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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 사상과 철학 227 (교재 공개)패러다임/철학 2025. 7. 23. 04:07반응형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생각하기 이해하기 실천하기-
사상과 철학 227
영상 강의 링크 : https://youtu.be/bz3N6gg-YEU
631.
탄트라 비전 스물여덟 번째 차트 <#자유를 찾아서> -2가지 수행법
만약 무엇을 해야할지 모른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제일 좋다. 여기에서 서로 다른 두 가지 방편을 한데 섞지 마라. 먼저 정확히 이해하고 수련을 시작하라. 잘못된 것을 하기는 쉽다. 그러나 그것을 고치기란 너무나 힘들다.
탄트라 비전 스물여덟 번째 차트 <#자유를 찾아서>
<수행법 여든넷> 84.육체를 향한 집착을 내던져라. 그때 나는 모든 곳에 편재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모든 곳에 편재하는 사람은 기뻐한다.
그대는 항상 육체를 입고 육체 속에서 수많은 생을 살아왔기 때문에 육체에 대한 뿌리깊은 집착이 있다. 그것은 자연스런 현상이다. 죽음과 또 다른 탄생 사이에 하나의 간격이 있지만 그대는 무의식 속에 있었다. 그래서 육체를 벗고 있을 때가 어떤 느낌인지 알지 못한다. 오직 한 가지 현상만 알고 있다. 그것은 언제나 육체 속에 있는 자신만을 안다. 이상태가 너무 오랫동안 지속되어서 자신이 육체와 다른 것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자신이 육체라는 동일시가 바로 집착이다. 그러나 자신이 육체가 아니라고, 영혼이며 진아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앎이 아니고 단지 듣고 읽고 믿은 것뿐이다. 어떤 체험없이 말이다. 우선 자신이 육체와 다른 그 무엇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는 점을 깨달아라. 마음은 타인의 지식에 의해서 다듬어진다. 그대가 수집한 정보의 일부다. 그것은 빌려온 것이지 실재가 아니다. 물론 그것 자체는 거짓이 아니다. 그것을 말한 사람은 진짜로 알았다. 하지만 그대에게는 자신의 체험이 아니기 때문에 거짓이다. 다른 사람에게는 진리일 수 있지만 그대에게는 아니다. 진리는 개인적인 것이다. 체험을 통하지 않는 것은 진리가 아니다. 그래서 우주적인 진리 같은 것은 없다. 모든 진리는 그것이 진리이기 이전에 개인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육체에 대한 집착은 육체와의 동일시이다. 그래서 그대의 환상을 통해 자신이 영혼이라고 어설프게 아는 지식을 내던져 버려라. 실체는 무척 고통스럽다. 우리가 실체를 감추고 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그대는 자신을 영혼이라고 생각하고 모든 좋은 것은 자신의 영혼에 돌리고 싫어하는 것은 육체에 속한 것으로 돌린다. 그대는 하나의 구분을 만들었다. 이 구분으로 집착이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만들었다. 어떤 것이 병(짐, 지옥)이라고 판명(인식, 느낄 때)이 날 때만 그것을 버릴 수 있다. 만약 집에 불이 났다면 누구에게 어떻게 해야 될지 묻지 않는다. 스승도 찾지 않을 것이고, 경전을 뒤적거리지도 않을 것이고, 어떤 문이 가장 올바른 문인지 망설이지 않고 집밖으로 뛰쳐 나갈 것이다. 그처럼 집착을 벗어날 방법을 찾지 말고 집착이 무엇인지 안다면 집에 불이 난 것처럼 그것을 그냥 내던져 버릴 것이다. ‘어떻게’라고 물을 필요가 없다. 당장 그것으로부터 뛰어나올 것이다. 이 방편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에 대한 거짓 지식을 버려야 한다. 그대를 제한하고 있는 것은 육체가 아니라 집착이다. 그대와 실체 사이를 가로막은 장벽은 육체가 아니라 집착이다. 한번 집착이 사라지면 그대에게는 어떤 육체도 없다. 전 존재계가 그대의 육체가 된다. 그대는 모든 곳에 존재하는 것이다. 실제로 몸은 존재계가 그대에게 닿은 연결점일 뿐이다. 그것은 그대에게 가장 가까운 존재계다. 그것은 얼마든지 확장될 수 있다. 육체가 감옥이 아니라 집착이 감옥이다. 그대는 어디에 있다고 말할 수 없다. 단전이나 가슴도 아니다. 그 ‘어디에’란 곳 자체가 없다. 단지 그대가 있을 뿐이다. 깊은 잠 속에서는 육체를 의식할 수 없다. 그냥 그대는 있다. 우리는 육체에 매여 있기 때문에 어딘가에 있다고 생각하고 죽을 때는 어디로 간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아무데로도 가지 않는다. 그대가 죽을 때 그대는 그 어디에도 없다. 즉 육체 속에 있지 않을 때 그대는 아무데도 없다. 혹은 모든 곳에 있다. 이 둘 중에서 설득력 있는 쪽을 택하라. 그것은 그대의 자유다. 그대는 하나의 공간 속에 한정되지 않는다. 그것이 전부다. 그대가 모든 곳에 있다면 아무데도 있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된다. 이 두말은 단지 긍정과 부정의 방법의 차이일 뿐 같은 뜻이다. 그러면 바다와 같은 느낌을 갖게 된다. 그대는 하늘과 같다. 모든 것을 담는다. 그때만이 자유로울 수 있다. 자유가 곧 행복이고 기쁨이다. 그것은 결과가 아니라 일어나는 상태다. 그것은 사랑할 때도 일어난다. 사랑에 빠질 때 육체에 대한 집착을 버리기 때문이다. 즉 다른 사람의 몸도 그대의 몸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상대방 속으로 들어갈 수 있고 상대방도 그대 속으로 들어올 수 있다. 그대는 이전보다 확대된 것이다. 존재가 더 커진 것이다. 새로운 영역에 도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존재계 전체와 사랑에 빠질 수 있다면 그대는 더 이상 육체가 되지 않을 것이다. 육체가 사라지는 순간에 그대는 단지 의식이 된다. 그때 쾌락이 아닌 기쁨이 다가온다. 그것은 또한 일상 속에서도 우연하게 일어난다. 운동에 전념할 때, 어린아이의 웃음을 볼 때, 아름다운 광경을 볼 때, 음악을 들을 때 갑자기 중력이 사라진다. 그대는 음악으로 가득 차게 되고 음악과 하나가 된다. 거기에는 음악을 듣는 자가 없다. 듣는 자와 들리는 대상이 하나가 되었다. 자신의 육체를 잊어버렸다. 거기에는 오직 음악만 존재한다. 그대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대는 확장되었다. 이제 한계가 없다. 그것은 육체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육체는 그대로 남아 있다. 집착이 사라지는 것이다. 육체는 거기에 있지만 내던져졌다. 그대의 의식이, 주의력이 몸 밖으로 나가 있다. 그래서 주의력이 아무데도 쏠리지 않은 상태 속에 있는 것이 바로 명상의 전 과정이다. 거기에는 주의를 끌만한 어떤 대상도 없다. 대상이 없을 때 육체도 없다. 그대의 주의력이 육체를 만들어 낸다. 주의력이 곧 그대의 육체다. 주의력이 아무데도 없다면 그대는 아무데도 없다. 혹은 모든 곳에 편재한다. 그때 그대가 곧 기쁨이 된다.
탄트라 비전 스물여덟 번째 차트 <#자유를 찾아서>
<수행법 여든다섯> 85.아무것도 없음을 생각하면, 제한된 자아는 무한해질 것이다.
생각이 한계를 준다. 그리고 그 한계의 유형은 수없이 많다. 그대가 흰두교도라면 그것은 하나의 한계다. 흰두교도가 되는 것은 어떤 특정한 유형에, 사고에 집착하는 것이다. 진정으로 종교적인 사람은 주의나 교도, 어떤 신념 체계, 어떤 신앙에 의해서도 제한받지 않는다. 특별한 생각이 없기 때문에 마음에 의해서 구속되지 않는다. 그는 무한 속에 산다. 그래서 첫째로, 특별한 생각을 갖고 있을 때 그 생각은 그대의 장벽이 된다. 그것에 얽매이게 된다. 그때 누군가에게 반대할 것이다. 왜냐하면 누군가를 반대하지 않고는 장벽이 유지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의 생각은 항상 하나의 편견이다. 그것은 항상 어떤 것에 찬성하거나 반대한다. 생각은 전체적일 수 없다. 오직 생각 없음만이 전체적일 수 있다. 두 번째로, 생각은 항상 마음에서 나온다. 그것은 언제나 마음의 산물이며 그대의 태도며, 관점이며, 편견이며, 반응이며, 공식이며, 개념이며, 철학이다. 그대의 모든 것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대의 존재가 아니다. 존재에 관한 그 무엇은 될 수 있지만 존재 자체는 될 수 없다. 꽃이 있으면 아름답다거나 성스럽다거나 추하다거나 뭔가를 말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생각이다. 그러나 무슨 말을 하든지 그것이 꽃 자체는 아니다. 꽃은 그대의 생각과 관계없이 존재한다. 또한 꽃은 그대의 생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저 존재한다. 꽃에 대해서 생각할 때마다 그대와 꽃 사이에 장벽을 쌓는 것이다. 생각을 떨쳐버려라. 그때 자신을 꽃 속으로 들어가게 할 수 있다. 말은 꽃에게 어떤 존재도 나눠줄 수 없다. 그저 장벽만 쌓는 것일 뿐이다. 생각하지 않으면, 그저 단순히 존재한다면, 전적으로 깨어 있다면, 어떤 사념의 구름으로 가려져 있지 않으면 그대는 제한되지 않는다. 육체만이 몸은 아니다. 마음은 더 깊은 몸이다. 육체는 물질로 구성되어 있다. 마음 역시 물질로 구성되어 있다. 보다 섬세하고 정제된 물질로 말이다. 육체는 가장 바깥의 몸이다. 마음은 내부의 몸이다. 그리고 그대는 몸과 분리되기는 쉽다. 그러나 마음과 분리되기는 어렵다. 마음은 몸보다 더욱 자신이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그대의 몸이 아파 보인다고 말하면 기분이 그렇게 나쁘지 않다. 그러나 그대의 마음이 아파 보인다고 말한다면 상처를 입고 모욕을 받았다고 느낀다. 마음이 자신에게 더 가까운 것이기 때문이다. 마음은 내부의 몸이다. 그대는 그것을 갖고 다닌다. 그것에 너무 깊이 집착한 나머지 죽음조차 그대를 그것에서 분리시키지 못한다. 그대의 과거 생들을 알 수 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만약 그대가 한때 개로 태어난 적이 있다면 그대 속에 여전히 개의 마음이 있다. 나무였다면 나무의 마음이 있고, 여자였다면 그것은 그대 속에 있다. 모든 마음이 그대 속에 있다. 그대는 너무나 단단히 그것들을 붙잡고 있어서 절대로 놓치지 않는다. 사람이 죽으면 외부의 몸은 해체된다. 그러나 내부의 몸은 그대로 남는다. 그것은 너무나 정제된 물질이기 때문에, 에너지의 진동이기 때문에 쉽사리 해체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대가 갖고 다니는 생각의 유형(욕망, 마음의 유형)에 따라서 새로운 몸으로 들어간다. 마음의 청사진이 다시 외부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다. 첫 번째 방편은 몸에 대한 집착을 던져버리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두 번째 방편은 마음, 즉 내면의 몸에 대한 집착을 버리라고 말한다. 죽음조차 그대에게서 분리시킬 수 없는 마음을 말이다. 오직 명상만이 그것을 그대에게서 분리시킬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명상을 하기가 두렵다고 계속 말한다. 거기에는 깊은 공포가 있기 때문이다. 죽음의 공포 말이다. 이제 가장 깊은 동일시가 끊어지려, 분리되려고 한다. 그때는 누구나 자신이 죽는 것처럼 느껴진다. 존재하지 않는 상태로 들어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깊은 심연이 입을 열고 무한한 허공이 펼쳐진다. 두려워하는 사람은 다시 되돌아가서 육체에 집착한다. 땅이 갈라지고 깊은 無의 절벽이 그를 삼키려 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래서 항상 사람들이 시도는 하지만 그 시도는 매우 피상적인 것이다. 그들은 더 깊이 들어가면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다. 한번 그대가 그 심연을, 그 쑤냐를, 그 허공虛空을 알고 나면 다시는 이전과 같은 상태가 될 수 없다. 그대는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되어 있다. 마음과 맺었던 이전의 동일시는 이제 완전히 끊어졌다. 그리고 이제 마음은 하나의 도구가 되었다. 무엇을 하고 싶다면 뭐든지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에 매이지는 않는다. 여기에 자유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오직 아무것도 없음을 생각할 때 가능하다. 이제 그대는 본래의 얼굴을 발견했다. 거기에 어떤 제한도 없다. 어떤 얼굴, 생각, 사상, 마음도 없다. 그것이 곧 無心의 상태다. 비로소 한정된 자아는 한정되지 않는다. 무한이 된다. 갑자기 그대는 모든 곳에 있다. 그대는 모든 사람이 된다. 그대는 나무 속에, 돌 속에, 하늘 속에, 친구 속에, 적 속에도 있다. 모든 곳에 편재하게 된 것이다. 그대는 모든 곳에서 비치고 있다. 이 상태는 지복의 상태다. 이제 그 어떤 것도 그대를 혼란시킬 수 없고, 그대에게 반대하는 것도 없다. 그대를 벗어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 거기에 죽음이 없다. 죽음 속에서조차 그대는 존재한다. 오직 그대만이 존재한다. 이것이 홀로 있음, 전체적인 홀로 있음이다. 모든 것이 그대 속에 흡수되어 그대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 상태를 두 가지로 표현할 수 있다. 긍정적인 표현으로서 신은 없다. 오직 나만이 존재한다. 혹은 내가 바로 신이다. 신성이다. 전체다. 모든 것이 내 속에 있다. 모든 강들은 나의 바다에 들어와서 하나가 된다. 나와 다른 것은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부정적인 표현으로는 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 둘 다 진리다. 모든 것이 내 속에 들어올 때 ‘나’라고 부를 만한 것이 없다. 모든 것이 그대가 되든지 혹은 그대가 모든 것 속으로 녹아들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된다. 그대가 무엇을 표현하든지 그것이 옳다면 그 반대 표현도 옳은 것이다. 모든 표현이 부분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상호 보충적이다. 브라흐마라(전체)라고 말하든지 니르바나(無)라고 말하든지 같은 것이다. 그 둘은 같은 경험을 표현한 말이다. 그 경험은 바로 아무것도 없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다. 사고작용은 관계도 다리도 교류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장벽이다. 말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누군가와 침묵 속에 있다면 그와 관계를 맺는 것이다. 침묵 속으로 깊이 들어가면 마음에는 어떤 생각도 없다. 그리고 두 마음이 전적으로 침묵하게 될 때 그대와 그는 하나가 된다. 영(0) 하나에 영(0) 하나를 더해도 2가 될 수 없다. 그냥 0일 뿐이다. 그것에 어떤 것도 덧붙일 수도 떼어 낼 수도 없다. 하나의 0은 전체다. 전체로서의 하나다. 그대가 존재계와 침묵할 때 그것과 하나가 된다. 이 방편은 존재계와 침묵하라고 말한다. 그때 신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다. 그대는 존재계와 한 가지 방식의 대화만을 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침묵의 대화다. 예를들어 바위에 손을 대고 침묵해 보라. 거기에 합일이 일어날 것이다. 그대는 바위 속으로 깊이 들어가게 되고 바위는 그대 속으로 깊이 들어온다. 하지만 거기에서 어떤 언어도 사용할 수 없다. 바위는 어떤 언어도 알지 못한다. 언어를 사용한다면 바위와 관계를 맺을 수 없다. 사랑은 침묵의 꽃이다. 오직 침묵 속에서만 피어난다. 그것은 하나됨 속에서만 피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기도란 단지 신과 재잘거리는 것일 뿐이다. 우리는 너무나 조건을 많이 걸고 다닌다. 그래서 교회나 사원에 가서도 끊임없이 재잘거린다. 신은, 존재계는 우리의 언어를 이해할 수 없다. 존재계는 오직 하나의 언어만을 이해한다. 그것은 바로 침묵이다. 산스크리트 어도 아니고, 영어도 흰두어도 아니다. 침묵은 우주적이다. 그것은 어떤 특정한 누구에게 속한 것이 아니다. 만약 침묵의 언어를 알면 그 무엇과도 관계를 맺을 수 있다. 바위도 침묵하고 나무도 침묵하며 하늘도 침묵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만큼이나 실존하는 것이다. 모든 것은 침묵이 무엇인지 안다. 모든 것은 침묵 속에 존재한다. 명상은 침묵을 의미한다. 수용적이며 사랑하지만 사고작용은 전혀 아니다. 생각 속에 갇혀있는 한 불행 속에 있게 될 것이다. 갇혀 있지 않으면, 생각을 초월해 있으면, 깨어 있으면, 생각의 구름에 가려져 있지 않으면 기쁠 것이다. 그대는 지복을 느낄 것이다. 즐기고 사랑하는 삶은 죽음에 이르는 문턱이며 길일 뿐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죽음을 감추고 있는 이 삶은 그저 죽음의 일부분일 뿐이다. 그대의 삶은 죽음이 그 유일한 열매라고할 때 삶에 대해 속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삶이 죽음이라는 열매를 맺는 이상 죽음은 이미 삶의 씨앗이다. 그래서 죽음을 초월해야 하는 것이다. 죽음은 시작이며 끝이고 삶은 그 사이에 존재하는 환영이다. 붓다는 종말, 즉 죽음(삶에 대한 부정적)에 대해서 말했고 탄트라는 시작 즉 삶(긍정적인 사랑과 섹스와 육체)에 대해서 말한다. 그대는 시작과 끝을 꿰뚫을 수 있다. 그리고 초월할 수 있다. 이것이 탄트라의 접근방식이다. 즉 시작과 끝은 모두 같은 것이다. 그대는 섹스와 함께 태어났다. 그리고 섹스는 죽음의 시작이다. 섹스를 통하지 않고 태어나야 불멸의 존재가 되는 것이다. 섹스를 통해서 태어나면 죽음은 반드시 있다. 이 때문에 사회는 섹스를 두려워한다. 섹스란 죽음의 공포를 대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탄트라는 삶을 긍정하는 것이 아니며 붓다 역시 삶을 진짜 삶에 대해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탄트라는 시작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붓다는 종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지만 탄트라는 좀더 현실적이다. 왜냐하면 그대는 이미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삶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죽음은 반드시 일어날 것이다. 그것은 그대에게 있어서 여전히 상상의 부분이다. 죽어가는 사람은 볼 수 있지만 죽음 자체는 볼 수 없다. 그것은 내부에서 진행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개인적인 것이며 불가시적인 것이다. 직접 죽지 않는 한 죽음을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죽음에 대해 알려진 것은 모두 추측일 뿐이다. 아무도 실제로 죽음을 아는 사람은 없다. 과거 전생을 기억해 내지 않는 한 알 수 없다. 이번 생에서 그대의 죽음은 미래의 일이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미리 생각할 수 없다. 그것은 안개 속에 가려 있는 미지의 것이다. 그대가 할 수 있는 것은 다른 사람이 한 말을 빌려오는 것뿐이다. 다른 사람의 죽음을 아무리 세밀하게 관찰해도 그대는 외부의 구경꾼일 뿐이다. 탄트라는 좀더 과학적이다. 그것은 삶과 함께, 탄생과 함께, 섹스와 함께 시작한다. 또한 전생을, 죽음을 강조하지 않는다. 그것은 아직 그대에게 관념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삶과 죽음에 대한 탐구는 모두 같은 것이다. 즉 죽음 없는 삶, 영원한 삶에 대한 탐구다. 시작을 초월하는 것이나 종말을 초월하는 것이나 모두 같은 초월이다. 탄트라는 그대로 하여금 내면 깊이 들어가도록 도와준다. 탄트라를 통해 삶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삶을 이해하게 되면 죽음도 이해할 수 있다. 삶과 죽음을 모두 이해할 때 거기 초월이 일어난다. 만약 이 삶에 대해 생각한다면 마음은 외부로 향할 것이다. 그리하여 보이는 사물에 집착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죽음이 모든 것에 감추어져 있음을 보기 시작한다면 그때 보이는 사물에 더 이상 집착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대의 마음은 내면으로 향하기 시작할 것이다.
꽃들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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