의미하는 통상적인 개별성과 달리, 어떤 개체의 고유한 것이지만 시간과 공간은 물론 이웃관계의 조건, 배치와 강밀도 등에 따라 그때마다 달라지는 것을 뜻하며, 그렇기 때문에 정의될 수 없고 그때마다 직관으로 포착할 수밖에 없는 어떤 감응이다. 이는 다른 것과의 비교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어떤 특개성도 다른 어떤 특개성과 비교할 수 없으며, 이런 점에서 종차적인 개체성과 다르다. 종차적인 개체성은 분류학이 잘 보여주듯이, 어떤 개체가 갖고 있는 성질을 비교하여 다른 개체와 공통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분류하게 하는 그런 성질이다. 반면 특개성이란 이런저런 질료, 이런저런 형상들, 그리고 이런저런 성질이나 특성들이 하나의 특정한 조건에서 섞이면서 지금 한 개체를 특별하게 만드는 개체화 원리인데, 사람이나 주체, 사물이 갖고 있는 성질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는 개체화 원리이다. 사람이나 주체, 사물이나 실체의 개체화 양식과는 매우 다른 개체화 양식이 있다. 이를 특개성이라고 부른다. 어떤 계절, 어떤 겨울, 어떤 여름, 어떤 시간, 어떤 날짜 등은 사물이나 주체의 개체성과 분명히 다르지만, 나름대로 완전한, 아무것도 결여하지 않은 개체성을 갖고 있다. 이 모든 것은, 변용하고 변용되는 힘, 분자들 내지 입자들 사이의 운동과 정지의 관계라는 점에서 특개성들이다. 그렇지만 이는 단순히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 어떤 개체가 갖는 일회적인 감응만은 아니다. 이러한 특개성은 하나의 요인으로 환원될 수 없지만 대개는 특정한 감응을 만드는 어떤 두드러진 요인에 의해 표현되고 포착된다. 결국 특개성이란 특정한 순간의 이 개체를 특별하게 만드는 감응이며, 그런 감응을 구성하는 요소들의 강도와 속도, 그리고 그것을 특정하게 만드는 이웃관계를 통해서 구성된다. 신체를 위도와 경도를 통해서 포착한다는 것은, 지금 이 신체를 통과하는 힘과 욕망의 흐름, 그것의 속도와 강도, 그로인해 만들어지는 감응, 그리고 그 신체를 둘러싼 다른 것들과의 관계를 통해 그 신체의 특개성을 포착하는 것이다. 신체를 그것이 갖고 있는 형태나 성질이 아니라, 그것을 통과하면서 그때마다 그것을 다르게 규정하는 성분을 통해 위도와 경도를 따라 포착한다는 것은 이처럼 전혀 다른 개체화 양식에 따라 그것의 특개성을 포착한다. 그런데 그것은 그 신체를 둘러싸고 있는 요소들의 배치에 따라 포착하는 것이란 점에서 배치의 특개성을 포착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개체화된 집합으로서의 배치 전체가 특개성이다. 형식과 주체들과는 무관하게 위도와 경도, 속도와 감응에 의해 정의되는 것이 바로 배치다. 형식과 주체는 다른 평면에 속한다. 여기서 개체화는 개인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영역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채석강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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