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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사상과 철학 264 (교재 공개)
    패러다임/철학 2026. 5. 4. 2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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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생각하기 이해하기 실천하기-

     

    사상과 철학 264

     

    영상 강의 링크 : https://youtu.be/XIFvLSLzIRI

     

     

    668.

    오직 너 자신 속에서 일어나는(꽃 피는, 자라는) 것만이 진실이다. 말을 넘어서 그 어떤 일이 일어났다면, 바로 그 시간부터 허식이 아닌 전체로서의 삶이 찾아온다. 존재의 문을 두드리는 최후의 노크 소리가 들릴 때 그대는 문득 그 순간 말의 세계(언어와 관념의 세계)로부터 벗어나게 될 것이다. 그대는 벙어리가 될 것이다. 무엇을 보든지 그 속에서 전혀 의미를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모든 것이 시시해지고 껍질로만 보일 것이다. 이 경험이 바로 깨달음의 극치, 저 ‘마하무드라mahamudra’로 가는 지름길이다. 마하무드라는 우주와 내가 하나가 되는 완전한 오르가즘을 뜻한다. 그것은 존재의 근원 속으로 깊이깊이 녹아들어가는 것이다. 이것이 마하무드라, 틸로빠의 노래인 것이다. 그대는 노래할수도 춤 출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을 이야기할 수는 없다. 그것은 깊은 현상이다. 이것은 틸로빠가 노래한 것이 아니다. 틸로빠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틸로빠는 이미 녹아들어가 버린 것이다. 오르가즘 그 자체가 노래하는 것이고, 경험 그 자체가 떨면서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하무드라의 노래는 절정, 그 엑스타시의 노래인 것이다. 엑스타시 그 자체가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엑스타시의 그 떨림 속으로 녹아 들어가 버린 것이다. 찾는 자가 사라졌을 때 바로 그 순간 목적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경험이 더 이상 거기 없을 때 경험은 거기 존재하는 것이다. 찾아라. 그러면 그것을 잃어버릴 것이다. 그것은 찾는 그 행위를 통하여 찾는 자의 의식이 더욱 강화되기 때문이다. 더 이상 찾지 마라. 그러면 그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찾을수록, 애쓸수록 실패할 것이다. 찾지 말고 너 자신으로 남아 있으라. 그 어느 곳에도 가지 말라. 그 누구도 신에게 도달한 자는 없다. 또한 그 누구도 도달할 수 없다. 주소도, 지도도, 길도 없다. 神이 어디에 있는지 말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신은 너에게로 온다. 그대가 준비되었을 때는 언제든지 신은 그대의 문을 두드릴 것이다. 신은 그대가 신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을 때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준비란 아무것도 필요치 않다. 오직 받아들일 수 있는 자세만이 필요할 뿐이다. 그때 에고는 없다. 그대는 이제 텅 빈 신전이다. 아무도 없는 빈신전이 되는 것이다. 진실은 언어 속에서가 아니라 말과 말 사이에서, 행과 행 사이의 빈 공간에서, 언어의 옆 그 빈 공간 속에 있다. 말은 변명에 지나지 않는 속임수이다. 하나의 책략이다. 진실은 음영이 되어 언어를 따른다. 진실을 찾고자 하는 마음이 많을 수록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그러나 진실로써의 그 무엇과의 대화는 불가능하다. 그런 마음이 전혀 없을 때, 진실을 찾고자 하는 마음조차 없어졌을 때, 그때 미묘한, 포착할 수 없는 진실의 음영을 느낀다. 그때 영적인 교섭은 가능하다.

    틸로빠→나로빠→마르빠→밀라레빠

    지식은 모방일 뿐이다. 가슴으로부터 나오지 않은 모방은 쓰레기이다. 부패물일 뿐이다. 오직 자신 속에서 자라는 것만이 진실(진리)이며 참된 삶이다. 복사품으로서의 지식은 버려라. 모방해온 지식은 마음을 사기꾼으로 만든다. 지식이 많은 사람은 그 자신의 지식 속에 갇혀 버리게 된다. 그 누구도 지식가의 그 에고를 뚫고 들어갈 수 없다.

    마리화나는 환각을 준다. 지식 역시 마찬가지이다. 지식은 그대에게 안다는 것의 환각을 준다. 마음은 논리의 독비늘로 날카롭게 빛나게 된다. 그러나 논리를 통해서는 결코 그 누구도 진리에 이르지 못한다. 합리적 정신 같은 것은 하나의 게임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논쟁은 철없는 애기들의 소꿉장난일 뿐이다. 삶은 그 어떤 논쟁도 없이 그냥 존재하는 것이다. 진실은 증거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진실은 그대의 가슴만을 필요로 한다. 머리로써의 논쟁이 아니라, 사랑과 믿음, 그리고 받아들일 수 있는 자세만이 필요할 뿐이다. 관계의 오랏줄을 끊어버릴 때, 바로 그 순간 절대자유를 얻는다. 만일 무엇인가가 존재한다면 협력이 필요하고, 관계가 필요하다. 그러나 거기 아무것도 없다면, 빈 거울 뿐이라면 그 어떠한 협력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인간의 본질은 無다. 빈 거울이다. 여기서 무란 있는 것有에 대한 없음無이 아니라, 절대의 무(眞空)를 뜻하는 것이다. 아무것도 없다. 망망한 무의 바다. 나라는 것이 어디 있는가? 그대 자신 속에 그대 자신이라는 것이 어디 있는가? 나라고 느끼는 모든 것은 잘못된 것이다. 마지막 경험에 다다를 때, ‘나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라는 것을 알 것이다. 그대는 그대가 아니다. 에고는 없다. 그대는 망망한 진공의 바다일 뿐이다. 조용히 앉아 두 눈을 감고 느껴라. 깊이 깊이! 나는 없다고, 아무것도 없는 진공의 바다일 뿐이라고.

    비물질적인 존재인 에너지의 선들이 교차하면서 물질이라는 환영을 불러 일으킨다. 마하무드라는 절대 무의 경험이다. 내가 없음을 경험하는 것이다. 내가 없는 데 고통받는 자는 어디 있겠는가? 누가 괴로워하고, 번민하고 우울해하고, 슬퍼하고, 행복해하고, 축복을 느끼는가? 축복을 느낀다면 또다시 고통의 희생물이 될 것이다. 아직도 거기 ‘나’라는 이 에고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대가 없을 때, 완전히 사라져 버릴 때, 고통도 없고 축복도 없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축복인 것이다. 여기에 오면 이제 다시는 無知에 떨어지지 않는다. 절대 무(진공)에 도달하는 것은 곧 모든 것에 도달하는 것이다. 수레는 부분들의 결합일 뿐이다. 수레를 해체하면 수레는 없어진다. 나 자신은 여기에 존재하지만 나의 부분들을 옮겨 놓으면 나는 사라진다. ‘나’란 교차하는 에너지의 선에 지나지 않는다. 이 교차하는 에너지의 선을 옮겨 놓으면 그 에너지의 교차하는 점은 사라진다. 수레는 그 수레를 이루고 있는 부분(바퀴, 난간 따위)의 결합에 지나지 않는다. 그대 또한 부분의 결합일 뿐이다. 사고思考를 의식으로부터 분리시켜 버리면 나라고 내세울 수 있는 것이 없게 된다. 거기엔 나가 없기 때문이다. 거기 진공만이 남는다. 느낌感情이 나로부터 분리되어 버리면 나란 사라져 버린다. 그러면 한계가 없는 不在와 빈 공간(眞空)뿐이다. 이것이 마지막 성취다. 이 경지가 바로 마하무드라의 경지인 것이다. 이 경지에 도달했을 때만이 전체로서의(우주로서의) 오르가즘을 체험할 수 있고, 어떤 한계도 없는 전체가 된다.

    말과 상징으로는 어떠한 것도 전달할 수 없다.

    마하무드라는 무(絶對無)에 뿌리를 박고 있다. 무가 되어라, 그때 모든 것을 얻게 되리라. 죽어라, 그러면 그대는 영원한 것이 될 것이다. 사라져라, 그러면 그대는 전체가 된다. ‘나’라는 이 물방울이 사라져 버릴 때, 거기 생명의 바다가 존재 속으로 파도쳐 온다. 집착하지 말고, 자신에 애착을 두지 말라. 그러면 발밑에는 심연만이, 낭떠러지만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우리가 하찮은 일에 집착하는 것은 의식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망망한 진공을 두려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진공의 사막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함이다. 우리는 이 진공의 사막으로부터 탈피하기 위하여 무엇인가에 집착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그대 자신을 심연 속으로 던져 버려라. 그러면 그대는 심연, 그 자체가 된다. 이제 여기엔 죽음이 없다. 심연이 어떻게 죽을 수 있겠는가? 그곳에는 종말이 없다. 아무것도 없음(絶對無)에 무슨 종말이 있겠는가? 무엇인가가 거기 존재할 때 종말이 따른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음(절대무)은 바로 무한 그 자체이다. 마하무드라는 아무것도 없음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마하무드라;깨달음의 세단계 가운데 최후의 단계 ①.아함까 ahamkar-에고의 상태 ‘나는 ...이다’의 ‘나’의 상태. ②.아스미따 asmita-나는 사라졌지만 ‘아직 ...이다’가 남아 있는 상태. ③아뜨마 atma 無我-‘...이다’ 마져 사라져 버린 상태. 이 상태를 마하무드라라 한다. mudra는 남성과 여성의 에너지가 결합된 상태, 성교의 절정 오르가즘의 상태. maha는 mudra의 상태가 인간과 인간의 그것을 넘어 우주와 인간이 결합하는 상태. 우주적 오르가즘에 도달한 상태. 존재의 오르가즘에 도달한 상태. 주관도 없고 객관도 없고, 없는 그것마져 사라져 버린 상태. 개체가 전체 속으로 흡수되어 전체 그 자체가 되어 버린 상태

    요가는 밤낮으로 노력하라고 한다. 그러나 탄트라는 노력하지 말고, 조작하지 말고, 그 어떤 인위적인 것도 하지 마라고 한다. 다만 일어나는 것을 허락하고, 그 흐름만을 타라, 그 속에서 무엇이 일어나든지 개의치 말라, 사랑은 작업이 아니다. 사랑은 노력없이 일어나는 것이다. 깨달음으로서의 전체적이요 마지막 경험도 이와 같다. 행위하려고 애쓰지 말고 그 위에 떠서 표류하라. 이것이 지름길이다. 탄트라의 문을 여는 열쇠다. 요가는 에고의 강화훈련이다. 마지막 단계에 가서 초월한다. 그러나 요가에서의 마지막 초월은 탄트라에서는 첫 단계가 된다. 그것은 에고의 소멸이다. 요가는 탄트라를 위한 준비 단계에 지나지 않는다.

    틸로빠는 여유 있고 자연스럽게 남아 있으라고 말한다. 그것은 자신과 싸우지 말라는 것이다. 주위의 도덕이나 성품의 성벽을 만들지 마라. 자신을 계율로 구속하면 멍에가 된다. 그러니 상황에 따라 움직여라. 고정된 태도를 가지지 말고 자연스러움과 표류하라. 역행하지 말고 물이 흐르듯 자유로워라. 자신에게 어떤 것도 강요하지 말고 물의 흐름을 따라 가라. 사회는 그대에게 강요하지만, 모든 것을 넘어서라. 지나치게 문화적일 때, 비인위적인 것의 전부를 상실한다. 그러면 그대는 하나의 기계일 뿐이다. 체계를 만들려고 하지 마라. 순간을 놓치지 마라. 잠깨인 자로 살아라. 불꽃으로 살아라. 미리 결정할 필요는 없다. 결정은 상황, 그 자체로부터 나오게 하라. 강요하지 말고 진실을 생활화하라. 이것이 참된 구도자의 길이다. 습관 속에서 행위하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명령이다. 그러나 의식은 자유를 필요로 한다. 비인위적인 것, 그 자체가 되도록 하라. 물은 절대로 형태에 저항하지 않는다. ‘이것은 나의 모습이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때문에 어떠한 모습으로도 변화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여유를 가지고 서두르지 마라. 그리고 틀을, 형식을 만들지 마라.

    도덕적인 인간은 결코 자연스러운 인간이 될 수 없다. 화가 나도 화를 낼 수 없다. 자신의 내부에서부터 솟아오르는 자연스러운 에너지를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랑을 느껴도 사랑할 수 없다. 사랑 대신에 도덕성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 그는 내부에서 솟는 비인위적인 것을 따를 수가 없다. 그는 웃을 때 언제나 분노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도덕적으로 위장된 웃음을 통하여 그들의 분노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무엇인가를 감추고 있다. 위선자들이다. 위선자란 인위적인 인간을 말한다. 그는 화가 나면 웃는다. 미워하고 싶을 땐 사랑하는 체 한다. 잔학한 짓을 하고 싶을 땐 동정하는 체 한다. 그러나 분노를 느끼면 분노하라. 하지만 그 분노를 느끼는 의식은 완전히 깨어 있어야 한다. 분노가 깨어 있음을 넘어가지 않도록 하라. 그리고 자신을 분노의 한가운데로 던져 버려라. 무엇이 일어나는지 주시하라. 그러면 조작과 인위적인 노력이 사라져 버린다는 것을 알 것이다. 결코 자신이 그것들을 잘라 내거나 죽인 것이 아니라 그냥 사라져 버렸을 뿐이다. 분노는 어리석음으로부터 온다. 그러나 나쁜 것은 아니다. 죄도 아니다. 그저 단순한 어리석음일 뿐이다. 탐욕도 시기심도 마찬가지다. 비인위적인 사람은 현명한 사람이지 좋은 사람은 아니다. 형식적인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지 나쁜 사람은 아니다.

    비어 있어라. 긴장하지 말고 위선, 문화, 위장, 가면, 인위적인 것을 버려라. 여유를 가져라. 그리고 비인위적인 것이 되어라. 이것이 가장 중요한 수련이다.

     

    밤의 꽃 풍경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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