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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사상과 철학 245 (교재 공개)
    패러다임/철학 2025. 12. 8. 2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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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생각하기 이해하기 실천하기-

     

    사상과 철학 245

     

    영상 강의 링크 : https://youtu.be/XvDp5Ti-OZ0

     

     

    649.

    삶에는 결론이 없이 어디까지나 앞으로 나아간다. 거기엔 시작도 끝도 없다. 항상 한가운데(중용)에 있다. 삶은 항상 현재에 있다. 하나의 진행과정인 것이다. 결론을 내리지 말고 살아라. 그것이야말로 유일한 생활태도이다. 그렇게 할 때 중용의 마음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중용이야말로 균형인 것이다. 삶이라는 것은 반대되는 것 사이의 균형이다. 그것은 절대로 종점에 도달하지 않는다. 그 균형은 어디까지나 계속 나간다. 그것은 영원하다. 결코 한쪽으로 기울지 말라. 하나의 극을 고집하지 말라. 왜냐하면 그러면 당신은 균형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비결이라는 것은 수많은 실수나 실책, 시행착오의 에센스다. 즉 체험이다.

    줄타기꾼은 한가운데에 계속 머무를 수가 없다. 한가운데 머무르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움직여서 균형을 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매순간 삶은 변하고 있다. 어떻게 고정된 채로 있을 수 있겠는가? 매순간 모든 것이 변화하고 있다. 아무것도 정적이 아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같은 강에 두 번 발을 집어 넣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 강에 두 번째로 발을 집어 넣을 때까지는 그 강은 변해 버린다. 뿐만 아니라 당신도 변해 있다. 무엇 하나 똑같은 대로 있지 않다. ‘같다고 하는 것은 환상이다. 유동이야말로 리얼리티인 것이다. 이렇게 생명으로 고동치고 있는 생동하는 세계에서 하나의 위치()에 달라붙어(고정관념) 있다면 당신은 죽어 있는 것이다. 결론을 내려 버린 사람들이 모두 죽어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만일 자신이 흰두교도, 회교도, 기독교도, 불교도라고 결론을 내려 버린다면 최후에 당신은 죽어 있다. 때로는 다른 교도로 기울어질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균형이야말로 삶인 것이다. 중용이라는 것은 고정적인 포인트가 아니다. 그것은 당신의 안쪽에 있는 것으로 하나의 균형, 하모니이다. 음식은 영양이 되지만 과식하면 독이 된다. 모든 것을 지나치게 쫓다보면 남는 것은 없다. 완성은 죽음이다. 그것은 오른쪽이나 왼쪽 중 그 어느 쪽을 선택하는 것이다. 불완전이야말로 삶이다. 완벽하면 당신은 무용지물이 된다. 불완전해야 생기발랄할 수 있다. 그리고 삶이 모든 곳에서 당신을 지탱해 줄 것이다. 완벽은 굳어져 있어 하나의 변화도 일어나지 않아 흐르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토털이 되야한다. 토털은 모든 것의 합계 그 이상인 것이다. 그들은 그 속에 모든 것을 갖추고 있다. 시는 말 전부보다 그 이상이고, 회화는 전체 색깔 그 이상인 것이다.

    지옥이나 천국은 미래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하나의 행위다. 그 자체 천국이나 지옥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균형 안에 머무르면, 즉 도에 따라 우주법칙에 따르면 행복이고 천국이다. 그러나 불균형해지게 되면 지옥이 생겨난다. 법칙은 균형이다.

    공을(만족감) 이루면 묻어나는 것이 하늘의 도다. 그것을 즐기고, 음미하고 흡수하고 그 이상은 구하지 말라. 마음은 언제나 좀 더를 구하고 있다. 계속 다른 것을 추구하게 되면 즐길 시간도 축하할 순간도 물러나거나 멈출 순간도 없다.(99의 악순환이 되는 것이다.)

    명상은 수평(마음)이 아닌 수직의 마음(높이, 깊이, 무심, 물러남)을 부여하는 데 있다. 토털로 살으면 순간에 머물게 되어 내일 일을 걱정하지 않게 된다. 그것은 죽음을 모른다. 그는 죽지 않게 된다. 왜냐하면 죽음이란 내일의 일이기 때문이다. 삶은 오늘의 일이다. 물러남은 휴식이고 그것을 즐기는 것이다.

    바깥쪽엔 오른쪽과 왼쪽만 있을 뿐이고, 한가운데라는 것은 없다. 그것은 내면에만 존재한다. 시계바늘은 과거에서 미래로 움직인다. 시계에 현재라는 것은 없다. 그것은 관념적인 시제일 뿐이다. 시간은 과거와 미래밖에 없다. 현재는 당신의 속에 있다. 그것은 항상 현재다. 거기에는 과거도 미래도 없다. 그런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만일 안쪽으로 향하여 나아가면 현재라고 하는 영원 속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바깥쪽으로 향하여 나아가면 과거나 미래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같은 말을 공간에 대해서도 할 수 있다. 공간 속에서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기울이면 그것은 바깥쪽이다. 그러나 그 두 개 사이에 균형을 취하면 돌연 안쪽에 있게 된다. 그 중간점은 당신 속에 있는 것이다. 실제로 현재 한가운데라는 것은 함께 있다. 어느 때이든 현재(한가운데) 속에 있을 때 한가운데(현재)에 있다. 그것은 하나의 내면의 현상이다. 그것은 정적일 수가 없다. 그리고 돌연 하나의 안으로 향한 폭발(내폭발)을 발견한다. 어느 때이든 내면의 중간 지점을 통과할 때 이제 똑같은 당신이 아니다. 당신은 강렬할 정도로 발랄해지고 순박해지고 순수해지고 신성해진다. 삶은 항상 하나의 끊임없는 균형 작업이다. 반대끼리의 사이에서 균형을 계속 취하면 요령을 포착할 수 있게 된다.(내면의 요령, 내면의 균형) 한가운데 머무르려고 하지 말고 균형을 취하려고 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당신은 이미 그것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필요한 것은 각성에 지나지 않는다. 당신은 행복했다. 또 다른 순간 당신은 불행하다. 당신은 반대쪽으로 이동한 것이다. 그것은 한가운데를 통과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어떻게 한가운데를 통과하지 않고 반대쪽으로 옮겨갈 수가 있겠는가? 어쩌면 그것을 통과한 것은 불과 1초의 몇 분의 1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쨌든 당신은 그곳을 통과한 것이다. 좀더 주의하고 있었다면 그 한가운데가 어디였는지 알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당신은 당신의 과거 삶에 의해서 지탱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여기에 있다. 그리고 당신은 한번도 최초에 출현한 일이 없다. 왜냐하면 그 전에도 역시 당신은 있었기 때문이다. 태초의 그 전에도 당신은 과거 삶에 의해서 지탱되고 있었다. 만일 당신이 깨어난다면 비록 단 일순간이라도 마음의 어리석음을 간파하는데 충분하다. 희망이야말로 모든 어리석음의 기반이다. 어리석음이란 것은 단지 경험하는 것에 의해서는 다 없어질 수 없는 것이다. 그것들은 각성을 하고 경험할 때 비로소 다 없어진다. 경험만으로 그것들을 없앨 수는 없다.

    사람들을 선하게 만들려고 하면 악해질 것이다. 자녀들을 원하는대로 기를려고 하면 자녀는 정확히 바라지 않았던 일을 할 것이다. 즉 무슨 일인가 하면 바로 그 반대현상이 일어난다. 결코 미래에 대한 걱정을 하지 말라. 왜냐하면 바로 당신의 걱정 그 자체가 역효과를 낳기 때문이다. 그것은 일상 생활 속에서도 마찬가지다. 걱정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을 낭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연이나 존재는 우리들의 이론에 따르지 않는다. 그것들에는 그것들의 길이 있다. 사물이라는 것은 단지 그냥 그런 것이다. 요구할수도, 주장할수도, 투영할수도, 물을 수도 없다. 사물을 단지 그냥 그런 것이라는 각성 속에서 성장해 나갈 때 거기에 하나의 깊은 수용이 생긴다.

    명상이란 그 신비속에 들어가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사랑이나 기도라는 것도 역시 그 신비를 허용하고 마음으로 그것에 거역하지 않는 것이다. 모든 것은 아름답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신비적이기 때문이다.

    실존의 가장 깊은 중핵은 비실존이다. 있는 것( isness)의 기반은 무이다. 그리고 무( nothingness)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의미가 아니라 사물이 없다(no-thingness)라는 의미인 것이다. 형태는 무형이라는 토대 위에 존재한다. 마치 파도가 바다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그리고 다시 무형 속으로 녹아 없어져 간다. 이름은 무명에서 솟아나와서 근원에로 가라앉았다가 되돌아와서 다시 무명이 된다. 삶은 죽음에서 솟아올라 다시 죽음으로 이행한다. 이들 반대끼리는 반대가 아니라 상호 보완적이다. 그것들은 모든 이해를 초월한 같은 현상의 두 가지 대극에 지나지 않다. 때때로 그것은 그 자신을 실존으로 표현하고 때로는 비실존으로 표현한다. 그러나 양쪽 속에 나타나고 있는 것은 똑같은 것이다. 비실존이 될 준비가 없는 한 결코 진정한 실존이 될 수 없다.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는 한 자신을 얻지 못할 것이다. 만일 자신에게 매달리면 파멸하게 될 것이다. 비실존에 발을 들여놓을 때 비로소 실존은 구원받을 것이다. 씨앗을 쪼개 보아도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거기에서 나무가 나온다. 씨속의 가장 중심에는 무가 존재한다. 그것이 너이고, 네가 그것이다. 당신도 역시 그 씨의 심장부에 존재하는 인 것이다. 내면의 이 비실존을 발견하지 않는 한 진정한 진실에는 도달할 수 없다. 어떤 이론이나 철학화할 수 있다 하더라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물에 설탕이 들어 있는 것은 맛을 보면 알 수 있지만 물과 설탕을 따로따로 만들 수는 없다. 삶과 죽음은 따로따로 있을 수가 없다. 그것들은 별개의 것이 아니다. 그 두 가지는 항상 공존한다. 실제로는 공존한다는 것도 틀린 표현이다. 왜냐하면 이라는 바로 그 말이 이라는 개념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둘이 아니라 하나인 것이다. 단지 두 개처럼 보이는데 지나지 않다. 당신은 어디에서 왔다가 어디로 향해 가는가? 에서 로다. 그리고 바로 두 개의 무 사이에서 실존이 나타난다. 실존이라는 강은 두 개의 의 둑 사이를 흐르는 것이다. 실존은 아름답다. 삶은 좋다. 그러나 죽음 역시 좋다. 삶은 죽음 없이는 존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죽음 없이는 삶은 일순간이라도 존재하지 못한다. 그것은 삶을 지탱해 준다. 그것은 바로 삶의 기반인 것이다. 당신이 살 수 있는 것은 당신이 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삶과 죽음은 두 개의 별개의 것이 아니다. 두 개의 날개이다. 같은 현상의 두 날개이다. 수레바퀴의 중심은 텅 비어 있다. 그러나 수레바퀴 전체가 그것에 걸려 있다. 죽음이라는 것은 바깥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죽음은 모든 사람이 생각하는 바와 같은 하나의 사고가 아니다. 죽음이 다가온다고 하지만 그것은 틀린 말이다. 죽음은 다가오는 것이 아니다. 죽음은 당신 속에서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죽음은 삶의 길 어딘가에서 돌연 죽음과 만나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죽음을 피하거나, 기만하거나, 우회하거나 할 수도 있다. 죽음이 바깥으로부터 일어나는 하나의 외적인 현상이면 그럴 가능성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죽음이라는 것은 하나의 씨앗과 같이 당신 속에서 진척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당신이 존재에 모습을 나타낼 때 존재에 모습을 나타낸다. 실제로 그것은 당신보다 전에 존재했다. 당신은 거기에서 나온 것이다.

    당신들이 배로 호흡하지 않는 것은 죽음의 공포 탓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배로 호흡하면 그 숨은 속 깊이 까지 도달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죽음과 접촉해 버리게 된다. 죽음을 두려워해서 당신은 얕은 호흡을 몸에 익힌다. 어느 때이든 두려워하고 있을 때에는 호흡은 얕아진다. 또한 공포가 엄습할 때에는 깊이 호흡할 수가 없다. 즉시 호흡은 얕아져 버린다. 모든 공포는 근본적으로 죽음의 공포이다. 당신은 의식적으로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신의 몸은 어디에 죽음이 있는가를 알고 있어서 거기에 가려고 하지 않는다. 몸은 현명하다. 마음은 풋내기이고 몸은 마음보다 오랫동안 존재해 오고 있다. 수백만이라는 삶을, 마음이 없는 삶을 통과하여 수많은 지혜를 저장해 오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때이든 무서워지면 당신은 호흡하는 것을 멈추든가 혹은 극히 얕개밖에 호흡하지 않는다. 죽음에 가까이 가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깊은 호흡(심호흡)은 삶 속에서 죽음을 호흡하는 것이다. 심호흡은 삶과 죽음 사이에 하나의 다리를 만들 것이다. 그리고 공포는 사라진다. 만일 속 깊이, 뱃속까지 호흡할 수가 있다면 공포같은 것은 완전히 사라져 버릴 것임에 틀림없다. 죽음도 역시 삶인 것이다. 그것은 같은 동전의 다른 면에 지나지 않는다. 죽음은 휴식이다. 깊이 호흡한다면 몸 전체에 휴식이 흘러들어가는 것을 느낄 것이다. 하나의 이완, 하나의 비긴장 상태가 될 것이다. 조그마한 어린이가 호흡하고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가? 그 아이는 배로 호흡한다. 그리고 바로 그  근처에는 섹스 중추라고 부르는 생명점이 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공포로 되어 버린다. 만일 깊이 호흡하면 그때에는 섹스가 용솟음쳐 올라온다. 그러므로 섹스를 두려워하고 있는 사람들은 깊이 호흡할 수가 없다. 만일 깊이 호흡하려고 하면 즉시 억압된 섹스가 다시 되살아나는 것을 느낄 것이다. 삶의 중심은 죽음의 중심 바로 옆에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죽음의 중심과, 섹스=삶의 중심은 바로 곁에 가까이 서로 거의 접촉할 정도로 근처에 있다. 사람들이 섹스를 하면서도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왜냐하면 섹스와 함께 죽음의 맥박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진정한 성적인 체험이라는 것은 또 하나의 죽음의 체험이기도 하다. 여성은 당신에게 탄생을 부여해 주었다. 여성은 당신의 죽음도 역시 함께 갖고 있음에 틀림없다. 죽음이야말로 바로 삶의 근원인 것이다.

     

    밤의 꽃 풍경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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