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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사상과 철학 272 (교재 공개)패러다임/철학 2026. 6. 28. 21:51반응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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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과 철학 272
영상 강의 링크 : https://youtu.be/zy0kXKEANNI
676.
생명체는 물질로 소급되는 외적환경을 갖고, 때로는 구성하는 요소와 구성되는 실체로 소급되는 내적환경을 가지며, 막과 경계로 소급되는 매개적 환경(새로운 코드화)을 갖고, 에너지 원천과 지각행동으로 소급되는 부속환경을 갖는다. 이동하는 물체의 카오스적 흐름에 반복적인 대응을 통해 하나의 리듬과 규칙을 만들어내는 신호등처럼 리듬이란 카오스에 대한 환경의 대응이다. 내부와 외부 코드와 환경이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환경 자체에 코드들이 섞이거나 변이되고, 그 변이체에 의해 새로운 환경이 만들어지는 교호交互와 횡단이 항상 존재한다. 아마도 이것이 환경과의 관계에서 개체들에 변이들이 발생하고, 그 변이가 확장되고 확대되면서 진화라고 불리는 과정이 진행되는 이유이다. 환경이 기능과 결부되어 있다면, 영토는 표현과 결부되어 있다. 환경을 형성하는 리듬은 기능적이고 영토는 환경과 리듬을 영토화한 산물이다. 영토가 충분히 정의되는 것은 스타일을 통해서이다. 그렇다면 스타일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질료는 어떻게 표현적 질을 얻게 되는가? 일단 그것이 포스터와 플래카드를 통과한다는 건 분명하지만, 그것에 머문다면 예술도 표현도 아닌 것이 되고 만다. 말 그대로 표지판에 머무르게 된다. 그런 점에서 나름의 스타일도 없으면서 서명만 멋있게 하는 사람은 가진 것도 없으면서 자신의 땅이라고 표시해대는 사람과 다를바 없다. 혹은 이른바 이발소 그림을 그려 놓고 한 구석에 자기 이름을 써놓는 화가와 다를바 없다. 이발소 그림을 살 때, 서명을 보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이처럼 자기 스타일을 갖지 못한다면 거기에 있는 어떤 서명도 별다른 쓸모가 없다. 그림값을 올리는 역할도 못하고, ‘누구의 예술세계’를 찾아보려는 사람에게 별다른 호소력을 갖지도 못한다. 서명은 스타일을 수반해야 하고, 고유한 스타일이 없는 한 서명은 무가치하다. 문제는 더 이상 서명이 아니라 스타일이다. 음악가인 새와 비-음악가인 새를 객관적으로 구별해주는 것은 바로, 포스터와는 다른 무엇을 만들며, 스타일을 만들어내는 모티프와 대위-점들에 대한 이같은 능력이다.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리듬을 분절하고 선율을 조화시키기(선율에 화성을 붙이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인해 어떤 새가 다른 새보다 더 노래를 잘한다고 하거나, 어떤 것이 다른 것에 비해 더 낫다고 하는 이야기도 가능해진다. 표현적으로 얼마나 훌륭한 스타일을 만들어냈고, 어떠한 표현적인 일관성을 만들어냈는지를 평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고유한 표현 내적 조직과 구성 양상에 관한 것을 ‘표현의 자율성’이라고 한다. 선율적인 풍경도 무한히 변화하는 리듬적인 인물이 될 수 있다. 리토르넬로라고 부르는 모든 표현질료의 집합은 하나의 영토를 그리며, 표현적 질의 두 요소인 영토적 모티프(리듬적인 얼굴 내지, 인물을 형성)와 영토적 대위법(선율적인 풍경을 형성)을 통해 전개된다. 예술은 인간에게 고유하지 않고, 예술이란 노동의 기능에서 독립되어 표현적인 특질을 갖게되는 것, 나름의 영토를 만드는 표현적인 스타일에 의해서 가능해지는 것이고, 거기서 시작하는 것이다. 반대로 제의는 이런 표현적 영토화에 의해 시작되고 존속될 수 있다. 영토와 배치는 다르다. 하나의 영토적 배치는 끊임없이 다른 배치로 이행한다(영토가 개방되었을 때), 하나의 영토는 언제나 탈영토화의 도중에 있으며, 최소한 잠재적으로나마 다른 배치로의 이행의 도중에 있다. 일관성이란(예술) 영토적 배치의 성분 전체를 하나로 묶는 방식에 관한 것이다. 하나의 배치를 이루는 것들은 대단히 이질적인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모든 영토화하는 표시들, 그 영토적 모티프, 동일한 내부 배치 안에서 영토화된 이 기능들을 하나로 묶는 것, 즉 이질적 요소들을 하나로(하나의 배치가 되게) 묶는 것(상대적 탈영토화, 재영토화 되는 한에서만 탈영토화되는 것)이 일관성이다. 이 이질적인 요소들은 무엇보다도 우선 모호 집합(퍼지 집합), 이산적 집합, 일관성을 지니게 될 집합을 구성할 뿐이다. 예를 들어 바이올린과 포도는 이질적인 대상이다. 그런데 피카소는 이 이질적인 것을 적절히 분해하고 재결합해, 거기에 또다른 이질적인 요소들을 섞어, 하나의 그림으로 묶어낸다. 그래서 전체가 어떤 일관성을 가진 하나의 그림을 이루게 된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 바이올린도 원래의 모습을 상실하고(탈영토화), 포도 또한 원래의 색깔과 형태로부터 탈영토화되어야 했다. 어쨌든 이토록 이질적인 것을 하나로 묶어주는 것을 일관성이라고 한다. 만약 이렇게 재구성한 바이올린과 포도가 하나의 일관성을 획득하는 데 실패했다면, 그것은 좋은 그림이라고 할 수 없다. 이처럼 일관성이란 이질적인 어떤 것들을 하나의 배치 안에서 적절한 기능이나 위상을 갖도록 하는 것이며, 그럼으로써 배치를 구성하는 요소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것이다. 이것은 배치의 구성요소들은 이전의 배치에서 탈영토화하여 어떤 배치 안으로 재영토화하는 능력을 뜻한다. 그런 점에서 요소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일종의 통일성이라고도 하겠는데, 굳이 일관성이라고 하는 것은 각 요소가 갖는 이질성을 제거하지 않는 것이란 점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소나타든 교향곡이든 일부분만 들어도 ‘이건 누구의 작품이군’하는 판단은 일종의 일관성과 결부된 것이다. 즉 여러종류의 작품들임에도 불구하고 피카소나 베토벤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묶어주는 것은 일관성과 관련된 그 사람의 스타일이다. 지금까지 말한 것이 영토성 내지 재영토성이란 면에서의 일관성이라면, 다시말해 재영토화되는 한에서만 탈영토화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면, 반대로 탈영토화 자체와 결부된 일관성이 있다. 이는 유사한 배치들을 다른 방향에서 탐색하는 방식으로 포착될 수 있다. 가령 새소리는 영토의 배치에서 구애의 배치로 이행될 수 있다. 여기서처럼 각각의 배치들은 이질적이지만 언제나 다른 배치로 이행하는 도중에 있다고 할 수 있고, 그런 이행의 성분을 항상-이미 포함하고 있으며, 그 성분은 항상-이미 작동하고 있다. 즉 모든 배치는 탈영토화의 도중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질적이고 상이한 배치들이 서로 이행하고 교대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바로 두 번째 의미에서의 일관성이다. 즉 상이한 배치들이 이행 및 교대의 성분과 더불어 존속하는 방식에 관한 것이다. 다른식으로 말하면 상이한 배치들을 이행이라는 것을 통해 하나로 이어주는 것, 이행을 통해서 상이한 배치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것이기도 하다. 전자가 어떤 요소를 하나의 배치로 묶어주는 것이라면, 후자는 여러 배치를 이행 가능성이라는 잠재성의 차원에서 하나로 묶어주는 것이란 점에서 다르다. 이처럼 극한에서 정의되는, 모든 배치를 이행 가능성이라는 차원에서 하나로 묶어주는 일관성은 사실 어떠한 영토성에도 고정되지 않는 상태에 있어야 하므로 잠재성의 차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일관성은 어떤 하나의 배치로 영토화하는 성분이 없는 절대적인 탈영토화(기관 없는 신체, 일관성의 구도탈영토화된 거대한 리토르넬로로서 우주)의 선을 그리고 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모든 배치를 이행 가능성이라는 차원에서 하나로 묶어주는 일관성은, 묶이는 것들을 형식적으로 포섭하는 것과도 무관하고, 그것을 하나의 층위로 ‘고르게’하는 것과도 상관이 없으며, 차라리 그와 반대로 이질적인 것을 이질적인 그대로 둔 채, 혹은 어떤 형식적 통일성도 부여하지 않은 채 하나로 묶는 것이란 점이다. 배치를 이루는 요소들이 그 배치의 일부가 되기 위해서 탈영토화되는 것을 통해, 나아가 어떤 배치도 될 수 있는 절대적 탈영토화에 이르는 것(절대적 탈영토화, 탈영토화 자체와 결부된 일관성) 일관성은 이질적인 것에서 공통성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둔 채 탈형식화되는 양상을 하나로 연결하여 포착하는 것이다. 이것은 통일성을 만들지만 그 각각이 갖는 이질성을 그 통일성으로 환원시키거나 귀속시키지 않는다. 이질성을 갖고 있으면서도 일관성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갖고 있는 기능이나 성격, 위치 등이 탈영토화되어야 한다. 각각의 이질성이 그대로 잔존하기 때문에 하나의 배치 안에서조차 다른 배치로 이행하게 하는 변환자로 쉽게 전환하게 된다. 바로 이러한 변환적 성분으로 인해 복수의 배치들이 하나로 묶일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일관성은 각각의 이질적 요소들이 스스로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자신이 이전에 속했던 어떤 배치에서도 탈영토화될 수 있을 때 비로소 형성된다. 일관성은 모델이나 동형성이 아니라 탈영토성에 의해서 정의되는 그런 종류의 통일성이다. 새로운 배치 안에서 재영토화되어 나름의 일관성을 형성해야 한다는 것을 내포한다. 이질적인 배치들에 대해서, 혹은 어떤 작품에 대해서 어떤 것이 더 훌륭한지 말할 수 있다. 여기서 기준은 평가자가 갖고 있는 어떤 초월적이고 외적인 척도가 아니라 다양성을 산출하는 이질성이 내적인 일관성, 탈영토성을 획득하는 정도라는 점에서 작품에 내재적인 것이다. 즉 작품의 가치평가는 ‘어떤 작품이 더 좋고 더 나쁘다고 말 할 수 없다’는 식의 소박한 상대주의와는 거리가 멀고 능력의 정도는 일관성 내지 탈영토성이란 관점에서 평가해야 한다. 이질적 요소들을 결합하여 콜라주하는 경우 콜라주된 각각의 부분들이 살아남아서 제 성질을 그대로 발휘하고 있다면, 그건 그야말로 오려붙이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남의 것을 많이 따다 썼는데도 만들어진 전체가 원래의 요소들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표현적인 능력을 갖게될 때, 우리는 비로소 그것이 나름의 표현적 자율성을 획득했다고 말하고, 그것이 하나의 새로운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대부분의 텍스트를 남의 것으로 채우고 있어도, 거기에 몇 마디 안되는 문구들을 갖다 붙임으로써 고유한 표현적 자율성을, 혹은 일관성을 획득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새로운 저자의 작품이 된다. 그러나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따온 각각의 부분들이 충분히 탈영토화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결국 문제는 베꼈는가, 인용했는가, 패러디처럼 비판적 거리가 있는가? 등이 아니라 그 어느 경우든 수합收合한 쪼가리들이 모여 일관성을 형성할 정도로 충분히 탈영토화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또 일관성을 응고(유착)라는 개념으로 설명할 수도 있다. 이질적인 것이 합쳐져서 강한 것이 됨을 뜻한다. 혈액의 응고나 콘크리트의 응고처럼 이질적인 요소들이 서로 섞여서 하나의 신체로 응고되는 것이다. 이러한 응고는 세 가지 요소를 포함한다. 첫째 선형적으로 계속되는 ‘시작’이 있을 뿐만 아니라 밀집화, 강밀화, 보강, 주입, 첨가 또한 있다. 둘째 그 반대는 아니지만, 응고시키기 위해서는 종종 구멍을 만들어야 한다는 점에서 간격의 이동, 불균등의 분배가 있다. 셋째 박자나 운율을 부과하지 않으면서 행해지는 이산적인 리듬의 중첩, 간-리듬성 내부에서의 분절이 있다. 이는 이질적인 것이 하나로 합쳐져서 하나로 존속하게 하는 일관성/견고성과 유사한 의미를 갖는다. 일관성이란 정확하게 응고(유착)고, 유착된 것을 낳는 행위며, 공존만큼이나 계속이다. 이는 세 가지 요인을 갖는다. 삽입체(윤달), 간격 및 중첩-분절이 그것이다. 가령 응고/유착의 개념을 잘 보여주는 철근 콘크리트라는 질료는 기둥(나무)-들보(가지)-볼트(나뭇잎)로 이어지는 수목형의 모델을 벗어나 새로운 배치로서 건물을 만들 가능성을 제공해 준다. 그래서 영토적 배치는 환경의 유착/응고물이요. 시간-공간의 유착/응고물이며, 공존과 계속의 응고물이다. 그리고 리토르넬로는 이 세 가지 요인과 더불어 작동한다.
항구풍경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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