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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사상과 철학 252 (교재 공개)패러다임/철학 2026. 2. 3. 00:06반응형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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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과 철학 252
영상 강의 링크 : https://youtu.be/q_Li5kYOy5w
656.
죽음은 미지의 것이기 때문에 두려워할 수 없다. 공포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은 뭔가 알고 있는 것에 대해서 뿐이다. 죽음의 공포라는 것은 시간의 공포에 지나지 않는다. 죽음은 모든 시간을 정지시켜 버리기 때문이다. 시간은 죽음이고 죽음은 시간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자신의 실존에 대한 깊은 이해에 도달한 인간이 나무를 자를 때 그는 단지 나무를 자른다. 거기에는 나무를 자르는 것만이 있다. 그밖에 아무도 없다. 실제로 거기에 나무를 자르는 사람이라는 것은 과거이기 때문이다. 앉을 때는 앉고, 걸을 때는 걷는다. 요는 동요하지 않는 것이다. 시간이 문제가 되는 것은 올바로 살고 있지 않기 때문이고, 올바로 산다면 시간이라는 문제도, 시간의 공포도 사라진다. 그러면 무엇을 하고 있든간에 그것을 토털로 하는 것이다. 단순한 일도 즉, 목욕탕에 들어갈 때도 토털로 들어가는 것이 좋다. 샤워기 아래서 전 존재를 자기 위에 쏟아부어 보라. 쏟아지는 수많은 아름다운 물방울과 융합해 보라. 또 청소나, 식사, 세탁, 산책 그러한 것을 토털로 하면 명상 같은 것을 할 필요가 전혀 없다. 명상이라는 것은 어떻게 하여 한 가지 일을 토털로 하는가를 배우는 하나의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 그랬을 때, 시간은 사라진다. 그러면 죽음도 사라진다. 그렇게 되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죽음 같은 것에 구애받지 마라. 지금 당신은 살아 있다. 삶을 살아라. 누군가 70년을 산다면 태어날 때, 자기 속에 자기 실존의 내면에 비할 데 없는 핵심에 죽음을 가지고 나온다. 그 아이가 그 핵심을 발견하는데 70년이 걸린다. 그리하여 어느 날, 그 아이는 사라지는 것이다. 죽음이라는 것은 당신 속의 無이다.
미래에 들어가는 것은 사고뿐이다. 각성은 항상 지금 여기에 있다. 그것은 하나인 것이다. 미래를 생각하고 괴로워하고 결과를 걱정한다면 최후에 당신은 깨어 있지 않는다. 결과의 걱정을 하는 것은 사고뿐이다. 만일 사랑하고 있다면 결과 같은 것은 생각하지 않는다. 사랑은 그것만으로 충분한 것이다. 생각한다는 것은 사랑 같은 것을 하고 있지 않다는 의미이다. 명상에 들어가면 명상 그 자체가 너무나 아름다워서 결과 같은 것에 구애받는 사람이 없다. 만일 결과 같은 것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명상은 불가능하다. 이 결과 지향의 마음이야말로 유일한 장벽, 유일한 블록인 것이다. 오르가즘이라는 것은 일종의 無心 상태이다. 그것은 거기에 마음이 없어졌을 때 일어난다. 그것은 당신이 순간 속에 토털로 있을 때 일어나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 있는 것 이상의 완성이 있을 수 있겠는가? 모든 것이 다 그대로 완벽하다. 당신이 완전주의자가 될 필요는 없다. 단지 현재에 있으려고 하는 것만으로도 좋다. 긴장을 풀고서 미래가 그 나름대로의 코스를 잡아가도록 맡겨두는 것이다. 결말을 잊어버리고 수단 자체를 결말로 삼아보라. 방법 자체를 목적으로 삼아보라. 실로 세계는 아름답다.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일어나는 것을 허용하는 것뿐이다. 모든 존재는 결국에 깨닫게 될 지 아닐지 당신에게 달려 있다. 다만 누구나 이미 깨닫고 있다는 것 뿐이다.
지식은 공격성, 투쟁, 충돌, 모반을 위한 장치이다. 지식이라는 것 전체가 자신이 아닌 무엇인가로 만들려는 하나의 유혹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지식은 미래를 만들어 낸다. 자신이 아닌 무언가가 되려는 욕망을 만들어 내고, 자신이 아닌 것을 향해서 노력하는 것을 말한다. 무구는 자신인 것을 즐기는 것을 말한다. 또한 당신을 하느님이라고 말한다. 그것이 될 필요는 없다. 당신은 전체의 일부이다. 또한 전체가 갖고 있는 것과 똑같은 질을 가지고 있다. 당신은 신성한 것이다. 무구는, 당신은 이미 그것이라고 말한다. 행해져야 할 일 따위는 아무것도 없고, 오로지 그것을 즐기고 축하하고 환희하면 될 뿐이다. 어린이가 미래의 일을 생각하기 시작한 날, 그 아이는 무구를 상실한다. 그 아이가 어린이인 것은 현재를 즐기고 있던 그 순간까지다. 낙원이라는 것은 뭔가 특별한 것이 아니다. 낙원이란 바로 지금 여기에서 자기 자신을 즐기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다. 당신은 이미 자신의 것 외에 어떤 것도 될 수가 없다. 낙원은 지리적인 문제가 아니라 내면의 공간 문제인 것이다.
고뇌나 지식이 당신에게 매달리는 일 따위는 있을 수가 없다. 당신이 그것에 매달리는 것이다. 뿐만이 아니라 그것을 계속 키워나가고 있다. 그러나 ‘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을 배우는 자는 매일매일 상실해가면서 짐을 내려 놓는다. 그의 유일한 학습은 배운 것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모든 명상은 모두 마음으로부터 떨어지기 위한, 마음으로부터 조금 거리를 벌리기 위한, 조금 떨어져서 그것과의 동화를 단절하기 위한, 마음을 초월하기 위한, 언덕 위의 파수꾼이 되어서, 마음 속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보기 위한 테크닉에 지나지 않는다. 당신이 마음과 별개가 되어야 비로소 무엇인가를 버릴 수 있는 가능성, 지식을 버릴, 배운 것을 버릴 가능성이 나타난다. 道를 배우는 사람은 매일매일 상실해 가는 것을 지향한다. 전체가 되기 위한 기술이 건강하게 되기 위한 기술이다. 명상도 역시 의료적인 것이다. 그것은 당신을 전체로 만들어 준다. 당신을 통합하고 건강하게 해 준다. 축적, 기억, 마음에 적어 넣는 일 따위가 아닌 단지 마음을 열고 귀를 기울여라. 음악을 듣는 것과 마찬가지로, 새소리에, 바람소리에, 물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떤 마음도 갖지 않고 단지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거기에 기억해야 할 것 따위는 없다. 잊어버린다고 하는 따위의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그 속에는 아무런 묵표도 없다. 그것은 엑스터시를 유발하고 지복으로 충만해 있다. 배운다는 것은 항상 무엇인가를 하겠다는 전망이 따라다니기 마련이다. 그것은 위대한 실행가가 되기 위한 기술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배운 것을 잊어버리게 되면 ‘하지 않는 사람’으로 만든다. 차츰 지식이 사라지면 행위도 사라지고 실존이 될 것이다. 그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게 된다는 것은 아니다.
당신이 중심이 되는 일은 있을 수가 없다. 당신과 존재와는 별개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중심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전체뿐이다. 토대는 지식이다. 토대를 없애 버려라. 그렇게 하면 그 집은 무너지기 시작한다. 그 집은 ‘하는 것’, ‘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는 지식인 것이다. 그리고 그 집 안에는 가공의 유령과 같은 것이 살고 있다. 그것이 자아(에고)이다. 그 토대가 사라져 없어졌을 때 집은 붕괴한다. 그러면 거기에는 아무도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 집은 줄곧 비어 있었다. 누군가가 있다고 생각했던 것은 변덕, 마음속의 단순한 꿈, 하나의 악몽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모든 것이 행해진다. 천하를 잡는 사람은 종종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그것을 이룩한다. 부득이 무엇인가를 해서는 천하를 잡는 것은 바랄 수도 없다.
명상이야말로 배운 것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차츰 마음의 몇 겹이나 되는 층을 벗겨 나간다. 인간이란 양파와 같은 것이다. 계속 벗겨 내도 또 다른 층이 나온다. 그리고 마지막 층이 벗겨져 나가면 無밖에 남지 않는다. 양파는 완전히 사라져 없어졌다. ‘자신’ 같은 것은 찾아볼 수가 없다. 이것이 바로 명상이 성취하는 지점이다. 이미 그것은 명상이 아니다. 그것은 사마디(삼매경)가 되어 있다. 텅 비게 되면 당신은 성스러운 힘에 의해서 지배 당한다. 그러면 무엇이 일어나건 모두 아름답다. 어쨌든 결정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할 수 있는 단 한 가지는 자신을 버리는 것, 배운 것을 잊어버리는 것, 자신의 조건부여를 버려 나가는 것이다. 그러면 전체성을 갖게 되고 그랬을 때 무엇이 일어나건 모두가 아름다운 것이다.
자유의지 같은 것은 없다. 그것은 단지 자아(에고)의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 자유인이나 노예나 허구의 개념이다. 자유인일수도 노예일수도 없다. 그 어느쪽이라 하더라도 ‘당신’이 필요할 것이기 때문이다. 삶이라고 하는 것은 광대한 상호의존이다. 당신은 다만 전체의 유기적인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당신은 분리되어 있지 않는데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는가? 그래서 자유이거나 자유가 아니거나가 아니다. 당신은 없는 것이다. 당신 같은 것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우주는 하나의 광대한 상호의존이다. 이 상호의존이야말로 ‘전체성’이며 하느님인 것이다. 그런데 자아는 어디까지나 자신을 내세우려고 한다. 당신은 노예도 자유인도 아니다. 또한 당신이 전체의 일부분인 것은 당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과 별개의 존재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노예인 것이다. 그것은 전체와 대립하는 것이다. 강과 함께 흐른다면 주인이 되지만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면 노예가 된다. 이 세상에 자유의지나 예속이나, 의존이나 독립도 양쪽 모두 잘못된 말이다. 이것은 상호의존이다. 우리들은 서로의 내부에 존재하고 있다. 내 속에 있던 숨결은 나가서 당신 속에 들어간다. 당신 몸 속의 혈액은, 증부모나, 나폴레옹, 아니면 아인쉬타인이 죽어서 흙으로 돌아간 것을 나무가 먹고 과일을 맺는다. 그 과일을 당신이 따먹는다. 그리고 당신의 자식들이 당신을 따 먹을 것이다. 과거 전체가 현재에 의해서 먹힌다. 그리고 현재 전체가 미래에 의해서 먹히게 될 것이다. 삶은 상호 관계하고 있다. 당신은 없는 것이다. 이율배반을 팽개쳐 버려라. 독립도, 의존도, 그것들은 상호의존하고 있다. 자유는 그 속에는 당신도 남지 않는다. 당신이라고 하는 것은 그 속박의 일부이며 일획인 것이다. ‘자기’는 허구의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 전체에는 초의식이 있다. 그것은 의식과 무의식 양쪽이지 그 어느쪽이 아니다.
자연풍경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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