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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사상과 철학 267 (교재 공개)
    패러다임/철학 2026. 5. 25.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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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생각하기 이해하기 실천하기-

     

    사상과 철학 267

     

    영상 강의 링크 : https://youtu.be/eoMoU4Tohi8

     

     

    671.

    책은 배치며, 외부와 접속하여 작동한다. 이런 점에서 책은 엄밀한 의미에서 기계다.(책의 실천의 문제, 이용의 문제) 배치란 접속되는 항들에 따라 그 성질과 차원수가 달라지는 다양체이다.-리좀적 다양성-프랙탈 기하학

    종류가 늘거나 추가되어 다양성이 증가하는 것은 전체에 아무런 변화가 없다. 이것이 수목형 다양성, 사이비 다양성이다. 반면 리좀적 다양성은 하나의 원리로 환원되지 않는 이질적인 것의 집합이고, 따라서 하나가 추가되는 것이 전체의 의미를 크게 다르게 만드는 그런 다양성이다. 다양체는 외부(외부의 선, 외부를 향해 새로이 분기하는 선, 탈주선, 탈영토화의 선)에 의해 정의된다. 리좀의 특징은 비의미적인(비기표적인) 단절의 원리를 특징으로 갖는다. 단절은 의미화의 계열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다. 즉 영화의 몽따주처럼 전혀 이질적인 것이 만나 전혀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이다. 즉 전혀 다른 뜻을 갖는 것으로 변용되어 다른 계열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이것을 탈영토화, 탈주라고 한다. 즉 서로 간에 아무런 관련이 없는 두 존재의 비평행적 진화라고 말 할 수 있다. 리좀은 정연하게 분화되고 갈라지는 나무의 가지처럼 수형도의 선을 따라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선들을 넘나들고 횡단하여 접속하는 것이고, 수목을 흔들고 교란시키고, 이질적인 것 안에서 직접적으로 작동하여, 비약하는 비평행적 진화나 비기표적인 단절이다. 평행선은 결코 헤어지지 않는다. 어떠한 동형성도 갖지 않고 상응하는 것이 리좀을 형성하는 것이다. 또한 리좀은 모상이 아니라 지도이다. 지도는 길의 형상과 지표면의 형상뿐만 아니라 사유의 경로나 힘의 분포, 기의 경로로 표시한 인체의 그림도 지도다. 그래서 길을 재현해야 한다는 관념에서 자유로울 필요가 있다. 실질적인 행동의 다이어그램으로서의 지도에서 중요한 것은 행동과 삶의 길/방법이 접속되고 분기하는 양상이고, 그 경로들의 위상학적 관계며, 그 경로를 가는 데서 만나게 될 장애물이다. 위험물의 적절한 표시일 것이다. 그럼으로써 생산적이고 긍정적인 삶의 지도를, 행동과 실천의 지도를 만들도록 촉발하고자 하는 것이고,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탈주선들을 그리는 법을 알려주는 것이다.(미시정치학, 분열분석, 리좀학, 화용론) 리좀은 나무 혹은 뿌리와 대비(다양성의 존중과 획일화에 반대)되는 개념이다. 통일화-독재자-수목적인 체계는 위계적인 체계로(리좀과 반대) 하나의 중심(一者 일자, 나무의 중심, 뿌리의 중심)으로 귀착한다. 그 잔가지나 곁뿌리들은 중심과의 관계에서 의미화되고, 그 중심을 통해서 주체화된다. 그것은 오직 상위 이웃을 가질 뿐이다.(우정의 정리, 독재자의 정리) 그 중심은 그 나무의 모든 가지의 중심이다. 즉 모든 사람들은 오직 하나의 인물, 오직 하나의 군주, 오직 하나의 통치자가 중심이 된다. 여기서 잔가지는 아무리 다양하고, 미세하게, 화려하게 뻗어나가고 펼쳐진다고 해도, 그 모든 잔가지는(국민) 하나의 상위 이웃으로만 연결되고, 그를 통해 오직 하나의 중심으로 귀결되고 만다. 이 경우 다양성은 잔가지의 수를 지칭하는 것일 뿐 모두 그 중심으로 환원된다는 점에서 사이비 다양성에 불과하다. 이런 점에서 나무와 뿌리는 우월한 통일성에서, 중심이나 선분에서 출발해 끊임없이 다양한 것을 흉내내는 사유의 슬픈 이미지를 상기시킨다. 이처럼 복수성을 흉내내는 것을 의미화와 주체화, 조직된 기억 등과 같은 중심적 자동장치를 통해 각각의 개체들을 하나의 중심으로, 중심화된 위계체계 안으로 끌어들인다. 따라서 위계화된 관계를 벗어나기 위해선, 중심으로 귀결된 저 엉터리 다양성을 벗어나기 위해선, 수목형 체계에서 오직 하나의 중심인 일자를 제거하기 위해선, 하나의 공통된 중심을 제거해야 한다. 중심의 제거, 이것이 수목적 체계와 대비되는 리좀적 체계를 정의하는 명제이다. 이런 점에서 리좀이란 비-체계가 아니라, 비중심화된 체계요. 각각의 부분들이 중심으로 귀속되는 상위의 이웃을 통하지 않고 직접 이웃과 만나고 접속하는 체계고, 그 자체로 유의미한 다양한 집결지를 가질 수 있는 체계며, 그런 만큼 여러방향으로 열린 체계고, 접속되는 항들이 늘거나 줄어듦에 따라 성질이 달라지는 가변적 체계라고 할 수 있다. 수목적 체계는 장군이 모든 병사들에 대해 초월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초월성이라는 사유체계와 결부되어 있다. 이데아, 신, 근거, 원리 등 어떻게 부르든 이 일자는 모든 현상, 모든 사실들에 대해 최초의 원인이면서 그것들 모두에 군림하는 초월적 일자이다. 이런 점에서 초월성은 유럽에 고유한 질병이다. 모든 것을 근거나 원인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는 사유, 그리하여 그것을 첫 번째 원인이나 원리로 삼아 모든 것을 설명하는 사유가 그것이다. 이런 사유는 그 첫째 원리를 모든 것을 설명하는 보편적인 것으로 만든다. 보편적인 제1원리를 찾아내고 그것을 통해 모든 것을 설명하는 이런 식의 사유를 통상 형이상학이라고 한다. 이런 근거 자리에 어떤 존재자가 들어설 때, 그걸 신이라고 부르든, 제1원인이라고 부르든, 혹은 이데아나 부동의 동자라고 부르든 그것은 본질적으로 초월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일종의 기독교적 의미의 신이다. 혹은 이는 모든 것을 가시적인 것으로 바꾸려 하고, 그 가시적인 것의 형식 내지 형상을 통해 그것의 이상적 본질에 도달하려고 하는 그리스적 태도에서 연원하는 것일 수도 있다. 진리를 형식으로 정의하고, 미조차 비례하는 가시적 형식을 통해 정의했던 서구의 전통적인 태도, 그리고 그 밑에 깔려있는 기하학적 사유방식이 이런 태도와 나란히 가는 또 다른 징표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런 태도가 바로 서구에 고유한 초월성이란 질병과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는 것이다. 반면 연기적緣起的인 관계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진다는 생각이나, 어떤 것이 무엇과 관계하는가에 따라 본질이 달라지고 관계의 질(가령 상극과 상생)이 달라진다는 생각은, 오직 상호간의 내재적인 관계에 의해 모든 것을 포착한다는 점에서 내재적인 사유라고 한다. 종종 道라고 불리는 하나의 원리, 궁극의 원리가 있다고 하지만, 道란 형식화될 수 없고 명명될 수 없는 것이란 점에서, 도나 최초의 원리란 無 내지 空이며, 어떤 것도 정해진 自性을 갖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미 원리라는 말이 무의미하다. 이런 의미에서 초월성을 서구의 고유한 질병이라고 한다면, 내재성은 동양에 고유한 사고방식을 특징짓는다고 할 수 있다. 기초, 뿌리, 근거, 정초 등의 관념으로 집약되는 수목적 사유, 수목적 모델이 서구의 사유에서 지배적이 되었고, 동양이란 유목적인 세계를 뜻한다. 성에 있어서도 서양은 성이, 오직 자손의 생산과 결부해서 성을 허용하는 기독교적 전통의 종자식물과 재생산의 모델에 종속된 것이었다면, 동양은 일종의 삶의 기술로 다루었다. 그러나 리좀 역시 수목적인 가지들이 뻗어나갈 마디들을 갖고 있으며, 그것을 통해 수목적인 체계로 변형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고, 반대로 수목적인 체계 또한 뻗어나간 가지들 사이에 몇 개의 선을 새로 긋는 것만으로도 하나의 중심으로 결집되는 양상을 전혀 다른 것으로 바꾸어놓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나무-뿌리와 리좀-운하라는 두 모델의 대립이 아니라 끊임없이 세워지고 부서지는 모델에 관한 것이며, 끊임없이 연장되고 파괴되며 다시 세워지는 과정이다. 모든 것이 연기적인 조건에 따라 다른 것으로 바뀔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리좀도 나무도 어떤 자성을 갖지 않는다. 리좀은 출발 내지 기원이나 종말 내지 목적에 결부된 사유가 아니라 중간 내지 중도의 사유이다. 리좀은 출발점이나 끝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중간에 있으며, 사물들 사이에 있는 간間존재요 간주곡이다. 중간은 결코 평균이 아니라, 반대로 사물들이 속도를 취할 수 있는 표면이다. 리좀은 일자적 중심을 제거함으로써 내재성으로 나아가는 방법이다. 즉 초월성이란 질병을 치유하는 방법이다. 즉 외부(이웃)의 관계에 따라 본질이 달라진다. 초월적 원리나 초월성이나 초월자를 제거하여 그것을 무나 공으로 전복시킴으로써 이루어진다. 반대로 내적인 본성을 가정하거나, 외부로 환원할 수 없는 내부를 가정하는 순간, 내재적 사유에서 벗어나 초월적 개념으로 올라간다. 리좀은 초월자를 제거함으로써 나무나 뿌리의 초월성을 내재성으로 바꾸는 것이며, 외부와의 접속이란 원리를 통해 ‘외부’를 통해 사유한다는 점에서 내재성의 구도를 형성한다. 그것은 기계와 배치, 되기 등의 개념이 바로 이런 관점에서 정의된다. 리좀은 스스로 질서를 만들어 가며 무한한 연결접속을 창조해 낼 수 있는 내재적 원리이다. 다양체들의 주요 특성은 독자성이다. 중요한 것은 운동의 성격이지 형태 자체가 아니다. 사본이 아니라 지도를 만들어야 한다. 리좀은 지도다. 지도는 자기 폐쇄적인 무의식을 복제하지 않는다. 지도는 열려 있다. 지도는 모든 차원들 안에서 연결접속될 수 있고, 끝없이 변형될 수 있고, 온갖 몽타주를 허용하며 어디에도 그릴 수 있고, 언제나 많은 입구를 가지고 있다는 점은 아마도 리좀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일 것이다. 반면 사본은 항상 동일한 것으로 희귀한다. 사유는 결코 나무 형태가 아니다. 수목형태는 권력의 구조이다. 초월성, 그것은 진정 유럽의 질병이다. 리좀은 어떤 지점에서든 다른 지점과 연결 접속하고, 반드시 자신과 동일한 본성을 가진 특질들과 연결 접속되는 것은 아니다. 리좀은 아주 상이한 기호체계들을 작동시키고, 단위들로 이루어져 있지 않고, 차원들 또는 움직이는 방향들로 이루어져 있다. 리좀은 시작도 끝도 갖지 않고 언제나 중간을 가지며, 중간을 통해 자라고 넘쳐난다. 주체도 대상도 없고 다양체들을 구성한다. 그러한 다양체는 자신의 차원을 바꿀 때마다 본성이 변하고 변신한다. 다양한 출입구들과 관련되어 있으며, 중앙 집중화 되어 있지 않고, 위계도 없으며, 기표작용을 하지도 않고, ‘장군’도 없고 조직화하는 기억이나 중앙 자동장치도 없으며, 오직 상태들이 순환하고 있을 뿐인 하나의 체계이다. 사물들을 중간에서 지각하도록 노력하라. 고원은 중간에 있지 시작이나 끝에 있지 않다. 리좀은 고원들로 이루어져 있다. 리좀은 시작하지도 않고 끝나지도 않는다. 언제나 중간에 있으며 사물들 사이에 있고 간주곡이다. 나무는 혈통관계이지만 리좀은 오직 결연관계일 뿐이다. 나무는 ‘...이다’라는 동사를 부과하지만 리좀은 ‘그리고...그리고...그리고...’라는 접속사를 조직으로 갖는다. 존재론을 뒤집고, 기초를 부숴버리고, 시작과 끝을 무화시킨다. 중간은 결코 하나의 평균치가 아니다. 반대로 중간은 사물들이 속도를 내는 장소이다. 그것은 위치를 정할 수 있는 관계도 아니고 그것은 출발점도 끝도없는 시냇물이다. ‘어디서 출발해서 어디로 가는가’ 이런 물음은 정말 쓸데없는 물음이다. 백지상태를 상정하는 것, 0에서 출발하거나 다시 시작하는 것, 시작이나 기초를 찾는 것, 이 모든 것들은 여행 또는 운동에 대한(방법적, 교육학적, 통과제의적, 상징적인...) 거짓 개념을 함축한다.

     

    자연풍경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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