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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사상과 철학 217 (교재 공개)패러다임/철학 2025. 5. 13. 21:30반응형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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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과 철학 217
영상 강의 링크 : https://youtu.be/fNkjgcU4RCc
621.
탄트라 비전 열여덟 번째 차트 <#삶을 흐르는 물처럼 지켜보는 기법>
-4가지 수행법이 있다.
먼지는 순수함을 파괴할 수 없다. 단지 순수함이 가려질 뿐이다. 그 먼지 뒤에 본래의 마음이 순수한 상태로 남아 있다. 우리의 마음은 본래의 마음에 먼지를 더한 것이다. 그 먼지를 제거할 수 있는 법을 알게 된다면 가치 있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인간은 죄악이 없다. 단지 거짓된 동일시만 있을 뿐이다. 우리는 마음과 자신을 동일시해 왔다. 아니 그 마음에 묻은 먼지와 말이다. 우리의 경험, 지식, 과거, 기억들이 모두 먼지인 것이다. 본래의 마음을 회복한다는 것은 곧 순수함을 다시 회복한다는 말이다. 그대가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언제나 과거다. 그래서 그대의 모든 지식은 먼지일 뿐이다. 아는 능력, 아는 에너지, 앎 이것은 순수한 본성이다. 그 본성을 통해 지식을 모았고, 그 지식은 이제 먼지와 같다. 그래서 모든 명상법들은 기본적으로 그대 자신을 과거와 분리시키는 방법이다. 과거는 언제나 미래로 투사된다. 이 두 가지 존재하지 않는 것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 있다. 그것이 현재다.
탄트라 비전 열여덟 번째 차트 <#삶을 흐르는 물처럼 지켜보는 기법>
<수행법 쉰일곱> 57.거대한 욕망의 파도 속에서도, 그대여 흔들리지 마라.
분노할 때 분노와 하나가 되지 말고 그 상황을 볼 수 있다면 즉 구경꾼이 된다면 더 이상 동요되거나 흔들리지 않게 된다. 이 흔들리지 않는 점이 바로 그대 본래의 마음이다. 만약 그대가 대상(분노, 욕망, 성욕)을 향해 간다면 먼지 부분은 흔들릴 것이다. 그러나 존재의 중심으로(구경꾼) 들어간다면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태풍의 눈을 상기하라. 분노, 욕망, 성욕의 중심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태풍의 눈이 없는 태풍은 없다. 분노 역시 그 분노를 초월한 내면의 어떤 것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그 어떤 것도 반대극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반대극은 항상 필요하다. 내면에 움직이지 않은 채로 존재하는 중심이 없다면 거기엔 어떤 움직임도 가능하지 않다. 그대 속에 흔들리지 않는 중심이 없다면 흔들림조차 가능하지 않다. 이를 분석하고 관찰하라.그대 속에 절대적인 평정의 중심이 없다면 어떻게 그대가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겠는가? 거기에는 비교할 수 있는 두 지점이 필요하다. 병들었다면 절대적으로 건강한 중심이 있기에 병들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처럼 머리가 아플 때에도 그 아픔을 느끼는 관찰자가 있다. 그때만이 ‘내 머리가 아프다’라고 말할 수 있다. 아픔은 아프지 않은 부분에 의해서 감지된다. 만약 병들었다면 열이 날 것이다. 하지만 그때 그대는 열 자체가 아니기 때문에 열이 난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열은 열 자신을 느낄 수 없다. 그것을 초월해 있는 그 누군가가 필요하다. 그래서 반대극이 필요한 것이다. 이 방편은 분노가 일어날 때 분노를 억누르라는 뜻이 아니다. 분노를 억누른다면 다른 부분에서 평정을 잃을 것이다. 그것은 두배로 혼란스러운 상태다. 분노가 생길 때 그대의 문을 닫아라. 그리고 분노에 대해서 명상하라. 분노를 허락하라. 표출이나 억압은 둘 다 쉽게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지켜보는 것은 어렵다. 지켜보는 것은 억압하는 것도 아니며 표출하는 것도 아니다. 엄밀하게 말해서 그것에 대해서 명상하는 것이다. 그래서 탄트라는 욕망에 반대하지 않는다. 오히려 욕망 속에 있으라고 말한다. 그러나 거기에 흔들리지 않는 중심이 있음을 기억하라. 그래서 섹스조차 이용될 수 있다. 섹스 속으로 들어가라. 그러나 거기에 휩쓸리지 말고 구경꾼으로 남아 있으라. 세밀한 관찰자가 되라. 일어나는 것이 무엇이든지 그것은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대는 단지 한 사람의 구경꾼일 뿐이다. 마음이란 녹음기처럼 되풀이 된다. 기억 중추가 자극을 받으면 그것은 똑같이 되풀이되어 돌아간다. 그대는 얼마든지 같은 자극만 있으면 그 기억을 재생할 수 있다. 하지만 그때 기억하려고 하지 마라. 단지 그 경험을 다시 반복된다는 사실을 느끼기만 하라. 그것을 다시 경험할 때(주로 나쁜 기억) 동요하지 말고 남아 있으라. 그래서 과거의 경험(기억)을 이용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그때는 그것이 하나의 게임이라는 사실을 알기에 동요하지 않는 것이 더 쉬워진다. 그것은 실제 상황이 아니다. 만약 기억에 대해서 성공적으로 이 방편을 수행할 수 있다면 그때는 실제로 분노가 일어나도 중심을 찾을 수 있다. 모든 욕망의 흐름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그것을 지켜볼 수 있다. 육체는 연기인지 실제인지 상상인지 거짓인지 모른다. 특히 섹스에 있어선 말이다. 어떤 것을 하기 시작하면 육체는 그것이 실제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행동한다. 그러나 그대는 그 뒤에서 그것을 지켜볼 수 있다.(단지 몸이 반응하는 것일 뿐이므로 섹스는 몸이 하는 것이지 그대가 하는 것이 아니므로 지켜볼 수 있다) 거기에 흔들림이 있고 동시에 흔들림이 없다. 이 두 가지 힘이 함께 작동할 때 그대는 저절로 변형된다. 한번 그대가 흔들리지 않고 지켜볼 수 있다면 그대에게 만큼은 이 세상이 불행하지 않다. 그 어떤 것도 그대를 혼란에 빠뜨리지 못한다. 아무것도 그대에게 상처를 입힐 수 없다. 이제 그대에게 고통이란 것이 존재할 수 없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 붙잡혀 노예가 될 것이고, 그대를 마음대로 혼란 속으로 밀어 넣을 것이다. 단지 한 가지 동작만으로도 그대는 울고 웃을 것이다. 그대는 주체적으로 행동을 하지 못하고 자동적으로 기계적으로 반응만 할 뿐이다.
탄트라 비전 열여덟 번째 차트 <#삶을 흐르는 물처럼 지켜보는 기법>
<수행법 쉰여덟> 58.이른바 이 우주는 하나의 요술경처럼 나타나며 그림을 보여준다. 즐거워하라. 그것을 그렇게 보라.
이 세상을 심각하게 대하지 말고 심각해지지 마라. 심각함은 그대를 곤경에 빠뜨릴 것이다. 아무것도 심각할 것이 없다. 먼지란 것은 그대가 심각하기 때문에 쌓이는 것이다. 그것이 문제를 만들어 낸다. 영화를 볼 때 사람들은 심각하게 받아 들인다. 그것은 영화 뿐만 아니라 모든 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대가 당하는 순간 그것은 너무나 심각하다. 당황하고 동요한다. 그러나 그토록 심각하게(첫사랑...) 여기는 이 순간은 다음 순간 쓸모가 없어진다. 그리고 그대는 그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삶은 흐르는 강물이다.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그것은 돌아가는 필름이다. 모든 것이 또 다른 모든 것으로 변화된다. 그러나 서양의 신은 너무나 심각하다. 그 어떤 것도 죄가 되지 않는다. 단지 실수만 있을 뿐이다. 그 실수 때문에 고통을 당할 수 있다. 그것은 신이 벌하는 것이 아니다. 규칙을 어긴 실수 때문에 고통을 받는 것이다. 만약 그대가 불행하다면 그것은 이 세상을 심각하게 대하기 때문이다. 행복해지려는 방법을 찾지마라. 단지 그대의 태도만 바꾸면 된다. 축제를 벌이는 마음으로 이 모든 삶을 하나의 신화로, 하나의 이야기로 여겨라. 일주일 동안 그렇게 해보라. 손해볼 것도 없다. 모든 것을 드라마라고, 쇼라고 생각하라. 그러면 행복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어떤 종류의 행복인지 생각할 수 없다. 그대는 이전에 어떤 행복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직 이 세상이 연극이라고 생각하는 태도에서만이 행복이 일어난다. 그대가 불행한 것은 삶을 대하는 태도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탄트라 비전 열여덟 번째 차트 <#삶을 흐르는 물처럼 지켜보는 기법>
<수행법 쉰아홉> 59.오, 사랑스런 그대여 쾌락에도 머물지 말고 고통에도 머물지 마라. 오직 그 가운데 머물라.
마음은 한 극에서 다른 극으로 움직일 뿐 결코 그 중간에 머물지 못한다. 그대가 행복하다고 느낄 때 그대는 불행한 쪽으로 나가려는 힘을 모은다. 이 방편은 그 자연적인 법칙을 바꾸기 위한 것이다. 고통이 있을 때 그것으로부터 달아난다. 즉 행복해지기 위해서 반대방향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행복할 땐 다른 극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집착한다. 이것이 자연스런 태도이다. 만약 이 자연적인 법칙을 초월하고 싶다면, 고통이 있으면 피하지 말고 그것과 함께 남아 있어라. 어떤 인위적인 행위도 하지 말고 그저 그것을 구경하라. 그것을 해결하려고 노력하지 마라. 그러면 전체적인 메커니즘이 혼란에 빠질 것이다. 또한 행복감을 느낄 때, 그것에 집착하지 말고 그냥 눈을 감고 구경꾼으로서 그 상태를 지켜보라. 집착하거나 달아나려는 것은 마음을 덮고 있는 먼지 때문이다. 만약 한 사람의 구경꾼으로 남아 있다면 양극 사이를 왕래하는 것이 자연적인 법칙이기 때문에 그대는 곧 그 중간에 머물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지켜보는 것을 통해 중도에 머무를 수 있다. 지켜봄을 놓치는 순간 그대는 이미 극단으로 가 있다. 그것은 집착하거나 탈피하려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에 수용성의 극치가 필요하다. 모든 것을 받아들일 때 지켜볼 수 있다. 불행이나 행복이 올 때 그것을 그냥 받아들이고 가는 것을 내버려두라. 언제나 구경꾼이 되어 단지 언덕 위에 서서 내려다보라. 시계추가 가운데 머물면 그것은 더 이상 양극으로 이동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대는 처음으로 세상 만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 그대가 움직이고 있는 동안에는 세상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없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 되어 혼란스럽게 보일 뿐이다. 그러나 움직이지 않을 때 처음으로 그 실체를 알게된다.
탄트라 비전 열여덟 번째 차트 <#삶을 흐르는 물처럼 지켜보는 기법>
<수행법 예순> 60.욕망들과 그 대상들은 다른 사람들 속에 존재하듯이 자신 속에도 존재한다. 그러므로 받아들여라. 그리고 그것을 변형시켜라.
화가 났을 때 그대는 항상 그 분노를 정당화(합리화) 시킨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화를 내면 즉시 그것을 비판한다. 우리는 자신에 대한 기준과 다른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 두 가지를 갖고 있다. 이 이중적인 기준 때문에 마음은 언제나 깊은 불행 속에 있다. 이런 마음은 단순하지 않다. 단순한 마음을 가질 때만이 진리에 대한 일별을 가질 수 있다. 오직 단순한 마음만이 이중적인 기준을 떨쳐 버릴 수 있다. 만약 그대가 자신을 비범하고 고상하고 예외적이라고 생각한다면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대 역시 모든 사람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주위에는 똑같은 욕망이 그대를 그리고 모든 사람들을 둘러싸고 있다. 그러나 그대는 자신의 섹스는 사랑이라고 부르고, 다른 사람의 사랑은 섹스라고 부른다. 세상을 어떻게 바꾸느냐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세상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그대가 잘못 되었다. 그대 자신을 바꾸는 것이 문제다. 그대가 한가지 기준만을 적용시키는 순간 그때 그대는 이미 변화되고 있는 것이다. 비난하지 않는 마음이 바로 자비심이다. 누군가가 죄를 저지르면 자신 속에도 그런 씨앗이 들어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비난하지 말고 차라리 그를 받아들여라. 그것은 또한 깊은 수용성이다. 그때 온 세상은 자신의 투사체일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거울이다. 그때 모든 얼굴이 그대 앞에 거울이 될 것이다. 그대는 자신을 모든 얼굴 속에서 볼 수 있다. 수용성은 변형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항상 탐욕으로 가득 차 있어서 거부만 해왔기 때문에 이것을 이해하기가 어렵다. 자신이 분노 자체라거나 분노의 씨앗을 갖고 있다고는 절대로 생각하지 않고는, 그 사실을 가면을 쓰고 정당화하면서 거부한다. 그 거부는 어떤 것도 변형시킬 수 없고 억압할 뿐이다. 억압된 것은 더 강해진다. 그것은 그대의 뿌리인 깊은 무의식 속까지 내려간다. 그리고 거기에서부터 작용하기 시작한다. 그대는 그것을 의식조차 하지 않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다. 수용은 모든 것을 드러나게 한다. 그대는 자신이 탐욕스럽고, 분노를 갖고 있고, 성욕이 있다는 것을 안다. 그것들을 비난하지 말고 자연스런 사실로 받아들이고 억압하지 않는다면 그것들은 마음의 수면 위로 나온다. 그때는 쉽게 제거될 수 있다. 깊은 중심에 숨어 있을 땐 처리하기가 어렵다. 그것들이 수면 위로 드러날 때에만 알 수 있는 것이다. 무의식 속에 있을 때는 알 수가 없다. 그리고 아는 병은 치료될 수 있지만 모르는 병은 치료될 수 없는 것이다. 모든 것을 수면 위로 드러나게 하라. 그대의 인간성을, 야수성, 동물성도 받아들여라. 무엇이든지 비난하지 말고 받아들여라. 탐욕과 욕심을 비우려고 하지 마라. 그대는 할 수 없다. 비우려고 하면 단지 그것을 억압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 역시 또 다른 욕심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다른 것으로 바꿀 수 없다. 그러면 이상적이고 고상한 것을 바라는 마음으로 겉모습만을 바꿀 것이다. 그대는 점점 더 교활해진 탐욕을 갖게 된다. 재산을 버리면 신의 나라로 들어갈 수 있다고 말했다면 재산을 포기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거래일 뿐이다. 탐욕은 탐욕 없음으로 변화될 수 없다. 탐욕은 오직 변형되고 초월되어야 한다. 폭력적인 마음도 비폭력적으로 되고자 하는 것도 자신에 대한 폭력이다. 오직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을 뿐이다. 탐욕 그 자체를 받아들여라. 변형은 자연스런 사실을 단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때 이해하게 된다. 탐욕은 항상 그대 속에 있음을 말이다. 이 인식이, 이 자각이 그대를 변형시킬 것이다. 받아들이는 것은 이미 탐욕이 아니기 때문이다. 분노, 탐욕, 폭력 이 모든 것은 무지 때문에 생긴다. 그 독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대는 자신의 손을 무의식적으로 불 속에 넣는다. 불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이 무엇인지 안다면 그곳에 손을 넣을 수 없다. 비폭력이나 탐욕 없음의 이상형을 바라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갖게 된다.
자연풍경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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