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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사상과 철학 228 (교재 공개)패러다임/철학 2025. 7. 29. 00:09반응형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생각하기 이해하기 실천하기-
사상과 철학 228
영상 강의 링크 : https://youtu.be/SIWVKAhHlDY
632.
탄트라 비전 스물아홉 번째 차트 <#언덕 위에서 내려다 보면>
-2가지 수행법이 있다.
인간은 동물(과거)과 신성(미래)의 얼굴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과거의 그림자와 미래의 꿈, 이 둘 사이에 인간이 존재한다. 인간은 그 둘 모두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인간은 과거에 동물이었다. 그리고 미래에 신이 될 수 있다. 그래서 그는 둘 다이다. 그러나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는 아직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둘 다 아닌 것이다. 인간은 이 둘 사이에 하나의 긴장으로 존재한다. 이 둘이 갈등을 일으킨다. 어떤 의미에서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동물에서 신성에 이르는 한 단계일 뿐이다. 단계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허공 중에 걸려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무엇을 하든지 거기에 만족할 수 없다. 두 가지 대칭되는 존재가 그 속에서 만난다. 동물이 만족스러우면 그때는 신성이 불만족스럽고, 신성이 만족스러우면 그때는 동물이 불만족스럽다. 한쪽은 언제나 불만 속에 있다. 둘 다를 동시에 만족시킬 수 없다. 천국과 지옥, 육체와 영혼, 낮은 것과 높은 것, 과거와 미래가 만날 수 없다. 하지만 그대는 언젠가 만나리라고 기대한다. 하지만 그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이 방편은 어떤 약속을 심어주거나, 동물성에 반대하고 신성을 만족시켜 주거나, 신성을 반대하고 동물성을 만족시켜 주기 위한 것도 아니다. 그대에게 변형이 일어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즉 모든 이중성에 반대하는 것이다. 단지 그대 속의 제3의 힘을 만들어 내려는 것 뿐이다. 즉 불이원不二元의 지점이다. 그것은 동물성과 싸우는 것도 신성을 찬성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 않으면 더 많은 갈등을 만들어 내어 폭력과 투쟁을 야기시킬 것이다. 이것은 초월의 방편이다. 오직 선택 없는 주시만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탄트라는 선택하지 않는 지켜봄이다. 주시력이 되라. 동물성과 신성을 동시에 바라보는 지점에 서라. 탄트라는 현재 속에 있다. 단지 이 순간이 되라. 지금 그리고 여기에 말이다. 그때 초월이 일어나고 그대는 동물도 아니고 신성도 아니다. 그냥 그러함 속에 있을 때 거기에 자유가 있다. 그저 주시자가 되라. 주시하는 순간 그대는 인간이 아니다. 두 얼굴 모두 초월하게 된다. 그대는 그저 존재한다. 그대는 순수한 존재 자체다. 이 방편들은 바로 그 상태를 위한 것이다.
탄트라 비전 스물아홉 번째 차트 <#언덕 위에서 내려다 보면>
<수행법 여든여섯> 86.인식을 초월하고, 이해도 초월하며, 존재하지 않음도 초월한 어떤 것을 그대가 깊이 응시하고 있다고 가상하라. 거기에 그대가!
인식을 초월한다는 말은 보여질 수 없는 것, 인식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대는 인식할 수 있는 것만 상상할 수 있다. 그대의 상상도 순수한 상상이 아니다. 상상할 수 있는 것은 그 어떤 것이라도 이미 알고 있는 것이며 인식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 방편은 인식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상상할 수 있을 때까지 계속하라고 고집한다. 즉 인식될 수 없는 어떤 것이 일어날 때까지 계속 그 모든 것을 지워 버려라. 그러면 상상력의 대상으로서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게 될 것이다. 오직 텅 빈 마음의 영사막만이 나타날 것이다. 거기에는 어떤 형상도, 상징도, 꿈도 영사되지 않을 것이다. 바로 그 순간에 변형이 일어난다. 인식의 대상이 아무것도 없을 때 모든 주의력이, 통찰력이 변형된다. 그때 자신을 자각하게 되는 것이다. 인식하고 있는 자, 이해하고 있는 자, 알고 있는 자를 자각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주체는 항상 대상 속에 가려져 있다. 지금까지 아는 자를 지식 속에서 읽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마음의 작용이 있기 때문이다. 존재하지 않음도 초월한 어떤 것이 있다. 인식될 수 없고 이해될 수 없는 어떤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그대 자신이다. 그대는 그대 자신을 인식할 수 없다. 그대는 그대 자신과 조우할 수 있는가? 자신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대가 아는 자신은 진짜가 아니다. 자신을 아는 그가 바로 자신이 될 것이다. 그대는 아는 자이지 알려질 수 없다. 자신을 자신 앞으로 끌어다 놓을 수 없다. 다른 사물을 알듯이 자신을 알 수 없다. 인식의 모든 관계성은 알려지는 대상과 아는 자이다. 자기인식이란 이런 의미에서 가능하지 않다. 거기에는 인식하는 자와 인식되는 대상이 하나다. 그대는 사물을 아는 것과 다른 차원에서 자신을 알 수 있는 것이 가능하다. 알려지는 대상이 전혀 존재하지 않게 될 때, 모든 대상이 사라질 때, 인식되고 이해될 수 있는 모든 것이 거기에 없을 때, 모든 상념을 지워 버릴 때 갑자기 자신을 자각하게 된다. 이 자각은 이중적이지 않다. 거기에는 대상도 주체도 없다. 오직 주체성만이 있다. 이 자각은 앎의 다른 유형이고 존재의 다른 차원을 제공한다. 예를들어 우리가 갖고 있는 에너지는 고정되지 않고 대상을 향해 계속 역동적으로 움직인다. 사람을 볼 때 에너지는 그 사람에게 흘러가고 그것은 다시 자신에게 다시 돌아온다. 그 사람을 인식할 때 하나의 순환 고리로 연결된다. 만약 그 에너지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 사람을 알 수 없다. 에너지는 주체로부터 대상으로 옮겨갔다가 다시 돌아온다. 이런 삶은 자신을 결코 알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자신의 에너지는 타인의 에너지로 가득 차기 때문이다. 그것은 상념들을 담고 있다. 그것은 또한 자신에게 그런 상념들을 낳게 한다. 이것은 그대가 지식을 갖고 있는 방식이다. 이 방편은 대상이 거기에서 사라지도록 허락하라고 말한다. 그대의 에너지를 진공 속으로, 허공 속으로 들어가게 하라. 그것은 그대로부터 나간다. 그러나 붙잡을 만한 대상이 없다. 그것은 다시 허공을 통해서 그대에게로 돌아올 것이다. 거기에는 어떤 대상도 담겨져 있지 않다. 텅 빈 채로, 순수 그 자체로 되돌아 올 것이다. 그것은 오직 그것 자체뿐이다. 이것이 명상의 전 과정이다. 그대의 에너지가 움직이고 있지만 거기에는 구체화되고, 인상 지워지며, 그것과 동화될 만한 어떤 대상에도 물들지 않는다. 그것은 어떤 상념도 담지 않은 채 다시금 그대에게 되돌아온다. 그 움직임은 나갈 때와 똑같은 텅 빈 상태로 순수하게 그대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이것은 에너지의 순수한 순환이다. 그리고 되돌아올 때 그대를 자극한다. 어떤 지식도 담기지 않은 에너지 그 자체다. 그때 그대는 자신을 자각하게 된다. 만약 그 에너지에 어떤 것이 담겨 있다면 그 담겨진 정보에 의해 그 대상을 알게 될 것이다. 만약 거기에 어떤 인상도 담겨 있지 않으면, 어떤 것에 의해서도 물들어 있지 않으면 에너지는 다른 어떤 것으로 옮겨가지 않는다. 그때 그대는 그대 자신 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이 움직임이 바로 자기인식이다. 자기 조명인 것이다. 기본적으로 모든 명상 방편은 이것의 다른 진동들이다. 이것이 일어날 수 있다면 그때는 처음으로 그대 자신을, 그대의 존재를 자각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주체성이다. 지식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대상의 지식(알려지는 것)과 주체성(아는 자)의 지식이다. 아는 자 그 자체를 자각하지 못한다면 그는 무지의 상태다. 자신을 자각하지 못한다. 마음이 생각으로 채워지지 않을 때, 거기에 어떤 잔물결도 일지 않을 때, 한 조각의 파도도 일어나지 않을 때 그대는 거기에 홀로 존재한다. 그대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없다. 그때 그대는 명백하게 자신을 자각한다. 대상이나 생각에 매이지 않으려는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단지 주시자로서 그것들에게서 분리되어라. 마음 속에 어떤 것이 다가오든지 ‘이것이 아니다. 이것이 아니다’라고 계속적으로 말하라. 마음의 방 안에 어떤 가구도 들여놓지 말아라. 모든 가구를 방 밖으로 내던져라. 텅 빔이 거기에 있을 때 그것이 일어난다.
탄트라 비전 스물아홉 번째 차트 <#언덕 위에서 내려다 보면>
<수행법 여든일곱> 87.나는 존재하고 있다. 이것은 나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것이다. 오 사랑하는 자여, 그러함 속에서 무한성을 알아라.
어떤 말을 한다면 그것은 기도가 아니다. 명상은 더더구나 아니다. 마음이 거기에 들어와 있다. ‘나는 존재한다’라고 말하지 말고 생각하지 말고 느낌 속으로 깊이 들어가라. 머리로 말고 온 몸 전체로 느껴라. 어떤 것을 반복해서 암송한다면 자동적으로 최면에 걸린다. 우선 지겨워지고 졸립고 잠을 자게 된다. 생각은 느낌에서 도피하게 하는 속임수이다. 만약 안과 밖에서 무엇이 일어나든지 자각할 수 있다면 그것이 곧 ‘나는 존재하고 있다’라고 느끼라는 말의 의미이다. 그러면 생각은 멈출 것이다. 그대가 존재한다고 느낄 때 그것은 생각이 멈춘 뒤 일어나는 전체적인 현상이기 때문이다. 그때 마음도 사념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것은 마음이란 것이 타인과 관계된 특별한 활동이기 때문이다. 모든 생각은 하나의 대화이다. 그대에게 언어를 주는 것이 사회다. 언어는 사회적인 현상이다. 자신의 중심 속에 자리잡을 때 거기에는 어떤 사회도 없다. 오직 홀로 존재한다. 마음도 상상도 다른 사람도 없다. 이것이 바로 명상이다. 완전히 깨어 있는 상태, 무의식이 아니면서도 전체성 속에서 존재를 느낄 때 마음과 함께 그대의 이름, 형상, 종교, 선악, 아름다움과 추함 등등 그대에게 붙어 있던 모든 제목들이 갑자기 사라진다. 바로 이 순간이 영원성 전체이다. 축복이 일어난다. 그리고 이 축복은 그대에게 일어나는 어떤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대 자신이다. 어느 장소에 있건 무엇을 하건 있는 그대로 자신의 존재를 느껴보라. 그대는 손을 갖고 있지만 손을 느껴본 적은 없다. 계속 같은 정보를 주고 있는 것은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존재를 느끼기 시작할 때 그대는 손(오감)등 온몸의 분위기를 알게 된다. 몸은 그대에게 뭔가를 말하고 있다. 하지만 그대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존재계는 미묘한, 여러 가지 방식으로 그대를 관통하지만 그대는 그것을 자각하지 못한다. 삶은 무한한 축복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지겨운가? 그대가 존재계에 뿌리박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겨우 생명만 유지할 뿐이다. 자신의 존재를 가슴을 통해서 느끼면 이 넘치는 존재함이 나의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체적인 존재를 소유하는 것이고 그대 속에 있는 가장 내밀한 핵심을 소유하는 것이다. 그리고 수십억년 동안 이 지구는 그대를 존속시키기 위해 준비해 왔다. 그대는 전체와 하나가 된다. 그리고 존재계가 그대를 위해 존재한다. 이것을 느끼는 동안 그것에 한계를 만들지 말고 어떤경계선도 긋지 마라. 그것을 무한하게 느껴라. 세상과 존재계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시작과 끝은 마음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깊은 명상 속에 들어가면 존재를 느낄 수 있다. 거기에 마음은 없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에너지의 흐름이 있다. 무한한 대양이 그대를 둘러싸고 있다. 그대는 그 속에서 한 조각의 파도일 뿐이다. 그 파도는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 그러나 대양은 그런 것이 없다. 한번 자신이 파도가 아니라 대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모든 불행은 사라진다. 시작된 것은 반드시 끝난다. 만약 그대의 존재 속에 결코 시작되지 않는 어떤 것을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은 끝날 수 없다. 그때 죽음의 공포는 사라진다. 죽음의 공포가 사라질 때 사랑은 그대를 통해 흘러 넘친다. 우리의 사랑은 공포의 일부분이다. 우리의 사랑은 공포로부터 달아나기 위한 수단이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은 죽음의 공포가 없어졌을 때만 일어난다. 죽음이 사라질 때, 그대가 결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는 것을 알게될 때 거기에 진정한 사랑이 일어난다. 그러나 그것을 미리 생각하지 마라. 명상 속에 깊이 들어가면 그것은 저절로 일어날 것이다. 공포는 사라질 것이다. 과거로부터 미래로 그대는 무한히 펼쳐질 것이다. 그 깊음 속에 그대가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순간, 이 현재 순간의 깊음 속에 그대가 있다. 그대는 그저 있다. 그대는 결코 시작된 것이 아니다. 그리고 끝나지도 않는다. 이 무한성을 무한하게 느껴라. 마음이 사라질 때 자연스런 내면의 소리가 드러난다. 그것이 일어나도록 허용하라. 그것을 명상하라. 그것과 싸우지 마라. 단지 그것을 주시하라. 그것과 갈등을 만들지 않는다면 그것은 저절로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사라지면 그대는 침묵 속으로 떨어질 것이다. 말, 소리, 침묵, 이런 순서로 들어간다. 말은 인간에 해당되고 소리는 자연에 해당되며 침묵은 우주다. 어떤 것도 말하지 마라. 말은 곧 생각이다.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 마라. 그것이 소리라고조차 말하지 마라. 그것에 이름이나 형상을 부여하지 마라. 그저 있는 그대로 내버려두라. 그것이 흘러가게 하라. 주시자로만 남아라. 구경꾼으로서 말이다. 강물이 어디서 흘러와서 어디로 흘러가는지 알지 못한다. 그저 소리곁에 앉아 있어라. 조만간 그것은 사라질 것이다. 그때 침묵이 있다.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 말고 지켜보는 것 속에서 즐긴다면 그대는 세 번째 층으로 더 깊이 들어갈 것이다.
꽃과 곤충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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