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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사상과 철학 203 (교재 공개)
    패러다임/철학 2025. 2. 6. 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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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생각하기 이해하기 실천하기-

     

    사상과 철학 203

     

    영상 강의 링크 : https://youtu.be/TbAEuxMRcNY

     

     

    607.

    탄트라 비전 여섯 번째 차트 <#중심에 이르게 하는 방편들 3.>

    -(4가지 중 3번째), 4가지 수행방법이 있다.

    인간의 육체는 두 가지 차원으로 기능한다. 하나는 외부로 나가는 것인데 그때 그대의 의식은 감각을 통해 세상과 만난다. 물질과 만나는 것이다. 또 다른 차원은 그대의 내면이다. 의식이 내면으로 들어오면 그때 그대가 아는 것은 무엇이든지 비물질이다. 실제로 거기에 어떤 구분도 없다. 물질과 비물질은 하나다.(둘을 동시에 볼 수는 없다. 그래서 하나의 차원을 보면 다른 차원은 자동으로 환영 즉 마야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실체라는 X가 눈이나 감각을 통해 볼 때는 물질로 보인다. 그리고 똑같이 이 X가 감각이 아닌 중심을 통해서 보면 비물질로 보인다. 실체는 하나인데 그것을 보는 방식이 두 가지이다. 여기에 나오는 방편들은 감각이 작동하지 않는 점, 감각을 초월한 점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그대가 눈을 통해서 사물을 볼 때 그것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눈은 단지 창문과 같은 것이다. 보는 주체는 눈 뒤에 있다. 꿈을 꿀 때 그대는 눈을 감고 있어도 영상이 보인다. 보는 자는 감각 뒤에 있다. 그 주체는 감각을 통해서만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러나 그대의 감각을 닫아 버리면 그때 보는 자는 내면에 남게 된다. 만약 보는 자, 보는 의식이 중심에 이르게 되면 갑자기 그 주체는 자신을 자각하게 된다. 그대가 그대 자신을 깨달았을 때, 다시 말해서 존재계 전체를 깨달았을 때 그대는 존재계와 둘이 아니다. 그러나 이렇게 되기까지는 먼저 중심에 이르는 것이 필요하다. 그대의 의식이 여러 갈래로 나뉘어지지 않는 상태에 이르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어느 곳으로도 움직이지 않고 그 자체 속에 머무르는 것 말이다. 그것은 매우 어려워 보인다. 우리의 마음이 어떻게 내면에 머무를까 하고 생각하는 것조차 결국 바깥으로 나가려는 하나의 행위가 되기 때문이다. ‘어떻게라고 생각하기 시작할 때 그것은 우리에게 또 하나의 생각이 된다. 그리고 생각이라고 하는 것은 모두가 외부적인 것이다. 생각은 구름과 같다. 그것들은 그대에게 다가오지만 결코 그대의 것이 아니다. 모든 생각은 외부로부터 나온다. 한 가지 생각도 내면에서 생겨나는 것은 없다. 그래서 그대가 언제 무슨 생각을 하든지 그것은 외부에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대가 내면에 대해서 생각하더라도, 그대의 영혼이나 자아에 대한 것이라도 그것은 그대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대에게 속한 것은, 다시 말해 그대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의식뿐이다. 그것은 구름 한점 없는 맑은 하늘과 같다. 이 단순한 의식을 내면에서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직접적인 방법이 없기 때문에 몇 가지 방편들이 필요하다. 그 방편들은 그대를 그대의 중심에 이르게 하는 데 필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대는 직접적으로 그 중심에 다가갈 수 없기 때문이다. 직접 다가가려고 하는 순간 그대는 외부로 나가게 되기 때문이다. 행복감은 하나의 부산물이다. 결과는 항상 간접적으로 나타난다. 그러니 결과에 집착하지 말고 그대의 전관심을 방편에다 쏟아 부어라.

     

    탄트라 비전 여섯 번째 차트 <#중심에 이르게 하는 방편들 3.>

    <수행법 열여덟> 18.어떤 대상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라. 다른 대상으로 옮겨가지 말라. 여기 대상의 가운데 축복이 있다.

    생각하고 이용하고 계산하고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탐욕이다. 왜 그것을 바라보는가?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가? 탐욕은 뭔가를 얻는데 있고 사랑은 뭔가를 주는데 있다. 사랑은 그대의 행복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사랑은 타인이 중요하지만 탐욕은 그대가 중요하다. 그대가 어떤 사물을 사랑스럽게 바라본다면 그 대상은 하나의 인격을 띠게 되고 하나의 인간이 될 것이다. 또한 그대가 한 인간을 탐욕의 눈으로 바라보면 그 사람은 사물이 된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비인간적인 행위 중의 하나이다. 그대가 사랑으로 바라볼 때 그 다음으로 그대가 할 일은 그대 자신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기도할 때 자신을 위해서 하지 말고 항상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라. 그리고 기도의 결과가 무엇이든지 모든 사람에게 득이 되도록 기도하고 축복이 내릴 때는 모두에게 골고루 내리도록 해달라고 기도하라. 또한 기도의 결과도 바라지 말라. 그러니 모든 것을 나누어 주어라. 그때 모든 것이 그대의 것이 되리라. 사랑 속에서 그대는 자신을 잊을 수 있다. 그대는 어떤 역경과 어려움도 사랑 속에 있을 때는 쉽게 견딜 수 있다. 관심의 초점이 그대 자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에는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중심 속에 들어가게 된다. 그런데 갑자기 그대는 축복으로 가득 차게 된다. 지복감으로 말이다. 왜인가? 그대는 자신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에 그대의 마음은 텅 비워진다. 내면에 공간이 마련된다. 그대의 마음이 전적으로 타인의 행복에만 쏠려 있을 때 그대는 무심의 상태가 된다. 그때는 모든 생각이 멈춘다. 그리하여 상대방을 어떻게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 까 하는 생각마저도 사라지게 된다. 그 순간 그대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때 그대가 여전히 뭔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대는 아직도 에고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만약 그대가 이것저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아직 완전히 사랑에 빠지지 않은 것이다. 사랑은 무력감 그 자체이다. 그리고 그 무력감은 아름답다. 완전한 무력감 속에서 진정한 헌신과 자기 체념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그대가 누군가를 증오할 때 그대는 뭔가를 할 수 있다. 그러나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대는 절대적인 무력감에 빠진다. 그대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무의미하고 우스운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사랑을 심오한 명상이라고 부른다. 사랑하는 사람이 소유되는 순간 사랑은 사라져 버린다. 그때 사람은 하나의 물건이 된다. 그러면 그 역시 그대를 물건으로 대한다. 축복은 그대가 사라질 때, 사랑하는 사람 속으로 그대가 녹아들 때 일어나는 것이다. 그것은 대상이 꼭 사람이 아니라도 가능한 것이다.

     

    탄트라 비전 여섯 번째 차트 <#중심에 이르게 하는 방편들 3.>

    <수행법 열아홉> 19.손이나 발로 지탱하지 않고 엉덩이로만 앉아 있어 보라. 갑자기 그대는 중심에 이르게 될 것이다.

    우선 무딘 엉덩이를 예민하게 만들어라. 3주 동안 모든 의식을 오직 엉덩이에만 집중하라. 그러면 그대는 엉덩이만을 느낀다. 즉 예민해지는 것이다. 그때 그대의 의식은 엉덩이와 하나가 된다. 앉으나 서나 무슨 일을 하건 엉덩이만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엉덩이의 균형이 완전히 갖추어지면 그 순간 그대는 갑자기 중심에 이르게 된다. 그 균형 때문에 갑자기 그대는 단전의 중심으로 내던져진 것이다. 그때 그대는 엉덩이 뿐만 아니라 그대 몸 전체를 잊어버릴 것이다. 그대는 내면의 중심으로 던져지게 될 것이다.

     

    탄트라 비전 여섯 번째 차트 <#중심에 이르게 하는 방편들 3.>

    <수행법 스물> 20.흔들리는 수레 속에서 율동적으로 흔들려라. 수레가 멈추어도 그대는 자신을 보이지 않는 진동 속에 계속 머물게 하라.

    흔들림에 저항하지 말고 리듬을 만들어라. 다 잊고 눈을 감고 춤을 추듯 조화롭게 회전을 만들고 그 속에서 자유롭게 회전하도록 그대를 방치하라. 원을 그려라.

     

    탄트라 비전 여섯 번째 차트 <#중심에 이르게 하는 방편들 3.>

    <수행법 스물 하나> 21.감로수로 가득 찬 그대 육체의 한 부분을 침으로 천천히 찔러보라. 그리고 찌르는 행위 속으로 깊이 들어가라. 갑자기 그대는 내면의 순수를 얻게 될 것이다.

    만약 그대가 육체만이 찔릴 뿐이라는 사실을 인식한다면 그대는 고통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고통 대신에 축복을 느낄 것이다. 굳이 바늘로 찔러야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일은 매일 일어나고 있다. 그대는 그것을 하나의 명상으로 만들 수 있다. 어떤 고통이 그대의 몸 속에서 일어난다. 그때 그대가 할 일은 딱 한 가지 뿐이다. 그것은 육체 전체를 잊어버리고 고통을 느끼는 부분에만 집중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 만약 그대가 다리가 아프다고 느끼면 다리에 집중하라. 그러면 다리 전체가 아픈 것이 아니라 무릎이 아픈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면 또 그 무릎에 집중하라. 그러면 무릎 전체가 아픈 것이 아니라 어느 한 점이 아픈 것이다. 그런 식으로 점점 범위를 좁혀 들어가라. 갑자기 그 한 점은 사라지고 만다. 그리고 그대는 축복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그 이유는 그대와 그대의 육체가 별개의 것이기 때문이다. 아픈 것이 그대가 아니라 집중하는 것이 그대이다. 아픈 것은 육체라고 하는 하나의 사물이다. 그대가 고통에 집중할 때 그대와 육체 사이의 간격은 점점 넓어진다. 그대와 육체 사이에 이어졌던 동일시의 끈이 끊어졌다. 그대가 내면으로 집중해 들어가는 동안 그대의 육체와는 점점 멀어진다. 그 움직임이 하나의 간격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리고 그대가 고통에 집중할 때 그대는 자신이 고통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이제 그대는 관찰자가 되었다. 그리고 고통은 그대와 아무 상관없는 것이 되었다. 그대는 고통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육체가 고통스러워 하는 것을 관찰하고 있다. 이런 변화가 간격을 만들어 낸다. 그 간격이 커질 때 그대는 갑자기 육체를 완전히 잊어버린다. 그대는 오직 의식만을 인식하고 있다. 침이 그대의 피부 속으로 들어갈 때 주의력을 집중하라. 고통이 일어나기 시작하는 순간 그 고통을 느껴라. 그리고 그 고통 속으로 들어가 보라. 고통이 그대 속으로 들어간다고 생각하지 말라. 고통과 그대를 동일시하지 말라. 침과 함께 몸 속으로 들어가라. 눈을 감아라. 고통을 관찰하라. 고통이 그대 속에 들어올 때 그대 역시 그대 속으로 들어온다. 침 끝이 그대를 찌를 때 그대의 마음은 쉽게 집중된다. 강렬한 고통을 이용하라. 그것을 지켜보라. 그것이 바로 찌르는 행위 속으로 들어가라는 말의 뜻이다. 만약 그대가 관찰할 수 있게 되어 고통이 그대를 찌르는 것이 아니라 단지 침 끝이 그대를 찌르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면 그대는 곧 내면의 순수를 얻게 될 것이다. 내면의 순수는 그대 앞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처음으로 그대는 자신이 육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한번 그대가 그런 경험을 하면 그대의 삶은 완전히 변한다. 그대가 육체가 아닐 때 그대는 새로운 삶을 만들어 낸다. 그런 삶이 바로 산야신, 구도자의 삶이다. 이제 그대는 하나의 영혼으로서, 아트만으로서 존재한다. 만약 그대가 육체로 존재한다면 그때 그대는 물질과 탐욕, 성적 욕망에 매인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그것은 육체에 집중된 삶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대가 비밀을 안 이상 그런 삶을 계속 꾸려갈 수 없다. 완전히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그것은 의식에 집중된 삶이다. 아름다움과 선함과 자비가 넘치는 삶이 될 것이다. 그 중심은 육체가 아니라 의식인 것이다. 중심에 이르는 것은 하나의 길이지 목적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방편이지 결과가 아니다. 사람이 신성에 이를 때 그 상태가 두 가지 방식으로 표현된다. 하나는 모든 곳이 중심이며 다른 한 가지는 아무데도 중심이 없는 것이다. 이것은 둘 다 같은 뜻이다. 단지 중심에 이른다는 말이 모순처럼 들린다. 수단은 얼마든지 모순적으로 보일 수 있다.

     

    산골 겨울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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