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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사상과 철학 283 (교재 공개)
    패러다임/철학 2026. 9. 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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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생각하기 이해하기 실천하기-

     

    사상과 철학 283

     

    영상 강의 링크 : https://youtu.be/a3O5s-vY6YY

     

     

    687.

    행위를 강제로 중지하지 말라. 강요하지 말고 자연적으로 사라지도록 행위를 주시하라. 깨어 있으라. 집중하라. 휴식이란 죽은 사람처럼 누워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행동한 것에 대해 어떤 죄책감도 갖지 말라. 그대 자신 속에서 휴식하라. 침묵 속에서 마음을 비우고 無만을 생각하라. 휴식이란 기대나 욕구보다도 충만함을 의미한다. 존재 전체인 것이다. 욕구를 버리고 지금 이 순간을 즐겨라. 평범함 속에서 즐겨라. 평범한 것은 모두 아름답다. 그러나 평범한 것이란 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神이 존재하는 한 모든 것은 비범하다. 그 어느 곳에도 목적지는 없다. 그대 자신이 생의 전목적인 것이다. 생의 축제자가 되라. 사실 지금 이 순간보다 더 충만된 것은 없다. 들에 핀 꽃을 보라. 그대 자신이 목적일 때 목적은 미래에 있지 않다. 더 이상 성취할 것이 없을 때 거기 축복만이 있을 뿐이다. 그대는 이미 목적을 성취했다. 그대 자신이 생의 전목적이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휴식이다. 동기가 없는 에너지이다. 갈 곳은 지금, 그리고 여기뿐 여기만이 목적이요, 생의 전부이다. 협조와 거부, 이것은 사념의 동조요 반대다. 이 양자는 모두 행위일 뿐이다. 침묵하려고 애쓰지 말고 입을 다물고 내면을 주시하라. 밤의 어둠과 같이 그대 위에 조용히 침묵이 내려 올 것이다. 침묵할 수 있는 상태만을 만들어라. 그리고 기다려라. 마음을 비우기 위해서는 흘러가는 사념을 그냥 수동적으로 응시하라. 보기만 하라. 정처없이 흘러가도록! 이 수동적인 태도는 자연적으로 그대의 마음을 비게할 것이다. 그것은 텅 빈 대나무처럼 되는 것이다. 어떠한 것도, 특별히 기다리지 않을 때, 자신이 빈 대나무처럼 느껴질 것이다. 그때 무한한 에너지가 그대 안에서 솟아날 것이다. 미지의 영감에 가득찰 것이고, 신비로, 신성으로 가득 찰 것이다. 영적인 바램도, 천국에의 바램도, 신성에의 바램도 버려라. 신은 소망할 수 없는 것이다. 바램이 완전히 소멸되어 버릴 때 신은 그대에게 온다. 바램이란 바란다는 그 자체가 이미 하나의 속박이다. 모든 바램이 끝났을 때 그대는 자유로워진다. 그대는 이미 붓다의 씨를 가지도 있다. 그대가 비어 있을 때 무한의 공간이 거기 있다. 씨는 그 무한의 공간에서 활짝 꽃피어날 것이다. 그대가 찾고 있는 것은 이미 그대 속에 있다. 그대가 이미 그것인데 무엇 때문에 그것을 찾고자 기를 쓰는가? 도대체 무엇을 성공한단 말인가? 그대의 성공은 이미 그대 속에 있다. 태어날 때부터 이미 그대 자신이 그것인데 무엇 때문에 그것을 찾겠다고 발버둥치는가? 초롱히 잠깨어서 사념이 흘러가는 것을 바라보는 자가 되어라. 어떤 것도 바라지 말고 그대 자신 속에서 그대 자신과 행복해져라. 자신과 축제를 벌여라. 부정적인 태도는 그대와 남과의 경계선을 만들고, 그 순간 존재의 문은 닫힌다. 진짜 무신론자는 삶을 부정하는 자다. 그의 태도는 상징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신 이외의 세속적인 모든 것을 부정한다면 그대의 믿음은 값어치가 없다. 그대가 믿는 신은 속임수일 뿐이다. 모든 것을 긍정할 때만이 진정으로 신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신은 그대 앞에 현현하기 때문이다. 존재의 모든 것을 긍정할 때 존재의 문은 열리고, 뭇 존재는 변형된다. 여기 나무, 바위, 사람, 강 ,산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하나가 된다. 이 하나가 바로 神인 것이다. 진정한 유신론자는 신의 존재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긍정하는 자다. 그렇지 않으면, 신만을 믿고 이 세상을 거부한다면, 구분을 만드는 것이다. 창조되어진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어떻게 창조주를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창조되어진 것과 창조주, 이 둘은 하나다. 그러므로 창조주는 곧 창조되어진 것이다. 사실 창조되어진 것과 창조주 사이에는 아무런 구분이 없다. 그것은 창조의 연속적인 과정일 뿐이다. 이쪽에서 보면 창조되어진 것이 창조주처럼 보이고 또 다른 쪽에서 보면 창조주가 창조되어진 것처럼 보일 뿐이다. 그들은 같은 현상의 양극이다. 탄트라는 말한다. 긍정하려면 그저 긍정만 하라. 무엇인가를 대신 부정하려는 태도는 필요치 않다. 그러나 모든 종교가들은 이 과오를 범하고 있다. 그들은 말한다. ‘이 세상은 필요없다. 신만이 있을 뿐이다’, ‘신이여, 우리는 당신을 믿는다. 그러나 당신이 만든 이 세계는 받아들일 수 없다’ 그들은 강제적으로 이 세상을 부정한다. 그럼으로써 신을 향한 그들의 믿음이 보다 강화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러한 태도가 존재를 둘로 갈라 버린다. 그리하여 그대 자신을 신 위에 놓는다. 그리고 말한다. ‘이것은 받아들여라. 그러나 저것은 거부하라’ 부정적인 사람은 종교가도 구도자도 아니다. 그들은 이기주의자다. 그는 이 세계를 우선 뒤로 젖혀놓는다. 그러나 그의 관심은 이 세계에 있다. 에고에는 그 자신을 만족시키는 교묘한 길이 있어서 몇 번이고 나선형의 상태로 되돌아온다. 새로운 얼굴, 그리고 새로운 색깔로 변장하여 다시 오는 것이다. 부정할수록 세속적인 인간이 된다. 수도사들은 이 세상을 부정함으로써 신에게 가까워진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관심은 온통 세상적인 것에 있다. 이기주의에 있다. 그 누구도 이 세상을 부정함으로써 신성에 도달한 자는 없다. 긍정하는 것이 에너지의 흐름과 함께 가는 것, 이 흐름 위에 떠 있는 것, 이 흐름 위에서 휴식하는 것, 이것이 탄트라이다. 긍정적인 태도를 갖는다면 그대의 내부에 깊은 수용受容의 마음이 일어날 것이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있어야 할 필연적인 이유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희망이 없다고 느낄때만 상황을 받아들인다. 이 수용력은 무기력한 수용력이다. 하나의 체념이다. 반면에 탄트라의 수용력은 넘치는 충만으로부터 온다. 좌절이나 실패로부터가 아니라 깊은 만족감으로부터 온다. 긍정적인 입장을 취할 때 수용력은 그대 속에서 용솟음친다. 그대의 존재 전체는 깊은 만족감에 젖는다. 그것은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갖으며, 강제적이지 않으며, 수련해서 얻어지는 것도 아니다. 수련한다면 어리석은 짓이다. 위선일 뿐이다. 그러면 그대는 두 개로 분열될 것이다. 겉으로는 받아들이지만 내면에서는 거절할 것이다. 손짓 하나 발짓 하나까지가 실은 깊은 무의식 속에서 검열을 거쳐 나오고 있다. 그러면서도 표면적으로는 모든 것을 긍정하는 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탄트라의 삶은 이 전체를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 외 모든 종교는 분열된 인격을 만들어왔다. 그리하여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만들었다. 신과 악마를 만들었다. 그들은 그대의 내부에 분열의식을 만들었다. 하나의 싸움을 일으켰다. 이때부터 죄의식을 느낀다. 구조적으로 그대와 하나인 그 부분(소위 악마적인 부분)을 도대체 어떻게 파괴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들은 그대가 만들어 낸 것들이 아니다. 다만 원래부터 존재의 한 부분으로 있던 것이 지금 발견되었을 뿐이다. 거기 분노가, 性이, 탐욕이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삶의, 존재의 한 부분이다. 눈, 손, 발이 그대의 한 부분이듯이, 그대는 그것들을 추하다거나 아름답다거나 그대 좋을대로 부를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것들을 부숴 버릴 수 없다는 사실이다. 존재의 그 어떤 부분도 말살시키거나 파괴할 수는 없다. 탄트라는 말한다. 변형하라. 그러나 부수지는 말라. 변형은 존재 그대로를 받아들일 때만 가능하다. 이때 모든 것은 제자리로 되돌아간다. 분노는 존재 속으로 흡수되어 버린다. 탐욕은 제자리로 되돌아간다. 존재 속의 어떠한 부분도 제거하지 않을 때 존재는 그 자체 속에서 재정리되는 것이다. 모든 것을 받아들일 때, 긍정적인 자세를 가질 때, 재정리의 현상은 일어난다. 내면에서 와글거리던 소음은 이제 음악이 된다. 리듬이 태어난다. 소음에 중심점을 부여한다면 음악이 된다. 모든 소음은 이 중심점으로 모여든다. 모든 것은 각자의 기능을 되찾게 된다. 미친 사람이 피아노를 연주할 때, 악보의 한 음 한 음은 연결이 없다. 독자적이다. 이것이 소음이다. 멜로디가 아니다. 그러나 음악가가 같은 손으로 같은 피아노를 칠 경우 거기 연금술적인 변화가 온다. 같은 악보가 일정한 연주 양식 속으로 들어온다. 음과 음은 그들 각자의 기능을 다 발휘함과 동시에 상호 조화를 이룬다. 여기 중심점이 생긴다. 이제 음들은 소음이 아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용기는 삶이 그대에게 주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깊은 겸손 속에서 신의 선물로서 모든 것을 받아들여라. 초월은 경험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 한밤중에 새벽을 느낄 수 있을 때, 거기 신비로움은 있다. 깨달음은 가까웠다.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높은 곳을 볼 수 있을 때, 지옥에서조차 천국을 볼 수 있을 때, 그때 그대는 생의 예술가가 될 것이다. 삶, 이 전체를 무조건 받아들여라. 그럴수록 헛된 욕구가 사라져 감을 느낄 것이다. 어떤 경우건 그것은 지금 이 순간 속에 있다. 이 순간을 받아들여라. 거기 일상적인 어떠한 행위도 있을 수 없다. 그대는 깊은 수용 속에서 순간순간을 산다. 가야 할 어떤 목적도 없이, 어떠한 욕구도 없이 삶, 이 전체로 여기 존재하는 것이다. 그대 자신이 되어라. 그대는 언제나 도달할 수 있는 그대 자신, 수용한다는 욕구조차 사라져 버린 그대 자신이 되어라. 그때 진짜 수용은 욕구가 없는 존재 그 자체 속으로 스며들어 온다. 그러나 이 수용을 억지로 수련하지는 말라. 강요하지도 말라. 그대는 자신의 욕구를 제거해 버릴 수 없다. 그 욕구들을 받아들임으로써 그것들은 사라진다. 경전의 독송과 계율이 엄수, 학교의 교육과 성전의 가르침을 통해서는 결코 본연의 진리를 깨달을 수 없다. 만트라의 암송, 정신분석학, 종교, 도덕, 기도 등 이런 것들은 모두 그대를 그들에게 순응하도록 가르쳐 왔다. 진정한 종교란 그대 자신이 변형을 위한 여행을 시작할 때만이 가능하다. 허위와 가식으로 가득찬 인간사회에 적응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 법계의 하모니 속으로 들어가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한 종교요 구도의 길이다. 인간사회에 적응하려 하면 그대는 타락해 버린다. 욕구와 야심을 성취하기 위한 생각이 끊없이 이어져 휴식할 수 없기 때문에 잠들 수 없는 것이다. 잠잘 수 없다는 것은 그대의 삶 속에 무엇인가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징조이다. 그 징조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초월하라. 그러면 깊이 잠들 수 있다. 이 수면을 통해서 전혀 다른 자각이 존재 속으로 들어온다. 동시에 그대의 의식은 별처럼 초롱하게 깨어 있을 것이다. 남을 위해 봉사한다는 것은 습관적으로 직업화될 뿐이다. 의무적으로 자신의 내적 존재가 완성되지 않았는데,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을 위해서 봉사할 수 있는가? 무엇보다 먼저 그대 자신이 행복해져라. 그러면 그대가 남을 행복하게 해 주고자하는 것은 의무를 넘어설 것이다. 직업화되지 않을 것이다. 남을 돕기 위하여 찾아 다니지 말라. 그들을 그들 자신이 되도록 놔 두어라. 그들을 방해하지 않는 것만으로 그대의 연민심은 충분하다. 그들을 변절시키려고 하지 말라. 오직 깨달은 사람만이 남을 도울 수 있다. 그 도움은 직접적이지 않고 저절로 넘쳐흐른다. 그것은 꽃의 만개滿開와도 같다. 꽃 향기가 바람을 타고 온 누리에 퍼져 나가는 것이다. 완전히 간접적일 수 있는 사람만이 모든 사람을 도울 수 있다. 직접적인 도움은 정치가로부터 온다. 그러나 간접적인 도움은 현자로부터, 깨달은 사람으로부터 온다.

     

    자연풍경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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