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사상과 철학 224 (교재 공개)
    패러다임/철학 2025. 6. 30. 22:39
    반응형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생각하기 이해하기 실천하기-

     

    사상과 철학 224

     

    영상 강의 링크 : https://youtu.be/R842QnzIsgQ

     

     

    628.

    탄트라 비전 스물다섯 번째 차트 <#존재계로 되돌아오라.> - 3가지 수행법

    철학이 사고작용을 뜻한다면 명상은 생각 없음의 상태를 의미한다. 철학은 어떤 실험도 하지 않고 추상적인 사념 활동만 하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결론에도 이르지 못하는 그저 생각의 유희일 뿐 끝이 없다. 과학은 오직 도구로서 사물과 접촉할 뿐 실험자와는 관계되지 않기 때문에 결과와도 관계없어서 변형되지도 않는다. 그러나 종교는 자신이 실험 도구이자 대상이며 방법이며 모든 것이다. 자신에 대한 실험이기 때문에 실험은 곧 체험이 된다. 그래서 실험을 통과하고 나면 변하여 다른 사람이 된다.

     

    탄트라 비전 스물다섯 번째 차트 <#존재계로 되돌아오라.>

    <수행법 일흔여섯> 76.비오는 캄캄한 밤에, 형상 중의 형상이 되어 저 암흑 속으로 들어가라.

    고대 유대교의 에세네(Essene)파라는 비교秘敎 수행 집단에서 예수는 교사였다. 이 에세네파는 신을 완전한 어둠으로 보는 이 세상에서 단 하나밖에 없었던 명상학파였다. 이방편은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 에세네파의 명상법이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어둠과 하나가 되는 명상법이다. 신을 빛으로 본 것은 신이 정말로 빛이어서가 아니라 어둠을 두려워하는 인간 때문이다. 이것은 순전히 인간의 착상이다. 신의 형상은 우리들에 의해서 주어졌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신의 모습은 우리 자신이 투사한 영상에 불과하다. 신은 우리의 창조물이다. 에세네파는 말한다. ‘신은 어둠이다. 어둠은 영원하다. 빛은 가기도 하고 오기도 하지만 어둠은 언제나 여기에 남아 있다.’ 빛은 떠오르고 나오는 근원이 있다. 빛은 우리를 긴장시키고 혼란시킨다. 이 때문에 밝은 곳에서 잠을 잘 수 없는 것이다. 빛은 태어나기도 하고 죽기도 한다. 그러나 어둠은 지는 일도 떠오르는 일도 없고, 근원도 없다. 그것만이 영원하고 무한할 수 있다. 어둠은 휴식이고 전체적인 이완이고 태어나는 일도 죽는 일도 없이 언제나 그저 여기에 있다. 그것은 죽음 없음이다. 빛을 신이요 생명이고, 어둠은 죽음으로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두려움이 투사한 하나의 영상이다. 엄밀하게 보자면 어둠이야말로 영원이요 무한이다. 빛은 유한하며 순간적이다. 어둠을 사랑할 수 있을 때 어둠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공포가 없을 때만이 어둠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러면 어둠과 하나가 되어 죽지 않는다. 그대는 영원 그 자체가 된다. 이 방편들을 위해서 먼저 어둠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 먼저 어둠 속에 앉아서 불을 끄고 어둠을 느껴라. 어둠과 친해져라. 어둠이 그대를 만지도록 허용하라. 어둠을 직시하고 흡수하라. 온 몸으로 어둠을 빨아들여라. 그렇게 어둠 속에 남아 있어라. 어둠은 가장 근원적인 휴식이다. 어둠의 역사적인 이유는 옛적에 인간에게 있어서 밤은 위험했다. 이 두려움은 우리의 무의식 속에까지 깊이깊이 스며들었다. 그래서 아직도 어둠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그대의 무의식은 자신의 것이 아니다. 무의식은 유전적이며 공유적이다. 집단적인 것이다. 또한 이 두려움 때문에 인간은 불을 숭배하기 시작했다. 불 덕분에 어둠에서 해방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위대한 신이 되었다. 우리의 무의식 속에는 이 어둠에의 공포가 아직도 남아 있다. 불을 끄고 어둠속에 앉아 있어 보라. 태곳적의 그 두려움이 다시 몰려올 것이다. 맹수에게 둘러싸여 있던 그 두려움을 느끼게 될 것이다. 무슨 소리가 들린다. 어둠 속에서 나는 그 소리는 맹수의 소리다. 위험이 다가오고 있다. 그러나 그대를 둘러싸고 있는 그 두려움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무의식으로부터 나오는 두려움이다. 그래서 먼저 무의식 속에 있는 두려움을 정복해야 한다. 그래야만 이 방편을 수련할 수 있다. 어둠의 명상법이기 때문이다. 어둠 속에 있을 기회를 가질 때마다 각성하라. 아무 생각없이 쉽게 불을 켜든지 잠을 자 버릴 수가 있기 때문이다. 불도 켜지 말고 잠들지도 말고 어둠과 함께 남아 있어라. 모든 형태의 두려움을 그대 의식의 세계로 끌어내라. 그것들은 스스로 나올 것이다. 그것들이 나올 때 구경꾼으로 남아 있어라. 그러면 그것들은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어둠과 하나가 된다. 이제 어둠은 아주 편안한 휴식이 될 것이다. 영원한 안식처가 될 것이다. 이 세계의 모든 형상은 어둠 속에서 만들어져 나왔다가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어둠은 자궁이다. 우주의 자궁이다. 거기 그 어느 것에도 흔들리지 않는 절대적인 고요함이 있다. 어둠의 주시자가 되라. 어둠 속에서 자신을 해체시켜 버려라. 이 어둠은 형상 중의 형상이다. 그대는 하나의 형상이었다. 그러므로 그 속에서 용해될 수 있다. 불빛이 있을 때 그대는 정의되고 한정된다. 그대는 하나의 경계선이다. 그것은 불빛 때문이다. 그것은 개성을, 정중함과 무례를, 죄인과 성자를 구분해 준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는 경계선은 사라져 버린다. 한정지어진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어떤 구분도 없이 통째로 받아 들인다. 모든 것은 모든 것 속에 흡수되어 버린다. 형상은 사라져 버린다. 이것이 두려움의 이유 가운데 하나다. 그대가 구분되지 않을 때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게 된다. 한정된 존재로서 느낄 수 없다. 그대의 존재는 희미하게 지워져 버리고 여기 두려움이 들어온다. 그래서 불을 켜고 싶은 것이다.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에고도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 우선 어둠을 주시하라. 빛은 근원이, 대상이, 초점이 있어서 쉽지만 어둠은 대상이 없다. 모든 곳에 있는 이 진공 속을 그저 편안히 주시하라. 어둠은 그대 눈 속으로 들어올 것이다. 그러면 그대는 이 어둠 속으로 들어간다. 수련하는 동안 눈을 뜨고 있어야 한다. 눈을 감게 되면 전혀 다른 어둠을 볼 것이다. 그 어둠은 자신의 어둠이다. 비실재적인 어둠이다. 그것은 부정적인 어둠이다. 어둠 속에서 두 눈을 뜨고 있으면 긍정적인 어둠을 보게 될 것이다. 진짜 어둠이 눈 속으로 들어오게 되면 그대는 그것으로 가득 채워질 것이다. 그러면 그대 안에 있던 부정적인 어둠은 모두 사라져 버린다. 이는 매우 심오한 현상이다. 어둠이 그대 속에 들어올 때 그대도 이 어둠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모든 것은 언제나 상호 수용적이다. 우주가 그대 속에 들어오지 않는 한 그대 역시 우주 속으로 들어갈 수 없다. 그냥 전부를 내맡김으로써, 자신을 완전히 열어젖힘으로써 그것은 가능하다. 그리고 그대 속에 어떤 우주적 영역이 들어올 수 있도록 자리를 내어줄 때, 그때만이 그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대가 할 수 있는 일은 먼저 자신을 여는 길이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 일주일 정도만 이 순수한 어둠을 체험해 보라. 전혀 딴 사람이 되어 돌아올 것이다. 이 절대적인 어둠 속의 일주일 안에 모든 공포가, 원초적인 공포가 드러날 것이다. 그대는 무서운 악마의 얼굴을 보게 될 것이다. 자신의 무의식과 대면할 것이다. 인간의 모든 진화 과정이 거기 있다. 그것은 마치 인간이 지나온 모든 과정을 이 일주일 동안 모두 거치는 것과 같다. 그리고 무의식으로부터 많은 것들이 의식의 표면으로 떠오를 것이다. 그것들은 실재처럼 보일 것이다. 그대는 두려움에 떨게 된다. 그것은 너무나 생생하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모두 그대의 마음이 그려낸 그림일 뿐이다. 정신병원에 있는 정신 이상자들이 고통을 당하는 것은 다름아닌 이 원초적인 두려움 때문이다. 그의 무의식 속에 있던 이 원초적인 두려움이 의식의 표면으로 표출되었기 때문이다. 매일 밤 한 시간 동안 어둠 속에 앉아 있어라. 그것은 3달 동안 어둠과 함께 살아라. 어둠이 되어 어둠 속에 앉아 있어라. 모든 개체성의 느낌을, 자신이 따로 떨어져 존재한다는 느낌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이제 그대는 외떨어진 섬이 아니다. 고도孤島가 아니다. 광활한 바다가 된다. 저 어둠과 하나가 된다. 어둠은 바다와 같다. 그 어떤 것도 그처럼 광활하고 영원하지 않다. 그리고 어둠보다 그대에게 더 가까운 것은 없다. 어둠은 이제 두렵지 않다. 어둠은 언제나 그대 옆에 있으면서 그대를 기다려왔다. 둘째, 어머니 곁에 눕듯이 그렇게 어둠 속에 누워라. 어둠은 어머니다. 자궁이다. 마치 어머니의 자궁 속에 누워 있듯이 어둠 속에 누워라. 어둠은 따뜻해질 것이다. 곧 사방에서 어둠이 그대를 에워싸고 있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 무엇을 하든지 그대 속에 어둠이 고이게 하라. 어둠이 그대를 물들이도록 하라. 그대는 어둠의 운반자다. 어둠을 담고 다녀라. 불꽃을 담고 다니면, 그대가 빛으로 느낀다면 그대의 몸은 이상한 빛을 발산하게 될 것이다. 어둠도 이와 똑같은 현상이 벌어진다. 전신이 어둠으로 가득 차게 되면 그대는 차갑고 조용하고 깊은 이완 상태에 있게 될 것이다. 그때 사람들은 그대를 두려워하며 피할 것이다. 그대에게 어둠의 공포가 있기 때문이다. 즉 그대의 눈은 깊은 골짜기, 심연과 같기 때문이다. 이제 그대는 화를 낸다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불꽃을 담고 다니면 쉽게 화를 낼 수 있다. 불꽃이 그대를 열광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면 더욱 강한 성욕을 갖게 될 것이다. 불꽃이 자극하고 정열적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둠을 담고 다니면 전혀 성욕을 느끼지 않고, 화도 내지 않게 되고, 그대가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느낄 수 없게 되고, 걸음걸이도 느려진다. 그대는 어떤 것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말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대는 그냥 존재할 따름이다. 밤에 어둠에 대해 명상하면 낮에도 어둠과 만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결국 내면은 외부와 만나게 될 것이다. 빛을 운반할 때는 행동이 되지만, 어둠을 운반할 때는 더욱더 휴식하게 된다.

     

    탄트라 비전 스물다섯 번째 차트 <#존재계로 되돌아오라.>

    <수행법 일흔일곱> 77.달도 없이 캄캄한 흐린 밤이 없다면 눈을 감아라. 그리고 그대 앞에 있는 암흑을 발견하라. 눈을 떠라. 암흑을 보라. 그리하면 실수들은 영원히 사라지리라.

    이 암흑이 처음에는 거짓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실재로 만드는 방법이 바로 눈을 떠라, 암흑을 보라이다. 처음에 눈을 감고 암흑을 본다. 그 다음엔 눈을 뜨고 내면에서 보았던 암흑을 외부에서 보라. 만약 그것이 외부에서 사라진다면 그것은 내부에서 본 암흑이 거짓임을 의미한다. 눈을 감고 어둠을 느껴라. 그리고 눈을 떠라. 어둠이 밖으로 나와 있는 것을 보라. 이것은 적어도 3주에서 6주 정도 걸릴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내면의 어둠을 몰아낼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는 날 그대는 내면의 진짜 어둠에 이를 것이다. 이제 진짜만 담고 다닐 수 있게 되었다. 만약 내면의 어둠을 바깥으로 내뿜을 수 있다면, 불이 켜진 방 안이나, 태양 아래서나, 밝은 대낮에도 어둠을 펼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에 의해 보호받게 된다. 어떤 흥분이나 열정도 그대를 동요시킬 수 없을 것이다. 이를 실행하는 세 단계가 있다. 첫째로 눈을 뜨고 어둠을 주시하라. 그리하여 어둠이 그대 속으로 들어오게 하라. 둘째로 어둠을 그대를 포근하게 감싼 어머니의 자궁처럼 느껴라. 그것과 함께 살아라. 자신을 잊어버리고 그 속으로 더욱 몰입하라. 셋째로 그대가 어디로 가든지 어둠을 갖고 다녀라. 그러면 그대는 어둠을 통해서 깨닫게 될 것이다. 어둠을 내부에서 느껴라. 그리고 눈을 떠서 그것을 외부에서도 느껴라. 즉 내면의 어둠을 외부로 끄집어 낼 수 있다면 그때 모든 오류가 영원히 사라질 것이다. 그대는 언제나 고요하고 냉정하며 흥분하지 않기 때문에 실수가 남아 있을 수가 없다. 실수는 흥분할 때만 일어난다. 그대를 칭찬해도 마찬가지다. 그대는 다시 다른 극쪽으로 미치게 된다. 그대가 욕망이나, 열정, 성욕으로 가득 차 있음을 느낄 때 내면의 어둠을 그저 상기하라. 그 순간 열정은 사라진다. 내면의 어둠이 그것을 흡수해 버린다. 그대는 무한한 진공이되어 그 어떤 것도 한 번 거기에 떨어지면 다시는 되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이제 하나의 심연이 되었다.

     

    탄트라 비전 스물다섯 번째 차트 <#존재계로 되돌아오라.>

    <수행법 일흔여덟> 78.그대의 주시력이 빛날 때마다 바로 이 시점에서, 체험하라.

    주시력을 발전시켜야만 이 방편은 이루어질 수 있다. 주시력이 빛나는 곳에서 체험이 가능해진다. 꽃을 바라볼 때 자신이 꽃을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꽃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했을 뿐 꽃 자체는 빠져 있다. 그대는 거기에 없고 엉뚱한 곳에 가 있다. 그래서 주시력이 빛난다는 말은 꽃을 바라볼 때 바라보는 그 자체에 열중해 있음을 의미한다. 그 순간에 거기에 있는 것이다. 마치 마음이 정지해 버린 것처럼 어떤 사고작용도 없다. 그대와 꽃 사이에 어떤 사념도 없다. 거기엔 오직 꽃에 대한 체험만이 있다. 이것이 가능하다면 갑자기 꽃으로부터 그대의 주시력이 옮겨져서 자신에게로 향하게 된다. 그것은 하나의 원이 된다. 꽃을 바라볼 때 거기에 반조返照가 일어난다. 그때 그대는 꽃을 바라볼 뿐만 아니라 동시에 바라보는 자신을 주시하게 된다. 그때 주시자와 꽃은 두 가지 대상이 된다. 그대는 그 둘 모두를 주시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선은 주시력을 훈련시켜야 한다. 그대의 주시력은 이것에서 저것으로 옮겨다니는 산만한 호기심의 시선일 뿐이다. 주시력은 침묵 속에 깨어 있음을 뜻한다. 거기에는 어떤 사념의 간섭도 없다. 오직 주시함으로써만 주시력을 키울 수 있다. 다른 길은 없다. 더 많이 주시하라. 그러면 주시력은 더 커진다. 보는 것 자체가 되라. 사고를 멈추고 보라. 바라보는 모든 곳에서부터 반조가 일어나 주시자 자신을 자각하게 될 것이다. 따로 시간을 내어 수련할 필요가 없다. 무엇을 하든지 단지 주시하라. 그러나 마음이 개입되어 계산하면 안 된다. 자신이 끼어들지 마라. 그대는 단지 거기에 존재할 뿐 간섭하지 마라. 그러면 주시력을 얻게 될 것이다. 체험자를 체험할 것이다. 모든 곳으로부터 그대는 자신이 반조되어 되돌아 올 것이다. 존재계 전체가 그대를 비출 것이다. 오직 그때만이 자신을 알 수 있다. 그대 속에 신성이 거주하는 모습으로 말이다. 보통의 거울만으로는 그대를 다 비춰낼 수 없을 만큼 그대는 무한하고 광대한 존재다. 그리고 이 방편은 존재계를 그대의 거울로 만드는 것이다. 주시력을 만들면 주시하는 모든 대상을 통해서 자신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꽃을 바라볼 때 거기에 일정한 에너지가 방사된다. 주시는 에너지다. 에너지를 던지는 것이고, 생명력을 쏟아붓는 것이다. 바라보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면 에너지를 낭비하는 것이다. 길거리를 하루종일 내다보고 있으면 피곤함을 느끼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대가 바라볼 때 어느 정도의 에너지를 던지고 있는 것이다. 그저 침묵으로 바라보라.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 말고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라. 고요해져라. 그 에너지는 되돌아 올 것이다. 그러면 지치지 않게 되고, 그대는 다시 충전될 수 있다. 사념이 없을 때 에너지는 되돌아 온다. 이 에너지를 재흡수한다면 이것은 재 충전이 된다. 주시의 방편은 대상하고는 별로 관계가 없다. 어떤 대상이건 상관없다. 그것은 주시하는 행위 그 자체에 대한 것이다. 눈을 깜빡이지 않고 주시할 때 집중하게 되기 때문이다. 마음의 본성은 끊임없이 이 대상에서 다른 대상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만약 어떤 움직임도 없이 제대로 주시하게 되면 마음은 곤란해진다. 계속 주시하는 것을 수련하면 마음은 점점 힘을 잃게 될 것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것은 멈추고 만다. 그때 거기엔 마음이 없다. 사념도 없다. 생각할 수도 없다. 그러면 깨어있게 된다. 주시는 눈뿐만 아니라 전체적인 마음이 눈을 통해 집중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저 바라보기만 할 뿐 어떤 행위도 하지 마라. 그 깊은 주시는 그대를 완전히 변형시킬 것이다. 그것은 명상이 될 것이다. 그러나 눈과 의식은 그 바라봄 속에서 만나야 한다. 진짜로 눈을 통해서 보고 있어야 한다. 거기에서 빠져나와 버리면 안 된다. 그대의 현존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때 무의식에 떨어져 잠이 들 위험성이 있다. 움직이지 않는데서 오는 잠이다. 즉 자기 최면에 빠질 것이다. 그리고 눈은 고정되어 있지만 그대가 현존하지 않을 때 마음은 움직일 것이다. 이 두가지를 극복한다면 명상의 상태가 될 것이다 그것은 마음이 깊은 잠속에 있는 것처럼 고요해지면서 동시에 생각할 때처럼 깨어 있다는 점이다. 침묵과 깨어 있음. 이 두 가지가 함께 존재해야 한다. 완전히 각성한 상태에서 깨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침묵해야 한다. 명상은 일종의 깊은 잠이다. 잠에 떨어지지 말고 깨어 있어야 한다. 잠을 잔다면 심연 속으로, 수렁 속으로 떨어진다. 그래서 명상 속에 있는 것은 끊임없는 사념과 잠 사이에 연결된 좁다란 다리 위에 서 있는 것과 같다.

     

    꽃과 곤충 풍경 3



    반응형

    댓글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