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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사상과 철학 207 (교재 공개)패러다임/철학 2025. 3. 5. 21:49반응형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생각하기 이해하기 실천하기-
사상과 철학 207
영상 강의 링크 : https://youtu.be/p0ULuus_uT4
611.
탄트라 비전 열 번째 차트 <#시각 명상법 1.> - 2개중 첫 번째
- 3가지 수행방법이 있다.
눈은 우리 몸에서 가장 비육체적인 부분이다. 만약 물질이 비물질로 옮겨가는 과정에 있다면 눈은 바로 거기에 해당하는 경우이다. 눈은 물질이지만 동시에 비물질적인 것이기도 하다. 눈은 그대와 그대의 육체가 만나는 지점이다. 육체 속에는 눈만큼 깊이 의식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입구는 없다. 육체와 그대는 많은 부분에서 분리되어 있다. 그러나 눈에서만큼은 그대와 그대의 육체가 가장 가까이 만난다. 그래서 눈이 내면의 여행(명상)에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눈을 통해 조금만 깊이 들어가도 그대의 근원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런 일이 신체의 다른 어떤 부분에서도 가능하지 않다. 그러나 눈에서는 한 걸음만 깊이 들어가도 그대 자신 속으로 충분히 들어갈 수 있다. 만약 다른 사람의 눈을 들여다볼 줄 안다면 그대는 그의 깊이를 들여다볼 수 있다. 그는 거기에 있다. 그는 육체의 다른 어떤 부분에도 없다. 오직 그는 눈동자 속에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눈을 들여다 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눈 속을 들여다볼 수 있는 사람에게만 가능하다. 눈을 들여다보는 것은 그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사랑하는 관계 속에 있을 때만이 타인의 눈을 들여다볼 수 있다. 따라서 눈이란 물질과 비물질, 육체와 의식이 만날 수 있는 접점이 된다. 그대의 눈은 그대의 비밀을 푸는 열쇠이다. 어떤 사람이 그대의 비밀세계로 들어가고자 할 때 그대의 눈은 그 문이 된다. 눈은 매우 유동적이며 계속 움직인다. 그 움직임은 고유한 리듬을 갖고 있다. 꿈을 안꿀 때와 사념이 일어나지 않을 때 눈동자는 움직이지 않는다. 눈이 움직인다는 것은 뭔가를 보고 있다는 것이고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이다. 즉 사념과 눈동자의 움직임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 눈동자와 사념 중 하나가 멈추면 나머지도 자동적으로 멈출 것이다. 눈동자는 하나의 대상에 머무르지 않고 계속 이것에서 저것으로 저것에서 또 다른 것으로 움직여 간다. 그 움직임은 그것의 본질이다. 그것은 강물이 흘러가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 움직임 때문에 그것이 살아있는 것이다. 눈동자는 움직임을 필요로 한다. 만약 그대가 갑자기 멈추고 더 이상 외부를 향하여 움직이지 못하게 하면 그것은 내면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다.
탄트라 비전 열 번째 차트 <#시각 명상법 1.>
<수행법 서른> 30.눈을 감아라. 그리고 감은 눈으로 그대 내부의 세밀한 부분들을 자세히 살펴보라. 그리하면 자신의 진정한 본질을 알게 되리라.
여기서 눈을 감는 것은 눈동자를 고정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눈동자는 계속 외부를 향해 움직일 것이다. 사념이 계속 일어나 내면으로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사념도 하나의 대상이며 외부에 속한다. 내면은 대상이 아닌 주체이며 그대의 의식이다. 그대는 눈을 감고도 계속 뭔가를 볼 것이다. 거기에는 기억이나 인상에서 받은 잔상이 계속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눈동자를 아무것도 볼 수 없도록 완전히 닫아야 한다. 현실도 꿈도 어떤 환영도 보여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하려면 눈을 감고 눈동자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의식적으로 붙잡아 두어야 한다. 그것은 훈련을 통해서 가능하다. 눈을 감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감고 난 뒤에도 눈동자가 움직이지 않도록 집중해야 한다. 눈동자에 감각을 집중해서 그것이 조금도 움직이지 않도록 하라. 마치 돌이 되었다고 느껴라. 그 어떤 동작도 취하지 말고 그 상태로 남아 있으라. 눈을 감고 내면을 보라. 그대는 몸으로부터 분리될 것이다. 왜냐하면 보는 자는 결코 보여지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그대가 내부로부터 그대의 몸을 전체적으로 볼 수 있다면 그대는 결코 자신이 육체라는 환상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그때 그대는 육체와는 완전히 다른 존재로서 몸 안이나 몸 밖에서 자유롭게 몸을 볼 수 있다. 그러면 그대는 육체와 자신의 동일시의 끈을 끊어 버릴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 그대는 마음 속으로 깊이 들어갈 수 있다. 그때 그대는 마음이 자신이 아니라 자신이 보고 있는 하나의 대상임을 알게 될 것이다. 몸과 마음은 그대가 내면으로 들어가면서 하나의 대상으로 보여진다. 그때 그대는 지켜보는 의식이지 몸이나 마음이 아니다. 이 지켜보는 의식이 바로 그대 자신이다. 보여지는 것은 그대가 아니다. 그대는 대상이 아니다. 주체인 것이다. 그것은 더 이상 주체와 대상으로 나누어 질 수 없는 것이다. 그대는 그대의 자아에 대해서 알 수 없다. 아는 자와 알아지는 대상이 필요한데 그것은 둘이 아니다. 주체는 주체를 알 수 없다. 그대가 내면으로 들어가 오직 지켜보는 의식만이 남아 있는 상태에 이르게 되면 거기에는 지켜볼 만한 대상이 아무것도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 사실을 알 수 있는가? 뭔가를 지켜보려면 반드시 대상이 필요하다. 그때만이 자신이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존재론적으로는 그것이 틀렸다. 실제로 내면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어떤 대상도 없이 오직 존재라는 의식만이 남아 있는 한 점에 이르게 된다. 거기에는 오직 보는 자만이 있을 뿐 보여지는 대상은 아무것도 없다. 순수한 주체만이 있을 뿐이다. 이 지점에 이르는 순간 그대는 존재의 궁극적인 목표에 들어간 것이다. 그것은 알파(시작)와 오메가(끝) 둘 다이다. 하지만 그대가 무슨 말로 표현하든지 그것은 옳지 않다. 말로 표현된 진리는 진리가 아니다. 육체의 세밀한 부분이 마음이며 마음의 거친 부분이 육체이다. 그리고 그대는 마음도 육체도 아니다. 그래서 그대가 이 전체 구조를 이해하게 되면 그대는 이 구조로부터 자유로워진다. 그리고 이 구조와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바로 그대의 진정한 본질이다. 육체는 죽을 것이다. 마음 역시 죽는다. 그러나 이 본질은 결코 죽지 않는다. 그것은 영원한 것이다. 그대가 이 본질을 무엇이라고 불러도 좋다. 이 본질은 그대의 이름도 아니고 모양도 아니다. 그 둘 다를 초월해 있다. 그렇다면 이 방편을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가? 먼저 눈동자가 움직이지 않도록 눈을 완전히 감는 것이 필요하다. 눈동자가 돌처럼 굳어지게 하라. 어떤 움직임도 허용하지 마라. 매일 이렇게 훈련하는 동안 어느 날 문득 내부를 들여다 볼 수 있을 것이다. 한번 그대가 내부의 일별을 대하고 나면 그대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게 된다. 처음의 일별이 어려운 것이다. 그러므로 눈을 감을 때마다 항상 눈동자를 고정시키는 훈련을 하라. 그러면 그대는 색다른 영역으로 들어갈 수 있다.
탄트라 비전 열 번째 차트 <#시각 명상법 1.>
<수행법 서른하나> 31.하나의 그릇을 볼 때 그릇 전체를 보라. 그것의 표면이나 재질을 보지 말고 그릇 전체의 형태만을 보라. 머지않아 자신을 깨닫게 될 것이다.
부분으로 나누어 볼 때 눈은 하나의 부분에서 다른 부분으로 이동할 수 있는 기회를 갖기 때문이다. 그때 눈동자는 움직여지고 그대의 사념은 시시각각으로 피어난다. 그러므로 대상을 볼 때 전체를 보라. 그것은 내가 나의 중심에 서서 보는 것이다. 재질은 물질적인 부분이다. 그러나 형태는 정신적인 부분이다. 이 방편을 통해서 물질적인 차원에서 비물질적인 차원으로 옮겨갈 수 있다. 대상에 대해서 생각을 꾸려가지 말고 세부적인 성질에 대해서는 잊어라. 그러면 곧 그대의 의식은 각성의 차원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눈동자를 움직이지 말라. 그 대상의 성질에 관한 어떤 사념도 떠올리지 마라. 형태는 순수한 것이다. 재질을 생각하면 사념이 계속 일어난다. 순수한 형태는 생각이 끊어진 바로 그 차원이다. 그리고 하나의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 옮겨갈 가능성마저 없다. 부분이 아니라 전체를 한 눈에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때 외부에 나갔던 그대의 시선은, 주의력은, 인식능력은 그대의 존재를 향해 돌아올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때 그대는 자신의 존재를 깨닫게 된다. 그리고 이 순간이야말로 지복의 순간인 것이다. 대상에 계속 응시하면 어느순간 그대의 인식 능력의 흐름은 정반대로 내면으로 흐른다. 그리하여 그대 자신을 깨닫게 될 때 그대는 아까의 그 대상물을 잊을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은 환영(마야)이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깨닫게 될 때 이 세계는 존재하지 않게 된다. 엄밀히 말하면 이 세상은 환영은 아니다. 이 세상은 이 세상대로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그대는 동시에 둘을 볼 수 없다. 바로 이것이 문제이다.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 갔을 때, 그가 그 자신을 깨닫게 될 때, 이 세상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 세상을 의식할 때 그대는 사라져 버린다. 그때 이 세상은 그대에게 너무나 확실하게 존재하고 있다. 그래서 그대 자신을 직접적으로 깨달을 수가 없다. 깨달으려는 노력이 오히려 장애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대가 자신의 존재를 깨닫게 될 때 대상으로서의 이 세상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 세상은 마치 허깨비나 환영처럼 보일 것이다. 그것은 더 이상 그대에게 존재로 다가오지 않는다. 이전에는 그대에게 자신의 존재가 환영이고 이 세상은 실재였는데 이제 그 반대가 된 것이다. 보이는 대상에만 고정되어 있다면 그대의 존재는 환영처럼 변한다. 그것은 마치 관념이나 꿈으로 보이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대는 이 양자를 동시에 깨달을 수 없다. 바로 이것이 문제점이다. 그대는 늙은 여자를 보든지 젊은 여자를 보든지 둘 중에 하나만 보게 될 것이다. 하나를 옳다고 보면 또 다른 것은 틀린 것이 되며 기껏해야 환영이 되고 만다. 그대가 의식의 방향 전환을 알게 되면 어디에서든지 이 방편을 수행할 수 있다. 굳이 어느 특정한 대상이 필요치 않다. 어떤 대상을 상대로 하든지 이것은 가능하다. 어느 것이라도 그저 전체적으로 보라. 그때 그대의 인식 능력은 자신의 내면을 향해 흘러 들어오게 될 것이다. 그와 동시에 대상은 사라진다. 내면의 여행이 시작되는 것이다.
탄트라 비전 열 번째 차트 <#시각 명상법 1.>
<수행법 서른둘> 32.사람이나 사물을 처음보는 것처럼 보라. 거기에 아름다움이 있다.
우리는 모든 것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어 무의식적으로 지나친다. 그대는 장님이다. 눈이 더 이상 필요없어진 것이다. 그대의 습관 때문이다. 깨어 있으라. 삶은 강물처럼 계속 흘러간다. 아무것도 똑같을 수 없다. 어떤 사물이라도 좋다. 이 방편을 수련하면 그대의 눈동자는 생기에 넘치게 될 것이다. 살아있는 눈이 될 것이다. 그대는 눈으로 자신의 내면까지도 쳐다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이다. 보통의 눈은 신체적인 것, 즉 물질적인 것 밖에 볼 수 없다. 제3의 눈이 기능할 때만이 그대는 다른 차원으로 들어갈 수 있다. 이제 그대는 신체적인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영혼)을 볼 수 있다. 그 눈으로 볼 때에는 거기에 더 이상 육체가 없다. 거기에는 비물질적인 것만이 있을 뿐이다. 보통 눈과 제3의 눈으로 흐르는 에너지는 같은 에너지이다. 제3의 눈은 신체 속에 깃든 유체에 속한 것이다. 물질적인 신체에 속한 것이 아니다. 이 방편들은 제3의 눈을 열기 위한 것이다. 만약 그대의 두 눈이 완전히 멈춘다면 더 이상 거기로 에너지가 흐르지 않는다. 에너지가 흐르는 것은 거기에 움직임이 있기 때문이다. 그대의 눈이 죽은 자의 눈처럼 움직이지 않으면 그때 에너지는 흘러가 다른 곳을 찾을 것이다. 눈동자를 움직이지 말고 한 점을 바라보라. 그러면 눈동자는 갑자기 굳어지고 에너지의 흐름이 멈춘다. 에너지는 본래 움직이지 않는 곳에 갈 수가 없다. 에너지는 그 성질 자체가 동적인 것이다. 그래서 문이 닫히고 에너지가 나아갈 길이 막히면 새 길을 찾는다. 제3의 눈이 가까이에 있다. 두 눈썹 사이에 1인치 깊이로 들어가 있다. 그곳은 에너지가 흘러들어갈 수 있는 가장 가까운 통로이다. 만약 그대의 에너지가 눈에서 해방된다면 첫째로 일어나는 일은 에너지가 제3의 눈으로 흘러가는 것이다. 마치 흐르는 물의 구멍을 막으면 다른 구멍을 찾아서 흐르는 이치와 같다. 그것은 자동적인 현상이다. 보통 눈을 통해서 움직이는 에너지를 막아야 한다. 그때 에너지는 그 자신의 길을 찾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제3의 눈을 통해서 움직이게 될 것이다. 제3의 눈에 에너지가 공급되기 시작하면 다른 차원의 세계를 맛볼 수 있다. 이전에 결코 본적이 없는 것들을 보기 시작할 것이다. 느끼지 못한 것들을 느끼고, 맡아보지 못한 냄새를 맡게 될 것이다. 새로운 세계, 유계(幽界)가 그대 앞에 펼쳐지는 것이다. 사실 그것은 본래부터 있었다. 단지 그대의 눈이 열리지 못했을 뿐이다.
봄 소식 풍경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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